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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6 15:47:13 조회 : 195         
사무엘의 한계 (삼상 16: 1-11)  대전-46강   이근호 이름 : 주향(IP:115.20.251.218)
사무엘의 한계 (삼상 16: 1-11)   
대전-46강   이근호  

2019년 1월 29일   
본문말씀: 사무엘상 16장 1-11절



(삼상 16: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삼상 16:2)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삼상 16:3)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사무엘 상 16절 1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이야기 하시는데 사무엘은 슬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인데 의견이 일치 돼야 하지요. 그래야 100% 전하지요. 지금 백성들은 사무엘이 인물이 얼마나 잘 났는지 말을 잘 하는지 관심 없어요.


사무엘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여과 없이 중간에 새는 것 없이, 누수 없이 그대로 전달되기를 바라는 거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만약 인간들 속에 하나님이 나타나면 모두 죽습니다. 다시한번 볼까요. 하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 인간이 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면 인간은 다 죽어요. 그 중간에 선지자가 있는데 사무엘 선지자가 하는 기능 안에는 뭐가 담겨 있냐하면 죽여야 될 인간을 안 죽이고 계속 관계를 유지하는 요소가 이 안에 담겨 있겠지요.

그 요소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거에요. 약국에서 파는 당귀정 있잖아요. 약 겉에 단 것으로 싸서 입히면 순하게 넘어가지요. 그렇듯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면 다 죽어요. 그렇게 되면 인간들이 다 죽어서 안 되니까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당귀정처럼 둘러쌌다면 이스라엘 백성도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무수한 말씀을 그렇게 듣게 되어 있어요.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가 아니어서 죽어야 되는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용서하심으로 둘러 쌓여 있기 때문에 인간은 늘 용서받으면서 주의 진노도 전하게 되는 거에요. 마지막 심판인 진노를 다 전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려운 이야기 하나를 하자면 하나님의 일의 중심이 어디쯤 있겠느냐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보통 하나님의 일은 창세 전에 있다고 하지요. 창세전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다음에 그대로 창조 됐잖아요.


그런데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그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창세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때에 있어요.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 된다고 했습니다. 숨어 있어야 될 중심이 이 땅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예전에 초등학교 운동회를 할 때 장대 하나에 만국기가 걸려 퍼져 있고 이것을 우주의 중심으로 본다면 예수님이 중심으로 들어 온 거에요. 그러면 시간이라는 것도 창조에서 마지막까지가 어디서부터 펼쳐지겠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펼쳐지고 다시 예수님께로 모아지겠지요. 그래서 중심이 뭐냐하면 예수님 오심이 중심이에요.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갑니다. 아주 아주 오래 전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중심은 역사 한 복판에 와버린 거에요. 모든 중심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전에는 막연하게 안 보이는 하나님이었잖아요. 안 보이는 하나님이 시작이 아니라 예수님부터 시작한다고요. 모든 의미도 예수님으로부터 나오고 모든 가치도 예수님께로 소환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된다는 거에요. 이러한 발상의 대표적인 예가 뭐냐하면 보통 과학에서 D.N.A 라는 유전 인자가 있어서 자식은 아버지를 닮게 되어 있지요. 과학까지도 필요 없어요. 상식입니다. 자식은 아버지와 엄마를 반반 닮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반대로 이야기해요. 부모가 자식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거와 다르게 중심은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거꾸로 펼쳐지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이것이 성경 어디에 나와 있는지 보겠습니다. 이런 발상의 전환을 언급하고 또 언급해도 중요한 거에요. 요한복음 8장 56절을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보세요. 아브라함이 너희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아브라함은 누굴 보기를 원해요? 자기의 후손 보기를 원하지요. 자손이 자기보다 먼저 앞섰다는 거에요. 다윗도 자기 자손을 보고 주라고 해요. 주가 없이 자기는 존재하지 않는데 자기를 자기되게 한 주는 후대에 온다는 거에요.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시간이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시간만 바뀌는 게 아닙니다. 공간도 바뀌어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고안이 어디냐? 없어요. 지난 주일도 이야기했어요, 소돔과 애굽과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 한 곳이라는 거지요. 어떻게 지리적으로 다른 지명이 하나가 될 수 있느냐?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밀어버리는 그것을 돌발, 돌출이라고 하는데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시간과 공간을 사용하는 그 무엇,


그것을 사건이라고 합니다. 사건은 그 현장에 가도 그 사건을 만나볼 수 있느냐? 만나볼 수 없어요. 사건이니까. 오늘 사무엘 상을 강의하면서 생각해야 될게 굉장히 많아요.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다시 해 보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느냐 하면 사무엘의 문제점이 뭐냐는 거에요. 사무엘에게 문제점이 있다라는 것을 생각도 못했지요. 감히 선지자를. 그런데 그의 문제점을 누가 지적했는가? 하나님이 하신 거에요,


“사무엘아! 왜 아직도 울고 있느냐?” 왜 슬퍼하고 있느냐는 거에요. 따라서 너는 선지자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거에요. 동업자가 의견 충돌이 일어난 겁니다. 그것은 사무엘도 인간인지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현재에 입장에서 과거에 들은 말씀입니다. 그것은 사무엘 본인의 옳바름과 정당성을 위해서 그것이 하나의 벽 또는 보호막, 장벽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어요.


교인들이나 성도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항상 자기 주변에 그러한 장벽으로 자기 주변에 쳐져 있어요. 나는 이것도 알고 이것도 안다. 이것은 본인도 못 깹니다. 남은 더더욱 못 깨고요. 이것은 사건인데 사무엘이 이 사건 통해 자기의 장벽에 갇혀있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장벽 안에 갇히면 거기서 뭐가 나오냐 하면 의미와 가치가 나오는데 그것이 누구를 위하는 가치와 의미냐 하면 고정되어 있는 사무엘의 의미와 가치에 푹 주저앉게 되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 했지만 중심은 어디 있다고요. 사무엘이 중심이 아니지요. 메시야도 아니고 구원자도 아닙니다. 모세도 구원자가 아니고 예레미아도 구원자가 아니고 이사야가 구원자 아니에요. 모든 것이 통일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사무엘의 자리가 멀 잖아요. 떨어져 있지요. 그러면 사무엘의 장벽은 찢어져야 되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 되요. 이 새로운 변화가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갇혀 있는 상태의 사무엘은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계시로 보는 거에요. 이럴 경우의 계시는 소유욕이 돼버립니다. 난 계시 안다. 난 하나님의 뜻 안다. 난 복음 안다. 소유욕이 되요. 내가 그 복음을 소유함으로서 구원 받는다 하면 소유욕이 되는데 변화가 와서 찢어지면서 계시가 되어버리면 내가 하나님의 계시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 사건에 동원된 거에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자기는 거기에 말려든 겁니다.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데 쓰여 질 뿐이지요. 그것을 신약에선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무엘을 보는 것이 우리에겐 유익이고 좋은 겁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면 기적이 막 일어나는 사무엘조차도 너무 인간적이었다. 난 이정도 아니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라든지 내가 이정도로 알아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되었으니까 마음 놓고 하나님의 일을 해도 별로 하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지금 사무엘 상 16장 1절을 하는데 쭉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인 사울을 버리지요. 사무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택할 때는 그 상태로 갈 것이라고 예상한 거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왕이 되게 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왕이 되게 했다면 하나님이 자기 약속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그러한 입장에서 보면 왕을 교체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거에요.


그런데 사울 왕이 교체가 됐다면 하나님에겐 하자가 없고 잘못이 없는데 인간이 사울 왕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해서 이런 결과가 왔다고 생각하고 슬퍼한 거에요. 사무엘은 그런 사울을 안타깝게 여기고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잃었다는 안타까움을 갖고 슬퍼한거에요. 이런 생각이 잘못됐다고 하는 거에요. 어떤 선입견이 잘못됐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은 곱게 받은 것을 꾸준히 유지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별 탈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 사무엘을 꽁꽁 묶은 선입견이고 자기 사상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보호막이 된 겁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도 모든 인간이 이런 생각을 다 갖고 있어요. 그런데 아까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던 가요? 세상의 중심은 창세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창세후도 아니고 이 세상 중심으로 이미 꽂혔지요. 말씀이 육신으로 오셨잖아요.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나타난 것이 하나의 중심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초등학교에서 운동회할 때 만국기 휘날리는 것처럼 생각해 보세요. 장대에 만국기 달리고 축제 분위기 나지 않습니까?

김밥 앉아서 먹어도 맛있어 보이고 그렇게 휘날려주고 분위기 띄워줘야 공책 받으려 달려줘야 사이다 먹고 신나게 축제하듯이 이 중심은 이미 확정되었어요. 사무엘의 시간과 예수님의 시간이 거리가 멀다는 말이죠. 사무엘뿐만 아니라 아브라함도 그렇고 아브라함도 누구의 때를 보기를 원했다 했어요? 예수님 보기를 원했지요. 왜 아브라함이 자기 고유의 나는 안다, 이 정도면 괜찮다, 구원 받는다를 멈추지 않습니까? 왜 그것으로 자족하지 않습니까? 나의 나됨은 나 스스로 확정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래요.


자식이 나를 닮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식을 위해 내가 먼저 존재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 자식은 또 그 자식을 위해 그렇고 결국 아브라함의 자손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의 흐름과는 반대로 생각해야 되요. 이 반대로 생각함이 거듭남입니다. 다시 태어나야 되는 거에요. 반대로 생각해야 되요.내가 표준이 아니에요. 심리적인 요소와 내 감정이 표준이 아니에요.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건에서 와해돼야 되요.

고정적인 이것이 나라고 하면 안되요. 그렇게 되면 의미와 가치를 품고 사는 것이 됩니다. 의미와 가치를 품고 살다가 새로운 상황이 오면 사무엘처럼 Cry 울어요. 우리는 울게 되어 있어요. 아파서 울어요. 몸이 아파 울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마음이 아파서 울어요. 왜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는가? 나는 하나님 잘 믿고 복음도 아는데 세상은 내 뜻대로 안되냐는 거에요. 복음은 소유용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통일에 합하기 위해서 은밀히 우리에게 주어진 거에요.

복음에 의해 우리가 늘 깨어지라고요. 사도 바울에 있어서의 계시가 뭐냐하면 마주침이에요. 사무엘도 마찬가지이만 마주침 또는 부딪힘이에요. 사울은 누구의 왕이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기름을 부었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새로운 상황에 부딪히면서 이런 생각이 깨져버립니다. 깨지면 자기는 뭐가 되요? 난 뭐지? 내가 그동안 선지자 노릇 제대로 한 거야? 선지자 노릇이 100점 이었어? 아니면 0점이었어? 아니면 50점이었어?

자기 자신에게 회의가 오지요. 자기 자신에게 의심이 드는 거에요. 자기가 전한 것, 자기가 행한 것에 의심이 드는 거에요. 이렇게 의심이 들 때 자기의 완벽했던 보호막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순간입니다. 그게 정상이에요. 왜냐하면 계시는 지식이 아니고 내가 있고 지식을 화보해서 되는 게 아니고 뭔가 나를 찢어 놓고 와해시키는 것이 계시에요. 나를 뭉게 버리고 파괴하는 것이 계시라고요. 계시는 사건이기 때문에 내 소유 대상이 아닙니다. 새벽 2시45분에 주님이 그 영혼 데려가면 그 창고에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이지요. 이 농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두고두고 할 이야기에요. 천하의 사무엘도 지금 슬퍼하고 있잖아요.[ Don't cry for lsrael] 이스라엘을 위해 울지 마라.언제까지 그렇게 울래? 울지 마라! 그러면 진작 버렸다고 이야기 안 해 줍니까? 진작 이야기 해줘야 된다고 여기는 그 틀. 나는 하나님에게 다 들어야 한다는 그 틀 자체가 내가 갖고 있는 것이 하나님 계시의 훼방질이고 방해물이 되는 거에요. 내가 어느 정도 안다는 것이 방해물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복음은 늘 우리에게 부딪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부딪힘이 부딪히면서 누가 깨지느냐? 사도 본인이 깨져요. 사도 바울이 미처 예상치 못한 새로운 하나님의 뜻이 마구 마구 발산되는 거에요.그렇게 되면 사도 바울에게 있어 내 인생이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내 인생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어요. 우리가 아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한번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찾습니다. 어려서 크리스마스 때 빵 얻어먹으려고 찾았던지 앞일에 걱정돼서 찾았던지 찾을 때 자기 자신을 위해 교회를 찾아와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되지도 않는 소리가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해 온 겁니다. 자기 틀은 깨지면 안돼요. 왜? 나 잘되려고 온 거지 욕바가지 먹으려고 온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와서 한 수 가리켜 주세요, 이렇게 나와요. 프로패셔널한 목사님! 저는 성경에 대해 무식하니까 한 수 가리켜 주세요. 아주 겸손하게, 가르쳐줘서 무하게요. 나에게 담으려고요, 담아서 뭐 할 건대? 내가 깨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천국 가려고, 이것 때문에 교회에 가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의미와 가치를 고스란히 담지요.

자기가 변화 됩니까? 안 됩니까? 변화 될 수 없지요. allf 예측한 그대로 자기가 안다고 우기는 겁니다. 사울은 그래서 버림받은 거에요. 사무엘은 이래서 책망받은 겁니다. 내가 주인공으로 살 수 없어요. 강물이홍수가 났다. 그 안에 수정구가 있어서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있다면 어떤 변화가 와도 내 것은 안 깨지겠지요. 이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종교라는 겁니다. 종교란 나를 지키는 또 하나의 방식이에요. 그리고 하는 말이 나는 험한 세파를 잘 이겨왔다는 거에요.


주여~내 손을 잡아 주소서! 라는 노래가 있지요. 미국에서 나온 가스펠 송이에요. 이런 것도 있지요. 주님은 풍파에 우리의 운전대이시다. I am sailing (Rod stewert)가 부른 유명한 팝송도 있지요. 항해를 할 때 험한 망망대해를 홀로 갈 때 주님이 운전사가 되어 주셔서 풍파를 이겨 달라는 사고 방식이 종교적 사고방식이에요. 눈물 흘리고 난리도 아니에요. 아직도 안 깨졌어요. 아직 계시를 모르고 복음도 모르고 십자가도 몰라요.


혼자는 다 배웠어요. 삼위일체도 배우고 십자가 복음도 다 배웠는데 주님은 어떤 용도입니까? 나 잘 되기 위한 나 안 깨지기 위한 용도이고 내가 지키고 싶은 의미와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복음을 배우고 배운거에요. 나 좋으라고, 이제 하나님께 버림받아 봐야 아아! 내가 착각도 보통 착각한 게 아니구나를 알게 되는 거에요. 사도 바울에게 자기 인생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식으론 안 살았어요. 강물위에 수정구 같은 것이 없어요.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인생뿐이지 자기 인생이 아니에요. 주님의 성육신의 되풀이에요.


자기는 죽고 자기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 거에요. 그럼 나는 어디 있느냐? 그때 그때 달라요. 매일 달라요. 어느 하나를 잡아 내 것이라 할 수 없어요. 지금껏 신앙생활 한 것을 다시 재정비하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이 책망 받는 것을 보시고 재정비 하세요. 어지간히 강의 다 들었어! 다 들으면 뭐합니까? 창고에 누적이 될 뿐인데 밑에는 막 썩고 있어요. 곰팡이 피고 너무 많이 들었어요.


콜롬비아에 깊은 산속에 깊은 호수가 하나 있어요. 그 호수에는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옛날 스페인 정복자들이 원주민에게 가서 금을 숨길 때거 없어 본국에 보내기 싫어서 호수 속에 원주민들 이용해 어깨에 메고 광산에서 캐낸 것을 다 호수에 집어넣었다는 거에요. 과연 이 호수에 금이 있을까요? 종교라는 것이 이런 겁니다. 교회에 가면 천국 간다. 교회에 가면 금이 있고 복석이 있고 미래에 구원이 있을 것이다.


성경 속에 보물이 있고 예수님 속에 보물이 있을 것이라 믿고 가는데 자기는 변하지 않아요. 자기는 멀쩡해요. 가서 호수의 물을 다 빼면 되겠지요. 부루룩 물을 다 빼면 금괴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100% 없습니다. 전설이기 때문에 없습니다. 그렇듯 교회에 가면 천국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구원도 없어요. 악마의 속임수였습니다. 교회 존재 자체가, 왜냐하면 구원은 우발적 사건이기 때문에 그 사건이 나에게 찾아오면 사건은 지식이 아니에요. 다시 한 번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가면 천국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이게 바로 구원이에요. 아하! 속았어! 속았어! 누구에게 악마에게? 내가 나한테 속은 거에요. 내 희망에 속은 거에요. 네 구원에 속은 거에요. 주님 내손 잡아주소서! 이게 속은 거에요. 옛날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찬송 부르면서 내가 나한테 속은 거에요.찬송 불러도 구원 없어요. 구원은 없어요. 천국도 없어요. 오직 천국은 주와 나의 만남에서 오는 겁니다.

어디든지 하늘나라, 어디든지 하늘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나에게 오세요라는 나 자체가 매일같이 허물어 지고 달라지고 허물어지고 달라지는데 주님께서 나에게 변화를 일으킨다는 자체가 나는 변화, 주님은 존재. 통일된 주님의 유일한 세계 중심만이 존재자이고 우리는 존재자를 증명하는 사건으로 데롱데롱 매달려있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먹고 사는 것 전부가 주의 사건이니까 내 인생은 없고 주님의 사건의 연속이고 뒤돌아보면 주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구나를 주님의 인생으로 내용이 꽉차있는 계시의 사건으로 된 내 인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오라는 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우리를 조져줘야 되는 거에요. 내 뜻대로 안 되줘야 되요. 슬퍼한다고요? 왜 슬퍼합니까? 기대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예상치 못하기 때문에, 어떤 분이 아가서로 수련회를 한다고 하니까 아가서 사랑의 내용에잔뜩 기대를 했다는 거에요. 다 끝나고 소감을 물으니 그 기대조차 나의 욕심이었다는 겁니다. 너무 멋져요. 그게 바로 계시입니다.

아가서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성경 말씀이 나는 멀쩡하고 몇가지 내속에 집어넣자가 아니라 그 집어넣는 주머니가 문제 있음을 아는 것. 이런 주머니가 있을 필요가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 내가 원해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에게 살려주세요 하면 안되요. 왜냐하면 그냥 주님에 의해서 살기 때문에 지금 말장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려주세요 하면 안되요. 왜냐하면 그냥 주님에 의해서 살고 있잖아요. 살고 있는 것을 뒤돌아보고 감사하면 되지 미리 주여! 살려 주소서! 다음은 요롷게가 나와요.


가정 화평하고 몸 건강하고 요롷게, 결국 주님의 일은 누가 훼방합니까? 반발하고 있어요? 내가. 그래서 주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거에요. 우린 죄인 되려면 한참 노력해야 되요. (웃음) 지난 낮 설교에서 이야기 했잖아요.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두 가지 밖에 없다고 죄와 허물 속에 사는 것. 이 의미 문제가 중요한데요. 악마가 하는 일이 뭐냐하면 바로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 것이에요. 악마가 하는 일은 이 하나 밖에 없어요. 선악과를 따 먹어라 하잖아요. 선악과를 따 먹어도 안 죽는다 했단 말이죠. 따 먹어도 안 죽는다는 말은 인간아! 네가 의미를 챙겨야지! 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는 것이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누구의 일이냐 하면 바로 주님의 일이에요. 주님이 죽고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 선악과라는 인간에게 둔겁니다. 악마는 거기에 미끼로 말려든 거에요. 따 먹어! 따 먹어! 선악과 자체도 에베소서 1장 10절에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 되게 하기 위해 미리 깔아 놓은 악마를 이용한 미끼, 악마로부터 유혹받을 만한 것을 깔아 놓은 거에요. 왜냐하면 이것이 금지거든요. 금지 있을 때 욕망이 생가는 겁니다. 수련회 때 제일 먼저 한 욕망이라는 것이 뭐냐?


욕망의 사랑과 충동의 사랑을 구분해 놓았잖아요. 욕망의 사랑과 충동의 사랑은 뭐냐 내가 이런 여자였으면 좋겠다는 조건을 걸고 그 조건을 들고 맞춰 나가는 게 욕망의 사랑이에요. 욕망의 사랑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사람과 결혼을 했더라도 그 조건에 부합되지 않으면 언제든 갈라 설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어요. 그러면 왜 안 갈라서느냐? 자식 때문에. 충동은 내가 시작한 게 아니고 나 아닌 다른 분에 의해 시작 된 거에요. 충동은 충동을 주신 분에게 놀아나는 겁니다. 어느 것이 피조성에 부합될까요. 내가 욕망을 쥐고 목표를 달성했다가 피조물답습니까? 아니면 놀아났는데 그게 피조물답습니까? 놀아 난거죠.


어느 강의에서 했던가? 인간은 빈 박스 같아서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라고요. 악령이 들면 악령이 차지해버리고 성령이 들면 성령이 차지해버리고 우리는 저항도 못하고 반항도 못하고 인생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은 공이다. 누가 와서 발로 차는 데로 굴러가는 인생은 공이에요. 결혼하면 여자는 남자에게 걸려든 공이고 아무나 잡은, 왜냐하면 결혼 전에 후보감을 기껏해야 몇 명이나 봤겠습니까? 선 두 세 번 봤습니까? 이 세상에 남자가 두세 명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두세 명 보고 왔다는 것은 나를 차지하려고 두세 명 밖에 안 왔다는 뜻이에요. 좀 더 탐색을 많이 할 것이지. 그러기엔 결혼 적령기가 너무 늦어져요. 아무리 자기 딴에 올바른 선택과 치밀한 판단력을 동원해도 인간은 공입니다. 아무나 차면 차이는 거에요. 내 인생 내 마음대로 못 합니다. 사방에서 어떤 발길질이 날아올지 누가 장담합니까? 멀쩡했던 애가 나가서 기브스하고 들어올지 누가 알겠어요. 그냥 차는 데로 자이는 거에요.


이게 바로 사건입니다. 물리학을 동원해서 이 사건을 설명해 볼께요. 관성의 법칙이라는 게 있어요. 관성의 법칙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기차가 달리잖아요. 기차 안에서 위로 폴짝 뛰면 어디로 떨어집니까? 그 칸 아래로 떨어지겠지요. 왜냐하면 같이 움직이니까 이것을 멈추기 전에는 하던 행동을 그대로 한다는 뉴튼의 관성의 법칙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도 사울을 보고 사무엘이 슬퍼했다는 것은 관성의 법칙에 해당되는 거에요.


내가 과거에 기억하던 그대로 가는 습성에서 인간은 스스로 못 빠져나오는 거에요. 내가 판단하고 이해하는 모든 것은 돌발적인 사건이 덮치지 않는 한 우리는 늘 하던 행세 그대로 가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그 상황의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새로운 변화에 여지가 있다? 없다? 없어요.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교회 역사상 자력으로 변화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어요. 주기철이고 누구이고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변화된 조건하에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죄인으로 구원되기 때문에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되면 안 되지요.


그러면 죄인을 부르러 온 주님의 취지와 어긋나니까 의인이라고 여겼던 그 자체가 자기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새로운 자기 보호막을 형성하게 된 거에요. 난 이 만큼 의롭다, 정당하다가 되는 겁니다. 이 관성의 법칙에 의해 사무엘이 슬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새로운 변화를 줍니다. 본문 1절부터 보면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그런데 2절을 보세요.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다리가 없습니까? 신발이 없습니까? 왜 못 가요?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이게 관성의 법칙인거에요. 지금 권세 아래에 있잖아요. 권세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권세의 종이 되었다 사실이에요. 아무리 우리가 노력한다 할 지라도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만 우리가 변화 될 뿐이지 결코 이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권세에서 벗어나야 될 게 아닙니까? 묻는다면 권세에서 벗어나야 구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이 권세에 종이 됨으로 구원이 되요. 왜냐하면 바깥에서 데리러 오시는 분이 들어오시기 때문에 그래요. " 너 이 세상에서 나와! 나오면 천국에 보내 줄께!" 이렇게 생각하면 안돼요. 그렇게 나올 수 있을 것 같으면 그냥 혼자 걸어서 나오면 되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죄 밖에 없는 세상에 주님이 들어오셨다는 거에요.


들어와서 자기 백성을 데리고 가시는 겁니다. 데려 갈 때 자기 백성은 의인이 아닌 뭐로 간다 했어요? 죄인으로 가는 거에요. 고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제가 아는 것은 그동안 혹독하게 속았고 속았다는 것은 만약 그것을 위배했을 때는 죽음이라는 두려움이 꽉 들어있는 거에요. 그래서 천하의 사무엘도 뭐라 합니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두려워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안 죽인다고 한 게 아니고 뭐라고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아까도 이야기 했습니다만 하나님과 인간이 직접 만나지 못합니다. 죽기 때문에 그래서 중간에 당귀정이란 게 있어 하나님의 진노를 감싸주는 것이 있는데 그 당귀정이 뭐라고 했습니까? 용서라고 했지요.

용서와 하나님의 진노, 진노라는 것은 버렸다, 더 이상 상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상대하지 않을 경우에 인간의 특징이 뭐냐? 홀로되기이지요. 신자이냐? 아니냐는 이것 하나로 끝나는 거에요. 하나님 부르짖고 찾는다고 기도원 쫓아다니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 어디계십니까? 하나님 어디계십니까? 찾아도 이 자체가 이미 홀로 있다라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믿음을 가질 생각을 하지 마시고 믿음 없는 사람이 구원돼요. 믿음이 없는 것을 아는 사람이 구원된다니까요. 자기 쪽에서 시도하고 믿음이 있다고 하니까 홀로서기에서 계속 멈출줄을 모르네,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이 땅에서 계속 홀로서기를 하기 때문에 자기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를 지킬자가 없어요. 이 땅에서의 이상한 버릇을 하나님에게도 자꾸 써먹으려해요. 하나님 제 믿음 어때요? 제 사랑 어때요? 제가 헌신하고 봉사하고 선교하는데 이것 어떻습니까?

맨 날 자기 행함을 내세우며 나에게는 믿음도 있고 소망과 사랑이 있다는 거에요. 그것을 버릴 수가 없어요. 버리면 자기의 존재도 없고 가치도 없기 때문에.그래서 오죽했으면 세리와 창기와 강도를 데리고 다녔겠습니까?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세리와 창기를 뭐라고 했습니까? 움직이는 빈 무덤이라고 했지요. 시체들이 돌아다니는 것하고 같아요. 시체가 돼야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개뿔도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어야 구원된다는 거에요.


혼인잔치에 누가 참석했다고 하던가요? 아무나에요. 아무나, 아무나 와서 맛있는 음식 먹은 거에요. 마르다가 준비한 것은 수요일에 이야기 했잖아요. 요셉 쪽에서 다 준비해요. 애굽의 바로 쪽에서 다 준비한다고요. 요셉의 형들은 빈털털이로 와야되요. 에스더가 하나님의 일을 한 이유가 뭡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원래 넌 죽었어. 얼굴은 좀 이쁘지만 죽었어요. 죽은 자를 사용하시는 거에요. 안 죽으면 안 죽은 것만큼 주의 일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사무엘에게 죽는 상황을 만들어줘요.


이것을 사무엘이 기대한 것도 아니고 예상한 것도 아니고 원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기피하고 싶은 상황이에요. 주의 일을 하다가 죽는다, 너무 억울하지 안 습니까? 제가 뭘 잘못해서 죽을 상황이 되었습니까? 아니야! 죽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일은 너희 보호막이 찢어지고 지킬게 없어지면 새로운 주의 사명을 받게 되요. 새로운 사명은 내가 살아있는 한 주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죽는 것과 동반해서 주어져요. 하나님의 말씀은 공책이 필요한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적는 공책은 그때그때 마다 조달해주지 기존에 있는 자기 공책 뒷면에 써주세요 하는 건 없어요.


주님의 계시가 가슴팍에 새겨 지려면 어제의 가슴팍은 날라가 버려야 되요. 새로운 변화 속에서 주님의 계시가 우리 몸에서 발산되는 겁니다. 매일매일 살게 해주시는 거에요. 어제를 닮은 내가 아니고 장차 오실 주님을 닮은 우리가 달라져야 되요. 주님은 이 땅에서 많이 고생하시고 설움 받으셨지요. 그 서러움과 변화 죽음을 점점 가까이 가서 우리는 그것을 닮아가야 되요. 나는 천국에 가서 잘산다가 아니라 난 이 땅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어! 라는 억지가 아닌 내 운명이구나! 예주님이 나를 붙잡았다는 것이 정상이구나!


감기에 걸리면 기침하는 것이 정상이듯이 주와 함께 있을 때 내 염려와 걱정, 의미라는 것은 와장창 망가지는 거리를 또 내가 하나 어설픈 몸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나는 주의 일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는데 주의 일은 감사와 고마움이 나오면 주의 일이고요 왕 짜증 나오면 이것은 악마의 일이에요. 소를 팔아서 썩은 사과를 사왔다는 거에요. 잘했군 잘했어! 이 일이 남이 보기엔 왕 짜증 나는 일인데, 소를 팔아서 썩은 사과를 사온 것이 왜 짜증나겠어요. 내 의미 내 보호막이 있기 때문에 내 영토가 있거든요.


내 영토가 침해받으니까 왕 짜증 난거에요. 내가 있거든요. 내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잖아요. 내가 살아있는데 당신이 밖에 나가 위기를 조성했다는 거에요. 우리는 위기랄 것도 없고 살려주시는 것을 뒤돌아보면서 감사와 고마워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이 드리블하며 차는 공이 되시길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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