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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0:53:43 조회 : 157         
28강-엡 3장 14-17절(기도내용)190616-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06.240.236.10)
28강-엡 3장 14-17절(기도내용)1906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3장 14-17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3:14-17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사도가 내뱉은 말 한마디 한 마디, 어휘 하나하나가 사도의 말이 아니고 지금 살아계신 주님의 뜻이고 계시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함축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하신 모든 일이 이 단어 하나하나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냥 잔소리 늘어놓는 것이 아니에요. 이 말씀을 지켰다고 했을 때 우리 인간으로서 이 말씀이 부합되는 삶은 어떤 삶이냐?

그것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모델로 보여준 겁니다. 사도바울은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기도자체에 대해서 사도의 생각은 간단히 이런 겁니다. 성령의 생각과 다르면 안 된다는 거예요.

기도할 때에 성령님의 생각과 다른 내용으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다르지 않은 내용, 성령과 동일한 내용은 지금 사도본인이 이렇게 기도내용을 펼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 기도내용이 15절에 보니까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각 족속에게 이름을 줬다는 것은 본인들이 그동안 가진 이름은 다 소용없다는 겁니다.

본인들이 가진 속성은 다 소용없고 이름을 주셨다는 말, 하나님이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너는 이제부터 이 하나님의 일에 대상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족속의 경계를 허물고 내가 필요한 사람에게 성령을 부여한 것은 네가 전에 알던 식의 삶의 방식은 이제는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 성령과 동일한 생각으로 살게 하겠다.

사도바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기도를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성령의 내용과 합치되는 겁니다. 오늘 설교제목도 ‘기도’인데요. 성령의 내용과 합치된다는 말은, 성령이 어디서부터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하늘에서 자기가 원하는 자에게만 주시는 것이 성령이잖아요.

그러면 성령을 받은 자의 기도와 성령을 안 받은 자의 기도가 달라도 너무 달라야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성령을 안 받은 자의 기도가 뭐냐? 거기에 대해서는 이미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미 언급을 하셨어요. 성경도 예수님의 생각이고 예수님의 생각도 예수님의 생각이니까 일관성 있게 계속 그것이 달라지지 않는 겁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이방인들은 뭐라고 기도하느냐? 7절에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기도의 응답은 어디에 달려 있다? 내가 어떤 내용을 꾸미고 내가 어떤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서 기도의 응답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성령이 하시는 기도는 뭐냐? 네가 어떻게 열심히 기도하고 악바리로 하든지 간에 내가 전혀 고려하지 않겠다. 다만 예수님이 필요한 만큼, 하나님이 필요한 만큼 너희에게 응답을 주는 거예요. 우리가 필요한 것 말고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개무시하는 겁니다. 그게 주의 뜻입니다.

개시리즈 연속되는데. 개 의견을 들을 이유가 없어요. 이걸 고상하게 말씀드릴까요? 기도의 내용이 뭐냐 하면, 주체와 객체를 바꾸는 거예요. 기도하는 사람은 내가 기도의 주인공으로 여겨서 저 분이 우리 하나님으로서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니까 내가 나를 위해서 필요한 대로 달라고 하면 하나님은 너무나 어지신 분이고, 자비가 넘치는 분이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니 내가 필요한 것을 주시겠지, 라고 해서 요구하는 이것은 여전히 자기가 주인공이고 자기가 주체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기도에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의 기도. 우리는 이것을 거치고 있고……, 여기에 머물러서 이걸 답습하고 있으면 안 되겠지요. 그걸 거쳐서 마치 옛날이야기처럼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옛날에는 기도를 이렇게 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달라졌다. 옛날에는 무슨 기도냐 하면,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얻을까를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얻을까? 돈 좀 있는 부모에게 자식이 평소에 전화도 잘 안하는데 전화가 왔다. 이거 수상한 거예요. “아버지 잘 계십니까? 그동안 잘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운을 떼고 “이번에 직장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인감증명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

왜냐하면 아들 본인이 주인공이에요. 아버지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나를 위해서 산다는 말이지요. 출발을 거기서부터 하는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기도 다 그렇지 뭐 그렇지 않은 기도가 어디 있습니까?”하고 의아해 한다면 그것을 넘어서지를 못한 사람의 고백이에요. 그 자리에서 아직 성령 받지 못했다는 티를 다 내고 있는 거예요.

기도의 응답에 대해서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엄마가 마트에서 장을 봐서 냉장고에 다 집어넣어놨어요. 그러면 성도는 할게 뭐냐? 냉장고 열면 돼요. 우리 집에 필요한 것은 냉장고이 이미 다 넣어놨으니까. 기도라 하는 것은 응답받기가 아니라 어떤 응답을 주시려고 준비해 놓았는지 확인하는 것이 기도에요.

내가 원하는 것 말고 주께서 원하는 것이 따로 있을 거예요.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니까요. 그러면 냉장고 열고 ‘주님이 이런 것 준비해 놓으셨구나. 감사합니다.’ 이게 기도응답이라니까요. 제가 어려운 말 해볼까요?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구약이고 신약에서는 이미 응답이 먼저 있고, 기도는 그 응답을 확인하라고 기도케 하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기도 응답은 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체와 객체가 바뀌는 겁니다. 바뀌는 구조에요.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이 그 의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는 너대로 해서는 천국 못 와. 내가 너에게 조치해야 돼.” 그 조치가 뭐냐 하면, “네가 주인공 노릇 하면 안 돼. 그것은 지옥에서나 하라고 해. 천국에서는 네가 주인공 노릇은 하면 안 돼. 그런데 아직도 네가 인생의 주인공이잖아. 내가 성령을 통해서 바꾸는 그 기제, 메커니즘, 작용을 다 줄게” 해서 다 주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본인이 애쓴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고 환경이 주어지게 되면 그 환경에 맞는 새로운 인간으로 재창조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지실 때 환경을 몰고 온 거예요. 천국이라는 환경을 몰고 왔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내가 주인공 노릇하는 기존의 세계에서 주님이 주인공 노릇하는, 주님이 주체가 되고 나는 그 주체를 위해서 봉사하는 객체가 되는 환경이 우리를 덮치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바뀌게 되는 겁니다.

바뀌었다, 안 바뀌었다, 그걸 어떻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가? 객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아요. 왜, 라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왜 내가 몸이 아파야 됩니까? 왜 내 인생을 이렇게 비참한 꼴로 몰아넣습니까? 왜 지옥이 있어야 됩니까? 왜 나는 지옥 꼭 가야 됩니까? 지옥가고 안가고가 문제가 아니고 ‘왜’라는 질문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직도 자기가 주인공인양 하고 설치는 거예요. ‘이것도 주셨군요. 저것도 주셨군요.’가 아니라 왜 나는 남들과 달리 다른 험악한 인생을 살아야 됩니까?

구약에는 기도가 먼저 있고 응답은 나중에 오지요. 그래서 시편에 보면 기도를 숱하게 이야기합니다. 기도하라. 기도하라. 응답한다. 기도하라. 응답한다. 시간적으로 기도하고 응답받고, 기도하고 응답받는 줄로 알고 있어요. 그 사람들은 시편의 주인공이 예수님인 것을 몰라요. 자기가 기도의 주인공인줄 알고 시편처럼 되는 줄로 알아요. 기도하고 응답되면 시간적으로 기도가 우선이고 응답은 나중에 기다려서 기도하는 당사자인 내가 응답이다, 혹은 응답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확인하고 측정하는 겁니다. 통계적으로.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는 순진하기도 한데요. 옛날 사람들은 지구가 가만히 있는데 해도 지구중심으로 돌고, 지구는 가만히 있는데 지구주변 천체가 다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만들어서 관찰해 봤어요. 세상의 별들이 지구중심으로 도는 것을 가지고 일주운동이라고 해요. 움직일 때 돌면 계속 돌던 방향으로 돌아야 되는데 가다가 역행하는 것을 발견했어요.

별이 죽죽 가야 되지 않습니까? 가다가 다시 뒤돌아서 갔다, 그 말이지요. 설명할 길이 없어요. ‘별이 미쳤어. 왜 저래?’ 별뿐만이 아니고 금성과 수성도 마찬가지에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자체가 주체와 객체를 거꾸로 했기에 설명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온갖 미사여구를 다 집어넣어서 ‘기도에 응답해주옵소서.’ 이러고 있는데 우리에게 등장한 것은 퇴행이에요.

하나님이 죽어버렸어요. 십자가에 맥없이, 그것도 아무 힘없이, 저항도 없이, 그 못난 인간에게 하나님이 죽어버렸어요. 그러니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자비하고, 전능하시고, 솜씨 있고, 힘이 있고, 내 적들을 다 물리치는 그런 하나님을 교회에서, 그리고 주변에서, 그리고 내 양심이 그렇게 원하는 신이었는데 ‘저분이 왜 죽었지? 왜 죽지? 에이, 십자가 빼고 이야기하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좋은 분이다.’ 그렇게 가는 거예요.

내 소원과 내 고통을 들어주시는 분이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고 주체자가 되는 겁니다. 논산훈련소에 최근에 다녀온 사람들은 다 알다시피 각개전투라는 훈련이 있어요. 그 전투가 끝나고 난 뒤에 큰 체육관같은 곳에 모여서 부르는 노래가 있어요. 2천 5백명의 훈련병이 모여서 부르는 노래가 ‘실로암’입니다.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내 눈에는 오직 밤이었소.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때는 차가운 새벽이었소.
당신 눈 속에 여명 있음을 나는 느낄 수가 있었소.
오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내게 주심은
나에게 영원한 이 꿈속에서 깨이지 않게 하소서.”

이것은 신자고 불신자고간에, 천주교 불교 관계없어요. 전부 다 떼 창, 제창을 해요. 왼발! 왼발! 해가면서 부르는데 “당신 눈 속에 여명 있음을 나는 느낄 수가 있었소. 오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은 나에게 영원한 이 꿈속에서 깨이지 않게 하소서.” 이 가스펠송을 2천 5백 명이 다 함께 불러요. 다 신자입니까? 다 신자에요?

논산훈련소라 하는 곳이 훈련소 입소전의 환경과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에 그걸 감당할 수가 없어서 억지로 참고 있다가 실로암 노래 속에 자기를 담아서 자기신세타령이죠, 다 분출하고 다 터뜨리는 거예요. 각개전투를 했으니 온 몸은 다 엉망진창이지요. 이 어두운 밤에서 언제 제대하겠습니까, 하고 불렀던 노래가 실로암이에요.

“내가 있는 이 세상 이곳은 밤이고 어두움이지만 주여, 어서 새벽(제대하는 그 날)이 되어서 나로 하여금 여기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오 주여, 감사합니다.” 이런 식으로. 눈물도 흘리고 난리 납니다. 신자 아니에요. 한국교회는, 촌에서 올라와서 하루에 재봉틀 열두 시간 밟아대면서 돈 모아서 집안 동생들 공납금 대던 60년대, 70년대 지나면서 서울의 교회들이 부흥이 되었어요.

위로받고 의지할 곳은 교회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교회가면 무조건 위로, 하면 된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난다, 절망에서 희망, 그렇게 희망할 곳은 교회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것이 그럴싸한, 좀 규모가 큰 무당집이에요. 성경이고 뭐고 몰라요. 무조건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그거 한 가지 컨셉 가지고 교회가 부흥한 거예요.

그 안에 예배부, 봉사부, 선교부, 전도부가 있어서 형식을 갖춰서 뭔가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요. 여러분, 교회가 무당집입니다. 나로 하여금 빨리 새벽을 보게 해달라는 거예요. 자기가 주인공이고 자기가 주체가 되고 말았어요. 흔히 교회에서 하는 말이, 말씀과 기도가 양립되어야지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고요. 그러면 이단이 된다고.

이단소리 하니 기억나는데 제 아내가 금요일에 이상한 문자를 받았어요. 돈이 결제되었다는 문자가 와서 전화를 걸었어요. 그런데 좀 이상해요. 자꾸 딴소리를 하면서 “어느 은행 거래 하십니까?” 그렇게 한 거예요. 결제한 것이 진짜 그런가 싶어서 전화를 해봤는데 가만 보니 이상해요.

무슨 소리를 하느냐 하면, “보이스피싱을 주의해야 됩니다. 금감원에 우리가 신고해 드릴까요? 가까운 경찰서에 대신 신고해 드릴 텐데 항상 조심해야 됩니다.”라고 보이스피싱이 이야기한다니까요. 보이스피싱이! 제 아내가 어떻게 그들이 보이스피싱인 것을 눈치챘느냐 하면, 그 말하는 경찰 행세하는 아저씨가 말이 너무 친절해요.

여러분, 경찰은 절대로 친절하지 않습니다. 이 설교 듣는 경찰이 있으면 좀 곤란한데. 경찰은 하루 일과가 불친절이고 귀찮아해요. 꼭 해야 될 말만 하고 끝이에요. 첫째도 불친절, 둘째도 불친절, 셋째도 불친절이에요, 경찰은. 경찰이 친절하게 되면 할 짓이 없어서 심심하거나 아니면 돈을 원하는 불량경찰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보이스피싱 경찰이 너무 친절해요. 그래서 눈치 챘습니다. 이단들이 하는 주 공격은 이단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은, 성경대로 해야지 성경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성경에서는 말씀과 기도를 균형을 맞춰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란히 양쪽 바퀴가 균형 맞춰서 차가 굴러가듯이.

우리가 그것을 이단인 줄로 알면서도 막상 복음을 안다는 우리도 거기에 대해서 반박이 되지를 않아요. 그들이 얼마나 이단소리 들어가면서 그것을 반박해 왔겠습니까? 그 반박을 도로 퍼붓고 있으니까. 다른 교회 다 썩어도 우리 교회는 안 썩었다는 식으로 하는데요. 그런 이단을 반박하려면 어떤 성경구절, 혹은 기도를 이야기할 때 도대체 뭘 원하는지를 살펴야 돼요.

성경 봤다. 그래서 균형 맞추는 신앙생활 한다. 그래서? 그래서 내게 돌아오는 것이 뭐냐? 내게 돌아오는 것이 뭐냐는 그것이 참된 영생이고 구원이라면 그 자체가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구원을 시도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죄인인 줄 알면 구원을 포기해야 죄인이지요. 포기하기 전까지는 구원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것은 사기입니다.

성령이 임해서,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딱 성령이 오고 나니까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의인이 하나도 없고 죄인이구나. 율법 아래 있게 한 것은 저주 아래 있게 함이었구나. 우리를 지옥보내기 위해서 주께서 십자가 졌구나.’ 그것을 안다면 더 이상 꼼지락거리지 말아야지요. 그런데 나는 어떻게 합니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 돼요.

내가 천국 간다는 그 자기주체가 주인공으로 있기 때문에 어느 교회 가면 바른 성경을 가르치고, 어느 교회에 가면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게 하느냐를 자꾸 찾으니까 보이스피싱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이단을 조심 하세요” 자기가 이단이면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구약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기도응답은 없습니다. 기도응답이라는 것이 없어요.

인간의 기도는 안 받습니다. 이거 틀리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집니다. 늙은 손에 지질 것도 없습니다만. 제가 욥기 1장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욥의 자기 아들에 대한 이야기에요.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욥은 자식들에 대해서 늘 쉬지 않고 기도했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면 제사까지 드리면서 “얘들아, 출세하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면 안 돼.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해.” 이렇게 하면서 욥은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욥을 보면 하루아침에 자식 열 명 다 죽었습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욥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다 죽었어요.

잠시 쉬어갈게요. 자, 기도응답 있습니까? 없지요. 욥이 그렇게 기도했으면 자식들이 안 죽어야 되지요. 우리가 평생 동안 교회 다니면서 아는 정보에 의하면, 구축된 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기도를 했으면 반드시 기도한대로 이뤄져야 돼요. 욥이 기도할 때 두마음을 품었겠어요? 혹시 두 마음 품고 기도해서 기도응답 안되었다면 야고보서 1장대로 맞아요.

하지만 그런 마음이 아니고 오직 너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고 하나의 마음으로 그렇게 했는데 주께서는 그 기도응답을 안했습니다. 따라서 제 말은, 인간의 기도는 응답 없습니다. 여기서 설교 끝내고 싶다, 정말. 인간은 기도응답 없어요. 해도 소용없습니다. 제가 아는 기도는 이게 전부에요.

왜 기도응답이 없는가? 그 이유가 잠언서에 나옵니다. 잠언서 28장 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아, 이게 원인이었네요. 하나님께서 기도를 안 듣는 이유가 있었네요. 그것은, 인간은 율법을 온전히 다 못 지키기 때문에. 안 들어줍니다. 그동안 교회 가서 헛바람 들었어요. 금요철야 한다고 커피 세잔 마시고 몸만 버려가면서 헛바람만 들었어요. 자기망상에 교회라는 무당집에 가서 헛수고한 겁니다.

왜 기도응답을 안 해주느냐 하면, 기도응답이 우리한테 필요 없기 때문에 기도응답을 안 해주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의 말을 듣고 일하지 않는 분입니다. 절대로 인간의 말을 듣고 일을 안 해요. 개들이 뭘 안다고 주님께서 그걸 참고로 해요. 인간이라는 개들이 뭘 안다고.

이것 모르신다면 새로 시작합시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네가 제물을 드리다가도 형제와 뭔가 문제가 있고 화해하지 못했다면 화해하고 난 뒤에 제물을 드리라고 했어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요지부동이에요. 우리가 못 지킨다고 해서 변경시킬 의사가 일체 없습니다. “네가 지키든 못 지키든 관계없어. 나는 나대로 그냥 밀어 붙일 거야.” 누구든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게 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한 거예요. 왜냐하면 말씀에 보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잖아요.

그러나 알아버린다면 그 기도는 소용없는 겁니다. 여자들이 메이크업, 화장을 하는데 왜 화장을 하느냐 하면, 생얼, 민낯,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화장을 해요. 진짜 어렵지 않은, 너무나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여자 분이 화장을 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면 그 기도를 하는 무의식속에 뭐가 깔려 있느냐 하면, 나는 민낯을 남에게 드러내면 안 돼, 라는 그것이 포함이 되어서 기도를 하기 마련이에요.

따라서 “하나님이여, 저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되 내 민낯까지는 드러내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라는 말은 안했지만 그 밑에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다는 말이지요. 그 기도가 응답될 턱이 있나? 응답될 수가 없지요. 아무리 감추고 또 감추어도 자기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는 일은 없게 해 주옵소서, 라는 그 말은 안하지만 그 밑에 이미 깔려 있는데.

깔려 있는 이상 그 기도는 소용없습니다. 응답 안합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왔을 때 인간은 하체가 부끄럽다고 한 거지요. 하체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하체는 주님께서 가죽옷을 입혀놓았는데 그 하체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인간은 얼굴 자체가 부끄러운 존재에요.

그게 출애굽기 33장 20절에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날 때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합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을 만나서 얼굴을 보지 못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보면 죽게 돼요.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성경으로 보게 되면 그래요.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 얼굴을 들지를 못했어요. 반면에 바리새인은 얼굴을 들고 이쪽저쪽을 다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누가 나보다 더 못났나, 다 쳐다보고 있었던 겁니다. 얼굴이란 인간의 수치가 다 집약이 되고 쏠리고 몰리게 되어 있어요. 이 낯짝이 수치스러운 거예요. 자기 얼굴이.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산 위에서 내려올 때 그 얼굴을 땅에 있는 사람이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이 영광스럽게 되었어요. 고린도후서에 보면 나옵니다. 모세가 수건을 덮었다고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설명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의 주제파악을 해라. 네가 누군지 몰라? 너는 모세의 영광의 얼굴도 못 볼 그 정도 지경이야. 그 정도로 엉망진창이고 그 정도밖에 안 돼. 인간의 얼굴도 못 보면서 어딜 감히 천국 가서 주의 얼굴을 대해? 그러니까 너는 아직 안 돼.”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세로 하여금 중보적인 기능을 하게 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기를 멀쩡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똑같은, 아무 문제없는, 나나 너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얼굴 들고 자꾸 싸대잖아요. 정작 주님의 얼굴은 못보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짜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떻게 왔냐 하면, 일그러진 얼굴로 왔어요. 상처 난 얼굴, 일그러진 얼굴. 가시면류관 쓰신 얼굴, 찌그러진 얼굴. 어떤 인간도 그리스도에게 호감을 나타내고 싶어도, 그 얼굴을 보고 싶어도, 그 얼굴을 보는 쪽에서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얼굴로 온 거예요.

주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주님의 얼굴에 있는 그 표정을 이제 성도의 표정으로 갈아붙여버리는 겁니다. 주체와 객체를 바꿔서. 나처럼 너도 세상에서 싫어버린바 되라는 말이지요. 화장만 하지 말고. 화장해 봐야 나이 많으면 화장도 떠요. 화장도 안 받지요. 기도하고 응답받고, 기도하고 응답받다가 별의 일주운동처럼 이게 역행을 해버립니다.

구약에서는 기도를 백날 해도 응답을 안 해요. 하지만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어떤 현상을 주느냐 하면,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이 아니고 응답은 율법을 다 지킨 예수님이 응답을 받아놓고, 냉장고에 다 넣어놓고 그 응답에 맞추어서 자기사람을 재조정하는 식으로 기도케 하는 기도가 있어요. 다시 말해서 기도하는 그 자체가 기도응답의 일부로서 기도케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욥의 기도고 또 시편에도 나오는데요. 시편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편 120편에 보면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기도는 반드시 환난 속에 있어야 돼요. 환난은 나의 박살남, 뭉개짐, 처참함, 더 이상 내게 나에게 건질 것은 남아 있지 않음. 그런 상태거든요.

시편 109편 7절에도 나옵니다. 거기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인간의 기도가 죄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하는 기도가 저주가 되게 하옵소서. 말씀도 못 지키는 주제에 건방지게 하나님이 내편이라고 기도를 해대는 그 기도가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죄가 되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환난이 되게 하옵소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환난 속에서 제대로 기도하게 하시옵소서. 왜? 기도하는 것 자체가 환난이 찾아왔다는 뜻이고 그 환난은 “너를 위한 기도 이제 그만해라. 내가 못 들어주겠다.” 하는 주님은 시그널, 신호입니다. “달라고 하는 기도는 이제 제발 그만! 그런 기도 하지 마. 지금 네 형편이 내가 보기에 충분해.” 아주 적절해요. 아주 좋은 환경이에요.

설교 처음에 한 것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 받지 않은 인간의 기도는 뭐냐 하면, 달라는 거예요.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는 기도인 반면에 성령을 받은 기도는 “주여, 누구십니까? 나를 객체로 전환시킨 주인공 되시는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을 알게 한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내 원대로 뜻대로 안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특별히, 우리 교회만 응답이 반드시 되는 기도를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특별입니다. 어떤 기도냐 하면,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이거 아무한테나 안 가르쳐 주는 것인데. 이 기도 반드시 응답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이 말은 뭐냐? 내 뜻을 다 드러내세요.

내가 주인공이라면 나는 이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는 것을 다 털어내시고 거기에 괄호를 묶으세요. 박스에 넣고 테이프를 붙이든지 해서 “주여, 이거 이 뜻 다 버리게 하옵소서. 주여, 천당 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조차 버리게 하옵소서. 천국 가는 것이 내 뜻이 아님을 내가 알게 하옵소서.

그러면 어떤 응답이 오는가? 그 뜻이 뭔가를 또 찾아야 되고 기다려야 되는가? 아니요. 응답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제가 응답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그 환경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그 환경 속에 소낙비처럼 주님의 은혜가 계속해서 지금까지 내려온 거예요. 소낙비 사이를 빠져나가 본적이 있습니까? 못 빠져 나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못 빠져 나와요. 환난속의 기도응답이 뭐냐 하면, 지금껏, 발걸음부터 머리카락 자라는 것까지 어느 것 하나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음을 소급해서 한꺼번에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이 환경이 나를 위한 환경이 아니었음을. 나를 위한 환경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마귀에게 속아서 나 중심으로 살다보니 자꾸 모든 것이 불만이고 주께서 안도와주는 것처럼 하고, 내 소원대로 안도와주시니 나쁜 하나님, 성질 못돼먹은 하나님처럼 자꾸 인식되는 거예요. 인간자체가 뭔가 모르기 때문에 오는 딜레마에요.

제가 은혜 받은 대중가요 노래 가사가 있습니다. “한잔 또 한잔을 마셔도 취하는 건 마찬가지지.” 아, 이거였구나. 이미 취한 상태에서 한잔 또 한잔을 마셔도 취하는 것은 마찬가지거든요. 이미 은혜를 받은 상태에서 나쁜 짓 한다고 해서 은혜가 취소되는 것도 아니고 착한 짓을 한다고 해서 은혜 더 받고 응답 더 받는 것도 아니에요.

이미 은혜에 취해버렸어요. 은혜에 취해 있다고요. 문제는 우리의 낯짝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치를 긍정하는 마당에서 기도를 요청했거든요. 이 괜찮은 얼굴을 더 괜찮게 해 달라고. 절대로 괜찮은 얼굴이 아니에요. 이것은 하나님 만나면 안 되는 얼굴이에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비로소 우리가 성령이 왔을 때 얼굴과 얼굴을, 성령이 와야 그 때 보이는 겁니다.

모세의 수건이 벗겨져야 보이는 거예요. 내가 주님이 객체가 될 때 보이는 거예요. 주님의 기도응답은 뭐냐? 우리가 십자가에 죽는 겁니다. 그 십자가, 내가 자살하면 안 되고 주님의 십자가, 주님의 죽음에 참여하는 거예요. 주체로서의 나를 죽여 버렸던 그 사건 속에 우리가 주에 의해서 질질 끌려가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가 죄인 아니라고 나름대로 낯짝 들고 돌아다니지만 이번에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가 인간의 모든 수치는 얼굴에 몰려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고유정이라는 분이 계시고 나이는 36세인데요. 자기의 현 결혼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전남편을 죽였어요. 아직까지 수사 중입니다만.

그 전남편의 남동생이 아주 기절을 합니다. 포승줄에 묶여서 끌려가는 그 여자 앞에서 그 여자 사형시키라고 검찰 앞에서 막 소리를 지릅니다. 그 남동생이 원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딱 하나에요. 사과도 아니고 보상금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발 그 여자의 얼굴을 들게 하옵소서. 그렇게 평소에 잘난 체하면서 돌아다닌 그 얼굴을 왜 가리느냐는 말이지요.

인간의 모든 수치는 자기얼굴에 다 쏠려 있습니다. 이 낯짝 가지고 하나님을 못 만나요. 그런데 교회에서 하는 기도가 뭐냐 하면, 낯짝 들고 살게 해달라는 겁니다. 좀 으스대게 해 달라는 거예요. 교회에 와서, 또 어디에 가도 으스대게 해 달라. 나 이만큼 잘나간다는 것을. 기도내용이 자기를 위한 기도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서른여덟 살이 되면 완벽한 존재가 되는 줄로 알았다고. 어떤 여자 분이. 10대나 20대에 그런 생각을 했겠지요. 내가 서른여덟 살이 되면 아마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처신도 제대로 하고, 옳고 그름도 제대로 분별해서 실수가 없는 완벽에 완벽한 삶을 살 것이라고 했는데 본인 나이가 서른여덟 살이 되었습니다.

하는 말이, 자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옆에 있던 58세 된 남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완벽이고 자시고간에 네가 한 짓이 남에게 얼마나 피해를 입혔는지를 서른 여덟살 때는 몰라.” 자기관리 한다고. 자기만 생각하니까 몰라요. 그러나 오십 여덟이 되어보니 내가 내 몸 하나 버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맘속으로 욕보였는지를 내가 느꼈다는 거예요.

육십 여덟 살 먹은 사람이 있다면 오십 여덟 살 먹은 사람의 뒤통수를 쳐버렸을 겁니다. 저는 이렇게 합니다. “너는 아직도 양심이라는 것이 남아 있구나. 오십 여덟 살아. 남에게 이렇게 해코지를 해서 나는 아주 나쁜 놈이라고 하는데 복음 알고 육십 여덟이 되면, 그게 죽은 거야 그게. 그게 바로 죽어 있는 거야. 네가 살아온 것이 아니고 계속 죽음, 죽음, 죽음, 죽은 시체의 모습이야.”

그 소리를 하고 있는 육십 여덟 살 옆에 팔십 여덟이 있다면, 물론 조건은 복음 안다는 조건인데, 뒤통수를 칠거예요. 그게 주의 뜻이다. 이렇게 끝날 거예요. 사람이 자기 자신을 하, 참……, 못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은 뭐냐? 십자가에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 주께서 부지런히 우리 자신을 박살내는 식으로 우리에게 응답을 줍니다.

더 이상 네가 너에게 기대하지 말라고요. 착한 짓 했으니 복 받을 것이다. 나쁜 짓 했으니 벌 받을 것이다. 제발 이제는 그런 사소한, 그런 사소한 생각을 하면 안 되거든요. 왜 아픕니까? 남들은 멀쩡한데 나는 왜 힘듭니까? 여러분 아파도 괜찮고 다 괜찮아요. 주님을 사랑하면 안 됩니까? 오늘 본문 내용이 그거예요. “사랑이 꽂히게 하옵소서. 사랑이라는 잉크물에 하나의 펜대로 꽂히게 하옵소서.”

사랑하면 되잖아요. 그분이 나를 험하게 하든, 이렇게 다루든 저렇게 다루든 주님을 사랑하면 된다 이 말이지요. 그게 바로 성령의 생각이고, 사도의 생각이고, 오늘날 성령 받은 너희들의 생각이라는 거지요. “각 족속의 성령 받은 너희들아. 나하고 생각이 같지? 그지?”라고 오늘 본문은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상당히 함축된 이야기고 어려운 이야기에요.

거저주시는 은혜에 대해서는 네가 늘 확인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당찬 자기위주의 사고방식,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살아가지만 제가 십년 전인가 본 영화가 생각이 나요.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영화가 하도 유명해서 봤어요. 제가 영화를 자꾸 보는 이유가, 현재 이 시대가 무엇에 꽂혀 있고 무슨 사고방식 가지고 대화주제를 삼는지, 어떤 정신상태를 유지하면서 남과의 관계를 가지는지 그걸 알기 위해서 보는데요.

거기에 최 민식이라는 그 배우가 나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최 민식의 역할이 뭐냐 하면, 지역깡패 두목 되려고 애쓰는 허당적인 인물이에요. 그 최 민식이가 이런 큰소리를 칩니다. “야, 내가 임마, 느그 서장이랑 임마, 어저께도 어 같이 밥 묵고! 어, 사우나도 같이 가고! 다했어!” 이게 최 민식이 하는 유명한 대사거든요.

허당이에요 허당. 나 예수 믿고! 철야기도 했고! 삼위일체알고! 이게 교회허당이에요. 교회최민식이에요. 오늘 제목 ‘교회 최 민식’ 나 선교했고! 선교회비 냈고! 나 목사고! 뭐예요, 이게. 나 신학공부 했고! 나 신학박사고! 무슨 의미 있습니까, 그게.

끝으로 결론 맺겠습니다. 계몽과 단죄가 달라요. 계몽이라 하는 것은 내 쪽에서 죄를 알고, 쉽게 말해서 예수의 피 믿고 죄 알고 바르게 살면 내가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그것은 계몽주의 사상입니다.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것처럼 뭔가 무지한 인간들에게 지식을 알려줌으로서 내가 내 가능성을 계발하는 것을 계몽이라고 해요.

그러나 십자가는 계몽이 아니고 단죄입니다. 끝났어요. 이미 죄인은 죄인다워야 돼요. 정말 죄인은 죄인다워야 됩니다. 예배 시작할 때의 대목은 시편 49편 15절의 말씀이거든요.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기 때문에 나는 구원을 얻는다는 그 말이거든요.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하나님이 영접하지 내가 스스로 계몽에 나서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응답 없습니다.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은혜, 그것만 감당하면서 주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허당, 참 말도 안 되는 허당, 더러운 얼굴 낯짝 들고 남 앞에 이름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는 이 허당, 주여, 이것조차 죄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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