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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4 11:24:14 조회 : 179         
국문의 현장 - 이미아(2015.10.12) 이름 : 송재원(IP:112.172.171.123)

저 멀리서 소리가 들린다.

“살아있는 세발낙지 사세요! 세발낙지가 쌉니다! 사러들 오세요!”

주일에 어김없이 설교를 듣고 있는 시간이면 설교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먹고 살기 위해서 저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바깥의 현실은 말씀을 듣기 위해 앉아있는 안의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는 것만 같다.

마치 세발낙지 사라는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통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말씀을 듣고 앉아있는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노란 신사임당 할머니한테 당할 자가 없는 이 현실.

새로운 현실이라고 우기는 종교도 그 노란 종이를 이기지 못한다.



예수님은 내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피를 흘리셨다는데 그 피로 안 되는 것이 있단 말인가?

동산위에 지어진 아담한 예배당 종소리를 듣고 더러운 세상을 떠나서 사랑과 용서만이 있는 종교로 숨어보고자 도피처를 찾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종교는 성화라는 미명하에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탈출하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 숨통을 조이는 덫이었다.

온갖 것을 다 끌어 모아서 나라는 인간을 개조해보겠다고, 구원받아보겠다고, 죄에서 해방되어보겠다고, 성화된 척 했지만 그것은 곧 욕정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고 바늘로 찔러야 하는, 그 옛날 열녀들의 수절과도 같았다. 애초부터 그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덫은 내 안에 이미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낯선 세계에 어떻게 들어서게 된 것일까? 모른다.

보이지 않는 힘이 낭떠러지로 밀치고, 밀치고, 밀쳤다.

돈이 있으나 없으나 죽어야 하는 이 실제적인 문제 앞에서 행복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를 찾았다. 예수를 찾고 부처를 찾고 알라를 찾고 그러다 자기 외에 믿을 것이 없기에 자기 힘이라는 신을 찾았다. 이 세상에서 잘 살다가 죽어서도 잘 살 수 있는 곳, 자기들 나름대로의 설계된 파라다이스를 위해서 사람들은 선을 쌓았다. 자기가 선이라면 선이었고 자기가 악이라면 악이었다. 내가 곧 신이다. 그 어떤 형편이고 환경이고 간에 살아있다고 여기는 나만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그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내가 찾은 신은 예수였지만 그것도 곧 내가 만든 예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선악과를 따먹고 신된 인간에게 있어서 양심은 값을 요구하게 되고, 그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이리저리 찾아 헤매다보니 그 값을 대신 치러주신 분이 계신다. 그래서 예수를 믿었다. 그러나 내가 찾아서 믿었던 그 예수는 가짜 예수였다. 내가 철학이나 철학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지만, 그래도 들었던 내용에서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포이에르바하가 말한 내용이다. “종교는 인간의 자기 욕망의 산물이다.” 곧 “신은 인간의 자기 투영이다.” 라고. 현실세계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은 상상력, 소원, 이기심을 동원하여 신이라는 이상적인 존재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위로를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결국 신이란 인간의 소원이 존재로 대상화된 것이며 환상 속에서 만족되는 인간의 행복욕에 불과하다고 그는 결론짓는다. 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듯이.



그렇다면 인간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가? 행복할 권리가 당연한 것처럼 요구할 수 있는가?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는 그 행복을 위해서 신을 만들고 절하며 행복하기 위한 소원을 빌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살려만 주신다면 다시는 절대로 만나지 않겠다고. 친구로 지내겠다고 했던 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사랑하고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신이 내린 벌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 사람을 떠날 테니 살려만 달라고 신께 빌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낫게 되니 결국 헤어지게 된다. 서로 헤어져 각자의 삶을 살다 10년이 흐른 후에 만나게 되었을 때 여전히 살아있는 그 남자를 보고 여자는 자신이 떠났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라고 안도하지만 그녀를 사랑한 남자는 신에게 했던 맹세를 어겼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운명은 나의 어떤 행동 때문에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정해져있는 것이라고. 신마저도 결국 둘의 사랑을 방해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듯했던 어느 인도 영화이야기가 생각난다.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고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의 무의식적인 것 같으나, 늘 의식하고 있는 법인 것이다. 자신의 행동만이 최선이고 최고의 법이다. 모든 드라마가 우리의 일상을 반영한다면 그 테마는 ‘권선징악’이고 ‘상선벌악’이고 ‘인과응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을 빌미로 하여 종교는 이 핵심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었다. 종교는 오히려 이것을 부추겨 이익을 얻기 위해서 장사를 시작했다. 인간의 본심적인, 인간의 욕구적인, 인간의 본질적인 것들인 행복과 영원불멸을 꿈꾸게 한 것이다. 마치 아론이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서 모세를 대신했던 것처럼 저마다의 우상을 만들어놓고 갑론을박을 한다. 자신이 곧 우상숭배자임을 모른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골3:5). 그 치닫는 파국 속에서 세월이 흘렀다. 그 파국의 현장에 질려서일까?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찾아 헤맸다. 참 신과 참 진리를 향해서. 그렇게 했을 때 남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하나도 손해 본 적이 없는 남는 장사만 했는지도 모른다.



주님! 복음을 아는 제가 고상하고 아름답고 예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해하고 그 희생을 알아주는 그 성의가 가상하지 않냐 구요?

죄를 알고 죄를 인정하다니 기특하지 않나요? 그러니 제가 원하는 것을 해주세요.

내 입에서 나오는 이러한 지껄임은 화수분과도 같아서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마치 누가복음 12장에서 자기 영혼에게 창고에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했던 것처럼, 그렇게 내 안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었다.

여전히 개혁주의고 성화주의고 청교도주의고 칼빈주의다.

방황의 모든 끝은 꼭 내가 잘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으니 남는 장사한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잘 안 되는데 어떡하란 말인가..잘 되는 것이 뭔지도 모른다.

사막을 걸어가고 있는 것 같은 이 절망을.....,세상은 절망하지 않는데 나는 절망하게 하셨고

현실도피처로 교회를 찾았던 그 화근을 절망으로 비밀스럽게 바꾸셨으니.....,

건물에 갇힌 예수님. 교회에 묻힌 예수님.

내 행복이나 추구하게 해주는 예수님은 가짜요, 우상이요, 결단코 예수님은 믿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다.

얼떨결에 어린양을 잡고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고 해서 발랐고 피를 발랐더니 살아서 출애굽 하였다. 그 취지를 이스라엘은 몰랐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 흘림의 취지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알게 하실 작정이시다.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 유월절 어린양이 죽었다면 너희들도 죽은 것이다. 애굽에서 나온 자들의 목적지는 광야였고, 강대한 주변국들과의 전쟁이었고 바벨론 포로였고, 로마의 압제였다. 그 어디나 그들의 영역은 국문의 영역이었고 국문의 여정이었다. 그 국문을 누가 하시는가? 창세전에 언약대로 주님이 하신다. 그렇게 창세전에 언약대로 모델인 이스라엘이 그랬다면 우리 또한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국문당하는 여정을 살아야 한다. 왜? 평생 동안 국문의 현장에서 살며 주님의 피 흘리심에 감격하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마음이시다. 왜? 나를 위함이 아니라 주님 자신을 위함이시다.



애굽 땅에서 종살이 하던 너희여 나와라! 국문의 현장인 광야로!

바벨론에 포로 된 너희여 올라오라! 국문의 현장인 예루살렘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열국 광야에 이르러 거기서 너희를 대면하여 국문하되 내가 애굽 땅에서 너희 열조를 국문한 것같이 너희를 국문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 이니라”(겔 20:36-37).



야곱에게 11자식들의 목소리가 위로가 되겠는가?

오직 요셉이 보낸 수레만이 위로가 될 뿐이다.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창 45:27).



저 멀리서 들려오던 소리는 설교를 들을 수 없을 만큼 한참을 크게 방해하더니 또 저 멀리 사라져간다. 말씀은 들리지 않고 ‘세발낙지 사다가 낙지볶음이나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맛있겠지.’ 이러한 상상에 입안에 군침이 돈다. 이게 내가 처한 웃픈현실, 국문의 현장임을 실감하면서, “창세전에 예정대로 국문당하는 여정을 걷게 하신 자만 걸을 것이고 올라올 자만 올라올 것이다.”는 설교의 결론이 들려온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게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송재원(IP:112.♡.171.123) 24-02-24 11:46 
지금부터 10년전에 곁에 있었으면서, 이런 환경속에 놓여있었는지, 공감하지도 못했고, 공감하려해주지도 않았다. 어제 결혼한 후 처음으로 식탁에 앉아서, 아내와 따뜻한 차를 마셨다. 속이 뜨거워서, 시원한 탄산음료만 찾았었는데, 새로운 경험이였다. 마시는 차가 참 따뜻했다. 오늘 아침에 또 그런 시간이 있었는데, 어제와는 다르게 좀 어색해서 어제처럼 자연스럽지는 못했다. 오늘도 그런 기회를 주셨고,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기 직전에 다행히, 출근하기 바로직전에 다행히 막산다는 것의 의미를 나누었고, 오늘 하루 직장에서 그것에 대해 묵상하게 하실 것 같다. 막산다는 것은, 경직과 반대다, 내가 선하고 바르게 행동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몸이 굳고 입자가 되어버려서 자연스러움이 깨진다. 그냥 살던 대로 하던데로 사는 것. 그냥 사는 것. 내가 바르게 살아야지 다짐하며 조심조심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안에 나의 몸을 맡겨버리는 것. 그것이 막사는 것의 의미인거 같다고 둘이 나누었다.
 구득영(IP:183.♡.224.162) 24-02-24 12:00 
나이가 60이 되었는데도, 30년을 함께 밥을 먹었는데도,
아직 그런 대화를 나누지 못했네요. 부럽습니다 ㅎㅎ
 송재원(IP:112.♡.171.123) 24-02-24 12:36 
네 아까는 티타임이고, 오늘 직장 출근해서 학생 가르치기 전에, 이웃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앞으로 창녀로써 이 땅에 몸을 굴리며 살아가는 제 본모습을 주님이 드러낼 것이라고 고마운 복음을 들려주시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김정은보다 악한 것이 너의 본 모습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하여주셨습니다. 티타임도 있고, 책망받는 타임도 있네요. 참 오늘 새롭습니다. 이제 학생이 옵니다. 봉사하는 것처럼 바른 선생인 것처럼하는 바리새인의 죄를 지으며 일터에서 일해야겠습니다. 목사님 안지 오래되었는데, 대화를 해본 적이 처음이네
 이미아(IP:112.♡.81.74) 24-02-24 13:32 
복음을 아는 사람도 싫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도 싫다.
나는.
 
"나는요", "저는요" "내가요" "제가요"
이 지긋지긋한, 아담에게 물려받은 악마의 속성이 잘 발동되도록 오늘도 십자가사건은 재현된다.
이 저주받은 공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대못으로의 역할이 잘 발휘되도록 어김없이 오늘도 십자가사건은
다 이루심 안에 놓여 있다.

시간의 흐름
시대의 흐름
역사의 흐름
이 흐름은 몸을 휘감아서 죽음이라는 흐름을 내뱉는다.
겨우 이정도다.
이게 죽음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죽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 흐름의 배경에 숨어서 움직이는 단 하나의 유일한 어떤 흐름은
죽어도 죽지 않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죽어야 사는, 죽음을 부활시키는 죽음을 생산하셨다.
죽음은 기쁜소식이다.
"나는" 없고 "예수님은" 있으니까.
보이는 것은 전부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전부다.
보이는 것은 가짜다. 보이지 않는 것이 진짜다.

"믿는 자여 어이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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