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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5 08:13:04 조회 : 143         
광주강의20240223b 고린도전서 12장 3절(포괄 개념)-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219.251.37.139)
광주강의20240223b 고린도전서 12장 3절(포괄 개념)-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말은 인간이 죽었다는 것과 달라요. 인간은 아무리 죽어도 죽을 수 없어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깨어남’. 자고 깨어나고 아무리 해도 인간은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은사를 못 받으면 성령을 못 받으면 죽으나 사나 악마의 세계에서 그대로 갑니다.

지옥이라 하는 것은 바로 세상살이 그대로 이사 가는 거예요. 똑같은 의식으로 그대로 가는 게 지옥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지옥 가는 것은 순서상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요. 오히려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가 있는 천국에 간다는 그 이야기가 의외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어떻게 사람이 천국을 가? 그건 도달할 수 없는 곳이잖아요. 도달할 수 없는 곳.

그래서 인간세계란 것은 그냥 학습하는 거예요. 학습이란 말은 습관이란 말도 포함돼요. 인간세계는 계속해서 훈련하고 학습하고 노력하는 거예요. 아무리 해도 자기가 닳아지긴 닳아지지만 자기가 소거되거나 제거되진 않잖아요. 이게 얼마나 인간이 불행한 겁니까. 내가 안 사라져요.

그럼 사라지는 방법이 있어야 되겠죠. 은사에게 사라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라는 용액에 우리를 담그는 거예요. 말씀이라는 용액에 담기면 우리는 거기서 희석되죠. 희석되고 해리돼요. 갈기갈기 다 허물어지죠. 아까 전라도 말로 뭐라고 했습니까? 다시 이야기해보세요. 쪼글이, 삐글이, 히글이, 뱅뱅글이. 이게 연체동물이라는 말이에요. 모든 게 흐물해져서 어떤 구체성을 따로 챙길 수가 없는 거예요.

뭐 찌글이, 삐글이 그것보다도 약간 고상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개별 개념에서 포괄 개념으로’. 좀더 고상해보이죠. 예수님만이 포괄 개념, 죽음이라는 포괄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사가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내려오게 되면 개별 개념, 인간은 죽는다는 개념에 뭐가 덮치는가?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예수님이 갖고 있는 포괄 개념의 죽음이 덮쳐버리죠. 그게 바로 용액이에요. 덮쳐버려요.

예수님이 죽으셨다. 그러면 그 앞에서 나의 개별적 죽음은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내가 죽은 것이 의미 없다면 내가 사는 것도 의미 없어요. 어차피 살아봤자 죽은 거니까. 사는 것, 죽는 것이 구분이 안돼요. 그게 그거니까.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갖고 있던 영이거든요, 성령은. 성령이 우리에게 은사, 선물로 주어지면 개별적 개념을 갖고 있던 자가 포괄적 개념으로 이게 드디어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죽음이라는 것만 개별적 개념이 아니에요. 인간이 철학이나 종교를 통해서 갖고 있던 개념들이 있잖아요. 그 모든 것은 전제가 ‘내가 잘 되어야 되고 나는 의로워야 되고 누가 뭐래도 나는 천국 가야돼.’라는 이 개별적 욕망이 갖고 있던 개별적 욕망과 관련되어 있던 모든 것들이 다 개별 개념으로 들통 나요. 천국이 어떠니 율법이 어떠니 사랑이 어떠니 이 모든 것도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나 잘되기 위한 조치라는 사실이 발각되는 거죠.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들은 포괄 개념이에요. 누굴 위한 겁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성경이 주어지는 겁니다. 여러분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성경 한번 찾아보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여기 한번 보세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누구니. 자, ‘산다’의 개별 개념은 뭐냐? 내가 숨 쉬고 살아야 돼, 이게 사는 거예요. 그런데 삶의 포괄 개념은 누가 사는 거예요? 주님의 생명이 삶이에요. 생명이. 내 삶은 개별 개념이에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생명으로 살고 있으니’ 그다음에 뭡니까? 죽는 것도 주님한테 유익하기 때문에 살려주는 거예요. 죽음도 주님의 죽음이 현장화 되는 데에 나를 수단으로 사용해주셨다는 것이 영광이다 이 말입니다. 그게 감사할 일이다 이 말이죠.

그런 관점으로 보니까 아까 첫째 시간 끝에 했던 두 번째 문장, ‘저 인간 왜 살아있지?’ 또 자기가 자신보고 ‘나는 왜 살아있지?’ 아, 내가 살아있는 것은 내가 산 게 아니고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내가 죽는 것이 그리스도께 유익되라고 나를 죽이는구나,라는 그런 기쁨으로 사는 거예요. 은사를 안 받은 사람한테는 신화적입니다. 무슨 이상한 소리하고 있네, 이런 이야기할 거예요. 그런데 그게 성경인데 어떻게 합니까. 이게 성경이에요.

은사를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개별 개념과 포괄 개념. 포괄 개념은 당연히 예수님께서만 아시고 그걸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은사로 주신 개념이 포괄 개념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이 세상은 전부다 동그라미에요. 이 동그라미가 공동묘지에요. 이 세상이 공동묘지입니다. 공동묘지고, 다른 한쪽은 천국이에요. 새 예루살렘 성. 옛날 성들은 그냥 성채가 아니고 요새 기능을 했기 때문에 망루가 있어요. 천국 예루살렘과 공동묘지 사이로 하늘에서 은사가 주어지는 거예요. 은사가 주어져서 공동묘지에 죽을 자를 천국의 백성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럼 저 공동묘지에 죽는 사람은 어떤 개념으로 삽니까? 개별 개념이죠. 어떤 단어, 어떤 성경말씀이 나를 살릴까.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나의 의를, 내가 이렇게 의롭고 훌륭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알아주실까’라는 그 목적 하나 붙들고 심지어 자살할지라도 나는 못났다, 나는 죽어 마땅하다 이런 거 없어요. 자살해도 끝까지 나는 나한테 정당하다 그거는 못 놓치고 있어요. 그건 마귀가 줬기 때문에.

마귀가 회개합니까? 어제 누가 문자로 그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마귀도 기도합니까?’ 그래서 답변을 이렇게 했어요. ‘피곤할 땐 좀 쉬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 자체를 분석하게 되면 ‘하루하루 사는 게 왜 힘듭니까’ 그런 뜻이에요. 괜히 다른 개별 개념들 동원시켜봤자 껍데기 포장지 다 뜯어내게 되면 ‘사는 게 왜 내 맘대로 안됩니까’ 이런 뜻이에요. 푹 쉬시라 하면 돼요.

자, 여기서 성경해석을 할 때 아까 첫 시간에 해석 이야기했지만, 개별 개념에 있는 자를 이렇게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넣어주는데, 은사가 왔다. 이 은사가 공동묘지에서는 어떤 작용을 하고 천국에서는 어떤 작용을 하느냐? 이걸 이번 시간에 알아야 돼요. 정리가 되어야 됩니다.

은사가 십자가에서 나오죠. 그럼 개별 개념은 결코 포괄 개념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저쪽 인간세계에서는 공동묘지에서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는 안 믿죠. 제자들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니까 제자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유령이라 했죠. 유령. 유령의 특징이 비(非)활성적 존재에요.

비활성적 존재라고 유령을 인간들이 그렇게 평하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에요. 유령은 내 마음먹은 대로 내가 다룰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이 이게 짜증나는 거예요. 아까 문자 보낸 사람도 짜증나서 그런 거예요. 짜증이 나서. 왜 세상은 내가 시키는 대로 활성화되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세상은 왜 너 마음대로 노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은사가 왔다는 말은 우리가 얼마나 악마적이고 마귀적인가 하는 그 적나라함이 그대로 노출되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에 담긴 해석이에요.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그 발언을 성도로 하여금 매일같이 끄집어내고 쏟아내게 만들어버려요.

용액에 뭘 하나 담그면 담긴 물질의 본색이 엄청난 색깔로 용액에 따라 막 해리되면서 해체되면서 풀어져 나오잖아요. 주님께서 은사를 줘버리면 그때부터 우리가 꼬깃꼬깃 숨겨놓았던 나의 본색이 주님 주신 은사와 더불어서 음흉한, 침침한 색깔, 더러운 죄의 색깔로 이게 마구마구 번져 나온다 이 말이죠. 번져 나오는 거예요. 그런 현상에 대해서 그걸 굉장히 고맙게 여겨야 됩니다.

그런데 은사를 준 것은 그렇게 시작하면서 결과는 뭐냐? 단 하나의 죽음이에요. 포괄 개념의 죽음인 단 하나의 죽음을 위해서 너희는 이 땅에 태어났다는 거예요. 단 하나의 죽음이에요.

삶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죽음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살아봤자 죽음밖에 없기 때문에 죽음에 갇힌 입장에서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망상에 해당돼요. 살아봤자 결국 죽잖아요. 죽음만이 유일하게 현실이지, 살아있다는 것은 비현실이에요. 그건 거짓말입니다.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죽어가고 있는 게 정답이지, 살아있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덕담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자꾸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자, 그럼 이 용액이 어디 있느냐? 로마서 10장 18절. 17절부터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20절에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21절에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에 말씀이 온 땅에 퍼졌다는 이 대목에다가 완전히 다 갖다 투입을 합니다. 특히 20절에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이 말씀을 하셨는데 그러나 오늘날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는, 언제? 언제 이런 일이 있느냐, 언제. 지금이 이사야 65장 이 말씀 그대로다 하는 말이 도무지 믿기질 않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 해석을 어떻게 했단 말입니까? 나 하나 지키기 위한 해석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해석하고 이게 격이 안 맞는 거예요. 맞질 않는 거예요. 말씀이 와서 덮쳐야 되는데 나는 내 것만 챙기면 오케이에요. 나만 잘 되면 그만이에요.

하나의 문장을 쓰겠습니다. ‘돈이 있으니 웃음꽃이 피어난다.’ 보세요. 뭔 뜻입니까? 아무리 슬프고 어렵더라도 돈, 그것도 많은 돈이 있으니까 그 돈 앞에 있던 모든 집단, 무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활짝 웃음꽃이 피죠. 어디 말씀 때문에 그래요? 그럼 한번 바꿔봅시다. 돈 대신에 말씀 있는 곳에 웃음꽃이 핍니까? 아니죠.

이 얼마나 인간은 이 땅에서 개별적이냐 이 말이죠. 자기 사정 외에는 알고 싶지 않아요. 자기 사정 외에는. 전체를 보는 안목이 없어요. 나는 유령이 되기 싫은 거예요. 나는 늘 활성체로 내 마음대로 내 선택대로 내가 결정한 대로 일이 착착 되는 그 재미로 나는 살고 싶은 거예요. 그 즐거움으로. 그게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입니다. 탁구를 쳐도 한국이 덴마크를 이겨야 기분 좋아요. 바둑을 둬도 신진서가 계속 우승을 해야 기분이 좋아요. 하여튼 내가 좋아하는 대로 움직일 때 우리는 또 하루를 살 수 있는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이라는 용액은 너무나 단호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두 구절을 이제부터 설명해야 돼요. 설명이 상당히 복잡합니다만 여러분 같이 봅시다. 전도서 1장 1-2절,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절,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다 했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아까 첫 번째 공부했던 것,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을 가지고 1장 2절을 딱 대비해보세요. 같아 보입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어떤 점이 다른가를 생각해봐야 돼요.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철학이 어느 수준까지 올라갔는가 보세요. ‘세상은 결국 (언제나) 선하고 정의롭다.’ 이것을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의 세계라 했어요. 이걸 진리의 세계라고 본 거예요. 세상은 결국 선하고 정의롭다고 이야기했어요. 이게 맞는 말입니까? 우리가 철학이라든지 누가 했다 빼놓고 이야기해보면 굉장히 복음적으로 들리죠. 복음적으로.

여기 뭐가 문제냐 하면, 강의 들어와서 이제 처음으로 진실이 밝혀집니다. ‘은사는 나를 지목하고 나를 겨냥해서 찾아온다.’ 소위 복음을 안다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이걸 잊어버려요. 매일같이. ‘세상은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합니까?’ 지금 뭐를 빠뜨린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오는 것을 파악하기를 내가 원했던 거예요. 뭐가 빠졌죠? 너 말이야. 너! 말씀이 나한테 바늘로 찌르듯이 온다는 사실을 놓친 거예요. 나에게. 세상 참 헛되고 헛돼. 아니야! 너. 너. 너 이야기야!

세상은 결국 선하고 정의롭다. 뭐 좀 멋있어 보이고 세상에 대해 제대로 알았어요? 그 제대로 안 거기를 향하여 은사가 나한테 오는 겁니다. 은사가 아까 무슨 은사라 했어요? 무슨 사건이요? 십자가 사건이요. 십자가 사건은 어떻게 내가 십자가 질 테니까 나를 믿어라,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믿어라,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나에게 찾아와요.

그건 나를 녹여버리는 하나의 용액이에요. 무서운 용액이에요. 내 개별적 죽음이 무서워 벌벌 떨 때, ‘너는 벌써 죽은 거야!’ 하고 포괄 죽음이 나에게 찾아온 거예요. 전도서나 이 성경말씀은 신약의 십자가 말씀과 연계되어서 솔로몬에게 계시로 찾아온 겁니다.

세상은 결국 선하고 정의롭다, 하나님의 주권론, 개혁주의 신학 이거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개혁주의 신학을 이야기하고 세상은 결국 승리하고 주님은 승리합니다, 그 이야기할 때 주님은, 내가 승리한다 했지? 승리의 맛을 한번 보여줘?

우리가 어떤 성경에 있는 용어를 다 동원하고 그럴싸하게 어떤 경우라도 이건 칭찬받아야 돼, 자신만만한 그 말씀 속에서도 주께서는 경상도 말로 치아라! 치아뿌라! 전라도 경상도 다 나온다, 내가 찾아갈 거야. 네가 발언하지 마. 내가 찾아가서, 상어가 낚싯바늘에 낚이면 상어가 굉장히 아프겠죠, 아픔으로 말씀이 우리를 꿰뚫어 입을 딱 낚시 바늘로 걸듯이 꼼짝 마라는 식으로 먼저 찾아들죠.

그게 바로 은사입니다. 그래서 은사는 비소유성이에요. 피동성이에요. 말려든 거예요. 걸려든 거예요. 저는 어떻게 됩니까? 이런 것은 십자가가 도저히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그러면 실제로 그 은사에 대해서 언급한 게 있느냐? 있고말고요. 당연히 있죠. 고린도전서 12장, 이제부터 좀 복잡합니다. 12장 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이렇게 되어 있죠.

이 말씀부터도 벌써 우리에게는 장벽처럼 작용하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예 관심이 없기 때문에요. 예수님을 저주하려면요,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작살내야 저주가 돼요. 그냥 나는 나대로 살고 주님은 저대로 일할 땐 저주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저주가 나타나지 않아요.

흔히 일반 교인들은 제발 좀 편하고 조용하고 행복하게 살길 원하지, 예수님하고 다투고 이거 취미 아니거든요. 그냥 편하게 조용하게 약간은 여유 있게, 약간, 약간 뭐 한 20억 정도 약간은 여유 있게, 몸도 약간 건강하게 병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도 안 아프고 이런 거 있잖아요, 날씨 추울 때 관절도 안 시리고 이런 거요, 지금도 20대처럼 팔팔 날아다니고 약간은 건강하고. 그냥 나 챙기는 거, 온통 24시간 나 챙기는 거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예수님 그 좋은 분을 왜 저주해요. 저주 안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저주를 안 하면 뭐가 안 됩니까? 은사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잖아요. 이래도 저주 안해? 하고 우리를 조집니다. 성령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은 참으로 저주해야 될 자라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버려요. 그걸 비로소 느끼게 되면 이제 와서 느끼는 게 아니고 원래부터 잠복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해요. 내 안에 여차하면 예수님이라도 나는 저주하겠다는 그런 괴물을 처음 태어날 때부터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평소에 그게 안 들키기 위해서 믿음생활, 신앙생활, 복음생활 온갖 거 다 한 거예요. 그건 가짜 내 모습인데 진짜 내 모습은 저주를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제자 중에 대표로 저주한 사람이 누구지요? 베드로. 세 번씩이나 저주해서 CCTV 걸려가지고 책으로 나왔어요. 성경책. 그런 우사가 없어요. 뭐 간음했다, 살인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노골적으로 저주를 한 거예요. 베드로란 그 분이 변화산에서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가 좋다고 했던 사람이에요.

헤라클레이토스에요. 세상에 안 변한 게 없어요. 다 변해.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가요? 세상 그렇지 뭐. 세상 다 변하는 거지. 세상은 변하지만, 세상이 변한다고 여기는 나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파르메니데스. 둘다 짝이라. 둘다 다 필요해요. 인간의 존재성을 위해서는 다 필요해요. 그래서 이 핑계대면 저리로 도망가고 저거하면 이리로 도망가고.

예수님에게 두 강도가 있었잖아요. 둘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한 강도가 처음부터 예수님보고 저를 생각해 달라 하지 않았어요. 둘다 그때 강도들도 같이 욕하더라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에. 같이. (27:44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은사를 준 이유는, 은사는 비소유성이죠, 아주 깊이 있게 생각해보세요. 은사가 없다는 말은, 소유성으로 산다. 은사 없는 특징이 소유성이에요. 소유성은 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내가 행위에 나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은사가 없는데 은사가 주어진다는 것은 이 은사가 인간의 은사 없음을 십자가가 공격하는 거예요. ‘너는 은사 없지? 너는 너 원하는 대로 살고 싶지?’라고 말씀이라는 용액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인간을 지목해왔다는 겁니다. 온 세상에.

어떤 사람은 ‘복음이 다 퍼지지도 않았는데.’ 아니에요! 지금 온 세상이라 하는 것은 단위별로 온 세상이 계속 반복되고 있어요. 이거 참 어려운데… 판케이크를 생각하면 돼요. 판케이크. 전에 서울강의에서 했는데 네 번째 짐승, 마지막 짐승이 로마잖아요. 로마가 마지막 짐승입니다. 로마 때 십자가 사건이죠.

그러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시간성으로 끝났어요. 하나님의 일은 언어로 표현 못해요. 그냥 일곱 때가 아니고 일곱 이레에요. 한 때, 두 때, 반 때에요. 이거는 인간이 알고 있는 시간에 대한 단어로서 하나님의 일, 예수님의 일을 곧이곧대로 그대로 표현 못합니다. 로마가 끝났어요. 로마가 끝나면서 성경도 끝나요. 요한계시록으로 끝나요.

그다음 그 뒤에 시대는 뭐냐? 이걸 반복하는 겁니다.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은 마지막 때까지 계속해서 있어야 되고 영원히 천국 가도 십자가 사건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로마까지 있었던 인류의 역사를 그 다음 시대에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는 거예요.

그럼 각 시대를 A, B, C, D라 합시다. 아무 때나 끄집어내서 C를 끄집어내면 이 시대는 두 가지로 되어 있어요. 하나는 시간과 하나는 어려운 단어로 묵시, 묵시는 너무 어려우니까 영적세계, 양쪽 다 중첩이 되어 있는 거예요. 인간은 어디 있겠어요? 시간 속에 있겠죠. 왜 세상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가? 하나님의 은사가 주어지면 아, 내 마음대로 안 되어야 다 이루어진 세상이고 이것이 바로 이미 천국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적용되는 원리는 로마 때까지 적용되는 이 성경이 성령에 의해서 되풀이해서 반복되어 이루어지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말씀이 새로운 용액으로서, 또 용액으로서, 또 용액으로서 그 시대에 맞는 용액이 주어진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환경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라는 환경의 이어짐이 아니라, 새 언약의 반복을 위하여 환경이 그때마다 만들어진다는 거예요. 그때마다 환경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적용은 이미 완료된 성경말씀, 말씀 외에 나가면 안돼요, 성경말씀이 그 시대마다 딱딱 집어넣어지는 거예요. 그 시대마다.

컴퓨터를 공장에서 만들어내죠. 그 컴퓨터에 있는 운용체계는 어떻습니까? 이미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나온 그걸 그냥 집어넣으면 되잖아요. 윈도우에 그냥 집어넣으면 되잖아요. 성경이 윈도우고 인간의 출생은, 애 계속 낳잖아요, 낳으면 거기다가 똑같은 말씀가지고 집어넣는 거예요. 말씀은 이미 완료되었어요. 더 보태거나 빼면 안돼요. 사도가 죽음으로써 말씀도 완료되었다. 말씀은 용액으로서 집어넣는다니까요. 그 말씀은 십자가 사건 안에 포함되어 있고요.

그러니까 어느 시대에 태어났든 간에 하늘나라는 늘 가까운 입장에 있습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그게 어느 시대든, 2220년도든 2250년도든 관계없이 그 시대는 늘 하늘나라와 맞닿아 있는 상태에요.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의 효과입니다.

이 정도 알았으니까 질문할게요.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습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순신 장군. 요새 이순신 장군보다 더 잘나가는 강감찬 장군으로 갑시다. 고려 장수로 거란을 크게 이겼던 강감찬, 나이 많지만 느즈막하게 군인이 되어 설쳤던 그 사람 구원받습니까? 당연히 구원 못 받죠. 자, 구원 못 받는 이유가 뭘까요? 성경을 거기에 동원시킵시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자, 이방인의 특징은 뭐가 없기 때문에? 언약이 없기 때문에. 언약을 이스라엘에 준 것은 하나님의 은사에요. 선물이죠. 결국 강감찬은 선물이 없었다. 어떤 선물? 내가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이것은 이미 죽은 것이라는 것을 아는 선물이 없었습니다.

‘강감찬 장군이 구원 못 받으면 어떻게 해. 구원 못 받으면 안되잖아. 세종대왕, 이순신 구원 못 받으면 안되잖아.’ 이러지 말고 이 강의 내용대로라면 강감찬 장군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강감찬 이전에 단군할아버지 때 강감찬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죠. 왜 고려 때 강감찬이 생겼습니까? 그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마치 뭐 세종대왕이 창세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지 마세요. 언약을 위해서 새롭게 만들어낸 거예요. 언약이 없는 자는 은사가 없는 자는 지옥 갈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제 뭐 깔끔하게 정리되었습니까? 뭐 나 혼자 깔끔한가. 정리됩니까? 이거 정리됐으면 응용문제 들어갑니다. 처조카는 왜 교회 안 나가죠? 시누이는 왜 교회 안 나가죠? 아까 첫째 시간과 한번 연관시켜서 생각해보세요. 왜 안 나갑니까? 바로 십자가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서 교회 안 가야 돼요. 교회가면 안돼요. 여러분 시누이 모르니까 하는 거예요. 알고는 이 소리 못하잖아요, 실례되니까. 그 시누이가 뭘 보여줍니까? 자기 의를 보여주겠죠. 박수치면 되는 거예요. 박수치면. 참, 말 더 심하게 해서 왜 아들은 교회 안 나갑니까, 하고 싶은데 각자에게 너무 큰 실례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은 뭐냐? 인간에게는 마귀가 심어준 자기 의가 있다. 그런 경우를 보여주는 존재가 등장해야 십자가 사건이 살아요. 제가 예를 든 거니까 교회 안 나가고 복음을 모르는 그런 시누이가 있다는 것은 성도 입장에서는 올케 입장에서는 주께 영광 돌리고 감사해야 되죠. 나는 지옥을 보았다. 나 살아생전에 지옥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거요. 내가 태어난 게 다 이때를 위함입니다. 그게 바로 은사가 주는 자유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불교를 봅시다. 나는 부처님 믿어서 천당 가는데 세상에 욕심쟁이 우리 엄마는 극락에 없으니 내가 천국에 와도 마음이 기쁘질 않네. 무슨 천국이 마음 안 기쁜 천국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나 혼자 구원받으니까 섭섭~한 마음이 있어가지고 부처님께 기도를 하죠. 부처님, 한번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이라 해도 되고요. 천주님, 마리아님 해도 돼요. 똑같으니까. 교리가 똑같아요. 그래, 한번 기회 줄게. 파뿌리 예를 너무 많이 해서 미안해가지고 예로 더 못하겠다마는 또 해먹자, 파뿌리 내미니까 엄마가 이제 아들 빽으로 올라오는데 보니까 이상한 한 놈 또 달라붙은 거 발로 차다가 파뿌리 끊어져서 둘다 다 죽었다는 이야기잖아요.

도대체 그 의도가 뭐에요? 의도가. 나를 잃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종교란 것은 나를 잃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어떤 경우에 그래요? 만약에 그래서 우리 시누이 지옥 보내고 우리 엄마 지옥 보내고 자식 지옥 보내면 우리 속에서 드디어 나타나는 건 뭡니까? 누굴 저주해요? 누굴 저주합니까? 주님을 저주하죠. 이거 무릎을 한번 쳐야 돼.

모든 이 세상의 움직임이 예수님을 저주케 하는 상황들로 우리에게 들이닥칩니다. 들이닥쳐요. ‘내 중보기도는 왜 응답 안 해주십니까. 나 혼자 구원받아서 나 혼자 천당 가면 재미지겠다, 정말. 나 지금 속상해 미치겠어.’ 이런 마음. 그게 저주에요. 그게 저주입니다.

그래서 12장 3절에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결국 이건 뭐냐 하면 믿음이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에요. 믿음은 해석입니다. 결과적인 해석이에요. 믿음이라는 해석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왜냐하면 저주해야 될 예수님을 찬양하고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런 조치를 내려주신, 어떤 조치? 시누이 지옥 가는 조치, 이런 조치를 내려주신 주님께 고맙다고 하는 것은 이게 내가 의도한 거예요, 의도하지 않은 거예요? 내가 의도하지 않았죠. 그걸 믿음이라 하는 거예요. 그걸 믿음이라 하고 성경에서 다른 말로 하면 선물이고 그게 뭐냐? 은혜고 그게 은사라는 겁니다. 은사.

이 대목에서 갑자기 제가 예상 못한…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이 가사 여러분 아마 들어본 적 있을 거예요. 조금만 하겠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이거 미친 거예요. 이럴 수가 없어요.)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이게 말이 안돼. 추임새입니다, 이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이건 말도 안되죠. 시기를 왜 안해요. 옆집에 집 팔려보세요. 시기나지.)

이제 이해되죠? 이제 됐습니다. 최성욱, 최안순이 부른 노래에요. 성경을 지키면 안된다니까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을 저주해야 돼요. 화를 내야 된다고요. 지키지도 못할 말씀을 왜 주고 합치될 가능성도 없는 걸 왜 주셨습니까? 그게 은사의 시작이에요. 은혜의 시작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뭐라고 하느냐?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를 주라 할 사람이 없다. 예수님이 주(主)거든요. 왕이거든요. 왕. 세상에 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를 왕으로 섬깁니까. 제가 대구 강의 때도 했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에요. 오야에요. 오야 마음대로에요. 누구 시누이 왜 지옥 보내냐는 이런 소리, 감히 왕 앞에서는 그런 소리 나올 수가 없어요.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모든 것이 왕으로부터 와서 이것을 왕에게 드릴 마음을 허락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것을 도로 아낌없이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역대상 29장).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21절,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 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라고 되어 있죠.

읽었던 본문 23절에서 ‘아름답지 못한 지체’라는 단어가 나오죠. 이 단어 일단 우리한테 오게 되면 포괄 개념입니까, 개별 개념입니까? 개별 개념이에요.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것을 우리는 분별하려고 해요. 왜? 자기 수준을 알기 위해서, 자기를 평가하기 위해서, 자기를 채점하기 위해서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알고 있어요.

알고 있는 걸 보고 누가 옵니까? 주님께서는 아름답지 못한 경우도 더 아름답다는 것으로 딱 왔을 때 우리에게는 반발이 일어나는 거예요. 왜 나는 발입니까? 왜 냄새나는 발입니까? 왜 근사한 눈은 아닙니까? 왜 저 숨어있는 발입니까? 발도 괜찮아요. 왜 발가락입니까, 이런 거요.

12장 12절 봅시다. 이제 본격적으로 좀 어려운 것 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이 굉장히 많아요. 이게 어려워서. 이게 정말 어려워요. 몸의 개념이 어려워요. 어렵지만 간편하게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사건은 몸으로 표현된다.’ 이 한마디에요. 사건은 몸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예수님 몸으로 나타나요. 예수님 몸이 아닌 하나님은 없습니다. 예수님 몸을 허락한 하나님이 하나님이에요. 다른 추상적인 신은 인간의 개별 개념이 만든 신 개념이에요. 진짜 하나님은 말씀이 몸으로 오신 거예요. 몸으로 왔는데 그럼 하나님 뜻은 뭐냐? 몸이 어떻게 되었어요? 몸은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죠.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 외에 다른 하나님 뜻은 없습니다.

내가 잘 되고 몸이 건강하고 이건 뜻이 아니에요. 뜻은 하나의 죽음에 모든 것이 모집되어 있어요. 은사는 하나의 죽음만 이야기하기 위해서 찾아오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것은 너 잘해라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너는 이미 죄인이라는 것, 네가 하나님을 죽인 하나님 원수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것이 바로 은사의 내용이에요.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어림도 없어요. 말씀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그냥 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고, 말씀대로 못 사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들킨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씩씩거리고 이런 예수 같으면 난 안 믿는다고 악마의 본색을 뱀의 혀를 나불거리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로 은사의 시작이라니까요. 말씀의 능력의 시작이에요.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뭐를 느끼느냐 하면 다 좋은 말인데 이런 식으로는 애 키우고 못 산다는 거예요. 다 맞는 말이고 좋은 말인데 이걸 지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거 내가 모를 바가 아닌데 아는데 그러면 우리는 생존이 위태롭다는 거예요. 이렇게는 못 산다는 거예요. 오해를 해도 무지무지 오해한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지키란 것이 아니고 바로 그 발언, 그 고백을 누가 유도했느냐 하는 겁니다. 누가 그 고백을 유도했냐는 거예요. 누가 그걸 유도했느냔 말이죠. 아이, 난 이젠 성경 안 본다, 이렇게 삐질 때, 누가 그렇게 삐짐-을 만들었냐. 누가 왔을 때? 소리가 이미 온 땅에 다 퍼진 거예요.

각 A, B, C, D 온 세대마다 이미 십자가 죽고 난 뒤에 성령께서 강감찬이든 세종대왕이든 오늘날 푸틴이든 관계없이 모든 각 나라의 환경에 십자가에서 나온 사태가 모두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두다 한통속이에요. 각 시대에 구원할 사람들을 다 그런 식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나의 본성을 알았고 나는 죄인이구나. 그런데 아까 믿음이란 뭡니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내 소유된 행함이나 이런 걸 개입 안했는데도 일어나버린 행위, 이게 바로 주님의 은사입니다. 은혜로 그냥 죄 사함 받잖아요. 그렇게 될 경우에 남아있는 게 뭐냐?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서 13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이제 이해되죠. 예수님의 몸은 하나이지만 우리는 그 몸을 쳐다보는 몸들, 지체들이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아담과 하와가 두 사람이지만 처음에 만들어졌을 때 우리 둘이 한 몸이라 하죠. 그 한 몸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유지하는 조건 하에 한 몸이에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걸 신약에서는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오늘 이 책 안 봤는데요. 이 관점에서 어디까지 나갔느냐 하면 제가 이렇게 보니까 p.43까지 했어요. 다음에 올 때는 p.44부터 해요. p.43까지 이 이야기가 계속 가는 거예요. p.41 한번 봅시다.【참된 교회의 9가지 특징】되어 있는데요.

유튜브 보면 어떤 목사가 설교하는데 ‘이런 치과는 가지 마세요’, ‘이런 한의원 가지 마세요’ 하는 거 있잖아요. 유튜브 조회수 뜰려고. 그 목사는 뭐냐? ‘이런 교회는 절대 가지 마세요’ 하면서 내세우는 조건이 뭐냐? ‘예배당 자랑하는 교회, 자기 교회에 부자들, 유력한 사람들 많이 참석한다고 자랑하는 교회, 자기 교회가 헌금 많이 한다고 자랑하는 교회, 자기 교회가 일 많이 한다고 자랑하는 교회, 그런 교회는 절대로 가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자기 자신의 힘을 자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희생적인 어린 양을 보호하지, 힘 있는 교회를 자랑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라고 유튜브가 나왔어요.

그 목사 설교의 문제점이 뭡니까? 아, 이거 너무 어려운 문제 냈네. 목사는 복음을 이야기해야지, 교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교회 이야기하는 자체가 교회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 이야기 들으면 사람들이 골라 가겠죠. 그러니까 아까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똑같은 거예요. 내가 나를 건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무슨 짓도 다 하는 것이 바로 마귀가 시킨 인간의 특징이잖아요.

아까 믿음이 뭐라고 했습니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나는 왜 살아있는 거예요?’ 이 질문이지, ‘어떻게 하면 바른 인간으로 유지하겠습니까?’ 그건 구약의 욥이 오해한 거예요. 욥이 오해를 하더라도 이미 그건 하나의 시작이고 결국은 욥처럼 오해하기 시작한 그것도 주께서 은사를 퍼부어주고 있는 시작인 줄 아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 몸은 없고 주의 몸을 지향하고 바라봐야 될 몸인데 말씀이 주는 과정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쁨으로 한 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광주강의20240223b 고린도전서12장 3절(포괄 개념)-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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