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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3 10:43:16 조회 : 145         
강남-누가복음 6장 20절 (종말의 위엄) 210518b-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6장 20절 (종말의 위엄) 210518b-이근호 목사



예수님께서 여기에 22절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욕 얻어먹음을 당하는 이유가 내가 원하는 것을 예수님이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상대가 있다는 것은 내게 필요할 때 상대라고 말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한테는 내게 필요한 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사람들이 줄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느냐.


이유가 뭐냐 하면은 율법의 도적질이라는 것은, 도적질이란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타인에게 빼내는 게 이게 도적질이에요. 도적질이나 살인이나 간음이나 거짓말이나 다 나쁜 것은 무엇이 확고해지느냐 하면은 셀프, 나 자신이 갈수록 면적이 넓어지는 거에요. 아까 그 D라는 면적에서 Dh만큼 늘어나잖아요. Dh+h만큼. 소량 크든 말든 늘어난단 말이에요.


여기에 에너지가 투입되는데 그 에너지가 어디서 얻습니까? 바로 자기 주변에서 얻는 거에요. 그러면 이 사람이 에너지 얻기 위해서 교회 와서 기도한다. 그러면 기도는 곧 뭐가 된다? 기도는 뭐가 되겠어요? 기도가 뭐에요? 도적질이죠. 왜? 내 면적 키우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내 것이 잘되기 때문에.


종말은 이것을 없애버릴려고 하는데 이걸 키울려고 한단 말이죠. 이게 도적질이에요. 내 몸집을 키우는데 당신은 얼만큼 나한테 보탬이 되겠느냐? 당신이 원하는 것 제공해줄테니까 그것보다 더 많이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는 거에요. 이러한 도적질, 주님이 도적질하실 분은 아니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 방법을 반대로 쓰시겠지요.


자, 이제 뭐가 궁금 하느냐 하면은 이게 인간들이 평소에 하는 생활이 이런 거에요. 눈만 뜨면. 애가 공부 7등하게 되면 5등으로 땡겨야 되고 5등하면 2등으로 땡겨야 되고 그러니까 지혜로운 아이는 7등하면 6등 해야 되지 2등하면 안돼요. 다음에 1등하라고 닦달해가지고 안돼요. 요령껏 석차를 조절해야지요. 그 정도 되면 천재지요.


이것이 인간들의 방법이고 악마의 방법이라면 주님이 쓰시는 방법은 뭐냐? 주님이 쓰시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강력한 자석이에요. 버티지 못할 정도로 빨아 당깁니다. 그래서 종말은 강한 시간이다. 강한 시간. 모든 시간이 거기 다 빨려 들어가요.


의존 강의할 때 고스트 바스터 했지요? 고스트 바스터란 노래 있잖아요. 청소기 가지고 귀신 빨아 당기는 것. 그거 하듯이 쫙 빨아 당겨버립니다. 저항할 수가 없어요. 막 빨아 당기니까 옷이 이렇게 가요. 종말의 그 블랙홀 쪽으로 모든 게 거기에 빠져 들어간다고요. 거기에 빠져 들어가요. 그거 안 빠져들려고 발버둥 치고 버텨도 주님의 그 강력한 자장, 자석의 그 필드, 자장에 의해서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거에요.


이게 바로 제자들이죠. 이게 제자들이고 이게 바로 사도들이죠. 이게 사도들이고 제자들이에요. 그리고 제자들이 하는 말이 “이번 일은 내가 안했어” 이래요. “내가 안했어. 이번 일은 내가 안했다고” 이거는 주께서 능력주시는 자가 했지 이건 내가 안했다. 맨날 이래요.


네가 얻어맞고 강도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이렇게 배고픔을 당하고 그런 요소에도 복음을 전했다. 네가 했지? 아니요. 주께서 능력주신 자로 주께서 하셨어. 이런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이런 고백이 막 나오는 거에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이제는 너의 증거는 끝났어. 너 잘났다는 끝났어요. 강력하게 빨아 당기는 주님의 일하심만 그 몸을 휘감고 있는 겁니다. 휘감고 쫙 당겨버립니다. 모든 시간이 거기 빨려 들어가지요. 그렇다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서양의 동화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여러분 잘 아는 겁니다.

그게 뭐 여러 가지의 버전이 있지만 한 가지 중에 이야기한다면 어떤 집에 신기한 암탉이 있는데 늘 아침에 가면 황금계란을 낳아요. 황금계란. 마치 일용할 양식처럼. 또는 만나처럼. 매일같이 황금계란을 낳는데 예를 들어서 그 주일 앞두고는 황금계란을 3개 낳는다든지 그런 식으로 줬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들이 있음과 있음으로 비교하고 비례하기 때문에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은 그 닭 안에 분명히 황금덩어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에요. 그래서 확인해보기 위해서 그 닭을 잡았습니다. 죽었어요. 이야기 끝이 났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제가 왜 거론하느냐 하면은 성도는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쪼개보면 다른 사람하고 똑같아요. 똑같은데 똑같기 때문에 주의 말씀이 자장 걸려가지고 형성하다 보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말씀이 말씀대로 자체적으로 실행해버리는 겁니다. 성취를 해버리는 거에요. 완성을 해버리는 거에요.


그게 날마다 감사의 계란을 낳는 거에요. 성도가. 남 보기에 뭐 별로 감사할 것도 아닌데 소소한 것 세세한 것도 다 감사해. 범사에 감사. 감사의 계란이 막 나오는 거에요. 매일같이 나오는 거에요. 심지어 예수 이름으로 핍박을 받고 악하다고 할지라도 22절 끝에 봅시다. 너희에게 뭐가 있다? “복이 있도다” 복이란 계란을 낳는 거에요. 복이란 계란을.


복이란 계란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미완료가 아니고 자체가 완성이에요. 내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완성되는 겁니다. 23절에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선지자들이 기뻐하고 좋아했을 때에 사람들은 선지자의 기쁨을 보고 선지자 노릇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과연 선지자가 기뻐했는지도 우리가 좀 의심스럽고. 목 베임을 당해서 기쁜지. 그러나 우리는 선지자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경험한 것을 그 가능성을 넘어서는 불가능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마치 평범한 닭이 황금계란을 낳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왜 감사하냐? 그럼 성도는 왜 감사하냐? 여러분들 노인네들이 아침에 운동할 때 동네 보면, 보면 여기도 있던데요. 흔들흔들하고 빙빙 도는 거 있지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흔들흔들하는 기계가 올라탄 사람보다 강합니까? 약합니까? 강하지요. 강하기 때문에 의지해서 운동이 되는 거에요. 기계가 약하면 같이 넘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성도라 하는 것은 주님의 완성된 것, 완료된 것, 확고한 것, 분명한 것, 강력한 죽음에 승리했다는 명백한 그 강함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성도에요. 성도라고요. 거기 올라타서 이렇게 운동해도 괜찮고 주님 목 붙들고 흔들어도 괜찮고 이 세상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떤 짓을 해도 주님의 죄 사해주는 그 확고함과 든든함. 그거는 변동이 없습니다. 왜냐하면은 나하고 계약 맺은 게 아니기 때문에.


자, 이제부터 어렵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운동기구하고 계약을 맺은 거에요. 운동하는 나하고 맺은 게 아니고. 거기서 까불든 말든 개미가 붙든 관계없고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확고하게 고정된 완료되어 버린. 처음이 곧 나중이고 이미 확정 나버린 그것과 하나님께서는 계약을 성사시킨 겁니다. 계약서에.


그래서 계약서의 싸인에 누구 이름이 있느냐 하면은 예수의 이름으로 싸인되어 있어요. 예수 이름으로 그 증서가 있어야 구원받는 거에요. 우리 이름은 소용없어요. 거기에 비해서 여기 24절 봅시다. 여기 복과 반대말이 뭐라고 되어 있어요? 복 있는 사람 반대말이. “화 있을진저” 저주 있으리라. 화, 쉽게 말해서 저주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이걸 좀 설명해 드리겠어요. 여기 종말에서 예수님이 등장했습니다. 여기는 황무하죠. 인간같은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 세상에 이스라엘과 함께 있던 여호와의 이름께서 이스라엘에서 튀어나와버린 거에요.


이스라엘에서 차버리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존에 있던 모든 줄줄이 따라오던 언약과 약속을 여호와 이름이 다 맡아버려요. 다 담당해버립니다. 그러면서 장차 인간 세계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계신 거에요. 약속에 의해서 들어갈 준비를 하십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주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주의 이름.


약속대로 주님이 오시면 이스라엘은 새로 만들어진다 그 약속을 믿었던 겁니다. 주의 이름에 의하면 여기 안에 뭐가 포함되느냐? 여기 새로운 이스라엘이 포함되는 겁니다. 기존의 이스라엘, 혈육적 이스라엘과 교체가 되는 거에요. 그 여호와의 이름이 여기 유대민족 안에 들어오신 겁니다. 들어올 때 언약대로 약속대로 들어오신 겁니다.


들어오시게 될 때 그러면 이거는 하나의 심판주로 오시기 때문에 이쪽은 뭐냐 하면은 멸망의 대상이죠. 멸망의 대상이란 말이죠. 그런데 멸망의 대상의 이들은 벌써 이스라엘을 통해서 언약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쪽에 있는 자들은 비록 가난해도 지옥 갑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가 스스로 위로해야 되잖아요. 스스로 위로하고 스스로 부요하다고 우기고 스스로 개뿔도 없으면서 웃고, 그러니까 이게 저주가 된다는 거에요. 이게 저주란 말이죠. 주님께서 유발시킨 거에요. 유발시킨 거. 주님께서 우리가 평소에 인간들이 실상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다 까발리는 겁니다. 뭐하기, 척하기, 뭐한 척하기. 돈도 개뿔도 없으면서 힘도 없으면서 강한 척하고.


저주 있을지어다 너희 부요한 자여. 여기 부자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부자이고 싶어하는 자. 또는 없으면서도 나름 부자라고 스스로 위로하는 자. 이게 뭐냐? 자체적으로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심리적 조정에 나서는 겁니다. 그래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 정도로 감사하지. 굉장히 신앙인 같애. 자체적으로 조절 가능한 것을 조절하는 거에요. 중들처럼 말이죠.


여러분들 중들이 머리를 깎는다 하잖아요. 머리를 깎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머리를 못 기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고 생각하세요. 결과적으로 같은 말이지만 이게 심리적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머리 길고 싶어 환장하는데 아 또 깎아야 되나? 이거는 머리 억지로 깎는 것이고. 이거는 머리를 안 기르는 조건 하에 자기는 중으로서 밥벌이가 돼요.


문신을 못 지워서 문신을 갖고 있는 게 아니고 문신 지워질까봐 염려하면서 문신하는 거에요. 인간은. 이게 저주받은 인간의 원리입니다. 인간은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부자의 욕망은 더 커지게 되어 있어요.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같은 인간인데 왜 나는 팔자가 이 모양이냐. 집에다가 잘 풀리는 집 화장지 이만하게 사 놔도 갈수록 일이 풀리는 일이 없네. 안 풀리는 정도가 아니고 뭘 해도 안 풀려요. 집에 창고에 보면 휴지 이만큼 사놨거든. 잘 풀리는 집이라고. 해도 안 풀려.


우리 집안이 잘 됐으면 하는 욕망은 갈수록 점점 더, 더 커지는 겁니다. 이걸 인간이 감당을 못해요. 그 욕망을, 그 결핍을 그 목마름을 버텨낼 수가 없습니다. 버텨낼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더 어떻게 합니까? 위장하고 위선으로 살 수밖에 없지요. 내가 예수 믿어서 참는다 이런 식으로. 너 참는 거하고 예수 믿는 거하고 무슨 관계인데. 핵폭탄 터트렸는데 뭐 거기서 새삼스럽게 폼 내고 척하고 그런 게 있어요.


바로 이 세상에는 악마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다 하지요. 그래서 성도가 뭐냐 하면은 악마가 할 수 없는 것을 성도는 해냅니다. 이거는 인간이 가난한 게 아니에요. 그럼 뭐냐 하면은 제가 대구강의 때 했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무너지는 시스템을 갖고 오잖아요. 성도는 한 달 수입이 2천이고 집이 세 채라도 자기를 가난하다고 볼 수 있는 것. 이것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그러한 특징입니다. 이건 사람의 능력으로 안돼요. 물론 한 달 수업 2억보다 되게 가난하잖아요.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 속에 예수님이 가난하게 했다는 그 말씀이 작용하게 되면 아무리 떵떵거리면서 잘 먹고 잘 살고 차가 여러 대 있어도 자기 자신을 가난한 자로 인식하는 그런 놀라운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을 세 자로 이야기하면 이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거푸집. 형틀을 뽑아내서 상품을 반복해서 찍어내기 위해서 거푸집 있잖아요. ‘거푸집’.


인간의 죄인 됨을 인간은 악마로 살았고 나 밖에 모른다는 것을 거푸집으로 사용해가지고 거기에다가 주님의 예수의 피와 희생을 거기에다가 찍어내는 겁니다. 그걸 찍어내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를 할 때 제가 오전인가 오후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는데 오후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어요. 피라고 했을 때 이 개념만 알고 있으면 돼요.


깨어짐이에요. ‘깨어짐’. 쨍그랑. 뭔가 그릇이 좋은 그릇이 쨍그랑 깨어지듯이 깨어짐을 거푸집으로 이용해서 깨어짐을 품고 있는 사람, 품고 있는 사람이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주님이 깨어졌다는 거에요. 주님이 깨어졌다. 이 땅에서. 인간들을 위하여. 이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욕 얻어먹고 미움을 당했다 이 말입니다. 주님이 사람 대우 못 받았다 이 말이에요.


사람 대우 못 받은 그 분을 나의 구주로 주인으로 모신 거에요. 그것도 거푸집, 나의 거푸집을 사용해서 찍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재산이 얼마냐 얼마나 착했느냐 얼마나 훌륭하냐가 아무상관 없는 이야기에요. 그리스도를 모시느냐 모시지 않느냐 그 차이뿐이에요. 그런데 그리스도가 거푸집이 되지 못하고 거푸집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25절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웃는 것이 죄입니까? 라고 묻지 말고 무조건 이것은 무조건 주님께서 없는 사람을 주님이 안 계신 사람을 무조건 애통하도록 그렇게 만드신 거에요. 물론 율법적으로 죄인이니까 그렇게 하지요. 그 다음에 26절 봅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자, 선지자들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 26절 선지자들은 어떤 사람이냐? 거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지 못하는 사람. 칭찬을 받지 못하는 사람.


왜? 납득이 안 되니까. 납득이. 납득이 알지요? 납득이. 건축학개론에 나오는 납득이 있지요. 납득이 안 되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 쪽 세계, 하늘나라하고 땅하고 대화가 됩니까? 하나는 불가능이고 하나는 가능인데요. 하나는 존재고 하나는 비존재인데요. 대화가 안 되지요. 대화가 안 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가 없고 대우를 받을 수가 없어요. 우리 과라는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무슨 뜻인지 여러분 아시겠지요? 선지자들은 자기 말을 못해요. 자기가 가능한 말을 못하고 불가능한 내용만 담아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선지자에게 성령이 왔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성신이 왔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께 문제. 오늘 강의 들었으니까 문제 냅니다. 이상하게 문제에 약해.


문제1. 성경에 마태복음 5장에 “너희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라. 너희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는 이 말씀과 방금했던 누가복음 6장 26절에 선지자의 말씀과 어떻게 일치 시킬 수 있습니까? 이게 문제. 첫 번째 문제. 마태복음 5장에 나오지요? 빛과 소금이 되어라. 너희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라.


그 말을 사람들이 아까 비교 또는 비례, 존재, 있음을 전제로 해서 해버리면 아까 우리 아까 첫째 시간에 봤던 면적 늘리기 있지요. 다시 이야기할까요? 안 해도 되지요? 면적. 지금은 내가 56만큼 착한데 내일되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서 57, 모레 되면 58 이렇게 되게 되면 그래프가 어떻게 됩니까? 일차곡선 이렇게 올라가겠지요. 이렇게 올라가는 것.


이렇게 포물선 그려서 더 올라가는 것. 이걸 염두해두겠지요. 인간 마음속에 더 놓은 곳을 향하여 천당을 기대하지요. 그런데 성도의 그래프는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곡선인데 뒤에는 없어요. 이제는 내가 죽었기 때문에 내 안에 누가 삽니까? 그리스도가 사시는 세상이죠. 대화가 안 되지요.


자, 이 말씀 듣고 빛과 소금이 되게 되면 지금 나의 선함이 56인데 내일되면 57, 더 착하면 58, 점점 더 100, 200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을 56때 가질 수 있지요. 그러니까 빛과 소금이 돼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영광을 돌린다 하는 그 말씀을 왜 주셨습니까? 주신 이유가 뭡니까? 문제 제가 냈어요 지금. 후딱 답변할게요.


성도는요 분명히 알 이야기했지요? 황금 알. 성도는 그냥 초라하고 모자란 존재 정도가 아니라 거기서 낯선 것이 나와요. 낯선 것이. 그 낯선 것이 뭐냐 하면은 빛과 소금의 역할이 이게 튀어나오네요. 그럴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으면서. 그럴 때 누가 화들짝 놀랍니까? 남들이 놀라는 게 아니고 본인이, 본인이 놀래버리는 거에요. 본인이. 내가 미쳤어 미쳤어. 내가 왜 이래.


나는 결단코 이런 인간이 아니야. 내가 빛과 소금 이거는 말도 안돼. 나는 돈 외에는 사랑한 게 없어. 돈이 최고야. 이게 우리 모습이잖아요. 목사님은 안 그렇겠다만은. 성경 말씀이 원인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요. 죄인으로 만들고 죄인이기 때문에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귀하게 보시는 겁니다.


죄인으로 만들고 “죄인이지?” “예.” “그럼 이런 거 나오는 거 네 솜씨 아니지?” “예.” 이게 또 나오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귀한 존재에요. 귀한 존재인데 어느 정도로 귀한 존재이냐 하면은 정말 보잘 것 없기 때문에 귀한 존재에요. 무가치하고 보잘 것 없고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기 때문에 귀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 병원에 어린 아이가 거의 1살 좀 더 된 아이가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나 엄마가 걱정을 많이 한 거죠. 하얀 가운 입은 사람만 보면 기겁하고 질겁을 하고 이래가지고 이거 또 어떻게 달래가지고 네가 주사 맞으면 맛있는 거 해줄게 이렇게 달랠 것이냐 고민하고 있는데 병원에 딱 갔는데 의사 선생님 봐도 아이가 울지를 않아요.


주사 맞자. 주사 맞아도 살짝 찡그리고 울지를 않는 거에요. 너무 기특해가지고 “ 얘 다른 애들 다 울고 하는데 너 어떻게 이렇게 주사 맞아도 안 우느냐?” “엄마 나 죄인이거든.” 그런 이야기는 없을 거에요. 엄마의 사랑을 못잊어 하든지 엄마의 기도 못잊어 하든지. 또 누구처럼 아주 시근 있는 아이 같으면 엄마도 고생하는데 나 이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해야지. 감수해야지. 그런 시근 있는 애들이 있어요. 있겠지만.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된다고 하는 것은 조건이 뭐냐 하면은 말씀에 입각해서 우리는 어떤 말씀도 못 지키는 그야말로 도적질만 하고 살인만 하는 그런 나쁜 인간. 남의 것을 뺏고 이용하고 아까 면적 나오지만 이 면적을 점점 더 키워서 남한테 내세울 거 있는 사람. 남한테 내 놓을게 있는 어떤 건전함이라든지 또는 위세라든지 능력이라든지 내가 이 정도 되는 인간이야 라고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마지막 때에 십자가 앞에서 이미 한꺼번에 내 안에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내 안에 죄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게 주님의 거저 주신 선물로 이해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것을 본인의 체질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본인의 능력으로 본인이 할 수 있는 자기의 가능성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고 본인이 놀래는 거에요. “주여 내가 이런 인간이 아님을 주께서 아시잖아요 주여.” 고마워할 줄 알지요.


마태복음 11장 잠시 보겠습니다. 11장 25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감사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걸 있는 자들에게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누구란 말입니까? 그 뒤에 어린아이랑 대비되니까 어른들이에요. 어른들에게 똑똑하고 알고 사회 경험 있다는 어른들에게 숨기시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얻어먹는 주는대로만 사는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나심을 감사합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은 누구 뜻이다? 아버지의 뜻이다.


그럼 어른들은 지옥가고 어린이들만 천당 간다는 그런 뜻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는 전부 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면은 뻔뻔스럽게 얻어먹는 거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어린아이 같은 심정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 심정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이 말씀, 마태복음 25장에 이 말씀을 죄인을 통해서 실현시키는 결과물로 성도가 생기는 거에요.


모든 것은 성경 말씀이 결과물을 말려도 안돼. 반드시 이게 나오게 되어 있는데 하필 그 나오는 그 대상자가 누구다? 성령 받은 우리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하고는 대화가 안 되지요. 대화가 안 되니까 미움 받는 거에요. 뭐 통해야지요. 자, 그럼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가? 세상 사람들의 심보, 의식 딱 이겁니다.


사회가 나를 안 받아주면 나는 어떡해. 나는 어떡해. 사회, 다른 말로 주변. 주변의 타인. 사회가 나를 안 받아주면 나는 어떻게 살아? 어떻게 살아. 이걸 달리 이야기할까요? 나와 대화되는 사람이 없으면 나는 어떻게? 죽어야지. 나와 대화되는 사람이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 집에 돈도 있고 집도 있고 있는데 차도 있는데 친구가 한 명도 없다. 안 놀아줘. 그럼 나는 어떻게 살지요? 이게 바로 세상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있는 거에요.


걱정을 하니까 마귀가 그들의 걱정을 부응해서 도와주는 겁니다. 그래 네가 절대로 딴 생각하면 안돼. 지금 네 친구 있고 사회가 너 받아줄 때 너 여기서 빠져나가면 안돼. 이게 최고의 행복이야. 네가 추구해야 될 목표가 바로 가장 좋은 것은 다 여기에 있는 거야 하고 거기서 딴 소리, 딴 생각 말고 딴 목적 말고 거기에 딱 모이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회 있잖아요. 이 사회. 이 사회가 뭐냐 하면은 의미의 바탕이 없습니다. 뿌리가 붕 떴어요. 붕 떠있는 거에요. 사회라는 게. 뭔가 속았어요 우리가. 마귀한테 속고 있어요. 뿌리는 없어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지만 사다리 타기하는데 이미 꽝으로 결정났어요. 쭉쭉쭉 타고 내려오는데 꽝이야. 안 통해 꽝인데 꽝이라도 그건 나중 문제고 지금 우선 내가 필요한 내 친구나 대화가 되는 나를 인정해주는 나를 인정해주는 사회가 있다면 나는 숨 쉴만하다. 여기에 몰두하겠다. 이걸로 끝나버리는 거에요. 이 사회가.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실 때 얼마나 외롭게 살았느냐를 한번 생각해보자는 거에요. 십자가 고난만 생각하지 마시고 평소에 말 통하지도 않는 인간하고 제자로 불러다가 맨날 오해만 하는 제자들 붙들고 같이 살았다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드냐 이 말이죠. 그 힘든 체험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 성도에게 그대로 반복시키고 재현시키는 겁니다.


어떤 때는 원망이 일어나는 거에요. 왜 원망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죄 용서는 누가 했습니까? 주님이 했잖아요. 주님이 죄 용서했는데 세상은 나보고 죄 있다 하니까 환장하네. 정작 심판하시고 재판을 하시는 재판장이 우리보고 죄 없다 하시는데.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게 하셔 버렸는데 정작 주변사람들이 너 그래서 지옥 간다. 그렇게 나쁜 짓해서 지옥 간다. 이러고 있으니 이건 아닌데 아무리 성령 받아도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참 뭔가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우리 교회 어떤 분이 오신지 한 1년 되었는데 그 분이 우리 교회 오시면서 고민거리가 있었어요.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는데 자기는 성경에 비춰서 모순되는지 확인을 해봤거든요. 확인을 해보니까 이게 성경에 다른 모순되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이 분이 너무 순진해서 물었어요.


목사님 성경에 이런 말씀 나오는데 지금 목사님 설교하고는 이게 안 맞네요. 그 때부터 목사가 그 사람을 왕따시키고 모든 교인들도 저 사람 이상한 사람 들어왔다. 이래가지고 완전히 그 사회가 안 받아주는 거에요. 그 사회에서 안 받아주는 거에요. 답변을 해야 되는데 답변은 안 해놓고 왕따시키는 것이 답변이 되는 거에요. 왕따시키는 것이.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은 그동안 마귀가 그렇게 해가지고 기 안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분은 기죽고 안 죽고가 문제가 아니고 관심사가 뭐냐 하면은 진리가 무엇인가? 진짜 복음이 무엇인가? 성경의 내용이 모순되지 않는 이것이 무엇인가 그게 궁금하기 때문에 사회가 나를 욕하든 말든 그건 신경도 없어요. 진짜 성경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이냐?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고난을 받은 그 깨어짐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성도. 예수님의 피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성도에요. 나 때문에 이렇게 깨어졌다는 사실. 나 용서할려고 이렇게 죽었다는 사실, 그 사실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 갑자기 노래 가사가 생각이 나네. 꽃보다 아름답다 뭐. 청바지 입고 기타 치는 사람.


하여튼 성도는 본인의 잘남이 아니고 나 못남인데 피 때문에 용서했어요. 왜 피 때문이냐? 성경대로 하면 메시야가 유월절 어린양으로 본인이 날 가지고 본인 할 일을 증명해버린 거에요. 나를 가지고. 아무것도 아닌 나를 가지고. 메시야는 이렇다. 이런 일을 하러 왔다. 이걸 증명해버린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했을 때에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잖아요. 그런데 그 세상과 똑같은 세상에 우리가 안 떠나고 여기에 있는 겁니다. 떠나지 않고 있는 거에요. 그게 마태복음 11장 아까 본 거기 봅시다. 11장 16절부터 보면 제가 읽겠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지혜’, 예수님 본인은 이 세상에 지혜 없다는 것을 본인이 유일한 지혜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지혜 없다는 세계 속에서 증명한다 이 말입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 성도가 갖고 있을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제 정리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오늘 잊지 말라고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면적입니다. D라는 면적에서 D+h. 조금이라도 내 면적을 넓히고 싶은 것. 이것 매일 일상 아닙니까? 일상. 여러분 면적이 늘어나는 것이 좋습니까? 깎여가지고 너덜너덜 걸레가 다 되가지고 이만큼 파먹어가지고 이거 모양 꼬라지 보세요. 갑자기 점선 부분이 생각날까요? 안 날까요? 점선 부분이. 생각나지요?


여기에 빡씨게 기도해서 만회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안하겠습니까? 하지요? 그때는 점쟁이같은 교회 찾아가지요. 주여 만회해주옵소서. 그동안 잘못한 것 십일조 안낸 거 다 낼 테니까. 만회해달라 이 짓하고 있지요. 이게 바로 있음. 있음이니까 제가 면적으로 생각한 거에요. 면적으로. 있으니까. 이것 반드시 면적 기억해야 되고요.


두 번째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의미입니다. ‘약속의 의미’, ‘언약의 의미’ 이것이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움직이는 의미로 만드는 거에요. 움직이는 의미로. 찰리 채플린이 만든 영화가 있어요. 그 영화가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가지고 찰리 채플린이 오늘 유명한 소프라노 연주회 티켓이 있어가지고 가기로 약속되어 있는데 아침에 뭔가 잘못해가지고 여기에 호루라기를 목에 삼켜버렸어요.


호루라기가 잘 빠지지 않으니까 움직이는 호루라기 된 거에요. 소프라노 연주회가니까 소프라노가 랄랄랄라랄랄랄랄라 하니까 여기 목에서 뽀로록 소리가 나온 거에요. 그러니까 눈치 막 주겠지요. 그러나 찰리 채플린이 본인도 어쩔 수가 없어. 예수님의 의미가 호루라기처럼 박혀 있으니까 행함으로 구원받는 건 아닌데 이미 죄의 용서받았는데 이건 아닌데. 자꾸 딸꾹.


이건 뭐 분위기 파악도 안 되고 눈치 줘도 안 되고 자꾸 나오는 거에요. 목사님 이 말씀이 그 말씀 아니잖아요. 이게 왜 자꾸 나오느냐 하면은 주님의 일방적 의미가 박혀버렸어요. 박혀버렸다고요.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연주회장 주위 사람들이 욕하겠지요. 욕 얻어먹었잖아요. 오늘 본문 그 점에서 한번 읽어 보세요. 딱 찰리 채플린이에요.


내가 하늘나라 갈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고 복 받았대, 우끼지요? 그 다음에 주리고 울고. 우는 것 자체가 복 받았대요. 그 다음에 인자로 인하여 예수님으로 인하여 미움 받고 멀리함을 당하고 욕함을 당하고 그때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방금 읽었던 23절 이 대목이 마태복음 5장 소위 팔복. 팔복이란 말 안 좋아해요. 복이 어떻게 8가지가 될 수 있겠어요. 복이. 하나지 무슨 복이 8가지가 있겠습니까. 팔복이라고 하니까 팔복인줄 아는데 그 대목도 나오지만 마태복음 9장에 봐도 비슷한 대목도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은 기쁨이라는 것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결혼식은 기쁨이고 그런 결혼식이 슬픔의 비탄에 잠길 때는 신랑이 신랑 잃어버릴 때 슬픔에 잠기지요. 그럼 99마리 양중에서 한 마리 양의 특징이 뭡니까? 목자를 잃어버린 거에요. 목자를 잃어버리니까 자기는 자기 옆에 어떤 빈자리가 있겠지요? 여기 아까 D라는 면적에서 재산 날라갔다고 아까워서 하는 게 아니고 여기에 뭐가 없었다? 예수님이 없어서 애통하는 자가 바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에요.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고 나는 들러리고 진짜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보고싶어요. 이렇게 될 때 이런 모습이 바로 예수님께서 유발시킨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그 모습이에요.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기뻐한다. 이게 혼인잔치의 기쁨이라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총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의미란 언약에 의해서, 약속에 의해서 함께 있을 자리 형식으로 오는 겁니다. 의미란. 따라서 의미는 자리이기 때문에 내 소유용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자리, 주와 함께 있는 자리, 소망이라는 자리, 주와 함께 있는 자리, 사랑이라는 자리, 주와 함께 있는 자리. 신랑과 함께 있는 자리, 혼인잔치를 이루는 자리.


이런 자리에 함께 있는 자리이지요. 나 여기 있어서 소유용이 아니에요. 따라서 이 자리는 의미를 위해서 언약적 의미를 위해서 나를 부인하게 만듭니다. 내가 그 자리의 주인공이 아니게 하시는 기능을 계속해서 발휘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23절에 봐도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기뻐하고 뛰놀라는 것은 22절에 “인자로 인하여” 예수님에 의하여 기뻐하고 뛰노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지요.


여러분들한테 한번 물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어떤 죄수가 있고 죄수한테 어떤 사람이 국선 변호사로 변호를 해줬는데 나중에 그 죄수가 유죄로 재판에서 죄 있는 것으로 판정이 난다면 변호사가 감옥에 갑니까? 죄수가 감옥에 갑니까? 물어보는 내가 나쁘다. 아무리 변호해도 죄수가 가게 되어 있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변호사 정도가 아니에요. 우리의 죄수입니다. 우리를 대신한 죄수에요. 그래서 십자가 의미가 그거에요. 깨어졌다는 의미가 나는 멀쩡한데 내가 모르는 죄를 위하여 주님이 깨어졌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누가 누구를 변호해야 돼요? 주님이 우리를 변호해야 돼요. 주님이. 감옥에 저주받은 주님이니까요.


그게 함께 있다고 해서 맞물려 있는 걸로 생각하지 말고 함께 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주님이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처리를 알아서 자기 싸인해 가지고 전부 다 알아서 일을 다 끝내버렸어요. 그래서 그 자장, 그 폭풍, 그 힘, 그 허리케인. 야 너 죄 용서받았어 라는 그 힘이 나의 철없음과 나의 시근 없음과 어설픔을 전부 다 휘감고 하늘나라로 빨아 당기는 이야기가 오늘 이야기입니다.


네가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왜? 너는 가난한 자니까. 너 재산이 수십억 있다. 그거 없다고 여겨라. 자식 공부 잘해? 없다고 여겨. 너의 지식? 없다고 여겨. 그냥 가난한 자. 나처럼. 하늘나라 영광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자 됐던 것처럼 가난하게 만들어 가지고 우리를 하늘나라 집어넣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지 않은 우리를 잘난 체하는 우리를 아예 일방적으로 가난한 자로 만들었던 겁니다.


그럼 그 이야기가 약속 있다는데 약속 어디 있습니까? 구약에 어디 있습니까? 바로 출애굽이죠. 출애굽에 이스라엘 전체가 가난한 자, 거지떼들이었어요. 거지떼들. 고아와 과부들이에요. 아무도 그들에게 주인공이 없어요. 친히 하나님이 주인공된 것처럼 오늘날 성도에게도 친히 우리 주님이 우리를 고아와 과부, 친히 목자가 되셔가지고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신다는 내용. 이것을 종말이 되서 메시야를 통해서 우리에게 실현시켰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이루시고 다 해놓으신 그 과정과 절차가 몰랐는데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까지 들어오니 감사합니다. 주께서 얼마나 낮아지셨다가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그 주님에게만 매여서 관심 두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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