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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07:11:26 조회 : 160         
서울의존강의20190614a 베드로전서2장 25절(일상의 무능함)-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61.102.247.43)
서울의존강의20190614a 베드로전서2장 25절(일상의 무능함)-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2장 25절

25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여기 중심성이 하나 등장하는데, 그것은 목자에게 돌아왔으니까 목자가 중심이 되겠죠. 그러면 양이라 하는 것은 각자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양이라면 내 인생이라는 것이 따로 있으면 안 돼요. 그것은 목자에게로 돌아가는 인생뿐입니다, 용납받는 게. 그러면 우리가 누구한테 돌아간다 할 때는 늘 이 관심사가, 그 중심되는 돌아가야 될 목적지에 관심을 두겠죠.

어린아이가 학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할 때에 걔는 옆으로 새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옆으로 새는 길은 집이 아니기 때문에. 최종점은 집으로 가기 때문에 집만 관심사가 될 거에요. 그렇게 되면 그 아이가 집으로 가는 데에 방해되는 게 있잖아요. 방해되는 거.

피노키오라는 동화에 보면 얘가 집으로 가야 되는데...목수가 나무로 만들어가지고 천사가 와서 사람 되게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아이가 빨리 학교 마치면 집으로 가야 되는데 중간에 놀이동산 서커스로 새버리죠. 쿵짝쿵짝쿵짝 음악소리 나니까, 퍼뜩퍼뜩 거리니까 애들이 거기에 빠진 겁니다.

그러면 피노키오가 그 쪽으로 샜다는 말은, 자기 집이라는 중심성을 잃어버린 거예요. 중심성을 잃어버리면 누가 중심성을 대체할까요? 내가 집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만약에 잊어버렸다. 그러면 뭐가 중심이 되냐 하면 바로 그 당사자가, 내가 중심이 되 버립니다. 세상의 중심이 내가. 내가 가고 싶은 데 가면, 내 마음대로다, 왜? 이렇게 된다는 말이죠. 내 마음대로.

그것을 뭐라고 하냐면,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산다. 중심성이 없는 이걸 가지고 ‘일상’이라고 합니다, 일상. 인간이라면 일상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이거든요. 오늘 본문은 바로 ‘일상 속에 있는 인간이 어떻게 목자로 모아지느냐’ 그게 핵심이에요.

일상에서 돌아가는 것, 영어로 루틴(routine)이라고 하는데 되풀이되는 것을 말합니다. 똑같은 하루, 아침에 일어나서 직장 가고 집에 들어오고 저녁 먹고 자고. 집에 들어와서 아이는 자자, 그래가지고 또 자고. 그러면 또 아침에 일어나서 직장 가고. 직장 갔다가 또 오고 가끔 회식하고. 토요일에 직장 불려가서 축구 한다 그래서 축구 붐 일어가지고 또 이강인 때문에 축구 요란스럽게 하다가 발목 삐어가지고 퉁퉁 부어가지고 들어오고. 그게 일상이거든요. 그리고 또 산에 간다고 해서 산에 가고. 낚시 좋아하면 낚시 가고. 그 전체를 뭐라고 했습니까? 그걸 일상이라고 하죠.

일상은 중심이 누가 중심이라고 했습니까? 본인이죠, 본인. 본인이 중심이 되어 있어요, 본인이. 가기는 어딜 가. 지금 내가 주인공이니까 내가 움직이면 그게 진리고 정답이라고 보는 겁니다. 어디 갈 곳도 없어요, 관심도 없어요. 나한테만 관심 있어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목자가 누구입니까? 본인이 목자에요. 그러면 양은? 양은 없어요. 본인 자체가 목자요, 교주고 다 해먹는 거예요.

이러한 일상성에서, 그냥 한 번의 일탈이 아니고 계속해서 평생을 두고 계속 일상성에 매여 있을 때 성경을 아는 사람은 ‘왜 그 일상에서 못 벗어나느냐’ 닦달을 낼 수가 있어요. 복음을 혹시 옆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이래요. ‘너는 주님한테 관심이 없고 그렇게 그냥 네 일상에 매여 사느냐’라고 한다면 그들이 이렇게 답변해요. ‘인간 사는 게 일상에 매여 사는 게 그게 다야. 그 외에는 없어.’ 그럼 너는 교회 안가냐고 물으면, ‘교회 가지.’ 교회 가도 자기가 있는 자기 집, 자기가 중심 되어 있는 그 집으로 빨리 예배 마치고 후딱 와 버려요, 후딱. 그냥 오는 것도 아니고 후딱 와 버린다니까요. 그러면 교회다님은 주님 중심이 아니고 그냥 일상 중에 하나로 보내는 그러한 프로그램이죠, 프로그램.

이걸 일상이라고 제가 했는데, 왜 일상에서 못 벗어나느냐.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요. 너나 할 것 없이 다 그렇게 살아가요. 자기 나름대로의 일상 속에 다 살아가고 그 주인공들은 누구다? 본인이 주인공이다. 이것이 이미 뭐 되었느냐 하면, 일반화되었어요, 일반화. 요새 시대에서 일반화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뭐가 일반화 되었다고요? 일상생활이 일반화 된 거예요, 일상생활이. 지루하면, 심심하면 약간은 새로운 것 하나 맛보다가...그러나 일상의 그 노선은 변함이 없어요. 그다지 벗어나지 않아요, 그다지.

전 남편을 죽였다는 그 여자 분, 지금 이 시간 뭐할까요? 저녁 먹지 뭐. 저녁 먹지요. 고유정이 이런 생각 했을까요? ‘이것은 주를 위해서 내가 사람 죽였다.’ 이런 생각 할까요? 누가 죽였나. ‘내가 죽였습니다.’ 그 다음에 거기서 문제에요. ‘내가 죽였다.’ 그러면 다시 형사가 묻습니다. ‘왜 죽였습니까?’ 나오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렇게 나올까요? ‘전 남편이 있으면 현재의 남편과 사는 데에 약간 걸리적거리기 때문에 제거했습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가 우리 보통 다른 사람들에게 굉장히 이상하게 들립니까? 왜 저 여자는 주를 위해서 사람을 안 죽였지? 뭐 이렇게 됩니까? 아니죠. 그 여자가 독하긴 하지만 그 처신에 대해서 그럴 수 있다고 이해는 되지요.

그러면 그 여자가 나쁜 게 아니고 그 여자가 나쁘다는 그 기준을 ‘좀 참지, 전 남편에게 애 보여주지.’ 그런 식으로 보태어 버리면, 여자가 나쁜 게 사람 죽여서 나쁜 겁니까, 일상의 굴레에서 못 벗어나서 나쁜 거예요?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고 중심이 된 게 나쁜 거예요 아니면 사람 죽인 게 나쁜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고 자기 위해서 사는 그게 나쁜 거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사람 죽인 그 여자는 안 죽인 다른 사람이랑 똑같다 이 말이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오늘 본문에 의하면 너희는 양들이었지만 이제는 목자에게로 돌아오잖아요.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돌아올 곳이 없다니까요. 자기가 주인공이고 자기에게로 돌아가면 끝이에요. 그래놓고 자기는 평생 동안 경찰서 안 갔다는 거예요. 사람 안 죽였다는 거예요.

그럼 이야기를 좀 더 확장시켜 봅시다. 교회에 나옵니다. 교회에 왜 나옵니까, 이제 물어보면 구원받으려고 나온다고 해요, 구원받으려고. 그렇게 되면 구원이 뭐냐. 자기의 일상적인 일이 되어 버려요. 일상 자체를 벗어나는 일이 있어야 되는데 교회를 가나 기도원을 가나 수련회를 가나 뭘 가나 항상 일상을 공고히 하고 일상은 어떤 경우라도 내가 못 벗어난다고 버티는 식으로 잠시 시간 내어서 수련회 가주고 잠시 시간 내가지고 교회 가주고 하는 거예요. 가봤자죠.

교회가도 자기가 주인공이고, 수련회 가도 자기가 주인공이고...전부 다 자기가 주인공이잖아요. 수련회 가서 한바탕 싸우고 또 삐치고...이게 뭡니까. 전부 다 자기가 주인공이잖아요, 자기가. 자기가 자기를 이끄는 목자라니까요. 우리 교회 목사는 따로 있겠지만 자기한테 목사는 본인이 목사예요.

개인적인 구원은 일상에 속합니다. 그래서 정말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성도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나오는 것은, 본인의 구원이 나온다면 그것은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중심성이 나와야 됩니다. 예수님 중심성.

사도 바울 식으로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와야 되죠. 십자가 때문에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은 십자가가 나온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십자가 말 거론했다고 해서 십자가가 나왔다고 쳐주면 안 돼요. 십자가 때문에 내가 구원 받으면 그건 나의 구원 위해서, 내가 역시 내 일상의 중심성이 되어 버립니다.

다시 말씀 드리겠어요. 어떤 성경 구절을 대할 때, 진리를 대할 때 그 진리라는 것은 내 일상성 자체가 문제 있음을 까발리는 내용이 아니면 그것은 성경 해석이 지금 엉터리인 거예요.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 앉았던 이 분은 요새 어느 일상성에 빠지셨습니까?

일상성이 모여서 나를 구성하는 겁니다. 사람은 평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게 뭐냐 하면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해요, 인간은. 심지어 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내가 어느 정도냐, 내가 어느 정도로 괜찮은 존재냐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괜찮은 존재 하려면 무엇은 모으고 무엇은 감춘다? 장점은 키우고 단점은 감춘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갑자기 땅 사고 땅값 오르면 11시 예배인데 10시부터 와가지고 설쳐 대고... 자기 인생에 큰 우환이 있어 가지고 이혼을 했다든지 애가 아프다고 하면 벌써 한두 달째 교회 안 나오고...이게 뭐에요? 장점 거리 있으면 남들에게 나타내고, 나 이정도야 나타내고 단점이 있으면 남들이 나를 낮추어 볼까, 점수 깎아서 볼까 싶어서 빠지는 겁니다. 남의 눈에 안 띄는 거예요. 나중에 괜찮은 것 가지고 만회가 될 때까지는 교회를 안 와요.

사람이 누구한테 자기를 등장시킨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일상에서나 있을 일이지...제가 여러분한테 등장시켰습니까? 아, 나 등장시키고 싶어 환장했어. 뭐 이렇습니까? 아니죠. 등장시킨다는 말 자체가 주님 나라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뭐 니 꼬라지 보고 대단하다고 남한테 등장시키고 말고가 어디 있냐는 말이죠.

돌아가신 이주일이라고, 14일, 이주일이라는 코미디언이라고 있거든요. 아저씨 개그 한 번 해봤습니다, 이주일. 그 사람이 맨날 무대에 서면 뭐라고 하냐 하면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뭔가를. 기껏 보여 주는 게 수지큐 춤추는 것 외에는 별로 볼 것도 없어요. 뭔가를 자꾸 보여 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관객들도 상당히 궁금하거든요. 뭔가를, 웃음거리를 보여주겠다고 궁금해 한단 말이죠. 그 코미디언이나 오늘 날 우리의 삶이나 다를 게 뭐에요?

회사에서 부장이 종용히 부릅니다. 어이 김과장, 이번 달 돼서 뭔가를 보여 줘야지라고 하거든요. 뭐를 보여 주는데? 뭔가를 보여 줘야지, 월급만 축내면 되요? 회사 발전을 위해서 뭔가를 보여 줘야지. 새로운 아이템 없어, 아이템? 뭐 물로 가는 자동차 만든다든지 이런 거. 아이템 없어? 밥 대신 알약 먹는다든지 이런 거 없는가요?

보고 듣고... 우리가 귀가 있고 듣죠. 눈이 있으니까 보죠. 코가 있으니까 냄새 맡죠. 혀가 있으니까 맛을 보죠. 피부가 있으니까 느끼죠. 이 모든 것에 우리를 완전 포위해서 날마다 우리에게 쏘아대는 것은 뭐냐 하면 일상입니다, 일상. 일상을 제가 좀 달리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오늘 제목을 일상으로 할까. 달리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일상이란 이런 경우도 있고 저런 경우도 있다. 이게 일상이에요.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이게 일상입니다. 뭐는 요지부동이지요? 뭐는 달라질 의사가 전혀 없죠? 나. 그냥 나라 하지 말고 나는 이러이러 하니까 남한테 무시당할 필요 없는 잘난 존재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나에게 예우를 다 갖춰라. 이것이 은연중에 계속 누구를 만나든 무의식적으로 쏘아대는 겁니다. 당신은 나에게 예의를 다 갖춰 주세요. 왜? 나는 무시당할 만큼 그런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 주인의 시건방짐은 뭐로 아느냐 하면 그 집에서 키운 개를 보면, 개가 시건방진 짓하면 주인도 시건방졌어요. 개보면 알죠. 인간이 시건방진 것은 누구를 닮아서 그렇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를 닮은 거예요. 악마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악마가 갈 곳은 둘째 죽음, 유황불 밖에 없어요. 악마가 그것을 감추죠. 감추고 지옥에 같이 데려 갈 인간들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나처럼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은 시건방지자. 남한테 밀리면 안 된다.

사람 사는 보람은 어디 있느냐. 내가 대단하다는 것을 매일같이 과시하는 그 속에서 사는 보람을 느낀다는 겁니다. 남한테 내가 우대를 받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내가 신처럼 한 번 행세해 보겠다는 깊은 욕망이 발산된 거예요. 인간의 욕구의 목표는 뭡니까? 신이 되는 겁니다. 신이 되는 거. 신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의미가 어디로부터 나와서 어디로 돌아가냐. 나로부터 의미가 시작 되서 결국은 그 모든 의미가 나의 의미로 종결되고 마감되는 것, 사람들은 그 의미만 아는 겁니다. 그 점을 여러분 잘 이해하시겠지요?

그러면 제가 여기서 간단한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여기 이 사람이 있고요, 여기 이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두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 쪽에서 말을 합니다. 방금 말을 할 때는 의미라고 했지요. 의미가 뭐지요? 말에 의미를 싣고, 어휘나 단어에 의미를 싣고 상대방을 쏘고 다시 되받아서 나에게로 되돌아오죠. 왜? 우리는 악마를 닮았으니까. 내가 신이니까 나한테 의미가 있어야 되죠. 그러면 이 쪽 사람은 또 이야기를 해요. 이쪽도 마찬가지로 다시 되돌아오죠. 그러면 둘 사이에 의견 일치가 됐습니까 안됐습니까? 의견 일치가 될 턱이 있나. 인간은 각자 자기 말하지 의견 일치라는 것이 없습니다. 일방적인 착각에 의해서 그 사람이 내 말을 알았다고 일방적으로 이야기 해버려요.

아까 식사하고 있는데...교회 다니는 모양이에요. 나이 많은 사람이 손자하고 여자 분 한 두 분인가 있고 남자하고 있는데 남자는 목사 같아요. 식사 기도를 하는데 시험 삼아 시간을 재 봤어요. 아...4분을 넘어가는데 나는 기도 참석도 안했는데 내가 지겹기 시작하는데 아이 건강, 손녀 문제... 불고기 하나 얻어먹는다고 불고기 값을 해야 되니까, 빨리 끝나면 목사가 너무 성의없이 참여한다고 다음부터 안 넣어 주는 수가 있어요. 자기들끼리 먹는 수가 있기 때문에 불고기 값을 하느라 이렇게 길게 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그 할아버지...할아버지도 아니죠 나보다 나이 적은, 다 들려, 큰 소리로 이야기 해가지고, 내년에 65세 전철 공짜라 해가지고...아멘을 4번을 해요. 아멘. 텀 재고 또 아멘. 애 건강하게 해 주시고, 아멘. 뭐 이렇게 해가지고 불고기는 볼볼 다 타고 있고...

자, 한 쪽에는 기도했고 한 쪽에는 아멘했습니다. 의사 통했습니까? 너무나 일방적인 생각입니다. 목사는 기도했으니까 빨리 불고기 줘, 이런 의미를 담고 지금 기도하고 있고 주님은 기도 듣지도 않을 것이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기도해서 나 돈값 했으니까, 기도값 했으니까 공짜로 먹어도 되죠? 이런 식으로 나오고 있고...너는 나니까 불고기 먹여 준다 해서...그저 니가 하는 것에서 부스러기나 떨어져 우리 아이, 손자 몸만 건강하면 좋겠다 해서 지 맘대로 아멘했고...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포용할 수 있습니까? 남을 어떻게 포용해요? 안돼죠, 안돼요. 오늘 본문에서 단순히 성도가 각자 목자에게로 돌아오는 그 이야기 뿐만이 아니에요. 양이 목자한테 꽂혀 가지고 돌아오는 과정 속에서 양과 양은 서로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랑하는 것이, 사랑할 때에 상대방을 사랑하면 안돼요. 왜?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자리를 사랑해야 돼요. 그 사람이 속해 있는 자리.

혹시 드라마 같은 데 보시면 돌아다니는 초밥 접시 있죠? 초밥 접시, 비싸기도 되게 비싸요. 계란말이 해놓고 3000원 인가 진짜 50원 하면 될 걸, 50원 너무 했나 100원...계란말이하고 3000원, 빨간 접시는 5000원 해 가지고 돌아다니는데, 그 음식이 어디 담깁니까? 접시 차이에 의해서 필요하면 음식 접시 들고 먹거든요. 나중에 쌓아 놓은 접시 가지고 계산을 하는데...

인간은 일상적으로 관심이 자기한테 있잖아요. 누가 나를 데려간다는 것은 장애인인 경우에나 그렇고, 또 장애자도, 도와주세요. 할 경우에만 그렇지. 내가 지식이 모자랍니까, 기도빨이 모자랍니까, 내가 성경을 못 봐서 그렇습니까. 내가 알아서 천국이든 지옥이든, 내가 선택해서 가겠다는 것이 인간의 고집이고 그것이 분명하게 될 때 내 중심의 일상화가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도 나의 일상에 다 포함되는 거예요. 그런데 누가 나를 접시에 담아가지고 나를 옮긴다면 이것은 나의 무능을 전제로 한 것이잖아요.

그러면 사랑할 때 상대방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아이고 기도 참 잘 하시대요.’ 이럴 게 아니라 상대방을 뭐로 보느냐 하면, ‘주님이 아니면 절대로 목자한테 올 수 없는 장애자이고, 등신이고, 무능한 자라-그런 관점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무능함을 사랑합니다.’ 이건 남이 들으면 기분 되게 나쁠 거예요. ‘당신 자력으로 천국 못 간다는 사실을 저는 사랑합니다.’

그리고 똑같이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퍼부었으니까- 이건 잘못 들으면 저주 퍼붓는 것처럼 느껴지죠? 아이고 등신아. 이렇게 들리죠. 자, 당신이 나한테 저주를 퍼부을 차례입니다. 이 등신아, 주님 은혜 아니면 네 힘으로 못갈 이 등신아. 이렇게 되거든요. 그게 바로 교회 아닙니까? 그게 성도의 만남 아니에요? 교회 와서 기도자랑 하지 말고, 헌금자랑 하지 말고...그게 성도잖아요.

다시 말해서 나는 일상생활 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 적어 볼께요. 첫 번째 중요한 것 나왔습니다. 첫 번째 중요한 것. 나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남들 다 하는 것, 일반화에요, 남들 다 하는 것. 자기중심으로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 이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어린애도 할 수 있어요. 이건 공부 안 해도 할 수 있어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 그런데 나는 어찌된 일인지 나는 내 일상생활 할 수 없고 초밥 접시처럼 접시에 담겨야 내가 원하지 않는 그 최종 목적지를 향하여 나는 지금 움직여가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

그러니까 당신은 아주 잘 생겼습니다, 당신은 멋있습니다, 당신은 힘이 셉니다, 돈이 많습니다. 그런 것 보고 부러워하면서 나를 사랑하지 말라 이 말이에요. 사람이 누가 부자됐다고 칭찬해 주는 것은 아 나도 부자 한 번 되어 봤으면...하고 자기의 숨겨진 탐욕을 노출시키는 순간입니다. ‘아 키 크네’ 이 말은 지 키 작아서 불만이라는 뜻이거든요. ‘언니 너무 이뻐요’ 이 말은 나 지금 못생겼다는 뜻이에요. ‘집사님 기도 너무 좋아요’ 뭐 이런 거요. ‘나는 어떻게 집사님 기도를 본받을 수 있을까.’ 그것도 기도 본받게 되면 그것은 일상입니까 주의 일입니까? 일상이죠. 왜냐면 자기는 주인공이니까. 또 나중에 모른다 하지 마시고 잘 들어보세요.

일상은 내가 주인공이에요, 내가. 왜 자꾸 제가 일상이라고 하냐면 남들 다 그렇게 살아가니까, 남들. 악마의 마음을 품은 모든 인간들이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걸 흔히 일상생활이라고 하잖아요, 일상생활. 루틴, 반복되고 되풀이되는 일상생활. 하루아침 눈떴다 저녁 잘 때까지 주인공이 누굽니까? 나잖아요, 내가 주인공이잖아요, 내가. 오늘 아침 10시엔 뭐하고 11시엔 뭐하고, 그 계획을, 스케쥴을 자기가 짠다 이 말이죠. 자기가 주인공인 그걸 일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일상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죄악된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세상에 나가서 일상 같으면 아주 평범한 삶이 되어 버려요. 그러면 주님께서 매일같이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그런 기적을 주죠. 기적을 줘봐야 무슨 소용 있습니까? 모든 기적들을 평범함으로 다 도배를 해놔 버리는데. 살려줘도 자기가 늘상 살아왔기 때문에, ‘뭐 이상해? 그냥 내가 살고 싶어 살았지, 하나님이 뭘 도와줘?’ 이런단 말이죠. 그러다가 다뉴브강에 한 번 빠져 봐야 아...살아 있다는 게 기적이구나...

한 번 물어봅시다. 사는 것이 기적입니까, 죽는 것이 기적입니까? 사는 것도 기적이고 죽는 것도 기적인데요. 기적이라는 것은 주의 일인데 삶의 의미는 살아 있음에서는 절대로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이 백날 연구해봐야 진리 모릅니다. 왜냐하면 죽음부터 출발해야 진리가 나오는데 그들은 사는 것부터 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는 왜 죽기 위해서 태어났지?’ 라는 질문을 해야 되는데 ‘왜 인간은 살다가 죽지?’ 이렇게 되어 버리니까 사는 것이 주류가 되어 버리고 죽는 것은 안 죽어도 되는데 죽어야 되는 것처럼, 마치 하나의 부록처럼 여기는 거예요. 그런 마음자세로서 아무리 신학을 하고 철학을 하고 공부를 하고 영화감독이 영화를 찍고 백날 해도 그건 소용없는 겁니다. 결국은 일상으로 돌아올 뿐이죠.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그 곳으로 돌아온다 이 말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교회 다니기, 일상입니다. 기도하기, 일상이에요. 왜 일상이냐? 살기 위해서. 누가? 어디 주님 살리려고요? 자기 살기 위해서. 왜 자기가 살려고 하지요? 왜 자기가 살려고 합니까? 나 말고 나를 살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니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도 백날 성경공부하고 믿어봐야 주인공이 누구에요? 자기는 신앙생활 한 게 아니고 일상생활 한 거예요. 이미 누구를 믿고 있어요? 내가 해야 일이 된다는 걸 믿고 있는 이상은 주님 믿어봐야 믿는 게 아니고 내 보조에 지나지 않아요, 나의 보조. 내 하는 일에 보탬 되는 정도로 선을 긋자 이 말이죠.

그런데 제가 뭐라고 했어요? 사는 것보다 뭐가 더 기적이라고 했습니까? 죽는 게 기적이죠. 죽는 게 기적이라면, 죽는 게 더 기적인 이유가 우리는 살고 싶어 하니까. 살고 싶어 한다는 이것은 정상적인데, 살고싶어 해도 소용없이 죽잖아요. 그러니 죽으니까, 이건 내 뜻이 아니니까 내 뜻 아니면 누구 뜻이겠어요? 주의 뜻이죠. 그러니까 죽음이 더 기적인 것이 맞잖아요.

아무리 잘 살아도 못 살아도 죽잖아요. 그러면 모든 의미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냐면 내 죽음부터 시작해야 되요. 그러면 죽음부터 시작하게 된다면, 죽음은 우리가 보통 눈으로 볼 때에는 사라짐이죠. 그럼 성경에서의 죽음은 뭐냐 하면, 바로 심판을 의미하는 겁니다.

정리해 봅시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뭐 받기 위해서? 심판 받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심판을 다른 말로 하면 저주죠.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저주 받기 위해서. 그걸 달리 하면 더욱더 죄인이, 죄가 죄 되게 하기 위해서. 게다가 율법까지 줘가지고. 율법 주게 되면 죄가 더욱더 죄 되게 하지요. 율법을 주게 되면 우리는 어디 아래에 있다 했습니까? 저주 아래에 있지요. 그게 주님의 의미란 말이죠.

왜 주님은 저주하고 죽이고 심판하려고 합니까. 우리가 일상을 통해서 까불어도 너무 까불거든요. 아침에, 24시간 눈만 뜨면 그 때부터 까불기 시작하는데 주님보다 누구 생각 먼저 해요? 평소에 내가 날 살리는 일에 전념하고 몰두하는 거예요. 그러다 누가 나에게 욕이나 한다 치면 열 배나 갚아주죠. 완전히 라멕같애. 아니 열 배가 아니고 칠 배나 갚아줘. 미사일 한 방 쏘는데 일곱 방 날려 버리고. 나에게 존경을 표하라 이 말이죠. 니가 함부로 갖고 놀 존재 아니다 이 말이거든요. 주인공이 자기잖아요.

남이 욕할 때, 그것을 ‘주께서 나에게 욕하게 하셨다’ 그런 생각이 아주 쉽게쉽게 그냥 그때그때 마다 떠오릅니까? 떠올라요? 노래가 안 뜨는 것도 주의 뜻이라고 떠올라요? 그냥 편하게 떠오릅니까? 다시 말해서 내가 사는 게 내 뜻이 아니고 죽여도 되는데 계속 살려주는 주의 뜻이라는 생각이 살아가면서 늘상 떠오릅니까? 일단 떠오른다고 칩시다. 안 떠오르면 그 다음 이야기가 안 되니까.

다시 이야기할께요. 사람을 대할 때는 상대방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내가 나를 보는 기준 가지고 상대방을 봐요, 인간은. 나는 공부 잘 하는데 쟤는 왜 저리 머리가 나쁘지? 이런 거요. 나는 공부 잘 하고 싶은데, 저 사람은 공부 못하니까...내가 얼마나 잘났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타인이 필요한 거예요. 혹시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남이 양발이나 팔목에 타투라고 하지요, 문신 보고 그렇게 부러운 사람이 우리 중에 있습니까? 없지요? 조폭도 아니고. 등짝에, 안 부럽죠? 그런데 타투 하고 싶은 사람한테는 뭐만 보입니까? 혹시 내가 문신한 것 보다 더 이쁘게 나왔나 그것만 찾지요.

그것은 내가 관심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나한테 의미가 되는 타인을 찾아다니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연대라는 거예요. 연대는 일상성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나만 그렇나 우리끼리는 다 그런데.

어떻게 여자가 얼굴에 문신을 하느냐. 나만 그래? 우리 연대, 우리 커뮤니티, 우리 공동체는 다 해. 이것보다 더 심한 사람도 많아. 이건 약과야. 이런 식으로 변명하잖아요. 어떻게 여고생이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냐고 하면, 우리 학교는 다 그래. 이렇게 한다고요. 연대에 속해 버리면 뭐가 뽑히지 않느냐 하면 자신의 문제점과 허점과 죄가 안 뽑혀 나오죠.

자, 정리 됐습니다. 일상은 뭐다? 일상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은 나의 죄, 잘못이 안 뽑혀 나오는 거예요. 왜? 일상은 자꾸 연대를 구성하기 때문에. 연대를 구성하거든요.

학생이 공부는 안하고, 몇 년 전에, ‘안녕하세요’라는 프로그램이 있거든요, KBS2에. 공부는 안하고 맨날 농사만 짓는 애가 등장했어요. 공부는 안하고 농사만 지어요. 그래서 걱정 되가지고 이 사람 걱정된다, 근심된다 삐빅삑 누르는 데에 나왔던 그 애가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어요. 농사 짓는데 그 ‘풀 뜯어 먹는 소리’라는 프로가 있어요, 요새 뜨는 송가인도 나오고 해요. 그러면 학생의 본분이 뭐에요? 농사에요, 공부에요? 공부죠. 그런데 공고를 갔는데 공부에는 관심 없고 농사짓고 유행가 노래 부르는 게 관심사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 그 학생이 나올 때에는 근심거리에요. 집, 이쪽의 연대가 뭐냐, 학생은 공부해야 된다는 연대란 말이죠. 그게 그들의 일상이에요. 그러면 공부 못하는 애는 죄인이 되어 버립니다. 문제아가 되어 버려요. 그런데 걔가 농사 너무 잘 짓거든요. 농사 잘 짓고 어른스럽고 하니까 그 쪽 연대에서는 죄가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인간은 가정에서 컸지만 커서 주로 어디 가겠습니까? 어떤 모임에 가고 어떤 그룹을 형성하고 어떤 연대를 형성하고 어떤 커뮤니티를 형성하겠어요? 자기 죄가 드러나는 데에 가겠습니까, 자기 죄가 감춰지는 데 가겠어요? 자기 죄가 감춰지는 데에 가겠죠. 그러니 일상이라는 것이, 그 연대, 어려운 말로 심급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 연대들, 수천 수만의 연대들, 그 연대들이 모여서 일상생활, 또는 일상입니다. 이래도 일상이 문제점 없어요?

자기 자신의 잘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교회 갔다. 그러면 교회가게 되면 죄를 알기 위해서 가겠어요? 나를 믿음 좋다고 알아주기를 위해서 가겠습니까? 자기 알아달라는 거예요. 또 힘들었으면 목사님이 위로를 해주고 격려를 해주고 희망과 용기를 부여하기를 원해요. ‘지금은 힘들겠지만 결국은 당신은 호강할 사람이다.’ 그런 것 사실 들으려면 교회 가지 말고 저 길바닥에 공원 근처에 가면 펴 놓고 부스 하나 만들어가지고 사주팔자 보는 데 있잖아요. 그런데 가면 거의 다 그런 이야기 해줘요. 조금 어려운데, 조금 어려운 것 같은데, 아 걱정하시지 마시라고. 3년 내에 펼 겁니다. 이런 거. 아저씨 안 만났으면 큰 일 날 뻔 했어요, 나 좌절할 뻔 했어요. 이래 가지고 용기 주고...

그런 것을 하는데 약간의 형식을 갖추고, 고딕 건물, 빨간 벽돌로 지어 놓고, 성가대 마련해서... 그게 약간 확장된 거거든요. 점쟁이는 점쟁인데 약간 그럴싸한 점쟁이. 그리고 점쟁이는 개인이 들어갔지만 이건 연대를 이루니까. 예수 믿고 복 받는다는 그러한 연대를 이루었으니까 사람들은 일상의 연장으로서 교회 다니고 있는 겁니다. 내가 대단하다는 것을, 누가 대신 내 뜻을 다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

그러나 그렇게 원하지만 실제로서의 오늘 본문에서 또는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일을 어떻게 합니까. 잃었다가 얻지 아니하면 성도 아니다. 이겁니다. 잃었다가 얻는 거예요. 누가복음 15장에 쭉 나오죠?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양 한 마리 잃어버린 것, 두 번째는 동전 잃어버린 것, 세 번째는 누굽니까? 자식 잃어버린 것 나오죠? 아버지에게 유산 받아 가지고 허랑방탕한 것.

그러니까 16장 넘어 가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불의한 청지기. 불의한 청지기. 불의한 건 맞아요. 그런데 세상의 어떤 누구보다 지혜로워요. 어찌 그런 일이...이제 아까 일상과 한 번 비교해 보세요. 일상생활 하는 사람들은 주인공이 누구다? 자기 자신이다. 그 자기 자신은 의미를 자기로부터 출발하죠. 그 의미는 뭐냐. 나 이렇게 대단한 것을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들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가수들이 무대에서 노래 부를 때 보람은 뭡니까? 박수 치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라는 거예요, 박수 치기를.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 라든지 또 영국의 무슨 리그입니까? 그 축구 리그에 관중들 보세요. 어떤 사람이, 런던에 있는 사람이 인터뷰 하니까 축구는 우리의 종교입니다...우리는 종교가 없다 이 말이죠, 축구가 종교다... 수많은 관중들이 손흥민! 토트넘 3000억 주고 다른 데 뺏아가면 토트넘 나 탈퇴할 거야, 이런 거.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그 의미를 당신이 실제로 그라운드에서 보여 달라는 거예요. 내가 당신을 응원할 테니까 당신은 우리 응원에 부응해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달라는 거예요. 그 비싼 돈 내고 폴란드까지 가가지고 20세 이하 축구시합, 세네갈 축구 할 때 마지막 차는 것, 패널티 킥 할 때 한국 선수 한 골 넣고 저 쪽 상대방 세네갈 선수가 못 넣었을 때, 그 때 목이 강의할 때 목 쉰 거보다 더 심해요. 아아~ 무려 백 분 이상 조마조마 했어요.

자, 그 때 관심사는 누굽니까. 제발 이겨다오. 제발 이겨다오. 노아웃에 세컨드 서드. 투수는 류현진. 야 여기서 1점대 떨어지면 안 되는데...2점 떨어지면 안 되는데...조마조마...드디어 다 한 점도 안내주고 그 회를 끝냈다. 와아~류현진! 류! 잘 한다 류!. LA 다저스의 그 수많은 관중들, 비싼 돈 내고, 5만원 인가...그 관중들 뭐 보러 갑니까? 사는 보람을 주러 가는 거예요.

자, 우리는 교회 왜 가죠?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아까 초밥...갑자기 제목을 초밥으로...접시에 초밥이 움직이잖아요? 나는 절대로 등신 같고 병신 같아가지고 나는 맨날 내 잘난 것만 생각하고 내가 주인공이라는 그것 밖에 모르기 때문에 뭔가 밑에서 접시를 받쳐 주지 않으면 우리는 목자한테 이 접시 없이는 갈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접시는 우리를 어디로 인도합니까? 우리로 하여금 자꾸 우리 자신을, 이렇게 잘나고 나한테 존경심을 표하라고 우기고 까불대고 으스대고 시건방진 우리를 무슨 자로 만들어버려요, 접시가? 잃어버린 자로 만드는 거예요. 잃어버린 자. 그걸 누가 하느냐, 그게 바로 성령님이 하시는 거예요, 성령님이.

성령님이 할 일은 우리 자아를 찢어 버려요. 찢어 버립니다. 쭉 찢어 버려요. 찢는다는 말은 성령님이 아니면 통합되어 있다는 거예요, 우리 자아가. 그것도 괜찮은 걸로. 괜찮은 것은 통합되고 내가 못한 것은 뒤에 은밀하게 감추고. 그래서 항상 나는 이렇게 할 가치있는 존재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그만한 자격이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은 거예요.

가수가 무대에 섰을 때, 가수의 보람은 뭐냐 하면 박수 소리예요. 물론 벌벌 떠는 사람도 있겠지만...그 박수소리에 혼이 나갈 정도에요. 그래 이 맛이야, 이 맛이야. 관중과 자기가 노래로 하나가 되는 거예요. 목사님의 꿈에 저를 봤다는데, 운동장에서 보고 또 어디서 봤다 했습니까? 체육관. 관중 몇 명이었습니까? 아, 많았어요? 슬슬 이제 은퇴할 때 됐는 모양이네요.

자꾸 예수 믿고 교회 갈 생각 하지 말고 내 힘으로 내 일상을 못 벗어나는 그렇게 무능한 무능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되요. 사도행전의 교회는 부서지는 교회입니다. 부서지게 한 것을 감사해야 되요. 멀쩡한 사람이 계속 살아 있으면 그 사람 중심으로 통합이 되어 버려요. 사도 바울 쫓겨 다니잖아요. 베드로 밉상 받지요. 스데반 집사는 죽지요. 꾸역꾸역 그런 식으로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어, 스데반 집사 죽네. 나도 가만히 있다가 같이 죽는 수도 있겠다. 나는 예수 믿지 말까’ 이러한 경우들이 발생 되어야 되요. 예수 믿고 잘 되는 경우 말고, 예수님 믿고 뭔가 내 소망과 틀어지는 경우들이 있어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나를, 하다 보니 실수한 사람일지언정 아예 처음부터 잃어버린 자라고 간주하지는 않아요. 이거 상당히 어려운 말인데...

사람이 자꾸 뭐가 있느냐 하면, 내가 평소에는 정상인데 이런이런 몇 가지가 잘못 됐다 이러고 싶어요. 대다수는 나는 괜찮은 존재고 사람이 완전할 수는 없으니까 죄 지었다. 하고 약간의 흠집 몇 개 더 갖다 붙이는 걸로 이해되는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통째로 이미 그 자체는 어떤 수를 써도 그 자체는 잃어버린 자에요. 따라서 천국의 생명나무에 근접할 수 없는 존재. 생명나무 있는 곳에 갈 수 없는 존재로 간주하고 시작합니다. 이걸 가지고 제가 아까 뭐라고 했냐 하면 인간의 시작은 삶이 아니고 죽음부터, 심판부터, 저주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러면 심판부터, 저주부터 출발 할 때, 그 출발점이 각 사람마다 다를텐데, 너 다르고 나 다를텐데 그 출발점이 어떻게 하나로 모일 수 있느냐. 그 출발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에요.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목자한테 가야 할 사람의 잃어버림의 출발점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 무슨 고백을 했냐 하면,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나님께 버림받은 예수님이에요. 하나님께 버림받은 예수님. 그 절차가 만약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라는 인식이, 곧 하나님께 이미 되돌려서 구원 받은 자에게만 그 인식이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성령님은 부활의 영이거든요. 부활에 참여된 자만 옛날에, 과거에 내가 어떠했음을 소급해서 알려주는 기능을 성령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이 하실 때 우리는, 성령이 오기 전에 육신에 있을 우리는 자꾸 일상에 빠져 있어요. 자꾸 통합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통합은 하나의 전체를 괜찮은 존재로 구성해 가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 와서는 이렇게 구성하면 안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야 되요? 이걸 해체시키고 찢어야 되겠죠. 그 일을 성령이 하시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190614a 베드로전서2장 25절(일상의 무능함)-이 근호 목사.hwp (65.5K), Down:8
 이미아(IP:122.♡.170.138) 19-06-20 09:05 
집사님! 감사하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연히 꺼낸 이야기에 녹취하고 싶었다는 말씀에 너무 놀라웠고요.
집사님께서도 지금의 때와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 주신 일에 감사함을 고백하시니,
듣는 그 고백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새로운 만남을 허락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숨겨놓은 주님의 백성들을 주님께서 직접 발굴해내셔서 사용하시는,
그 새로운 일들을 목도하는 즐거움이 날마다 계속해서 넘쳐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무능할 수밖에 없고, 무능해야 하고, 바보, 등신, 장애자여야 마땅하지만,
주님의 일상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51:12)
 이미아(IP:122.♡.170.138) 19-06-20 09:09 
녹취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시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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