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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0 15:46:10 조회 : 126         
20190607b 울산강의-레위기23장 : 시간의 의미 이름 : 한윤범(IP:125.129.150.22)
20190607b 울산강의-레위기23장 : 시간의 의미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구약을 모형과 그림자라 했단 말이죠. 그럼 실체는 어디 있느냐? 하늘에 있다 했습니다. 하늘의 실체는 보이지 않아요. 보이는 형식으로 나타난 게 그림자고 모형이었습니다. 그림자와 모형이라 해서 허깨비를 잡는 게 아니고 나름대로 분명히 거기도 실체가 있지요. 실체가 인간의 신체에요. 이스라엘 사람들, 아브라함 혈통에 속한 인간의 신체성을 말합니다.

그럼 보이지 않는 신체는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신체성에 있겠지요. 그 두 신체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섞여버린 거예요. 섞여지니까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 신체를 생각하듯이 저 사람,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고 본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훌륭한 사람 믿는 게 아닙니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믿는 게 아니고 그분 앞에서 난 죽었다, 이렇게 돼요. 나 같은 인간은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걸 말합니다. 왜냐하면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벌이 있고 저주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에. 교도소에 같이 있으면 기죽을 필요 없어요. 그러나 심판주 앞에선 태도가 어때야 됩니까? 세리가 주님 앞에 어떠했습니까? 감히 얼굴도 못 들었잖아요. 그러면 세리가 살아가는 인생 전체 감히 얼굴도 못 드는 인생인 거예요.

장로님께서 만약에 국회의원 됐다. 국회의원이니까 국민들 앞에선 어른이죠. 어딜 걸레질하고 있어, 라고 기자들한테 욕하고 그러겠죠. 그런데 어느 날 오후 4시 쯤 주님을 만났다. 그러면 국회의원이고 대통령이고 없어요. “주여, 저를 죽여주옵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그 소리밖에 할 게 없지요. 그 외에 뭘 하겠어요? 심판주인데요.

평소에는 내가 나를 측정하고 판정했잖아요. 남들 앞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나를 계산했단 말이죠. 그런데 주님 앞에선 계산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그냥 죽은 자에요.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날 핍박하느냐?” 그 앞에서 사울은 나귀 타고 있다가 그냥 고꾸라져서 땅에 넘어졌어요.

꼭 서울 안 가본 인간이 큰소리치면서 이야기한다고 주님 만나게 되면 십일조 얼만 냈습니다, 교회 봉사했습니다.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려요. 그런 소리 안 나옵니다. 나올 수가 없어요. 그걸 자유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어떤 이야기나 어떤 평에 대해서 일체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그건 선악이거든요.

적어도 우린 선악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용서로 구원받기 때문에 선악과 구원은 단절입니다. 생명나무 기능이 끊어진 것처럼 단절이기 때문에 저쪽에서 하는 이야기 우리는 알지만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저쪽에선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듣는데 개한테 진주를 던질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그리 살다 지옥이나 가라. 이러고 끝날 문제에요.

국가가 어떠니 트럼프가 어떠니 쓸데없는 소리하고 있네. 트럼프와 천당이 무슨 관계있습니까? 내 인생, 주님이 이끄는 인생인데.

그림자와 모형이 이 땅에서 만남이 이어지는 것을 히브리서에서 언약이라 해요. 그걸 유언이라 하지요. 사람이 죽지 아니하면 유언이 발생되지 않는 것처럼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은 죽음 바탕으로 전제로 하고 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게 돼있어요. 죽음이에요. 우리는 죽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라서 기뻐요. 거룩한 분의 모형이라서 감사해요.

나의 진면목은 진즉에 죽어야 됨, 이게 나의 성적표고 평생 살아야 이 성적표는 변동이 없습니다. 마트에 물건 사고 계산하지요. 사만오천 원이라든지 나오잖아요. 평생 살아봐야 죽음입니다. 끝나버리는 거예요. 아무리 오래 살고 연금 얼마 받고 소용없어요. 어떻게 살고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죽음이에요. 주님 앞에서 살 자가 없습니다.

그러면 죽이시지 왜 살려주십니까?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담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 언약을 활용하기 위해서 활용체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육체를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죽지 마! 너 필요할 때 있어. 니가 필요한 게 아니고 내가 필요해. 그래서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고, 이 소자한테 한 것이 다 나한테 한 것이다.

제가 언제 했습니까? 소자한테 한 것이 주님한테 한 거예요. 주님을 위한 육체로 주께서 그렇게 조정해나가시는 겁니다.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주의 일 되도록 조정해나가시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나 목숨도 지금 주님이 붙들고 있지 우리가 알아서 예수님께 영광 돌리고 그런 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제가 첫째 시간 끝에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신체, 인간의 육체는 두 종류가 있다 했어요. 하나는 천국을 보여주고 한쪽은 지옥을 보여주는 육체로 둘로 나눈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 자체가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그것이 그대로 그리스도에게 완성이 돼요.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천국 가고 예수님을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이죠. 이렇게 돼요. 그러면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완성의 양면이라고 보면 됩니다. 지옥도 주님이 완성하셨고 천국도 완성하셨어요. 천국만 완성하고 지옥은 나 몰라라 한 게 아닙니다. 마귀를 통해서 지옥을 완성시킨 것도 주님이고 천국 완성시킨 것도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두 일을 다 한 겁니다.

이게 여러분들이 결론적으로 아는데 우리가 공부하는 게 구약이거든요. 그럼 구약에서 신약까지 이끌어가는 과정을 우리가 알아야 되거든요. 그 과정을 수학에서 말하는 행렬이라는 겁니다. 수학에서 행렬은 보통 A=( ) 이렇게 이야기해요.

예를 들어서 A=라고 한다면, 위에 것을 ‘행’이라 해요. 밑에 것을 ‘(배)열’이라 해요. 합쳐서 행렬이 돼요. 또 B=이라면, A+B라는 것은 같은 자리에 있는 것끼리 더하기해서 새로운 칸을 메운 걸로 돼있습니다. 수학의 법칙에. 수학이란 인간이 만든 거니까 행렬, 영어로 matrix라 하는데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해나가는 겁니다.

이 수학에 나오는 기법이 방식이 언약을 설명하는데 굉장히 편리하게 돼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처음에 행으로 봅시다. 행과 열 아시죠. 가로는 행이고 세로는 열입니다. 이렇게 보겠습니다. 처음에 창조언약이 있어요. 이게 언약의 끝일 것 같으면 행이 필요 없습니다. 창조언약 다음에 노아언약 있어요. 벌써 두 개 등장했지요. 행이 지어지지요.

노아언약 다음에 아브라함언약이지요. 아브라함언약 다음에 모세언약, 모세언약 다음에 다윗언약. 예수님은 누구의 자손? 다윗의 자손, 끝이에요. 이걸로 끝이거든요. 물론 다윗 다음에 새 언약이 있지만 다윗언약에 포함되니까. 이게 행으로 연결돼있는, 창조-노아-아브라함(이삭-야곱)-모세-다윗, 이게 행이라면, 배열은 뭐냐 하면, 밑으로 마찬가지에요. 창조-노아-아브라함-모세-다윗.

왜 이렇게 되느냐 하면, 창조의 완성이 되게 되면 천국에 이르죠. 맞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완성이란 말은 지킨다는 것도 있지만 안 지켰다, 못 지켰다, 반항했다, 대들다도 있어요. 위반이 있어요. 위반되면 밑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지옥 가겠지요. 왜 행렬을 이렇게 나열하느냐 하면, 창조언약 다음에 노아언약 왔을 때 창조언약의 요소가 노아언약에 옵니다.

수학에서는 행과 열의 숫자가 같은 걸 주대각 행렬이란 어려운 말로 전문용어를 쓰는데 노아 이전에 창조가 있어요. 그 다음에 아브라함에는 노아가 창조가 있겠지요. 그리고 창조언약이 이렇게 들어갑니다. 창조언약이 계속 밑에 배열로 하지 말고 창조, 창조, 계속 창조로 나가겠지요. 언약이 가면 갈수록 창조, 노아, 아브라함 배열이 계속 누적이 되겠지요.

이렇게 설명하는 게 더 어렵다 하는데 복잡하고 어려울진 모르지만 이런 점이 있어요. 예를 들면 모세언약에 의하면 전쟁할 때 반드시 제사를 드리라고 돼 있잖아요. 전쟁할 때 사울 왕은 제사를 드리고자 했습니까, 제사를 안 드리고자 했습니까? 제사를 드리고자 했지요. 사울 왕은 모세 때 있었으면 제사 드렸으니까 율법을 마치 지킨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다윗이 기름부음 때에 제사 드리는 것은 다윗언약 때 모세언약은 다윗언약 밑으로 가는 거예요. 배열은 창조 다음에 노아, 아브라함으로 계속 들어간다 했지요. 사울 왕이 모세언약처럼 제사 드리니까 백성들 보기에 우리 임금님은 진짜 하나님의 율법대로 사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사울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천국을 보여주는 인물이 아니고 무엇을 보여줘요? 율법대로 사는데 결국 지옥을 보여주는 거예요. 행 말고 배열의 마지막 언약은 뭡니까? 새 언약이죠. 새 언약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어디 간다? 지옥 가는 근거가 돼버려요. 십자가 복음은 남 구원하려는 복음이 아니고 구원만 하는 복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십자가 복음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걸 통보하기 위해서 성령이 와서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한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2장 15절에 보면,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돼있지요. 향기는 사도 바울 본인한테나 향기지요. 본인한테는 십자가 복음이 너무 좋아요. 인간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인간의 선악에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주님이 창세전에 자기 택한 백성에게 거저 주시는 어린양의 피, 용서로써 건진다.

이게 사도 바울에겐 좋아요. 그리고 이건 정말 샤넬 #5, 이런 향수가 없다할 정도로 계속 맡고 싶은 거예요. 음미하고 싶고 듣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도 복음을 전했으면 알겠습니다만 다 체험들 해봤지요. 가까운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한테 해봤지요. 씨도 안 먹히지요. 고마해라. 많이 묵었다. 이러지요. 그건 향수가 아니라 방구 냄새보다 더 못하지요. 그걸 악취라 하지요.

고린도후서 2장 15절, 16절은 뭐냐 하면, 그럴 줄 알았다는 거예요.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기쁜 소식이라는 거예요. 지옥 가는 사람이 지옥 가는 티를 내줘야 그게 복음이라는 거예요. 복음을 아는 목사들이 목회를 왜 합니까? 사람들 끌어 모으려고 합니까? 왜 아직도 안 가세요? 왜 아직 교회 나오세요, 이상하네. 뭘 얻으려고 오시는 거예요, 도대체. 난 복음이 좋아요. 그러면 오세요. 만약에 내 입에서 복음 안 나오거든 날 내치세요. 이단이라고. 그러면 좋아요.

그런데 복음 알고 그래도 교회 다녀야 아이들 취직도 해야 되고 가게 새로 오픈했는데 지하상가 샀는데 팔려야 되고 어떻고 이렇게 나온다면 얼마 못 있습니다. 나가야 돼요. 복음만 전한다는 조건 하에 그 사람은 그 모임에 참석하기가 곤란해요. 교회 나와서 득보려고 하는 사람들, 안 됩니다.

그래도 붙들어야지요. 붙들면 목사가 이단 되는 거예요. 왜? 붙들면 나 괜찮은 목회했으니까 주께서 목사로 알아주겠지, 라는 사적인 욕구와 욕망을 위하여 예수님을 활용하고 이용한 사람이에요. 자기의 가치와 자기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자기 일을 도와줘야 된다고 우기는 사람이에요.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죽을 생각이 없는 사람이에요.

주께서 우리를 찾아내는 것은 우리의 약점을 찾아내요. 바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장점으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약점을 쥐고 우릴 구원하는 겁니다. 우리의 약점이 우릴 구원하는 거예요. 우리의 장점이 아니고.

지금 레위기에서 안식일을 지키라 했지요. 자, 그들이 형식적으로나마 지켰겠어요, 안 지켰겠어요? 지켰지요. 우리가 지켰기에 복 받는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들은 아직 언약이 마지막 부분을 몰라요. 중간부분에서 자기가 누군지 본인을 너무 성급하게 단정 지었던 겁니다. 내가 안식일 지켰으니까 구원받겠지,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제가 문제 하나 낼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구원했습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 구원했습니까? 조용~.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누굴 생각했는가? 바로 예수님을 생각한 거예요. 아브라함은 예수님 때가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때가 거꾸로 올라가서 아브라함 때에 자기의 행의 마지막에 예수님이 있었던 거예요.

그 마지막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이란 이름으로 이 땅에 태어나야 했던 것을 아브라함이 알게 된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또는 성신을 통해서 알게 된 거예요. 언약 안에 그 아는 게 있어요. 아브라함이 내 때를 보기 원했고 보고 기뻐했다고 했어요.

그러면 예수님과 아브라함의 때는 어떤 때냐 하면 시간이 흘러갑니까, 시간이 고정된 겁니까? 고정돼버린 거예요. 아브라함과 예수님이 동기동창이 돼버린 겁니다. 그런 예를 마태복음 17장에 두 사람이 등장했지요. 세상사람 같으면 구경도 못할 사람이 등장했어요. 한 사람은 엘리야고 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 예수님 세분이 대화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서 대화한다는 것은 같은 시공간에 있을 때나 대화가 가능해요. 죽은 사람 깨워놓고 대화해요? 아이고, 아버지, 해도 아버진 아무 소리 안 하고. 지금 죽어 있는데 무슨 대화가 돼요.

신약성경 사도의 편지에서 ‘예수 안’이라 하잖아요. 예수 안에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고 그래요. 달리 이야기할까요. 만년이 일초 같고 일초가 만년 같다 이 말이에요. 시간에 대해선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겁니다.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시간이란, 이 세상의 인간은 누구 의미의 시간입니까? 내 의미의 시간이에요. 공간도 마찬가지고. 비가 온다, 안 온다. 오늘 저녁이다. 다른 날 저녁은 신경도 안 쓰다가 딸내미가 저녁 늦게 동창회 있다고 하면 그때는 왜 시간이 밤 10시가 그렇게 위험한 것인지?

딸내미가 밤 10시에 나가 보세요. 그리고 서울에 따로 자취해보세요. 딸이 문 열고 들어가니까 어떤 인간이 붙드는데, 1초만 늦었어도 성폭행 당했다는 동영상 안 봤습니까? 난 열 번도 넘게 봤는데. 엄마가 오늘 밤 근무라면, 갑자기 밤이라는 시간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거예요.

다 누구 중심이에요? 나 살기 위해서잖아요. 내가 만족스럽고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내가 누군데? 그건 모르지요. 그건 나한테 묻지 마라. 무조건 그렇다는 거예요. 차에선 무조건 라디오 틀어야 된다는 거예요. 말이 안 되는 소리에요. 무조건 나만 행복해야 된다는 거예요.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자기가 절대자입니다. 인간은 괴물이에요. 세상은 나를 힘들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이다, 이러고 있다고. 우리가 얼마나 억지스럽게 인생을 살아가는지 몰라요.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억지에 억지를 더하니까 나중에 지 억지가 지가 치어서 우울증 걸리고 자살하겠다, 하고. 우리는 목매 자살할 자격도 못 됩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 언약 속에서 아브람이란 인간은 아브라함한테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아요. 진즉에 소멸될 없어져야 될 것을 안다. 그런데 왜 나는 아브라함이 되어야 하는가? 그건 나 때문이 아니고 내게 뒤집어씌워진 언약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요셉은 형한테 팔렸습니다. 진즉에 죽었습니다. 마치 애굽으로 내려가는 대상들, 장사꾼 없었으면 물 없는 구덩이에서 그냥 죽었지요. 얘들 열두 명인데 하나 죽으면 어때요. 왜냐하면 요셉이 계속 있으면 열한 아들이 힘들어져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필이면 장사꾼들 만나서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으로 팔려가게 했거든요.

그러면 요셉 인생 가운데 누가 계속 주관합니까? 요셉 본인이 아니에요. 본인은 어떻게 되는지 몰라요. 아무리 성실해야 안 알아줍니다. 결국 하나님이 말씀대로 응하게 해서 요셉으로 하여금 국무총리가 되게 하니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는 구원이란 결코 구원받겠다는 내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일방적인 꿈같이 찾아온 주님의 뜻이었고 나는 그 속에 예속되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사로잡혔다는 겁니다. 그게 요셉의 일생이에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걸 계속 해봅시다. 노아언약이 오면 창조언약이 밑에 들어가지요. 들어가면서 배열이 이렇게 돼야 되지요. 아까 주대각행렬 식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언약 때에 방주 만들면 구원됩니까? 안 되지요. 그럼 묻습니다. 아브라함언약 때에 바르게 살면 구원받습니까? 안 되지요.

자, 노아 때는 방주 만들면 홍수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때에 방주 만들면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아브라함 밑에 노아 방주가 깔려있단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 시대 사람들은 창조언약으로 심판받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언약으로 심판받는데 그 심판이 뭐냐? 노아언약의 수준에서 아브라함언약까지 뚫어내지 못하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심판받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렵습니까? 쉽게 가겠습니다. 예수님 이 땅에 있을 때에 유대인들은 무슨 언약에 있었습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십자가 빼놓고 줄줄이 다 있지요.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천지창조는 누가 만들었다? 여호와가 만들었다. 그 다음에 안식일 지킵니까, 안 지킵니까? 지키지요. 지키니까 창조언약 맞지요.

그 다음에 그들은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해요, 안 해요? 아브라함 자손이죠. 아브라함언약에서 할례언약 나오지요. 할례 행했습니까, 안 행했습니까? 할례 행했지요. 잘했어요, 할례. 그 다음에 그들은 십계명 지킵니까, 안 지킵니까? 지키죠. 안식일 다 지키는 거예요. 그들은 다윗의 메시아를 기다립니까, 안 기다립니까? 기다렸지요.

그런데 그들이 누굴 죽였습니까? 메시아를 왜 죽여요? 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이것을 인간 쪽에서 올라오는 방향은 하나님께서 차단시켜서 절대로 올라올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는 주님에 의해서 분류되는 게 아니고 나라는 이유 때문에 나는 무조건 지옥 가선 안 되고 무조건 천국 가야 된다는 것이 철두철미하게 내 육체를 감싸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교회 오는 사람치고 지옥 가고 싶어서 오는 사람 없어요. 그리고 그들은 말합니다. 교회에서 배운 데로 예수를 믿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목적이 뭐죠? 그 의미가 뭡니까? 자기 구원이죠. 이걸 구원론이라 하는데 유병언이나 거듭남의 비밀 박옥수나 그뿐만 아니죠. 한국교회 전부 다지요. 신천지도 그렇고.

그들의 목적은 자기 구원받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거기에 약간 내용이 첨가되면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고 무탈한 가정이 됩니까? 그게 눈치 안 들키게 하면서 뒤에 살짝 붙어요. 구원받으면 덤으로 이걸 주시겠지, 갖다 붙인다고요.

그렇다면 주대각행렬이 왜 있느냐? 이게 저주기 때문에 그래요. 이쪽 행렬은 천국이죠. 그런데 아브라함 할 때 이미 예수님이 그 속에 들어왔지요. 예수님께서 노아 속에 들어왔지요. 예수님께서 아담 속에 들어오고 아벨 속에 들어왔지요. 이 행의 이야기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늘나아의 모형이고 그림자라고 하는 거예요.

이미 하늘나라를 염두에 두고 주께서 어떤 모형과 그림자를 깔아놓고 그것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연결된다고 하는 것이 히브리서를 쓴 그분의 신학이고 믿음이고 복음이에요. 사도 바울의 복음이 그건 거예요.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하셨던 대로 그냥 찾아오는 거예요.

찾아올 때 구원받았다고 좋아하라고 찾아오는 게 아니고 창세전에 아들에게 하신 그 일을 우리를 통해서 발산되도록 찾아오시는 거예요. 에베소서 1장 10절 봅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게 하나님 안에서 통일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에요. 하나님 안에서 통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통일이라면 이미 유대인들이 알고 있잖아요. 그리고 이방인들도 알고 있는 거예요. 이방인의 전설이나 신화 보세요. 노아언약 다 나옵니다. 태초에 전설에 보면, 이건 성경 관계없이 모든 민족 속에 홍수이야기가 다 들어있어요. 사람이 입이 싸서 전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홍수 경험했던 노아 자식들, 후손들이 입이 근질근질해서 가만있겠습니까? 이야기하겠지요.

그래서 생긴 탑이 바벨탑 아닙니까. 다시는 헤어지지 말고 한데 모으자. 두 번 다시 당할 순 없다. 이름을 어디까지 놓는다? 하늘까지 놓으면 그게 엘리베이터 돼서 올라간다는 말 아닙니까. 우리 이름을 하늘까지 내자.

창조언약에 선악 나오지요. 모든 인류는 종교가 있든 없든 어린애든 어른이든 구십이 되던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양심이라는 게 있고, 그 양심이 뭐냐? 나쁜 짓하면 지옥 가고 착한 일하면 천당 간다. 이건 제일 밑바닥에 언약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선악이니까.

그 다음에 노아언약을 줘도 노아는 착하다는 거예요. 무슨 착한 사람이 술 먹고 하체를 드러냅니까. 노아언약은 착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방주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벌써 내가 아니고 방주라는 사물이 첫째 시간에 했지요. 하나님과 땅이 매개되는 사물로써 구원받는 겁니다.

그리고 방주 안에 누가 들어있느냐? 정결한 짐승이 들어있었고 바깥으로 나와서 그 정결한 짐승의 피를 내고 발랐기 때문에 피 먹지 말라는 새로운 조항이 노아언약에 최초로 주어집니다. 피는 네 소유가 아니고 오히려 네가 피의 소유돼야 된다는 피가 너를 먹을 것이다. 그래야 네가 구원받는다. 네가 피를 먹지 말고.

모든 것이 피 중심으로 무지개가 피어오르는 거예요. 피 있는 제사가. 창세기 4장에서 아벨도 마찬가지고요. 다시 말해서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언약 아래 있는 인간들이 언약을 통해서 위에서 찾아오느냐, 그러면 구원이죠. 천국이고. 우리가 그것을 시도하느냐? 그러면 지옥이죠.

오늘 본문 레위기는 어디 있느냐? 아브라함언약 다음에 모세언약이죠. 안식일을 지키라. 그들은 뭐냐? 아브라함언약에다 새로운 계시가 주어졌으니까 아브라함언약, 할례언약도 지켜야 되고 그 다음에 안식일도 지켜야 되고. 그러면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이거는 언약의 완성에 아직 이르지 않았어요.

언약의 완성에 이르지 않았지만 중간에 무엇이 드러난다? 저주스러움과 복스러움이 드러나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안식일 지킬 때 억지로 지킨다든지 감사함이 없으면 안식일 지켜놓고도 벌 받아요. 안식일에 어떤 내용이 추가되는지 여호수아 6장을 봅시다. 여러분 잠도 오고 하니까 6장 14, 15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그 제 이일에도 성을 한 번 돌고 전에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날뿐이었더라” 그날뿐이라. 무슨 날을 강조해요? 안식일을 강조하는 거예요. 그럼 안식일은 인간이 지킨다, 주님이 지킨다? 주님이 지키는 거예요.

인간이 지키는 방법은 노동하지 않고 제사 드리면 지킨다고 했어요. 그건 여리고 성 오기까지 알던 이야기에요. 여리고 성에서 새롭게 일이 추가되면 이것이 안식일이 제사 지내고 노는 날이 아니고 그 자체가 무기가 되는 겁니다. 안식일이 공격무기, 심판무기. 안식일이 무기가 된다는 것은 좀 엉뚱하고 희한한 이야기지만 안식일이라는 시간이 무형체가 유형체가 되면, 마치 총이 되고 칼이 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사실은 안식일이 모여서 총 되고 칼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이 되죠. 예수님이 되죠. 예수님이 너무 초라하고 허름하니까 이건 막 먹자고 나가는 거예요. 주님이 심판주라 해도 듣지도 않아요. 내가 마지막에 모든 민족을 다 모으고 오른편 양, 왼편에 염소로 나눈다 해도 그들은 구라 떨지 말라고 어딜 협박하느냐는 거예요. 뭐 당신이 구름 타고 와 죽는데. 지금 우리 손에 죽잖아. 살아 있어서 구름을 타든지 말든지 하란 말이야. 죽는데 무슨 구름을 타고 와요. 죽으면 끝이지.

여기서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 맞아요. 여리고 성을 신약적 복음적 십자가로 달리 해석해야 되겠지요. 여리고 성은 뭐냐? 우리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함락할 수 없는 세계. 그러면 안식일 지키면 되겠네. 안식일이 여리고 성을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면 결국 안식일 자체가 누가 돼야 돼요? 여리고 성에 있는 사람과 그리고 안식일 안의 어떤 인물이 살아 있어야 되겠지요.

안식일이라는 시공간을 보이지 않는 인물이 휘감고 돌아야 저쪽에 안식일 없는 민족을 쳐서 승리할 수 있는 거예요. 여리고 성은 안식일이 없잖아요. 안식일이 없다는 말은 여리고 성은 토담, 모든 재료와 인간의 노동으로 세운 것 아닙니까. 결국 여리고 전쟁은 인간의 힘이냐, 누구 힘이냐? 주님의 힘인데 여호수아에선 그게 안식일의 힘으로 보는 거예요.

그게 추가된다 했지요. 안식이 일곱 있다 했지 않습니다. 유월절, 무교절 마지막 날, 맥추절, 나팔절, 대속죄일 등등 있잖아요. 그 내용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전개되고 펼쳐진다 이 말입니다. 그 안식일에 담긴 하나하나 내용을 패를 까자 이 말이죠. 까게 되면 여리고 성 무너지는 사건도 나올 거고 그 뒤에 온갖 사건들이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안식일에서 모든 사건이 튀어나온다면 이 말은 예수님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튀어나온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지금 트럼프와 중국이 무역전쟁하지요. 그게 다 어느 몸에서 나온 사건이에요? 주님의 십자가 몸에서 나온 사건이죠. 왜?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모든 것은 어디서 통일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기 때문에.

우연히 그냥 일어난 일은 없어요. 오늘 울산에 비 왔다. 그것도 우연한 것이 아니에요. 시공간, 시간과 공간은 그리스도의 통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언약 밑에 있는 인간들은, 나는 양심은 있는데 나는 나쁜 것은 나쁘다고 알고 좋은 것은 좋은 것으로 아는데 살다보니까 좀 양보했다, 왜? 봐주소, 주님.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봐달라고 나오는 것도 대단한 거죠. 사실은 뭐가 뭔지도 몰라요.

행렬봅시다. 보통 행렬에서는 Aij로 표시해요. i는 행, j는 배열. 만약에 아까 A=에서 위에 행이 셋, 배열이 두 개잖아요. A₃₂ 이렇게 표현한단 말이죠. 그러면 인간의 육체가 있을 때 언약이 우리한테 새겨지는 거예요. 십자가가 새겨진다는 것은 십자가만 새겨진다는 말이 아니고 창조-노아-아브라함 모든 것이 십자가 안에 모여서 새겨지는 겁니다. 예수의 흔적처럼 말이죠. 십자가 안에 모든 것이 다 이뤘다가 새겨져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브라함언약 행하고 또 뭘 행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 육체로 십자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때로는 노아언약 환경, 때로는 아브라함 환경, 때로는 모세 환경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으면 우리 신체는 필히 뭐가 나와야 돼요? 죄가 되어서 나와야 돼요.

왜냐하면 죄가 되어 나와야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죄+피’가 될 때 이게 예수님의 제물성을 대변해주고 있거든요. 죄인을 위해서 피 흘려야지 죄인도 없는 피 흘리면 피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잖아요. 주님이 헛수고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도 모르는 죄를 자꾸 밝혀주는 겁니다. 주님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 자신의 공로가 얼마나 대단하면 오직 주께만 찬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 있습니까? 이거 위험한 발언이다. 아내, 남편만 사랑해준다는 것이 우리의 모범답안이잖아요. 그런 모범답안 말고 나이 60이든 70이든 80이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 챙기기에 나서겠어요? 이상한 생각 말고 예를 들어서 손녀라고 합시다. 손녀 앞에 어른 행세하겠습니까? 할 이유도 없고 할 필요도 없지요. 그저 손녀 보기에 재미있는 할아버지라 하면 그걸로 대만족 아닙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랑이란 같이 있고 싶어 해야 돼요. 같이 있고 싶지도 않은데 사랑이란 말하면 안 돼요. 솔직하게 미워하면서도 미워하는 걸 감추기 위해서 사랑한다, 사랑한다, 남발하는데 자꾸 가방 사주고 뭐 사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미운 감정이 없어지는 것 아니잖아요. 사랑한다는 말은 네가 대단하다는 뜻이 아니고 제발 너를 없앨 방법을 찾아보란 뜻이에요.

지금 모든 고민과 걱정이 내가 의식돼서 그래요. 내 몸을 바칠 대상이 없어서 미치는 거예요. 인간은. 그대만 있다면 나 지금 죽어도 좋아요. 아까 손녀 예를 들었지만 손녀, 너만 잘 큰다면 내 돈 없어져도 좋아. 할아버지, 빵 사주세요. 너 빵 사주면 난 뭘 먹고? 이런 할아버지는 별로 없을 걸요. 사람이 상대가 좋으면 귀찮게 해도 좋아요. 귀찮다고 물러나면 사랑도 아니죠. 귀찮다 하던 저리 가라 하던 그건 그쪽 생각이고 지 좋으면 좋은 감정 유지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릴 알아요. 우리가 왜 힘든지. 우리가 힘든 이유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없어 그래요. 우리 인생을 살면서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자기 단도리, 자기 관리한다고 이건 괴물이 따로 없어, 환자입니다. 그것도 너무 순한 표현이다. 그냥 우린 정신병 환자들이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정신병 환자들. 그저 성령 받아 천당 가야 돼. 이것도 정신병 환자에요. 성령을 받게 되면 나 천당 가야지, 이게 아니고 나 같은 것까지 신경 써주시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주일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어떤 마을에 행실 나쁜 여자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향수를 다 뿌리고 울면서 했지요. 우리 보기에 그 여자가 헌신한다고 하는데 헌신한 게 아니에요. 주님의 헌신이 너무 커서 자기 헌신은 보잘 것 없어 헌신 축에도 못 껴. 주님이 먼저 나 같은 죄인을 건져주신 그 헌신과 희생이 너무 커서 기껏 하는 헌신이 시집 갈 때 쓰려고 모아놓은 향수 다 허비한 고 정도밖에 안 돼요. 그래놓고 울고 있어요. 눈물까지 보태요. 그것도 주님이 주신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기를 잃어버릴 때 내 걱정 안 하고 내 자식 걱정, 사업 걱정, 내 장래 걱정, 노후 걱정, 내 건강 걱정, 나라 걱정, 그런 것 안 합니다. 좌빨이고 우빨이고 간에 그런 걱정 안 해요. 말아먹든지 북한에 다 바치든지 몰라. 그것에 내 기분이 매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U-20 월드컵 4강 들어가든 말든, 류현진이 10승하든 말든 그게 결정적인 문제 아니에요.

적어도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 어떻게 아느냐? 사랑과 견줄만한 것 다 견줘보세요. 상상해보라고. 사랑하면 내 얘가 헝가리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도 괜찮아. 이러면 사랑은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사랑이 있는 거예요. 그게 주님이시잖아요. 안식일의 완성이에요. 모든 시간의 완성. 시간이 이스라엘을 다뤘듯이 그분이 나를 지금도 천국 가는 사람으로 다루고 모양을 만들고 틀을 만들고 내용을 그분이 알아서 다 채우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했어요. 이것은 안식일이 이어지게 되면 바로 희년이 되고 쭉 나가서 다른 언약은 다 깨지더라도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보면 안식일은 영원하리라는 말이 나와요. 그 영원한 날이 예수님에 오면 이걸 안식일이라 하지 않고 안식일 이야기도 하지만 결국 누가복음 4장에서 희년 이야기해요. 50년, 안식일의 절정이죠.

희년은 어떤 상태냐 하면, 옥에 갇힌 자, 죄에 갇힌 자 더 이상 자력으로 뭘 해볼 도리가 없는 자에게 그냥 사면을 선포하는 거예요. 이게 줄곧 안식일이 그리스도와 만나야 될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 지켜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죠. 십자가 피를 흘리는 거예요.

그러면 구약의 안식일은 뭐냐? 이미 우리 신체 속에 들어있는 언약을 겨냥해서 안식일이 왔고 그 언약을 두 조각난다. 하나는 네 신체가 지옥 갈 신체인지 천국 갈 신체인지 미리 하나님께서 이 정보를 인간을 만들 때마다 심어놨어요. 심어놓은 걸 아까 행렬로 A₃₂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A 뒤에 ‘천국’라는 것이 먼저고 이걸 위해서 우리의 신체를 이 땅에 생년월일 정해서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우리가 걸어 다니는 지옥이냐, 걸어 다니는 천국이냐? 그거는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합치도록 이끄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안식의 완성의 신체성으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안식일에 담긴 완성의 의미가 우리의 평소의 삶과 행동과 말씨와 태도와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마구마구 발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을 위하여 우리가 있게 된 것을 고백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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