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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5 10:09:31 조회 : 122         
3강-요나 1장 4-7절(초과적질서)210714-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180.11)
3강-요나 1장 4-7절(초과적질서)2107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 1장 4-7절입니다.

요나 1:4-7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요나가 가는 곳, 선지자 가는 가는 곳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선지자가 가는 그곳은 세상 사람들이 재수 더럽게 없는 곳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선지자는 특수한 존재거든요. 일반인들은 자기의 중심을 몰라요. 자기가 인간이라는 게 어디서 시작되었으며 어디서 끝나는지를,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존재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요나가 섞여 들어갔습니다. 요나가 섞여 들어가니까 거기에 누구도 같이 섞여 들어갔느냐 하면, 폭풍도 같이 섞여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폭풍 앞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무능한 그러한 존재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대풍이 큰 폭풍이 바다 한가운데 크게 작렬했습니다.

그렇다면 폭풍이 벌어진 이 상황 그때 요나와 같이 있던 일행들은 자기들 인생에 최초로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아는 기회를 잡게 된 거예요. 인간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로 볼 게 없는, 아무 볼 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이 요나가 참여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그걸 알겠습니까? 대자연의 바다 한가운데가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유일하게 제대로 알 수 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 바리새인에게 이야기하실 때에 네가 표적을 구하는데 요나의 표적을 생각해보라고 하신 이유를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돼요. 요나가 섞였던 그 현장에서 어느 인간도 내세울 것이 전혀 없었다는 그런 인간으로 자기 본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말하는 요 나의 표적 곧 십자가의 표적입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저주받은 모습이거든요.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이 저주받은 모습이에요. 그렇다면 그 저주받는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들이 태어나서 한 번도 진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전혀 몰랐는데 그 십자가 앞에서 아, 내가 이렇게 저주 받아야 될 대상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접하는 그런 기회가 된 겁니다. 그 십자가 앞이라는 것이. 물론 사람들이 기피하고 다 도망쳤지만.

그래서 이 인간들이 요나와 더불어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들 형편이 본인이 생각했던 자기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호들갑을 떨고 있어요, 여기서. 요나는 잠자고 있는데 다 깨워가지고 우리가 이제는 망하게 되었다, 하고 보니까 사방이 바다지요. 죽음의 바다, 빠져나갈 곳이 없을 때 인간은 우왕좌왕하면서, 살려달라고 하면서 각자의 신을 부르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여기서 다 끄집어냅니다.

그러면 평소에 인간들은 이렇게 폭풍 속에서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는 혼란 속에 자기가 일부가 되어 있다는 그 사실을 평소에는 왜 몰랐는가? 그것은 인간은 이 대자연을 통해서 자기의 질서 같은 것을 생각한 겁니다. 자기 생존에 필요한 질서잡기에 나선 거지요.

일반인들의 상식은 일관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지키는 것에 일관되어 있어요. 그걸 달리 이야기해서 인간들의 많은 이야기가 있더라도 인간들이 알아듣는 이야기는 자기 지키는 이야기만 알아들어요. 자기 지키는 이야기만.

서울에 코로나 방역 4단계입니다. 이 말 알아들어요. 그 말 놓쳐버리면 자기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그 말을 알아들어요. 요나가 합류해서 폭풍이 일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그것은 전혀 못 알아들어요. 남의 이야기에요. 내가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살 수 있을까? 그 필요한 정보만 평생토록 빼먹으면서 살아온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신을 믿는다는 것도 오늘 본문 그대로예요. 신을 믿는다는 것도 그런 일반인의 상식 안에 들어온 가짜지요. 가짜 신이에요. 인간의 상식 안에 들어온 가짜. 인간의 상식이 뭐라고요? 인간의 상식은 뭐냐 하면, 어떤 질서가 있고 그 질서가 나를 지킬 수 있는 가공된 조작된 질서, 이것이 인간은 대자연이다, 라고 그렇게 마음먹고 싶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자기 잘남과 자기 목숨을 견지하고 유지하는 것 그것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질서가 뭐냐 하면, 인간이 그 무한한 대자연에 대해서 대응하는 그 조치가 질서라는 겁니다. 무한에 대해서 유한한 인간이 자기 조치를 취하는 거지요.

예를 들어서 기타의 현을 눌러버리면 마디가 생기지요. 그 마디가 생기면서 거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음의 정형화된 질서가 잡힙니다. 마디를 눌러서 C음, D음, F음, 이렇게 만들어 내거든요. 마디를 누가 누르는가? 그것은 기타리스트가 누르지요. 애들이 그냥 기타를 뚱땅 거리면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이것은 혼란, 카오스, 혼돈이에요.

혼돈인데 기타리스트가 딱딱 마디를 눌러가면서 소리를 내니까 아, 이건 뭐 아름다운 음의 질서가 나오지요. 그 음의 질서를 창조하는 자 그게 곧 인간이라는 말이지요. 인간은 자기에게 필요한 질서를 자기가 스스로 창조해서 그 덕분으로 자기가 밥 먹고 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답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요나가 거기에 끼어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낯을 버리고 어디에 끼어드는가? 일반인의 상식만 통용되는, 인간들의 삶의 질서만 허용이 되고 그것만 진리라고 여기는 속에 요나가 쑥 끼어든 거예요. 피할 곳도 아닌데, 숨을 곳도 아닌데 요나가 지금 숨어들어온 거예요.

요나는 본인도 생각 못한, 언제나 있는 그 무엇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선자자직입니다. 선지자직은 메시아직에서 파생된 겁니다. 선지자직은 곧 메시아의 기능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것은 요나가 무슨 짓을 하든, 어디로 내빼든 간에 언제나 요나와 함께 있어야 돼요.

마치 이스라엘 같아요. 물론 이스라엘 선지자니까. 언제나 요나와 함께 있는 그것,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면 그 ‘언제나’가 자기에게서 떨어져 나갈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벌을 내리신 것이 아니에요. 요나 보면서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벌을 줬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요나에게 징계 내렸다 하면 안 돼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갈등을 일으킨 것은 갈등 그 자체가 하나님의 화해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너는 저들과 달라야 한다는 겁니다. 너는 일반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요나 선지자니까 그렇지 보통 선지자 같으면 초월적인 존재,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선지자는 초월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초과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요.

초월적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감히 못 하는 멋있는 활동을 하는 것을 초월이라 한다면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그냥 버스 타도 될 것을 괜히 거미줄 쳐 가지고, 401번 타면 그냥 갈 것을 가지고 거미줄 가지고 해보세요. 건물도 없는데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그러나 선지자는 초월적이 아니고 초과적이에요. 초과적이라는 말은 뭐냐? 그 힘을 자기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힘에 자기가 소유 당해서 자기도 그 힘에 대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남들이 뭐라 하기 전부터 본인 자체가 그 힘에 주눅 들어 있는 것이 초과적인 거예요.

본인이 설명할 수 없는 것, 본인이 관리할 수 없는 그것이 선지자기 때문에 언제나 함께 있었던 겁니다. 그런 요나가 그게 없는, 하나님의 그 초과적인 힘이 없는 일반인 속에 쑥 들어가서 그저 일반인처럼 행세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마치 동네축구에 메시가 들어간 것과 똑같은 거예요. 골목야구에서 박찬호가 공 던지는 것과 같은 거예요.

단층밖에 없는 마을에 2층집 짓는 겁니다. 본인은 수구리 해서 숨었는데 그게 2층집이라. 주님께서 대번 알지요. 분명히 안다고요. 지금 요나가 본인을 숨기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대번에 안다는 게 중요해요. 요나가 갖고 있던 그 초과적 힘은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몰랐던 인간의 원리 자리를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그 원래의 자리가 뭐냐 하면, 인간은 거품 이는, 검은 파도가 이는 깊은 바다처럼 인간은 바다의 하나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아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없는 존재였습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니까 아, 저게 나구나, 저게 나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게 나라고 여기는 순간부터 인간의 모든 생각의 출발점은 그 나를 지키고, 그 나를 완성 시키고, 그 나를 천국에 보내고, 그 나를 가지고 남에게 자랑질하려고 평생을 거기에 모든 정력과 힘을 소비를 한 거예요. 대자연은 멀쩡하다고 생각한 거에요.

그러나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의 자리를 모르면서 태어났고 모르면서 하루하루 지내고 있는 겁니다. 내 원래의 자리를 몰라요. 그 원래의 자리는 누가 갖고 있는가? 원래의 자리와 관련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원래의 자리와 관련된 뭐냐? 선지자에요. 그 선지자가 요나입니다.

모든 인간은 본래의 자리를 모르고 모든 출발점을 나 잘났다, 부터 시작되거든요. 내가 있음 자체가 하나의 질서라고 여기는 겁니다. 내가 여기 하나의 질서로 있으니까 하나님이 이 질서를 무시할 리는 없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실 거야, 기도하면……,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원래 자리는 혼돈의 자리에요. 그 혼돈 맛을 못 봤습니다. 요나가 탔던 배의 선장부터 해서 그 일행들은 자신의 본래 자리를 못 봤어요. 그런데 그들이 본의 아니게 예상 밖으로 원래의 자리와 연계 되어 있는 인물이 배를 탔거든요. 합승을 한 거예요. 그 배에 들어오고 만 겁니다.

그리고 선장은 일반 상식이니까 자기의 과거의 기억에 의해서 이런 질서는 유지될 것이라 생각하고 배를 띄워서 항해를 했는데 졸지에 그 배는 혼돈에 포위되었습니다. 예상도 못한 거지요. 선장은 도리어 반겨야 되고 고마워해야 돼요. 요나에게 감사해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평생을 다 가도록 한 번이라도 경험하지 못한 진짜 나는 누구냐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를 요나 덕분에 부여받은 겁니다. 그것은, 인간은 살아도 실은 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그것은 폭풍 속에서 하나의 비말, 날아다니는 물방울처럼 사라져도 아무 상관 없는 존재라는 것이 인간인 것을 폭풍 속에서 그들은 다 같이 수긍해야 되는 겁니다. 인정해야 되는 거예요.

저 일렁이는 파도나 그 배 안에 있는 우리나 똑같은 신세라는 사실, 이 거대한 대자연의 횡포 앞에서 우리는 다시 나를 찾을 기회가 없다는 사실, 진짜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어떤 인물인가를 알 수 있는 기회를 그들은 부여받은 겁니다.

막 요나 껴안고요, 눈물 흘려야 돼요. “귀한 분 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뭐 그래야 되거든요. 그래야 되잖아요. 마치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예수님 십자가 앞에 엎드려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저주 받음으로서 우리도 저주받은 사람인지 이제 알았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놓고 “잘 했다. 쓸데없는 것 처치 잘했다.” 손 털고 나오는 겁니다. 문제는 인간이 사람이 사람이냐, 라는 그 사람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인간들끼리 쑥덕쑥덕하면서 인간이 뭐라고 엉터리 같은 결론을 제시해서 그걸 가지고 인간세계에 통용하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고 대학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선택하셔서 선지자를 이 인간세계에 드러나게 하시는 이유는 인간이 그동안 하나님과 관련되어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면 제거할수록 더욱더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 제대로 인간 모습이 드러난다는 거예요.

그동안 내가 사람이고 싶어서, 그것도 괜찮은 사람이고 싶어서 그냥 계속 긁어모은 복음이라는 지식 있잖아요. 성경 지식, 산더미 같은 성경 지식, 그 모든 지식이 한순간에 무용지물화 시키는 하나님의 그런 계기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게 다 조작이거든요. 50년 60년 교회 다니면서 3대째 4대째 신앙인이라고 우기면서 했던 그 모든 것이 전혀 하나님 앞에는 통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복음을 수집하고 그것이 나를 천국 보낼 것이라고 끌어모으지만 진짜 하나님의 복음은, 나라는 인, 이 거짓된 나라는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잡아먹고 갉아 먹습니다. 그 사례가 뭐냐 하면, 요나예요. 요나가 신학을 모르겠습니까? 선지자인데. 요나가 율법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그 심판 소식에 대해서 요나는 자기하고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상관없는 일로 여겼어요. 선지자가 되어가지고 자기만 구원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선지자 속에는 메시아적 기능이 있습니다. 십자가 기능이 있어요. 선지자는 자기 구원받으라고 선지자 된 것이 아니에요. 어느 인간도 구원될만한 자격이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지자 된 거예요.
그걸 어렵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아담에게는 결여가 있다. 아담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결여, 결여라는 말은 모자람이라는 뜻이에요, 한구석이 텅 비어 있습니다. 온전치 못한 아담이 된 겁니다.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냥 흙이 제격입니다. 흙이라는 칭호가 제격이에요.

아담은 자기가 인간이라고 우기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흙이에요. 아담은 자기에게 주어진 아담이라는 이름의 취지를 몰랐습니다. 아담이라는, 흙이라는 이름은 자기하고 상관없는 이름인 줄 알았어요. 흙이라는 이름, 아담이라는 이름이 내가 사람이라고 그렇게 이해하는 이름, 아담을 사람이라고 이해하는 그 이해를 이겼어요.

나는 사람이고 싶지만 이름은 나를 흙이라고 부르고 있는 겁니다. 흙이 되어야 된다고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게 결여에요. 결여, 그 모자람, 빠진 부분이에요 그 빠진 부분에 뭐가 들어가냐? 율법이 들어가 버립니다.

그러면 아담은 차고 들어오는, 그 빈자리에 들어오는 하나님의 계시, 그 율법, 하나님의 약속이라 해도 되고 예언,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네가 저주를 받으리라 한 그 약속이 아담과 결합이 되어버리면 아담은 본인이 생각한 아담이 허물어져야 돼요. 폭망해야 됩니다. 무너져야 되지요.

오늘 본문에서 지금 요나 선지자는 요나 개인적 입장에서 나 실패했다, 하지만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요나가 도망치는 것도 요나 선지자의 기능 중에 하나에요. 드라마 주연급 배우가 되어서 전체 16회 분량 드라마인데 1, 2, 3회 나가는데 벌써 죽어버렸어요.

작가한테 막 항의하고 싶지요. 내가 주인공인데 나를 왜 죽이느냐. 그런데 그 죽는 씬이 있어 줘야 이게 성공작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꼭 닮은 쌍둥이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은 계속 출연하면서 돈벌이하게 되어 있어요.

처음에는 몰랐지요. 1인 2역인 것을 몰랐지요. 이 세상 사람들은 인간이 자기가 인간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기가 1인 2역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흙이 되는 역할을 도외시했지요. 그러나 선지자는 제대로 된 메시아적 기능, 예수님과 관련된 존재기 때문에 죄인이면서도 결국은 의인 되어야 되고 죄인 된다는 그 과정 자체가 의인 되는 절차라는 사실을 선지자만, 오늘날 성도만 그걸 받아들여서 감사해야 돼요.

그걸 아멘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죄인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은 폭망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게 합당합니다. 대구에서 제일 괜찮은 지역이라는 수성구에 살다가 후진 동네로 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폭망이지요. 그러나 그게 하나님의 화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아담과 계약한 것이 아니고 같이 결여된 것을 채운 율법과 하나님께서는 계약을 맺은 겁니다. 율법 속의 인물, 바로 하나님은 예수님과 계약을 맺은 거예요. 요나는 그 계약 속에, 그 계약에 끌려 들어간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하나님하고 계약해서 그래서 구원을 이루는 그 구원에 요나는 선지자직으로 끌려들어간 겁니다. 이걸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느냐? 초과적이라 했어요. 초과적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다른 말로 바꾸겠습니다. 사명이라과 해요 사명. 사명이에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사명이 그 인간을 장악해야 돼요. 그 인간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고 사명이 그 인간을 질질 끌고 가야 돼요. 어디에 가든지. 지금 요나의 결정적 잘못은 딱 이거예요. 요나의 결정적 잘못은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자기중심의 공간과 시간관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의 생존에 필요한 질서를 다지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늘 계산하고 측정합니다. 내가 어디에 가서 살면 내가 편하겠는가? 이게 공간이거든요. 내가 몇 년 뒤에 성공한 사람이 되겠는가? 이게 시간입니다. 지금 요나는 공간적으로 자기를 위한 공간이 따로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람이 인생 살면서 힘든 이유가 뭐냐? 왜 걱정거리가 되고 왜 힘들고 사람이 괴로운 이유가 뭐냐? 자기를 위한 시간과 자기를 위한 공간을 극복하지 못해서 그래요. 자꾸 도망치기 바쁘고. 서울은 4단계니까 1단계인 경북으로 도망가지, 이런 식으로.

자꾸 도망치기 바빠요. 다음에는, 나중에는 25일 되면 어디 간다든지, 나중 되면 성공한다든지, 그 시간대에 있는 멋있는 내 모습, 이것은 여전히 자기가 자기한테 농락당하는 모습이에요. 시간도 이기고 공간도 이긴다는 말은 어느 시간대든지 어느 공간대든지 그 시간과 공간대에 주님의 지시와 명령, 다시 말해서 주님이 아버지와 맺은 그 계약 있잖아요, 약속이 그 인간의 모든 정신을 통제하고 지배한다면 어느 곳도 하늘나라입니다.

그게 35도가 되는 한여름이든 시원한 저녁이든, 그게 대구든 서울이든 상관없이 시간과 공간을 초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요나야, 네가 어딜 가도 내 약속은 변함이 없다. 네가 어디 가도 나와 맺은 언약은 내 쪽에서는 취소 안 했다. 네가 어디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나는 너한테 일체 묻지 않고 네가 있는 그 자리에서, 네가 있는 그 시간대에서 이 하나님의 사명은 내가 적용시키도록 조치해줄게.” 이게 지금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에요.

이걸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언제나 있는 그 무엇이 요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요나는 너무나 개인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낯을 사적으로 따로 분리할 수 있다고 우겼습니다. 요나가 자기가 따로 살림 차린 거지요. 나만의 특수한 공간 시간대가 따로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가 느끼는 것은 뭐냐? 과거로부터 내속해온 어떤 배반감을 당했던 겁니다.

요나가 잠재적으로, 다시 말해서 요나는 인간적인 면에서 치욕스러운 경우를 지금 하나님 앞에 당하고 있는 겁니다. 요나는 분노하고 있어요. 가짜 하나님은 분노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저 좋은 게 좋아요. 그냥 바치면 복 주고 이런 하나님이 좋아요.


그러나 나의 어떠한 계획조차도 일체 그런 것을 싸그리, 싸그리 그걸 묵살하고 박살낼 때 인간은 아담에서 내려오는 근원적인 죄악된 그 존엄성이 작살 나는 데서 오는 필연적인 어떤 치욕감, 분노, 이게 인간에게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목욕탕에 가서는, 저는 목욕탕에 간지가 몇 년이 되었습니다만, 목욕탕에 가서 시원하게 한번 적시고 나가려고 냉탕에 있는데 목욕탕관리인이 정신이 나갔는지 술을 먹었는지 냉탕에다 온탕 부어버렸어요. 자기 계획이 무산되면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본문에서 일반인들은 나름대로의 정돈된, 질서 잡힌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 속의 자기 삶이 있어요. 어디론가 가는 배를 탔을 때는 다 미래가 있고 계획이 있잖아요. 여기가 온탕이라면 온탕에 누가 들어 왔느냐? 샘물이 들어온 거예요. 요나가 들어온 거예요. 엉망진창이에요, 엉망진창.

이걸 요나가 미처 예상 못했어요. 요나는 자기가 일반인과 섞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여러분이 성도입니까? 성도가 일반인과 같이 섞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어떻게 메시가 동네축구하고 같이 게임을 할 수가 있습니까? 이게 말이 안 되지요. “봐주면서 할게.” 백날 해도 안 돼요. 자기 몸에 배인 기술이 있어서 공을 자기 머리 위에 얹고 다니면서 온갖 묘기 다 부리면서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러지, 하는 그 자체가 묘기가 되어 버렸어요.

성도는 사명감에 장악되었기 때문에 본인이 사명을 감당하는 게 아니에요. 요나가 착각한 것은, 본인이 사명을 잠시 접어두겠다는 거예요. 사명감은 잠시 접어두는 게 없어요. 사명감이 따라오는 겁니다. 사명감은 마치 뭐와 같으냐? 훌라후프 같아요. 또는 복부비만. 자기는 그냥 쉽게 탕 속에 들어갔는데 그냥 물이 넘쳐 자기도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뚱뚱한지를. 복부비만이에요.

자기도 눈에 보이지 않는 둘러쳐진 아우라 같은 게 있어요. 이 사명이. 자기는 성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회식할 때 막 맥주 먹는 척을 하지요. 밑에다 부어가면서, 먹는 척을 하면서 내가 교회 다니지만 쿨하게 안 믿는 사람과 이렇게 소통한다는 것을 보여주겠지만 그 회식 자리에 태풍이 일어나보세요.

태풍이 일어나면 회식하던 불신자 불교 청년회장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러한 재앙은 우리 중 누군가 수상한 자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각자 기도해라. 누구 때문이냐? 제비뽑기 하자.” 제비뽑기라 하는 것은, 뽑는 그 현장이 굉장히 신기해 보이지만요, 이점을 알아야 돼요.

제비뽑기해서 내가 걸리는 것이 신기한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내가 사는 게 신기해요. 이 땅에서! 이 땅에서 하루하루 사는 게 제비뽑기의 연속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있는 그 무엇의 지배가 제비의 선택이라는 그러한 법칙을 지니고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로마서 9장 15, 16절에 나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자, 제비뽑기가 뭐냐, 라고 질문하신다면 제비뽑기는 내가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제비뽑기에요.

그렇다면 성도의 하루하루의 삶은 전부 다 일반인과 차이 나게, 차별 지게 제비뽑음의 연속이에요. 하나님의 제비뽑기의 연속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네가 원하는 것으로 하루하루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루하루를 살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게 성도의 위상이고 형편입니다. 성도가 이런 대상이 성도에요. 그런데요, 나는 자기의 결심과 하나님의 결심을 여기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거예요.

일반인들은 자기가 탄 배가 뒤집어 지니까 무슨 일생 일대에 대단한 일이 벌어졌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대할 때 요나를 보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 뒤의 말에 의하면 요나는 이미 각오했습니다. 제비뽑을 것도 없어요. 우리 제비뽑기하지, 그거 뽑을 것도 없어요.

자기가 뽑히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제비를 뽑았다, 하는 것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고 눈에 감지 되지 않는 다른 질서와 이 인간이 조작한 엉터리 질서가 중복되어 있고 중첩되어 있어요. 중첩되어 있는데 인간의 단단한 질서, 우리는 이렇게 해서 살아왔다고 장담하는 그 질서가 흔들리는 그 폭풍 속에서 배가 흔들리는 것처럼 흔들리는 토대가 되어 버린 거예요. 이게 무너져 버린 거예요.

무너져 버리니까 인간의 실상이 뭐냐? 도대체 인간은 뭐냐를 제대로 보여준 거지요. 요나 덕분에. 뱃사람들은 요 나에게 고마운 줄 알아야 됩니다. 성도라면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주여, 오늘 제가 무슨 일을 할까요?” 이게 성도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는 “주여, 내 인생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어요?” 이게 불신자에요. 교회 나오는 불신자입니다. 금요철야기도 하는 불신자에요. “네 인생이 있다고? 그런 게 있었나? 네 인생이 있었어? 너는 결여된 존재야. 네가 빵꾸난 존재야.” 빵꾸난 양말은 양말이 아닙니다.

빵꾸난 인생은 인생이라 할 수 없고 그걸 나라고 하는 그 자체가 악마적이지요. 마귀적이지요. 고장난 시계가 시계입니까? 아니지요. 고장난 인간을 인간이라고 말하면 안 돼요. 그냥 죄인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냥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이런 노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바람 속에 날려오는 먼지, 바람 속에 날려오는 먼지.

여러분 생각에는 요나가 자기 사명을 버리고 도망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소환하고 호출한다 하지요. 그게 아니고 요나는 자기 현장에서 제대로 된 선지자 노릇을 합니다. 제대로 된 이스라엘 선지자 값을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목격자이기 때문에 거짓말이 성립되는 거예요. 목격자이기 때문에, 봤기 때문에 거짓말이 성립되는 겁니다.

일반 인간들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거짓말도 거짓말로 쳐주지를 않아요. 애초부터 이것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진리와 관련된 거짓말은 목격자이어야 돼요. 하나님과 직접 만났어야 돼요. 그러한 인물이 사사기 6장 37절에 나옵니다.

그 대목 보기 전에 사사기 6장 26절에 보면 거기에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이스라엘 마을인데도 불구하고 마을 한가운데 제일 중심 로터리에 바알신상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드온 보고 그 바알신상을 부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낮에 해야 되는데 겁이 나서 기드온이 밤에 몰라 바알과 아세라여신상을 찍어버렸습니다. 26, 27절에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나무로 번제를 드릴찌니라 이에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행하되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그 바알이라는 것, 사람들이 자기 질서와 융화가 가능하다고 여겼던 신이거든요. 내가 내 삶에 필요한 이 질서체제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신이 그게 바알이었습니다. 오늘날 이것이 예수고 여호와고 성령이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바알이었어요.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천사가 와서 기드온에게 하라고 하는 것은 그 바알을 찍어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바알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명이 사적인 시간과 공간을 초과해 버려요. 이겨버린다고요. 이겨버리면 나는 사명이 중요하지 그 밑에 있는 나는 개코도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내가 몇 년 살다 죽었느냐, 한 달 수입이 얼마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갑근세 얼마 내고, 의료 보험료 얼마고, 아파트 몇 평 짜리 사는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문제는 인간이 자기를 찍을 수 없다는 거예요. 기드온이 이렇게 해놓고 겁이 나서 벌벌 떨었지요. 사람들은 기드온을 잡으려고 하고요. 바람 속의 먼지 같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감히 하나님의 신이 임한 기드온에게 지금 공격하려고 덤벼드는 거예요.

여기서 기드온이 쫄았습니다. 쫄아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에게 지시한 하나님이 진짜 지시했는지 내가 착각을 했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사사기 6장 36절부터 보게 되면 거기에 두 개의 시리즈로 된 기적을 하나님께 요청하지요.

양털 하나 해놓고 양털에는 이슬이 맺히고 다른 데는 이슬이 안 맺히게 해달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니까 그다음에는 양털에는 이슬이 안 맺히고 다른 데는 축축하게 해달라. 이런 식으로 기적을 요구했지요. 두 번씩이나 반대되는 식으로, 처음에는 너무 쉬웠다 반대로 해볼까, 이런 식으로 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기적이라는 것은 딴 게 아니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그것이 기적의 연발이었고 기적의 연속이었어요. 아무것도 아닌데, 달음박질해도 아무것도 아니고 부지런해도 아무것도 아닌데, 그 아무것도 아닌 나를 하나님의 계약과 언약과 사명, 그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아무것도 아닌 나를 긍휼히, 불쌍히 여기면서 계속 살려내고 일을 시키고 지시를 하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살아계신 자의 일의 성취입니다.

우리는 별 볼일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가만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본래의 메시아적 기능을 다 성취해 내고 있습니다. 이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매일매일 살면서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래, 바로 딱이야, 딱!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어떻게 네가 그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공식에 딱딱 맞아 들어가느냐?” 그 말이지요. “네가 생각해도 신기하지 않나?” “신기합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성도의 삶입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태풍 앞에서 우리는 물방울, 비말에 지나지 않아요. 비말이라는 이 단어 코로나 때문에 많이 나왔어요. 재채기 나올 때의 그 비말, 그것도 코로나로 범벅된 튀김 과자? 코로나로 범벅된 아무것도 아닌 게, 마스크로 살았습니까, 아니면 긍휼로 살았어요?

주께서 불쌍히 여겨서 살게 해주셨던 겁니다. 우리 현장이 바로 요나의 선지자 기능이 일어나는, 그래서 그 기능이 선지자의 자리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피할 곳이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따로 나만을 위한 질서가 주 앞에 용납되지 않는 것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지금 있는 이곳이 홀로 있지 않고 주께서 주의 일을 성취하는 장소이고 현장인 것을 저희들이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3강-요나 1장 4-7절(초과적질서)210714-이 근호 목사.hwp (93.0K), Down: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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