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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5 22:17:29 조회 : 94         
25강-스가랴 9장 9-12절(국가신화와 진리) 240103 - 이 근호 목사 이름 : 정대은(IP:14.42.237.97)
25강-스가랴 9장 9-12절(국가신화와 진리) 24010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9장 9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오늘 예언의 말씀을 이렇게 보게 되면 눈치챈 사람들은 다 있겠지만, 시온의 딸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을 두고 시온의 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시온의 딸이 되려면 조건이 하나 있는데 겸손한 왕과 결합되어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시온의 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왕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 그리고 또 하나의 조건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에서 나오는 메시아라는 조건입니다.

여기 10절에 보면,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 에브라임과 예루살렘을 이렇게 결합시키면 바로 북쪽 나라와 남쪽 나라. 북이스라엘과 남쪽 이스라엘이 전부 다 통합이 되는거죠. 그 통합될 때 겸손한 왕이 어떤 겸손한 왕이냐 하면 이스라엘이 무기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운영하려는 그런 인식, 그 사고방식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왕. 그것이 바로 겸손한 왕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왕이라는 것은 국가가 있기 마련이고 그 국가의 총 지도자가 왕인데 하나님이 준비한 그 왕, 그 나라, 천국이죠. 천국은 이 지상의 인간들이 운영하는 나라의 운영 방법과 전혀 같지 않아요. 완전히 틀립니다. 어떤 방법이냐. 겸손한 방법으로 국가를 운영하시는 거에요.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왕과 결합이 된다는 것은 겸손한 왕을 대할 때 그 백성 자체도 활 들고 설친다던지 창 들고 설친다던지 무기 들고 설친다던지 이 세상 사람들이 의지할만한 그런것들 가지고 나라를 좋은 나라 해보겠다고 시도하는거, 그거는 겸손한 왕을 놓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오늘 본문을 쭉 생각하면서 먼저 고린도전서 3장을 제가 먼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5절에서부터 6절까지,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여기서 ‘나’는 사도바울이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하나님의 집에 하나님의 천국의 백성은 인간들이 설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친히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시는거에요. 가정에서 콩나물 키울 때 그걸 지켜봅니까? 하룻밤 자고 나게 되면 아침이 되면 쑥 커져있죠, 콩나물이. 이것이 뭐냐 하면 물주는 이 나 때문에 그렇다고 우기지 마시고 자라나게 하신다는 사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거에요. “이게 언제 컸지?”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 말을 달리합시다. “제가 어떻게 해서 천국을 다 가게 되었죠?” 같은 말이에요.

“제가 뭐 한게 있다고요. 제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요.” “주께서 친히 천국 백성으로 이렇게 매일같이 자라나게 하셨잖아요.”라는 그 고백. 그것이 바로 겸손이라는 겁니다. 겸손. 하나님께서 겸손한 백성 아니면 천국 백성으로 삼지 않는다는 그 근거가 오늘 본문에 보면 여기에 10장 끝에 나옵니다.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했는데 땅끝을 측정하는 그 시발점을 유브라데 강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어요.

이건 여러분들이 감 잡을거에요. 에덴동산이 원래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있었던 동네입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 국가를 만들고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인간들로 하여금 일체 자기의 노력과 자기의 열심으로 낙원의 사람이 아니었던 거에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그냥 숟가락 하나 걸친다고 할까?

다 만들어 놓은 천국에 그냥 슬쩍 숟가락 하나 걸치듯이 거기에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게 살게 된거에요. 이게 겸손입니다. 내가 한게 뭐가 있다고. 이게 겸손이에요. “자라게 하신 것은 또 천국 백성 만드는 것은 그것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주님 혼자 다 하셨잖아요. 생명의 면류관? 후딱 벗어서 도로 드립니다.” 그런데 이런 겸손이 인간세계에는 그동안 범죄하고 난 뒤에는 인간세계에서 없었다는거에요. 이게 사라져 버렸다는 거에요.

왜 사라졌을까를 한번 생각해 봐야 돼요. 사라진 이유는 다른 게 아니고 에덴동산은 그리운데 실제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지금 인간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딱 깨놓고 이야기해서 하루하루가 화가 날 지경이에요. 인간은, 살아가면서. 어린애는 몰라요. 점점 어린애가 좀 크고 학교랑 사회 나가면 인간 내부에 분노가 계속해서 자라납니다.

그것은 환경 자체가 이 세상 환경 자체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과 분노로서 가득 차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그게 싫은 거에요. 인간은 화가 나있습니다. 에브리데이(everyday), 매일같이 화가 나있어요. 점잖은 체 한다고 그걸 감추고 있는데, 화가 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것저것 할 생각하지 말고 그냥 곱게 죽어라는거에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저주스럽게 만들어 놓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굉장히 간단해요. “죽을 만해서 벌 받을 만 해서 벌 받는거니깐 그냥 곱게 죽자. 그런 인간으로 살아라.” 주께서는 어떻게 뭐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그런 쓰잘데 없는 그런 생각 좀 하지 말고 그냥 곱게 죽어라. 그러나 인간은 곱게 죽을 위인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분노를 낼 만한 이유가 어떤 경우라도 자기가 죽지 않을려고 하기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는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획을 잡느냐 하면 이 환경 자체를 인간을 죽이는 압살하고 죽여버리는 환경으로 바뀌어놓고 거기에 대한 인간 자체도 그런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전체를 포함하죠.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규정된 겁니다. 확실하게 규정된 거에요.

진노의 자녀였으면 너는 뭘 요구할 입장이 아니고 분노 하거 나 화낼 입장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서 그냥 망해야 된다는 거에요.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 그 이유가 있죠.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되어있는데, 여기서 허물과 죄로 너희가 죽었다고 되어있어요. 그런데 교회 가보면, 특히 교회 가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한 것을 가지고 자꾸 하나님께 호소해요. “하나님 저 연약합니다. 연약해요. 좀 강하게 해달라”

주께서는 우리가 연약한걸 고백 하란게 아니고,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만드는 거에요. 나는 죄인입니다. 연약하고 강해서 그거 어디다 써먹으려고요. 그거 왜 써먹습니까? 연약한 존재가 아니고 연약하다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렇게 괜찮은 세상을 줬는데 내가 거기서 괜찮은 세상에 호응해서 부응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겠다 하는데 힘이 모자랄 때 그때 연약하다고 하는 거에요.

그러나 이 세상은 이렇게 포근한 세상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지 못하게 압박을 하는,“니 이래도 꼭 살래? 내가 이렇게 조지는데?” 매일같이 조지는 식으로 숨도 못 쉬게 만드는데 거기는 무슨 고집이 있어 가지고 “그래도 연약하니 힘 좀 주시면 주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영광은 다른게 아니고 “죽어 마땅합니다”가 영광이에요.

“없어져야 마땅합니다.” 그게 영광이고 그 이외에 영광 없어요.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의 불일치에요. 이거 어떻게 해결 할겁니까? 이거 해결 안됩니다. 잘해보려고 하는 것 인간 생각. “제발 입 다물고 죽어줄래?”이게 하나님의 뜻. 맞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에베소서 2장 1절에 방금 이야기했지만,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면 살리는 방법이 오늘 읽었던 스가랴 9장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 내용에 죄와 허물로 죽었던 것을 살리는 방법이에요. 살리는 방법이 뭐냐 하면 인간 쪽에서 어떻게 하는가? 그런 것은 하면 안되고요. 인간 쪽에선 글러 먹었어요. 소용없어요. 왕이 등장합니다. 왕이 등장하죠. 왕이 등장해서 그 왕이 어떻게 등장하느냐 하면 인간의 잃어버린 품성이 뭔가를 본인이 시범조로 보여줍니다.

인간이 인간 속에 왜 인간과 하나님이 웬수지간이고 매일같이 분노하고 또 하나님은 인간을 향하여 매일같이 분노하는 이렇게 티격태격하는 그런 사이가 된 것은 인간에게 잃어버린게 있는데 그 잃어 버린 것을 이 왕이 되시는 분이 무엇을 잃어 버린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 분의 왕이 하늘나라라는 그분의 나라의 왕이 되시는 분이에요. 잃어 버린거. 그러면 뭘 잃어버렸는가?

“시온의 딸아!” 천국의 백성이죠. “예루살렘의 딸아.” 하나님의 약속된 백성들을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즐거이 부를지어다. 네 왕이 나타나는데, 그는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곧 나귀 새끼니라.”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대목이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대목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면서, 왕으로 왔다고 하면 인간들의 인식의 왕은 힘이세요.

못할 것이 없고 적들을 가볍게 물리치고 그 적들 속에 있는 자기 백성을 데려가는 방식의 왕을 사람들은 왕다운 왕이다. 킹 오브 킹(king of kings) 왕 중의 왕이다고 생각하는데, 비리비리하게 아무 어떻게 무기라든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말, 이렇게 전쟁하는 활, 이런 거 없이 아무 무기 없이요. 그냥 비무장. 비무장도 그런 비무장이 없어요. 아무것도 없이 그냥 덜렁 맨손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기대감 조차 줄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하기 짝이 없는 그런 모습으로 왔을 때, 인간에게 어떤 희망이 되겠습니까? 전혀 희망이 되지 않죠.

여기서 왕이 그것도 나귀도 아니고 나귀 새끼를 탔다는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게 나귀 새끼가 어떤거냐 하면, 그 나귀 새끼는 아직 어른 나귀가 아니고 새끼니까 작은 새끼는 그 자체로 어떤 쓸모가 없어요. 누가 사용해주면 비로소 쓰여짐을 받는 아주 극단적인 피동적 존재가, 피동적 상대가 바로 나귀 새끼입니다. 스스로 서기도 비틀 비틀해요 이거는. 겨우 서서 자기 걸어 갈 정도.

남한테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그런데 왕은 그 나귀 새끼를 골라 갔다는 겁니다. 여기서 나귀 새끼를 탔다는 말은 무슨 뜻이 있느냐? 하나님은 일체 사람하고는 상대 안한다. 일체 사람하고는 상대하지 않습니다. 사람하고 상대 안하면 이것보다 더 겸손한 것은 없어요. 작은 미물과 작은 짐승도 아닌 짐승 새끼, 보잘것없는 짐승 새끼와 직접 관여한다는 말은 그 사이에 어떤 뭐 가치 있는 의미있는 인간들 거기에 완전히 못 끼어듭니다. 인간은 그 자리에 없어요.

예수님과 나귀 새끼 사이에 인간은 일체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나귀 새끼가 어떤 의미에선 그 나라에 백성이 되는 거죠. 아무 쓸모 없으니까. 주께서 쓰신다고 불러줄 때 쓰여지니까. 주의 백성의 이미지가 인간도 아니에요. 나는 힘 쎈 짐승도 아니고, 짐승의 새끼. 아주 덜 성숙한, 덜 자라난 짐승. 쓸모짝 없는 그 인간, 그 인간과 예수님이 결합을 합니다.

자, 이 본문을 누가복음 19장에서 40절에 보면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좀 어려운데요. 다시 어렵지만 쉽게 해야죠. 하나님의 약속된 메시아가 올 때에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오는거에요. 구원자로 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늘 평소에 “메시아다, 메시아 같다” 싶으면 사람들은 마음의 준비를 했어요. 뭘 준비를 했느냐 하면 호산나를 외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호산나는 시편 118편 24절에서 25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이게 이제 호산나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요청하오니 구원자여, 우리를 구원해주소서. 그걸 예루살렘은 마음의 준비를 딱 하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 당시 예루살렘 입장에서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분노하고 있죠.

뭐냐 하면, 우리에게 납득이 되는 왕이 왔을때는 내가 알고 있는 호산나라는 의미를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호산나라는 의미를 가지고 왕과 마중을 나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그 당시 자기를 신앙이라 하고 이걸 겸손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거에요. 겸손이라고. 근데 아까 이야기 했지만 예수님은 짐승하고 먼저 상대함으로 인간하고 상대하지를 않아요. 인간치고 백성 될 자격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근데 누가복음에서 사람들이 호산나 하고 예수님께 길을 내주니까, 제자들이겠죠 주로, 제자들에게 길을 내주고 호산나라고, 호산나라는 단어를 나귀 새끼를 탄 예수님과 결합을 시켜서 외치고 있으니까 여기에 누가 화를 내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누가복음 19장 39절, 바리새인들이 화를 내어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이것은 시편 118편 15절 16절에 나오는 그 말씀을 그렇게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바리새인들의 말이, “저거는 나귀 새끼 타고 온 사람한테 붙일게 아닌데 붙였으니까 이거는 말씀에 어긋나니까 책망하소서” 하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아까 나귀 새끼도 사람 아니거든요. 여기에 나오는 소리 지르는 사람들도 예수님은 뭐로 보느냐 하면 그냥 죽은 돌이 호산나라는 말씀과 결합해서 돌들이 튀는걸로 보는 거에요. 그냥 돌인데, 그것도 죽은 돌이에요. 돌이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에 영향력을 입어서 호산나의 실현체로 호산나라는 그 말씀의 실현된 하나의 증거로서 돌들이 튀듯이 부르짖으면서 지금 호산나라고 부르고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계속 말씀드리는 것은 뭐냐 하면 주께서 왕으로 왔을 때 어떤 인간도 자진해서 예수님의 천국 백성이 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그만큼 겸손한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로 수준을 낮추느냐 하면 나귀 새끼, 그리고 돌멩이. 돌. 우리 이 수준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에요. 그 돌들이 구원받는다? 돌들이 말씀을 안다?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뭐냐? 나귀새끼와 결합된 예수님이 이 땅에 들어오심으로써에 대한 영향력, 그 효력이 어떤 효력이냐 하면, “저 돌인데 왜 저를 구원하죠?”라는 효과를 준다는 거에요. 저 아무 쓸모짝 없는 인간인데 왜 천국을 가죠? 주께서 그렇게 하셨죠 그렇죠? 주께서 나로 하여금 메시안줄 알아보게 하셨죠? 그렇죠?”라는 그런 효과를 낸다는 거에요.

이게, 이러한 이해가 무엇을 근거를 해야 이런 이해가 나오느냐 하면, 이게 인간이 그냥 인간들이 범죄하고 난 뒤에 있는게 아니고 국가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한 소속이 되어있어요. 자, 인간에게 국가가 뭐냐?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국가는 신화입니다. 신화. 조작된 거에요. 국가가 조작된 겁니다. 국가가 조작된 건데 특징이 뭐냐? 어쩔 수 없이 뒤집어 쓴 신화에요. 국가라는 것은 어쩔수 없이 뒤집어 씌워진 신화적 조직입니다.

신화라는 말은, 제가 신화라는 말을 쓰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 말이죠. 거짓되다 이 말입니다. 인간이 꾸며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한계가 뭐냐? 자기가 꾸며낸 것만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고 자기가 꾸며내지 않으면 인간은 거부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인간은 뭘 꾸며냈는가? 국가라는 신화를 꾸며냈지요. 이 국가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데 그걸 왜 자꾸 신화라고 그렇게 억지를 부리느냐.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아까 말씀드리면서 다시 한번 정리해보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인간은 본질상 저주의 자녀로 봐서 하나님께서 대자연을 통해서 압박을 가합니다. 죽으라고. 이건 살아도 산 게 아니라고, 이미 죽은 시체라고 송장이라고 압박을 가해요.

압박을 가함에 대해서 인간 나름 대로의 대응하는 방법이 있어요. 인간 자체는 어떤 경우라도 자기가 허무하게 죽기는 싫다는 것이 이구동성 모든 인간이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보자. 버텨보자. 사는게 남는거다. 살면 성공이요 죽으면 실패다.” 이런 인간들의 억지스러움이 신화화 된게 최종신화의 모습이 뭐냐? 국가라는 겁니다. 자, 국가는 뭐냐? 매일같이 패배하는 것을 성공한 것으로 형식적인 전환을 꾀하는 것이 국가에요.

실제로서는 인간은 패배했는데, 지금도 죽어가는 사람 많아요. 패배했는데 패배한 것을 패배라고 인정하지 않고 살아남았으니까 성공이잖아라고 그것을 형식적인 전환으로 바꾸어서 그걸 내세우고 싶은 그 신화가 바로 국가 신화입니다. 패배 자체를 승리로 제시하고자 하는 고집스러운 관점의 억지스러운 관점. 이게 국가 이념이에요.

우리는 그 국가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학교 교육을 그 국가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벌써 인간은 처음부터 패배했어요. 다윗이 아는 것 처럼 나는 죄 중의 괴수에요.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습니다. 죽는 것이 이거는 마땅하고 당연한 거에요. 그런데 국가를 만들어가지고 국가 안에서 우리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서로에게 얼싸안고 격려를 해주는 거에요. 격려를 하고 독려를 해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린다고. 우리를 살게 하신다고. 국가를 통해서.

그거는 싸구려 속임수입니다. 실제로는 죽어가고 있으면서 이 세상에 우리의 노력한 것이 우리를 살린다고 우리가 노력했던 정당한 보상이요 대가로 주는 이 상이 우리가 후대에 물려줄 안정적인 국가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억지 부리면서 우리는 대를 이어서 대대로 이 한반도에서 한민족이 계속 살게 될 것이라고 우기는 것. 그게 바로 신화, 다른 말로 거짓, 사기입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 자체가 사기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 탄 왕을 돈키호테처럼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어디에 투입했느냐? 국가 속으로 들어온 거에요. 그 국가 속으로 들어왔을 때 국가의 권력자와 만남의 기회를 갖게 되는데 주님께서 그렇게 의도했죠. 그것이 요한복음 18장 34절 37절까지 나옵니다. 좀 길지만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33절부터,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의 이 의견을 한번 분석해보겠습니다. 빌라도는 지금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의 왕에게 속해있는 충신입니다. 그러니까 로마가 봤을 때 유대 나라는 하나의 나라로 본거에요. 속국으로 본거에요. 속국이니까 직접 통치하고 자율권을 주되 세금과 모든 국가에서 병력을 요구할 때에는 해야 되고요. 특히 속국이 되면 제일 서러운게 뭐냐 하면, 자기가 전쟁해놓고 전쟁에 패배하면 보상금을 속국한테 그걸 물어내라고 해요.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나라가 그렇게 해서 재산 다 날아갔어요. 앗수르 바벨론에게 충당비 다 준거에요. 어쨌든 “니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우리나라도 나라인데 너도 작은 나라지만 나라냐? 라고 묻는 거에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시기를 “물을 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라고 얘기를 했어요. 이 말은 “네가 그들과 한통속이다”라고 이야기 하는거에요. “너도 별거 없어. 너도 마찬가지로 한통속이야.”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36절에, 예수님 분명히 빌라도에게 이야기했어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이게 신화와 국가의 만남이에요. 국가가 신화라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으로 여러분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실감날 거라서 제가 말씀 드리는겁니다. 15세기에 그러니까 서기로 1400년경 영국에서 헨리 4세라는 왕이 있었어요. 벌써 역사 이야기하면 지루해 할텐데 빨리 하겠습니다.

헨리 4세가 있는데 이 사람이 정권 탈취하는데 너무 귀족들하고 싸움을 해서 영국이라는 나라안에 반란이 너무 심했던 거에요. 그래서 자기가 지쳤지요. 지쳐 가지고 자기 후계자를 세우는데 그 후계자, 큰아들 이름이 할, 둘째 아들이 토마스에요. 이름이 할이에요. 할에게 왕권을 넘길려고 그렇게 했는데 할이 자기가 왕이 되기 싫데요. 그래서 일부러 방탕한 생활하면서 왕이 안 될려고 내뺐던 겁니다. 자,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걸 우리가 알아야 돼요.

우리가 일반 사람들, 평민들 같으면 왕은 최고 권위의 호사스러움과 모든 걸 다 가져서 얼마나 기분 좋으냐 하겠지만, 막상 그 왕족, 왕의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 해보세요. 왕 그거 왜 합니까? 나는 왕이 하기 싫다는 거에요. 이게 뭐냐하면 국가라는 게 신화라는 거에요. 국가가. 백성들이 맏아들이 하라니까, 맏아들이 해야 그다음에 정통성이 백성들로 인정받으니까 해주세요 해도 나는 기어이 싫다는거에요.

둘째 아들이 토마스가 되어가지고 둘째 아들은 본인이 왕 멋있지, 남자로 태어나서 왕 하면 최고지. 제일 높은 욕망의 달성이지 하고 은근히 하겠다는 거에요. 결국 아버지가 할 수 없이 토마스에게 맡겼습니다. 토마스 딱 맡기니까 큰아들 할이 딱 등장합니다. “동생아, 너 전쟁 안 해봤지? 나 전쟁해봤어. 전쟁 그렇게 하는 것 아니야.” 지금 나라가 내란이 일어나 가지고 엉망진창이 나서 신하들도 왕을 무시하고 막 함부로 대드는 그런 판에 나라가 꼴이 안 돼요. 나라 꼴이 안 되니까 그야말로 도둑 떼들이 설치는 셈이되죠.

그러니까 일반백성들이 빨리 나라가 안정될 수 있는 위대한 왕이 와서 나라가 하나로 통합되었으면 좋겠다고 백성들이 요구하고 그 백성들의 요구가 그 윌리엄이라는 신하한테 계속, 최측근인데 왕 헨리 4세의. 자꾸 연결을 하는 거에요. 우리가 여기서 또다시 한번 생각 해봐야 돼요. 나라가 뭡니까? 누구를 위한 나라입니까? 인간은 자신의 안전과 자기의 생존과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나라가 있어야 된다고 너도나도 이야기하죠. 그러니까 인간이 만든 것, 그러니까 신화가 되는거에요.

우리는 그 신화가, 신화라는 말. 다시 말해서 이게 허상이라는 것을 아무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요 이게. 예수님 오시기까지 그걸 아무도 몰랐어요. “뭐 신화든 어쨌든 나라가 없으면 포로가 되니까 나라가 있어야 되지.” 지금 그런 편이에요. 나라가 완전하고 좋다는 뜻이 아니고 나라가 있어 줘야 우리가 사는데 편하다 지금, 전부 다 그런 조에요.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아까 에베소서 2장 말씀, 그리고 스가랴 말씀, 전체 성경 말씀. 하나님께서 어떤 차원에서 왕을 보내셨는지 이제 이해되십니까?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신화 같은 왕, 나를 지켜주는 왕, 나를 지켜주는 국가, 그걸 우리가 과연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과연 본인에게 있는가 한 번 본인에게 물어보세요. 왜 주님은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는지. 돌멩이를 가지고 백성 만드는지. 그 이야기 좀 더 약간 지루하겠지만 계속 한 번 들어보세요. 윌리엄에게 압력을 가하니까 윌리엄 신하가 딱 보니까 토마스는 왕 감이 아니에요. 토마스는 왕 감이 아니고 큰아들이 왕 감인데 큰아들은 하기 싫다고 하고. 그래서 윌리엄 신하가 꾀를 냅니다.

윌리엄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왕자님, 우리의 적은 우리 내부에 있는 게 아니고 바깥에 프랑스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당신을 모독하고 당신의 아버지 헨리 4세” 아버지가 죽고 이제 둘째 아들이 왕이 됐죠.“아버지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큰 아들한테, 둘째 아들은 이거 별로고, 큰아들한테 왕 되기 싫다는 애 한테 계속해서 약을 올리는 거에요. “보세요. 드디어 자객이 보내왔잖아요. 당신 죽일려고.” 이거 윌리엄이 다 짜고 한거에요.

할이 약이 올라가지고, “다른건 참아도 우리의 가문과 우리 영국을 모독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가지고 그 할이 왕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존이라는 그러한 진짜 전쟁 잘하는 진짜 지혜가 넘치는 존이라는 나이 많은, 나이 많지만 친구인, 옛날 충신하고 만나서 프랑스에 가서 전쟁을 벌입니다. 전쟁을 벌이는데 프랑스 왕은, 그때 프랑스 왕세자는 뭣도 모르고 영국이 먼저 쳐들어오는게 되죠.

그래서 저쪽이 먼저 시비 걸었으니까 우리도 붙자 이렇게 나올 때, 내일 비가 올 테니까 비록 우리가 무기가 변변치 않더라도 비 올 테니까, 프랑스 기병대가 있어요. “힘 못 씁니다. 우리가 이깁니다.” 하면서 “내가 나가서 먼저 싸움을 걸어서 제가 승리하겠습니다.”하고 존이 나가서 결국은 승리했는데 존 이 사람이 죽어요.

죽고 난 뒤에 할이 헨리 5세가 됩니다. 역사 속에서 실제로 헨리 5세가 돼요. 이 인간의 국가라는 것, 인간 국가가 흘러가는 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실패인데 실패지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뭘로 여기냐 하면 내가 국가가 왜 중요하냐는 어떤 국가적인 보상과 유익 같은 걸로 꾸며서 국가가 필히 국가는 있어야 된다고 우기는 것들의 신화. 이게 오늘날 우리가 국가에 소속되어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손실본 것, 살아가면서 우리가 제대로 못사는 것, 거기에 대한 고통스럽지만 이 국가와 함께할 때 거기에 상이나 이익 같은게 있다고 우기는 것이 신화적 현재 우리가 이야기하는 국가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나 보상은 일체 없습니다. 인간은 거기에 끼어들지도 못해요.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꼭 우리가 필히 살아야 된다는 거에요.

필히 살아야 된다는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뭐냐 하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런걸 하고있는 거에요. 거기에 반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살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나라의 왕이에요. 하늘나라의 왕인데 그 왕 자체가 이 땅에 와서 상처를, 고통을 받고 상처를 입고 결국은 죽기 위해서 오신 거에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결과를 앞장세우고 이 땅에 밀어붙인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에요.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라고 요청할 수가 없습니다. 근데 마가복음 19장에서 보면 그 특징이 있어요. 나귀 새끼 보는 사람 특징이 자기 겉옷을 벗어서 나귀에도 얹고, 그리고 나귀 새끼가 주님이 오면서 길을 열어주게 되는데, 뭐 엠뷸런스 오는 것 처럼, 길을 열 때마다 그냥 길을 여는 게 아니고 사람들 입었던 겉옷을 벗어서 길 가에 까는 방식으로 길을 열어줍니다.

자, 이게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요.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뭐냐하면 겉옷을 벗어서 나귀 새끼타는 예수님 앞에 겉옷을 벗어놓고 그걸 밟고 지나가라는 이 말은 내 자리가 내 자리의 최종 위치를 드디어 이미 확보 했다는 거에요. 내 위치를.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벗어서 나귀 새끼 오시는 예수님 앞에 그걸 냈다는 말은 자신의 최종적인 위치를 비로소 확정되고 고정시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내 자리를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오시는 왕이 밟고 지나가는, 왕의 자리죠 주께서 나귀 새끼타고 한 발자국 밟고 지나가는 그 자리, 그 자리에 내 옷을 가지고 거기다 집어 던지는 거에요. 살포시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합류하는 겁니다. 오실 왕과 합류되는 거에요. 이게 호산나의 의미입니다. 저를 구원해달라는 말은, 저에게 최종적인 자리를 확보하신 분에 우리가 합류되게 하옵소서. 최종자의 자리.

그 최종적인 자리가 요한복음 17장 12절, 예수님의 그 기도 가운데 있는 내용인데요.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기도하기를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아버지하고 오실 왕, 나귀 새끼타고 오신 왕. 사이에 맺어진 그 관계가 우리 이스라엘 백성, 천국의 백성에 최종 자리가 바로 그쪽 자리에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어요. 예수님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주님의 결정을 나귀 새끼타고 온 그분의 모습을 내가 몰랐던, 내가 미처 경험하지 않았던 최종 자리를 그분들이 확보한 채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현상으로 간주하는 자, 이 자가 바로 주와 함께 기뻐하는 자, 그게 바로 오늘 와서 언약이라고 합니다.

탁구도 혼자 못 치잖아요. 같이 쳐야되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을 이루는데 있어서 백성들도 같이 합세해서 짝을 이뤄서 그 자리, 그 예수님의 왕, 백성이 없으면 왕이 안 되니까요. 왕이 왕 되게 백성다운 백성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주께서 조치를 했다는데 자기가 거기다가 겉옷을 가지고 참여를 한거에요.

우리는 할게 아무것도 없으니 주님이 알아서 해주시옵소서라는 마음.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해줄거다 라는게 아니라 그게 최종적이다는거에요. 확정되고 고정되고 최종적인 거에요. 나라는 인생이 이미 양도가 된 거에요. 주님 하신일에 소속이 되고 등기가 넘어간 거에요. 그쪽으로. 그러니까 이건 우리는 뭐냐 주님과의 이 땅에서 우리의 남은 성도의 삶은 혼자 사는게 아니고 주님께서 나귀 새끼타고 밀어 붙이고 공격해오는 그것과 동반, 동행하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우리가 지금 우리의 자리를 항상 최종적으로 생각하고 그냥 콱 죽으면 돼요. 콱 죽으면 되는데, 왜? 그래야 돌멩이가 되니까. 주께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확정된 그러한 주님의 대상자로서 우리를 통해서 호산나라는 주님이 바로 구원자라는 것을 외칠 수 있는 그런 사명을 매일같이 할당받고 분배받는 그러한 현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라, 그것이 가짜인 줄 이제 알았습니다. 국가, 그것이 하나의 종교인 줄 알았습니다. 신화였고 거짓이었던 것을 저희들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 나라의, 영원한 나라의 왕은 사람과 상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주님 홀로 일을 진행한다는 이 사실이 우리의 최종 우리가 얻고자 하는 주의 왕인 모습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5강-스가랴 9장 9-12절(국가신화와 진리) 240103 - 이 근호 목사.hwp (95.0K), Dow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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