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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0 21:50:44 조회 : 228         
12강-엡 2장 3-4(긍휼)190210-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8.92)
12강-엡 2장 3-4(긍휼)1902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2장 3-4절입니다. 신약성경 310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2:3-4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사도바울이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 유대인들도 있었지요. 유대인들은 일종의 선배격이라고 보면 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오직 자기민족에게만 찾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성경이라는 그들의 역사가 곧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자기 역사가 없으면 하나님의 계시가 없는 거예요.

그처럼 얼마든지 이렇게 잘난체를 할 수 있는 그 민족에 속한 유대인들을 만났고 사도바울 본인도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3절 끝에 “진노의 자녀”라고 일괄해서 단정지어버립니다. 유대인인데, 하나님 여호와를 믿는데, 자기에게 오신 예수님의 계시에 의하면 진노의 자녀라는 거예요. 그것도 나쁜 짓을 해서 진노를 받은 것이 아니고 본질상, 출생 자체가 지옥 한복판에 출생한 거예요.

출생하고 보니 지옥 한복판이에요. 본질상. 본질을 누가 건드립니까? 본질에서 나온 줄기인데 줄기가 뿌리를 건드려요? 줄기가 뿌리를 건드립니까? 개선할 수 있다는 그 말입니까? 터무니없는 생각이지요. 그것은 사기입니다. 본질은 본질대로 살면 돼요. 본질은 본질대로 살면 되지 그걸 아닌 척 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규정한 것이 아니에요. 주님께서 규정하신 겁니다.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역사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계시 받은 유대인들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에요. 유대인들이 그렇다면 이방인은 당연히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항상 그 일관성을 찾아야 됩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면 안돼요. 일관성 있게 봐야 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 할 때 그 일관성 있는 줄기 가운데서 어느 근거를 제시해서 네가 몇 사람만 만나봤다고, 전부 다 그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 라고 우리가 반박할 수 있겠지만 그 일관성을 따라가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죽인 자를 살리시는 거예요.

여러분, 안 죽이고는 일이 안됩니까, 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사람을 안 죽이고 천국 보낼 수 있을 능력도 갖고 계신 분이라고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시지 않고 예수님을 시범조로 보여주시면서 반드시 죽은 것 가운데서 살리는 거예요.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본질상, 본질상 이 땅에서 죽도록 태어났다는 겁니다. 따라서 살고자 하는 모든 의지는 본질상 충돌되는 거예요. 그것은 반칙입니다. 억지지요. 우리가 불순종의 역사하는 영들 속에 살다보니까 우리는 산다는 것이 억지인지도 모르고 그게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점조차 사도바울은 일관성 있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자연에 가깝고, 내추럴 한 것이고 따라서 자연스럽고 정상이다, 라는 주장들을 사도바울도 한 두 번 들었겠습니까? 그래서 아주 그 입을 막아 버립니다.

고린도후서 4장 3절에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웠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이 세상 자체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느냐 하면, 복음을 가리는 기능의 일군으로 부름을 받은 거예요. 징용된 겁니다. 보이지 않는 악한 영이 있는데, 이 세상 영에게 부름 받았는데 인간은 어떤 기능을 하는데 그 기능이 뭐냐? 복음을 가리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악마로부터 부림을 당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인간자체가 속고 있고 농락당하고 있는 거예요. 매사가. 유대인들은 구약역사가 계시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줄 때 농락당하고 속고 있다는 생각을 절대로 안했고, 진노의 자녀라는 것도 생각도 못했어요. 혹시 역사 가운데서 그들의 경험상 광야에서 나쁜 짓을 했을 때 벌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뭐라고 생각했느냐? 나쁜 짓을 했을 경우에만 벌을 받는다. 본질상 벌을 받는 대상은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기어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그 약속의 땅에서 훌쳐 보냈어요. 나가거라. 네가 있을 곳이 못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인 동시에 하나님의 작은……, 히브리서에서는 그걸 그림자, 또는 모형이라고 하는데 작은 모형으로 사용하신 거예요.

“나가거라, 약속의 땅에서”라는 실체는 “나가거라, 천국에서”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왜냐하면 구약의 약속의 땅이라는 지리적인 여건을 가지고 모형으로 사용하기에 그렇습니다. 설계사무소에 가보면 모형으로 아파트 지어놓은 것 있지요. 그 안에서는 못삽니다. 너무 작아서. 모형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렇게 지을 거예요, 라고 3d로 보여준 거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가나안 땅에서 살았던 것은 하나님의 설계사무소, 그 책상위에 있는 모형이라고 보시면 돼요. 가나안 땅 모형이 있고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훌쳐내고 모아두고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2차 대전 나오는 영화에 보면 독일 장교들이 빳빳한 옷 입고 긴 작대기를 가지고 탱크나 비행기의 모형을 옮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탱크는 여기로 가고, 군함을 죽 밀면서 여기로 가라고 작전지시하지요. 세상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게로 통일되기 위해서 쑤신 거예요. 모형으로 사용한 겁니다. 나가거라, 약속의 땅에서. 그러면 도로 들어가면 되지 않겠느냐? 도로 들어가는 조건은, 그들이 도로 들어가고 싶다는 열의에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체 다를 보여줬어요.

죽지 않으면 도로 못 들어간다.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산 자하고 좋게 잘해보자는 식이 아니에요. “열심히 해봐라. 천당 넣어줄게.”가 아닙니다. “일단 맞자. 일단 죽자. 죽고 난 뒤에 내가 살려줄게. 콜?” “노 콜!” 제가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강의를 하는데 로마서 9장 3절의 말씀을 가지고 첫 번째 강의를 했었어요.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내 백성 구원하는 것이 소원이다, 라는 대목인데 강의를 듣고 어떤 분이 수심이 가득해서 “우리도 성령 받은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살아야 됩니까? 내 백성 살리기 위해서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되면 나만 손해 아닙니까? 나는 그렇게는 못합니다. 남 좋은 짓 시키자고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모험은 안하렵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라고 저에게 직접 질문을 했었어요.

그래서 제가 답변을 했습니다. “이 대목은 이미 죽은 자에게 해당됩니다.” 이미 죽은 자 가운데서 해당되는 겁니다. 아직 안 죽었는데 한 번 살아볼까, 이런 꼼수를 쓰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자에게만 살아 있는 거예요. 만약에 이 말씀이 아직 안 죽은 자에게 있어버리면 말씀이 살아 있는 자아에 다 가리워집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복음을 가리는 것은 악마가 시키는 대로 인간들이 움직이는 것이라고요. 이 세상이 괜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요. 죽은 다음에 살자는 식의 법칙을 우리가 가려버리자.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단결해서, 지혜를 끄집어내서 살아 있는 사람끼리 착실하게 살아서 그것으로 천국을 뚫어내자, 라는 운동이 그만 가득 찼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고린도후서 4장 3절의 말씀, 복음을 가리기 위한 악마의 사투입니다. 아주 발악을 해요. 죽고 난 뒤에 살리겠다는 이 복음의 원칙을 온 수단을 다 동원해서 막아보자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은데서 살려버리면 뭐가 날라가 버리냐 하면, 교회라는 자체도 의미가 없어져 버리거든요. 종교자체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일관성 있는 사도바울은 이겁니다. 모든 사람을 진노의 자녀로 묶어버립니다. 묶어버리면 예수님이 최초로 부활하신 분이 돼요. 이 대목도 굉장히 어려워요. 왜냐하면 예수님 오셔서 죽고 부활하기 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한 두 분이 아니거든요. 아예 안 죽고 그냥 떠나간 분도 많아요. 에녹,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도 죽은 자가 살아난 사람도 있고.

그들은 그냥 죽었다가 살아난 그 자체가 모형이 되고 실제로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안 나와도 되는 영원한 부활의 첫 열매는 엘리야도 아니고 에녹도 아니에요. 그들은 모형이고 시범조교고 진짜는 예수님이 최초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에녹의 나라도 아니고 엘리야의 나라도 아니고 산자들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살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나라가 아니고 주님이 살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나라에 우리가 합류하는 방식이에요. “십자가 원할래, 부활 원할래?” “나는 부활 원할래.”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선택할 수 있는 여지도 없어요. 이미 죽은 자니까.

그 다음에 일단은 진노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데 그냥 죽었다고 하면 될 텐데,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면 될 텐데 왜 진노의 자녀냐 하면, 너희들이 하나님의 진노 밖에 못 벗어나는 결과로서 죽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약발 떨어져서, 링거 떨어져서 죽는 것이 아니고 네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서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살아 있으면서 성도는 무엇과 만나야 하느냐? 하나님의 진노의 실제성과 만나줘야 된다는 겁니다. 죄, 분노, 하나님의 징벌, 그것과 만나야 돼요. 그래서 인생 산다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제가 유난떨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산다는 것이 아담이 힘들게 살아간 것이 아니고 아담자체가 힘듦을 발산하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나 봐라. 이렇게 힘들게 살았잖아.” 아담이 어떻게 살았다, 가 아니라 아담자체가 징벌의 덩어리가 되는 거예요. 징벌의 덩어리. 폭죽이 땅에 있을 때는 네모지게 생겼잖아요. 하늘로 쏘아 올리면 온 색깔로, 다채로운 색깔로 하늘에 퍼지지요.

퍼지는 색깔 안에 다 응축되어 있는 겁니다. 내가 산다는 것이 아니고 징벌이 내 몸을 이용해서 살아가고 있고 하나님의 저주와 분노가 내 안에 살아 있는 거예요. 여러분, 얼굴 보니 그 진노, 저주에 비해서 밝아요, 지금. 그렇게 어둡지가 않습니다. 앞에 나라는 것을 붙이는 것이 문법적인 오류입니다. 내가 산다, 가 아니라 사도바울의 일관성은 뭐냐?

“인간을 봐라. 하나님의 진노가 살아 있잖아. 하나님의 화냄이 살아 있잖아.”라고 이야기하고 거기서 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봐,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살아 있잖아.”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살아 있잖아, 라고 할 때 그 뒤에 후차적으로 하나 붙이면 돼요. 내가 긍휼을 입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실은 내가 긍휼을 입은 것이 아니고 긍휼을 살리기 위한 증거용으로 우리를 계속 긍휼이 작용하는 사람으로 만든 거예요. 긍휼 빼놓고 다 도려내라, 그 말입니다. 따라서 긍휼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경험이고 기억이에요. 사람이 성경책을 보든 인생경험을 하든 항상 기억 속에 남는 것이 뭐냐? 이 머릿속에, 시상하부 속에 남는 것이 있다, 그게 기억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기억은 어디에 써먹는가? 기억은 어떤 사태를 해석하는데 써먹어요. 성경을 해석하는데 기억을 써먹고요, 어떤 사람을 분별하는데 기억을 써먹고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판단하는데 기억을 써먹고요. 판단하는 그것을 이성이라, 이성적 판단력, 일반이성, 그 모든 이성은 사람 따라, 기억 따라, 그리고 세대 따라 나이 따라 다 달라요.

20대가 판단하는 것과 30대가 판단하는 것이 다 다릅니다. “아, 그 때는 내가 잘못 생각했네, 라고 생각한 그 때가 실례지만 몇 살입니까?” “서른 살입니다.” 그러면 40이 되어서 그 때 잘못 생각했다고 한 그 것도 잘못된 생각일 수가 있어요. 김형석 교수라고 아직도 살아 있는데 나이가 백 살 된 사람이 있어요. 인간극장에 나왔던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연세대철학과 재직하다 은퇴했고 연세대철학과 후배교수들을 만나는데 나이 60먹은 교수들이 그렇게 철딱서니가 없다는 거예요. 나이 백 살 먹어서 보니까.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은 백 살 먹었어도 철이 없어요. 인간 행복을 이야기하고 완전히 에베소서 2장 3절과는 딴 소리를 하고 있어요. 그렇게 기독교, 기독교 외치면서.

사도바울의 일관성 있는 복음은 우리가 어떤 이득을 얻느냐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느냐,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자꾸 살면서 경험하게 되고, 체험하게 되고, 그 체험이 의미라는 개념으로 바뀌어서 서랍에 양말 넣듯이 저장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무엇을 판단할 때는 저장된 기억 속에 자기가 경험상 알고 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판단한다는 말이지요. 성경도 판단하고. 그렇게 판단할 때 그 앞에 ‘나’가 붙어요. 내 경험상, 내가 인생 살아보니, 내가 공부 좀 해보니, 라고 나오는 겁니다.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데 부모가 말하기를 “얘야, 내 경험상 그 여자하고 헤어져라. 그 여자는 안 된다.” “엄마, 왜 그래?” “내가 살아보니까 그렇다.” 하는 겁니다. “엄마 인생이나 내 인생이나.” “엄마 인생이 너보다 낫다.”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것이 자기 판단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인생은 어떤 인생이냐? 땜질, 땜빵하는 인생, 누더기에요. 전부 다 조각 천 가지고 온 만들면 그것은 완전히 거지 아닙니까? 그처럼 우리 인생을 보면 전부 다 어디서 뜯어온 거예요. 이태리 여행하고 뜯어온 것, 미국 이민 가서 뜯어온 것.

자기 딴엔 경험했다는 것, 혹독하게 체험했다는 그런 의미들을 더덕더덕 온 천지에 붙여놨어요. 노숙자가 따로 없습니다. 왜 그걸 뜯어 붙이는가? 살려고. 기본적으로 옛날 우리 선배들, 유대인들이 했던 짓거리를 그대로 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옛날 유대인들을 미리 하나님의 진노의 계시의 대상자로 만드신 이유는 긍휼의 구조가 진노의 구조를 쏙 빼닮았어요.

둘이 똑 닮았어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인간의 어떤 조건 같은 것은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어느 대학 나왔으며, 아버지는 뭐하시며, 형제가 몇 명이고,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차는 뭘 타는지, 그게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좋은 차 탄다고 해서, 천당 가거라, 그런 것 없거든요.

키가 몇 센티이며 천식을 앓는다든지 그런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조건 앞에서 아무 소용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누더기 인생이기 때문에 그걸 되게 귀한 인생이라고, ‘남들은 이런 경험 못했지, 그지?’ 그러니까 나는 너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경험과 기억 속에는 뭐가 형성되느냐? 높낮이가 형성돼요. 계급이라는 겁니다. 높낮이가 형성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인간의 판단력에 의해서 결정된 높낮이는 일체 인정될 수 없습니다.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라는 조건의 하나를 끄집어내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망해야 마땅한 요건을 갖추지 아니하면 진짜 망한다.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요건, 자기가 부인되어야 될 이유가 옆에 있지 않는 한 그 사람은 지금 편안히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누가 나를 지적질해야 되고, 근원적으로, 본질적으로 지적해주는 요소가 항상 우리 옆에 따라붙어야 돼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진노의 자녀였었어, 라는 그것을 계속 확인시켜주는 요소가 계속 따라붙어 있어야 돼요. 그 구조라면 긍휼의 구조는 그와 똑 닮았어요. “네가 어디 가서 무슨 짓 하는 그것 신경 쓰지 마라. 네 행동에 대해서 네가 책임질 생각하지 마라.” 모든 것을 뜯어내고 오직 긍휼만 남게 하는 겁니다.

마치 착하든 안착하든 어떤 경우에도 진노만 남듯이, 이제는 사태가 역전되었어요. 하나님이 찾는 것은 네가 얼마나 착하냐, 훌륭하냐, 성실하냐를 찾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긍휼하심만 찾는 거예요. 하나님의 긍휼하심만 드러내는 겁니다. 제가 어느 책을 보니까 유대인들이 얼마나 자기신앙에 철저에 철저를 기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게 있어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사도바울 자체가 유대인이고 사도행전에 보면 늘 유대인들을 만나왔다고요. 그 유대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오늘날 소위 기독교 내에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기본적으로 매일같이 열여덟 내지 열아홉 가지의 기도를 반드시 하루 중에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도 서서 해야 된답니다.

서서 한다고 해서 그걸 ‘아미다’라고 하는데 그 19가지의 내용을 나열해볼게요. 첫째는, 역사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 역사, 과거에 우리 이스라엘을 이렇게 인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거예요. 두 번째, 자연의 하나님,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 번째가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는 것.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게 해달라는 기도.

네 번째가, 명철을 구하는 기도. 똑똑하게 사리를 잘 판단하게 해 달라는 기도. 다섯 번째, 회개의 기도. 여섯 번째가 용서를 구하는 기도. 일곱 번째가 고난에서 구출되기를 원하는 기도. 여덟 번째가 치유를 구하는 기도. 힐링이죠. 아홉 번째가 가난에서 건져주심을 구하는 기도. 열 번째, 사로잡힌 자에게 돌아오기를 구하는 기도. 여기에 ‘쇼파르’라는 양각나팔까지 동원합니다.

열 한 번째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 열두 번째, 하나님의 대적의 멸망을 구하는 기도. 거기에는 오만한 자를 멸망케 하옵소서, 라는 기도의 내용이 나옵니다. 그 기도 내용에 따라서 유대인들이 기독교신자를 박해한 거예요. 이 기도가 예수님 당시의 기도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 유대인들이 보기에 기독교인들이 오만한 자에 해당되는 겁니다.

열세 번째가 의인들과 개종자들을 위한 기도. 열네 번째가 예루살렘의 재건을 위한 기도. 열다섯 번째가 메시아 왕을 위한 기도. 보이지 않는 하늘에 있는 이스라엘 왕을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열여섯 번째가 기도의 응답을 구하는 기도. 철저에 철저를 기하는 거예요. 중간에 기도가 없어지지 않게 해달라는 그 말이지요.

열일곱 번째가 성전예배의 회복을 위한 기도. 열여덟 번째가 하나님의 변함없는 자비하심에 감사를 드리는 기도. 열아홉 번째 마지막이 평화를 구하는 기도. 뭐 빠진 것 있으면 이야기해 보세요. 빠진 것 없지요. 이거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들어가거든요. 행함은 그냥 행하지 않아요. 행함은 반드시 뒤에 뭐가 따르느냐 하면, 반성할 행위를 했을까, 아니면 스스로 셀프칭찬을 해도 괜찮은 행위를 했을까를 돌아보게 하는 근거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철저에 철저를 기한 유대인, 사도바울이 만났던 유대인을 사도바울은 한 방에 보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 복음을 가리기 위해서 발악이 된 자녀들. 악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하나님의 긍휼을 가리기 위해서 사투를 벌이는 집단들. 쉽게 말해서 “너희들이 하나님을 알아?” 그 말이에요. “너희들이 하나님을 알아?”

사도바울이 하나님을 거론한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사건의 의미를 그들의 코앞에 들이대는 겁니다. “너희들이 십자가를 알아?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방식을 알아?”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죽여 놓고 살리는 방식.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들이 이런 철저에 철저를 기하기 때문에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왜? 복음에 방해되니까.

아마 열아홉 가지의 기도를 어느 교회에서 걸어놓고 한다면 그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할 거예요. 하나님이 이런 교회는 절대로 멸망시킬 일이 없다. 반드시 천국 다 보내준다고 그렇게 아주 은혜 넘쳐서, 탄복해서, 괜찮은 교회 있다고 입으로 소문낼 거예요. 음식점이나 교회나 입소문이 최고입니다. 맛 집 소문내는 것.

그들은 그것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 해당되는 것은 감히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제가 보기에 그들은 자신이 미치지 않으려고 했기에 그런 겁니다. 신앙인은, 성도는 미친 자다. 제가 동의합니다. 동의하는데 조건이 있어요. 멀쩡한 것을 아는 상태에서 미친 사람이에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미친 자는 자기가 미친 지도 모르고 미친 거예요. 멀쩡하다는 기준이 그들에게는 없어요.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멀쩡한 줄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성도는 이미 세상에서 멀쩡하다는 것을 다 살아봤어요. 하나님의 성령이 와서 그것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전에는 자기는 자연스럽고 옛날 선배들인 유대인들이 그래서 망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 못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거룩함과, 소박함과, 낮춤과, 신중함과, 침착함, 이런 모든 것들, 내가 할 수 있는 성스러운 것을 총동원하면 하나님이 내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찾는 것이 아니고 긍휼을 찾는다는 말, 그러한 하나님의 작전을 생각도 못한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긍휼만 찾고 인간을 버린다면 하늘나라에 한 명도 없겠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건데요. 하나님께서 긍휼을 찾는다는 것은 진노의 구조와 꼭 닮았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이 세상 아담의 후손은 필히 진노덩어리로 살아야 된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필요했던 것처럼, 반대로 하나님의 긍휼이 지금 엄연히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는 꼭 긍휼의 백성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것을 내가 긍휼 받았다고, 그 앞에 ‘나’라고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그 말이지요.

긍휼이 내 안에 살아있는 것이지 내가 긍휼을 소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내가 긍휼을 소지해버리면 나는 엄연히 살아 있는 것이 돼요. 그러면 하나님의 일관된 법칙, 죽은 자를 살린다는 법칙과 안 맞아요. 주께서는 계속 죽어 있되 긍휼이 살아 있는 조건하에 거기서 계속 우리 자신을 살려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예뻐서 살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의 긍휼, 불쌍히 여기심을 살려내기 위해서 계속 우리 자신은 불쌍히 여김의 혜택을 입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 살면서 무전기를 갖고 살아야 됩니다. “하늘 나오라, 긍휼!” “여기는 긍휼! 지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긍휼!” “예, 지상은 이렇게 돌아갑니다. 긍휼!” 오버, 대신 긍휼을 다 집어넣어야 돼요.

계속 긍휼과 긍휼로서 주고받음이 긍휼 안에서 이루어져야 돼요. 긍휼을 다시 풀이하게 되면 ‘불쌍히 여김’이에요. “여기는 불쌍히 여김의 나라. 밑에 있는 불쌍히 여김의 인간, 지금 잘되고 있나?” “예, 지금 세상은 이렇습니다. 저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가 이야기합니다.” 항상 이렇게 자기 자신을 해체해버리고 거기다가 불쌍히 여김을 집어넣자는 그 말이지요.

그걸 저는 긍휼의 왕노릇이라 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긍휼에 풍성하시다 하는 거예요. 풍성하시다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상 밖에 여분의 것을 더 주시는 거예요. “아이고, 그만 이제 되었습니다.” 하고 말릴 수도 없어요. “너 더 얻어야 돼. 더 가져야 돼. 널 위함이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함이다.”라고 더 퍼부어주고 더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요, 신중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초연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남들이 미쳤다, 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남들이 미쳤다고 할 때 우리는 알지요. 네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멀쩡함이 어떤 범주의 멀쩡함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그 멀쩡한 범주라면 내가 너희들이 미쳤다는 그 이야기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가 미친 것이 맞다. 내가 미쳤어.’

그 미친 내용이 뭐냐? 이 진노밖에 없는 나라에서, 오갈 데 없는 우리를 주님께서 받아줬잖아요. 오갈 데 없는 것. 사람이 구사일생 살림을 받았으면요, 그저 살려준 그 품안에 달려가서 팍 안겨야 돼요. 팍 안겨야 됩니다. 딴 것 생각하지 말고. 휴, 하고 살았다고 안겨야 돼요. 여러분, 초콜릿 cf 알지요? 팍 안겨서 그냥 탁 내밀고 “맛있어요?” 하는 것 있잖아요.

그냥 주님 품 안에 푹 안겨버려야 된다고요. 딴 생각하지 말고. 천식 같은 것 생각하지 말고 그냥 푹 안겨버려야 돼요. 살림을 받았잖아요, 살림을. 주님의 일관성, 죽였다가 살리는데 그 살릴 때 긍휼로만 살리거든요. 왜냐하면 죽일 때 진노로 죽인 거예요. 잘못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 나왔다고 지옥 보내는 것이 아니고 그냥 본질상 지옥의 사람으로 만들어냈어요.

왜? 우리가 미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 만드신 거예요. 태어나보니까 진노 한 복판에 있었다니까. 우리 탓도 아니고 남 탓도 아니에요. 주께서 그렇게 하겠다는 거예요. 아담의 자손들은. 긍휼의 구조가 그 구조를 그대로 닮았어요.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긍휼로 구원받아요.

긍휼은 새로운 마당, 새로운 장을 여신 겁니다. 여기에 지장되는 것을 가지고 제가 인간의 경험, 인간의 체험이라고 한 거예요. 인간의 체험, 경험은 반드시 반성을 유도하게 되어 있고, 그 반성을 보면서 거기에 뭐가 또다시 부각되느냐 하면, “나는요? 저는 어떻게 됩니까? 저는 앞으로 어떻게 돼요?” 꼭 자기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고 염려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이여, 자기보고 뭘 시켜 달라는 거예요. 뭘 행하라고 하는 거예요. 저를 살릴 수 있다면 어떤 것도 행하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행해서 내가 살 수 있다면 까짓 거 그것을 행하지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관된 복음의 일을 훼방하는 방해공작에 지나지 않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의 속성을 그대로 노출한 겁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긍휼이 살아 있기를 원하는 것, 하나님의 뜻이에요. 자 그렇다면 그 긍휼이 지금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시키는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또는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

예를 들면, 지난 시간에 이 세상을 밥솥이라 했는데, 찜통이라고도 했고요. 찜통 안에 쥐 몇 마리 넣어놓고 독가스를 풀어봅시다. 그러면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모르고 그 안에 있는 쥐새끼 들은 이유도 모르면서 탈출을 하려고 애를 쓰겠지요. 그걸 저는 ‘두려움 + 두려움’ 연속된 두려움이에요.

그 갇혀진 밥솥 주변에 살아보겠다는 손톱 발톱의 핏자국이 다 묻힐 거예요. 그게 인생살이입니다. 자기가 한 번 살아보려고. 그 사는 방법이 어떤 방법이냐? 소위 육과 초월의 순환구조로 이루어져요. 뭐냐 하면, 육체로 살면 안 되고 영적으로 살아야 돼, 라고 교회에 가서 기도든 헌금이든 할 수 있는 온갖 것을 다 해보는 거예요.

우물 속에서 손톱가지고 기어 올라가 보세요. 나중에 밑에서 당기는 돈의 위력에, 그 중력에 결국은 주르르 미끄러집니다. ‘아이고,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구나.’ 하다가 정신 차려서 ‘아니야, 주님이 최고야.’ 하고 또 올라가고. 백날 올라가봐야 그 안에 갇혀 있는 순환구조에요. 노력하고, 성화하고, 빠져나오려고 애쓰고, 용한 점쟁이 찾는 것처럼 용한 목사 찾아다니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공포가 자꾸 밀려와요. 공포 내지는 두려움. 사는 것이 힘들고 외롭고.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묻지 마세요. 원래 그래야 되는 겁니다. 왜? 우리 인생은 진노의 여파를 죽을 때까지 발산하는 본성을 갖추라고 주께서 우리를 이 땅에 만들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두려움과 공포에 쫓기고 시달리고.

시달릴 때마다 교회 가서 철야하고, 차가운 바닥에 새벽기도 한다고 엎드리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성경 요한 1서 4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성령 받았다, 하나님의 신비다, 기적이다, 믿지 말라는 그 말이에요.

영들 이야기하고, 성령 이야기하면 전부 다 진짜 복음 아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항상 앞에 두려움에 쫓기고 있는 내가 성령 받았다, 두려움에 쫓기는 내가 뭘 어떻게 할까, 성경을 더 읽을까, 또 내가 나를 살리는 그 몸부림을 밥솥 안에서 시도하는 거예요. 독가스에 도취되어 있는 쥐들이 살기 위해서 발악을 하는 그 모습과 인간의 모습과 다를 점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똑같은 거예요.

어디로 가는지, 왜 사는지, 사는 이유가 뭔지,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 무조건 어떤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하면, 자기 자신을 움켜쥐는 거예요. 여러분, 손에 꿀을 한 움큼 쥐고 날아드는 벌을 보고 “저리 가, 저리 가!” 하면 벌이 갑니까? 자기가 손에 움켜 쥔 꿀이 있는데.

내가 나를 쥐고 안 놓으려고 하면 여기에 악마가 주는 공포와 두려움이 계속 달려오는데 “가거라, 공포야! 두려움아!” 하면 갑니까? 안가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거예요. “아직도, 네가 지키는 것이 아직도 남아 있느냐?” 하는 그 말입니다.

그게 자존심일수도 있고, 명예도 있고, 자아일수도 있고, 내 목숨일수도 있고, 내 인생일수도 있고, 내찬란한 경험과 기억일수도 있는데 그걸 아직도 네가 쥐고 있느냐는 것. 내 가정일 수도 있고 내교회일 수도 있거든요. 그걸 아직도 쥐니까 악마가 주는 협박 공갈이 계속 오는 거예요. 그걸 쥐고 있으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참 답답했어요. 그 답답함이 누가복음 7장 31절, 32절에 나옵니다.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미 이 세상은 주님이 하는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이미 압력솥이고 찜통이기 때문에, 갇혀 있기 때문에, 진노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겁니다. 미가 3장에 보면 종교라는 것이 어떤 기능을 하는가? 이런 기능을 해요.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편안하다, 잘된다, 행복하다, 자꾸 긍정적 이미지를, 긍정적 마인드를 계속해서 주는 거예요. 꿈을 꿔라. 소년들이여 비전을 가져라. Boys be ambitious, 이런 것 있잖아요. 계속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해서 강요를 하는 겁니다. 이것은 뭐야 같으냐 하면, 세월호와 똑같아요. 이미 물이 다 들어차고 있는데 세월호 배 안에서는 태평이라.

오늘날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세월호에 비유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가까운데 안에서는 태평이에요. 잘된다, 평안하다, 무탈하다. 무탈하지요. 왜? 마귀가 그렇게 복음을 가리도록 해놓았으니까. 무탈하지요. 아무문제 없지요. 나는 내 것으로 잘 살고 있으니까. 열심히 살면 뭔가 좋은 수가 나겠다는 거예요.

캐럴 레이크라는 여류작가의 <장미언덕>이라는 단편소설집에 <심판의 날>이라는 단편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데려가기 위해서 방주를 가지고 오셨는데 하나님께서 내려온다고 피곤해서 선술집에 잠시 술 마시러 갔어요. 소설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술 먹고 있는데 천국 가고 싶은 사람들이 방주를 보고 우르르 몰려가서 저희들이 노를 저어서 저희들끼리 천국에 가버렸어요. 하나님은 태우지도 않고서.

오늘날 교회가 이 모양입니다. 소망, 소망 하는데 소망이 그들의 주님이에요. 자기 소망이 그들의 메시아가 되어버렸어요. 진짜 메시아는 우리보고 진노의 자녀, 죽으라고 하는데 자기는 죽기 싫은 거예요. 산채로 가겠다는 거예요. 어디로? 천국으로.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방주로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방주를 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살아 있는, 움직이는 방주되기 위해서는 방주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진노에서 긍휼로 바뀔 때에 누구 힘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그 벌어진 일을 우리 안에 집어넣는 방식으로 우리의 환경을 진노의 환경에서 긍휼의 환경으로 바꾸는 겁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안에서, 예수 안에서, 그 이야기는 너무 길어져서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만, 에베소서 1장 2장 넘어오면서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몰라요. 예수 안에서, 방주 안에서, 주님이 주신 긍휼 안에서, 너희는 이미 백성이었더니.

‘긍휼 안에서’입니다. ‘긍휼 안에서’ 우리의 행함을 묻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너 똑바로 해, 그런 책임을 지라는 말이 아니에요. 뭘 보여주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9장 23절에 두 그릇이 있는데 하나는 진노의 그릇이고 하나는 긍휼의 그릇이라고 되어 있어요.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내가 만들었다고 해서 너희들이 시비 걸지 말라는 뜻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긍휼의 그릇이라면 우리는 일종의 미친자에요. 정신병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함으로 될 수 없는 존재로 변했기 때문에. 정신병자에요. 하지만 멀쩡하다는 자들이 어떤 것을 멀쩡하다고 하는지를 아는 정신병자에요.

그리되면 예수님도 우리하고 같은 정신병자 되지요. 요한복음 9장 3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네가 미쳤다 하니 정상이지만 네가 안 미쳤다 하니 정신병자니라. 똑같은 거예요. 성도는 미친 거예요. 왜냐? 본인도 미치고 싶어서 미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이 와서 미친 거예요. ‘뭐 이런 세계가 다 있노?’ 본인도 깜짝 놀라요. 그러면 주님이 “너는 그것 때문에 살았다.” 하면 “아, 죽을 우리를 살려줬으니까 제가 뭔들 못하리오.” 하고 주님 품안에 팍 안기지요.

자, 그래서 다시 돌아보세요. 오갈 데 없는 우리를 이렇게 받아주니 얼마나 긍휼이 감사한지요. 뭘 로 이걸 되갚습니까? 되갚을 방법이 없어요. 이런 자유. 누가 시기하는지 알아요? 자기 힘으로 발악해서 천당 가려는 인간들이 시기하는 겁니다. 그들은 긍휼을 받은 적이 없어요. 그들은 진노의 자녀의 선배 되는 바리새인하고 똑같은 겁니다.

행함으로 구원받자. 행함으로. 겸손해서 구원받자. 마음 낮춰서 구원받자. 그런 것은 복음을 가리기 위한 악마의 술책인 것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잘되기 위해서 긍휼을 준 것이 아니고 오직 긍휼만 남고 나머지기는 날마다 도려내는 식으로 주께서 일하십니다. 진노에서 긍휼로 바뀐 그 능력이 아직도 우리 안에 살아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백성이고 세상 보기에 미친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환경을 일관성 있는 주님의 복음 앞에 다시 한 번 비춰보기를 원합니다. 누더기 같은 인생 걸치고 나름대로 해석한다는 그해석이 얼마나 엉터리며 누더기 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주님을 판단하고 성경을 판단해 왔었습니까? 이제는 긍휼만 드러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2강-엡 2장 3-4(긍휼)190210-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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