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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9 20:51:58 조회 : 75         
254강-여호수아 24장 23~24절(이방신) 20190929-이 근호 목사 이름 : 송민선(IP:14.55.184.154)
254강-여호수아 24장 23~24절(이방신) 201909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4장 23~24절입니다. 구약성경 358페이지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로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한지라”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이 없어요. 왜냐 하면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이냐 아니냐는 구분 자체가 성립되지 않고 그냥 인간들입니다. ‘우리 민족, 너희들 민족’이라고 하지 이방인이라는 말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어떻게 참된 백성이냐 하면 창세 전에 선택될 때 가능합니다. 창세 전에 선택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방인들은 어떤 좋은 일이 있으면 창세 전에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고 덕을 쌓아야 나에게 행운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백두산 천지를 마치 코앞에 있는 호수만큼 훤하게 어떤 장애물도 안개도 하나 없이 말끔하게 다 보려면 3대째 덕을 쌓아야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이방인들은 천지 보려고 그렇게 돈 모으고 시간 일부러 내서 그렇게 갔는데, 하얗게 안개가 끼어서 거기 앉아서 통곡했다는 거예요.

그러나 성도에게는 3대째 덕을 쌓아서 보는 게 아니고 창세 전에 덕을 쌓았죠. 창세 전에. 우리가 있기도 전에. 딱 보니 훤한데요. 마치 우리 집 앞의 호수처럼 맑게. 3대째 덕 안 쌓아도 창세 전에 이미 보기로 예정되고 작정이 된 거예요. 선택되었다는 말이죠. 덕이 필요 없는 거예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덕이 필요한 겁니다.

내가 원인이 될 때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에 철저한 사람들이 바로 세상 사람들인데, 그게 세상 사람들은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다들 그러니까 따로 이방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성립되지 않고 인간은 원래 그렇다는 식으로 끝나버려요. 창세 전부터 사랑하사 택했다는 그런 민족은 그들에게는 애초부터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창세 전에 만약에 덕을 쌓고 창세 전에 사랑을 해버리면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시간 속에서 내가 노력해서 얻어진다는 그 논리와 원인과 결과 고리가 성립되지 않아요. 백날 노력해도 하나님이 창세 전 아니라고 하시면 끝나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에게 어떤 기대나 미련 같은 것이 완전히 박살 나는 겁니다. 그것이 싫은 거예요.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 이방인들에게는 싫은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고 언급하면서 앞에 무엇과 대비하느냐 하면 이방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이것은 곧 “너희들은 이방 신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너희들은 이방 신을 통해서 네가 이방 민족이 아님을 그들과의 차이 나는 것을 통해서 너희가 그것을 발견하라”라는 이야기예요.

이방 신을 안 만난다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두고두고 계속해서 이방 신을 만나게 될 텐데,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그 의미가 저들과의 차이 남을 통해서 이게 너희들이 습득하고 체험하게 되고 너희들이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너희가 다시 한번 이방 신을 믿는 민족들의 의식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하겠죠.

그러면 이방 신에 대해서 어디서 아는가 하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속 진행하며 계속해서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면서 그들에게 나타나게 될 겁니다. 이미 그 전에 여호수아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의 특성과 특징에 대해서 알려준 적이 있습니다. 민수기 23장 28절부터 30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나오고 또 누가 나오냐 하면 발락이라는 모압의 왕이 나와서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목이 민수기 23장부터 계속해서 민수기 24장까지 계속 나옵니다.

왜 이렇게 길게 나오느냐 하면 이방의 민족에 대해서 네가 확실히 알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이방 민족에 대해서. 그래서 우리도 이방 민족에 대해서 알아야 되거든요. 이방 민족에 대해 안다는 것은 창세 전에 하나님의 확정된 그런 사랑과 그러한 계획이 없이 창세 전과 무관하게 인간이기 때문에 내가 하면서 내가 꾸역꾸역 인생을 꾸려나가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어떤 것들이 형성되어 있는가를 민수기 22장~24장까지 길게 나와 있습니다.

다 하려면 시간이 없기때문에 간추려서 말씀드리면 28절에 보면 “발락이 발람을 인도하여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브올산 꼭대기에 이르니” 왕이 발람이라는 점쟁이를 데려다가 산꼭대기에 이르니 왜 거기에 올라가느냐 하면 거기서 이스라엘 진영이 보이고 이스라엘이 진행하는 것이 보이는 거죠. 거기서 29절에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일곱 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준비하소서”라고 나와 있어요.

“발락 왕이여 신에게 응답을 받으려면 갖은 귀한 재물을 나에게 바치면 소원대로 당신에게 필요한 점괘가 나올 겁니다”라고 발람 점쟁이가 그렇게 이방 왕에게 이야기한 겁니다. 여기에서 발락의 특징은 한마디로 뭐냐 하면 소원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설교의 핵심은 이미 나왔습니다. 소원이 아직도 있는 사람은 이방인이고 소원이 없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간단하죠.

소원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는 거예요. 구심력이라는 것은 원심력과 반대인데 원심력은 밖으로 튀어 나가는 힘이고 구심력은 속으로 계속 응축이 되는 힘이 구심력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이 없는 이유가 중간에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가름하는 경계선이 없어요. 그저 나만 있을 뿐이에요. 나만. 나만 있다는 것은 마치 당구 알처럼 딱딱해지고 강력해져야 해요.

계속해서 자기 쪽으로 힘을 모아야 해요. 마누라가 검찰 조사를 받든 말든 관계없어요. 계속 나는 힘을 모아야 합니다. 계속 나에게로 힘을 모아야 합니다. 자식이 어떻게 되든 말든 관계없어요. 나에게는 내가 전부예요. 왜? 구심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평생을 나를 위해 살아왔거든요. 따라서 신에게 거래한다는 것은 평생을 나에게 귀한 것들과 나에게 귀한 것들을 신에게 내놓으면 신도 내 귀한 것을 내놓은 줄 알고 응답할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방 신이에요. 들어보니 꼭 교회 같지요. 이상하게 들어보니 기분이 꼭 교회 같아요. 귀한 것 드려서 귀한 것 이상의 30배 60배 100배의 투자한 것 이상의 더 많은 수익을 내는 것, 그래서 그런 신을 여호와라고 인정해 줄 때, 그때 우리는 챙길 것 챙기기 때문에 남는 장사가 아니냐는 사고방식, 그것이 바로 이방 신입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의 이방 신. 교회라는 이름의 이방 신이에요. 여호와라는 이름의 이방 신이고 예수라는 이름의 이방 신인 겁니다. 이 구심력이 문제예요. 구심력. 다시 한번 말씀드릴까요? 이방인의 특징은 소원이 있다. 소원이 있다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다 해요. 두 번째는 이스라엘은 소원이 없다. 아무 소원이 없어요. 여러분이 제 말씀을 들으면 두리번거리게 되죠. ‘우리 가운데 이스라엘 있을까?’

정말 이스라엘 찾기 힘듭니다. 세상에 소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눈만 뜨면 기대감과 성취감과 소망 같은 것들이 사는 보람을 제공하는데 소원도 없는데 왜 사는지 의아할 정도죠. 그래서 성경에서는 소원이 없는 자를 죽은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죽은 자의 특징은 더는 소원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산자라 하는 것은 아직 여분의 소원이 따로 있는 사람이 산자가 되겠지요. 소원성취하려고 달에게 비는 대신 예수에게 비는 거예요.

그래서 발람이 세 번이나 축복하는데 발람의 점괘가 별로 안 나왔어요. 안 나오니까 고관대작까지 다 동원합니다. 고관대작까지 동원해서 계속해서 압박을 가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이스라엘을 저주할 때까지 각양 제물을 다 바치고 온 고관대작들이 다 아부할 테니까 무조건 너의 입에서 저 이스라엘을 저주한다는 망하게 한다는 그런 소리를 듣게 해라. 모든 후원을 다 해줄 테니”라고 하는 거예요. 차 사주고 집 사주고 사택 주고 월급 주고 다할 테니까 무조건 우리 소원대로 당신은 점괘를 얻어내라는 겁니다. “이 목사야 아쉬운 거 없이 다 해줄 테니 점괘를 얻어내라”라는 말입니다.

이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결국은 자기도 견디다 견디다 못해, 이 말씀이 23장부터가 아니고 22장부터 계속 나오거든요, 발락의 윽박지름에 발람 선지자가 그야말로 지칠 지경이에요. 계속 발락이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압박을 가합니다. 결국 결론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안에는 하나님의 왕이 계셔서 이거는 너희들이 저주하려고 하는 모압이 오히려 저주받고 망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민수기 23장 19절에서부터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 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들 중에 있도다”라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24장에 들어가면 거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24장 17절에 보면 “내가 그를 보아도 이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발람도 재물이고 뭐고 강력하게 얼마든지 해준다고 하니까 발람 선지자도 거기에 휘둘리고 싶지만, 하나님께서 강권 적으로 작동을 하셔서 이거는 원수의 점쟁이가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만드는 그런 일종의 소동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어요.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반드시 망한다. 우리 모압 나라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라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에게 준 점괘이기 때문에 어떻게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이기느냐고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발람이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외부에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관여하는 거예요.

이것은 이스라엘 자체적으로 발람에게 자신들을 저주하지 말라고 부탁한 적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내가 애써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서는 주님께서는 내가 애쓰지 않더라도 바깥사람들을 통해서 하나의 수제품으로 만들어 내는 거예요. 성도로. 이 이야기 처음 들으시죠. 내 구원은 내가 애써야 한다는 것이 상식인데 그건 이방 신들이 이방교회들이 하는 짓이에요.

내가 애써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나와 무관한 사람들을 관리해서 기어이 창세 전에 덕을 혜택을 보도록 한다니까요. 왜 자꾸 우리는 이방적 사고방식으로 내가 뭔가 행동을 제대로 하게 되면 구원에 가깝고 행동 개차반같이 하면 지옥에 떨어지고 하는 식의 자기 구심력을 적용합니까? 내 행동에 대해서 왜 그렇게 예민하고 민감합니까? 그게 이방 신이라니까요.

뭔가 나쁜 짓 했다고 하면 헌금이 더 두꺼워지고 갑자기 안 하던 봉사도 하고 하다가 좀 잘 된다 싶으면 헤헤거리며 교회 안가도 잘 되는데 뭐 하려고 교회 가냐는 식이고. 민수기 22장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발람이 저주하러 가는데 여호와의 사자가 그 앞길을 막으니까 그 나귀를 때렸잖아요. 여호와의 사자가 눈에 안 보이니까. 그런데 나귀가 왜 때리냐고 말을 하고. 만약에 나귀가 멈추지 않았다면 발람 선지자는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발람 선지자는 이미 죽은 자인데 살려주는 것은 이스라엘 외부에서 복을 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본인들이 애써서 구원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의 조건은 하나님에 의해서 제공된다는 겁니다. 구원받은 그들이 자기의 구원 꺼리를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고 바깥에서 다 조정을 해 줘서 구원 안 되려야 안 될 수 없도록 조정해 나갈 때 그때 생기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다 구원받습니까? 구원 못 받지요. 왜? 이스라엘 내부에서 바깥 관점이 날아가 버리고 속 내부에 스스로 구원을 시도할 때 이미 그 이스라엘은 이방인화 되어서 망하는 겁니다. ‘내가 뭘 해서 구원받지?’라는 통밥이 돌아가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하나님의 하는 일에 대해서 훼방하고 막아서는 일이 시작되는 거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초조해요. 도대체 무엇이 되기 위한 초조함입니까? “아무것도 안 하니까 이게 구원받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는데 그게 믿음이 없는 거예요. 그게. 그게 초조하다는 거예요. 자기 위주의 삶은 초조함의 반영입니다. 그럼 왜 초조할까? 남에게 축하받을 일이 적으니까 그렇죠. 사람들은 뭔가 초조하고 외로울 때 기대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남들이 나를 좀 칭찬해주면 좋겠다는 거예요. 칭찬.

‘잘한다, 훌륭하다, 애쓴다, 욕본다, 잘 될 거야, 당신 집안 잘 풀릴 거야’라고 좀 빈말이라도 이렇게 ‘훌륭하다, 이쁘다, 참하다, 성격 좋다, 성실하다, 건강하다’라는 이거. 그거 들으면 뭐 합니까? 천국의 조건이 아닌데. 그때 기분 좋다뿐이지 그렇게 기분이 좋아져 버리면 무엇이 감춰지느냐 하면 내가 자신을 지키려고 점점더 애착을 하게 돼요.

그러면 점점더 멀어져가요. 주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과 점점더 멀어져 가버립니다. 신자 되려고 하다가 갈수록 점점더 불신자 되어 버리죠. 그러면 이러한 이방인들과 접촉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다워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다는 것은 하나님의 작품이고, 이스라엘 자신들 스스로는 그렇게 이스라엘 답지를 못 합니다.

제가 여행 중에서 어디를 갔느냐 하면 만주족 항일운동하는 격전지를 갔는데 거기에 기념 건물이 있고 일종의 만주족 민속촌이 있었어요. 거기에 허성숙이라는 사람의 조각상을 세웠는데 1915년에 태어나서 1939년에 죽었어요. 나이가 24살에 죽은 아가씨죠. 항일 투쟁한 만주족입니다. 한국 독립운동한 것이 아니고 만주 독립운동한 사람들이에요.

죽었던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만 항일한다고 죽은 것이 아니고 수많은 만주족 사람들이 그때 죽었거든요. 죽었을 때 ‘이것이 바로 혁명의 기치다. 이 혁명의 정신을 높이 들어서 이 땅에 사회주의를 완성하자’라는 취지로 동상을 세운 거예요. 그래서 그걸 보고 거기 글자에 ‘혁명’이라는 글자가 나오길래 내가 속으로 그랬죠. ‘그것은 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가지고 사건이라고 하는 거야. 사건’

혁명은 획기적이고 남에게 축가들을 일이 있을 때 혁명이라고 하거든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매일이 혁명이고 매일이 사건이에요.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것도 안 한 이 자체가 혁명적 사건이에요. 왜냐 하면 내가 나를 손 안 대도 되는데 손 안 대면서도 이 만큼 되었잖아요. 이게 주님의 혁명 아니고 뭡니까. 이것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한 것은 민수기 속의 사랑이라는 강의를 제가 올려놨습니다.

그걸 보면 좀 더 상세하게 나와 있어요. 존재를 점으로 바꾸면 점과 점 사이의 관계가 사건이고 그 사건이 거듭남이거든요. 그 관계가 거듭남이에요. 점이 뭘 가져요? 점이라고 하는 것은 그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두 지점에 불과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건을 위해 누굴 만나게 하고 누구를 겪게 하는 것은 중간에 주님의 언약 적인 폭격이라고 하는데 이 언약 적 폭격을 가해서 언약이 생생하게 살아있어서 언약 속의 인물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한 별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금 이스라엘을 활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 별을 드러내기 위해서 누구까지 동원했느냐 하면 그 얼토당토 않는 아무 상관도 없는 발람이라는 이방 민족 선지자까지 동원 시켜서 그냥 가고만 있는데 그 뒤통수를 향하여 저 높은 산에서 그냥 축복하는 거예요. “모압 나라는 망할 것이고 너희들은 어떤 것도 너희들을 방어할 세력은 없을 것이다. 왜? 창세 전에 덕을 쌓았으니까”라고. 창세 전에 자기들이 덕을 쌓았습니까? 주님이 덕을 쌓았죠. 창세 전에 계획에 대해서, 그 밀어붙임에 대해서, 그걸 막아설 자가 누가 있습니까?

이게 믿음이잖아요. 이게 믿음이라고요. 자기를 쳐다보고 ‘내가 잘했나 못 했나’라고 하는 게 믿음이 아니에요. ‘내가 좀 성실했을까, 부지런했을까, 내가 너무 나태하지 않나’라고 생각하는 게 믿음이 아니에요. 왜 자기 점검합니까? 자기 점검할 때마다 우리는 초조함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초조하면 불안정해요. 불안정하면 뭔가 조치를 가하려고 하고 결국 그 조치가 이방인 적이라니까요.

그냥 감사하면 안 됩니까? 왜 그렇게 초조하게 살아야 해요? 허성숙이라는 사람은 24살 때 죽었어요. 여기 24살 이하 된 사람은 별로 없는 거 같은데 한 사람 있나요? 우리 살 만큼 살았잖아요. 그런데 그걸 세상에서는 혁명이라고 해요. ‘장하다! 젊은 일꾼이여, 젊은 아가씨여. 네 덕분에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우리 만주 민족이 해방되었다’라고.

그러나 우리는 “장하다! 주님이여”라고 하죠. 주님의 창세 전의 덕으로 우리는 여기서 백두산 천지도 맑게 보고 모든 게 지금 이 상태로 있는 겁니다. 이방인에게 소원이 있다는 말은 소원이 있는 속을 우리가 관통하고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소원이에요. “검찰 개혁!!” 전부 다 그들의 소원이에요. “조국 구속하라!!”라는 것도 소원이에요. “문재인 탄핵하라!!”라는 것도 소원입니다.

전부 다 우리는 뭔가 내 소원대로 혁명을 일으키는 내 중심의 구심력으로 일어나는 혁명이기를 원하고 있어요. 그러니 사는 것이 초조하죠. 내 뜻대로 안 되니까. 이방인, 불신자들의 특징은 시간이라는 괴물에게 시달리는 겁니다. 이미 이스라엘 속에는 장차 별이 나타난다는 확정이거든요. 그런데 이방 민족은 확정된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냥 내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식의 시간이라는 괴물에 시달려서 ‘내일은 잘 되겠지. 모레는 잘 되겠지’라는 계속해서 시간이라는 괴물에게 마음의 평안도 빼앗기고 행복도 빼앗기고 다 빼앗기는 겁니다. 우리가 어지간히 살지 않았습니까? 더는 뭐 바랄 거 있습니까? 더 살아봐야 치매 걸려요. 치매 걸리기 직전에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만큼 하면 살 만큼 살았다고 평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는 그걸 몰라도. 따라서 이 땅에 이스라엘이 되려면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버림받아야 해요. 우리가 사실은 세상과 한통속이거든요. 이방인 욕할 것도 없어요. 우리 사고방식이 이방인이고 그들의 사랑이나 내 사랑이나 둘 다 나 중심이고 나밖에 몰라요. 따라서 주님께서 손댑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주셔서 “나처럼 가차 없이 버림받아라. 그러다 그에 의해서 내쫓김을 받아라. 그것조차도 방향이 지옥 가다가 천국으로 가는 노선 변경이다. 그것이”라고 하십니다. 슬퍼하거나 서러워할 필요 없어요. 그건. 큰일 날 뻔했다고 오히려 고마워해야 해요.

“나는 뭐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내 덕으로 사는 게 아닌데”라는 이런 소리 좀 했다고 친구들이랑 헤어지고 “너랑은 대화가 안 된다”라는 소리 듣고 밉상 받고 그런 거예요. “내가 자식 낳았는데 너 알고 보니 잘 못 낳은 자식이었구나”라는 소리 듣고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엄마 이상해졌어. 아빠 이상해졌어. 무슨 교회 다니는데 이렇게 이상해졌어?”라는 말이 초조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니들이 창세 전의 덕을 알아? 공덕을 알아?”라고 당당한 거, 바로 주님의 공덕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공덕이 아니고 창세 전의 주님의 공덕이 우리 안에 현실화 되어서 발산되고 있는 것을 왜 우리가 억지로 억지로 감추려고 하는지. 주여 이제는 공개하게 해주시고 내 안에 내 힘이 아니라 주의 힘으로 주님의 계획이 주님의 창세 전의 예정하신 사랑이 터져 나올 수 있는 움직이는 경계선이 되게 하옵소서.
 첨부파일 : 254강-여호수아 24장 23~24절(이방신) 20190929-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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