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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1 23:08:37 조회 : 113         
33강-스가랴 12장 1-6절(언약의 속) 240228 - 이 근호 목사 이름 : 정대은(IP:119.195.109.140)
33강-스가랴 12장 1-6절(언약의 속) 240228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2장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치리라,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아보고 모든 국민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유다의 두목들이 심중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거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찌라, 그 날에 내가 유다 두목들로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국민을 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리라” 아멘.

여기에 예루살렘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시고 그 예루살렘에게 이 말씀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관심을 그곳에 두도록 유도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온 나라, 사면에 모든 백성들,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많고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목하는 하나님의 주 관심사는 예루살렘에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천하만국과 그다음에 예루살렘,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는 사실을 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천하만국과 예루살렘을 대비시켜서 예루살렘의 가치를 드러내는 용도로서 천하만국에 어떤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그 천하만국이 예루살렘과 관련해서 멸망하는, 망해버리는 그들이 크게 당해버리고 벌 받는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 일을 그런 식으로 이끌어 가시겠다 는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계시하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이고 싶어하는 생각이 훅 드느냐하면, 예루살렘에 내가 있어서 예루살렘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로 이어지기를 이 말씀을 보는 가운데서 은근히 희망하게 될 것입니다. 최종승자가 예루살렘이니까. 우리 자신도 예루살렘의 일부가 되어서 그 승리를 실컷 맛 보고 싶은거에요. 마지막 웃는 자가 최후의 승자잖아요?

그래서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그다음부터는 이 예루살렘의 한 주민으로서 내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최후의 승자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에 어떻게 하면 내가 일원이 될 수 있는가? 그런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전의 말씀을 우리가 생각 안 하고 이 대목을 통해서 우리 이득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기는데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은 망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이방 나라 가운데 누가 이기는가? 이방 나라가 이깁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철저하게 폐허가 됩니다. 그쪽 거민들은 없어요. 주민들도 없고 거민들도 없고 거민들은 이미 예루살렘이 파멸하고 난 뒤에 전혀 하나님과 상관없는 주민들이 거기로 이주해서 살게 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없앨려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은 뭐냐 하면 성전이 있는 곳이고요, 이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였던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다는 것은 나는 너희 인간들과 만날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뭐 하나님을 만나야 부탁을 하고 할 건데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만나게 해주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은근히 예루살렘의 일원이 되어서 멋진 승리가 내 승리로 이어지기를 고대하는 사람한테는 이 성경 말씀은 다 헛꿈이 되는 겁니다. 소용없는 겁니다.

인간을 배제하고 인간의 자기의 욕구 같은 것을 배제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단박에 떠오르는 생각은 뭐냐? 이 하나님의 모든 계시의 말씀은 사람에게 주는 말씀이 아니고 사람 같지도 않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진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이 스가랴 12장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감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 빼고 예수님에게 이 말씀이 그대로 다 주어지는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나 빼고 예수님에게 주어졌다는 이 사실을 이제는 도리어 감사하는 심정을 가져야 돼요. 하나님이 하신 좋은 일에 은근히 발하나 집어넣고 “나도 그 혜택을 누리고 싶어요.” 쓱 발 집어넣으면, 주님께서 “그 발 안 빼? 발 안 빼? 너 배제당했어.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니가 왜 거기 끼어들어? 발 빼.” 이것은 예수님하고 하나님 사이의 이루어질 일입니다.

여기 있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벌어질 최후의 승리. 최후의 승리는 어디를 근거로 하느냐 하면 실제로 역사 속에 있었던 예루살렘, 이스라엘, 유다 그 모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망했다는 터 위에서 이 말씀이 성취를 봅니다. 예루살렘이 망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믿는 자들이 실은 하나님을 믿을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완전히 까발리고 난 뒤에, 멸망 당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이 폭로되고 난 뒤에 그 폐허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이 계시는 이루어지는 겁니다.

은근히 우리가 거기다가 발 집어넣고 손 집어넣고 할수 있는 그런 처지가 못 되지요. 그러면 우리가 질문을 다시 해야 돼요. “나는 어떻게 승리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라고 나를 거기다 집어넣지 말고 “장차 오실 진짜 예수님은 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다 성취를 해냅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저는요?” 라고 묻지 않는 그 태도 자체에서 주님에게 이루어졌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의 전부라고 저는 인정합니다.

수긍하겠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일이 진실로 우리가 몰랐던, 어떤 인간도 몰랐던 하나님 일의 전부라는 사실을 흔쾌히 저는 동의하겠습니다. 이러한 태도 속에서 그 사람은 더는 자기 자신을 안 믿게 되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다시 성경을 한번 보는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스토리가 보여요. 스토리가. 인간 나라의 스토리보다 이 본문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어진 그 스토리가 어떤 스토리로 이어졌는가를 보여 주는겁니다.

첫 번째는 잔, 두 번째는 돌, 세 번째는 불, 네 번째는 죽음, 다섯 번째는 시온. 2절에 잔 나와요. 술 잔, 사람의 정신을 비틀거리게 만드는 취하게 만드는 잔. 두 번째, 돌이 나옵니다. 3절, 무거운 돌이 나와요. 세 번째, 6절, 횃불, 불이 나옵니다. 네 번째, 6절, “모든 국민을 사를것이요.” 죽음이 나옵니다. 다섯 번째, 6절과 7절. 6절 끝에, 또 7절에 보면 시온이 나옵니다. 잔에서 돌, 돌에서 불, 불에서 죽음과 그다음에 시온 이런 절차를 딱 하나님께서 제시한다는 것은 그것은 뭐냐 하면 여기에 잔 앞에 진노라는 말을 붙이면 돼요.

진노의 잔, 진노의 돌, 진노의 불, 진노의 죽음,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을 잔과 돌과 불과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소멸시키는 수단이 되는 겁니다. 소멸시키는 수단이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서 하시고자하는 것은 뭐냐? 모든 인간들의 스토리, 이야기를 지워버리는거에요. 모든 인간들의 이야기를 지워버려요.

사람들, 특히 주부들 전화할 때 짧게 하면 한 시간, 약간 길게 한다 싶으면 한 시간 반 내지 두 시간 되죠. 전화하는데, 옛날에 집에 전화하기가 진짜 애들 중학교 입시보다 더 중요할 정도였던 그 시대에 이렇게 했어요. ‘용건만 간단히’ 있어요. 왜 사람들은 용건만 간단히 하질 못합니까? 스토리가 있어요. 스토리가. 인간은 자기 스토리에 자기가 매료당해요. 내 스토리를 타인에게 전함으로써 자기가 자기의 동질성 속에 타인을 끌어 당길려고하는겁니다.

“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았지? 뜻을 알았지? 그러니까 내 심정 이해하겠지? 응? 그러니까 날 좀 위로해 달란 말이야. 내 마음을 좀 알아 달란 말이야.” 이건 뭐냐 하면 자기 동질성을 소멸시킬 의사가 전혀 없어요. 끝까지 자기 동질성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여기 1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오늘 본문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을 찾으라 하면 이 대목이에요. 사람 안에 심령을 지었다는 거에요.

누가?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분과 예루살렘의 멸망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게 굉장히 어려운거에요. 사람 속에 심령을 지으면 그냥 내 심령이 “하나님 잘 믿겠습니다. 그러니까 구원해주세요. 오케이? 됐죠?” 이러면 끝날 문젠데, 하나님의 심령을 지으신 분이 난데없이 예루살렘에 불을 내놓습니까? 왜 심령을 지으신 분이 왜 이 세상 나라 모든 민족들을 다 불살라 가지고 다 소멸시키는 이유가 뭡니까?

개인의 심령을 지으신 하나님, 그 심령과 바깥에 있는 인간의 정치적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복잡하죠? 상당히 복잡해요. “니가 마음으로 나를 섬겨라.” “예” 이러면 간단하게 끝날 문제를. “니가 마음이 너는 욕심이 많구나.”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 섬겨” “예” “니 심령을 니가 알아서 날 섬기는데 쓰는거야.” “예” 이러면 깔끔하게 끝나요. 그런데 왜 이방 나라가 불타고 예루살렘이 불타고 이스라엘이 망하고 그거하고 개인의 심령의 변화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이 어려운거에요. 도 닦는게 아니에요. 이 세상에 인간의 사회적 변화와 인간의 개인의 심령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 관련성, 그 관련성을 이제부터는 우리가 추적해서 찾아 내야 돼요. 왜냐하면 아까 말씀 드렸다시피 12장 1절에서 6절의 말씀은 우리 인간의 말이 아니고 인간들은 배제된 채 하나님과 오실 메시아된 참된 인간되시는 그분이 홀로 다 이룰 일이기 때문에 오실 메시아가 개인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개인의 심령은 물론이요 인간의 국가 단위의 인간세계 자체를 주께서는 다 불살라 버린다는 그것과 예수님의 심령과 관련성이 있다는 걸 보여주시는 분이에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그것은 바로 스가랴 11장 14절의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됩니다.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자, 둘째 막대기를 잘랐다 했어요. 작대기는 원래 하나인데, 이걸 분질러버리니까 두 개가 되겠죠? 그러면 그 두 개가 되면 이 작대기는 소용없는 작대기에요. 연합되어있는 작대기가 분질러져서 뚝 부러졌다는 말은 더 이상 연합이라는 것은 성사 될 수 없다는 하나님의 확실한 자신의 뜻을 드러낸겁니다.

그런데 그걸 분지르시는 그 하나님의 일이 이 땅의 인간세계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이에서 그 연락이 끊어졌거든요. 여기 14절에, “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라 이렇게 되어있죠. 열왕기상에서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12장에서 나라가 둘로 쪼개져요. 11장 12장 넘어오면서.

우리가 이 성경을 보면서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아예 없애든지, 안 그러면 같이 망하든지 해야되는데 왜 나라를 북쪽과 남쪽으로 의도적으로 이렇게 분질러놓고 둘이 끊어지게 한 이유에 대해서 알수가 없는거에요. 그것이 한 나라 이스라엘이 두 나라로 나뉘어지는 남, 북으로 나누어지는 그 이유가 스가랴 12장에서 그 연유가 밝혀집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유다 족속의 특수성을 드러내기 위함이에요. 잘 모르겠지요.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를꺼에요. 알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을 두동강 냅니다. 이스라엘을 두동강 내고 그다음에 두동강 낸 입장에서 유다 나라를 또 두동강 내요. 유다 나라를 불태워버립니다. 이스라엘 두동강 냈으니까 어느 하나 나라 건지겠지. 나라 건지지 않습니다. 부러진 모든 유다 나라나 떨어져 나간 이스라엘 나라 둘 다 연합해야 된다는 하나님의 본래 취지에 부합되지 않아요.

둘 다 소멸 수단에 의해서 소멸 되어야 돼요. 잔, 돌, 불, 죽음. 다 소멸 되어야 돼요. 소멸 되고 난 뒤에 마지막 도착 지점이 뭐냐?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면 이거는 예루살렘이 어느지역에 있느냐 하면 유다 지역에 있거든요. 근데 유다 지역, 예루살렘 분명 불태웠어요. 이방 나라 바벨론 군대가 와서 완전히 예루살렘 시온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폐허로 만들었기 때문에 거기서 시온이 나온다는 거에요. 예루살렘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동안 예루살렘에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는 스토리, 이야기가 있는 예루살렘이길 원했지만, 이스라엘의 유다 나라는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면서 그 예루살렘 이야기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게 인간 이스라엘들의 이야기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이거는 다른 종족들 하고 똑같은 입장이 된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종족들을 불로 태우기 전에 먼저 다른 종족과 똑같은 이방 종족으로 변해버린 예루살렘을 불태워버립니다.

그럼 여기서 나오는 공식은 뭐냐?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진짜 유다 요소가, 유다 살리는 요소가 예루살렘을 불태웠다. 더 아주 함축해서 말하면 하나님이 생각한 유다를 진짜 유다가 지상에 있는 가짜 유다를 불태워버렸다. 그렇다면 그 진짜 유다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 의해서 세워진다면 가짜 유다를 불태웠던 그 불태웠던 원칙에 의해서 모든 이방 종족도 불태워진다는 하나님의 일관성이 적용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이거 여러분 감당된다면 이해된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북쪽 이스라엘을 그렇게 다루는 것이 아니고 남쪽 유다를 왜 하나님께서는 유다 자체를 두동강 내서 숨어있는 보이지 않았던, 그동안 인간들이 몰랐던 유다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유다를 적으로 간주해서 불태웠느냐. 왜 북쪽 이스라엘은 그 기능을 못하고 하필 유다에게 그 기능을 하느냐.

그것은 바로 막대기를 자르는데 있습니다. 막대기를 자르면서 거기에 등장 되는게 있어요. 그게 뭐냐? 절단면. 막대기를 잘라버리면 거기에 잘렸다는 사실. 뭔가 두동강 났다는 단면이 나와요. 굵다란 엿가락 훅 불어서 딱 끊어서 구멍 큰 사람이 먹고 구멍 작은 사람이 돈 내는 것, 옛날에, 내때에 지금 노인들 때에 하도 먹을게 없을 때 엿장수 나올 때 그런 게임 있잖아요. 이게 끊어야 돼요. 끊어야 구멍이 보이는거에요. 이걸 단절시키는 겁니다. 유다가 바로 그 단절의 최종 아들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5장 21절에,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러니까 창세기 25장 21절에 하나님께서는 이 리브가를 불임여성으로 만들었습니다. 불임여성이니까 자식이 없는거에요. 자식이 없다는 것은 자식 낳아야 될 그 여인이 태가 죽은거에요. 그러니까 언약의 여인은 죽음을 내포하고 있어요.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자궁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성으로서 이미 죽은 여성이에요. 여성의 기능을 못하니까 이거는 죽음이라는 것,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것을 헛바람, 없는 것을 생산할 수밖에 없는 없는 여인, 죽음의 여인, 쓸모 없는 여인, 있으나 마나 한 여인, 그 여인을 하나님께서 언약의 가정에 여인들로 줄줄이 줄을 세워서 나타나게 했습니다. 창세기 29장 3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레아, 총이 없다는 말은 임신을 못해요. 임신을 못하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라고 되어있어요. 그 이름을 르우벤, “보라, 아들을 낳았다. 아들이다.” 하나님께서 태를 여시니깐 아들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안계신다면 결코 나올수 없는 아들이 등장한 겁니다.

완전히 인간은 배제당해요. 인간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능력은 완전히 하나님 앞에 배제당합니다. 왜? 언약을 위해서요. 언약은 인간의 능력과 섞이면 안돼요. 인간의 능력으로 언약을 이룰수가 없습니다. 배제당합니다. 배제 당한 체 하나님께서는 아들 없음, 아들 없음, “아들은 없다. 너의 태는 죽었어”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태를 여니까 아들이 생긴거에요. 그렇다면 이 아들은 사람의 능령과 결부된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등장된 아들이에요.

이건 리브가하고 똑같은 거에요. 아들이다. 두 번째.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내 기도 응답했다. 세 번째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레위. 드디어 나는 연합하였다. 남편과 연합한다. 아들이다, 기도 응답했다. 연합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 드디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름을 유다. 찬송하거든요. 유다 해놓고 그다음에 중요한 단어가 나와요. “유다라 하였고” 35절 끝에,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그의 생산은 멈췄습니다.

이게 유다 아들로 보여주는 한 세트, 아들이다, 기도 응답 되었다, 그다음에 연합되었다, 드디어 하나님께 찬양한다. 이 네 아들이 한 세트를 이루어서 드디어 생산은 끝났어요. 생산이 멈췄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이 아들은 언약의 아들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기도 응답이다, 언약이란 목표는 하나님과 인간이 연합하는 것이다. 네 번째 마지막 목표는 그 연합 된 자를 통해서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이다. 끝. 이렇게 한 세트가, 그게 한 유닛, 단위가 되는거에요.

유다로 끝났어요. 찬양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면 아들이 4명 밖에 안되죠. 아들이 4명 밖에 안된다고요. 근데 아들은 12명이에요. 그럼 뭐냐? 이 아들 열 두명 되니까 수평적으로 열 두명이 카운트가 돼요. 원, 투, 쓰리, 포, 트웰브(12)까지 갑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 단면이 안보여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인간이 하는 일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그 단면성을 보이지 않고 하나의 일반적인 종족이 되고 맙니다. 동일한 종족개념. 종족은요 지독한 동일개념을 갖고있는 자기만의 스토리를 가지고있어요. 인간은. 이스라엘이 그것 때문에 망한겁니다.

우리는 다 아브라함 자손이고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 동질감을 갖고 있었어요. 하나님께선 그 동질감을 작대기 분질르듯이 분질러버렸습니다. 어느 대목에서? 유다 대목에서 분질렀어요. 유다 대목에서. 유다가 인간의, 이거는 인간의 뜻을 위하여, 인간의 복이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자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없는데서 있게 했다는 걸 보여주는 그 시그널이 유다입니다. 유다에요.

이것을 우리가 전체적으로 미리 이 사실을 알려면 로마서 4장이 너무나 적절한 말씀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할 때 그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러분 잘 아시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면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거에요. 이 원칙은 계속 이어집니다. 계속 이어져요. 예수님이 왔을 때 이 원칙이 계속 이어집니다. ‘내가 없어진다는 것은 내가 죽어야 되고 내가 없어져야 마땅하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죽어야 마땅하다.’

근데 그 죽어야 마땅한 이유를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그 내용이 더 깊어지고 강화되고 심화 됩니다. 그 이유는 뭐냐? 내가 어둡기 때문이다. “내가 양지가 아니고 음지다.” 이런 뜻이에요. 내가 어둡기 때문이다는 거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은 세상 전체가 다 어둡다고 이야기해요. 어두움의 실증이 뭐냐? 죽으면서도 죽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았다고 착각하는 것. 없는데도 있다고 여기는 것.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유다, 예루살렘을 불태워버리고 이스라엘 다 없애버리고 작대기를 분질러서 없애버리고 그 없는데서 진짜배기 유다를 만들어내요.

없는 데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고 어두운 데서 빛이나게 하는겁니다. 그 기능이 유다 기능이 하는거에요. 왜? 유다가 바로 언약의 내용을 그 단면을 보여주는 ‘아들이다, 기도 응답했다, 하나님과 인간이 연합되었다, 드디어 찬양하게 되었다’라는 그 단위의 마지막 마감재로서 찬양이라는 유다가 한 세트가 되고 그걸로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임신을 못 하게 만들었어요. 그 뒤에 다시 태 열어서 하는 임신은 원래 처음에 원, 투, 쓰리, 포.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이 세트와 뒤에 나오는 세트가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여덟명을 낳은 거에요. 그 중에 한 명더 포함되어있어요. 그게 디나에요. 레아가 디나를 낳습니다.

그 디나라는 여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획기적으로 완전히 언약적으로 돌아서게 되죠. 그 이야기는 다른 설교에서 제가 해드렸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1절에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잘 한번 들어보세요.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 다시 말씀드립니다.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모세 혼자는, “하나님의 계신” 그다음에 나오는,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 암흑이에요 암흑. 어두움 속으로 가요.

인간은 이 세상이 환하게 밝다고 생각합니다. 그 밝은 데서 인간은 자기의 역량껏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기도 하고 자기의 일터로 나가고 자기의 동족의 연속성을 도모하기 위해서 아이에게 젖을 주고 맛있는 양식을 주면서 나름대로 이땅에서 생계와 생존을 위해서 부지런히 노력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게 바로 죽어 마땅한 모습이고 그게 진노 받아야 할 모습이고, 그게 있으나 실은 없는 모습이고, 빛이라고 여기지만 사실 정확하게 어두움의 세상의 본모습을 그대로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라는거에요.

인간은 그게 전부에요. 언약이 없는 인간들의 모습은 그게 전부에요. 그것뿐이에요. 그들은 그들이 분질러져야된다는 사실을 모를뿐더러 그 이야기하면 화를 내고 있습니다. 유다가 누구냐? 예수님 자체가 유다에요. 왜? 이 내용을 다 포함하고 있기때문에. 아들이다? 응답받았다? 아버지하고 연합되었다? 하나님께 찬양한다? 이 전부다 언약의 완성상태며 그것은 바로 완성상태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거에요.

그 당사자가. 그분이 바로 유다입니다. 따라서 유다가 해야될 것은 뭐냐 하면 유다가 해야 될 것은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이미 없는 자고 있어도 시간 따라 없어지고 분해 되고 그리고 이미 너희들은 죽은 자고 이땅에 모든 것은 너희들은 어두움에 불과하다는거에요. 인간들이 그걸 안 받아들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뭐냐? 진노의 잔, 진노의 돌, 진노의 불, 진노의 죽음. 이것을 이스라엘을 샘플로 삼아서 시범 조로 이스라엘에게 이 진노의 잔과 진노의 돌과 진노의 불과 진노의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적용시켜 버리는겁니다.

시온.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 시온. 불태워집니다. 그게 불태워져 없어져요. 시온이 없어져요. 예루살렘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스토리, 이야기는 이스라엘 이야기는 이 땅에서 지워집니다. 예수님은 창세기 38장에 보면, 특별히 그 열두지파 가운데 유다 가족의 이야기가 사적인 이야기가 거론되어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유다가 이방인하고 결혼했는데, 그 며느리 하나를 들였어요. 그 며느리 하나가 다말입니다. 큰 아들이 며느리하고 결혼했어요. 큰아들 이름이 엘이에요.

근데 그 며느리가 들어와서 엘이 죽었습니다. 둘째 아들 이름이 오난인데 오난도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형수하고 결혼했는데 결혼하자마자 결혼 뭐 하고 난 뒤에 오난도 관계하고 난 뒤에 오난도 죽었어요. 그러니까 그 유다가 자칫하면 하나님의 야곱의 복을 받았는데 대가 끊길 참이에요. 그래서 종족의 보존이죠. 우리 유다 가족의 동질성을 본능적으로 그걸 지니고 싶어서 자기의 막내 아들 마저 저 여자 때문에 저주받아 죽을까 싶어서 이방여자는 내어보내고 아들을 지키는 쪽으로 아들을 빼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다말이 제대로 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유다는 나중에 다말이 일시적인 창녀가 되어서 시아버지 되는 유다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거기서 두 아들이 나와요. 베레스와 그리고 세라가 나와버립니다. 결혼했다는 말이 아니에요. 시아버지와 결혼했다는 말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관계를 맺어버려요.

이것은 바로 그 잘나고 잘난 하나님의 언약 백성 유다, 유다 개인 사적인 가정에 분질러버리는, 막대기를 잘라버려서 너 안에, 인간 안에 어떤 단절면, 어떤 속이 들어있는가를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왜 거래하지 않고 인간의 어떤 행위를 왜 배제하는 이유를 그 이류를 보여주는 데서 비로서 언약 백성은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거에요. 그러니깐 언약 백성의 특징은 뭐냐하면 두가지를, 양쪽을 다 알고 있는거에요. “나는 없다. 근데 나는 언약 때문에 있고 나는 죽었다. 그런데 언약 때문에 살았고 나는 어두움이다. 나는 음지다. 하지만 주님 때문에 나는 양지다” 이 말이죠.

이게 단순히 사적으로 개인의 심령같으면 나하나 죽고 있다, 없다. 죽었다, 살았다 끝나겠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의 심령을 뭐로 확대 시키느냐 하면 전 인류로 확대 시켜요. 그렇다면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단순히 인간은 살다 죽는다가 아니라 죽는 이유가 온 인류가 이미 어둡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오셔서 추가적으로 그걸 알려줍니다. 요한복음 11장 9절에서 12절, 지금 나사로가 아파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 엉뚱한 나사로 죽은 것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엉뚱한 발언을 해요. 11장 9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앞뒤가 안맞는, 마르다가 병들었으니까 빨리 낫게 해달라는 그 대목에서 이게 삽입 될 수 없는 엉뚱한 발언을 예수님께서 하시는거에요. 이거는 마르다는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개인적 문제인데 왜 지금 낮 열두 시 이야기는 왜 하냐, 뭐 일기 예보관입니까? “지금 몇시야?” “12시입니다.” “어떻게 12시인데 밝아?” “밝습니다.” 밝으니까 문제가 된다는거에요. 이게 어둡다고 니가 지금 어두움이 어둡다고 느끼지 못하면 넌 빛이 없다는거에요.

출애굽기 20장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대목이 얼마나 중요한 대목인지요. 20장 21절,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모세는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 인간들을 통째로 인간 세상 자체를 어둠으로 만드는 방법은 하나님께서는 어두움 속에서만 나타나야 돼요. 그리고 모세는 누구나 가기 싫어하는 그 어두움 속에 모세는 거기서 강제로 호출당합니다. 어두움에 빛이 있어요. 그리고 죽음에 부활이 있습니다.

없는데서, 불임여성이 애를 낳아요. 잉태치 못한 자가 천국가는 백성입니다. 태어나지도 못한 자가 구원받아요. 태어나서 뭐 예수믿고 해야되는게 그게 아니에요. 태어나지도 않는 자가 구원을 받아요. 이 세상은 소멸 대상이고 그 소멸 수단으로서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만들어놓고 분질러버려요. 분지르면 이스라엘 망하고 유다도 망했는데 분질러 보니깐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언약은 생생하게 자기 본래의 계획을 멈춘적이 없다는 사실.

그 유다가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분질러졌을 때, 이스라엘이 분질러졌을 때 모든 인간이 다 멸망 했을 때, 모든 인간이 어두움에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생각지도 못한 빛이 나왔고 부활이 나왔고 거기에 영원한 있음이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언약대로. 그러니깐 언약은 인간이 행함으로 성취할 수가 없고 언약은 오직 예수님과 하나님만이 해낼수 있다는거에요. 그런데 인간은 행함으로 언약을 지킨다? 돌맹입니다.

자빠지고 엎어진다고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9장 33절에,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엎어지고 자빠지는 바로 그것이 시온이에요. 시온에 그게바로 십자가 사건이죠.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어두움의 행위이기 때문에 빛이 아니기에 주께서는 애시당초 그것은 거부하신겁니다. 진짜 유다는 예수님 자신이 유다에요. 왜? 인간이 예수님을 없앨 때 인간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 죽음에서 비로소 죽지 않는 분이 등장하는 겁니다.

이와같은 요소가,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뭐냐? 오늘날 성도는 마음속에 뭐가있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나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사탄의 가시가 박혀있는, 이 사도 바울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고 이것을 8절에 보면 이걸 하나님의 은혜라고 이야기해요.

사탄의 가시가 있음으로써 나는 없고 나는 있고 나는 죽었고 나는 살았고 나는 어두움이고 나는 빛이고 양쪽 다가 내 속에 언약적 기능이 사탄의 가시와 그리고 동시에 주님이 사탄의 가시를 이긴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함께 공유함으로써 이게 바로 오늘날 시온에 해당되는 시온에 올라가서 영원히 살고있는 하나님의 천국 백성들의 공통점입니다.

예수님과의 동질성을 유지하는거에요. 예수님과 같은 동족에 해당하는겁니다. 바로 이 내용이 시편 87편에보면 이렇게 난해하게 나와있습니다. 얼마나 난해한지 여러분 한번 듣기나 한번 들어보세요. 이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시편 87편 1절에서 7절까지인데 제가 빨리 읽어보겠습니다.

“그 기지가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셀라), 노래하는 자와 춤추는 자는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이게 뭐냐 하면 모든 이 세상의 어떤 민족도 천국에 들어올 수 있는 자들을 만들어 내는 조건을 만들어 내는 그곳이 바로 시온에서 그러한 언약이 나오게 하신다는 거에요. 이게 구약 때는 너는 이방 민족이니까 이스라엘 백성 안돼, 하던 것이 이스라엘 멸망하고 난 뒤에 하나님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어떤 자도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편 87편에서 미리 예언하고 있는 겁니다.

시온에서 나오는 그 부활의 능력이 시온 백성들을 될 수도 없는 자들을 시온 백성되게 될 때 거기에 시온 천국에 들어가게 된 사람은 “너는 어떻게 구원 받았어?” 그 능력은 시온에서부터 능력이 와서 그렇다는 고백을 한결같이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 시온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시죠. 예수님이십니다. 유일한 언약인 분이니까요. 예수님이 진정한 예루살렘이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과 하나님이 영원히 연합되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찬양 해야 될 그 모든 비유가 한 인격에, 예수님의 모든 것이 다 성취가 될 때 예수님 안에선 하나님과 연합이 되고 예수님 안에서 찬양이 되고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언약은 줄기차게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하도록 그동안 여럿 이스라엘과 많은 이방 민족을 그대로 이용해 왔던 겁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이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방인으로 태어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한 것을 위하여 충분히 이용당하는 영광을 같이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은 해내지 못한 것을 주께서 해내시고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완성된 것을 저희들로 알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능력이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에서 왔다는 그것을 위하여 구약에서 줄기차게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한 바로 그것인 것을 이제는 우리가 우리 안에서 그 말씀들을 받아들이고 작동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33강-스가랴 12장 1-6절(언약의 속) 240228 - 이 근호 목사.hwp (97.5K), Dow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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