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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5 06:26:47 조회 : 111         
광주강의20240223a 고린도전서 12장 3절(포괄 개념)-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219.251.37.139)
광주강의20240223a 고린도전서 12장 3절(포괄 개념)-이 근호 목사


p.26 오늘은 은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교회는 성령의 은사로 이루어진다.】간단하게 나와 있죠. 은사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비(非)소유’입니다. 소유될 수 없는 게 은사에요. 은사라는 말이 좀 어려우면 쉬운 말로 하겠습니다. 선물.

선물은 주신 분의 취지가 받은 자에게 계속 남아있기 위해서 제공되는 거예요. 보통 인간세계에서의 선물은 주면 내 것 되잖아요. 그러나 성경에서의 선물은 반대에요. 줬기 때문에 그 은사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소유는 빼앗기게 되는 겁니다. 빼앗는 겁니다. 은사는 줘놓고 빼앗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욥기에 나오죠.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라고 했을 때 거둔 자도 하나님이라 했잖아요(욥 1:21). 그런데 욥이 하나 놓친 게 있어요. 재산에 관해서만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러나 욥은 자신의 목숨, 자신의 건전함도 빼앗긴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욥이 화가 나서 ‘이럴 것 같으면 내 목숨도 그냥 가져가세요.’라고 했죠. 하나님은 안 가져갑니다. 안 가져가요.

욥에게는 뭐가 있었는가? ‘자기 의’가 있었던 거예요. 목숨과 내 의 중에, 목숨은 내놓되 뭐는 못 내놓는다? 나 잘남은 못 내놓는 거예요. 자기 의. 그러니까 인간세계에서 골칫거리가 목숨보다 더 센 자기 의에요. 자기 의. 뭐 죽으면 죽었지, 난 이거 못 내놓는다 하는 게 있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의입니다.

욥은 당대의 의인(義人)이잖아요. 욥의 주제는, 이 의(義)가 욥은 나의 의, 자기 의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의가 욥 너의 의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이 의는 누구 의겠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되겠죠. 일단 욥에서는. 나중에는 하나님의 의가 장차 올 예수님의 의로 바뀌지만 일단 구약 욥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겠죠.

그런데 여기서 욥은 이 의가 내 믿음으로 말미암은 내 거라는 거예요. 내 것.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얻은 내 것이라 여긴 겁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실제로도 그랬지만 욥이 자기 것이라 여긴 이 의를 하나님께서 가져간다면 욥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의가 빼앗겼다는 의식을 갖겠죠. 그렇죠? 드린다는 의식이 아니고, 가져가셨다는 것이 아니고, 빼앗겼다는 뉘앙스가 뭐에요? 원래 내 건데 강제로 누가 탈취해가는 것을 빼앗겼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봐서는 욥은 믿음 좋고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고분고분하고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자식들한테 죄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외부에서 볼 땐 그랬는데 욥 본인도 모르는 결정적인 자기의 취약성이 있었던 겁니다.

목숨 내놓을 테니까 이것만은 빼앗지 마세요, 하는 목숨보다 더 센 게 욥을 붙들고 있었어요. 자기 목숨보다 더 센 것. 목숨은 버릴지라도 못 떼어놓는 게 있어요. 그게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자기 의란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목숨은 빼앗겨도 어떤 노력으로도 안 빼앗기려 하는 족쇄 같은 게 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자기 의라는 겁니다.

욥이 이런 이야기를 함으로써 예수님의 제자 중 베드로가 ‘저도 목숨 바쳐 주를 따르겠습니다.’ 할 때 그게 욥의 경우와 그대로 닮은 것을 알 수 있죠. 베드로가 ‘목숨 바쳐서 주를 따르겠습니다.’ 할 때 베드로는 ‘목숨은 내놔도 예수님에 대한 나의 신뢰, 나의 순종, 나의 복종, 나의 믿음, 주님에 대한 사랑 이것만큼은 내 걸로 해주세요.’하는 겁니다.

이걸 통해서 하나님의 원수(마귀)가 인간을 어떤 식으로 다스리고 지배했느냐가 드러납니다. 지배가 지배답게 되려면 인간은 자력으로 여기서 빠져나오질 못해야 해요. 빠져나오지 못하고요. 그래서 마지막 때에 종말의 영, 성령을 통해서 은사를 주는 것은 모든 시작을 하나님의 원수의 입장에서 그걸 파악하고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이 세상을 볼 때 하나님의 원수 입장에서.

하나님 원수가 뭐죠? 마귀죠. 악마가 인간을 어떤 식으로 다스리고 있는가에 대해 감이 있어야 돼요. 감각이 있어줘야 됩니다. 그거 없으면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목숨 바쳤다는, 또다시 욥 같은 일이 재현되는 거예요.

그럼 이야기를 일단 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차지한 것은 우리의 속이고, 우리 내부를 우리가 모르니까 그 속을 뒤집어버리는 거예요. 우리 속을 간파하고 파악해내는 그러한 선물로서 은사가 온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은사가 왔을 때, 여러분 아시는 이야기에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성령이 어떤 사건 이후에 오게 되어 있어요. 어떤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이죠. 십자가 사건. 이걸 사후적이라 해요. 사후적이라는 것은 일이 터지고 난 뒤에, 그동안 기억치 못했는데 어떤 계기가 왔을 때 그걸 해석하면서 비로소 현실감각이 생기는 것, 그걸 사후적이라 하는 겁니다.

어떤 트라우마, 충격적인 것이 있었는데 그게 잠복되어 나타나지 않다가 어떤 일이 계기가 된다면 ‘아, 어릴 때 내가 그런 일이 있었지.’라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다시 한번 되새겨지는 거예요. 군수실에 갔을 때 갑자기 잊어버렸던, 군수하고 이야기 나눴었던 것이 확 떠오르죠.

결국 인간은 본인이 해석하는 게 아니고 환경에 의해서 늘 해석당하며 살죠. 해석당하면서 내가 선택해서 경험했다 했는데 선택해서 경험한 게 아니고 그냥 나에게 있던 경험들이 그때그때 내 선택에 의해서 필요한 것만 느끼고 나머지는 기억의 창고 속에 다 집어넣은 거예요. 집어넣었다가 또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게 상기되겠죠.

그래서 인생은 ‘해석의 더미, 총합’이에요.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모르고 내 인생은 어떻게 내가 살면 되냐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떻게 사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해석하느냐죠.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고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되새겨 줍니다. 되새겨주는 거예요. 이게 성령 받은 교회 또는 성도의 삶이에요.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십자가가 뭔가를 내가 현재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삶이 성도의 삶이에요.

그럼 십자가 사건을 성령이 그대로 되새겨주니까 성령은 자기 일이 없고 십자가 사건을 반복하는 일, 그 일입니다. 그럼 십자가 사건이 뭐냐? 십자가 사건은 무엇의 만남인데, 인간은 배제해요, 인간은 배제당하고 하나님의 아들과 누구의 만남이냐 하면 바로 악마의 만남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악마는 예수님의 발꿈치를 물었고 예수님은 악마의 정수리, 이사야 또는 시편에서는 정수리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하게 제일 급소인 부분을 쳐버려서 더 이상 대들지 못하게 하는 그 만남의 사건이죠. 인간은 어떻게 됩니까? 배제되죠.

그럼 은사가 왔다는 말을 이제 여러분들이 아시겠죠. 은사가 선물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아신다면 선물은 무슨 뜻입니까? 내 행함, 내 노력이 배제되는 걸 의미하는 거예요. 내 행함이 배제되어버리면 선물은 지금 이 시간 속에 존재하는 나로 하여금 십자가 사건을 해석토록 하는 이것이 바로 은사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서 어떤 결과를 이루냐, 이것은 배제되어야 돼요. 배제되어야 되는 거예요. 해석을 하라고 성도의 인생은 계속 질질 이어지고 있어요. 십자가 사건을 해석하게 되면 내가 어떻게 행하고 노력했는가는 배제되고 뭐만 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과 악마의 만남에서 일어난 일의 결과로서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인간은 악마에게서 못 벗어나니까 악마와 하나님의 아들과의 만남이 십자가 사건이라면 ‘악마는 어떤 식으로 나를 가르쳤느냐?’ 또는 ‘내 마음을 관장하고 주관했는가?’ 무엇이 빠져버립니까? 예수님이 하신 해석이 없죠. 그 해석이 없다는 말은 ‘내가 한 그것이 나의 소유가 될 자격이 있다’ 이게 바로 악마가 우리한테 가르친 거죠. 내가 한 것으로 나는 이 땅에서 내 걸 가질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거예요.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체코)라는 20세기 초의 체코 문학가가 있어요. 문학인데 국가나 사회보다도 개인의 마음에 대해서 정신에 대해서 탐구한 문학가에요. 그걸 실존주의적이라 하는데 ‘나는 누구냐’를 내부로 파고들어가는 문학이에요.

그 사람이 지은 단편 가운데 <변신>이라는 게 있어요. <변신>에서 아빠와 여동생 그리고 가족이 나오는데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맏아들인 본인이 점원하다가 열심히 노력해서 정식 영업직으로 노력한 만큼 계속해서 가정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어요. 그래서 변신의 주인공은 자기 자부심을 느끼는 거예요. 온가족은 노는데 자기 혼자 죽기 살기로 일해서 온가족이 하하 호호 웃고 밥 먹고 사는 것이 자기로서는 일할 보람을 느낀 겁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내가 일하는 것을 굉장히 존중하고 고마워할 것이라는 생각을 본인이 갖고 있었어요. 자, 방금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이게 뭡니까? 내가 한 것이 나의 소유가 될 자격, 이것이 욥에서는 뭐로 등장합니까? 자기 의로 등장해요. 자기 의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주인공이 벌레가 되었어요. 전에는 사람 모습 안에 있는 자아였는데 어느 날 졸지에 벌레가 되어서 아주 흉측한 집게벌레 안에 있는 나가 된 거예요. 벌레 안에 내 자아상이 담기게 된 거예요. 내 노동으로 인해 밥 먹고 살고 행복하다고 ‘오빠, 고마워.’, ‘그래, 우리 아들 최고야.’라고 했던 가족들이 졸지에 자기가 벌레가 되고 나니까 벌레 안에 자아상이 있으니까 들리는 거예요. 이 벌레를 놓고 어떻게 처리할지, 가족들이 처리하는 게 다 들리잖아요.

그래서 느낀 것이 가족에 대한 배신감입니다. 죽여 버리자. 그들이 얼마나 자기에게 고마워했습니까. 고마워하고 감사했으면 마음이 마음과 서로 교류되고 통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주인공은 그걸 몰랐던 거예요. 그 내용에 보면 진짜 열심히 일할 때는 심지어 저 여동생이 나를 굉장히 존중하니까 빨리 돈 모아서 여동생이 좋아하는 음악학교, 옛날에 음악학교는 돈이 비쌌던 모양이에요, 음악학교에 넣어줘야지 생각할 정도로… 자기한테 잘해주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여동생이나 아버지나 부모가 자기한테 잘한다고 칭찬하는 노동으로 그들은 장남인 나를 본인들이 소유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돼요. 남한테 배려하는 말을 하고 남을 배려함으로써 빼먹을 것은 빼먹는 내 소유물로 이미 전락해버린 거예요. 이게 바로 실존주의에서 비로소 밝혀지는 인간사회입니다. 인간사회에요.

여기서 뻔한 질문을 해봅시다. 그 여동생과 부모는 왜 돈 잘 버는 큰 아들을 좋아했습니까? 이게 정말 뻔한 질문이지만 답변을 해보세요. 왜 좋아했습니까? 그들의 생존의지 때문에. 생존의지.

지금 욥이 하나님이 죽이는 것보다도 자기가 기꺼이 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하는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요모조모 따져 봐도 자기는 곧 죽을 거 같아. 너무 아파서, 욥이. 시들시들 내가 죽는 입장에서 목숨을 포기해야 되는 그 지경까지 밀리면서도 기어이 포기 못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자녀들한테 내가 고아와 과부한테 어려운 사람한테 내가 가족들에게 그들 신앙생활 잘하라고 제사 드린 가족들에게 높은 사람에게 겸손하고 어려운 사람 도와줬던 그 모든 것을 본인이 잊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본인이 잊을 수가 없죠. 그거 잊지 못하면 자기 의 그대로 있는 거예요.

악마가 인간한테 꼼짝 마라 한 이유를 알겠죠. 인간은 악마와 내 관계를 생각하지 않으면 세상을 제대로 해석 못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전혀 이해 못해요. 그래서 터진 사건이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이 남들보다 좀 더 착해야 자기가 존경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 당시에 유대 나라에 성전이 있잖아요, 이 헤롯 성전이 46년 동안 지은 엄청난 성전인데 이 성전이 있음으로써 성전에 밥 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세 들어오죠. 성전세 말고 또 여러 가지 성전과 관련된 행사 진행에 관한 비용, 굿즈, 관광업 또 그 동네 환전할 때 커미션(수수료), 그리고 소 팔고 양 파는 자에게 커미션 들어오죠. 그리고 수리할 때 인테리어 업자, 건축업자에 대한 권리금, 그 권리금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이 사람들이 장악했거든요. 장악할 때 그들이 백성들에게 존경받지 아니하면 그런 커미션이라든지 성전세가 제때 들어오겠습니까, 안 들어오겠습니까? 안 들어오죠.

그러니까 그들이 할 일은 뭐에요? 율법 공부하고 율법대로 그들에게 그럴싸하게 사는 모습을 과감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보여주는 겁니다. 신을 섬길 때는 우리처럼 섬기라는 것을 하나의 모델로 보여주면서 그들은 돈벌이가 되는 거예요. 일반백성들은 사는 데에 급급해서 그 정도 레벨까지 이르지 못하니까. 경건한 레벨에 이르지 못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성전을 계속 지으라 했습니까, 헐라고 했습니까? 성전을 헐어버리라. 자, 성전을 헐어버리라는 이 말씀이 오늘 이 강의와 관련되어서 저 끄트머리까지 연결된다면 결국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에게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너의 의를 버려라.

이것은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버리라 하는 거예요, 못 버리기 때문에 버리라 하는 거예요? 인간이 아무리 흉내 내고 신앙적으로 해도 결국은 이 마지막 멘트, 너의 의를 버리라는 이 멘트 자체가 심판이에요. ‘넌 죽었어.’ 이 뜻이에요. 넌 죽었다는 거예요.

곤충이 곤충 되면 몰라도 곤충 안에 자기가 들어있으니까 더 큰 문제죠. 곤충 안에 들어있는 자아상. 곤충 안에 안 들어가고 그냥 멀쩡한 인간일 때 있던 대우와 본인이 곤충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 가장 가까운 식구들한테 들려오는 소리가 이처럼 대비적이고 대조적이고 차이난다는 사실을 이 <변신>이라는 단편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성도에게 곤충 되라는 이야기하지 않고 그보다 더 심한 이야기를 했죠. 너는 어디 안에 들어가라? 어디 안에 자아성을 가져라? 십자가 안. 예수님의 죽음 안에 네가 들어가 봐라. 그러면 세상이 지옥인 것을 볼 것이다. 온통 자기 의로 가득 찬 세상이에요.

은사는 소유하라고 주는 게 아니고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우리의 속내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주신 거예요. 십자가 자체가 우리한테 선물이 되어서 우리가 알지 못한 나의 정체를 그대로 까발려주는 이것보다 더 큰 고마운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방금 은사 이야기했는데 은사가 어디부터 시작한다 했습니까? 십자가 자체가 예수님과 악마의 만남이죠. 인간은 빠지죠. 악마의 가르침이 뭐냐? 이걸 알아야 이 세상이 악마의 세계라는 사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인간은 거기서 못 빠져나온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악마라는 말을 안 하고 인간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과학, 철학의 시원(始原), 다른 말로 뿌리라 할 수 있는데 또는 기원,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제가 해보겠습니다. 인간의 언어(생각)로 더는 넘어설 수 없는 한계, 이게 바로 시원(뿌리)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아무리 구상해도 더 넘어설 수 없는 그것이 바로 시원 또는 기원 또는 근원 또는 뿌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악마는 어떻게 되는가? 악마는 신화에 속한 거예요. 신화. 신화는 인간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언어를 통해서 말하는 게 전설이고 신화에요. 그러니까 시원부터는 인간의 역사가 돼요. 문자 역사, 언어의 역사가 되고 그전까지는 그냥 구라지만 도대체 설명이 안 되니까 인간 현상으로 설명 안 되는 것들의 집합체, 뭐겠어요? 전설의 고향이죠.

그럼 시원부터 시작한 역사는 뭐냐? 철학과 과학의 역사라 볼 수 있어요. 수학, 과학, 철학. 이 기원이 뭐냐? 이 기원에 두 가지의 설이 있으니까 그 두 가지 설을 제가 지금 설명해드리려 하는 거예요. B.C.500년경부터 약간 이후, 이게 바로 보통 세상의 역사와 철학의 기원이라고 보는 겁니다.

파르메니데스(기원전5세기경 그리스 철학자)와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6세기말 그리스 철학자)의 양대 이론이 지금 21세기까지 과학과 철학을 전부 다 지배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냥 간편하게 설명해드릴게요.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거예요. ‘변화는 없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 일단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어요. 둘 중 어느 것이 맞습니까? ‘변화가 없다’가 맞습니까,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게 맞습니까?

성경을 한번 봅시다. 성경에도 마귀를 모르는 인간들의 주장 같은 게 나와요. 베드로후서 3장 4절,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주가 강림한다는 것은 세상이 들으면 신화에 속하죠. 절설. 그냥 무시해도 되는 이야기. 그러나 세상을 정확하게 본다면 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파르메니데스 말이 세상 말 그대로죠. 그냥 있는 거예요. 해? 졌다? 아니야. 아침 되면 또 뜰 거야. 세상은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파르메니데스가 변화는 없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이렇게 해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고 이야기해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커피 잔에 커피가 있고 이 커피를 옆으로 옮긴다면 헤라클레이토스가 파르메니데스한테 뭐라고 하겠어요? ‘거봐. 커피가 옮겨졌잖아. 변화가 있잖아.’ 이렇게 하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파르메니데스는 커피는 옮겨질 수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커피가 옮겨지려면 옮겨질 자리가 빈자리가 되어야 돼요. 그런데 빈자리는 ‘없는 것은 없다’라는 원칙에 의해서 빈자리는 없는 거예요. 빈공간이 있으면 옮길 수 있는데, 커피를 옮기고 변화가 있는 건데, 빈자리가 없기 때문에 커피가 옆으로 옮겨져도 이건 변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이 사상이 오늘날 과학을 지배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물질이 변해도 궁극적으로 입자라는 것만 있고 나머지는 없는 거예요. 입자는 변한다, 안 변한다? 안 변하죠. 입자는 변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파르메니데스 말이 맞는 거예요. 나중에 이 사람의 사상을 이어받은 데모크레이토스는 원자론을 주장했는데 세상에 있는 것들이 변하지 않는 것들의 만남과 부딪침, 이런 것뿐이지 궁극적으로서는 변하지 않는 이게 맞다는 거예요. 118가지의 원소라는 거예요. 원소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변하지 않는 게 원소에요.

분자, 원자, 원소에 의하면 누가 틀렸어요? 헤라클레이토스가 틀린 거예요. 모든 것은 변하는 게 아니에요.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원적인 것, 원자, 분자는 변하지 않는다. 이 말이 맞다는 거예요, 파르메니데스가. 그러니까 빈공간은 없으니까 나중에 빈공간은 없는 게 아니고 에너지가 있다. 파르메니데스가 맞는 말했네요. 이 세상에 빈공간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있어도 뭐가 있다는 겁니다.

헤라클레이토스 이 사람은 어떤 말로 유명하냐 하면 ‘같은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없다.’ 흐르는 강물에 똑같이 발을 담글 수 없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강물에 한번 발 담그고 강물이 내려갔잖아요. 그다음 강물에 발을 담그면 그 발은 이미 그만큼 늙은 발이에요. 늙어빠진 발이 그다음에 들어가는 거예요.

헤라클레이토스는 무엇을 절대화시키느냐 하면 시간을 절대화시키는 겁니다. 시간 안에서 모든 것은 다 변화한다. 단, 변하지 않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운동론이에요. 뉴턴의 운동론이에요. 미분 적분 여기서 다 나온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하는 거예요. 변화가 곧 변하지 않는 질서고 원칙, 진리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변화할 때 어떻게 변화하는가? 만물이 시간 중심으로 변하는 이유는 거기에 대립물이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서로 대립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은 없고 새로운 미움이 오면 사랑도 변한다는 거예요. 사랑은 움직이는 거거든요. 모든 게.

그러니 이 세상은 뭐냐? 이 세상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생성이에요.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부딪치고 충돌하면서 투쟁과 갈등상태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 진리는 다음 진리가 올 때까지만 유보적인 진리이지, 그다음 진리 오면 진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여기서 나온 게 헤겔의 정반합이에요. 정(正)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세월 지나니까 반대(反對)되는 게 나오고 둘 사이에서 새로운 요소로 결합되면 그다음에 합(合)이 되면서 지난 정(正)을 내쫓는 새로운 정으로서 진리의 자리를 일단은 차지한다. 차지해도 그것은 임시적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시간을 따라서 늘 차이를 드러낸다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 이야기고 파르메니데스 이야기는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천국이 있다. 이게 플라톤 사상이에요.

반면에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처음 나온 게 영혼사상이에요.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시간인데 그 시간 속에서 모든 게 변한다. 그러면 인간의 영혼은 뭐냐? 인간의 영혼은 그때그때 변할 때마다 인식이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깊이 있게 신경 쓰다가 신경을 덜 쓰다가 이런 식으로 마치 풍선이나 심장이 늘어났다가 줄었다 하는 그것처럼 인간의 영혼이라 하는 것은 적절한 만큼 커졌다가 꺼지다가 그렇게 하는데 그게 뭐냐? 인간의 영혼이라는 겁니다.

들어보면 너무 일리 있죠. 말씀 듣고 은혜 받았습니다, 해놓고 돌아서면 없잖아요. 은혜 받을 때는 커졌다가 다시 쭈그러들죠. 영혼, 인간의 마음이 그렇다는 거예요. 파괴되고 생성되고 파괴되고 생성되고. 인간의 마음속에 세상을 분별하는 인식기관이 있는데 그 인식기관을 영혼이라 하자, 이 사람이 최초로 이야기한 겁니다.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 ‘전체는 로고스(logos)고 개별적인 것은 각자 개별적인 자기의 영혼이 감당하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닌, 들쑥날쑥한 나일뿐이다.’ 하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입니다.

그러니 인간들 입장에서는 양쪽 다 맞고 어느 한쪽도 버릴 수가 없죠. 전부 일리가 있죠. 여기서 바로 과학과 철학과 인문학이 다 쏟아져 나온 겁니다. 방금 제가 정리한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은 이렇게 두 개로 정리되는 겁니다.

여기다가 우리의 일상을 대입해보세요. 설명이 다 돼요. 설명이. “너 뭐 8시에 만나자 해놓고 8시 반 다 돼서 왔는데 어찌된 거야?” “그럴 수 있지, 뭐. 오다가 눈이 와서 차가 좀 지연된 걸. 내 마음대로 되나. 나도 몰라. 너 그것도 양해 못하나?” 그랬던 그 사람이 다음에 약속할 때 상대방이 30분 늦게 오니까 “내가 한번 늦게 왔었다고 나한테 지금 개기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너 성질 좀 누그러뜨리면 안돼? 난 한결같아. 곧이곧대로 이거하면 이거야.” 그래놓고는 다음에 어떤 사람들한테는 “사람은 뭐 그때그때 마음 다르고 그렇지 뭐.” 도대체… 변명 핑계 좋~다, 하여튼.

자, 여러분 지금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을 이야기하니까 파르메니데스는 천국까지 이야기하고 영원한 천국까지 이야기하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두 가지 이론이 딱 나오니까 여러분들이 굳이 성경 말씀 복음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필요해요, 필요 안해요? 이 두 개 아니까 성경을 대체할 것 같은 느낌 안 듭니까, 이 철학이? 성경 없어도 충분히 잘 살 것 같죠.

이제는 악마를 대비해봅시다. 이게 마귀가 만든 거거든요. 이게. 고린도후서 10장의 말씀처럼 세상의 모든 학문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지혜로 그걸 다 묶어버리고 파괴시켜버립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10:5). 그게 십자가에요.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할 때는 인간세계 철학에 대해서 안다는 뜻이거든요.

우리는 악마가 우리한테 어떤 사상을 심어줬는지 그것도 모르는 채 무조건 복음, 무조건 하늘나라, 성경말씀, 헬라어, 히브리어 원어 따지고. 백날 따져보세요. 아까 두 가지 철학에서 벗어납니까, 못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요. 그래놓고 자기는 복음은 안다, 이렇게 한다고요. 복음 아니고 다 철학인데. 철학에 불과한데 자기는 복음 알았대요. 복음 안 게 아니에요.

그러면 복음 아는 것과 철학 아는 것이 어떤 차이가 나느냐? 아까 제가 이야기할 때 시원, 기원, 뿌리라 했죠. 그 뿌리 너머로 가보자는 거예요. 뿌리 너머 예수님의 안목에서 이 악마의 사상을 어떻게 보느냐.

여러분, 제가 두 가지 문장을 쓸 테니까 어떻게 차이 나는지 보세요. ‘1.저기 있는 사람 (내가) 어떻게 처리하지?’ 악마에 속해있는 모든 인간의 심보가 바로 이 심보입니다. 저기 있는 사람 내가 어떻게 처리하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두 번째 문장은 좀 이따 하고요. ‘가난한 사람은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사람을 매정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가난한 사람이라 해도 되고 그냥 보통 사람이라 해도 돼요.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을 만난 순간 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감이 있잖아요. 그 기대감이 뭐냐 하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기 때문에 스스로 남들 사는 것처럼 사람답게 못 산다는 열등의식 같은 게 있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누굴 만나면 마음속으로 ‘제발 나를 도와주세요.’라고 하죠. ‘나를 도와주세요.’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만약에 안 도와주면 매정한 사람으로 규정하겠다는 거예요.

택배 1층부터 10층까지 왔다갔다 해도 가만있으면 좋은 사람이고 한소리 하게 되면 매정한 사람으로 본다. 너는 돈 벌어서 아파트 살지. 나는 아파트 못 살고 배달이나 하고 있다. 나 얼마나 불쌍하냐? 좀 봐줘. 뭡니까?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사람을 매정한 사람으로 이미 규정하고 들어가죠. 이 긴 말을 다음 문장으로 약간 짧게 정리할 수 있어요. ‘저기 있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처리하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 이 세상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내가 너보고 욕하게 하지 말라는 그런 장치, 시스템이 우리 안에 작동하고 있어요. 이게 마귀 아닙니까. 너는 무조건 내게 보탬이 되어야 되고 도와줘야 돼. 이 인간아.

누구든지 눈에 띄면 그래요. 저기 있는 거 어떻게 처리하지? 처리한다는 건 죽인다는 말도 되지만 안 도와줬을 때는 죽어버려라, 이런 뜻도 되거든요. 이게 무슨 마음입니까? 무슨 마음이죠? 악마의 심보죠.

왜 본인은 그런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까? 내 안에는 돈이 있기 때문에? 아니요. 내 목숨이 있기 때문에? 아니요. 아까 했죠.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자기 의. 하나님이 와도 나한테 욕하면 안된다. 왜? 이유는 없어. 무조건. 하나님의 심판은 나한테 욕하면 안돼. 나를 나무라면 안돼. 왜? 모르겠어. 이게 마귀의 마음이에요. 이런 마음으로 태어나서 가족을 만나든 누굴 만나든 누굴 만나면 저 사람을 어떻게 내가 구슬려서 내게 도움 되도록 빼먹을 수 있을까? 어? 안 해줘? 이 매정한 인간아.

자, 이게 악마가 있는 인간의 심보입니다. 이것을 감추면서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공부를 하는 거예요. 의사들이. 그리고 판사들이. 그리고 대기업의 모든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이 전부 이 마음을 다 갖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게 1번입니다. 2번 안 적었어요. 2번 적어볼까요? 기대되죠? 왜냐하면 1번 이게 전부니까. 세상에 이 문장 말고 다른 문장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죠.

‘2.당신은 왜 거기 있지? 참 신기하네.’ 집에 가니까 딸이 하나 있어요. 딸,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네가 왜 거기 있지? 억수로 신기하네. 거울 보니까 거울에 누가 비쳐요? 내가 비치죠. 내가 왜 여기 있지? 이게 복음 안에 사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저걸 어떻게 이용해먹지?’가 아니라 ‘나는 마땅히 있어야 돼’가 아니라, ‘내가 왜 있어야 되지?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거예요. 내가 있는 이유에 대해서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해줬어요. 그런데 있어. 그것도 늘 있는 게 아니에요. 늙으면 또 죽어요. 90 넘으면 돌아가셔야 돼요. 양양 가서 하시든지 뭐 함평에 계시든지… 그런데 내가 왜 있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왜 있는 거야.

이것은 뭐냐? 십자가 앞에서 내 존재를 일단 제거해버려요. 십자가 사건은 누굴 배제하기 때문에? 인간을 배제하기 때문에. 인간이 없는 거예요. 있다면 십자가 사건이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만 인간은 두 종류의 인간이 있는 거예요. 하나는 마귀에 속한 인간과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인간, 두 종류의 인간만 있어요.

그냥 내가 있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엉터리 같은 주장이에요. 내가 그냥 있는 것. 그런데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의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여기 있다’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부터. 내가 있는데 내가 한결 같으냐, 영원히 내가 있느냐 그것은 나중 문제에요. 내가 왜 있느냐에 대해 그들은 완전히 깜깜하게 몰라요.

욥도 몰랐어요. 내가 왜 있는지. 나중에는 알게 되죠. 있는 존재는 내가 아니고 하나님만 있어요. 하나님만 있기 때문에 나의 의는 애초부터 없었고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오케이에요.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돼요. 나의 의는 내가 따로 소유하거나 나한테 있으면 안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의에 누가 방해물이냐? 내가 따로 있고 따로 있는 내가 나의 의를 가질 때, 이게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욥에서. 이걸 말로만 했던 것이, 신약에 와서 욥은 하나의 예언이니까, 그 예언이 완성된 사건이 무슨 사건이겠어요?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되지, 내가 따로 있을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은사는 바로 그 해석입니다. 이제는 근원적이고 기원적인 것보다 더 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인간의 삶은, 성도의 삶이라 하는 것이 적당하죠, 성도의 삶은 낱개로 포장된 죽음 단위입니다. 하루하루가. 낱개로 포장된 것. 각설탕. 죽음을 맞이하는 거예요. 죽음을.

죽음인데 이 죽음은 진짜 죽음이에요. 인간은 어떻게 해도 진짜 죽음을 못 죽어요. 인간이 죽는 것은 가짜 죽음이에요. 진짜 죽음은 따로 있는 거예요. 보통 인간은 모르고 성도는 하루 산다는 것이 늘 진짜 죽음을 처리하는 또는 그걸 드러내는 매개체, 운반체, 그걸 보여주는 증인, 발현체, 그런 식의 삶이 성도의 삶이에요.

그러면 성도에게는 어떤 싸움이 있겠습니까? 가짜 죽음과 진짜 죽음, 예수님의 죽음만 진짜 죽음이에요,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진짜 죽음이거든요, 진짜 죽음의 그 차이를 매순간 그 틈새 사이에서 계속해서 내놓음으로써 십자가 사건을 날마다 새롭게 해석하는 그 일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10분 쉬어야 되겠죠.
 첨부파일 : 광주강의20240223a 고린도전서12장 3절(포괄 개념)-이 근호 목사.hwp (66.0K), Dow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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