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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12:17:36 조회 : 97         
202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8강-에스더 강해: 낯선 신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202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8강-에스더 강해: 낯선 신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를 기어이 악한 자로 만들기 위해서 덤터기를 씌우는 겁니다. 본인이 하지도 않은 일을, 본인이 그런 의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강간한 자가 돼버렸어요. 강간한 자가. 분위기 자체가 그렇게 몰아세우는 겁니다. 이게 과연 정의로운 하나님일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여기 교재 4페이지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정의롭다니, 정의롭지 않다니 하는, 인간에게 평가의 대상이 되지를 못합니다. 인간의 평가나 판단의 대상이 되는 신은 어떤 신이냐 하면은, 바로 어떤 신이냐 하면은 하만의 신이에요. 하만의 신.

 

왜냐하면 하만은 항상 뭐로 하느냐 하면은, 누구를 치든, 누구를 치든 간에 항상 법적으로 하자가 없기를, 잘못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을 칠 때도 법적으로 왕으로부터 권력을 인수받아서 반지를 끼고 유대인을 쳤다 이 말이죠. 하만의 법적인 입장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유대인을 결코 예외의 존재가 아니에요. 일반민족하고 똑같은 민족이고, 예외가 있다면 오직 자기 위에 있는 상관 임금님밖에 없는 거예요. 자기는 철저하게 임금님 말만 듣는 거예요.

 

유대인을 600만 명이나 학살한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은, 물론 이 사람은 그렇게 폴란드 유대인 수용소에서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여도, 아우슈비츠(독일이름)수용소에서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여도, 왜 죽였느냐고 전범재판소에서 물으니까, “나는 충실한 공무원일 뿐입니다. 나는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공무원이 공무원의 일을 하지, 법적인 것을 법적으로 수행할 뿐이지,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신은 양심도 없어요!” 이렇게 이야기하겠죠. “당신이 짐승이 아니고 기본적인 인간이라면 배려나 사랑도 없습니까?” 이렇게 할 때에 아이히만이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주입니다.” 이래 나와요.

 

그러나 그것은 사적인 문제고 공적인 문제에서는 공적으로 해결하는 겁니다. 하만 이 사람에게는 공적인 이 법이 자기의 사적까지 점령한 거예요. 법으로 시작해서 법으로 나온 겁니다. 이게 바로 비-언약이에요. 비-언약. 하나님의 사랑이 빠져버린 상태입니다. 그러면 이 상태는, 법은 우리에게 어떤 위장술을 주느냐 하면은 바로 나의 정당함, 나의 의로움, 이것을 보증해주는 식으로 법에 호소하는 거예요. 안 믿는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면 안 믿는 식구들이 어떻게 그렇게 똑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있는지. 복음을 전하고 뭐 십자가이야기하게 되면 한결같이 이야기해요. “나는 절대로 양심에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았다.” 그 말이 맞아요. 양심에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지옥 가는 이유다 이 말이죠. 그게.

 

그게 뭐냐 하면은 내가 알고 있는 신이 가짜인 것을 모르는 거예요. 내가 알고 있는 신은 내 잘남에서부터 유한이죠. 나는 잘났다, 잘났다, 나의 잘남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신은 유한에서 시작되어 무한으로 이어지는 가무한 상태, 이거는 가짜에요. 가짜라는 뜻이에요. 가짜신이에요. 가짜신. 뭔가 피벗pivot이 있어야 돼요. 아, 내가 알고 있던 모든 행동과 하나님이든 어떤 누구를 평가하고 할 때, 내 안에는 항상 뭐가 있었는가 하면은 내가 그 사람을 셈하고 헤아릴 권리가 나한테 있다는, 그만한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그것을 근거로 해서 남을 평가한 거예요. “너는 나보다 착해? 너는 나보다 성실해?” 전부다 이런 관점이에요. 그런 관점을 말로는 안 하지만 속으로 담아놓고, ‘이 사람은 나쁜 사람!’ 이래되는 거예요.

 

만약에 교도소에 갔는데, 거기에 사람 일곱 명 죽이고 온 사람이 있었고 또 세 명 죽이고 온 사람이 있었다 이 말이죠. 그럼 세 명 죽인 사람이 일곱 명 죽인 사람한테 하는 말이 “너는 나처럼 세 명 죽이고 절제해봤어? 네 번째는 안 죽여 봤어?” 뭐 이래 나오겠죠. 그러니까 나는 너보다 잘났다가 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방향은 자기의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가 못한 사람을 적으로 만들어놓고 그걸 공격하는데 사용하는 보람과 삶의 의미를 찾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인간은 적대요소를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있어줘야 자기의 정당함이 반대로 이게 구축이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가 불교를 그렇게 욕하고, 복음 좀 안다고 한국이 그렇게 욕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희열감과 우열감이 더불어서 나는 정당하고 옳은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렇게 노출하기 싫었던 악마를 닮은 모습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돼요. 이 하만은 정말 죄짓지 않았기에 지옥 가는 겁니다. 죄짓지 않았기에. “정당하게 시키는 대로 법적으로 행동했고 나는 결코 에스더를 강간할 마음도 없었고 강간할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강간했다면 그것은 내가 강간을 해서가 아니라, 왕이, 당신이 감히 나를 오해하고 잘못 봐서 그렇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지요. “정말 억울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러나 하만이 있어서는 안 될 이유가, 그렇게 하만이 왕한테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왕은 법을 넘어서는, 초법상대한테는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돼요. 까라면 까야죠. 왕인 내가 강간했다고 하면 강간 안 했어도 강간한 것이 되는 것이 왕의 지침이에요. 그게 예외의 상태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라고 베드로가 아무리 해도, “닭이 울 때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너는 천국에 와야 돼!” 하면 베드로는 “예. 가겠습니다.”하고 까라면 까야죠.

 

주님이 오라고 하는데 “내가 세 번 부인했습니다.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런 구질구질한 비겁한 변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게 복음의 세계에요. 복음의 세계입니다. 주께서 가라고 했기에 갈뿐이지, “내가 뭐 모라자서 어떻고....” 겸손 떨지 마세요. 겸손을. 겸손은 자기 정당성의 표현입니다. 이런 낯선 하나님을 누가 납득하겠습니까? 아무도 납득 못합니다. 교회마다 선한 것을 강조해가지고 “예수 믿었으면 바르게 살아야지.” 이런 쪽으로 막 나가지, 이런 예상 밖의 낯선 하나님을 이야기하게 되면요, 그들은 자기 정당성의 근거가 다치는 것을 용납 못해서 하만적인 요소를 유감없이 발휘해버립니다.

 

“나가! 꺼져!” 그러면 그게 뭐냐, 그게 바로 하만의 세계였다는 겁니다. 이 교회가. 하만의 세계. 비-언약적 세계였고 전혀 복음을 모르는 세계였다는 것이 들통 나는 계기가 돼버리죠. 그렇다고 이 소리를 듣고 또 교회가가지고 괜히 시비를 걸지 마세요. 대구에 그런 사람이 하나 있어요. 작은 교회는 가지도 않아요. 온 큰 교회에 가가지고 복음 아니라고 외치고 고소당하고. 고소를 한두 번 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제가 잘 알아요. 저를 존경한대요. 존경해도 우리교회는 오지도 않는 것 같은데. 왜냐하면 사는 재미가 적을 만들어놓고 공격하는 그 재미로 살아요. 교회 공격하는 그 재미로 살기 때문에. 대구신학교 나왔어요. 그래서 이 성경과 한국교회가 다르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악한 자를 기어이 악하게, 억울하게 만드는, 덤터기를 씌우는 하나님이에요. 강간하지도 않았는데 강간했다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은 예외의 상태기 때문에 그래요. 예외의 상태기 때문에. 조용하게 강원도에서 평생 교회도 모르고 절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제주도도 모르고 감자만 캤는데 지옥가래요. 양심대로 사는데. 벌레도 안 죽였는데. 지옥가래요. 아이히만 이 사람의 성격이 벌레도 못 죽이는 성격입니다. 벌레도 못 죽이는데 사람은 600만 명 죽인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법이 그만큼 무서운 거예요. 법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자기의 정당성이, 의롭게 되고자 하는 그 욕구가 바로 악마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나쁜 사람, 악마라고 할 때에, 악마는 항상 비-언약적이라는 것.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지 않는 그것을 의미해야 되지, 성격이 포학하다든지 뭐 그런 쪽으로 평가를 내리면 안 됩니다. 그런 평가를 내리고 싶다는 것은 본인이 포학하지 않다는, 자기는 착하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자꾸 그런 식으로 하는데. 항상 성경은 뭐냐 하면은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낯선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자기 아들을, 그 사랑하는 아들, 그냥 미워하는 아들도 아니고 그 사랑하는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 버리는 하나님. 이게 말이 안 되죠. 분명히 말이 안 돼요. 모든 인류가 머리 맞대도 말이 안 되는데, 문제는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 팩트라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믿거나 말거나 그 일이 벌어졌다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것이 문제에요.

 

어떤 공통점이 없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어떤 공통점도 없어요. 선악적인 하나님은 뭐냐 착한 분이고 정의로운 분이다고 하는데, 이게 정의롭습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정의, 이거 다 피벗pivot이 되어야 돼요. 전부다 반대로 바꿔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마치 승리자의 외침인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그것을 세상에, 십자가에서 마지막 내뱉는 이 말이 다 이겼다! 다 이루었다! 이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옆에 있는 강도가 아무리 요모조모를 따져 봐도 지금 분명히 처참하게 망가지는데 다 이루었대요. 믿으래야 믿을 수가 없죠. 근데 그 예수님도 못 믿겠지만 더 믿을 수 없는 사태가 그걸 보고 같은 강도는 그러니까 메시야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앞뒤가 맞는 이야기에요? 연결이 안 돼요. 맥없이 죽는데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

 

그게 어떻게 선하고자 하는 인간에게 매치가 돼요? 매치가 안 되죠.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행전에서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에 나오죠. 복음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알기는 알아도 알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 받은 사람만이 깨달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복음의 공식으로 굳어져버린 겁니다.

 

자, 그렇게 해서 그다음부터는 하만의 반지를 모르드개의 손가락에 끼워버립니다. 한번 봅시다. 원래 이 반지가 누구 반지냐 하면은 왕의 반지죠. 그래서 왕은 반지의 제왕이에요. 왕의 반지가 하만으로 갑니다. 왕의 권력이 악마의 권력으로 가죠. 하만의 반지에서 어디로 갑니까? 모르드개로 가죠. 그렇다면 이 모르드개의 반지는 반드시 뭐를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은 하만의 반지를 경유를 해야 되는 겁니다. 하만의 반지를 경유를 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 모르드개에 있어서 반지를 찬다는 것은 자기가 민족을 위해 복수를 하겠다든지, 저 하만을 꺾겠다는 것이 아니고, 이거는 우발적으로 이렇게 주어진 거예요. 우발적으로. 우발적. 같은 말로 우연적이죠. 우연적. 또 같은 말로 하면 사건. 돌발. 돌출. 이렇게 되는 겁니다. 돌발, 돌출.

 

이것은 전체적으로 뭘 깨느냐 하면은 이 세상이 보이는 것으로 전체가 하나가 되겠다는 것을 하나님이 깨시는 방식이 바로 이 방식이에요. “나는 저걸 원하지 않았는데요.” 나는 저걸 원하지 않았다는 그런 고백이 나오도록 하는 겁니다. “나는 구원을 원하지 않았어요.” 이걸 하니까 갑자기 노래가 생각이 나네. “나는 사랑을 원하지 않았어요. 근데 사랑이 왔어요. 내가 예상하지도 않았는데 나한테 왔습니다.” 따라서 이거는 은혜로 덧입는 거고 내 소유라 할 수 없고 그냥 선물로, 나한테 다가온 모든 것이 선물이죠.

 

어떤 여자 분은 결혼할 때 소원이 뭐냐, 애 하나만 낳아서 잘 키워보겠다고 소원을 했는데, 임신을 해서 병원에 가니까 한 2주나 3주 됐나, 애기가 둘이라고 해요. 아, 쌍둥이구나. 또 가니까 애가 셋이라네요. 아이고, 세상에 세쌍둥이를 어떻게 키우나. 나중에 애가 넷이 나왔어요. 딸 네쌍둥이. 지금 인간극장에서 하고 있어요. 네쌍둥이. 다 못 키워서 둘은 분양을 했어요. 둘은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시가집에. 둘은 서울에 있는 자기 집에서 키우고. 자기 남편이 요리사인데. 강남에 있는 가게가 곧 있다가 폐업하게 됐어요. 장사가 안 돼서. 하나인데 넷이 됐어요. 보세요. 반지의 제왕이 네 개로 끼웠잖아요. 그 사람이 만약에 복음을 안다면 이거는 내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겠죠.

 

어쨌든 모르드개에게 반지가 주어졌으니까, 그전에 왕의 권력은 누가 있습니까? 에스더가 있는 거예요. 에스더. 그러면 에스더가 있다면 왕과 예외의 상태거든요. 예외의 상태인데, 이 예외의 상태에서 에스더 때문에 왕은 빠져버리고 에스더만 유일한 예외의 상태가 되어서 그다음부터는 에스더가 생각한대로 갈뿐이에요. 그러면 이 모르드개는 어디에 갔느냐, 에스더 때문에 같이 일을 활동하게 됩니다. 빨리 수습을 해야 되니까. 하도 영토가 넓으니까 빨리 수습을 해가지고 명령을 내린 이 명령을 철회해야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하나의 조를 짜가지고 편지1, 편지2, 편지 두통을 연달아 보내면서, 편지 내용이 뭐냐, “죽여라! 유대인들을 해롭게 한 사람은 다 죽여라!”해서 75,000명 죽이고, 죽인 날짜도 맞춰서 죽이라고 해서 12월 13일에 죽이고, 수산도시에서는 12월 14일에 죽이게 되어 있고, 그 뒤에 절기를, 12월 13일과 14일의 양일을 부림절이라고 해요. 부림절. 이 부림이라는 것은 뭐냐 제비뽑았다는 거예요. 제비뽑았다. 하나님께서 하만으로 하여금 유대인을 죽이는 날짜가 어떤 날이 적당하냐고 하니까, 하만의 부하들이 제비뽑자고 한 거예요. 하만의 신은 존재하기 때문에 신의 뜻을 받들어서 일하거든요.

 

그래서 신의 뜻에 의해서 제비뽑은 거예요. 악마도 하나님의 종이니까. 신의 뜻으로 제비뽑았는데 그 제비뽑은 날이 자기 제삿날이 됐어요. 자기 아들들이 작살나는 날이 됐어요. 아들들 다 죽고. 모르드개를, 예외의 존재를, 언약의 사람을 죽이려고 한 그 자리에다가 자기 아들들을 다 매달죠. 그러면 모르드개가 달리도록 예상되었던 그 나무는 무엇의 상징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의, 분노의, 하만과 악마에 대한 진노의, 악마에 대한 분노의 그러한 증거가 되겠죠.

 

그렇기 때문에 이 지옥이라는 것도 주님의 십자가가 있음으로서 지옥의 처벌이 정당화되는 겁니다. “너희들 손으로 이 창조주 하나님을 죽였잖아. 처참하게 죽였잖아. 그러니까 너희들이 그 저주의 무게를 감당해야지. 왜? 너희들부터 먼저 일을 시작했으니까.” 이 땅에서 너희들부터 일을 먼저 시작했잖아요. 사실은 주님이 유도했지만. 근데 사실은 인간보고 닦달내시는 것이 아니고 인간 배후에는 육과 혈육이 아니라 악마에 대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시는 겁니다.

 

자, 에스더를 계속 봅시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타이밍이 정말 희한하게 돼요. 타이밍이 너무 희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참, 우리 하나님 멋있어요. 대단해요.” 이렇게 좋아하게 될 게 아니고, 우리가 몸서리쳐야 돼요. 왜 몸서리쳐야 되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기는 살아계시는구나’ 그걸 느낄 때, 이거는 어느 것보다 더 전율이 오고 두렵습니다. 무섭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그 느낌은, 세상에 어떤 사태나 불상사가 일어나도 그거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그 감정 앞에서는 그거는 시시한 일이에요. 아주 대수롭지 않는 일밖에는 안 돼요. 히브리서 10장 31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너희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 타이밍이 소설 같아요. 두 번째 날에 나에게 이렇게 호위를 베푼 신하에게 뭘 해주느냐고 할 때에(에6:6), 그 사람에게 왕의 말을 태우고 왕의 옷을 입히면 왕을 칭송하리라고 할 때에(에6:7-9), 그것을 모르드개가 예상한 것이 아니라 하만이 예상한대로 그 효과가 모르드개에게 넘어갔다는 그 타이밍이나, 잠이 오지 않아서 “거기 밖에 누가 있느냐?”라고 할 때에 마침 하만이 거기에 등장하는 그거나, 이런 타이밍이 이게 에스더 솜씨겠어요? 에스더는 금식만 한 거예요. 자기가 나서서 민족구하겠다고 떠들고 까불고 전국부녀자협회하고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주님은 노시는 분이 아니니까요. 호들갑 떨 필요가 없어요. 호들갑 떨 필요가. 알아서 착착 되는데, 그것이 내 예상 밖에서 착착 되는 거예요. 내 예상 밖에서.

 

그럼 그걸 어떻게 감사하느냐? 뒤돌아보면서 감사하는 거죠. 뒤돌아보면서. 모든 것이 타이밍이었고 타이밍이었다. 어느 것 하나 빈틈없이 다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유대인을 죽이기 위해서 제비를 뽑은 날이 결과적으로 무슨 날이냐 하면은 유대인의 축제의 날이 됐죠. 죽을 뻔 했는데 살았다. 9회말 역전이 된 거예요. 이런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죠.

 

반전인생을 그들은 산 게 된 겁니다. 죽었는데 다시 살았다. 그 가운데서 에스더가 그야말로 이미 죽은 몸으로 왕에게 나갔다. 죽은 몸이라고 하는 것은 법이라는 폭력을 동반한, 폭력을 배태한, 폭력이 자욱한, 진짜 매캐한 법의 세계 속에서 옷을 입고 나갔을 때에, 이미 그거는 법 안에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죽은 여자죠. 죽은 왕비가 되는 겁니다.

왜? 법이 늘 적용이 되니까.

 

여러분들에게 장대비가 쏟아질 때, 또는 소나기가 쏟아질 때 그 사이를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시속 몇 킬로를 해야 빠져나갈 수가 있겠어요? 홀딱 맞고 나가는 거죠. 이미 죽은 자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내가 나를 처분할 수 없고 처분은 하나님께 맡겨야 되겠죠. 그런데 왕이 예상 밖에 너무 큰 환대를 해줘가지고 그냥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고 심히 사랑스러운 거예요. 심히. 혼이 나갈 정도로 사랑스러웠더라. 내 반을 준다는 것은 다 가져가라고 하는 것하고 똑같은 소리거든요. “너만 있으면 돼. 나라 없어도 괜찮아. 너만 있으면 족해.”라고 할 정도로 심히 사랑한다는 것은, 이것은 평소에 있었던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유대민족은 죽음이라는 것,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천국백성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식겁한 거예요. 식겁했지만.

 

그러나 돌아보면 식겁했지만, 만약에 하만이 그렇게 권력을 다 장악해서 설쳐댈 때도, 그래도 뭔가 살 궁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철저하게 차단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니까, 이럴 때는 아직까지 제대로 금식이 아니에요. 금식이라는 것은 자유낙하, 그냥 몸을 맡기는 거예요. 전부다 그냥 맡기는 거예요. 비트라는 영화에서 정우성이 오토바이 타면서 손 놓고 그냥 공기에다가 모든 것을 맡기듯이, 성도는 주님의 타이밍, 주님의 일하심에 모든 것을 그냥 맡길 수밖에 없죠. 그러면 우리도 오토바이 타면서 손 놓을까요? 손 놓을 때가 있고. 오토바이 손잡이 단단히 쥘 때가 있고. 우리의 감정이라든지, 느낌, 누구를 좋아한다는 것조차도, 세상에,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관여할 줄은 우리는 상상도 못한 겁니다.

 

자, 그다음을 한번 봅시다. 8장에 보게 되면 반지를 빼서 줬다는 이야기가 나오고요(에8:2). 그래서 전국 각 도에다가 빨리 통보를 해가지고 다시 유대인들을 살리려고 하니까(에8:11), 8장 17절에 보면 “왕의 조명이 이르는 각 도, 각 읍에서 유다 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 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하여튼 비겁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계속해서 예외의 자리에 유대인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사나라는 이 예외의 자리에, 법을 초월한, 사랑을 입은 유대나라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세상나라가 사는 유일한 길이 되는 거예요. 그들의 임무가 되는 겁니다.

 

9장을 봅시다. 9장을 보게 되면 모르드개를 두려워했다고 되어 있고(에9:3), 그래서 유대인이 도성 수산에서 오백 인을 또 죽였어요. 전에 죽였는데 또 죽였어요(에9:6). 그 다음에 10절에 보면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고, 하지만 재산에는 손대지 않았어요.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이것은 내가 너희들 적하고 같은 급인 줄 아느냐? 그게 아니다 이 말이죠. 재산에 탐을 내버리면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노림수가 딴 데 있다는 것을 티를 내는 거예요. 노림수가.

 

하나님이 예외의 상태에 있어서 법적으로 이렇게 통치를 할 때에, 그 법은 본토인들이 이렇게 많이 죽는데, 죽을 때 그 기준이 뭐가 되겠어요? 많이 못돼서 그렇다고 그렇게 할까요? 그 기준이 뭐겠습니까? 부모한테 효도를 안 해서 그럴까요? 그게 아니죠. 뭐냐 하면은 유대인이 갖고 있던 그 언약에 대해서 미워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이 죽는 겁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을 핍박하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그런 게 있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린다고 했죠(창12:3).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정해준 그 사람에 대해서 네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따라서 너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유대인들과 바사본토인들과 이렇게 안 만나면 될 게 아니냐, 바사인들의 운명은요, 안 만나고 싶어도 유대인들과 같이 살게 되어 있어요. 모이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하신 거예요. 이게 바로 전도고 이게 바로 선교라는 겁니다. 여기 에스더 9장 6절에 보면 “유다 인이 또 도성 수산에서 오백 인을 죽이고” 또 15절에 봐도 “아달월 십사 일에도 수산에 있는 유다 인이 모여 또 삼백 인을 수산에서 도륙하되 그 재산에는 손대지 아니하였고” 아달월은 12월이죠. 그리고 16절에 보면 “왕의 각 도에 있는 다른 유다 인들이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며 자기를 미워하는 자 칠만 오천 인을 도륙하되 그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이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 설명을 하면 복잡한 면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은 소위 공동체라는 거예요. 의기투합했다는 거예요. 의기투합했다. 의견이 하나가 될 때에는 계기가 있어야 해요. 어떤 계기냐 하면은 “감히 나에게 대들다니!”하는 계기로 하면 절대로 이거는 공동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어떤 점이 어려운가 하면은, 나한테 해코지했기 때문에 복수해버리면 이거는 사적인 복수지 주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종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러면 뭘 겪게 되느냐, 첫째는 그들이 같이 절망해야 돼요. 같이 절망. 같이 절망해야 돼요. 같이 절망해야 된다는 것을 풀이하게 되면 서로가 믿을 구석이 없어야 돼요. 교회에서 “나는 저 교회를 믿습니다. 나는 저 교회를 의지합니다.”라는 그런 마음이 없어야 돼요.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없어야 돼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을 믿지 말라는 뜻이에요.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것은 그 안에 누가 포함이 되느냐 하면은, 나도 남들과 마찬가지고 믿음의 대상이 못 되는 겁니다.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은 우리는 다 같이 이 땅에서는 같이 절망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 중에 유력한 자가 나타나서 뭐 어떻게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회가 재정이 어렵다. 어떤 유력한 자가 우리교회에 나타나가지고 십일조 한 300만원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력으로, 자기 힘으로 어떤 기대를 이어가려는, 희망을 이어가려는 시도에 불과해요. 그러면 온전한 절망이 되지를 못해요. “그래도 뭐 주께서 보내준 사람이 계시겠지.” 뭐 주께서 보내준 사람이라고 말은 잘해요. 이렇게 기다리게 되면 이거는 사적인, 개인적인 감정에 불과하다 이 말이죠.

 

근데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어느 누구하나 믿을 구석이 없어요. 전부 다 절망해야 돼요. 다 절망해야. 다 절망. 그리고 에스더도 자신감을 못 비쳤습니다. 뭐 죽으면 죽으리라, 이미 이것도 절망적이에요. 그 말 자체가. “아이고, 오빠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내가. 내 남편 꼬셔가지고 이거 완전히 바꿀게.”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도 같이 금식하고 자기도 벌벌 떠는 거예요. 자, 이 말을 다시 해봅시다. 같이 절망한다고 했죠. 같이 절망한다는 말이 얼른 들으면 울고불고 하는 그런 뜻으로 생각하는데, 좀 더 깊이 생각하면 다 같이 평안을 누린다는 뜻이에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은 제일 사람들에게 사는 게 힘든 것이 뭐냐, 사람하고 엮이는 것이 제일 힘들어요. 요 근래 설교시간에 자주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개, 고양이 키우는 사람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사람하고 엮이기 싫어서 개, 고양이가 편해요. 지난 낮 설교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얼마나 사람하고 엮이기 싫었으면 산속에서 모기한테 뜯기고 파리한테 시달리는 것이 사람한테 엮이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한지 몰라요. 사람한테 얼마나 시달렸으면. 믿는다, 믿는다 해가지고 전부 다 사기당한 사람들이에요.

 

뭔가 빌붙으면 노림수 쓰는 기분 같아요. 다 같이 절망할 때는 다 같이 이게 얼마나 평안한지 몰라요. 왜? 기대를 안 하니까. 조금 물만 대줘도 “아이고, 고맙습니다.”(기도도 안 했는데) “앞자리 앉으세요.” “아이고, 고맙습니다.”(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집사님, 제가 그 정도 할 여유가 있습니다.”(나는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고마움이 스스로 발생되는 거예요.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저 사람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타이밍 맞춰서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아니, 아니 이런 잡스러운 생각하면 안 돼. 허락하신다는 것도 내 욕심이야.’

 

이게 뭐냐 하면은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 기대하지 말고 그때그때, 그 순간순간 감사하시라 이 말입니다. 그 순간 감사해야 되고. 감사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종이 되거나 노리개가 되면 안 돼요. “내가 당신에게 퍼준 게 얼만데 당신 이리 나오면 돼?” 그거는 세상에서 하는 소리고요. “줄 때 줬으면 됐지, 줘놓고 뭘 딴소리해! 나는 사람 안 믿어.” 다 같이 믿지 않음으로서 다 같이 서로 사랑하게 되는 희한한 결과가 나온 겁니다. 너무 논리가 이상합니까? 기대하지 않음으로서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마음을 아예 삭제한다는 이 말이죠. 제발 이것이 그냥 다른 사람에게 뿐만 아니고 부부사이도 이렇게 살아야 돼요. 이렇게. 오래 살아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같이 살아준 것에 대해서 점점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 늘 유지되어야 합니다. 또 너무 심한 율법을 줘서 죄송합니다.

 

유대인들이 기뻐한다는 것은 첫 번째 같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서 그들은 뭐냐, 같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다 같이 우리는 무능한 자다. 다 같이 무능한 자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인간이 취할 태도는 뭐냐, 우리는 기쁨으로 스스럼없이 자기를 무능한 자로 고백하는 겁니다. 무능한 자로.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중간에 주님과 성도 사이에 유능한 자로 치고 들어오는 자가 있어요. 이걸 사도행전 20장 29절에 보면 이리라고 해요. 늑대. 이리.

 

교회에 있어서 교인들을 노리고 중간에 치고 들어오는 자가 있어요. 자기를 뭐로 보느냐 하면은 무능한 자가 아니고 유능한 자로 자처하면서 치고 들어와요. 절대로 이런 자를 목회자로 세우면 안 됩니다. 자기를 유능한 자로 생각하고 떠벌리는 자를 절대로 목회자로 세우면 그 교회 큰일 납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9절에,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그냥 이리가 아니고 흉악한 이리죠. 양떼의 특징은 목자 없이는 못 살 정도로 무능해요.

 

무능한데, 여기에 이리가 선한목자인양 들어와 버리면, 자기를 유능한 자로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주님 바라보는 방향을, 그들에게 욕심을, 절망을 계속해야 하는데 절망하지 않게 하고 갑자기 희망을 갖게 만들어버리면 이거는 양들의 영혼을 납치한 거죠. 구약에 보면 그런 사람이 있죠. 압살롬. 압살롬의 이야기를 보다보면 덤터기 씌우는 방법이 또 나와요. 압살롬은 되게 억울한 사람입니다. 자기 누이동생이 겁탈 당했거든요. 복수를 벌인 거예요. 그 복수에 대해서 아버지한테 호소를 했지만 아버지는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암논이라는 자기 배다른 오빠한테 당했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친오빠니까, 친오빠로서의 복수심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래서 그 복수를 감행했는데, 그냥 사그리 아버지까지 복수의 대상이 된 거예요. “아버지는 내가 보기에는 정당하지 못하다. 따라서 나는 아버지보다 정당하다. 따라서 정당한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은 정당한 내가 적임자지 아버지는 이미 맛이 갔다. 그리고 이 정당한 것을 백성들에게 호소해보자. 누가 정당한지.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 누가 정당한지. 분명히 백성들은 정당한 쪽에 설 것이고 나는 쿠데타에 성공한다.” 이게 바로 압살롬의 논리였어요. 압살롬은 뭘 빼먹었습니까? 인간은 절망해야 마땅하고 인간은 전부 다 무능자라는 하나님의 언약적 요소를 다 빼버린 거예요. 어떤 실적위주로 나간 겁니다.

 

이거는 일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자식을 잘 키웠다. 그래서 나는 부모노릇을 잘 했으니까 큰소리친다. 이거는 약속을, 복음을 전하는 부모의 태도가 아닙니다. 부모의 태도가 아니에요. “얘야, 내가 얼마나 못난 부모인지. 너를 박사로 만들다니. 이거는 내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이다. 네가 국문학박사가 되다니. 이거는 해서는 안 될 짓이야.” 그럼 자식도 “엄마, 국문학 박사가 되는 죄를 지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걸 죄라고 인정하오니 교만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네가 나와 생각이 같구나. 너한테도 다 계획이 있었구나.” 이상한 가족에 이상한 대화에요.

 

그래서 재산을 빼앗지 않는 것은 자신의 복수심의 성과를 자기가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이 말이죠. 사적인 복수가 아니에요. 유대인이 노리는 것은 다른 차원에서 복수를 한 겁니다. 뭐냐 하면은 하나님을 건드렸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은 그냥 겸손의 말이 아니고 자기들은 정말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절망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절망했느냐 하면은 복수할 기회조차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복수할 기회조차도.

 

이 부림절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달력으로 12월이잖아요. 12월 13일부터 14일까지 이틀 동안 그 당시에 지키는데, 요즘 이스라엘 달력에 보면 제일 먼저 유월절 그전에 부림절이에요. 제가 부림절에 이스라엘에 갔는데요. 부림절이 언제냐 하면은 2월말부터 3월초까지 부림절을 지켰습니다. 옛날 날짜로서는. 그 부림절을 지키면서 그들은 시커먼 옷을 전부 다 입고 펭귄처럼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펭귄처럼. 특히 밤중에 잘 돌아다녔어요. 밤중에.

 

왜 그러냐 하면은 밤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다음 날을 기약하지 못할 최후의 순간임을, 그래서 그들은 장례식 복장을 입고 돌아다닌 거예요. 우리는 진즉에 이렇게 힘없이 무능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은 누구 덕이냐, 이거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 된다. 그래서 그들은 부림절을 지키는 겁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지키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에 의해서 주께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죠.

 

그들은 에스더를 보면서도 왜 그렇게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뭘까요? 제가 뜬금없는 질문을 해서 죄송합니다. 그들은 뭐냐 하면은 역사적 의식을 아직도 유지하기 때문에 그래요. 좋았다, 큰일 날 뻔했다, 고맙다, 그거 다 과거지사입니다. 이제는 다 과거지사가 되어서, “한때 그런 일이 있었다. 이제는 그것을 교훈삼아서 우리는 정신 차렸다.” 정신 안 차렸습니다. 과거에 그런 일이 있어서 절망했지만 우리는 정신 차려서 다시는 절망하지 않기, 다시는 우리가 서로가 무능하지 않기, 그렇게 각오로 나선다면 그 사람은 바로 비-복음적인, 그런 악마적인 요소를 끌고 가는 사람인 겁니다.

 

이 시간 마지막으로 교재 3페이지를 보겠습니다. 3페이지를 보기 전에 교재에서 중요한 것을 하겠습니다. 아니, 3페이지를 보겠습니다. 4페이지 중간에 보면 이래요.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회의구성은 ‘교환의 통합’ 덕분이다. 통합은 세 층위에서 이루어지는데, 먼저 친족체계의 층위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사람은 우선 부부가 결혼해서 자식을 놓으면 그게 이제 시작이다. 이 말입니다. 혈육관계의 시작이에요.

 

『친족관계의 층위다.』 층위라는 것은 그러한 위치를 고수한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핏줄은 가장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동물도 자기 새끼를 사랑하듯이, 인간도 세상에 어떤 가치라도 나와 내 자식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어요. 이러한 결속력이 아무리 사회가 다변화되고 커진다고 할지라도 내 새끼, 내 가족중심은 변함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제가. 육에서 가족의 혈육적인 층위를, 통합을 깨는 것은 인간의 역사상 이런 일은 없다 이 말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단단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제가 이걸 쓰고 싶었던 것은 뭐 복음이고 예수고 십자가고 간에 기본적인 것이 깔려있는, 쪼개지지 않는 가장 단단한 바탕은 뭐냐, 내 새끼, 내 자식이에요. 우리 부모고. 아무리 남의 자식이 예뻐도 나 닮은 내 자식이 더 예뻐요. 나 닮은 내 자식이 더 예쁘다니까요. 고슴도치 새끼보고 “고슴도치 언니가 좋아? 사슴이 좋아?” 물어보라 이 말이죠. 나 닮은 부모, 나 닮은 자식을 더 좋아하죠. 이게 우리가 그렇게 뭐 바사나라 하만은 비-언약적이고 악마가 거기에 개재되어 있고 대적이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입장을 바꿔서, 우리가 하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바사나라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저 유대나라는 필리핀인이고 캄보디아인이고 네팔인인 거예요. 그냥 이주민이에요. 이주민.

 

그러니까 그들을 핍박하고, 핍박까지는 안 했죠. 핍박은 안 했지만 “그냥 봐줄게. 그냥 조용히 살아라. 까불지 말고.”라고 그렇게 대처하는 것. 본토인이 중심이니까. 본토인은 자기 혈육중심이니까. 혈육중심으로서 혈육이 아닌 다른 민족이 사는 것에 대해서 그 정도로 배려해주면 그것도 대단한 혜택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성경 에스더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일반적인 정서, 인간의 정서를 보게 되면, 이 유대인이 살았다고 까부는 것은 너무나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이 칸막이를 어떻게 인간이 뛰어넘습니까?

 

아까 강의한 것을 다시 해볼까요? 버스 정류장에 줄을 서고 있다. 이게 왜 죄냐? 이 말이죠. 극장에 가서 줄 서있고 같이 모여서 유흥을 즐긴다. 이게 뭐가 나빠요? 그런데 벽의 커튼을 쳐버리면 여기 이상한 나라가 있죠. 이상한 나라. 희생물의 요소가 없으면 멸망하는 나라. 그 나라가 유대민족입니다. 그러니까 바사나라는 이 민족이 자기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이미 이 나라에 단속, 단단한 혈육 이거는 허물어지고 무용지물이 됐다 이 말이죠. 혈육을 깨는 이것이 하나님이 옛날 아담 계열에 속한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새 계열로 인한 심판입니다. 새 계열의 입장에서 옛날 계열을 심판하죠.

 

두 번째가 뭐냐 하면은 『경제의 층위』 이것도 중요하죠. 자, 가족끼리 모였다고 합시다. 가족끼리 모였을 때에 너는 내 자식이고, 아버지 어머니라고 할 때는 아직까지 애들이고 성인이 될 때까지 에요. 성인이 될 때까지인데. 그 다음부터 좀 컸다 싶으면 부모들이 부담스러워요. 자식을 내보내고 싶어요. 그저 둘이만 늙은 몸을 가지고 같이 조용하게 살고 싶어요. 그때 부모가 요구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크게 쓸게요. 경제자립입니다. 경제자립하지 않은 자식은 자식이 아니므니이다. 이거는 빈대에요. 평생 빈대에요. 경제자립이 돼줘야 이게 인간이 됩니다. 인간은.

 

인간은 돈이 있어야 인간이지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인간이 아닙니다. 노숙자죠. 동물과 사람의 경계선입니다. 아버지고보고 엄마보고 괴롭다고 하지 마세요. 그동안 몇 억 때려 넣어서 대학까지 보내줬어요. 그러면 내가 알아서 해야죠. 그러면 자식들이 이야기하죠. “제가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이력서 백군데 넣고 얼마나 노력합니까?” “다 커서 그런 시시한 변명하지 마! 그것도 너 팔자다.” “아버님, 너무해요.” “너무하기는. 너 키운다고 벌써 고관절 다 나갔다. 경제자립을 하든지, 경제 자립한 여자를 만나든지, 아니면 경제 자립한 남자를 만나든지. 빈대를 하려면 거기 가서 빈대해라.”

 

그래서 결혼하니까 또 애 둘 낳아가지고 가까운 데로 이사를 오네. 3층에 부모 살고 4층에 자식이 살아가지고 이거는 층간소음도 이런 층간소음이 없어. 이거는 스카이 콩콩 타고. 이거는 자식한테 항의할 수도 없고. 그러다가 주차하다가 아버지 차를 박아버렸네. 이거는 물어달라고 할 수도 없고. 차주가 자기 아버지라. 이게 말이 돼요. 이게. 그런데 딸은 엄마 아니면 애 못 키우고 자기는 돈 벌이하러 나간다고 하면서 애 맡겼는데, 문제는 돈을 안 줘. 조선족한테 맡기면 이백만원 줘야 하는데 부모한테 맡기면 십 원도 안 주고, 분유 값도 엄마가 다 대라는 거예요.

 

애를 키운다고 온갖 몸이 다 아파서 병원비도 만만치 않고, 엑스레이 찍고 해도 돈 한 푼 안 줘요. “조금만 애 더 클 때까지 돌봐주면, 그러면 부모님 모실게요.” 부모는 거의 죽을 판인데, 언제 모실 건데? 그래가지고 맞벌이 한다고 결혼했더니만 세상에 또 욕심내가지고, 신혼 초에 그냥 빌라 살지, 뭣 하러 대출받아서 아파트 산다고. 대출 2억을 받아서 대출금 갚아야 한다고 부모한테는 용돈 없다고 하고. 대출 끝나니까 우리는 신세대라고 해서 해외 놀러가야 된대. 유럽으로 놀러가 버리고. 돈이 없어. 돈이. 이러한 돈의 관계, 이거 누가 끊습니까? 인간은 안 끊어지죠. 아무리 에스더가 어떻고 뭐라고 해도 이 관계는 끊어지지 않아요.

 

세 번째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바로 명령관계, 『언어체계의 층위』 사회 나가면 직장의 명령, 현실이 주는 법적인 명령, 그거 안 들으면 못 사는데요. 명령관계 이런 것. 교재에 보면 『유전자의 교환을 보장한다.』라고 했죠. 다시 말해서 경제적이고 혈육적이고 높은 자리에 서서 남에게 명령할 수 있는 언어적 층위, 이런 층위가 지금까지 계속 욕했던 바사나라의 현실이고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이걸 누가 가상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오직 희생물 되신, 십자가 지신 주님만이 가상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안녕히 주무세요.

 

 첨부파일 : 202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8강-에스더 강해.hwp (80.0K), Dow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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