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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1 02:43:42 조회 : 110         
26강-스가랴 9장 11~17절(존재와 사건) 240110-이근호 목사 이름 : 김혜근(IP:121.125.5.83)
26강-스가랴 9장 11~17절(존재와 사건) 24011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9장 11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1페이지입니다.

(9: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9:12)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9:13) 내가 유다로 당긴 활을 삼고 에브라임으로 먹인 살을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 하며 너로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9:14) 여호와께서 그 위에 나타나서 그 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리시며 남방 회리바람을 타고 행하실 것이라

(9:15)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매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9:16)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9:17)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소년은 곡식으로 강건하며 처녀는 새 포도주로 그러하리로다


길었던 이 본문 내용에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다른 민족에 의해서 갇혀 있었던 겁니다. 갇혀 있는 것을 11절 끝에 ‘물 없는 구덩이’라고 합니다. 갇혔던 그들을 다시 내가 끄집어내어서 너희의 ‘보장’, 보장(保障)이란, 요새를 말합니다.

옛날에 살았던 단단한 마을, 또는 성채(城砦), 캐슬(castle), 그곳으로 내가 돌아오게 할 것이다. 돌아오게 하는데 뭔가 대단히 요란스러워요. 그 요란스러운 게 뭐냐 하면, 15절부터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매 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피가 나오는 현장은 전쟁터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지는데 곱게 조용하게 건지는 것이 아니고 큰 전쟁을 유발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다시 건지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그 다음에 자기 백성은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난다.’(16절)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전쟁을 하는데 이 전쟁에 무기가 있어야 되거든요.

그 무기가 뭐냐 하면, 13절에 나옵니다. “내가 유다로 당긴 활을 삼고 에브라임으로 먹인 살을 삼았으니” 쏘는 활, 잡아당기는 활, 그것을 유다로 삼고, 당기면서 그 반발력으로 쑥 날아가는 화살을 에브라임으로 삼았다는 말은 그동안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민족에게 수난 당하고, 포로 잡히고, 살육을 당한 그들을 하나님의 전쟁의 무기로 등용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전쟁의 상대가 누구냐? 그 상대가 13절에 “헬라 자식을 치게” 한다. 여기 헬라자식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민족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이방 민족을 치는데, 그 치는 주체가 누구냐? “시온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온아“ 이렇게 하나님께서 언어를 배치하시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구덩이에 빠져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기 백성을 구덩이에서 빼냄으로서 비로소 움직임을 제공하는 쪽이 그게 바로 시온이라는 거예요, 시온. 시온은 고정적이고, 시온에 의해서 부림을 당하는, 움직임을 부여받게 되는 쪽은 유다와 에브라임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움직이지 않는 시온의 상대적인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헬라 자식“ 이방 민족입니다.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13절) 고정된 확정된 후손이 이방 민족의 후손을 향하여 그동안 수난 받았던 유다와 에브라임을 가지고 무기를 삼아서 전쟁을 벌여서, 그래서 천국 가는 새로운 백성을 하나님께서 만들어내겠다는 그런 이야기예요. 들어보면 간단해 보이는 이야기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해야 될 게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고정된 것이 과연 있느냐? 이 세상에 고정된 건 없어요. 그러면 여기 있는 시온이라는 것은 뭐냐? 어느 차원에 있느냐 하면, 해와 달과 별과 동등한 차원으로 승격돼버려요. 해와 달과 별은 인간이 보기에 늘 같은 자리에 나타나는 고정된 것이에요. 고정된 자리로 인하여 농부는 아침에 일어나서 밭을 갑니다. 해가 떴기에..

해가 농부의 경작에 대해서 움직임을 제공하는 쪽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고정점은 시온이고, 그 고정점 시온에 의해서 움직임을 당하는 것은 에브라임과 유다, 즉 백성이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되는데, 문제는 왜 구원을 하는데 호들갑을 떨 듯이 전쟁을 하게 되느냐, 이게 중요합니다. 전쟁을 안 하면 구원이 안 되는 이유가 뭐냐를 생각해야 돼요.

그것은 전쟁을 가지고 이것은 신적인 폭력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여기 전쟁할 때 봐주는 거 없어요. 그냥 밟는다고 나와요. ”밟을 것이며“ 밟으면 피가 튀잖아요. 그 밟은 피를 마시는 거예요. 철저하게 짓밟아서 진멸해버리는 그 전쟁, 그 전쟁이 왜 동원되어야 되는가?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유다와 에브라임이 적들에게, 이방 민족에게 포로 잡혀가서 꼼짝 못했던 이유가 그들이 존재기 때문에 그래요, 존재. 그들이 스스로 자기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현대 삶 속에 적용시키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사는 게 힘든 이유는 자기 때문이에요. 내가 있기 때문에 힘든 겁니다.

그러면 힘 안 드는 방법은 뭐냐? 자기를 없애면 되죠. 그런데 인간은 자기를 없앨 방도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를 없애는 대신, 편한, 행복한 자기를 찾아서 세상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니는 겁니다. 그 헤매고 다닐 때 나오는 게 뭐냐? 환상입니다. 환타지예요. 인간은 왜 힘든가?

다시 정리하면, 인간이 힘든 이유는 매일 같이 환타지를 본인이 뿜어내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그 환타지를 사람들은 희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실은 그게 망상인데요. ‘사람은 희망 없이는 못산다.’ 흔히 그렇게들 이야기하잖아요. 정직하게 이야기하세요. 사람은 환상 없이는 못삽니다. 자기가 환상의 주인공이고 싶어 해요.

인간의 욕망이 환상을 계속해서 뿜어내요, 에프킬라처럼. 움직일 때마다. ‘아, 이 정도면 만족하겠다.’라고 생각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 딱 그 선 달성했잖아요? 거기서 새로운 환상이 또다시 생산됩니다. ”내가 기껏 이거 하려고 살았나?“ 이러면서 또 환상을 꾸며내요.

그러면 그동안 거기까지 오는데도 피곤한데 피곤의 대가가 예상한 기쁨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의 피곤의 대가에 영 못 미쳐요. 그 목표를 가진 순간 어느 새 자기 속에 있는 욕심도 그 목표를 넘어서는 욕심이 새롭게 또 생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또 꿈을 꾸고, 소위 비젼을 가지고 희망을 갖습니다.

‘올해의 계획은..’, ‘올 12월 까지는 이거 하나 목표 정한다.’이런 식으로. 그러면서 인간은 자기가 자기 존재에게 회초리를 때려요. 자기가 자기보고 ”인간아, 정신 좀 차려라. 맨날 그렇게 비리비리하니까 남한테 욕 얻어먹는 거야.“ 그렇게 회초리를 때리면서 ”사람이 꿈이 있어야지, 배포가 있어야지 그게 뭐야?“

자기를 후치고 때리면서 자기로 하여금 자꾸 새로운 환상을 향하여 변화를 시도하는데 따지고 보면 자기 존재를 몰고 피신하고, 도망치고, 숨고 이런 짓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어느 지점에서 ‘이만하면 됐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도대체 그 원인이 뭐냐? 이건 약간만 생각하면 알아요. 그 원인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원인이에요.

내가 없으면 꿈 꿀 필요도 없고, 내가 없으면 욕심낼 이유도 없고, 내가 소멸되면, 소멸되는 그 순간 그 다음부터는 걱정 근심도 같이 소멸되기 때문에 내가 없어지는 것이 제일 좋겠는데, 사람이 얼마나 독한지요, 죽는 순간도 내가 죽으면 천국 갈까, 지옥 갈까? 죽는 순간도 천국을 향한 야망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는 순간에 얼굴이 밝지를 못해요. 그 욕심 때문에 불안해서. 사람은 자꾸 힘겨운 자기에게 불행을 야기한 현 지점에서 탈출을 시도하는데 인간은 탈출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소멸돼야 되고, 소실돼야 됩니다. 그러면 나로서는 되지 않는 이 소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조치하시느냐?

여기에 하나님의 폭력이, 하나님이 친히 내리시는 폭력이 우리의 존재를 군화발로 짓이겨서 비벼서 터트려서 우리 존재를 하나의 무기물로 만들어버리죠. 하나의 기계로 만드는 겁니다. ‘너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런데 이 성경을 보고 교회에 오면서 사람들은 신적인 폭력을 접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신화적인 폭력을 성경에서 자꾸 찾아내려고 해요. 어렵지요?

신적인 폭력과 신화적인 폭력, 둘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신화적 폭력의 특징은 이 힘겨운 인생살이를 참고 견디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온다는 거예요. 신화라는 말은 어려운 말인데, 신화적인 이야기를 몇 가지 예를 들면, 춘향전, 심청전, 홍길동전, 이런 거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어떤 영웅이 신데렐라 동화도 마찬가지고요. 배설공주도 마찬가지로 전부다 신화적이에요.

어떤 억울한 사람이 너무나 억울한 일을 당해서 죽을 지경까지 갔지만 결국은 끝에는 성공으로 마감되잖아요. 그걸 신화라고 합니다. 참고 견디고 버티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온다. 그게 신화예요. 사람들이 교회 오는 것은 하나님이 만든 신화를 듣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얼마나 견디면 제가 복을 받겠습니까? 제 형편이 펴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견디면 죽어서도 천국에 버젓이 가겠습니까? 거기에 필요한 성경구절들 어디에 몇 군데 있습니까?“ 이것을 얻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 존재를 으깨는 게 아니고 자기 존재를 하나의 투자로 내놓는 거예요.

투자로 내놔서 30배, 100배로 괜찮은 존재로 되돌려 받으려는 꼼수를 부리는 겁니다. ”조금만 견디고 고난 받으시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실망치 않게 해주실 겁니다.“ 그 소리를 목사한테 듣고 싶은 거예요. 구겨진 내 인생 만회할 기회를 주께서 허락하실 때 정말 하나님은 참 좋은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생각, 그것과 유사한 존재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예요.

안 울면 선물 줍니다. 그게 신화적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잘 되라고 때리시니 맞을 때 아프더라도 조금 견디면 맷값은 쳐준다는 거, 그것도 30배, 60배, 100배로 쳐준다는 거, 이거 존재에서 존재입니다. 자기 존재가 잠시 부정을 통해서 결국은 긍정적 존재로 변신을 시도하는 하나의 전략을 가지고 교회에 다닌 거예요.

그러나 신적인 폭력은 존재를 무엇으로 바꾸는가? 사건으로 바꿉니다. 사건으로. ”그 동안 너 어떻게 살았는데?“ 라고 묻는 게 아니고, ”그 동안 어떤 사건이 너로 하여금 이 십자가 사건 안으로 들어오게 했는가?“를 묻습니다. 그것을 이야기하죠.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성경 언어를 통해서 신적이 아닌 신화적 폭력, 하나님의 영웅적인 행위를 찾으려고 하는데, 성경 언어에 그런 거 없습니다. 사진을 보면 이미지가 있죠. 영화 배우 얼굴 같은 거도 있고요. 그러나 돋보기를 사진에 점점 가까이 대보면 이미지는 사라지고 점들만, 아무 의미 없는 점들만 있어요.

올바른 번역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올바른 번역은 모조리 사건 뿐이에요. 사건. 인간은 자기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언어를 내가 소유하면 됩니까?“를 묻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사건이기 때문에 그 존재를 점으로 해부시키고, 해체시켜버리는 거예요. 분해해서 ‘나’라는 것을 없애버리는 것이 성령께서 성경 말씀을 사용할 때는 이것을 사건화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저 어떤 존재 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주님의 답변은 ”너는 이제부터 나의 십자가 사건에 합류해라. 너는 십자가 사건의 소품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돼요. 존재의 질서가 있고, 사건의 질서가 따로 있어요.

그러면 이 층이 전에는 세상 살면서 ‘열심히 하면 뭔가 좋은 날이 오겠지’ 하면서 돌아다니는데, 이 돌아다니는 것이 단층, 유리판 위에서 뚫지도 못하고 빙빙 돌면서 궤적만 남기죠. 서울 대전 부산 찍고 광주 목포, 뭔가 궤적만 남긴 거예요. 그냥 존재판에서 존재판으로 이동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건의 질서는 어디 있는가? 괜찮은 존재가 되려는 인간들이 하늘에서 오신 존재를 없애버렸어요, 소멸시켜버렸어요. 그 소멸시킨 그 분이 우리에게 사건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잘 되기 위해서는 뭔가를 알아야 되는데, 사도행전 1장 6절에 보면, 주님께서 아주 아이스크림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깔끔하고 산뜻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뭐라고 하시냐 하면,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행 1:7)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이스라엘의 회복이 언제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것은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 기한은 네가 몰라야 돼. 왜? 너는 존재기 때문에. 사건을 처리하는 그 주인공의 일을 너희는 알 필요가 없어.”

사람이 제일 가벼울 때가 언제냐 하면, 알 필요 없는데 일이 되어질 때, 내가 나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더라도 내가 움직일 때, 사람은 제일 가볍습니다, 깃털처럼. 그러면 언제 무거운가? 행동 하나하나 하면서도 내가 이거 잘 하는 행동이냐, 못하는 행동이냐? 행동 하나, 결과 하나에 나를 계속 모심기 하듯이 계속 심어대게 되면 어떤 좋은 결과가 와도 우리는 쇳덩어리처럼 인생 자체가 무거워요. 참 무겁습니다.

그래서 존재와 사건을 제가 구분할 때, 거기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있느냐 라고 따지는 분들이 있을 텐데, 근거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마지막 심판할 때, 거기 보면 책이 두 권 있는데 책이름이 너무나 흥미로워요. 일단 먼저 지옥 가는 사람의 명단 책을 지옥책이라 하지 않습니다. ‘행위책’이라고 해요.

행위라 하는 것은 존재를 전제로 해서, 존재가 내뿜은 행위를 말합니다. 행위책이라 하는 것은 “너는 네 존재에서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다, 너는 네 자아에서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다. 지옥이나 가라” 이게 행위책이에요. 그러면 천국은 누가 가느냐? 천국 가는 사람이 기록된 책을 ‘행위 안한 책’이 아니고 ‘생명책’이라 해요.

생명책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존재이고, 예수님만이 행위가 되어서 자기 성도한테는 예수님이 행했던 그 사건에 합류한, 예수님의 존재를 사건화시킨 현상적인 사람이 바로 생명책에 기록된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주님, 저 뭐하면 됩니까?”하면 주님의 답변은 이미 정해져있어요. “네 알 바 아니요.”

“주님, 내일 뭐할까요?” “네가 알 바 아니요. 네가 주인공이 아니야. 네가 주인공이 아니야.” 그래서 여기서 이것이 과연 성경적으로 증빙이 되는지를 성경에서 열 군데만 찾았어요.

첫 번째, 요한복음 12장, 지금 우리가 뭘 하려고 하냐 하면, 행위가 어떻게 사건으로 전환되느냐 예를 드는 겁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마리아가 예수님 발 앞에 비싼 향수를 한꺼번에 한순간에 다 부었어요. 부었을 때, 제자 중 하나, 가롯유다죠. 가롯유다가 하는 말이 “이야, 저 비싼 거, 엄청나게 비싼 저것을 어떻게 그것도 삼백 데나리온 요새 은값이 굉장히 비싸거든요. 은 삼백 데나리온을 한꺼번에 다 붓느냐?”

그러니까 마리아는 마리아가 주체가 되어서 어떤 행위를 보여줬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즉각적으로 사건으로 전환시킵니다.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12:7) 마리아가 행동한 것이 ‘마리아가 행했다.’는 마리아의 행위로 두는 것이 아니고 후딱 가져와서 내가 죽는 사건, 십자가 사건에 하나의 소품으로 마리아의 행위가 쓰여졌다고 해석해버리는 겁니다. 이게 성경 해석이에요.

“그래, 마리아처럼 우리도 바쳐야지” 이거 아니에요. 성경 보고 “내가 뭘 하면 됩니까?” 이거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존재가 그냥 남아요. 내 존재를 소멸시키는 것이 사건입니다. 간단해요. 우리는 움직이지만 그 움직임은 고정된 시온에서 주어진 부여된 사건화된 하나님의 무기였던 거예요.

두 번째는 에베소서 5장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22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이렇게 되어있죠. 그 다음에 25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 존재 두 사람 나옵니다. 아내, 또 한 사람은 남편.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하고’

누가 봐도 이것은 남편, 아내 두 존재가 행위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죠. 그렇게 사도바울이 설명해놓고 에베소서 5장 31절에 보면,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31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32절)”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스도는 지금 안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이중의 층, 단일층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다른 층의 유일한 존재가 예수님인데 그 존재가 이 땅에서는 사건으로만, 사건적 현상만 남기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남녀가 결혼을 했는데 나중에 성령을 받고 보니까 이게 자기 행위가 아니고 서로 사랑의 행위가 아니고,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걸 증거하는 사건 속에, 사건에 의해서 본인들이 움직여지는 거예요.

아내와 남편의 움직임을 보여준 거예요. 또다시 여기서 존재에서 사건으로 변한 거예요. 존재에서 사건으로 안변하면요 행위책, 지옥 가는 거예요. 천국 가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한, 예수님의 존재만 드러내는, 예수님의 행위만 드러내는 우리는 사건으로만 이 땅에 현상적으로 남아져야 되는 거예요.

세 번째, 요한복음 2장 13절에서 21절, 간단히 설명하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과 돈 바꾸는 사람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때리고, 뒤엎고, 성전에서 내어 쫓고 신체적인 폭력을 행했죠. 예수님이 이렇게 행하시고 난 뒤에 당황한 유대인들이 말하길 “너 뭐야? 왜 하나님의 집을 네 맘대로 부숴? 어찌 그런 행동을 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제자들도 “우리 선생님은 왜 저런 행동을 하지?” 이렇게 된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들이 보기에 이 건물이 성전으로 보이냐?”라고 하니까 제자들이나 유대인들도 “그래, 성전이다.” 유대인들이 말하길 이 성전 46년 동안 지었다는 거예요. 존재지요. 성전이 있으니까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은 이게 성전이라고? 성전은 이렇게 존재하는 게 성전이 아니야.” 이 말을 제자들도 몰았어요. 나중에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 아, 사라진 예수님만이 성전이고, 우리는 그 성전을 이 땅에서 증거해야 될, 예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사건화되기 위해서 부름받은 소품인 것을 깨닫는 거예요.

성전은 뭐냐? 예수님이 성전이에요. 예수님 몸이 성전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데,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성전이고, 성전인 것의 여파로 우리가 움직인다면 그 고정된 성전에서 나오는 우리는 하나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사건이 되는거죠, 이 땅의.

네 번째, 야고보서 2장에 기생라합인데 25절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라고 되어 있어요. 기생 라합은 자기가 여리고 성 민족의 출신이에요. 뿌리가, 아빠 엄마 전부 다 여리고 성 사람이에요. 존재가 있다 말이죠. 그런데 여리고의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과 더불어서 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부터는 자기의 존재로부터 자기의 뿌리로부터, 고향으로부터, 자기 민족으로부터 떨어져나왔어요.

존재로부터 떨어진 사건이 뭐냐? 여리고 함락 사건을 통해서 저 쪽 존재 쪽 아니고, 사건을 일으킨 여호와 쪽에 붙어버린 거예요. 또 존재에서 사건으로 나간 겁니다. ‘침몰하는 배에 붙은 빈대’의 반대말은? 기생 라합. 왜? 자기 고향을 버렸으니까. 자기의 출신을 버렸습니다. 이게 바로 사건이에요. 행함이 아니라 사건이에요. 주께서 쳐들어왔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의 결과인 겁니다.

다섯 번째, 야고보서 2장 앞부분에 나와요. 아브라함 이야기인데,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아들도 존재, 자기도 존재지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그것도 사랑하는 아들을 모리아 산에 가서 잡습니다. 번제물로 드려요. 이것은 존재가 존재에게 절대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시키는 이 일이 존재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방안을 주셨다고 생각하고 그냥 존재자가 존재를 제거해버렸어요. 자기 아들에게 칼을 꽂았죠. 그럴 때, 여기서 진짜 존재가 등장합니다. 수풀 속에 있는 수양. 그 수양이란 존재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유일한 존재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이삭은 그 사건에 말려든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은 자기들이 존재가 아니고, 숨어있는 사건을 드러내는 소품으로서 이 땅에 등장한 인물이 되는 겁니다. 자기의 뿌리가 존재가 나 아니라, 나는 소멸되어서 나 아니고, 내가 있던 그 자리가 예수님의 존재와 더불어서 그때부터 나는 예수님의 존재가 사건화 되는 현상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면 되지요.

“예수님, 언제 재림합니까?” “네가 알 바 아니고, 너는 내가 시키는 거나 해라. 그런 거 알 생각하지 말고. 지식 얻어서 뭐할래? 지식 얻어서 네 존재 네 지식으로 살겠다고? 헬라어, 원어 해서? 아이고.” 전부다 말씀은 사건이에요. 우리의 골수를 깨는 사건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확보할 지식이 아니고.

여섯 번째, 열왕기하 6장 14절~17절, 이것은 정말 존재에서 사건으로 노골적이에요. 얼마나 노골적인지. 여기 두 존재자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게하시’ 엘리사 선지자의 매니저, 비서 게하시이고, 또 한 사람은 엘리사입니다. 누가 봐도 거기엔 두 존재자가 있어요. 두 존재자가 있는 그 곳을 누가 포위했는가?

무수하게 많은 아람 군대가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가지고 달랑 두 사람 있는 곳을 완전히 포위했어요. 엘리사 비서 게하시가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지요. 왜 떱니까? 내 존재를 내가 지키고 싶은 환상 속에 있었는데, 이제는 이 적에 의해서 내 존재가 완전히 달아나면 내가 꿈꾸는 내 인생도 같이 박살난다는 그것이 너무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내 주여 어찌할까요?”라고 묻습니다.

‘아아’ 나와요. 15절에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쉽게 말해서 “큰일 났습니다. 끝났습니다. 우리 존재 끝났습니다.” 그 때 엘리사가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16절)그러니까 게하시가 봤지요. 달랑 둘밖에 없는데 뭘 함께 해요. 그런데 기도하고 눈을 떠보니까 천군 천사가 저 쪽 쪽수보다 더 많아요.

천군천사의 숫자가 그 많던 아람군대 숫자하고 게임이 안돼요. 저쪽은 좀비고, 이쪽은 최정예 미군이고, 이건 게임이 안돼요. 거기다 무기도 불말과 불병거예요, 무기가. 화살이나 핑핑 그런 게 아닙니다.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해서 엘리사를 보호하고 있었던 겁니다. 보호한다는 이것은 주님과 엘리사 사이의 그 관계, 그 사건을 보호하는 거예요.

엘리사의 존재를 보호하는 게 아닙니다. 엘리사의 존재 같으면 엘리사가 안죽어야죠. 결국은 죽잖아요. 죽든 안죽든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엘리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숨어있는 하나님의 존재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엘리사와 게하시를 사건의 현장의 소품으로, 비품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일곱 번째, 누가복음 2장 29절 아기 예수를 만났던 그 대목입니다. 아기 예수를 만난 그 대목에서, 아기 예수는 누가 봐도 존재지요. 그 다음에, 그걸 보고 있는 시므온이라는 사람, 누가 봐도 존재지요. 그런데 그 존재와 존재가 만나면서 시므온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눅2장 28절에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28)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29)” 종을 평안히 놓아주신다, 평강이죠, 평강. 로마서 14장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주님의 완료된, 고정된 시온산에서 주신 평강이 사건화 되어서 내 내부까지 파고들어오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아기 예수를 안는 순간, 아기 예수가 갖고 있는 그 평화, 하늘의 평안에 같이 거기에 자기가 말려든 거예요. 그러니까 시므온은 뭐냐? 단일층에 사는 것이 아니고, 이중성 안에 살고, 사건과 존재 둘 사이에서 희락과 기쁨과 평화를 지금 만끽하고 있고 의로움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시므온이 뭐 죄 안지었습니까? 죄 지었지요. 하지만 의로움과 평강과 희락, 아기 예수님이 갖고 있던 그 의를 부여받는 거예요. 그 평강과 다 이루심, 다 이루심을 예수님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 그 자체는 뭐냐? 남들은 모르죠. 그러나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으니까 사건이죠.

여덟 번째, 마태복음 19장, 여기에 부자 청년 나오는데, 이 부자 청년이 자기 존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 찾아 왔어요. “예수님, 십계명 있는데 얼마나 더 지켜야 됩니까?” 자기 존재의 온전함을 위해서 왔을 때, 주님께서는 ‘네 존재를 포기하고 내 존재로 건너오면 된다’는 거예요. 내가 일으킬 사건 안에 네 존재 버리고 오면 된다, 존재 버리는 게 뭐냐?

그 동안 네가 존재라고 우기게 만든 그 많은 돈을 다 없애버리고 나한테 오라는 거예요. 그건 도저히 부자 청년으로서는 내가 내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했던 돈이기 때문에 그걸 버리면 자기 존재를 버리는 거기 때문에 그건 못하지요. 이처럼 존재의 온전함은 필연코 사건의 온전함과 대치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나의 온전함을 노리는 것은 결국은 그것도 행위책에 불과해요.

아홉 번째, 사사기 7장 1절에서 2절,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서..” 이게 미디안의 13만 5천명 하고 이스라엘이 붙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상대도 안되게 미약해요. “기드온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서 하롯 샘 곁에 진 쳤고 미디안의 진은 그들의 북편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1절)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7장 2절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하, 너무 많대요. “너무 많다. 나는 너를 그런 식으로 구원하지 않는다.”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2절)

‘내 손이’ 나의 존재가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그런 사건은 십자가 사건 아니야, 하나님 사건 아니야. 이중성의 위층의 사건이 아닙니다. 아래층에서 생각해내는 사건일 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제일 적은 숫자 300명만 가는데, 300명 그들이 하는 게 아닙니다.

7장 16절에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고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자, 그렇다면 이 인간들 300명이 전쟁하느냐? 아닙니다. 그럼 뭐냐? 사람은 제끼고 그들이 들고 있는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을 들고 가는데, 이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의 특징은 순간적이라는 거, 사건적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 사건은 그 현장에서 소모되고 순식간에 깨져버리는 거예요. 항아리 깨지죠, 횃불 타버리죠. 나팔 소리나고 몇 초, 몇 분 안가서 나팔 소리 다 끝나죠. 오래 가는 것은 존재지만, 순식간에 끝나는 것은 사건이죠. 이 전쟁은 존재와 존재의 싸움이 아니라, 존재와 하나님의 사건의 싸움이죠. 이게 사건의 검이에요, 사건의 검. 사건의 칼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 열왕기하 5장, 역시 엘리사의 매니저 게하시에 관한 겁니다. 문둥병 환자 나아만 장군이 왔을 때, 나아만 장군은 예상했어요. “내가 환자니까, 존재자인 의사가 와서 존재인 환자를 존재자가 고친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환자는 있는데 의사가 보이지를 않네요. 식사하러 갔는가? 의도적으로 엘리사가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뭐냐?

존재의 병은 문둥병이 아니에요. 존재가 그대로 존재로 있는 게 병이에요. 고질병입니다. 존재는 존재가 아닌 말씀에 순종할 때 드디어 존재가 사건화 될 수가 있어요. ‘고침 받은 나’가 아니라 ‘사건이 고쳤다’가 되어야 돼요. 사건의 증인되어야 돼요.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가” 체면이 있는 나아만 장군이 안 들어갑니다. 옆의 신하가 “들어가세요,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가세요.” “나는 그리 생각 안했지. 엘리사가 나와서 안수하고 그럴 줄 알았지.” “고집부리지 말고 일단 해봅시다.” 해보니까 일곱 번 요단강에 들어가고 나았어요.

거기서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가 나를 낫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엘리사의 지시도 엘리사가 섬기는 보이지 않는 유일한 존재-우리는 존재가 아니에요. 그냥 해체돼야 할 쓰레기에요-유일한 존재, 하나님이 저 아무 것도 아닌 엘리사를 통해서 나한테 그 사건화의, 주님이 일으킨,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에 말려든 게 한 것이 내 병을 낫게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게하시는 그걸 모르고 5장 22절에서 “ 저가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게하시가 나아만이 갖고 온 선물을 도로 가져가니까 그게 탐이 난 거예요.

저것만 있으면 내 존재가 행복해지는, 내 환상이, 내 비젼이 달성되고 만족할 것 같은, 욕망이 충족될 것 같아서 그걸 달라고 한 거예요. 나아만 장군은 존재에서 사건화 되었는데, 게하시는 존재를 존재로 더 키우려고 시도한 거예요. 그래서 나아만 장군에게 있었던 문둥병이 게하시한테 옮겨갑니다.

출발점을 너는.. 문둥병이 뭐냐 하면 존재해도 존재 값을 못하는 가장 지저분한 존재가 문둥병자예요. “너, 처음부터 다시 봐라. 존재라는 것이 얼마나 처절하게 더러운 것인지를 그거부터 너는 새로 시작해라.”

이렇게 해서 오늘 열 가지를 보았습니다. 시온은 고정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는 고정된 시온에서 움직일 때 이제는 그렇게 골치 아팠던 ‘나는 잘했는가, 못했는가? 나는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사는가? 제발 그만! 그것은 주님이, 고정된 주님 존재가 알아서 우리에게 할 거예요. 그래야 우리는 생명책에 이미 들어온 하나님의 천국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나 추스른다고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내가 나를 포기하지 못해서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갔습니까? 이제는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우리 안에서 작동을 하는 사건화 된 그러한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6강-스가랴 9장 11~17절(존재와 사건) 240110-이근호 목사 .hwp (31.5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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