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19-02-28 14:43:53 조회 : 137         
179강-창 47장 1-6절(언약의 거주지)190227-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59.14.217.21)
179강-창 47장 1-6절(언약의 거주지)1902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7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75페이지입니다.

창 47:1-6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가로되 나의 아비와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형들 중 오인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우거하러 왔사오니 청컨대 종들로 고센 땅에 거하게 하소서 바로가 요셉에게 일러 가로되 네 아비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비와 형들로 거하게 하되 고센 땅에 그들로 거하게 하고 그들 중에 능한 자가 있는 줄을 알거든 그들로 나의 짐승을 주관하게 하라.”

요셉이 형과 아비가 자기가 있는 애굽땅에 왔다는 것을 바로왕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하면, 지금 애굽땅의 주인은 바로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로왕이 요셉의 형들과 아비를 만났을 때 우리가 일단 바로왕 입장에 서서 생각해 봅시다. 질문은 간단한 거예요. 우리나라에 왜 왔느냐? 난민신청 하러 왔느냐는 말이지요. 이민을 온 거냐고 묻는 거지요. 왜 왔느냐.

요셉의형들과 아버지가 오고 싶어 했는데 네가 왜 그래, 라고 할 입장이 못 되지요. 그들이 떠나서 도착한 것은 그냥 비어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남의 나라입니다. 애굽입니다. 애굽나라에 그들이 온 겁니다. 우리 집에 누가 오게 되면 단박에 묻는 것이 있어요. 무엇 때문에 오셨어요, 왜 오셨어요, 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여기에 살러 왔습니다.” “왜 살러 왔습니까?” 4절에 보면 나오지요.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살러 왔습니다. 이것은 어떤 뉘앙스를, 어떤 느낌을 주느냐? 우리가 여기서 의도적으로 이 나라 백성 되려고 온 것이 아니고 기근, 가뭄에 쫓기다시피 해서 어쩔 수 없이 왔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이것은, 기근이 끝나게 되면, 즉 이 나라를 침략하러 왔다든지, 접수하러 왔다든지, 그런 뜻이 아니에요. 기근이 끝난다는 조건이 되면 떠날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한시적으로, 임시적으로 어쩔 수 없이 왔으니 양해해달라는 식으로 언급을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애굽사람 될 의사가 없습니다, 하는 겁니다.

기근이 아니었다면, 가뭄이 아니었다면 애굽나라가 탐이 나서 ‘나는 그쪽 백성이 되어야지’라고 간절하게 원해서 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섞일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족을 다루시는 방식을 보세요. 창세기 37장에 보면 그 이야기가 야곱의 족보가 이러하니라, 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야곱의 족보라면, 야곱의 집안의 족보인데 그 집안의 사적인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일상적으로 족보라 하는 것은 누가 누굴 낳고, 누가 누굴 낳고, 이렇게 죽 내려가는 거예요. 그러나 야곱의 족보 이야기에서 야곱의 집안이 다른 집안과 다른 점은 애굽과 결합되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애굽에 산다고 해서 애굽나라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야곱의 족보이야기 속에 애굽나라에 가서 살아야 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야곱의 사적 집안이 단순히 어떤 나라에 소속되어 있고 특정 나라의 가족으로서 계속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70명의 그 집안이 애굽나라, 그것도 바로왕과 상대를 한다는 것은 여기서 새로운 나라, 국가가 애굽나라를 통해서 양성되고 생성되고 잉태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하나의 국가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보통 국가라 하면, 가나안 땅에 왔으면 그 가나안 땅에서 자식을 번성시켜서 힘을 모아서 국가로 만들면 될 텐데 여기서는 야곱이라는 국가, 나중에 이스라엘이 됩니다, 그 이스라엘국가의 특징은 가족들이 숫자를 키워서 땅 개간해서 나라를 만들자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그 가족이 애굽나라 속에 예속되어야 되고 소속되는 방식으로 국가가 생성되는 겁니다.

이 조짐이, 장차 이스라엘나라가 되는 원리가 지금 야곱의 가정이 애굽나라에 들어와서 산다는 것과 관련성이 있어요. 보통 집안 아닙니다. 물론 출애굽기 4장 22절에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신약에서 알다시피 하늘나라라는 것이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늘나라가 아니에요. 거기서 누가 와야 돼요. 누가 이 땅에 합류가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합류할 때 그냥 합류하는 것이 아니고 뭘 갖고 왔느냐?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겠다는 약속과 더불어서 약속을 칭칭 몸에 감고 이 땅에 오신 분이 계신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야곱이라는 것은 그냥 평범한, 남들 보기에, 우리 집안이 있듯이 저쪽도 집안이 있는, 그저 집안 대 집안으로 생각할 거예요.

집안이라는 것은 규모가 작습니다. 70명밖에 안되잖아요. 그러나 국가라 하는 것, 애굽나라는 인구가 많아요. 그 나라에 야곱이라는 집안이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 뭘 갖고 왔느냐? 하나님의 언약을 배후에 짊어지고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애굽이라는 70명의 가족단위가 나중에 어떻게 국가로 성장되느냐, 국가로 변신되느냐, 하는 그 요소에 애굽의 요소가 필수적으로 여기에 기여해야 돼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이렇게 보시면 돼요. 우리가 천국가려면, 우리가 이 세상 나라의 도움이 없이는 천국에 못 간다는 그 말입니다. 야곱이 애굽나라에 들어와서 살면서, 우리가 보기에는 야곱 가족이 70명밖에 안되거든요, 그 야곱가족과 다른 수천, 수만의 가족이 어울려서 애굽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어요. 그러면 야곱이라는 가족은 수천, 수만의 가족 중에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진척을 시켜나가는 과정에서 야곱가족과 그 외 모든 가족이 서로 반대편에 포진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현재 야곱이 있는 나라는 달랑 애굽이라는 나라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밖에 없는 나라에서 나중에 나라가 두 개가 생겨서 나옵니다.

그것은 출애굽 이야기고요. 여기 야곱의 가족에서는 나라가 없어요. 그저 나라는 없는데 나라의 씨앗은 야곱가족 속에 함유가 되어 있고 그게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왜 오늘 야곱가족이 애굽에 사는 것이 중요하냐? 오늘날 교회에서, 기독교에서 벌어지는 일이 대단히 근원적으로 잘못된 추이들이 있어요.

그게 뭐냐? 교회들마다 교인들이 원하는 것은 개인구원입니다. 개인구원. 자기가 죽어서 천당하고 천당 가기 전에 기도해서 가정이 행복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 와요. 소위 유명하다는 목사들의 설교를 들을 때 그 듣는 자세가 뭐냐? 내 개인적인 구원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땅에서 내가 무탈하게 살기 위해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소위 유명하다는 목사들의 설교를 듣는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개인구원적인 욕구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안 갖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에요. 개인구원적인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보면, 나는 성경을 천 독을 했니, 만 독을 했니,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소용이 없어요. 지금 야곱과 애굽의 만남에서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개인구원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개인구원이 되려면 하나님을 이용하고 예수님을 이용할 뿐이에요.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가정에 우환이 있다 합시다. 부모가 다 아프고 자기도 몸이 아플 때 주변에서 자꾸 조언을 해요. 네가 기도가 부족했고, 네가 믿음에 합하지 않기에 이런 어려움이, 환란이 찾아온다. 네가 빨리 신앙을 회복하고 제대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가정이 화평해지고 부모의 병도 낫는다. 이런 식으로 자꾸 조언을 하는 거예요.

그런 분이 저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걸 보고 제가 가슴이 되게 아팠던 것이 뭐냐? 개인구원이 필요하다면 여기에 코디가 따라와야 돼요. 서울의대 가려면 코디가 있잖아요. 드라마에 나온 것처럼. 서울의대 가는 것이 국가를 살리기 위함입니까? 아니잖아요. 자기집안, 그리고 자기이름 빛내려고 좋은 대학 가잖아요. 그게 사적인 이야기라 이 말이지요.

사람이 개인구원을 추구하게 되면 그 다음에 어떻게 믿음을 가지느냐 하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든지, 자기가 기대하는 기적이라든지, 놀라운 현상을 자기가 직접 보고 가지고 느낄 때 비로소 나는 구원되었다고 확정짓고 싶은 겁니다. 현재 몸이 아픈데, 또는 집안이 잘 안 풀리는데 하나님을 믿으니까 몸이 건강해지고 집안이 잘 되었을 때 나는, 여기에 ‘나’를 붙이는데, 나는 구원받았다, 그것으로 내 목적은 달성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어려움에 처한 것도 잘 모르겠어요, 그 어려움에 처했다는 사람에게 자꾸 조언하기를, 네가 보기에 힘든 것은, 네가 뭔가 내가 구원받았다, 신앙인이다, 성도다, 하는 어떤 획기적인 증거물을 네가 안 갖고 있기에 그렇다고 주위에서 코디를 하고 조언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듣는 본인은 너무 힘든 거예요. 그래서 잘은 모르지만 저에게까지 전화를 한 거예요. “목사님, 사람들이 이런 조언을 하는데 참 견디기가 힘듭니다.” 하는 식으로 하소연을 늘어놨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했지요. 거지 나사로를 목표로 삼으세요. 아직 거지나사로 정도는 안 되었잖아요. 몸이 아파도 거지 나사로만큼은 안 아프고, 돈이 없더라도 거지 나사로만큼은 아니고, 거지소리 들어도 거지 나사로만큼 아주 망가지지는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거지 나사로가 주님 생각할 때, 하나님 생각할 때 그렇게 자기 자신을 처참하게 느끼겠어요? 느끼겠습니까? 거지나사로가? 주위 사람들이 거지 나사로보고 “믿음에 합해라. 네가 끝가지 거지로 사는 것은 신앙이 잘못된 길에 있기 때문이다.” 자꾸 네가 개인적으로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확보하라는 식으로 자꾸 윽박지르는데 지금 거지나사로는 느긋해요. 게임 끝났어요. 부자하고 배틀해서 이미 이긴 게임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믿는 것은 ‘다 이루었다’를 믿는 거예요. 게임 끝났어요. 몸이 망가지든, 거지가다 되든. 그래서 욥을 보라고 했어요. 욥은 개인구원이 아닙니다. 주님이 누구신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아파야 했고, 자식 열 명을 다 날려야 했고 재산 다 없어져야 했어요. 주님이 누구고, 하나님이 누군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개인구원이 아니라니까요. 내 몸 하나 천당 가면 되지. 그거 아니에요.

개인구원에 욕심을 내면 코디가 붙고 그 코디를 다른 말로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교회란 게 뭐예요? “사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천당 가는 것을 좀 도와주고, 코디역할을 해주시고, 여행사 안내원 해주세요.” 그래서 만든 것이 교회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교회가 아니지요. 마귀의 단체지요. 악마의 단체지요. 악마가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당신은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고.

제가 누누이 이야기했잖아요. 구원은 나의 소원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시작이 주님의 창세전에 예정한 뜻이 그 시작이라고요. 우리는 그 결과물이고. 뭐 그리 복잡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시작할 때 우리가 놓아야 될 것이 뭐냐? 나의 구원을 놔버려야 되는 거예요. 나의 개인적 구원을 놔버려야 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의 구원을 지키겠다. 구원에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포기를 해주는 겁니다.

왜? 저쪽에서 밀려왔으니까, 이미 ‘다 이루었다’가 밀려왔으니까 사적인 나의 욕망은 거기서 여지없이 찢어져야 되지요. 찢어진다는 표현을 할 때는 그냥 하지 말고 여기 메모지에 자기 이름을 쓰세요. 그리고 찢으세요. 이게 제일 실감나요. 자기 이름을 써서 찢으면 돼요. 과감하게 자기의 운명과 미래를 찢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느긋해야 거지 나사로, 스데반집사처럼 되는 거예요.

스데반집사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스데반집사와 같은 위치에 있는 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 다른 위치, 위치가 서로 달라요. 지금 야곱의 가족은 그 수는 70명밖에 안되지만 애굽의 다른 가족과 위치가 달라요. 해야 될 위상이 다르다고요. 교회 30년 다녔다, 그 교회 내가 만들었다, 목돈 내서 큰 교회 했다, 온갖 주장을 하는데 그 바탕에는 뭐냐?

그래서 사적으로 나는 구원받았다는 그 확신을 잡으려고 어떤 기적적인 것, 자꾸 교회가 부흥되었다는 기적, 병 나았다는 기적, 예수 믿고 나서 가정이 화목 되었다는 기적, 집안이 너무 번창했다는 기적, 그런 기적을 쥐려고 하는데 그것은 악마의 늪에 빠진 거예요. 그럴수록 점점 지옥에 가깝습니다.

천국은 자기를 부인하는 자만 갈 수 있지 자기를 부인 못하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교회 가 보세요. 내놓는 이야기가 뭡니까? 주님 이야기, 하나님 이야기, 아니고요. 자기 구원받았다는 그 이야기잖아요. 자기가 혜택 입었다는 그 이야기 하고 있다고요. 앞에 ‘나’가 붙잖아요. 애굽의 다른 가족들과 야곱이라는 가족의 차이가 뭐가 있겠습니까? 뭔가 이질성을 갖고 있어야 돼요.

이질성이 없으면 나중에 야곱이라는 가족이 따로 떨어져나가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집어넣을 때 그 언약에 있는 그 내용이 보통 육적인 가족과는 전혀 이질적인 것, 전혀 다른 원리가 흐르는 특수한 가족으로 만들기 위해서 언약이 야곱 속에 들어온 겁니다.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제가 해도 안 받아들이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이 가족연대성, 유대성이라 하는 것은 가족의 힘으로 끊을 수가 없어요. 이겨낼 수가 없어요.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식당에 직원이 세 명 있습니다. 직원 세 명이 있는데 두 명은 굉장히 부지런히 일을 해요. 그런데 한 사람은 행동이 좀 굼뜨고, 일할 의사나 있는지 모를 정도로 대충하고, 관심도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세 사람이 할 일을 지금 두 사람이 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관심도 없는 한 사람은 그 두 사람을 공격하는 셈이 되어버려요. 직장에서 왜 일에 대해서 서툴면 안 되느냐 하면, 남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직장에서 그렇게 하게 되면 직장에서 “나가! 사표 내!” 하겠지요. 일 못하는 사람을 두고 “나 저 사람 때문에 일 못하겠습니다. 일 제대로 하는 사람 불러주세요.” 그래서 나가라고 하든지 본인이 사표내고 나가면 그만인 거예요.

왜냐하면 회사라 하는 것은 그냥 모였다 흩어지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요. 가족이라는 것은 그렇게 농땡이 부린다고, 마음에 안 든다고, “너 이제 내 자식 아니다. 나가라.” 그렇게 할 수 있는 단체가 아닙니다. 가족은 빼도 박도 못 해요. 교회를 나가든 안 나가든, 절에를 가든, 여호와의 증인을 믿든,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다고 내 자식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요.

안되는데 주께서는 되게 하시는 거예요. 가족과 가족을 끊어놓은 거예요. 요셉과 가족을 끊어놓은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개입해서. 하나님의 꿈이 개입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해서 끊어진 거예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야곱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보편적인 가족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야곱의 언약을 언약대로 살리는 요소가 야곱의 족보 안에 있는데 그 족보는 육적인 야곱의 혈통에서 벗어나서 그 벗어난 인물인 요셉, 야곱의 혈통을 영적인 혈통으로 바꿔주는 핵심부분이 야곱에서 끊어져 나간 요셉에게 구심점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사람으로 오셔서 같은 몸인데 같은 몸이 아니에요.

같은 몸이 아니고 그 몸이 하나님에 의해서 십자가로 가서 그 몸이 단절, 끊어지게 만들어요. 끊어지게 만들어놓고 네 쪽이 아니고 예수님 쪽이 천국 쪽이고 그게 천국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날 사적인 구원, 우리집안의 구원, 나의 구원, 개인적인 구원을 끊어내면 어떤 구원이냐?

그것은 단체구원, 집단구원 되지요. 그런데 그 개인과 집단으로 갈 수 있는 연결은 우리 개인이 시도해서 갈 수가 없어요. 인간이 자기구원을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나만 구원받겠다는 그 자기집착을 무슨 수로 끊습니까?

못 끊습니다. 못 끊는데 여기 하나님의 언약이 야곱에게 주어져서 야곱의 가정이 요셉을 버리게 함으로서 버림받은 쪽에서 그 끊어져 있는 관계를 요셉의 완성된 하나님의 언약이 끌어안는, 자기를 버린 자를 도리어 자기를 감싸 안는 방식으로 요셉이 있는 곳에 야곱이 온 겁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주도권이 결국 육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꿈에, 하나님의 계시에 주도권이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알아야 될 것은 이 야곱이라는 집안이 어떻게 해서 애굽나라에 가서야 비로소 국가가 되느냐? 애굽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면 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안 나오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오늘 본문 가지고도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만 그래서는 너무 거창하게 이야기하니까 단출하게 하기 위해서 뭘 말씀드리느냐? 다니엘 2장의 이야기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6장에서 7장으로 넘어가면 방주가 나오지요. 방주 나올 때 방주는 집안과 집안, 혹은 국가의 싸움이 없어요. 그냥 잣나무 베어서 방주 만들면 돼요. 방주라는 물체를 만들면 되잖아요.

제가 방주 이야기를 왜 하느냐? 오늘 본문이 어디에 끼었느냐 하면, 방주 이야기와 다니엘 2장 사이에 끼어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하나의 집안이 국가가 되어야 하는데 그 언약국가가 굳이 애굽나라라는 국가를 상대해야 되느냐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니엘 2장을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 2장에 보면 누가 꿈을 꿔요.

다니엘 2장에서 이스라엘의 다니엘과 그 세친구가 느부갓네살의 나라 바벨론에 포로 잡혀서 그 나라에 속했지요. 바로왕과 마찬가지로 그 때는 바벨론이 바로왕의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이사를 가는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포로 잡혀 갔지요. 느부갓네살에게 꼼짝도 못해요.

창세기에서는 요셉이 꿈을 꾸고 나중에 바로왕도 꿈을 꾸고 나중에 바로의 신하도 꿈을 꾸지만 처음에는 요셉이 꿈을 꿨어요. 그런데 여기 다니엘서에서는 처음에 꿈을 누가 꾸는가? 느부갓네살이라는 왕이 꿈을 꿉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누부갓네살이 누구냐 하면 바벨론의 대표자인 왕이에요. 왕이 자기가 꿈을 꿔놓고 자기 꿈을 잊어버려요.

내 꿈 찾아내라고 난리도 아닙니다. 부하직원을 닦달 내요. 자기가 꿈을 꿔놓고 다른 사람에게 내 꿈을 이야기하라고 하니까 신하들이 옳은 이야기를 해요. “왕과 나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왕이 꾼 꿈을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만 할 수 있지 사람은 못합니다.”라고 했어요. 거기에 느부갓네살은 화가 난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사적인 것만 생각한다고. 왕과 개인이 결합이 안 된 상태에서 너희들은 나의 녹을 먹었다는 거예요. 자, 여러분! 예수님하고 우리 몸이 딴 몸입니까? 예수님의 꿈이 우리 꿈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안목이 우리안목 아니었던 겁니까? 예수님의 세계가 우리 세계 아니었던 거예요? 주님 따로 우리 따로 입니까? 주님에게 우리 정성과 성의만 표하면 주님 나라에 우리를 넣어주는 거예요?

이것은 개인구원에요. 이것은 따로 노는 거예요. 개인구원을 접고 단체구원에 이미 합류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럼 뭐가 필요하냐? 느부갓네살이 꿈 때문에 신하들 다 죽여 버린다고 설칠 때에 다니엘이 자기 꿈도 아닌데 누부갓네살의 꿈을 자기가 이야기해놓고 그것이 얼마나 위기의 순간인지 몰라요.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뭐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느부갓네살이 놀랍게도, “그래. 그게 내가 잃어버린 그 꿈의 내용이 맞아.”라고 “네가 찾아줬구나.” 했는데 다니엘이 찾아준 것이 아니고요 그게 다니엘의 꿈이 된 거예요.

다니엘이 그 꿈을 이야기해 줄 때 느부갓네살이 감탄을 하는 거예요. 그 꿈은 내가 꾼 꿈이다. 사실은 다니엘의 꿈으로 전환시켰어요. 왜냐하면 해석을 다니엘이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금 다니엘은 바벨론왕에게 포로로 잡혀왔다고 생각하는데 주도권이 뭘 로 바뀌었느냐 하면 다니엘의 갖고 있는 하나님이 주신 총기와 지혜가 지금 바벨론나라의 주도권을 홀로 쥐고 있는 셈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다니엘 2장에서 꿈이 없었던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알고 해석을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꿈도 없고, 그 나라의 주인공이 아니고, 왕도 아니면서 실질적으로 바벨론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최고권위자가 되어버렸어요. 다니엘과 세친구가.

눈에 보이는 나라는 달랑 하나입니다. 오직 하나의 나라가 있어요. 하나의 나라가 있는데 왕 되신 예수님의 약속의 이 하나밖에 없는 바벨론 같은 현실세계에 들어와 버리면 예수님의 그 약속을 이해를 하고 알게 된 사람이 이미 왕 되신 그리스도와 한통속이 되고 이미 그쪽에 소속된 백성으로서의 현실세계에 살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보면, 야곱의 가족, 일종의 가정이지요. 가족인데 그들에게는 다른 가족에게는 없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요셉의 주신 그 꿈이 실현되었다는 겁니다. 실현되는 그 방식이 뭐냐? 애굽나라에 들어와서 살아라, 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언약이 앞으로 실현되는 과정 속에서 애굽나라 속의 한 가정이 아니고 애굽나라와 단절되어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 나라로서 이스라엘이 야곱언약 속에서 잉태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름을 가지고 이스라엘이라 하지요. 요셉의 아비가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름이 야곱의 이름인 동시에 야곱의 후손들이 만들 나라의 이름을 미리 한 개인 안에 함축이 되어 있는 겁니다.

다니엘 이야기를 더 해보겠습니다. 다니엘 2장 45절에 보면 그 꿈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데 꿈의 내용은 금신상에 대한 이야기고 금신상은 전체가 금인 줄 알았더니 금이 아니고 금에서 은, 은에서 놋, 놋에서 철과 그리고 진흙으로 혼합되어 있는 발바닥을 딛고 있는 우상, 그 금신상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5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어디서 돌이 날아와서 이 우상을 박살냅니다. 박살내게 되면 그 자리에 태산 같은 새로운 영원한 제국이 그 우상이 무너지고 난 거기에 수립이 돼요. 영원한 제국이. 영원한 나라가.

그렇다면 느부갓네살의 꿈속에 다니엘의 해석이 삽입이 된 거예요. 그러면 외부적인 형식으로 볼 때는 느부갓네살의 꿈이지만 그 꿈의 진행과정과 완성단계에서는 다니엘이 알았던 하나님의 지혜, 총기가 내내 그 안에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현재 우리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나라가 없어지고 난 뒤에 천국이 오는 것이 아니고 이미 대한민국에서 보이지 않는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미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총기를 주셔서, 하나님의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을 주셔서 이 나라에 천국의 백성으로서 이질적인 요소를 발휘하라고 살게 하신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면, 종말을 품고 살아야 돼요. 마지막 때를 품고. 노래에 이런 것이 있어요.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된다면서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노래가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 바꾸겠습니다. 종말을 품고 사는 자가 아름답다. 마지막 때를 품고 사는 사람이 그렇게 편한 거예요.

마지막이라는 것을 즐겨야 됩니다. 그리고 무너지는 것에 대해서 아주 반겨야 돼요. 몸이 아프고 모든 것이 망가질 때 그것을 희소식으로 여겨야 됩니다. “주여, 작살날 나라 과연 뜻대로 작살내시는군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다 이루었다,를 이미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이에요. 그런 조짐이 이미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성도가 힘들다는 것은 뭐냐 하면, 본인이 자꾸 개인구원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우리는 내가 개인구원으로 건너갈 수 없는 나라에 건너왔는데 이제는 사적으로 내가 쥘 것이 없어요. 쥘 것이 없다면 내 인생을 살면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버린 패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빵을 안 먹겠다고 버렸는데 빵에 곰팡이가 피었다. 그것은 우리가 그걸 염려할 이유가 없지요. 내가 버린 빵에 곰팡이가 피었다고 그걸 애타하고 안타까워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할 일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지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사람, 주변으로부터. 이게 다르다는 것, 같을 이유가 없어요. 언약을 아는 야곱과 그리고 애굽과 같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 인구가 번창한 야곱의 족보를 자기 손에 쥐려고 하다가 그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결국은 쥔 그쪽이 도리어 완전히 엉망이 되면서 기어이 이스라엘나라를 내놓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결론 맺겠습니다. 이 세상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를 덮고 있는 외투다. 봄 되면 외투를 벗어야 되겠지요.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준 약속은 야곱가정을 애굽에 집어넣고 잠시 떠납니다. 거기서 번창하라고. 김정은을 태웠던 기차가 지금 어디 있게요? 중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태우기 위해서 다시 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처럼 우리를 세상에 집어넣은 우리의 기차는 지금 하늘나라 우편에서, 주님우편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이 세상나라가 있기 때문에, 악마나라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생활을 천국백성답게, 개인구원에서 벗어난, 이제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된 것을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성도임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 개인구원보다 우선됨을 깨닫게 해주옵소서. 요셉이 원해서 인생길 간 것이 아니듯이 저희들이 이 길을 가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인 것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79강-창 47장 1-6절(언약의 거주지)190227-이 근호 목사.hwp (32.0K), Down:9
게시물7,851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8246   안양20190308b야5장1절(봉사)-이 근호목사 공은주 19-04-02 105
8245   안양20190308a야5장1절(봉사)-이 근호목사 공은주 19-04-02 110
8244   강남-요한복음 20장 19절(인격 파괴)190319b-이근호 … 홍민희 19-04-01 104
8243   강남-요한복음 20장 19절(인격 파괴)190319a-이근호 … 홍민희 19-04-01 120
8241   230강-여호수아 15장 16~19절(갈렙의 딸)20190331-이 … 송민선 19-03-31 105
8240   19강-엡 2장 13-14절(담의 철폐)190331-이 근호 목사 오용익 19-03-31 132
8239   주일학교 설교 / 바다의 순종 / 190331 정인순 19-03-31 84
8238   강남 모임 안내(4. 2. 화) 이명직 19-03-31 83
8237   대구 모임 안내 이근호 19-03-30 80
8236   183강-창 48장 1-7절(언약의 아들)190327-이 근호 목… 오용익 19-03-28 105
8235   18강-엡 2장 11-12절(이방인)1903024-이 근호 목사 오용익 19-03-24 135
8234   229강-여호수아 15장 1~5절(유다의 땅)20190324-이 근… 송민선 19-03-24 97
8233   광주강의20190322b 마가복음13장 24-25절(안정성)-이 … 이미아 19-03-24 101
8232   광주강의20190322a 마가복음13장 24-25절(안정성)-이 … 이미아 19-03-24 97
8231   주일학교 설교 / 네 가지 인간형 / 190324 정인순 19-03-24 105
8230   대전강의안내 이종분 19-03-22 69
8229   182강-창 47장 27-31절(환도뼈)190320-이 근호 목사 오용익 19-03-21 109
8228   271강-YouTube강의(예언자와 신탁)20190319-이 근호 … 이미아 19-03-21 95
8227   270강-YouTube강의(역사)20190319-이 근호 목사 이미아 19-03-21 85
8226   광주 강의 안내 김을수 19-03-19 94
맨처음 이전 [1] [2] [3] [4] [5] [67 [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