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19-06-20 11:15:22 조회 : 141         
192강-창 49장 22-26절(요셉에 대한 예언)190619-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06.240.236.10)
192강-창 49장 22-26절(요셉에 대한 예언)1906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9장 22-26절입니다. 구약성경 79페이지입니다.

창세기 49:22-26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요셉지파에 대한 예언입니다. 요셉지파에 대한 예언이 중요한 내용들이 연결되어 있는데요. 만약에 열 두 지파가운데 요셉지파가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요셉지파가 아예 없다면 요셉지파에게 준 예언도 이스라엘한테는 적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요셉지파가 있다고 칩시다. 있게 되면 요셉에게 주어진 예언이 전체 이스라엘에 대해서 어떤 효력을 발생하는지 그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야곱이 열 두 아들 가운데서 특별히 두 아들에 대해서 축복하는 내용이 다른 아들들보다 배 이상으로 깁니다. 유난히도 긴 예언을 준 것이 49장 9절의 유다지파에게도 길게 이어져 있고 그 다음에 긴 것이 방금 읽었던 요셉지파에게도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축복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과 그냥 축복의 차이점이 뭐냐? 그냥 축복은 우리가 받아내면 그만이거든요. “내가 너에게 복을 줄게.”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버리면 내 소유가 될 겁니다. 그런데 야곱언약의 야곱약속에 관한 축복을 줘버리면 이 복을 받은 사람은 무엇과 연결되느냐 하면, 장차 이 모든 복이 다 완성이 되고 완료가 되는 그 미래의 시점과, 지금 이 복을 받겠다고 약속을 받은 이 사람 사이에 연결줄 같은 것이 형성되는 겁니다.

연결되어 있는 거지요. 끊어져 있지 않고 이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신다 할 때는 그냥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보고 최선을 다하라고 하고, 네 양심껏 네가 아는 선행을 하라는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자와 구원될 사람의 끈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약속의 끈이지요.

약속의 끈의 굵기라든지 내용 같은 것은 우리 쪽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언약이라는 구성 안에서 그 내용이 하늘나라와 구원될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서 누굴 만나든지 교회에서 누굴 만날 때에 그 사람의 인품이 어떻고, 학식이 어떻고, 그런 것을 찾지 마시고요, 그 사람의 몸이 건강한지 팔이 부러졌는지 그런 것을 찾지 마시고 끈이 연결되어 있는가, 하늘나라와 끈이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냐를 보는 거예요.

비록 그 사람이 초라하고, 가진 재산이 없고, 반지하에 살든, 가족이 몇이 있든 없든 간에 또는 우환이 있든지 그런 것은 상관이 없어요. 끈이 연결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 끈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연결된 그 끈이 있는가를 보셔야 돼요. 만약에 그 끈이 없이 교회 나오면 자기가 그 노력을 한다는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계속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결국 좌절해요.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도 모든 과목에서 백점을 맞을 수가 없듯이 인간은 율법을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킬 수가 없습니다. 지켰다 싶으면 새로운 율법이 또 주어지니까. 이정도 하면 되었다 싶으면 또 주어져요. 그래서 내 쪽에서 뭔가 행한다, 지킨다,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양초 안에 심지가 있듯이 우리를 양초라고 보고 그 안에 심지를 꽂아놓은 그 연결선이 있어야 돼요.

그러면 성도는 뭘 자랑하느냐 하면, 자기가 얼마나 잘났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양초의 심지 같은 약속이라는 끈을 자랑하게 되지요. 그 약속의 끈은 뭐냐 하면, 인간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주신 것은, 그 약속은 네가 손대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지키려고 하지 말라. 약속을 주신 분이 약속을 지킵니다.

그 약속을 주신 분을 누구라 하느냐 하면, 주님이라고 해요. 앞으로 여러분이 주여, 주님을 부를 때는 다른 것 생각하면 안돼요. 약속을 먼저 던져놓고 자신이 던진 약속을 따라가면서 그 때 그때 성취해내시는 분, 이게 바로 약속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 주님이고 주의 이름입니다. 어릴 때 하던, 숫자 1, 2, 3, 4, 5, 6, 7 해가지고 돌을 던져놓고 돌이 있는 곳까지 가는데 땅에 그려진 칸의 규칙에 맞춰서 다리를 벌렸다, 모으고, 뛰고, 건너고 해서 그 돌을 주워오는 게임이 있잖아요.

주님께서 스스로 약속을 던져놓고 던져진 그 약속을 찾아서 스스로 회수하는 가운데서 그 노선, 주님이 했다, 주님이 홀로 하셨다는 그 노선에 빨려 들어가는 사람만이 이스라엘이 천국백성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오직 주님의 약속만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그냥 줘버리면 그것은 내가 간직하라고 주신 복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이 복이 무슨 복이냐 하면, 약속된 복이 와버리면 이 복에 대해서 받으려고 하는 우리가 이 복을 지키거나 관리할 권한이나 능력은 우리에게 전혀 없습니다. 주께서 그냥 자기가 던진 약속대로 그것을 실현해 나가시는 거예요. 마치 요셉에게 꿈을 줘놓고 그 꿈이 요셉을 장악하는 것처럼 지금 우리들의 인생을 장악하는 것이 뭡니까?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언약, 약속이라는 끈이 우리 인생을 장악해야 되고 그래야 구원되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그 말씀이 뭐냐 하면, 십자가 안에 모든 구약의 마지막 약속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이루었다는 말은 그 이룸이 의가 되고 의가 되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저주가 아니라 모든 하늘의 복을 다 받는 거예요.

오늘 2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라고 되어 있어요. 누구한테 준다는 말입니까? 요셉지파? 아니에요.

이 약속에 의해서, 방금 이 축복에 의해서 다시 탄생하는 그 이스라엘에게 이 복이 주어지는 겁니다. 전에 피자 판 이야기했듯이 어느 지파에게 주어진 복은 하나의 피자 판이기 때문에 어느 지파에게 주었든지 간에 그 복을 누리는 것은 전체가 공히 누리는 겁니다. 다만 하는 일들이 달라서 그래요. 기능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창세기 49장 이 복을, 내가 부자 되기 위해서, 내가 잘 먹고 잘살고, 나 개인적으로 복 받기 위해서 이 말씀을 이해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백설 공주 이야기 잘 아시지요. 기차타고 오면서 백설 공주 이야기를 약간 각색하고 수정한 동화이야기를 들었어요. 내용이 이렇습니다. 백설 공주 원 내용은 계모가 할멈처럼 꾸며서 독이 든 사과를 백설 공주에게 주게 되면 그걸 먹고 잠들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그 원래의 동화를 각색했어요. 할멈이 독이 든 사과를 가지고 백설 공주가 있는 집 문을 두드려서 사과를 줬어요. 그런데 백설 공주가 그 사과를 자기 피부에 양보해서 팩을 했어요. 화가 난 할머니가 창문으로 보는 거예요. 아무리 봐도 안 먹는 거예요. 다시 문을 똑똑, 두드려서 독이 든 사과를 주니까 윌리엄 텔처럼 그 사과를 과녁삼아서 활을 쏘더라는 말이지요.

그것도 실패해서 다시 사과를 주니까 이번에는 사과를 놓고 정물화를 그린 거예요. 이번에는 백설 공주가 그 사과를 그 할멈에게 먹여버리니까 그 할멈이 죽어버렸어요. 이게 각색된 백설 공주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십자가가 원래 스토리에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그것이 영생이거든요. 그게 원래 스토리인데 사람들은 성경에 이게 나오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전부 다 이 땅에서 출세하고, 부자 되는 여기에 엮으니까 이것은 완전히 엉터리버전이에요.

성경의 뜻이 그게 아닌데. 예수님이 부자였습니까? 예수님은 말씀대로 사신 분이었는데 부자였습니까? 예수님은 말씀대로 사셨는데 안 돌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은 말씀대로 사셨는데 갑자기 땅을 갖고 이 땅에서 정치적인 활동, 국회의장 되었습니까? 아니잖아요. 이 땅과 나는 별개다. 그것 보여주시고 그냥 돌아가셨고 사흘 만에 부활했지 않습니까?

그게 첫째 부활이고, 그러면 둘째 부활 해당자가 누구입니까? 성도잖아요. 셋째 부활, 넷째 부활 전부 다. 그렇다면 이 복이라 하는 그 복의 완성은 누가 교회 다녀서 장로 되었다, 부자 되었다는 그것을 모델로 삼지 마시고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야 돼요. 스데반집사님을 모델로 삼아야 돼요. 그게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교회 나와서 말씀 지켜서 죽고자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 길 안 갈걸요?” 이렇게 나올 거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못하지요. 아무도 주님의 길을 안갈 거예요. 그러니까 주께서 이 예언의 말씀대로 주께서 기어이 좁은 길로 가서 영생에 가도록 조치를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무심코 성경을 보면서 얼마나 오해를 하겠습니까?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요셉지파와 더불어서 제일 긴 축복을 받은 지파가 유다지파입니다. 축복으로 말하면 투톱이에요. 두 개의 장대 같은, 중심 되는 인물이 양분됩니다. 이스라엘 역사 자체가 한쪽은 유다, 한쪽은 유다 외 이스라엘. 이름도 이스라엘이고 한쪽은 유다에요. 이렇게 양분되거든요.

그 양분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시편 78편 68절, 6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전체를 투톱으로 설명을 해주는 겁니다.

이스라엘전체를 어떻게 묘사하느냐 하면, 유다지파와 그 외. 유다지파 외에는 무슨 지파냐? 요셉지파를 대표로 하는 지파들. 이게 시편인데 다윗시대 때 이미 이것으로 갈라지거든요.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유다에 대한 예언과 요셉에 대한 예언이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둘이 양분되어서, 어떤 마주침을 통해서 진정 야곱언약을 주신 축복이 그 마주침과 차이남의 틈새를 경유해서 완성된 상태로 달성한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가 있어요.

유다지파에게 준 것은 뭐냐 하면, 너에게서 왕이 날 것이라는 거예요. 요셉지파에서는, 너에게서 목자가 나올 것이라고 했어요. 목자라는 성향을 보여주는 것이 요셉지파. 저쪽 유다지파는 무서운 사자 같은 분이 오셔서 기어이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왕,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요셉지파의 목자와 유다지파의 왕, 왜 그렇게 둘로 갈라지느냐? 갈라지니까 이스라엘의 역사가 뭔가 하나로 출발했다가 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로 통합한다는 뉘앙스를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갈라짐이 없으면, 요셉쪽과 유다쪽의 갈라짐이 없으면 그 갈라짐 속에서 진정 나올 이스라엘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스라엘은 하나의 이스라엘이고 줄곧 계속해서 하나의 이스라엘로 갈 것이라는 그러한 이스라엘은 잘못된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이 하나로 시작했다가 뭔가 깨어지고 깨어졌다가 다시 요셉과 유다지파의 통합에 의해서 결성된 이스라엘지파만이 최종 야곱의 언약이 완성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요셉지파의 역할은 뭐냐? 오늘 본문 창세기 49장 22절에 보면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되어 있어요. 요셉지파의 복은 뭐냐 하면, 자기영토만을 위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역할이 자기영토를 넘어서요. 쉽게 말해서 어떤 건물이 있다면 그 건물의 외피를 담쟁이로 완전히 덮는다고 보면 돼요.

중세 때 기사들이 전쟁할 때 옷 위에 뭘 더 입지요. 쇠고리로 만든 옷인데 제가 유럽에 갔을 때 그것을 만져봤거든요. 만져보니까 기사들이 입는 철갑옷이 굉장히 무거워요. 그처럼 요셉은 이스라엘의 외피를 완전히 장식해 버립니다. 외피를 장식한다는 것은 내막과 그 본질은 요셉담당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어디 담당이냐? 그것은 유다담당이에요.

안쪽은 유다가 담당하고 바깥쪽은 요셉이 담당하고. 그러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환경이 뭐냐 하면, 요셉은 형제로 인하여 내침을 당해서 애굽으로 간다는 말이지요. 애굽으로 가서 애굽에서 하나님의 꿈대로, 약속대로 획득된 것이 뭐냐 하면, 무사히, 조금도 다침이 없이 안전하게 야곱의 아버지가정을 폭 감싸는 식으로 보호하는 권력층을 요셉 하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형성시켜 줬습니다.

온 식구 70명이 몽땅 애굽으로 가도 애굽에서 그들 전체를 안전하게 어떤 이방세력에서도 지킬 수 있는 외피적이고 외형적인 형식의 틀, 보호막은 요셉에 의해서 다 마련되었어요. 그러나 그들이 과연 외피로서 보호해야 될 내용은 뭐냐? 그것은 유다지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형성시켜 줬습니다. 다른 아들에게는 없는데 요셉과 유다 이 두 아들에게 있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들의 자식이 전부 다 외부에서 주입되었다는 거예요. 요셉의 아들은 애굽의 여자와 결혼해서 자식이 들어온 거예요. 므낫세, 에브라임 다 외부에서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유다는 뭐냐? 유다의 자식은 창세기 38장에 나오는데요. 28절에 보면 쌍둥이를 낳는데 먼저 나온 애가 나오려고 하다가 쑥 들어가 버리고 뒤에 있는 애가 제치고 나와 버려요. 새치기해서 나왔다 그 말이지요.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 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유다에 있어서의 이 두 아들은 뭘 거치고 나왔느냐? 유다의 아버지가 야곱이거든요. 야곱의 형이 있는데 그 이름이 에서에요. 에서와 야곱 둘 쌍둥이인데 이 쌍둥이의 운명이 달라도 완전히 대조가 되는 운명을 한꺼번에 쌍둥이에 결합시켜서 등장합니다. 에서는 창세전부터 저주받게 되어 있고 야곱은 창세전부터 복 받게 되어 있어요.

쌍둥이면서도 너무나 가는 길이 달라요. 이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하면,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있는데 하나는 이스마엘, 다른 하나는 이삭이에요. 둘 다 아버지 몸에서 태어났지만 이스마엘은 영원히 저주받아야 되고 이삭은 대조적으로 영원히 천국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될 운명입니다. 이게 아까 처음에 설교할 때 말한 끈이에요.

연초에 토정비결 보지 마세요. 성경 보세요. 우리의 운명은 언약적 끈이 있느냐, 그 언약적 끈을 못 느끼느냐, 그걸 알지 못하고 있느냐의 그 문제에요. 언약은 장차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요소가 언약 안에 이미 담겨 있거든요. 정말 언약을 아는 사람은 이미 천국이고 언약과 관계없이 내 스스로 인생을, 미래를 결정하겠다, 천국이나 지옥 가는 것은 내 노력과 내 선행에 의해서, 나의 거룩함에 의해서 해보겠다고 나오면 그것은 영원히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왜? 끈이 없기 때문에. 언약적 끈이 없어요. 그냥 자기수완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37장에 보면 야곱의 족보를 이야기하면서 요셉이야기가 한 장을 차지하는데 그 다음에 38장에 보면 요셉 이야기는 없어지고 유다이야기가 나와요. 유다가 아들이 세 명 있었는데 큰 아들이 죽고, 형수에게 장가든 둘 째 아들도 죽고 두 명 죽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다말이라는 이방여자가 큰 아들의 부인으로 되어 있어요. 유다는 생각하기를 ‘그 이방여자와 결혼했다는 이유 때문에 아마도 내 귀한 아들이 죽었다’고 오해를 한 겁니다. 나중에 결국 유다가 알게 된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한 자식은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약속에 의해서 나에게 집어넣는 그 자식이 내 대를 이을, 나의 천국, 영생으로 이어질 끈이지요, 언약의 끈이지요, 언약의 자식이 된다는 것을 유다는 알게 된 겁니다.

유다나 요셉 둘의 공통점은, 외부적인 것이 찾아와야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과 연결된다는 그 점에 대해서 두 아들이 표현해주고 있는 상황을 맞이한 거예요. 다른 아들들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외부적인 거예요. 족보가 있는데 육의 족보가 아니고 외부에서 투입된 새로운 족보만이 기존의 육에서 벗어나서 영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요셉지파와 유다지파 두 지파만이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열 두 지파 중에서 두 지파가 유난히 돋보이는 겁니다. 돋보이는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요셉지파는 외피를 담당해요. 이스라엘전체를 보호해주는 거예요. 요셉지파에게 준 것은 뭐냐? 담쟁이처럼 넘어가서 뭘 이루냐 하면, 이방인과의 경계선을 이뤄요. 외피라 하는 것은 외부와, 외부요소와의 경계선을 이루는 거지요.

요셉지파가 이걸 지켜주는 거예요. 외부로부터 지켜주는 겁니다. 그게 무슨 기능이냐? 그게 바로 목자의 기능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상황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진다. 그동안 양의 떼가 흩어지지 않은 것은 목자가 보호자 역할, 보디가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에요. 자기양떼를 목자가 책임지고 지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목자 되시는 예수님이 잡혀가게 되면 그동안 목자 안에 있던 양떼는 제갈 길로 다 가버려요. 그 비슷한 이야기가 유명한 이사야 53장에 나오지요.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양이 구원받은 자라면 양은 필히 목자 없이는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그것보다 유명한 말씀이 시편 23편에 나오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시 말해서 성도라면 본인인생을 자기가 개척하고 관리하고 꾸려나가는 것이 성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계몽이에요. 그것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겁니다.

남에게 안 지려고 악을 쓰고 악바리가 되는 거예요. 일종의 자기가치를 지키려고 발악을 하는 거예요. 그것은 마귀의 품성이지요. 마귀의 마음을 품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 겁니다. 성도라면 “저는 목자덕분에 살았어요.” 하고 자꾸 목자이야기만 해야 돼요. 우리 인간이야기, 양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이 되는 것이 아니고 목자가 없으면 인간이 돼요.

인간이라는 말은 뭐냐? 나는 목자가 필요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너 인간될래, 양될래?” 우리는, 성도는 당연히 양이 되어야 목자를 증거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인간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나의 잘남, 너 못지않게 나도 잘났다는 사람 대 사람을 견주게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낳은 새끼를 귀하게 여기고 자기자식이 있으면 주님의 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유다지파와 요셉지파는 내가 낳은 자식을 꺾어버리고 외부에서 온 자식의 이름으로 요셉은 요셉을 치고, 유다는 유다를 치는 거예요. 자식이 내가 예상한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의 개입의 증거로서, 축복이 집요하게 너에게 개입하고 있다는 증거로서 내가 예상치 못한 다른 계통의 자식, 물론 이방여자지만, 다른 계통의 자식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통 속에 들어와 버리는 겁니다.

그 증거에 대해서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나와 있지요. 3절에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다말을 여기서 강조하는데 다말이 이방여인이거든요. 다른 데는 여자 이름이 안 나옵니다. 외부에서 새로운 노선, 언약적 노선이 죽어가는 육의 노선을 육의 허락 없이 강제로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약속을 구현하겠다는 주님의 의의로 강제로 들어왔을 때 우리는 그 들어온 흔적을 지니고 있어야 그게 바로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모태신앙이 되어서 어릴 때부터 세례 받아서 열심히 한 50년 교회 다녔습니다. 그게 뭔데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50년 동안 종교놀이 했는데요. 교회놀이 했잖아요. 아름다운 교회, 이상적인 교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 교회라는 이름의 소꿉놀이했잖아요. 하나님이 나를 부정하던가요? 그런 계기가 있어야지요. 교회놀이 하는 나를 “웃기고 있네.” 하고 그 자체를 원천적으로 밀치는 일이 있어야 돼요.

그게 언약이 강제로 침입한 거예요. 뾰족한 양초의 심지가 나를 찔러버린 겁니다. 강남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소시지나 오뎅에 딱딱한 나무 꼬챙이가 쑤시고 들어오잖아요. 물렁물렁하고 부드러운 나의 착한 양심을 어떤 하나님의 십자가, 십자가의 끝이 뾰족하니까, 십자가가 그걸 완전히 후비고 쑤시고 들어와 버려야 돼요.

“착한 양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것도 피 묻은 꼬챙이로. 그 노선은 네가 지옥 가는 노선이야. 그걸 보여주는 인물이 뭐냐? 그게 유다고 요셉이에요. 요셉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외피를 구성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요셉지파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은 맞습니다만 요셉지파가 구원하는데 보탬이 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요셉지파가 생각하는 그 외피적인 기능은 엉터리입니다. 그리고 유다지파가 생각하는, 우리에게서 왕의 노선이 나온다는 그 왕의 노선도 그게 엉터리에요. 하나님께서는 요셉지파와 유다지파 투톱으로서 둘을 비교시켜 가면서 계속 둘 사이에 차이를 두고 충돌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둘로 쪼개져요. 남쪽은 유다나라가 되고 북쪽은 이스라엘 나라가 됩니다. 이름도 재미있지요. 북쪽은 이스라엘이라고. 왜? 열 지파가 거기에 가담했으니까. 열왕기상 12장 16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온 이스라엘이” 재미있잖아요.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다윗(유다지파)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우리는 따로 나라 만들겠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요셉중심의 나라와 유다중심의 나라로 둘로 나뉘어진 거예요. 나뉘어졌다는 것은 둘이 하나로 통합이 안 된다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처음에는 같이 시작했으면 줄곧 하나로 완성된 채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요셉지파도 그렇게 생각했고, 다른 지파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유다지파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내부가 두 중심으로 양분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중심과 유다중심으로 양분시켜서 요셉 지파가 요셉지파가 아니고, 유다 지파가 유다지파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은 유다지파라고해서 유다지파에게 준 약속을 지킬 수가 없고, 요셉지파라고 해서 요셉지파 너희들에게 준 복을 너희들이 지킬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진짜 요셉지파와 육의 요셉지파가 갈라서게 해서 그 틈새에서 진짜 요셉의 약속을 구현하는 분이 등장하고, 진짜 유다지파와 육의 유다지파 사이가 갈라지게 해서 그 차이에서 구원자가 나오기 마련이에요. 그것이 에스겔 37장에 나오는데 이렇게 되어 있어요.

15절에 에스겔 선지자보고 하는 말씀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이미 둘은 쪼개졌어요. 쪼개졌는데 그 둘을 서로 연합해서 앞으로 만들겠다, 그렇게 한 거예요. 쪼개짐이 있어줘야 다시 만들어짐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쪼개질 때 그 때 쪼개진 유다와 요셉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짜 이스라엘은 두 개가 쪼개지고 난 뒤에 그 쪼개짐을 연결시키는 그 연결비트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연합적인 이스라엘, 그분이 누구냐? 인자에요, 예수님이에요.

그러면 왜 그렇게 쪼개지게 하시는가? 왜 멀쩡한 이스라엘을 쪼개기 하시는가? 그 이유가 스가랴 11장 7절에서 14절에 나옵니다. 7절에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쌔.” 역시 또 막대기가 두 개입니다. 은총이라는 것을 쪼개버려요. 10절에 보면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잘랐어요. “나는 너한테는 이제 은혜 안준다. 더러워서 은혜 안준다.” 은총을 잘라버립니다.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야곱의 모든 축복은 취소, 약속취소, 너에게는 안 간다는 그 말입니다. 아주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육적인 이스라엘 속에 진짜 이스라엘이 감춰져 있는데 그 감춰져 있는, 진짜 천국 가는 천국백성은 육적 이스라엘에 가려진 거예요. 그러면 진짜 이스라엘이 역사 위로 차고 나오려면 위에 있는 이 가짜 이스라엘, 현재 이스라엘이지요, 이스라엘이 찢어져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 방법을 누가 사용한다? 그 방법을,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거예요.

찢어져라, 그 말이지요. 내가 약속 믿고 내가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포기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진짜 너의 구원은 네가 요령 부린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약속하신 주님에 의해서 이미 마련되어 있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에 손댈 필요도 없어요. 다만 그것을 누가 방해하느냐? 내가 설쳐서, 내가 나 구원받겠다고 설치는 내가 진짜 숨겨놓은, 하나님이 숨겨놓은 진짜 나를 계속해서 훼방질하고 가리고 있는 겁니다.

가짜가 진짜 행세하면서 말이지요. 쉬운 예로 열두 제자지요. 자기들은 열 두 제자니까 주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할 줄 알았지요. 그런데 뭡니까? 목자를 치니까 양떼가 흩어졌잖아요. 그들은 예수님이 목자니까 자기들은 충실한 양인 줄로 알았어요. 본인이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스가랴 같은 경우에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자라고 ‘연락’을 끊어버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에 그런가? 그 당시 목자가 잘못되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 뒤에 스가랴 11장 15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찌니라.” 목자가 제대로 안되었으니까, 이스라엘의 목자가 엉터리니까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 목자를 봐서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축복을 완전히 없애버리겠다는 겁니다. 스가랴뿐만 아니고 에스겔서도 마찬가지에요. 에스겔도 목자를 문제 삼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외부의 이방인과 경계선으로 해서 안쪽에 있는 이스라엘을 보호해야 될 요셉의 기능이 우상숭배에 의해서 허물어져버리니까, 바깥에서부터 허물어져버리니까 안쪽도 물들어서 엉망진창이 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이 훼손된 이 대책을 어떤 식으로 세우느냐 하면, 내부로부터 새로운 왕이 오셔서 그 왕이 목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게 되면 그로 인하여 새롭게 갱신된 본질과 내용에 의해서 외피, 외형의 형식이 새롭게 재구성되는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 예수님 보내셔서 그 일을 완수시키시는 겁니다.

하나라고 여겼던 그 약속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날카롭게 둘로 대립되어 전쟁을 벌이면서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이 싸우지요. 하지만 주께서는 그 둘을 의도적으로 갈라서게 했고요. 그 둘, 너도 아니고 너도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죽었으니까. 유다 너도 가짜 유다고, 요셉 너도 가짜 요셉이다. 진짜 요셉과 유다의 통합은 바로 너희들에 가려져 있었던 겁니다.

진짜 약속을 이루실 분은 외부요소가 들어와야 돼요. 유다의 자손이 예수님이거든요.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9:27) 유다의 자손이 거꾸로 소급해서 옛날 선조의 유다를 살리는 방식, 이스라엘자손이 옛날 이스라엘을 살리는 방식으로,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왜 그렇게 일을 인간에게 맞기지 않고 거꾸로 하시는가?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이 육인 것을 모르고 덥석 축복 받아서 이제는 이것이 내 축복이다, 이 구원이 내 구원이다, 이 천국이 내 천국이라고 전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기에 그런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가리는 짓인 것을 몰라요.

우리는 나와 내가 쪼개져야 됩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약속으로 내 소유의 구원을 날마다 쪼개십니다. 네 소유의 구원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구원이지요. 내 구원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가 할 것은 뭐냐? 주님과 나의 차이를 성령을 통해서 날마다 확인해야 돼요.

왜 나는 내 식대로 안 되는가? 그리고 왜 주님은 안 되는 자를, 무엇에 근거해서 안 되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구원을 해내시는가? 그것은, 모든 예언은 주님홀로 다 이뤄내시는 그 언약의 원리원칙 때문에 그래요. 자, 그러면 우리는 뭐냐? 우리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외피입니다. 꼬라지는 이래도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용서하심, 볼품없는 우리를 통해서 마음껏 발산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땅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진짜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뤄주셔서 그것을 우리 안에 심지처럼 꽂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살면서 나 복 받고, 나 잘되고, 나 성공하기를 바랐기에 진정 주님의 축복과 주님의 영생과 구원을 우리가 훼방하지 않았습니까? 날마다 성령께서 우리를 쪼개서 우리 안에 주님 계심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92강-창 49장 22-26절(요셉에 대한 예언)190619-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1
게시물7,990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8386   강남-요한복음 21장 15절(양과 목자)190702a-이근호 … 홍민희 19-07-09 105
8385   안양모임 안내(7.12. 금) 공은주 19-07-09 57
8384   20190705b 울산강의-레위기 23장 : 시간의 선회 한윤범 19-07-08 143
8383   20190705a 울산강의-레위기 23장 : 시간의 선회 한윤범 19-07-08 126
8382   31강-엡 4장 4절(몸)190707-이 근호 목사 오용익 19-07-08 125
8381   대구경북지방 여름수련회 참석차 명단 (1차) 이상규 19-07-07 174
8380   242강-여호수아 22장 10~12절(단)20190707-이 근호 목… 송민선 19-07-07 96
8379   주일학교 설교 / 거지와 부자 / 190707 정인순 19-07-07 90
8378   부산 성경공부 안내 서경수 19-07-07 52
8377   수련회 재 광고 서경수 19-07-05 213
8376   194강-창 49장 29-33절(야곱의 죽음)190703-이 근호 … 오용익 19-07-04 126
8375   울산 성경공부 안내 서경수 19-07-04 58
8374   281강-YouTube강의(아첨과 탐심)20190702-이 근호 목… 이하림 19-07-03 94
8373   280강-YouTube강의(공로의 위험성)20190702-이 근호 … 이하림 19-07-03 86
8372   30강-엡 4장 1-3절(하나 됨)190630-이 근호 목사 오용익 19-07-01 120
8371   241강-여호수아 22장 1~3절(동쪽 지파의 땅)20190630-… 송민선 19-06-30 97
8370   광주강의20190629b 마가복음14장 1-9절(죽음에 대한 … 이미아 19-06-30 141
8369   광주강의20190629a 마가복음14장 1-9절(죽음에 대한 … 이미아 19-06-30 115
8368   주일학교 설교 / 살아난 나사로 / 190630 정인순 19-06-30 79
8367   강남 모임 안내(7. 2. 화) 이명직 19-06-30 61
맨처음 이전 [1] [2] [3] [4] [5] [67 [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