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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8 11:50:03 조회 : 152         
50강-엡 5장 14절(일어나라)191117-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06.240.236.10)
50강-엡 5장 14절(일어나라)1911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5장 14절입니다. 신약성경 314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사도바울은 일반사람들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잠자는 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얼마나 분주하게 밥벌이 하면서 살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하나의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힘들게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시비 거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누구에게나 지극히 지당하고 당연한 것, ‘사람은 살기 위해서 활동한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공부해야 되고 노력한다. 거기에 대해서 누구도 시비 걸지 말자. 오히려 게으른 사람에 대해서 욕을 하자. 열심히 부지런히 사는 사람을 격려해주자.’ 하는 이 세상에서 통하는 상식에 대해서 뒤에서 칼을 꽂아버립니다. “너희는 다 죽은 자다. 잠자는 자다.” 내가 살려고 열심히 애쓰는 것에서 인간들은 어느 방향이냐 하면, 나보다 더 행복하고, 더 돈 잘 벌고 잘 사는 쪽으로 눈동자가 가 있고 그 사람을 따라잡으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런데 ‘열심히 살고, 바르게 살고, 그리고 착하게 살면 복을 주겠지. 주께서 행운을 주겠지.’ 하는 이런 사람에게는 무엇을 돌아볼지 모르냐 하면, 자기의 뒤쪽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요. 내가 잠자는 자, 다시 말해서 내가 죽은 자라는 생각을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가는데 힘이나 좀 보태주세요, 하나님!’ 이런 식이지 ‘나 뭐지?’ 이런 생각을 못해요.

제가 20대에 취직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을 때에 교회에 다녔습니다. 고대 앞에 있는 안암제일교회에 다녔어요. 열심히 교회 충성하고, 봉사하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청년회 일도 하면서 늘 무슨 생각을 했느냐? ‘남들은 다 취직하는데 왜 나는 취직 못하느냐’ 하는 이것에만 관심이 있었어요. ‘열심히 사는데 주께서 도와주실 거야.’라고 생각한 거예요.

죽은 자라는 이야기, 내가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는데 그 목사라는 사람이 한 번도 저에게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저 뿐이겠습니까? 다른 사람한테도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취직하면 뭐하겠나?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취직을 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 목사가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 목사가 왜 이야기를 못하겠습니까? ‘네가 취직을 해서 십일조를 하겠지. 십일조 많이 할수록 교인들도 많이 모이고 교회도 잘되겠지.’ “교회 잘되니 뭐합니까? 그 교회가 죽은 자의 교회인데.”라는 말을 감히 목사가 설교시간에 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등짝에다 칼을 꽂아버린 거예요.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왜 너희들이 죽은 자냐 하면, ‘예수님과 비교해보라. 예수님만 유일하게 산자기 때문에 너희는 자동적으로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주님하고 비교할 생각을 안하고 있어요.

나보다 더 행복하고, 나보다 더 출세한 사람과만 비교하려고 온 정신이 거기에 쏠려 있어요. ‘저 나이에 저렇게 성공하다니’ 거기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일괄적으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아무개여 일어나라”고 하지 않습니다. “잠자는 자여.” ‘아무개여’가 필요없어요. “잠자는 자여”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렵게 해서 사도바울에 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주님의 살아계심으로 인하여 주의 이름 외에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길이 없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은 예수의 이름 빼놓고 나머지 모든 이름을 제거해 나가는 겁니다. 지워나가는 거예요.

인간에게 이름이라 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겁니다. 왜 지워나가느냐 하면, 인간은 죽은자기 때문에 죽은 자는 이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명사라는 것은 뭔가 대칭되고 대응되는 하나의 물체가 살아 있어야 이름을 붙이는데 이미 죽은 자들 집단속에 들어가 버리면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구태여 네가 부를 네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내 이름 불러서 내가 구원받지를 못해요. 그런데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나는 어떻게 되지?’라고 자꾸 나를 놓지를 못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도바울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땅에서 왜 죽었지?’ 관심사가 다르지요? 성경 해석하면서 ‘하나님은 왜 죽었을까? 하나님은 왜 이 땅에 와서, 인간들 사는 세계에서 하나님은 왜 꼭 죽어야만 했을까?’

오늘날 교회 교인들은 ‘나 죽으면 천당가요, 지옥가요? 내 미래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자신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습니다. 참, 차이가 보통 나는 것이 아니에요. 정말 이 차이를 아셔야 되는데요. 제가 한 문장을 읽어드릴 테니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세요.

“나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안다.” 할 때 여기 ‘나’가 두 개가 들어가요. 처음의 ‘나’는 성령 받지 않은 나에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안다고 할 때 그 두 번째 나는 성령 받은 자만이 아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 받은 자에게서 내가 죽어 있기 때문에 그 앞에 나를 붙여주면 안돼요. 이렇게 해야 돼요. “주님은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안다.” 이런 문장이 나와야 돼요.

그런데 그 문장이 성령을 안받은 상태에서는 주님의 그 자리에 자기가 들어가고 싶은 거예요. “나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 사람은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고 살아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사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살아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스스로 몰두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살아있는 것으로 쳐주십니까? 남처럼 이렇게 하게 되면 살았다고 내가 자부할 수 있습니까, 주여?’ 살아있는 것이 뭘까, 를 자기에게 자꾸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하나님입장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뭐가 살아있느냐 하면, 주님만이 살아있는 것을 살아있다고 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 왜? 나는 어디서 죽었다?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는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다’는 말은 무엇이 살아 있느냐하면, 십자가만 살아있는 거예요. 더 어렵게 이야기해서, 내가 죽고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와 함께 죽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살아있는 거예요. 세상사람들은 이런 성경이야기에 대해서 실증적으로 증명이 안된다고 해서 전부 다 배제해버립니다.

가을 되면 낙엽 쌓이지요. 낙엽 쌓인 거기에 또 낙엽이 쌓입니다. 발길에 툭툭 차이지요. 봉오동 가는데 청소를 안해서 계속 낙엽이 쌓여서 걷기가 힘들어요.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가 5년 전에 살아있는 연습, 4년 전 살아 있는 연습, 3년 전 살아 있는 연출, 이런 것이 계속 낙엽처럼 쌓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낙엽처럼 쌓여 있는 거기에 바람한 번 불게 되면 쌓였던 그 현장에 낙엽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나오는 유명한 노래가 <낙엽처럼 가버린 사랑>이에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낙엽하고 똑같아요. 충실하게 열심히 살았는데 죽음이라는 바람이 와버리니까 그 현장에 내가 없어요. 지금 오늘 오후에 죽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오늘 김장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남 좋은 일만 시켰어요. 김장 맛도 못보고.

다 없어지는 거예요. 그 없어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 안되고 오히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우리가 이상해요. 우리 인간은 그런 존재인데, 원래 인간은 없어지라고 만든 존재인데 마치 아닌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연습들을 해온 겁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잠자는 자와 죽은 자를 같은 것으로 쳐주는 겁니다. 잠자는 자여, 라고 할 때 하나의 이름, 하나의 개인이 수립되어 있다는 것은 반칙이라는 겁니다. 다 같이 너도 반칙, 나도 반칙을 하니까 우리는 이것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자신을 살아 있는 어떤 특정인으로 설립을 하고, 성립하려고 한다면 여기에 뭐가 필요하냐 하면, 남들과의 관계와 그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내가 충족시키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 목사가 있지요. 목사가 등장하면 그 앞에 ‘나’가 붙어요. ‘나는 목사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목사다워야 한다.’ 여러분 가정에 가면 시동생이 있지요. 형수님이 와서 ‘당신은 나의 시동생’이라고 할 때에 시동생이라는 소리 듣자마자 형수와 시동생 그 관계 속에서 시동생답게 해야 되고, 시누이는 시누이답게 해야 되고, 올케는 올케답게 해야 되는 겁니다.

모든 이 세상관계답게, 나에게 그런 호칭과 할당된 신분의 자리, 나의 육적인 자리에 합당하게 나는 있어줄 때 그 나는 형수라고 불러줬으니까 형수로서 살아 있고, 목사라고 불러줬으니까 목사로서 살아 있고, 교회에서 장로나 집사로서 불러줬으니 장로나 집사로서 나는 살아 있다, 그 호칭과 명칭과 주어진 신분이 살아 있기 위해서 나는 거기에 맞춰서 살아 있는 것이 맞다,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잠자는 자여, 죽은 자여, 할 때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지요. 누가 목사로 불러주고, 장로집사라고 불러주는 것, 형수, 시누이, 올케, 여보, 당신, 남편, 아내, 자식, 아버지, 그걸 완전히 깡그리 무시해버리라는 겁니다. 전부 다 죽은 자니까.

죽은 자에게 무슨 신분이 필요하고 무슨 호칭이 필요합니까? 당신은 내 남편이고, 내 아내고, 하는데 이미 죽은 자들끼리는 호칭 자체가 무의미한 거예요. 주님께서 뜻하는 것은 ‘서로 없는 사람처럼 살아라’ 그 말입니다. 관계를 연상하는 것은 살아 있는 내가 집어넣는 거예요.

주님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지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누이와 올케 사이다, 하는 그런 관계는 아주 개무시해버리라는 그 말입니다. 개나 줘버리라는 말이지요.

죽고 나면 없어질 의미를 왜 자꾸 끌어 모으고 그걸 낙엽처럼 만들어내느냐, 그 말입니다. 왜 그렇게 만들어내요?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해 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잖아요. 그것은 오늘 본문에 함축되어 있는 마귀가 인간들로 하여금 그렇게 만든 거예요.

‘너는 살아있는 거야.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주님의 말씀 믿지마. 나만 믿어. 너를 산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 악마밖에 없으니까, 악마는 악마라고 안하지요, 나밖에 없으니까 너는 살아있는 거야. 누가 뭐래도 너는 살아있는 거야. 살아있으니까 너는 더 살아야 돼. 사는 것이 당연한 거야. 여기에는 토 달 필요도 없어. 이것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합당한 이야기야.’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우리는 악마로부터 그런 독촉을 받았고 훈련을 받은 거예요.

‘네게 주어진 신분답게, 목사면 목사답게 행동해.’라고 누가 그렇게 촉구하느냐 하면 악마가 그렇게 촉구하는 거예요. 여러분, 빚 독촉 한번 받아봤습니까? 저는 평생에 그런 독촉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가만 생각하니 기분이 좋네요. 그런데 만약에 사채업자에게 쫓긴다고 한다면 정말 그것은 힘들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복음을 모를 때는 독촉 받았습니다. 누구한테? ‘네가 성도답게 살아야지’라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마치 빚 받으러 오는 것처럼 계속해서 ‘네가 그렇게 해서 성도다워? 네가 그렇게 해서 집사다워? 네가 그래도 교인다운거야?’ 하고 뭔가 주님이 나에게 촉구하고 독촉한다고 생각을 했었지요. 복음을 모를 때는, 나 위주로 생각했을 때는 그렇게 했지요.

나중에 복음을 알고 보니까 주님께서는 빚 독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독촉을 한 거예요. 마귀가 정죄를 한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약점을 잡는 것은 마귀입니다. 이제 말한다. 주님은 우리의 약점을 잡을 생각도 없고 잡지도 않습니다.

지난여름에 네가 한 일을 안다. 이것은 악마가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악마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내가 원하는 나다움을 유지하려고 하다 보니 집나간 일곱 귀신이 다 들어오는 거예요. 온 귀신들이 다 달라붙어요. ‘너 그래가지고는 구원 못받는다.’ 맨날 구원파에요. 내 구원파. 맨날 내 구원만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구원받습니까?’ 이런 식으로.

마치 우리가 죽어 있으면서도 산자의 행세를 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할 때 여기에 가장 기본적으로 들어 있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은, 이 어두움 속에서는……, 잠자는 자의 세계가 어두움이라는 것이 그 앞에 죽 나오거든요.

어두움의 세계, 잠자는 자의 세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우리는 혼자 호들갑을 다 떨어요. 광화문에서 태극기를 흔드느냐 마느냐, 조국이 물러나면 정권이 바뀌겠느냐, 북한의 핵이 어떻고, 주한미군 방위비가 어떻고, 온천지가 호들갑의 파티에요. 호들갑을 떨고 있다고요.

주님 보시기에는 잠자는 자들이거든요. 이게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인데 거대한 매장지에 집단으로 다 묻혀 있기 때문에 위에서 보면, 시멘트 발라놓은 위에서 보게 되면 그냥 전부 다 잠자는 자에요. 주님이 인간 보는 관점은 아주 간단해요. 아주 고요하게 보십니다.

‘참, 이런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을 거야.’ 호들갑을 떨면서 혼자 머리 싸매고 고민을 하는데 주님은 이렇게 합니다. 어깨 두드리면서 “너 무슨 일이 있어? 무슨 일이 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깥에서 보면 고요합니다. 왜 그런가? 너희들은 잠자는 자, 모두가 잠자는 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정인이 잠자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잠자고 있는 입장에서, 여러분이 자식들이 잠자면서 잠꼬대 할 수도 있고 꿈을 꿀 수도 있어요. 꿈속에서도 보면 아주 요란스러워요. 꿈속에서 보면, 로봇 태권v의 대결, 우주인, 외계인들과 싸운다 하지만 그 애가 잠자면서 외계인과 싸울 동안에 아빠 엄마가 그 애 보면서 “이불을 다 차냈네.” 하면서 그냥 이불만 덮어줘요.

왜? 잠자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오늘 본문이 이해가 안되십니까? 인생 자체가 꿈속이라는 겁니다, 꿈. dream, 그냥 드림이에요, 드림, 이게 꿈이라니까요. 낙엽이 한 무더기 떨어질 수도 있고, 낙엽이 물방울 맞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어디까지나 우리 죽으면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아닙니까? 낙엽이 낙엽이지 예쁜 낙엽, 참한 낙엽, 좀 얼굴에 손댄 낙엽,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잠자는 낙엽1, 낙엽2, 마찬가지지요. 나경원 낙엽, 조국 낙엽, 낙엽들이에요. 김정은이 낙엽. 낙엽이 낙엽보고 발발발 떨고, 낙엽이 낙엽보고 두려워하고, 나 사는 연습에 지장된다고 그런 짓 하고 있어요. 뭘 사는 연습을 해요. 그저 연습이겠지, 어차피 죽었으니까.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이 말씀 하는 것은 처음부터 다시, 새로 다시 하라는 거예요. 시작이 잘못되었어요. 시작이 나부터, 인간들이 나 개인부터 출발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성경은 주님부터 출발해야 돼요. 주님부터 출발해버리면, 주님께서 무덤에 가셨거든요. 나중에 빈무덤 됩니다. 무덤에 가셨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무덤에 있으면 우리보고 무덤 속에 들어오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무덤 속에 안 들어가고 무덤 속을 박물관 유물 관람하듯이 “여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장소고요.” 이런 식으로 빙 둘러보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무덤 속으로 들어오라고 하는데.

어렵게 해서 이렇습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나라” 이 말은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죽은 자는 이 말을 못알아들어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이 말은 원조가 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무덤 속의 예수님 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은모든 말씀을 다 이뤄서 그걸 현실화시키는 분이기 때문에.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하는 이것은 죽은 자는 빼놓고 요단강에서 성령 받으신 예수님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구원에 있어서 성령이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성령 받은 자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통로가 마련되어서 아버지가 하는 모든 지시와 명령이 그대로 아들에게 전달되는 거예요.

창세기 1장에,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는 그 말은 그 당시에 하나님말씀과 피조세계에는 연결통로가 있었던 거예요. 성신이 함께 있기 때문에. 창세기 1장에 모든 피조세계에 성신이 함께 있다고 되어 있어요. 지금은 성령이 함께 있고.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잠자고 있는 사람이 듣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 “잠자는 자여”, ‘너는 잠들어 있다, 죽어 있다. 하지만 이 아버지가 너를 살리면 살린다.’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약속, 언약, 창세전에 이미 사전에 다 계약이 되어 있어요. 약속대로 주님은 잔을 마시고 죽어 있어야 돼요.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 자기능력으로 우지직, 터미네이터 태어나듯이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성령이 임하여서 죽은 예수님이 살아났어요. 이것이 로마서 8장 1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죽은 예수를 살리시리라. 아버지가 살렸다는 말이지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게 원형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의 원형이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살리려면 예수님은 어디에 가계셔야 되는가? 무덤 속에 가 있어야 되지요. 무덤 속에 있어야 나중에 그 무덤이 빈무덤 되는 겁니다. 로켓을 올리려면 제주도에서는 못올려요. 어디서 올려야 되느냐 하면, 미국 휴스턴의 나사본부, 우주항공센터 발사대에 가야 되듯이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면, 십자가라는 발사대에 들어가야 돼요.

그래서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바울은 ‘어찌하든지 나는 십자가를 향하여 간다.’ 어찌하든지 십자가를 향하여. 다시 말해서 내가 아무리 살아있는 흉내를 내고 연출을 해도 내가 살아 있다는 연출을 하고 흉내를 낸다는 그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는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의 티를 내는 것이다. 이것을 알게 하는 자리,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먼저 가 계셨던 무덤입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그 무덤을 성령께서 현장에서 살려내는 거예요.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늘나라가 어디 있느냐 하면, 성령이 임한 곳이 하늘나라에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으신 그 무덤이 우리한테 살아났을 때 그게 바로 하늘나라의 출입구가 되는 겁니다.

살아있다는 이 말을 간단하게 정리하게 되면, 인간이 모든 존재는 죽은 존재에요. 그러면 이 죽은 존재에서 살았다고 할 때는 존재를 가지고 너는 살았다고 하면 안되고 사건이 너를 포크레인을 가지고 집었다. 이렇게 사건 속에 있을 때, 십자가사건 속에 있을 때 그 사람은 산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건이라는 말은 그 현장에 가면 그 사건은 이미 종결되고 없어져요. 그래서 사건은 특징이 뭐냐? 존재가 그 사건을 소유하거나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5년 전에 어느 기도원에서 은혜를 받았다. 그러면 5년 전의 그 기도원에 가 보세요. 은혜가 어디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없어요. 5년 전에 그 기도원에서 은혜를 받았는데 다시 가서는 ‘에이, 은혜도 못받았네.’ 했는데 집에 돌아와서 은혜를 받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하는 그 사건이라 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 어떤 사람은 설거지하다가 은혜 받은 사람이 있고, 차타고 가다가 은혜 받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룸살롱에서……, 룸살롱에서 은혜 받는 사람은 별로 없겠다, 영화관에서 은혜 받는 사람도 있고요. 사건은 그냥 덮치는 거예요.

덮치게 되면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누가 이야기하는 내 신분과 내 존재를 주려하는 이 기쁨이 새로운 그 기쁨 앞에서 빛을 잃어버립니다. 시시해져버려요. 나라는 그 자체가 시시해져 버리는 겁니다. 나라는 그 자체가 시시해지니까, 수능을 잘 쳤나 못쳤나, 한 달 수입이, 혹은 연금이 줄어들면 어쩌나, 나 자체가 시시해지니까 그 다음에는 나 자신을 정립하기 위해서 붙들어 매던 모든 일들이 전부 다 시시한 일이에요.

우리 딸이 세월호 탔다가 죽었다, 시시한 일.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아직도 그 사람들 텐트 치고 3년 동안 버티고 있다, 데모를 해야 될까, 말까, 하는 그것도 다, 다 시시한 일. 드라마 보면서, 까불이가 잡혔단다, 동백이 이제 살았다, 하는 그것도 다 시시한 일. 민주당이 어떠니, 한국당이 어떠니, 그것도 다 시시한 일.

그런 기쁨은 사건에 포집된 그 기쁨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기쁨을 뭐라고 하느냐? 그걸 빛이라고 이야기해요. 빛, 그리스도의 빛이 너를 비취리라. 처음으로 돌아가자. 최초의 빛, 네가 없을 때의 그 처음의 빛 앞에 서라. 그러면 이 세상 돌아가는 이 모든 시간과 공간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호들갑에 불과한 거예요.

부질없는 근심과 걱정으로 그동안 악마가 풀어놓은 도사견 일곱 마리에 쫓기고 다녔던 겁니다. 네가 목사다우려면 이렇게 되어야 해, 장로가 장로다우려면 이렇게 되어야 해, 도사견 있잖아요. 입마개도 하지 않은 도사견이 막 따라오는 거예요. 평생을 두고.

도사견이 따라오니까 1월 1일, 신년예배 드리면서 ‘올해는 잘할게요.’ 뒤에서는 으르렁, 하고 도사견 일곱 마리가 따라오고. ‘올해만큼은 교회 안빠지고 다니겠습니다.’ 이러고 있다고요. 귀신대장 목사는 그걸 지켜보고 있고요.

이처럼 십자가 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새생명이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나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내가 안다.”고 할 때의 그 “나는”이라는 이것은 성령 받지 못했을 때나 나오는, 내가 주어가 되는 상태고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안다고 했을 때의 나, 살아있는 나는 그냥 흉내만 낼 뿐이고 모방만 할 뿐이지 이런 나는 느끼지를 못합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믿음 안에서 산다고 할 때 그 믿음의 주인공이 있을 텐데 그 믿음의 주인공은 죽기 전의 사도바울이냐, 아니면 죽고 난 뒤에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냐, 하는 문제가 생겨요.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라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인간은 죽었지만 성령으로 다시 살았다, 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이것은 잠시 머리 굴린 것 밖에 안돼요. ‘내가 죽은 척을 해야지. 성령 받으면 내가 다시 사니까.’ 전에 있는 나와 후에 있는 나가 같은 나가 되어버린다는 말이지요.

그걸 가지고 동질성이라고 하는데 그 동질성은 주께서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이 문제를 저는 수련회에서 이렇게 강의했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에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했을 때 제가 뭐라고 설명했느냐?

“마리아가 처녀로서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우리가 마리아가 되어서 예수님을 낳아야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했다고요. 서울에 계신 어떤 분이 그 내용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고 해서 답변을 이렇게 해드렸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엄마가 먼저 있고 자식이 나중에 있어요. 아빠가 먼저 있고 자식이 나중에 있어요. 이것이 존재가 존재를 이어가는 방식입니다. 그것뿐이에요. 그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은 없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했기 때문에.

창세기 5장에도, 아담이 누굴 낳고, 누굴 낳고, 계속해서 낳고, 낳고, 나오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주께서 너희들의 선조가 된다고 이야기했어요. 자기 뒤에 나타날 자기의 몇 대 손의 후손인데 다윗이 자기의 후손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 나의 주시라고 할 때에 주님께서 바리새인보고 이 시간의 역전행위에 대해서 처음으로 질문한 대목이 그 대목이에요.

어떻게 후손이 너의 선조가 되는지 그 관계를 설명해 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빛의 세계에서는, 언약적관계에서는 예수님이 먼저 설정되어 있고요, 출발을 나부터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나온다면 그 예수님이 먼저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낳아야 하는 거예요. 먼저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따라서 우리가 마리아가 된다는 말은,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운 성도가 만들어졌음을 우리가 증명하는 작업 속에 우리가 참여되고 부름을 받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간단히 말해서 내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는, 주님이 나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조치에 의해서 태어났다는 그 말이에요.

그러면 태어나야 되거든요. 예수님에 의해서 우리가 태어나야 된다는 말이지요. 태어나려면 인간들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창세기 19장 34, 3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19금, 그보다 더한 25금이 되어서 애들은 잠시 귀를 막으시기 바랍니다.

“이튿날에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이 밤에도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강제성이고 억지성이지요. 강제로 자식을 번성하겠다는 겁니다. 이걸 보고 우리는 두 딸을 욕하지요. 이 딸들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배워먹은 것이 그것밖에 안되느냐고 욕을 하겠지만 그렇게 욕하는 사람들보고 “자식 없는 상태에서 자식을 낳기 위한 대책을 내보라.”

아버지와 딸이 아니고 그냥 암컷과 수컷으로 조치가 되는 거예요. 내 자식 만들기 위해서. 왜? 출발점이 나니까. 내가 나를 닮은 자식, 나의 자식, 나의 불멸성, 나의 영원성, 나는 이것 포기 못한다. 나는 자식에게 dna를 전수함으로서 내가 죽더라도 자식이 살아 있으면 나는 부활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육적의도를 우리가 부정 못합니다. 이게 성경에 나온다고요. 이걸 단칼에 끊는 것이 뭐냐? “네가 그렇게 네 후손을 보고 싶고 자식을 보고 싶어?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한다.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옛날에 대구 안지랭이, 애 못낳는 여자들이 거기에 빌러 많이 갔어요. 안지랭이가 선지국만 파는 동네가 아닙니다. 선지국으로 유명한 동네인데 거기 가서 아들낳게 해달라고 빈다고요. 심지어 “지금 내 딸이 아기를 못낳는다 하더라도 주님은 살아계시니까 주의 기적으로서, 능력으로서, 내가 주님 앞에 얼마나 많은 헌신을 하는 것을 보셨으면 그저 내 소원하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저 아들 하나만 주시면 더는 소원이 없습니다.” 간절히 빕니다. 여기에 모든 종교적인 노력을 다 기울이지요.

만약에 천사가 와서 왜 그런 기도를 하느냐고 물으면 “내 자식을 낳고 싶습니다.” “왜 네 자식이 필요한데?” “내가 그냥 죽으면 안되잖아요. 내가 그냥 죽으면 끝이잖아요.” “네가 죽으면 끝이 아니어야 하는 이유를 대봐라.” 없어요. 그게 없습니다.

악마가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 예수님만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거부하기위해서 계속 인간을 부추겨 온 겁니다. “예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네가 중요한 거야. 이 등신아 정신 차려. 예수님보다 하나님보다 네가 우선이야.” 그걸 얼마나 우리 내부에서, 우리 육적인 내부가 얼마나 우리에게 호소를 해왔었습니까? 평생을 통해서.

그런데 오늘 본문은 뭐냐? “이 죽은자여, 이 잠자는 자여.” 단칼에 끊어버립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 무슨 뜻이냐? 애 달라고 하지 말아라. 애는 누가 지정하고 누가 만드느냐? 애 만드는 소관은 주님소관입니다. 주님이 만들어줘야 영생이고 천국백성이에요. 그냥 애는 아니에요.

인간들이 자기소망을 얻기 위해서 2천년 이상 종교를 만들어 놓고 장엄한 미사를 드리면서 “로물루스 도미노스……” 이 음악 모르지요? 라틴어 노래입니다. 악마하고 싸울 때 나오는 배경음악이에요. 이 라틴어 음악이 나오기만 하면 악마가 막 물러가는 느낌이에요. 한 번 더 해볼까요? “로물루스 도미노스, 빰빠밤, 레무스 도미노스……”

갑자기 이 소리 듣고 악마가 막 쪼그라드는 것 같아요. 그 라틴어 음악이 성당에서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겁니다. 기분상, 기분학상 이상하게 하나님의 성령으로 한바탕 덮어 쓰인 것 같아요. 그런데 나는 삶속에 있는 나잖아요. 이미 죽음 속의 나가 아니고. 삶속의 나. 내가 나를 기억하고 내가 예상한 나다움을 놓치지 않고, 나다움에 흡족하게 만족하는, 그래서 나에게 기쁨이 되는 그런 나로 재탄생하고 싶어서 신의 이름, 예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교회 와서, 새벽기도회에 엎드려서.

완전히 귀신의 전당이에요. 아무 일이 없는데 혼자서 호들갑은 온 호들갑을 다 떨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 35절에서 41절을 길어도 읽어보겠습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이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거예요.

36절에,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믿을 수가 없지요. 죽은자에게서는 믿음이 안나옵니다. 죽은 자에게서는 호들갑만 나오지 믿음이 안나와요. 걱정근심만 나오지 믿음이 안나온다고요.

믿음이라는 것은 기쁨인데 그 기쁨 앞에서 나의 모든 호들갑도 고요함, 정숙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그것이 믿음이거든요. ‘무슨 일이 있어?’ 낙엽에게 낙엽일이 일어나지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냥 가을되고 겨울 되면 날라 가면 그만이지.

주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 말고는 따라오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통곡하는 사람들 다 내 보냅니다. 그리고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이가 잔다고. 오늘 본문과 똑같아요. “잠자는 자여” 로물로스 도미노스, 이런 배경음악도 없어요. 그냥 평범해요. 평범하게 이야기합니다. “얘는 자고 있어.”

죽은 자를 두고 왜 자고 있다고 하느냐 하면, 주님이 잠자는 자를 깨우러 오신 분이고 예수님이 곧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앞당겨서 주위 사람들에게 일어날 일을 전도하시는 거예요. 너희들이 생각하는 너와 내가 생각하는 너희들이, 이 세상이 다르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비웃지요. 비웃거나 말거나 40, 41절에 “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자 이 대목에서 소녀가 한 일은 무엇일까요? 말을 달리하겠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한평생 살면서 한 게 무엇일까요? 아무 일도 없는 그냥 죽은 일을 하고 죽은 티, 잠자는 티를 내면서 여기 또 하루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천당갈까, 하는 걱정근심은요, 악마가 우리에게 그런 걱정근심을 주는 거예요.

그럴 자격도 없는 피조물이 왜 그런 근심을 합니까? 모든 것이 계약대로, 모든 것이 주님의 약속대로 진행될 뿐이에요. 하세요, 뭐든지 하세요. 장사를 하든, 치킨집을 하든, 노래방을 하든지 뭐든지 하세요. 하시되 그 자체가 무의미하고 그냥 해보는 짓이라고 하세요. 위시리스트. 죽기 전에 해보는 일중에서 노래방도 해보고, 전기도 고쳐 봤다가, 문도 한 번 고쳐봤다가……, 그냥 해봐요. 수능도 쳐봤다가……, 그냥 해보라니까요.

이혼도 해봤다가, 결혼도 해봤다가, 그냥 해보라니까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암에 걸려서 죽는 것도 해보고. 어차피 그것도 잠자는 일의 일종이니까. 우리는 주님의 박자와 음정도 전혀 모르고 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창녕군에 가면 이방면이 있는데 산토끼기념비가 있어요. 저도 봤어요. 지방방송국에서 연세가 90넘은 할머니에게 산토끼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어요. 그 할머니를 비롯해서 그 고장 사람들이 산토끼의 본고장인 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니까.

“산토끼 토끼야 어딜 날아가느냐” 이런 식으로 불렀다는 말이지요. 처음에는 기자가 듣기에 이상하게 맞는 것 같아. 가만 보니 아니에요. “산토끼 토끼야. 어데를 가느냐?” 이래야 맞는 건데 가사하고 가락이 전혀 맞지를 않아요.

우리는 주님이 만들었습니다. 주님은 약속대로 언약을 위해서 만들어놨는데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악마에게 배운 노래여서 그 가락이 갑자기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라 오너라”가 된 거예요. 산토끼의 곡조가 나비야 곡조가 된 거예요.

우리는 주제파악도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님께 일어났던 그것이 너희에게 반복될 것이다.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성령께서 그렇게 할 때 만약 내가 살아있다고 한다면 그 말을 못알아 듣습니다. 자기 일에 너무 몰두하고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야 된다는 그것에 관심이 있다 보니까 “네가 죽은 자인데 내 피로 영생 얻는거야.” 하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듣고 그게 무슨 기쁨인지도 못알아 들어요.

그런데 성령께서는 깨웁니다. 제가 다시 질문할게요. 아까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한 게 뭐가 있습니까? 한 게 없지요. 한 게 없이 영생 얻었습니다. 한 게 없이 구원받은 겁니다. 소녀가 죽어 있으면서 고민을 막 했습니까? ‘아, 지금쯤 예수님 오실 때가 되었는데. 아, 예수님이 내 손잡아 줄 때가 되었는데. 손을 이렇게 내밀고 죽어 있을까?’ 이런 걱정했습니까?

없어요. 그냥 주님이 와서 “달리다 쿰! 소녀야 일어나라. 내가 명령한다, 내가! 내가 주의 자리에서, 하나님 자리에서 명령한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더라, 하는 것처럼 사건으로 그냥 덮치는 거예요. 성도되고 싶은 사전준비 일체 없습니다. 그냥 어느 날 성도가 된 겁니다. 성도가 살아난 것이 아니고 성도라는 그 자체가, 성도라는 신분자체가 살아 있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성도가 살아있다 보니까 성도로서 부르심을 받은 거예요.

성도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는데 성도될 수밖에 없는 것은 주님의 자기숙제였다는 말입니다. 자기과제였어요. 아버지 뜻을 이루는 자기업무였어요. 주의업무에 휘말려든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와 성도의 만남이라는 것은 간단하지요. ‘당신도 받았어요?’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나나 당신이나 아무것도 아닌 것’

“조국이야기니 뭐니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것 알지요?” “알지요. 그런데 그렇게 시끄럽네요.” 정치이야기도할 수 있고, 경제이야기도 할 수 있고, 어떤 이야기도 다 가능합니다. 드라마부터 해서 그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그러면 성도가 뭡니까? 성도란 화투패 중에서 새로운 패가 들어오면 기존의 패를 내보냅니다. 던지게 되면 그동안 나갔던 패가 어떤 패냐? 내가 산사람 만들기 위해서 아등바등 애를 쓰면서 노력했던 그 모든 것이 다 낙엽 따라 헛된 것, 이것도 헛된 것이고 이 광땡잡은 이것도 헛된 것이고…….

이렇게 그 사람 말 가운데서 “이게 다 부질없는 것들입니다” 하고 빼내서 뿌려지는 것들을 보면서, 아, 나는 성령을 받기 전에 이것가지고 나다움을 유지하려고 악마에게 속아왔다는 사실을 증거물로 내세우는 겁니다. 형수가 형수다워야 된다고 했고, 그 집의 며느리가 며느리다워야 된다고 했고, 그런 것들도 이제는 다 부질없는 것, 세상살이 부질없는 것, 전부 다 소용없는 것,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앞에서 아무것도 나다움이 아니고 주님다움이 성도라는 파이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13) 또는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14)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 안에 살아있음을 그런 식으로 보이는 겁니다. 빛 앞에서는 모든 긴장도 풀리게 됩니다. 언젠가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또 다시 말씀드립니다. 정신 차리지 마시고 정신 줄 놓고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신줄 놓고 살아도 되는데 왜 우리가 바짝 긴장하고 정신차리고 살려고 하는지, 그 살고자 하는 것이 욕심이고, 악마의 표적이고, 악마의 노리개감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버리게 하여 주시고, 우리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다 배설물이고 악마의 시험거리였다는 것을 우리가 자랑스럽게 감사하면서 쏟아놓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50강-엡 5장 14절(일어나라)191117-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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