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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4 10:50:05 조회 : 146         
174강-창 45장 16-20절(요셉의 나라)190123-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83.105.195.253)
174강-창 45장 16-20절(요셉의 나라)1901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5장 16-20절입니다. 구약성경 72페이지입니다.

창 45:16-20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 신복이 기뻐하고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너희 아비와 너희 가속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 땅 아름다운 것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이제 명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비를 데려오라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하라.”

요셉의 형들이 다시 애굽으로 짐을 싸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아직 아버지는 오지 않았지요. 요셉이 형들과 만났다는 소문을 듣고 이제는 바로 왕이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요셉도 아버지가 애굽으로 오기를 원하고 있고 그 소원이 바로왕의 소원이 되었어요. 바로왕도 요셉의 가족들이 애굽이 다 와서 국무총리 요셉중심으로 살기를 원했던 겁니다.

이렇게 바로 왕이 요셉의 뜻과 같이 될 수 있는 것은, 창세기 45장 8절에 보면, 요셉이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보냈다는데 하나님은 눈에 안보이잖아요.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는데 하나님의 조치는 눈에 보이더라 그 말이지요.

그 조치가 뭐냐?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말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비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고, 바로가 요셉의 아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요셉으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고. 실권자가 되게 하셨다는 그런 뜻이지요.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여기 아비가 나오고, 주가 나오지요. 요셉보다 더 높은 권세는 실제적으로 애굽나라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아버지역할을 하고 주인역할을 한다는 그 말이지요. 그렇게 요셉이 이야기했던 것은 그냥 허풍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바로 왕이 충분히 호응을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결과만을 놓고 볼 때에, 요셉이 이런 높은 자리를 얻게 하기 위해서 요셉으로 하여금 고생을 많이 하게 했구나, 하고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바로의 아비가 되고 애굽의 주가 되는 것은 누구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무슨 의미냐?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도 눈에 안 보인다는 뜻은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이 눈에 보일 때에 결정적인 것,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다 집약되어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하시는 일로 집약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5장 39절에 보면, 모든 성경은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허풍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냥 신학쪼가리가 아니에요. 신학을 해서 무슨 구원을 받습니까? 신학이 아니고 이게 이 세상 돌아가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도 나와 있지요. 이 모든 세상의 권세, 움직임이 그리스도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닌다, 종교를 가진다. 이것은 의미 없어요. 현실 속에서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식으로 이 세상을 펼쳐 가심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거지요. 이것은 종교나 취미생활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내가 누구냐, 내가 어디서 왔느냐를 다 포함하는 이야기입니다.

안 해도 그만이 아니고 안하면 낭패고 완전히 파멸입니다. 성경을 보는 우리 인간의 태도에서 제일 기본이 뭐냐? 나는 인간도 아니다. 여기부터 시작해야 돼요. 나는 사람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뭔가 다른 요소가 개입되어야 그 때 사람이 되는 겁니다. 다른 요소가 뭐냐?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 쪽에서 그걸 인간으로 쳐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도 아닌 세상사람들이 잘먹고 잘사는 것에 대해서 부러워하지 마세요. 부러워하면 지는 겁니다. 제가 아까 기도할 때 했지요. 이 땅에서 나의 일은 없다고 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다 통일되었다는 말은 주의 일이지 나의 일이 없어요. 요셉이 국무총리 된 것을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우리가 백수가 되고 거지가 된다 할지라도 예수님으로 통일된 것을 알게 되면 하나님보기에 귀한 존재고 국무총리 못지 않는 관계, 자리, 그런 위상에 있습니다.

요셉의 직책이 국무총리지만 우리는 국무총리 아니라도 국무총리의 격에 맞는 대우를 받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간단해요. 요셉이 국무총리 격에 맞는 대우를 받는다면 그 대우가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 요셉의 형과 그리고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돌아간다는 그 내용이 오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요셉이 훌륭했다, 인내심이 있었다, 믿음이 있었다, 이렇게 나오면 안돼요.

왜냐하면 요셉이 국무총리 된 것은 요셉 본인의 의사도 아니고 노력여하도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히,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5)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일을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언약대로 일을 하십니다. 그 언약이 창세기 27장 28절에 보면, 아버지 이삭이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그 때는 에서가 배석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야곱에게 축복을 해버리는 거예요. 일종의 수의계약하는 거지요.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야곱에게 주는 겁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할 때 여기 열국. 모든 인간사는 여러 나라로 구성되어 있잖아요.

바벨탑사건에서 흩어지고 난 뒤에. 그 많은 국가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 국가들이 열국인데 그 많은 나라가 있는 이유가 뭐냐 하는 그 의미는 누가 등장할 때가지 유보되어야 하느냐 하면, 야곱의 가치, 야곱에게 담긴 하나님의 뜻이 구현될 때까지입니다. 그 나라들은 무슨 용도로, 무슨 이유로 그들은 이 땅에 등장해서 나름대로 인구를 늘이면서 번창했어야 되는가를 자체적으로는 몰라요.

열국의 의미가 되려면 야곱에 속한 나라를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줘야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복이라 하는 것은 상대적이에요. 복이라 하는 것은 그것을 분석해서는 알 수 없고 복의 상대자가 등장할 때까지 복의 내용은 유보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지정한 그 복의 나라가 복이라고 정의를 내릴 때 그 때 그 규정 앞에서 다른 민족은 자기의 입장, 형편과 처지가 확정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저주받은 거예요. 복의 나라는 따로 있고 그 외의 나라는 저주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 때 이미 결정난 거예요. 예정된 것입니다. 야곱의 언약, 야곱에게 준 축복을 야곱은 오해했지요. 자기 자신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자신과 비교하면서 저쪽에서의 나라라든지 열국보다는 자기가 잘될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나 집안 돌아가는 꼴을 보니 잘되기는커녕 가뭄도 들고 제대로 밥도 못 먹을 지경이 된 겁니다.

사람이 희망이 없으면 밥을 먹어도 밥이 먹히지를 않아요. 언제 밥이 먹히느냐 하면, 희망이 있을 때, 내가 잘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 때는 갑자기 밥맛이 팍팍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금 온 세상이 가뭄이 들었다는 것은 모든 세상의 나라, 열국들이 ‘잠잠할찌어다’ 하는 상태와 마찬가지입니다.

가뭄, 그것도 왜 심한 흉년이 들었을까? 그것은 자력으로 생존할 수 없는 처지인 것을 알라고 7년 흉년이 든 겁니다. 만약에 7년 흉년 속에서도 살았고, 7년 흉년이 끝나도 살게 되었다면 우리가 마땅히 나의 수고와 나의 노력으로, 고생으로 살았다는 소리, 그런 군말을 못하게 만드는 특정한 요소가 그 흉년가운데서 두각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거대한 애굽의 나라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서 그렇게 무시를 당했던 요셉의 나라로 뒤바뀔 줄은 아무도 상상 못한 거지요.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항상 어떤 식으로 사느냐?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어떤 기적 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 언약을 앞장세우시는 하나님의 기적,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평소에 그것을 분석을 못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어디에 완전히 꽂혀 있느냐 하면, 내 노력한 것이 얼마나 실적과 업적을 남길까, 그게 자기 꿈이니까, 거기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애 좋은 대학 보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하는 부모한테 예수 그리스도가 좋다고 하면 그것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소리에요.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이 안 좋은 이유가 자기가 거기에 대해서 노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가 수고하고 노력한 것에 대해서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이걸 간단하게 하면, 하나님이 세우시는 천국은 선악과 따먹은 사람은 못 간다, 그 말입니다. 왜 못 가느냐? 자기의 선악으로 그것을 측정해서 갈만한 나라인지 못갈 나라인지 분석해서 자기가 마음에 들면 자기 쪽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그 성격이 먼저 앞장서기 때문에 그래요.

그 점은 야곱도 마찬가지고 요셉의 형들도 마찬가지에요. 요셉의 형들을 계속 보니까 요셉의 형들은, 어떻게 밥 먹고 살 수 있느냐, 양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애굽에 왔고 애굽나라사람 되려고 노력한 것도 아니고, 잃어버린 요셉을 걱정하는 식으로 살아가려고 한 것도 아니고, 지금 자기걱정하고 있어요.

우리하고 똑같아요.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 걱정 안하고 내 걱정하고 살아갑니다. “주님이 좀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할 테니까.” 이런 식이에요. 항상 목표가 내 걱정, 내가 만족스러운 내 꿈을 달성하는 것이 목표고 그 목표를 위해서 목적이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수고하고 애쓰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로왕이 제시하는 것을 보세요. 18절부터, “너희 아비와 너희 가속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 땅 아름다운 것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이제 명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비를 데려오라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하라.”

다시 말해서 다 놔두고 오라는 그 말이지요. 애굽땅에 그냥 오게 되면 다 줄 테니까 구닥다리 전에 쓰던 것은 다 버려버리라는 그 말이지요. 이사 가면서 옛날 물건들 가져오지 말고 빈 몸으로 와도 다 구비되어 있으니까, 그것도 좋은 것, 최상급으로 줄 테니까 다 놔두고 오라는 그 말 아닙니까? 이게 요셉의 효과잖아요. 하나의 언약의 효과잖아요.

그동안 야곱과 요셉의 형들이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 애쓴 것이 천국에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사람의 의미라는 것은 자기 노력여하에 따라서 그 의미가 증강되거든요. 노력을 많이 하게 되면 할수록 점점 더 자기의미가 굳어져버려요. 그렇게 고생고생 했는데 일찍 죽으면 아깝다는 겁니다.

목표가,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다 와서 미끄러져버리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돌을 정상까지 굴려갔는데 기름이 발려서 도로 원위치로 떨어지게 되면 얼마나 인생살이가 허무하겠어요? 다시 노력을 해서 또 돌을 정상에 올려놨는데 또 미끄러져서 원래대로 된다면? 인생이라 하는 것이 헛된 줄 알면서도 수고하는 것이 인생의 반복 아니겠어요?

그러면서도 꿈은 키우지만 그 꿈은 개꿈이고 망상에 불과한 거예요. 복음을 듣고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은 자유겠습니다만 좋아한다 해도 안 믿는 이유가 실생활에서 하는 행동을 보게 되면, 복음이 좋다 하지만 더 좋은 것이 따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자꾸 받아요.

부질없는 정상을 향하여 자꾸 달려가고 있습니다. 부질없는 것인데. 부질없어도, 부질없다고 판단 받는다 할지라도 사는 보람은, 내가 수고하는 이유는, 내가 고생고생하고 먹을 것 안 입고 온갖 모독적인 소리 들어가면서 기어이 애쓰는 이유는 부질 있든 없든 간에 그 꿈 있음 그 자체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투를 벌이거든요.

그런데 언약의 완성상태에서의 이 바로 왕, 또는 요셉이 하는 말이, 그거 다 버리라는 거예요. 결국 이 요셉의 형들과 야곱은 인생 헛산 겁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세상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악마한테 속았다 그 말입니다.

매일같이 속고 또 속고. 속더라도 대안이 그것밖에 없으니까 속는 줄 알면서도 할 게 그것밖에 없다는 거예요. 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왜 만들어놨을까요? 지옥가기 전에 벌써부터 지옥생활 하라고 만들어놓은 거예요. 지옥이 그겁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꿈과 희망은 다 개꿈이 되는 세계, 그게 지옥이에요.

아무 희망이 없어요. 영원히, 더는 바뀌지 않는, 확정된 최후정도가 아니고 최고의 영역, 상태, 그것은 인간세계에는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인간들은 유사한 것을 만들지요. 지금 우리가 이 본문을 생각하면서 신약도 겸해서 생각해 봐야 돼요.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의 꿈이고, 우리가 평소에 기대했던 희망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꿈과 희망, 내가 기대하는 꿈과 희망, 그리고 그 꿈과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고 선교하고 애쓰고 교회 다니는 이 모든 것도 다 헛방이고 헛수고라는 것, 그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시는 거예요. 예수 믿으려고 노력했던 그 노력과 희망조차도 네 구원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 ‘내게 주신자’라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인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의 의미는 뭐냐?

인간은 짐승과 달라서 스스로 자기의 의미를 만들고, 자기의 꿈을 만들고,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자요, 그 희망이 희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희망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참고, 견디고, 친절하고, 애쓰고, 베풀고, 이웃사랑하고, 그렇게 해서 그 꿈이 속히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달성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진 자가 인간이다, 라는 것이 인간이 스스로 정해놓은 인간의 정의에요.

되게 고상해 보이지요. 거룩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신을 닮아가고 신에게 합일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다. 이게 인간이 내린 정의라니까요. 인간은 이렇다고 규정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에 인간을 인간으로 일체 보지 않습니다. 아담으로 봐요. 아담은 인간이 아니고 흙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흙과 의논하고, 흙과 타협해서 그들을 건지기 위함이 아닙니다. 내게 주신 자,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특별한 마지막 인간군이 있어요. 마지막 인간류가 있어요, 마지막 아담류. 마지막 아담이 와서 그 마지막 아담이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뜻에만 순종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서, 내게 주신 자만 잃어버리지 않는다. 내게 주신 자. 인간은 이 땅에 없어요. 다만 하나님이 인간이라고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에 의해서 아들에게 전달된 지시사항이 있어요. 내게 주신 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내신 자, 그 자들만 위해서 마지막에 다시 살리고 하나도 잃어버리는 것이 없게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뜻은 언약에 담겨 있어요. 야곱의 형 에서에서 축복을 주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니라 야곱에게만 복이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모든 열국들에게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야곱의 나라만 복이 되게 함으로서 저절로 저쪽 나라는 굴복되게 되는 거예요. 굴복된다는 말은 요새말로 하면 비정규직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나올 때까지 계속 자기가 정규직인줄로 알고 있어요. 자기도 인간인줄 압니다. 그러나 정규직이 등장할 때는 자기가 정규직이 아니고 비정규직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나는 인간흉내는 내는 사실은 인간이 아니었었다. 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면 누가 부르심을 받았는가? 그것은 야곱언약에 등장하는 마지막 아담, 하나님이 인정하신 두 번째 아담이 등장함으로서 저절로 예수 그리스도 빼놓고는 모든 인간은 저주받은 인간으로 모든 정의가 확정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6 장 65절에 이런 말씀 있어요.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인간 쪽에서 천국 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진리가 아니고 그것은 현실이 아니고 실제도 아닌 거예요. 인간 쪽에서 하나님에게 갈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들어올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왜 자꾸 천국에 보내달라고 이야기합니까? 천국 들어올 자격도 안 되는데. 천국은 우리가 노력해서, 애써서 가는 나라가 아니고요, 주께서 보내줘야 돼요.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뭐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이미 펼쳐져 있고 나타나 있어요. 그것이 마지막 때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 전에는 선지자를 통해서, 그 전에는 족장 야곱을 통해서 보여준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야곱의 언약을 받은 야곱은 오해했지요. 자기가 잘 될 줄 알았어요. 그러나 야곱이 잘되는 것이 아니고 야곱에 의해서 낳아진 자식이 하나 있는데 그게 요셉이에요. 그 요셉이 하나님의 꿈을 어깨에 짊어지고 노예생활로 간 겁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낮아진 모습으로 애굽나라에 갔어요.

애굽나라에 갔는데 그 과정을 모른다 치고 결말은 뭐냐? 요셉이 애굽을 삼켰다는 거예요. 요셉이 애굽의 주가 된 거예요. 이것은 창세기 27장의 말씀대로 야곱의 계열에 속한 인물이 모든 열국의 주가 되는 이런 계획은 야곱의 뜻도 아니고 에서의 뜻도 아니고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이에요. 그게 요셉의 꿈이 된 겁니다.

하나님의 뜻, 다른 말로 하나님의 소원이에요. 그러면 인간들에게 있어서 요셉의 형이라든지 야곱에게 있어서 이러한 일을 예상했는가? 전혀 예상을 못했지요. 깜짝 놀랐지요. 예상 못한 겁니다. 그러면 예상 못했으니까 요셉의 형들도 야곱도 나름대로의 그들 인생사라 하는 것은 항상 예상한 것을 기대하면서 그것을 쫓기 위해서 수고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하는 일이 있으면 정신없이 그 일에 몰두를 하게 되어 있어요. 왜 몰두를 하느냐? 자기 일에 몰두 안하고 딴 데 한 눈 팔면 어느 순간 그 바닥에서, 그 세계에서 낙오자가 됩니다. 가게를 하나 열었다. 그 가게 일에 매진해야 돼요. 24시간 그거 생각해야 되지요. 가게 차려놓고, 피자집 하나 떡 차려놓고는 자기는 토요일마다 배드민턴치고, 봉사활동 해버리면 피자가게가 제대로 될 리가 없지요.

골목식당 백종원이가 얼마나 탄식을 하는지. 피자집 차려놓고 자기는 할 것 다 하는 거예요. 유학 갔다 왔다고 유식한 체 하면서 거들먹거리기나 하고. 손님은 하나도 안 오지요. 그 세계에서 낙오자가 되는 거예요. 회사 취직했는데 ‘나 취직했으니 월급 받아서 놀러가야지.’ 이런 정신머리 가지고는 회사 취직도 안 되고요, 회사 취직해서 보면 놀러갈 시간을 회사에서 용납을 안 하지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맨 날 잔업이고, 또 승진을 해도 업무가 돈 값을 다 하게 되어 있어요. 일 안하고 돈 주는 그런 바보 같은 회사는 없습니다. 정 놀러가고 싶으면 회사 때려치우고 그 돈 가지고 식구들과 3년 동안 해외 돌아다니든지. 밴 하나 사서. 세상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우리 소원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 돈 주는 회사의 종이 되든지, 꼴사나우면 네가 나가서 사장소리 듣든지 네 맘대로 하라는 거예요. 직원으로 살 때는 하루 8시간 근무하지만 자기 사업 하면 하루하루 열 몇 시간씩 일해도 그 월급을 못 채우잖아요.

그래서 이게 뭐냐? 인간은 자기 존재의 의미, 내가 알고 있다는 것, 내가 예상하는 것, 자기 자신이 벌린 일에 농락당하고 있는 이 세상, 그것을 가지도 두 자로 뭐냐? 지옥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땅에 이미 인간들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충분하게 죄의 세계 속에서 죄가 주는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 비극적 결말에 이르는지를 혹독하게 경험케 하는 그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그러면 복은요? 복은 네가 기대하면 안 되고 복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따로 추진해서 이게 복이야, 라고 나타날 거예요. 그 복이 뭐냐? “다 버려라. 내가 다 제공해줄게.” 이게 복입니다. “지옥에서 했던 것 아까워말고 다 버려라. 천국에는 다 있다. 천국의 삶에 필요한 것은 다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실 때는 우리 소원대로 주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자기만의 원칙이 있는데 그 원칙은 뭐냐? 지옥에 살던 지옥백성을 천국에 사는 사람으로 갱신하는 것, 적합하게 하는 것, 그게 주님이 하는 일입니다. 그게 천사가 우리에게 찾아오고 성령이 찾아오는 거기에 원칙이 있어요.

그냥 무원칙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원칙이 있다고요. 네가 수고하고 애쓰고 믿음이나 꿈같은 것은 다 버려라. 너 자신을 부인하라는 뜻이에요. 그거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네가 종교생활 하는 그것 아무 의미 없다. 애쓴 것 의미 없어요. 아니 너 자신이 너에게 의미 없어요. 잘잘못 따지고 자시고 할 것 없어요.

인간에게 죄짓지 말라고? 태어난 자체가 죄인데 어떻게 죄를 안 짓습니까? 죄 짓는 것도 죄고 죄 안 짓겠다는 그것도 죄고, 이래도 죄고 저래도 죄에요. 왜냐하면 죄의 환경 자체가 죄를 유발하니까요. 주께서 그렇게 죄인으로 몰아세우니까 죄 안 지을 사람이 누가 있어요? 다 죄지요.

그러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이 펼쳐진다는데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펼쳐집니까? 그것은 인간이 예상 못한 추가적 요소가 구원을 합니다. 제가 이번 아가 수련회 하면서 괴테의 <파우스트> 마지막 대목을 인용한 적이 있지요. 여자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여성성이 구원한다, 할 때 어떤 분은 그 대목이 잘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여성성이 뭔지 그게 잘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여성성이 잘 이해가 안 되시거든 성경에서 베냐민의 어머니 라헬을 생각해 보세요. 베냐민 낳고, 낳는 동시에 라헬은 교체가 돼요. 자기는 죽고 죽은 자기 몸에서 베냐민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여성성이라 하는 것은 희생의 모토에요. 죽음 속에서 새 생명을 낳는 것 그것이 여성성입니다.

아담이 유혹을 받아서 인간은 흙으로 죽어야 돼요. 죽음은 인간 쪽에서 끝나는 거예요. 죽음 그 자체로 완결된 겁니다. 추가적요소라 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의 행함으로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존재하는 것, 외재성이라 하는데, 외부에서 추가적인 요소가 다가와야 돼요. 그게 요셉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꿈이었습니다.

그 꿈이 추가적 요소, 여분의 요소, 또는 잉여적 요소, 전부 다 이 땅에서 인간의 자기생각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낯선 것입니다. 낯선 것이고 우발적이고 우연적이고 예상 못한 것이고. 예상 못한 그것이 우리에게 뭐라고 요구하고 호소하느냐 하면, 네가 이 땅에서 했다는 것 다 무의미하니까 그것은 다 버려도 좋다.

오늘 본문대로 하면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네가 애쓰고 노력한 것 아끼지 말고 다 버려라. 성경공부 한 것 다 버리고, 헌금한 것 잊어버리고, 네가 교회 봉사한 것도 잊어버리고, 출세한 것도 잊어버리고, 네가 네 나름대로 죄지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네 맘대로 착하게 살았다는 것, 희생했다는 것도 다 버리고, 내가 몇 명을 전도 했니, 그런 것도 다 잊어버리고, 어쨌든 간에 그것은 네가 예상할 수 있는 거잖아요.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은 인간으로는 분석이 안 되는 이유가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분석은 자기가 예상한 가장 건전하고 고상하고 경건해 보이는 그것을 동원해서 자꾸 하나님을 분석하려고 하니까 교회가 오히려 지옥에 가장 본부 같아요. 아지트 같아요. 가장 고상한 것도 버려야 돼요. 가장 성화된 것도 버려야 되고 가장 경건한 것도 버려야 되고.

낯선 것이라니까요. ‘아,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다른 분이 날마다 내 인생을 삭제시키고 제외시키는 중이구나.’ 어떻게? 나는 요셉의 형들처럼 날마다 내가 한 것이 아까워서, 그것을 못 놓고 있고, 과거에 잘나간 것, 고생한 것, 그것을 못 놓고 있는데 성령이 오셔서, 천사가 오셔서, 주님이 오셔서, “그거 관계없다. 그거하고 아무 관계없는 거야.”라고 잊어버리라고 하고, 버리라고 하고, 안 버리면 버리게 만드는 거예요.

딸꾹질을 하고 기침도 하니 죽음이 가까웠구나. 내가 죽는 것도 이게 내 일이 아니잖아요. 왜 내 일도 아닌데 내 죽음에 신경을 씁니까?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에요. 그런데 병원에 가니 치료해주고, 비타민제도 맞으러 갔거든요. 그것도 예상 못한 주의 일이에요. 살든지 죽든지 이게 주의 일이라고 인정하게 되면 이미 지상으로부터 지옥 속에서도 천국생활을 실습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만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에요. 천국에 안 갔어도 그들만이 이미 천국은 개시된 겁니다. 수시모집에 합격한 거예요. 이런 자부심을 우리는 가져도 좋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셉의 세계, 주님의 여분으로 주신 천국에 가기 위해서 주께서 찾아오심을 감사합니다. 천국생활 해야 되는데 아직 버릇이 지옥생활의 버릇만 남아서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천국에 갈 수 없지만 보혜사가 계셔서, 날마다 도와주셔서 우리 한 것을 개무시 하시고 일체 죽는 것과 사는 것이 우리 일이 아닌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그 도우심을 찬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74강-창 45장 16-20절(요셉의 나라)190123-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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