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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8 20:04:00 조회 : 139         
광주강의20190426b 마가복음13장 24-27절(재림)-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광주강의20190426b 마가복음13장 24-27절(재림)-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나를 위한 천국관, 구원관은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것이 불필요한 요소가 돼버려요. 자기만 달랑 구원받으면 되지, 우리가 떠날 세상에 다시 오실 이유가 뭐가 있느냐, 그래서 재림이 필수적으로 제시되지 못한 구원관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나의 구원에 있기 때문에, 출발하는 게 나의 구원에 있어요.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럼 이것은 인간들이 근본적으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자라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뭘 생각하라고 했습니까? 인간부터 먼저 생각하라고 했죠.

 

인간이 무엇인가? 인간은 뭐부터 한다? 가능성이죠.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은 있음에서 뭘 한다? 있음이죠. 바둑 두는 사람은 알아요. 바둑에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두 집을 나면 삽니다. 바둑 게임에서 두 집 나면 살아요. 왜 그러냐 하면은 한 번 두고 한 번을 두기 때문에. 연달아 안 두기 때문에. 연달아 두게 되면 이거 잡고 이거 잡는, 다 잡아버리는데, 한 번 두고 한 번 두기 때문에 죽지를 않아요. 바둑은 뭐냐 하면 게임입니다. 인간이 만든 게임은 인간의 내부적인 소망이라든지, 인간의 성향, 이런 것을 게임을 통해서 그대로 다 보여주는 겁니다.

 

야구보세요. 포수로부터 퍼스트, 세컨, 서드로 해서 다 돌아오죠. 중간에 아웃되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죽었다고 하죠. 한 점 나는 사람은 이게 사는 게 돼요. 인간의 본성은 그 게임을 통해서 반영이 되는데, 그 게임은 뭐냐 하면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느냐에 관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느냐. 인간이 그게 달라져야 해요. 사느냐가 돼버리면 천국이라는 것도, 구원도, 내가 살아야 되겠다, 뒤에 객차 붙이듯이 갖다 붙이는 거예요. 이게. 내가 살아야 되겠다, 잘살되, 나는 죽어서도 잘살아야 되겠다, 이게 천국이잖아요. 이게 구원관이잖아요.

 

앞에 있는 것은 손도 안댔어요.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았어요. 그럼 내가 살아야 되겠다고 할 때는 나는 인간입니까? 인자입니까? 인간이지 인자가 아니죠. 아담이죠. 예수님이 아니잖아요. 예수님께서 인자가 구름타고 온다고 한 것은, 바로 인간들의 게임화 된 이 세상의 삶, 모든 것을 전부 다 심판하는 겁니다. 인간의 구원관, 천국관, 지옥관, 전부 다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인간이 끄집어내고 고대하는 그 모든 천국과 구원은 다 엉터리라는 겁니다. 기껏해야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아이디어에 불과한 거예요.

 

근데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것을 뭐로 한다고 했습니까? 게임. 모든 것을 게임화 시키는 거예요. 게임화. 대표적인 것이 뭐냐, 정치 아닙니까? 정치하는 게임에 관심 있는 사람들 전부 다 “유튜브 들어오시고 sns에서 글에 좀 좋아요! 눌러주세요.”라고 해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가 정치라는 게임을 하는데 재밌다는 거예요. 무슨 트랙? 패스트 트랙Fast Track(안건의 신속처리를 달리 부르는 말), 빨리하자. 30일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법률안이 상정되도록. 이게 전부 다 인간이 정해놓은 거잖아요. 정할 때 주님한테 물어봤습니까? 인간이 인자한테 물어봤어요? 안 물어봤죠.

 

그럼 정치게임을 왜 합니까? 두 집 내서 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일종의 바둑이고 장기라니까요. 이걸 비트케슈타인이 처음으로 이야기한 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게임이다. 의미 없다. 게임이에요. 누굴 위한 게임이다? 나의 있음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게임에 불과한 거예요. 부모가 자식을 훈계할 때 그것도 게임이에요. 우리 가정을 영광스럽게 하는 게임에 니가 그 규칙을 따라 도! 이런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시편에 나오죠. 이게 전부 다 자기 영광성입니다. 자기 영광성. 인간이 자기 영광성을 취해버리면 누구 영광성이 죽습니까? 주님의 영광이 죽죠. 하나님의 언약과 인자의 영광이 죽죠. 그래서 인간이 하는 짓거리는 하면 할수록, 살면 살수록 계속해서 주님의 영광에 대한 모독과 훼손과 해방 쪽으로 사람들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인간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왜? 자기가 벌인 게임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게임은 뭐냐 하면, 게임이라는 말은 규칙이거든요. 규칙. 왜 규칙을 신봉합니까? 왜, 규칙이 없는 무규칙을 불안해해요? 내가 만든 게임이 잘 돌아가게 되면 거기에 헌신했던 나의 의미가, 그게 살아나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러면 그 게임에서 뭐가 필요가 없습니까? 예수님의 재림, 인자의 재림 같은 것은 필요치 않는 거예요. “기다려라! 내가 와서 데려갈게.” 이러면 그냥 십자가 부활도 빠져야 돼요. 왜? 재림만 있든지, 아니면 십자가 부활이 있으면 재림은 없어야 돼요. 인간들의 구원론에 의하면 그렇게 돼야 돼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불가능성으로 볼 때에 이거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선호하는 겁니다. 재림하시는 인자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본문에 인자가 재림하잖아요. 구름타고 오죠. 천사들하고. 그 인자 안에는 십자가도 들어있고 부활도 들어있고 재림도 들어있죠. 재림이 들어있는 인자하고 재림이 없는 인간하고 비교할 때, 하나님께서는 누굴 인정하고 누굴 부정하겠느냐? 인간을 부정하는 거예요. 이거는, 재림이라고 하는 것은 인자의 수준에서 볼 때에, 인간의 모든 구원관, 인간이 하는 것은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구원관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재림은 뭐냐, 결국 심판용이에요. 심판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심판하기 위해서. 그럼 심판은 이미 십자가로 심판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하는데, 십자가에서 심판할 때 그 심판은 예수님의 죽음이었죠. 그렇죠. 예수님의 죽음은 어디까지 파생되느냐 하면은 이 죽음에 입각해서 전 세상을 심판하는 데까지 확대되어야 하는 겁니다. 먼저 심판받은 자만이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겁니다. 먼저 심판받은 자.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했을 때, 이거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개인적인 부활이 되는 겁니다. 이 개인적인 부활에서 자기 백성에게, 온 세상에 대해서 뭐가 아직까지 있어야 되느냐 하면은 심판이 추가가 되어야 해요.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심판을, 제대로 된 심판을 경험한 분이 심판주가 된다. 제대로 심판을 경험한 이 분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면은 인자라고 합니다. 인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인자. 제대로 심판을 경험한 분이 그 다음에 이 세상을 전면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겁니다.

 

이게 누구 기준이냐 하면은 인자되신 예수님의 기준이에요. 인간들 중에 이 기준에 부합되는 인간들이 있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없지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기 때문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재림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이걸 이해 못하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가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죄용서 해주셔가지고 부활해서 신난다! 이래 돼버리면, 이 사람은 애초부터 심판의 대상이 안 되었다고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변화의 조치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이라는 내 자신이 달라져야 되는데, 중간에 재림까지 거쳐야 완전히 달라지는데, 십자가에 죽고 부활되어가지고 나는 이제 새사람 되었어! 라고, 그 우기는 자아는 뭐냐 이 말이죠. 그게 미흡한 자아고 잘못된 자아라 이 말입니다. 그게. 인자라는 것은 재림이 필요해서 그런 게 아니고, 재림이라는 것은 우리 예수님의 인자됨, 그 자체 안에 아버지로부터 그런 요소가 전부 다, 스케줄이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재림까지.

 

왜 재림하십니까? 인자거든. 끝난 거예요. 니가 왜 재림이 있어야 됩니까? 라고 묻는다는 그 의도자체가 인자의 관점이 아니고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 구원에 필요한 조치만 있으면 충분하지 않느냐, 라는 자기생각에 노출된 거예요. 자기생각에. 쉽게 말해서 재림할 수 있는 재주가 없거든 입 다물라! 이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재림되지도 못할, 재림의 주인공이 되지도 못할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그게 옳다고 허락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의 어떤 행동도 옳은 행동이 없어요. 왜냐하면 재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럼 재림은 뭐냐, 전면적인 심판입니다. 전부 다. 이 전면적인 심판에 대해서 아까 제가 첫째 강의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모든 가능성에 대한 파괴. 인간의 모든 가능성에 대한 파괴. 그럼 그 가능성에 대한 반대말을 아까 뭐라고 했죠? 불가능성. 인자는 불가능성만 이야기해요. 가능성가지고는 해석이, 파악이 안 됩니다. 인간이 가능성의 의도를 가지고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떤 것을 해석해도 엉터리에요. 내가 왜 전면적으로 심판을 받아야 할 자고 죽어 마땅한 자입니까? 라는 것을 아는 식으로 해석이 되어야 해요. 그런 해석이 아니면 재림할 이유도 못 밝혀낼 것이고, 십자가에 죽는 의미도 모르게 됩니다.

 

인간이 자기가 성경해석을 하듯이, 그냥 성경해석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을 해석할 때 인간은 반드시 뭘 동원한다고 했습니까? 자기의 가능성을 동원하죠. 그냥 말씀만 듣고 행해야 된다고 하니까, 행하는 자기 모습을 거기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이 말씀은 내가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게 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게 바로 가능성이잖아요. 이 가능성은 어디서 나옵니까? 인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서 나온 거죠. 그 인간에게서 나온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주님께서는 “니가 재림 한 번 해볼래?” “내가 미쳤습니까? 재림을 왜 하게요?” “그러니까 너는 인간이지 인자가 아니야.” 하나님께서 인정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여기 24절 봅시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기 위해서 누가 빡세게 기도해서 이런 변화를 일으켰습니까? 어느 요술사, 마술사가 이렇게 했습니까? 없죠. 결국은 예수님께서 인자로 오니까, 인간은 가능성이 없으니까 무슨 성이죠? 결국은 불가능성이잖아요. 예수님은 불가능성에서 오는 거예요. 애초부터 불가능성에서. 모든 가능성을 다 부수면서. 니가 기도해서 해가, 별들이 땅에 떨어지게 해봐라, 이 말이죠.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너는 인간도 아닌 거예요.

 

기준이 뭐냐 하면은 인자라는 기준으로 보자는 거예요. 재림할 수 없거든 입 다물라! 라는 뜻이에요. 이 땅을 전부 다 심판하고 파괴할 재주가 없거든 입 다물라! 니가 행한 것은 주께 통하지 않는 행위를 해왔다고 생각하라 이 말입니다. 주께선 허락하지도 안했는데 본인들이 본인을 허락한 거예요. 인간들은 평소에 이 불가능성에 대해서 무슨 마음을 갖고 있느냐 하면은 공포심을 갖고 있어요. 불가능성에 대해서. 불가능성이 공포심이기 때문에 이걸 가능성으로, 스스로 위로하려고 하는 겁니다.

 

“목사님, 구원받으려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성령으로 거듭납니까?”라고 묻는 그 질문의 의중이 뭐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성밖에 없으니 가능성으로 바꾸어주세요.”라는 그런 뜻이잖아요. 그거는 결국은 안 변해겠다는 뜻이에요. 지금 목소리 괜찮잖아요. 그렇죠. 다행이다. 안 변하겠다는 겁니다. 안 변하고 자꾸 죽겠다는 거예요. 십자가 껴안고 내가 주를 위해서 죽겠다는 거예요. 베드로처럼. 여러분, 죽는 게 변하는 게 아니에요. 왜 그런가 하면 내가 죽겠다고 할 때, 그 죽음의 의미를 누가 먼저 설정했어요? 본인이 설정한 죽음이잖아요. 주께서 그런 것을 허락한 적이 없어요.

 

인자의 이 땅에서의 출발점은, 인자가 인자로서 출발하는 증거가 뭐냐 하면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온전한 죽음인데, 이게 성경적으로 언약적 죽음이죠. 언약에 준해서 죽는 죽음이에요. 인자가. 그러면 인자에 합류된 이 사람을 성도라고 하는데, 성령 받은 성도, 성령께서 성도에게 찾아오는 이유는, 어디에 의미를 두느냐 하면은 언약 완료에 준해서 계속 그 사람을 다루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지난 낮 설교에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죠. 성도가 성도끼리 서로 대화를 할 때는 미완료로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고, 완료를 가지고 주고받고 해야 된다고 했죠. 제가 그렇게 분명히 했죠. 완료를 가지고.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런 뜻이에요. 성경에 보면 이웃을 사랑하라 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죠. 이게 불가능한 말씀이거든요.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어떤 식으로 하느냐 하면은, 불가능한 말을 가능한 말로 하기 위해서 뭘 하느냐 하면은, 관용을 베풀어요. 관용을 베풀고 동정을 베풀고 도와주려고 하고, 어려운 것을 봉사하려고 하고. 이런 식으로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을 내 손에서 불가능함을 가능함으로 바꾸려고 시도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관용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은, 너무 가까이는 오지 마세요, 라는 표현이에요. 사랑은 해주되, 내가 거리를 조정해주는 거기까지만 오세요. 더 근접해버리면 내가 거북스럽습니다. 따라서 사랑은 해주되,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티가 나는 그 거리가 있잖아요. 그 거리까지만 오세요. 그래야 내가 벌이는 이웃사랑이 내가 확인될 수 있기 때문에. 결혼을 했는데, 방귀를 안 텄다는 가정이 있거든요. 신혼이죠. 결혼을 했는데 방귀를 아직 안 텄다. 방귀를 아직 안 터서 화장실에 가서 뀌고 있다 이 말이죠. 트림도 안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남편이 아내 앞에서 옷을 못 갈아입는 사람도 있고. 뭐냐 하면 같이 살되, 너무 근접하지 마세요, 라는 것이거든요.

 

근접하면 뭐가 깨져요? 나의 바운더리가 깨지면서, 과거의 나의 기억과 체험에 있던 구축된 자아성에 대혼란이 일어나는 겁니다. 내 자아성에 혼란이 일어나면 자아성이 엉망진창이 되죠. 그러면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적에 내 자아성이 응당히 정돈된 상태에서 사랑이 사랑답게 전달돼야 하는데, 사랑하기 이전에 먼저 저쪽에서 나에게 쳐들어와서 이 구축된, 정돈된 자아상이 훼손돼버리면, 무슨 공식이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은, “나는 주의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했습니다.”라는 건덕지가 발생되지 않는 거예요.

 

내가 말씀대로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내가 확인할 길이 없다 이 말이죠. 너무 가까이 와버리면. 사랑하는 것은 좋은데 내가 허락하지 않은 그 선까지는 넘어서지 마라는 겁니다. 선까지 넘어서지 마라. 이런 경우는 굉장히 많아요. 부부사이에 그런 것이 많습니다. 서로 신혼여행 갔다 와서 서로 사랑한다고 철석같이 이야기를 했죠. 사랑한다는 것에 남자들이 깜빡 여자한테 속아 넘어간 거예요. 사랑한다고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해줄 줄 알았죠. 여자도 속기는 마찬가지고. 이제는 내가 먹고 싶었던 소원, 된장찌개가 먹고 싶은데 당신이 된장찌개를 해주겠지. 왜?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자, 남자나 여자나 사랑한다는 의미가 뭡니까? 나의 모든 것을 그대에게 드리리가 아닙니까?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별들의 고향.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잖아요. 나는 사랑했고 사랑받은 그 사람은 모든 것을 드렸으니까. 이제는 마음 놓고 내가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된장찌개를 끓여달라고 전에는 조심조심 이야기했는데, 이제는 사랑한다고 하니까, 백퍼센트 그 약속을 믿으니까, 내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지가 자발적으로 사랑했으니까, 이제 된장찌개 끓여달라고 해도 되겠지.

 

그래서 신혼여행 갔다 와서 “여보! 된장찌개 끓여줘?” “미쳤나! 니가 손이 없나, 발이 없나, 나 된장 냄새나서 된장찌개 안 좋아한다. 그냥 내가 아침에 토스트 해줄 테니까 토스트나 먹어라. 그거 싫으면 니가 해먹든지.” 그러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나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래 했지.” “사랑하는데 왜 안 해주냐?” “사랑은 하되 내가 구축한 이 자아, 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구축한 경계선에 침범하지 않는 조건하에 사랑한다는 말이다.” “진작 그렇게 이야기하지.” “그러면 너무 말이 길잖아.”

 

사랑은 없습니다. 이게 아가의 주제에요. 어제 누가 뒤늦게 아가수련회 내용을 다 보고 그래요. “아가서 주제가 뭡니까?” 수련회강의를 다 보고 그렇게 물어요. 모르겠다는 거예요. 유행가만 나오고 모르겠다는 거예요. 아가의 주제는 사랑은 없다는 겁니다. 사랑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은 항상 가능성에서 나 좋아라고 하는 사랑으로만 이해하거든요. 나한테 잘해준, 반대급부로 내가 잘되는 것이 사랑이에요. 하나님한테 잘해주면 나는 천당 간다. 이것만 사랑이에요. 재림이라는 심판성이 빠져있는 사랑이에요. 재림이라는. 우리가 인자가 아니고 인간이라는 것. 인간은 애초부터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그걸 놓쳐버린 사랑이에요.

 

그래서 제가 아가에서 분명히 했어요. 사랑은 내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사랑은 다가온다고 했죠. 다가오는 것. 기억 안 나시죠? 사랑은 다가오는 거예요. 그냥 덮치는 거예요. 나의 자아라는 경계, 바운더리가 아예 흔적도 없이 짓밟히는 것을 말합니다. 왜? 안개니까. 안개면서도 안개 아닌 척 하면서 말씀을 지키려고 했던 거예요. 안개, 소멸될 안개인데, 마치 우리는 소멸 안 되어야 할 사람인 것처럼 착각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 자아가 나를 죽여서 부활하는 것은 감사한데, 내 자아만큼은 아예 심판의 대상으로는 안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구원의 가능성을 약간 비출 수 있는, 구원의 어떤 여지가 있는 괜찮은 사람으로 봐줬으면 좋겠다는 것이, 우리가 계속 살아온, 자아가 구축한 심보고, 우리의 버릇이에요. 자아가 만든 이 자아의 버릇이에요.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너는 너를 모른다는 뜻이에요. 그게. 니가 지금 원수를 사랑하겠다고 덥석 덤벼드는데, 그거는 니가 조작해놓은 자아고, 진짜 자아는 너 자신도 모르고 있다는 뜻을 의미하는 겁니다. 원수사랑은 누가 합니까? 누가 해야 할 몫이에요? 인간은 못하고 누가 해요? 인자가 해요. 심판이 바로 사랑이에요. 심판이. 재림이 사랑이었던 거예요.

 

주님은 우리한테 묻습니다. 니가 기도한다고 해가, 별이 떨어지나? 해가 빛을 잃나? 내가 무슨 재주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니가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이 아닌 거예요. 그게. 내 위상, 예수님의, 인자의 기준으로 봤을 때 미흡하면 그거는 전부 다 인간이 아닌 거예요. 그거는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재림이라는 것이, 시간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재림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라고 물으면, 인간은 십자가 부활이라는 이걸 통해서 자기 자신이 근원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요. ‘내가 구원됐으면 나중에 주께서 알아서 재림하시겠지.’ 아니, 나중에 재림하는 것이 아니고, 재림이라는 그것이 어디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까? 인자라는 요소에 포함되어 있죠.

 

그럼 인자라는 요소가 포함된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진즉에 우리는 재림에 의해서, 우리는 진즉에 심판받아 합당한 존재인 것을 미리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자, 이거 한 번 봅시다. 제가 이걸 강의해도, 천식을 이겨가면서 강의해도 지금 감이 잘 안 잡힐 줄 믿습니다. 십자가, 부활, 그 다음에 승천하죠. 승천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재림이라고 했잖아요. 재림인데, 여기서 승천하고 난 뒤에 뭔가 오는 것이 있어요. 인간 쪽으로 오시는 게 있어요.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이 오실 때는,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재림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여기 인자 요소에 포함된 요소가 아닙니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이 인자고, 부활하신 그분이 인자고, 승천하신 그분이 인자고, 재림하시는 그분이 인자죠. 이미 그것을 하나의 박스에 담고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재림의 의미가 뭐냐, 우리는 마땅히 심판받아 합당하다. 우리는 인자가 아니고 뭐기 때문에? 그냥 인간일 뿐이기 때문에. 인간일 뿐이거든요. 인간은 주께서 원하는 않는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재림을 통해서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재림을 생각 안 해버리고, 예수님 십자가, 부활, 승천, 성령이 와버리면, 이 십자가가 나를 위한 십자가, 이 부활이 나를 위한 부활, 나를 위한 승천으로 오해하는 거예요.

 

그 ‘나’가 뭡니까? 바로 내가 그토록 내가 구축한 나잖아요. 이게. 이거 내가 구축한 나 아닙니까? 우리는 나에 대해서 내가 구축하지 누가 구축하겠어요? 나의 기억과 나의 체험이 자연스럽게 지금의 나를 잉태했잖아요. 만들어냈잖아요. 타인이라는 것은 두 종류가 있어요. 내가 타인이라고 하는 타인이 있고, 타인인줄 모르게 그분이 오니까 비로소 그분 입장에서 내가 타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타인이 있어요.

 

평소에 우리는 나라는 바운더리, 경계선, 영역에 있기 때문에, 내 세계에 저 사람이 부합이 되느냐, 부합되지 않느냐를 따질 때 그 타인이 있습니다. 애 둘 데리고 딸내미가 목요일에 와가지고 퍼질러지면 분명히 딸이지만 타인이에요. 왜냐하면 뭘 내가 해줘야 되니까. 내가 뭘 해줘야 돼요. 편히 쉬도록 해줘야 되고, 신경 안 쓰이게 해줘야 돼요. 아무리 가족관계지만. 그러면 뭐냐 하면 좀 가줬으면 좋겠다, 다시 나로 환원됐으면 좋겠다, 시간을 보면서 주일이 빨리 왜 안 지나가나, 사위가 와서 빨리 안 데려가나, 라는 이런 생각이 든다고요. 왜냐하면 나를 잊지 못하니까. 내가 생각했던 ‘나’가 뭔가 방해를 받는다는 느낌이 든다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아까 이야기했던, 잘해주는 거예요. 그걸 관용이라고 하죠. 관용. 잘해줘 가지고 내가 여기까지는 해주는데 이거 선까지는 넘어오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된장찌개는 못 끓여주고 토스트는 해줄 용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라고 한 거예요. 토스트 해주고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라고 한 거예요. 근데 그 새댁이 처음에는 그걸 몰랐죠. 사랑할 때는 다 주고 싶었죠.

 

이게 아주 오묘해요. 내가 남편을 기쁘게 하고 남편이 원하는 것을 다 해줄게, 라고 했는데 막상 남편이 쑥 들어온 거예요. 된장찌개 끓여달라는 거예요. 된장찌개는 냄새나서 자기가 싫어해요. 싫어하는 것으로 쑥 들어온 거예요. 어떻게 합니까?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해줍니까? 아니죠. “나는 청국장 못해주고 토스트 해줄게.”라고 할 때에, 자기가 이런 인간인줄 본인이 그때 새삼스럽게 알게 된 거예요. 새삼스럽게. “나 당신 원대로 다 해줄게. 다이아 반지 사줄까? 뭐 아파트 사줄까? 다 해줄게.” 그러면 상대방이 하는 말이 “그런 것 다 해줄 생각 말고 내가 좋아하는 개고기 먹을 수 있느냐?” “그건 안 되지. 그건 안 돼. 나는 개고기 싫어하니까.”

 

타인이 나에게 그렇게, 내가 생각한 타인이 아닌 돌발적이고 의외의 타인으로 쑥 들어올 줄을, 오늘 제목을 ‘쑤욱’으로 할까요? 쑥 들어올 줄을 상상도 못한 겁니다. 상상도 못한 거죠. “내가 허락한 그 범위 내에서만 내가 남이라고 해줄게. 내가 관용해주고 예의를 갖추어서 당신에게 해줄 수 있으면 해줄게.” 이거하고, 내가 설정한 타인 말고, 나라는 자아를 짓밟고 확 들어왔을 때에 그때 타인은 달라요.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은 어느 쪽입니까? 우리가 설정한 타인이에요? 쑥 들어온 타인이에요? 쑥 들어온 타인이죠. 이게 성령을 통해서 재림이야기를 언급하니까, 왜 재림이 필요하지? 박살내는구나. 완전히 박살나는 것이 합당한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봤던 아름다운 별, 해와 달 어떻게 됩니까? 24절에,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절,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애가 학교에 가서 감기에 걸려온 것이, 이게 호들갑 떨만한 일이죠. 그렇죠. 애는 내 자아의 바운더리, 내 영역에 속하고, 엄마는 그 애가 평소에 건강하면 내가 힘들지 않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애가 아프니까 내가 짜증이 나면서, 손 닦으라고 했는데, 똑바로 내가 시키는 대로 안 해서 그렇다고, 원인과 결과를 따져가면서 이렇게 하잖아요. 근데 애를 나무라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달이 떨어진다? 어떻게 됩니까? 애들한테 잔소리 할 때는 우리라는 바운더리, 우리 가족이라는 바운더리를 계속 유지해나가고 지속시키자는 그런 열정 때문에 걔에게 잔소리 하는 거예요.

 

그렇게 돼야 우리 가정의 훌륭한 자녀가 된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해가 떨어져서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권능들이 흔들리게 돼버리면, 우리끼리, 우리 가족이라는 이것조차도 이것이 인자 앞에서는 용납될 수 없고 허락될 수 없는 짓거리를 해온 거예요. 어떤 짓거리도, 인간으로 하는 모든 짓거리는 인자의 수준으로 봤을 때는 허락될 수 없는 겁니다. 그게 재림이에요.

 

앞으로 재림할 일을 미리 이야기함으로써, 뭘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이야기함으로써 이 예수 십자가 믿고 부활을 믿는 것이 내 좋아라고 주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사건이에요. 오직 누구 좋아라고 하는 겁니까? 제가 수요일에 이야기를 했는데, 이 모든 일이 누구 만족이에요? 주님의 자기만족이라니까요. 주님의 자기존재증명이에요. 전부 다. 우리가 안개니까. 우리는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깐 살았다가 없어지는 안개에요. 뭐, 누나 죽고 형님 죽어도 전부 다 소용없어요. 그냥 원래 처음에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홀연히 소리 소문 없이 죽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살아있을 동안에 서로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상대방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상대를 타인 또는 남이라고 하는 거예요. 남이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나’가 설정되어 있는 거예요. 물론 남에서 점하나 떼면 님이 되죠. 님이 되던 남이 되던 간에 항상 자기 구심점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근데 이 ‘나’가 재림이 가능합니까? 하늘의 별을 떨어트리고 전체 우주를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까? 이 ‘나’가. 내가 그런 권한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없는데, 왜 큰소리치느냐 이 말이죠. 없으면서 내가 그렇게 한다는 것은 자기 주제파악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뭔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너무 건방떨었다는 뜻이에요. 너무 건방지게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연탄불에 오징어 한번 구워본 적이 있죠? 마른 오징어 구워본 적이 있죠? 연탄불에 들어가기 직전에는 오징어가 너무 딱딱해요. 쫙 펴져가지고. 몸통, 다리 열 개해서 늠름하게 있어요. 근데 연탄불에는, 불이죠. 심판의 불 앞에는 오징어가 돌돌 말려가지고 오므라들죠. 오므라들어요. 늠름한 자기의 위신과 품격과 품위는 없어져요. 우리는 주님의 재림 앞에 연탄불에 구워지는 마른오징어처럼 돌돌 말려가지고 하나의 연탄재와 합류가 돼버립니다. 연탄과 우리와 차이가 없어요. 동일합니다. 모든 게, 해와 달과 별의 신세와 우리가 똑같은 신세에요. 영광 다 잃고 빛을 잃어버려요. 우리 고유의 가치와 의미도 없는 겁니다.

 

결국 제 이야기의 모든 것은 출발을 어디서 합니까? 죽음부터 출발하는데, 그 죽음이 어디서 나오는 죽음이냐? 살다 죽는 것이 아니고 무슨 죽음이냐? 언약적 죽음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모든 시작은 언약적 죽음. 언약의 시작은 죽음부터에요. 죽음. 레위기의 제사도 마찬가지고. 십자가의 절정에 이르는 것도 마찬가지고.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우리의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고, 예수님의 죽음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부터 시작해서 그 죽음이 배경이 뭐냐, 재림에 있는 겁니다.

 

죽고 난 뒤에 재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돌아가시고 부활하고 그때의 스크린, 배경, 그 배경이 바로 뭐가 되느냐 하면은 그게 재림이라는 취지에 맞추어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죽으신 거예요. 언약에 의한 재림이기 때문에, 거기에 앞장서서 언약에 의한 죽음, 언약적 죽음은 십자가에 있는 겁니다. 스크린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어벤져스4가 지금 개봉이 된다고 하는데, 65세 이상은 무조건 오천 원이에요. 조조든 뭐든.

 

이 세상 자체가 돌돌 말려야 돼요. 재림하면 모든 게 불로 불쏘시개가 되잖아요. 그 불쏘시개, 라는 그 연극무대에서 벌어지는 거예요. 그 연극무대에서 벌어진 거예요. 재림을 아울러서, 예수님의 모든 이야기는 재림을 아울러서, 전면적인 심판을 아울러서 하는 거예요. 세례요한은 이 점을 몰랐습니다. 세례요한은 뭘 몰랐느냐 하면은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준다고 했거든요. 세례요한이 이야기를 했잖아요.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주는데, 당장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 당장. 자기가 물세례를 하는데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서 주는 거예요. 당장 올 줄 알았죠.

 

성령과 불은, 이거는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염두 해둘 때, 마지막에 불세례가 주어지는 겁니다. 알곡은 하늘나라 창고에 쭉정이는 지옥불로 들어가잖아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데,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하기 전에 세례요한은 뭘 착각했느냐 하면은, 자기가 먼저 앞장서 오고 자기 뒤에 예수님 오시고 그 다음에 성령과 불로서 이렇게 온다고 한 거예요. 성령이 예수님한테 먼저 오신다는 것을 몰랐던 겁니다.

 

예수님에게 심판이 먼저 온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자거든요. 인자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있는 모든 요소들이 거기에 다 함축되어서, 벌써 짊어지고 같이 있는 거예요. 성령이 오셨으니까. 그럼 예수님의 스케줄은 뭐냐 하면은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스케줄을 가게 되죠.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것도 성령을 통해서 재림하시는 거예요.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 모두가.

 

한 번 정리하고 난 뒤에 그 다음 진도 나겠습니다. 자, 인자 이전의 인간은 어떻게 살아간다 했습니까? 가능성을 보고 살아간다고 했고, 가능성은 어떤 합리적인 공식이 있다고 했죠. 원인과 결과를 자꾸 이으려고 했죠. 원인과 결과. 그래야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희망이 있다면 그냥 희망을 쳐다보고 있지 않잖아요. 내가 뭘 하면 저 희망을 얻겠느냐? 에요. 45억이라는 재산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요? 주식 투자하는 수밖에 없겠죠. 그것도 부부가 같이. 얼마나 그거보고 부추겼으면 투자를 그렇게 또 하겠어요? 그렇게 날려놓고.

 

주식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남이 손해 본 것을 지가 끌어 모은 것이 자기의 이득이에요. 왜? 화투판에서 판돈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에요. 잃은 자의 것이 따는 자의 몫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식을 해서 돈을 벌겠다는 것은 내 대신 누가 눈물 좀 많이 흘려다오, 라는 요청이라는 말이죠. 이 말은 자기밖에 모르는 거죠.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원하겠느냐 이 말이죠. 구원 안 해주죠. 어떻게 합니까? 조건이 있죠. 변화되어야 해요. 달라져야 해요.

 

그럼 달라져야 하면 기준이 있어야 되는데, 뭐로 달라져야 합니까? 언약이 없는 인간이 언약이 있는 존재로 달라져야 되겠죠. 그럼 언약이 있는 존재의 기준이 등장했어요? 안 등장했어요? 등장했죠. 누굽니까? 인간이 아니고 인자죠. 다윗언약에 의한 다니엘과 시편, 다윗언약부터 나오는 인자에요. 시편, 에스겔, 다니엘, 전부 다 호칭이 뭐예요? 인자죠. 인자. 시편 8편에 보면 다윗보고 뭐라고 합니까? “인자가” 이래 되어 있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내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예언으로 먼저 담은 거예요. 내가 언약에 의해서.

 

그럼 인자 안에는 어떤 요소가 있는데, 어떤 요소가 있느냐 하면은 십자가 요소 있고, 부활 요소 있고, 그럼 승천 요소도 있고, 성령 부어주심도 있고, 그 다음 마지막에는 뭡니까? 재림하는 요소가 있죠. 이게 전부 다 무엇에 의해서 된다? 전부 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만 되는 거예요. 근데 언약에 의해서 되는데, 이 언약은 싸움의 대상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언약의 후손으로 오시는 분은 누구하고 싸우게 되어 있어요.

 

누구하고 싸웁니까? 뱀의 자손과 싸우게 되어 있잖아요. 그 뱀은 현재 누굴 장악하고 있습니까? 인자를 장악한 게 아니고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데, 뱀은 인자마저 자기 손에 장악하려고 광야에서 유혹을 했거든요. 시험을 했다 이 말이죠. 이 세상사는 자체가 시험입니다. 이게 유혹이에요.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희망을 계속 제공하기 때문에 이게 시험이에요. 왜? 세상은 광야기 때문에. 시험과 유혹을 피할 생각을 하지 마세요. 뭐해야 하느냐 하면 삼켜야 돼요. “죽으면 죽으리라. 그냥 시험 들자.” 이래면 돼요. “시험을 피했기 때문에 복이 올 거다.”라는 이런 계산을 하지 마세요.

 

시험이 왔다는 말은 시험에 걸려들어서 우리는 멸망해도, 나는 마땅하고 당연한 존재라는 것을 수긍을 해야 돼요. 안 그러면요, 이 시험을 피하면 악마가 계속 죽을 때까지 쫓아다닌다니까요. 죽을 때까지. 애가 김치를 먹기 싫어하잖아요. 김치 먹기 싫어도 힘들지만 김치를, 그걸 먹어야 돼요. 삼켜야 돼요. 안 삼키면 엄마가 김치 숟가락 들고 계속 따라온다니까요. 계속 따라와요.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기회를 놓치면 안 돼요. 내가 지금 멸망해도 마땅하다는 그 절호의 기회를 주시잖아요. 우리에게.

 

세상에서 사는 삶 자체가 뭡니까? 희망자체가 전부 다 유혹이라니까요. 잘 할 수 있어. 잘 될 수 있어. 너희 가정 행복할 수 있어. 이 교회 부흥될 수 있어. 너는 목사답게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어. 모든 게 유혹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의 자아는 그 유혹에 길들여진 자아기 때문에, 우리는 유혹이 없이는 살맛도 없어. 사는 재미는요, 유혹가지고 사는 거예요. 어떻게 장담할 수가 있느냐 하면은, 옛날이 좋았던 그 고마움은 세월가면 그 고마움이 다 고맙지 않게 돼요.

 

제가 이런 예를 여러 번 들었는데, 촌에서 초등학교 밖에 안 나와서, 가사는 기울어졌고, 나 아니면 이 집안은 못 산다고 해서 열심히 공부해가지고 9급 공무원이 되었거든요. 옛날에 라디오가 있었어요. 언젠가 하면 1974년도, 제가 군에서 들었으니까. 라디오에 ‘인간승리’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9급 공무원이 되고나서 그렇게 감사했다는 거예요. 그 첫사랑을 계속 유지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만약에 나라에서 “니 60되도 9급으로 계속 전환해라.” 이래도 “예. 고맙습니다.” 이래야 돼요. 왜? 그 고마움이 있다면. 그 감사를 유지한다면. 근데 사람은 계속해서 살다보면 유혹이 오니까, 이제는 공무원 합격한 것도, 광고에서 하는 공무원 합격은 에듀윌이고 뭐고 어떻게 해도 다 짜증이 나요. 사표내고 싶고. 감사가 줄어들고 있어요. 감사가.

 

감사가 줄어드니까, 주께서 조치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있는 것도 빼앗아야죠. 있는 것도 빼앗아야 다시 한 번 정신이 확 돌아오는 거예요. 세상 자체가, 이게 있는 것도 빼앗길 때, 그 빼앗기는 그런 느낌이 들 때, 우리가 피하지 말고 거기에 뛰어들어보세요. “날 삼키세요. 유혹아! 날 삼켜라!” 내가 유혹을 이길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내가 깨달아야 돼요. 내가. 내가 알아야 돼요. 피하지 말고. “오늘도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이러면 마귀가 더 큰 유혹을 가지고 온다고요. “그럼 이거 한 번 또 시험쳐봐라.” 해가지고, 모의고사 더 어려운 것 가지고 들고 나온다니까요. 그러면 게임이 돼버립니다. 두 집 내고 살라고 하는 거예요. 바둑에서.

 

그런 속임수로 지금껏 우리가 살아왔어요. 내가 속임수를 요청했어요. 유발한 거예요. 유발자. 내가 시험유발자였어요. 내가. 세상은 어차피 재림에 의해서 작살나잖아요. 그러면 저 해와 달과 별은 또 유혹이에요. 전부 다. “나는 달에게 절하지 않는다.”라고 하지 말고, “달아! 니가 그렇게 청명하고 내 마음을 빼앗는구나! 그러니까 나는 지옥가도 마땅하지.” 이렇게. 이미 완료된 언약과 언약의 원인이 되어서 우리가 언약의 결과물로 매치시키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잉~~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과 우리 자신을 연류 시키면 돼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증인이 아닙니까? 재림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주님이 어디에 재림하는가? 그거 찾고 있어요. 주님이 어디에 재림하십니까? 어디에? 성경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21장에 나옵니다. 이 지구상에. 쉽게 말해서 우리가 외면할 곳이 없는. 요한계시록 6장을 봅시다.

 

요한계시록 6장 12절에 보면,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13절,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14절,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며. 15절,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16절,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가리우라고 하는 것을 보니까, 결국 숨을 곳이 있다? 없다? 없죠. 성령을 통해서 이걸 우리가 접수하면 되는 거예요. 접수하면. 성령을 통해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하면 된다 이 말이죠. “주여, 이 세상의 혼돈을 어서 들추어주옵소서”라고 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뭐 어렵습니까? 유혹 피하지 말고 삼키고, 내가 멸망 받아 마땅함을 알면 되잖아요. 그게 언약활동이니까. 그게 십자가의 취지의 결과니까요. 죽어 마땅한 죄인이니까. 그걸 왜 굳이 피해서 의인되려고 그렇게 피할 길을 찾는 거예요? 그거 잘못된 겁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이 오실 위치가 뭐냐? 바로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 이 세상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어요. 재림까지 미리 성령을 통해서 알아버리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붙들만한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이제는 그만 놔두세요. 놔두시고,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떤 요구를 할 때, 관용하는 것으로 해서 자기 의를 챙기려고 하지 마시고. 쑤욱 들어올 때, 아, 주께서 쑤시는구나! 또 연탄불속에 오징어처럼 내가 기존에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이 자아의 건전함과 우수함을 또 작살내려고 오시는구나! 이게 성령께서 예수님의 재림을 미리 맛보게 하시는구나! 그런 각오로 수용하시면 되는 겁니다.

 

이왕 안개 되는 것, 몇 년 남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편하게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시는 일, 인자가 하시는 일, 누가 말리겠습니까? 우리가 자아 때문에 억지로, 억지로 버틴다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만 손해고 우리만 불행하고 우리만 힘들뿐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지금 주께서 재림하셔도 반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광주강의20190426b 마가복음13장 24-27절(재림)-이 근호 목사.hwp (55.5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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