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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2 08:10:03 조회 : 266         
20210510b 부산강의 : [시편]38(23편)-양의 출처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20210510b 부산강의 : [시편]38(23편)-양의 출처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양보 없는 충돌했지요. 양보 없는 충돌, 서로 두 지평이 양보 없어요. 갑자기 인간의 얼굴만 보이다가 키가 얼마 몸무게 그것만 보이다가 보이지 않는 지평선, 영역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벌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신앙이란 것은, 주님은 주님의 상처를 품고 있는 그러한 지평, 지층 또는 거대한 판때기, 판이라면 여기는 상처 있음, 이건 뭐냐 하면 상처 없기를 바라는 그러한 지평과 지층.

상처 없는 걸 세상에서는 간단히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행복 또는 행복 지향적이다. 몸 편하고 배부르고 그거거든요, 이게. 몸 편하고 배부르고, 몸 아픈데 없고 배부르고, 건강하고 행복하고. 건빵 아니고 건행. 행복 지향적이죠. 제발 나를 그냥 두세요. 나한테 시비 걸지 말고. 독립적이죠. 독립적이고 자립적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1장에 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짐승들이 나와요. 소와 나귀 나오죠. 여러분 안 찾아봐도 아시겠지만 찾아 읽겠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1장 4절에. 그 앞에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주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먼저 발췌해서 먼저 생각을 해서 자기 백성을 만들어놨는데 이 이스라엘은 소나 나귀보다 더 못하다 이 말입니다. 뭘 잃어버렸어요? 주인을 잃어버렸어요. 종속되고 의지해야 되거든요.

집에 개를 키우는 사람의 보람이라는 것은 그 개가 철저하게 주인에게 종속되는 그러한 보람으로 키웁니다. 주인이 개 키울 때는 개 속에서 자기가 친화적인 것을 발견하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개를 키워요. 그러니까 더러운 똥도 치워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요소가 발견된다는 그걸 기대하면서 개를 키웁니다. “너는 왜 이렇게 나한테 순종하고 순해. 순해빠졌어.” 이 말은 뭐냐? 나 계속 너 키우고 싶다 그런 것이거든요. 나 네 주인이고 싶다 이거잖아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랑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것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 책임지겠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면서 악마와 결탁해서 독립적이고 자립적이기 때문에 결국에 가서는 배신해버립니다. 왜냐하면 주인은 2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늘에 태양이 둘이 될 수 없잖아요. 이걸 어제 낮 설교에서는 나는 어떤 경우라도 남이 될 수 없는 거예요. 너무나 당연하고 간단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구원될 수 없는 겁니다. 이 나는 구원의 대상이 아니에요. 내가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성령을, 믿음을 선물로 줄 때는 노림수가 있어요. 그동안 이유가 순종이 안 되고 예속된 인간을 뒤에서 악마가 그런 식으로 시켰지요. 이걸 부셔버려야 철저하게 하나님의 철저한 종이 됩니다. 순응적이 되지요. 이 성질머리를 주님께서는 가만두지 않습니다. 양 같으면 목자가 증거 해야 될 양의 역할인데 양이 지 잘난 양을 증거 해버리면 이것은 전혀 주께서 원한 양이 아니지요.

그래서 교회에서나 어디에서나 뭐가 문제냐 하면 양과 양이 만나는 게 문제에요. 양과 양이 만나게 되면 서로가 서로한테 기댈 생각해요. 기대게 되면 그 중량감 때문에 피곤해요. 덥다, 좀 떨어져라. 그런데 자꾸 뭔가 괜찮다고 기대고 싶어. 떨어져라 해도 자꾸 기대고 싶어요. 힘들어요. 양과 양이 만나면.

그때는 중간에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목자가 중재를 해야 돼요. 목자가 중재해서 반갑다 친구야, 되려면 항상 목자가 개입해야 돼요. 둘 다 똑같은 인간끼리 뭘, 이게 돼야 된다고. 가정 가운데 가장 행복한 가정은 뭐냐? 둘 다 성령 받은 가족, 드문 경우지만 진짜 생각만 해도 짜릿합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둘 다 못났음을 자랑하는 가족, 둘 다 서로를 보면서 당신은 나에게 과분하다는 것을 행동, 태도, 말 전부 다 온몸을 다하여 난 당신의 영원한 종이 되고 싶어, 딸랑딸랑.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 목자가 개입할 때 상대에게 자기가 투자한 투자액을 찾지 않는 사람, 서로에게. 내가 너한테 해준 그 공적을 보상 안 받으려고 하는 그거에요.

숫자로 하면 둘 다 0제로가 되고 제로 사이에 1이 있다면 1의 완결성, 1의 최종성에 순응하고 거기에 순종하는 사람, 이 가정이 최고의 가정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봐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딴 게 아니고 서로의 종이 되라, 서로의 짐을 지라 그런 게 있거든요. 그럴 경우에는 뭐냐 하면 더 이상 내가 나라고 안 하겠다고 포기하는 거예요. 두 분 그렇게 사시지요?

당신 앞에서 나를 지워버리는 거예요. 이거는 김수희가 이미 이야기했어요.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그리 작아지는가” 이미 우리나라도 많이 전했잖아요, 그 노래가. 충돌이 있을 수가 없어요. 작다는데 큰 것과 골리앗과 싸워서 뭐합니까. 내가 알아서 기는데, 졌다 했는데. 여자가 남편한테 잔소리하게 되면 남자가, “그 모습도 왜 그리 아름다워.” 이러면 끝난 문제에요. 아무 문제 될 게 없고 끝난 문제에요. “나 당신 같은 사람 쫓아낼 거야.” 하면 “그 쫓아내는 행위도 난 존경스러워.” 이렇게 이야기해버리면……

그런데 이것이 지식이 아니고 지식이 있더라도 실제로 자극이 되게 되면 실제로 건드리게 되면 잠자는 난 벌써 복음 알았기 때문에 나는 없다고 여겼던 그것이 건드리니까 발작을 일으킵니다. 갑자기 이렇게 벌벌 떨고 감히 내가 너한테 다이아반지 해줬는데 감히 지금 와서 벌벌, 가방 사줬는데 벌벌 떨어요. 발작을 일으켜요.

그걸 노이로제라 합니다. 신경 증세라 하는 것은 생각이 몸의 증세로 나타나는 것을 신경 증세라 해요. 정신분석학에선 그렇게 해요. 이건 본인이 어쩔 수 없어요. “여보, 식사하세요.” 평화로울 때는 그렇게 되잖아요. 발작을 일으키면, “여-보- 식사하세요.” 속으론 죽여 버릴까? 이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나는 비어있지만 빈자리를 주님이 야기한 주님이 밝혀낸 이 세상의 구조가, 양과 염소의 구조가 아무 것도 비어있는 내 안으로 사건화 되어서 내 안에 내용으로 채워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데요.

열왕기상 21장 1절에,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이스르엘에(이스라엘 약간 북쪽에 있는)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 왕 아합의 궁에서 가깝더니 아합이 나봇에게 일러 가로되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지금 나봇이 포도원이 있는데 포도원이 그 당시 아합 왕, 최고 권력자가 보기에는 그 포도원은, 포도원이라는 영토 있잖아요. 영토는 주인이 누구냐 하면 나봇으로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나봇 거라 하는 거예요. 그러나 나봇은 이 땅에 내가 실린 게 아니고 나는 종이고 여기 여호와가 여기에 살고 있다, 여호와의 기업에 여호와가 살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자기도 땅이 자기 땅이 아니니까 자기 땅 같으면 팔겠는데 자기 땅이 아닌 거예요. 하나님의 유산으로 기업으로 상속받은 거예요. 상속받았기 때문에 팔 수 없는 겁니다.

오늘날 이걸 성도 입장에서 하게 되면 너 예수 믿지 말고 교회 가지 말고 십자가 믿지 말고 나랑 산에 가자고 한다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불신자 남편을 여자는 한 몸으로 보지만 복음을 아는 성령 받은 성도는 아내는 자기 영토에 누가 마련해준 거예요? 주님께서 했기 때문에 자기도, “잠깐만 주님한테 물어보고 이야기할게.” 이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구원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에 숟가락 하나 얹은 것밖에 안 되니까 내 팔자, 내 운명이 내가 조성하고 내가 만들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나 불신자 입장에서는 자립적이고 자존적이기 때문에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 의지로 모든 것을 개선이 가능하다고 본 거예요. 이 불신자 남편이.

그러니까 불신자가 교회에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걸 내 결정에 의해서 된다는 거예요. 내가 믿고 안 믿고 내 마음이라는 거예요. 이 불신자 남편 이야기할 때 진짜 신자는 내가 천국 가고 지옥 가고 그게 내 마음대로 될 것 같으면 내 마음대로 하겠는데 나 천국 가고 싶습니다, 나 지옥 안 갈래요. 에이 천국도 따분하다 지옥 갈래. 이게 내가 결정할 문제 같으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게 내 손을 떠나버렸어요. 내 팔자, 내 운명 자체가 없어요. 영토와 영토의 충돌이거든요.

그러니까 아합 왕의 부인이 있지요. 이름이 이세벨입니다. 이름만 봐도 얼마나 미인인 걸 알잖아요. 이세벨라, 이세벨 이 이름치고 못 생긴 여자가 없어요. 내가 너무 편견이지만. 이세벨라 유명한 영화배우들 많이 있잖아요. 이세벨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이자. 지금 죽이면 포도원 가져올 수 있다. 죽이자. 죽였지요. 종은 죽였는데 주인은 못 죽인 거예요. 주인이 누굴 죽이느냐 하면 이세벨을 죽여 버립니다.

바로 이러한 순환구조, 엮여진 순환구조 그래서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종이 받은 상처를 주인이 보복해주는 이 순환구조의 세계가 오늘날 현실세계에요. 건들지 말아야 될 자를 건드린 거예요. 이 나봇이, “나와라. 나는 여호와와 함께 있다. 덤벼라.” 이러질 않았잖아요. 막 시민운동하고 우리끼리 연합해서 이 정권을 물리치자, 그런 것 안 했지요.

죽이겠다는 결정을 누가 했습니까? 아합과 이세벨이 했지요. 했는데 나봇은 그 결정마저도 누가 했다? 주께서 허락하신 걸로 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미 이 포도원 안에서 나봇은 여호와 앞에서 죽은 자에요. 죽음이 더 이상 협박용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이런 나봇의 죽음 사건이 성경개념에 나와 버리면 사람들은 그 대목을 침 발라서 빨리 넘겨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성경개념을 나의 존재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 차용을 해야 되는데 죽음 나오니까 이건 나중으로 미룹시다. 이건 믿을 좋을 때 믿을게요. 후딱 넘어가버리거든요. 성경에서 최종적인 것은 죽음입니다. 나머지 곁가지 소용없어요. 날 위해서 죽을 수 있는지 묻는 게 아니고요. 이미 너는 나를 위해서 죽은 존재로 보는 거예요.

우리 쪽에서 새로 결심할 게 남아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아무 것도 결심하지 마세요.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면 사건이 계속 주어질 겁니다. 그 사건이 나를 자극시켜서 분명히 나는 양이고 주님은 목자라고 알았는데 그 사건 오는 순간 그 다음에 뭐가 되느냐? 크게 쓰겠습니다.

“내가 나에게 상처를 주네.” 이게 인간으로 태어난 해답입니다. 내가 나에게 상처를 줘요. “이 쪼다야 한 평생 동안 뭐했냐. 남들은 인간처럼 사는데 네가 인간이야 짐승이야.” 내가 나를 핍박을 해요. 꼴 보기 싫어해요. 내 인생이 원망스러워요. 자기 인생 원망해놓고 혹시 주님께서 나무랄까 싶어서 주님한테 이야기는 아니고요, 내 인생.

이러면서 나오는 왜곡되고 조작된 고백이 뭐냐 하면, “나는 죄인입니다.” 제발 이런 소리하지 말라고 저는 제발 이런 소리하지 마세요. 이것 한다고 점수 더 받는 것 아니거든요. 이상하게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게 꼭 주님에게 압력 넣는 것 같아. 나 죄인인 줄 아니까 뒤에는 모기소리만큼, “제발 이것만은 이뤄주옵소서.” 내가 알아서 길 테니까 이것만 이뤄달라는 뭐 있어, 뭐 있다고. 이것 눈치 채야 돼요.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것 같아.

내가 나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육신의 몸을 우리는 범죄 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죽을 때까지 동거해야 됩니다. 나밖에 모르는 이 이기심과 동거해야 돼요. 그래서 남 탓할 수도 없어요. “인간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다.” 인생이 이렇습니다.

나는 생각 안 해야지. 그럴 필요 없어요. 인간은 생각하게끔 돼있어요. 인간이 생각하는 게 아니고 생각이 인간을 생각하게끔 유도하게 돼있습니다. 인생은 존재가 아니고 흐름이에요, 그냥. 바람 같은 거예요. 한시라도 인간은 멈출 수가 없어요. 뭘 해야 돼. 촌에 팔십구, 구십 가까이 된 어머니가 일하는 것 보고 용돈 줄 테니 일하지 말라 해도 일하지 않는 게 더 징역살이 같아요.

자식 눈치 보고 호미 하나 들고 가서 뭐라도 합니다. 하다가 두 바퀴 굴러서 엄마는 다리 부러져서 병원에 있고 자식들은 엄마가 원망스러워서 일하지 말라 했잖아요. 일 많이 해서 우리 공부 다 시켜놨으니까 호강하셔야지. 일 안 하려했는데 심심해서 나왔다 이렇게 두 바퀴 굴러서 다리 부러져 있고 그 다음부터 자식들은 반찬 해댄다고 고생 더하고. “아이고, 지겨워, 지겨워.”

그렇게 인간은 멈출 수가 없어요.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이 인간은 흐름이라는 것, 이미 인간은 사건에 말려든 거예요. 충돌사건. 하나는 뭐냐 하면 주님의 계획과 버티기에 나가는 악마의 고집, 이것이 충돌사건을 일으킵니다. 악마는 우리 인간을 통해서 계속해서 협박과 회유를 합니다. “네가 중요한 거야. 누구도 너를 대신할 수 없어. 주님이 너한테 밥 먹여줘?”

이것을 누가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내 속에 내가 이야기한다니까. 너 장로로서 20년 했고 교회 복음 안 뒤 50년 됐잖아. 그러니까 이제는 좀 쉬어. 이제는 예수 말고 딴 것 즐기라고 계속해서 나의 나다움을 고집하게 만들어요. 우리의 사명과 주님에 대한 역할, 영적인 싸움, 무기 다 그딴 것 생각하지 말고 말씀은 주님이 지키고 나는 놀기만 하라고 자꾸 압력을 가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계획은 뭐냐? 아까 멈추지 않지요. 그리고 멈추지 않는 것이 시편 95편 7절에 나옵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자, 우리보고 양 되라 했습니까, 백성 되라 했습니까? 아니지요.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어요, 누가 자기 계획을 중단 없이 펼쳐나가십니까? 주님이죠. 하나님이죠. 우릴 지으신 분이 주님이 우리를 그냥 양 되게 하고 백성 되게 하시는 거예요. 이걸 우리 안에서 멈춰지질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뭐냐 하면 실컷 당하세요. 악마한테 그런 회유를 받고 실컷 당하세요. 그 당하는 가운데서 이게 죽음이거든요. 심판이거든요. 실컷 당하고 난 뒤에 죽음 속에서 생명의 힘으로 사는 거예요. 생명의 힘을 발견하는 거예요. “아아, 이거는 내 일이 아니구나. 내가 나를 지탱하는, 유지할 수 있고 기도 빡세게 하고 금식한다고 뭐가 되는 게 아니구나.”

나는 포기하는 늘 막장 인생, 마지막 포기, 주님이여 그동안 사랑해준 것 고맙습니다만 저도 지쳤습니다. 저도 할 만큼 했는데 우리가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그럴 때 비추는 것이 뭐냐? 나는 죽음이요 주님은 생명이에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주님은 생명이 되고 나는 항구요. 나는 무능력자요 무능력자를 살리시는 주님만 찬양합니다. 일체 주님의 행동에 우리가 절대로 섞여서는 안 되죠. 섞여서는 안 되는 겁니다.

악마는 계속 살아 있어야 돼요. 그래야 계속 우릴 자극해야 될 기능을 해야 되니까. 주님의 지속적인 작업에서 주께서는 처음에 이야기한 양과 목자의 개념은 성경의 개념은 주님만 손댈 수 있지 우리는 손 못 대지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악마의 활동을 허락하심으로써 무슨 개념을 끄집어내느냐? 엉터리 목자 개념을 끄집어냅니다. 엉터리 목자가 있어줘야 그 다음에 양도 생기고 진짜 목자가 등장하거든요.

에스겔 34장 1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아예 이스라엘 목자란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경에 목자라는 개념이 있으니까 그들은 이스라엘 존재 자체를 견지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말씀에 입각해서 그 성경개념에 입각해서 목자 위치를 만든 거예요. 스스로 자기들에게 인간들끼리 직분과 지위를 만든 거예요.

이게 어렵지 않지요. 오늘날 교회가 그거 아닙니까. 목사는 목자로 바꾸지요. 이 교회는 그게 없지만 약간 큰 교회 고딕건물에 가면 무슨 실이 있습니까? 목양실이 있지요. 참 목양실에서 화투 치는가 모르겠어요. 침대 있는가. 목양실이 있어요. 여러분 목자도 없고 양도 없어요. 그거는 사건을 일으킬 때 목자, 양이 함께 동반되어 등장하는 거예요. 한시적입니다. 사건 수그러들면 목자, 양도 없어요.

뭐만 있는가? 에스겔 34장에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리 나오고 염소 나와요, 숫염소. 34장 17절,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양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의 사이와 수양과 숫염소의 사이에 심판하노라” 이스라엘을 화답해놓고 이스라엘이 얼마나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코스프레 하는지 조작하는지를 다 허락하시는 거예요. 그래야 악마의 세계가 이스라엘에 합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3절에 보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니까 이스라엘 엑기스가 유대나라에요. 유대나라가 집약하고 압축이 되니까 거기서 뭐로 확실해졌다? 뱀의 공동체에요. 악마의 크리스털, 악마의 정수, 엑기스, 핵심. 인삼 엑기스 있지요. 숟가락으로 퍼먹는 것. 악마의 농축액이 종교란 이름으로 국가란 이름으로 오늘날 교회란 이름으로 응축이 돼있습니다.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은 멈출 수 없는 주님께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렇게 악마가 악마 짓을 해줘야 결정적인 상처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여기 방금 유대나라는 뭐로 봅니까? 악마의 농축액이죠. 그러면 여기에 농축액에 대해서 농축액을 뚫고 이건 아니지, 라고 덤벼든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열두 제자 중에서 아무도 없지요. “누구야? 예수님을 그렇게 하다니.” 그렇게 나와 봤자 악마가 씩 웃습니다. “나, 너 알거든. 뭐 어디…”

그리고 주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 있지요. 주님한테 혜택 입은 사람들 있잖아요. 병 고침 받은 사람들, 혜택 있어도 결정적인 건 뭐냐 하면 실제로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느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제자들도 안 믿었으니까. 심지어 마리아 3인조 있지요. 야고보 어머니와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3인조도 부활을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안 믿었지요.

왜? 인간의 한계는 부활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 자체가 한계에요.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그 점을 우리가 잊지 마세요. 나는 인간이에요. 인간은 믿음도 없고 부활도 믿을 수 없는 게 인간임을 날마다 확인시켜주는 겁니다.

내가 나에게 상처를 줄 때 이 나라는 것은 예수님에게 나를 기존의 나가 개뿔도 모르는 나가 나를 계속 핍박하는 거예요. 인생 똑바로 살아. 네가 그렇게 허접스럽게 사니까 니 인생 니 꼬라지 그렇게 했잖아. 그때 그런 결정 안 했으면 니 안 망했어, 라고 내가 자꾸 과거를 들춰가면서 기도하면 만회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를 핍박하는 거예요. 남이 혼내주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혼내줘요. 실망스럽다고요. 네가 어릴 땐 안 그랬잖아, 이런 식으로.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것에 대해서 자기 한계를 모르고 새벽제단에 와서 성경책 품에 안고 와서 주여 손들고 옵니다, 하면 하나님께서 봐줍니까? “손 내려. 니 누구세요?” 내가 나를 핍박할 때 이 나가 나와 동일한 나거든요. 그런데 주님이 생각한 나는 이미 나라고 생각할 때 주님의 진짜 나는 여기서 벌써 떠나가 버렸어요. 이게 왜냐? 존재가 되기 때문에 사건은 날아가 버렸어요. 없어졌다고요.

내가 지적하는 나나 지적받은 나나 똑같은 존재에요. 이미 한물 간 똑같은 거예요. 과거의 내 기억 속에 있는 나에요. 그러면 나는 구원 못 받잖아. 백날 강의해도 무슨 소용 있습니까. 주께서 일하신다는 데 우리는 내가 일해야 현실이 된다는 그 생각은 이거는 믿음이 아니고 믿음에 돌파하지 못한 거예요. 우리는 돌파할 수 없는 육신이 된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원리 이야기했잖아요. 감사하면 성령의 일이고 공포스러우면 악령의 일이다. 이게 이렇게 증명돼요. 범사에 감사하면 이게 성령의 일이고 공포스러우면 이게 성령의 반대가 악령이니까 악령의 일이 되는 거예요. 주여, 아무 것도 무능자를 이렇게 구원해서 감사합니다. 카운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시계 벌써 5초 지났어요.

벌써 나는 뭐냐? 이쪽에서 이쪽으로 내려와 버렸어요. 감사합니다, 하니까 신자 맞지요, 라고 벌써 내려와 버렸어요. 자꾸 나는 내가 일한 것에만 기억하고 있어요. 내가 나를 근거만 기억하고 있다고요. 그것을 가지고 뭐냐 하면 이게 시험이라 하고요, 시험의 공간이 이 세상이고, 악마가 시험해요.

시험 받는 이유는 뭐냐 하면 악마와 한 통속되는 속성이 우리한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로 인하여 사망을 낳아요. 그러니 우리 욕심이 죽을 이유가 있기 위해서 우린 날마다 욕심쟁이 우후후 돼야 돼요. 날마다 욕심을 부릴 수밖에 없어요. 나 자신의 가치를 못 놓는 욕심, 이 길로 가고 우리는 이 길로 그냥 죽으러 가는 거예요. 브레이크도 없이 그냥 가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계속 성령의 사건으로 개입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나와 나 중첩된 현실, 산수에서 분모, 분자 하듯이 늘 중첩되게 보는 거예요. 이렇게 죄진 나는 그림자고 우리의 생명의 실체는 하늘에 앉으시고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죽었어요. 이 구조입니다.

이 구조가 주님 쪽에서 보면 이렇게 돼요. 주님은 머리가 되고 육신 되는 우리는 이 땅에 아직 더러운 땅에 발을 딛고 있고. 그러나 우리는 머리를 쳐다봐야지요. 나를 보지 말고. 주님이 당한 그 시련을 우리가 양이란 이유 때문에 같이 공히 당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일이 또 가짜 목자 이게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꼭 있어야 돼요. 필수적이에요. 왜? 예수님도 예수님의 활동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대사회를 뭐로 만들었습니까? 악마의 힘이 농축된 그 사회를 만들었잖아요. 우리가 양이라면 동일한 그 사회현실에 온몸으로 견뎌야 되고 견디기보다도 겪어야 돼요. 견딜 순 없고 그냥 겪어야 되죠. 그 체험을 겪어야 돼요. 늘 자기 부인이 되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계획에 보면, 자 봅시다. 집에서 개 키운다고 봅시다. 저는 아주 어릴 때 개를 키운 적이 있어요. 내가 키운 건 아니고 우리 집안에서 키운 적이 있는데 개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가장 마음에 드느냐 하면 개가 혓바닥으로 물을 핥아서 물을 먹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왜냐하면 헐떡거리면서 먹는 그 소리 있잖아요. 도저히 인간세계에선 나올 수 없는 너무나 맛있게 물을 저렇게 맛있게 먹는 존재는 처음 봤다. 철퍼덕철퍼덕 물 먹는 소리가 10미터에서도 다 들려. 그게 그렇게 보기 좋았어요. 왜? 주인의 자부심이 막 올라가. 너 내가 물 안 줬으면 죽을 뻔했어.

바로 양이 하는 행동에 대한 하나님에 찬양이 되는 경우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때가 언제냐 하면 허기질 때 오직 목자에게만 생각과 관심이 다 쏠렸을 때 따로 내가 악마를 이긴다고 설치지 않고 돈키호테처럼 미치지 않고 그냥 남이 뭐라던 간에 그냥 나는 한 마리의 개가 되어서 주님 주시는 사료나 물을 헐떡거리면서 맛있게 먹어줄 때 자식 입에 먹는 것 들어갈 때 부모가 그렇게 예쁜 거예요. 물론 그 자식도 어릴 때 자식이고. 커서는 그게 안 되지요.

허기질 때 말씀에 허기질 때 밤이나 낮이나 말씀으로 내가 시냇물을 찾는 사슴이 허기질 때 주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지요. 놀라운 사실은 이 개를 주님의 계획에 의해서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 개를 자기의 신부로 바꾼다는. 개는 개인데 주님은 이걸 사람 취급하는데 그냥 사람이 아니고 주님의 신랑의 신부로 바꾸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여자로 바꾸는 거예요. 여자는 스스로 책임질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남자가 다 책임집니다. 프러포즈 다 받아보셨지요. 당신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내가 알아서 다 할게. 당신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고 당신이 좋아하면 그것이 나의 유일한 남은 생애의 행복이다. 어디서 베껴서 프러포즈, 무릎 꿇고 이렇게 하지요. 나중에 얼마 안 가서 너 때문에 못 살겠다. 내 인생 네가 조져 놨다.

사람은 그야말로 무능합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빗어 봐도 말을 듣지 않아요. <그대와 영원히>라는 이문세 노래 가사에 나와요. 머리카락이 빗에 엉켜서 말을 듣지 않는 거예요. 전에는 삭삭 빗어졌는데. 이 신부가 될 때 여자입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주도권을 쥐면 안 돼요. 그래서 제가 뭘 하나 준비했어요. 뭘 준비했느냐 하면 노래 하나 준비했습니다.

제가 이 노래를 여러분 아시는 노래에요. 이 노래가 뭐냐 하면 <주만 바라볼찌라> 하는데 다른 사람 말고 [다윗과 요나단]이라는 밴드가 부른 노래에요. 제가 이 노래를 들은 이유는 여기서 여성의 코러스를 한 번 들어보세요. 이게 남자가 주도하지만 여자의 역할이 어떤 역할인지 얼마나 음악을 아름답게 만들었는지 들어보세요. 지금 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좀 더 들어봐야 돼요. 이 노래 약간 더 들어봅시다. 나올 때까지.

자, 이제부터 들어보세요. 우우우 있잖아요. 여자는 받쳐주는 거예요. 주님을 받쳐주는 거예요. 주인공 되면 안 돼요. 와와 있잖아요, 와와. 요거, 요거 중간에. 뒤에 깔아준다고요. 이게 배필자이거든요. 간주할 때 이야기하는데 이 뒷부분은 더 기가 막힙니다. 뭐냐 하면 그때 신랑, 신부 같이 불러요. 그대 희열을 느낍니다. 아아, 우리가 주께서 같은 급으로 사용하는구나. 이 귀한 노래를 여자와 같이 들어가는, 이제 나옵니다. 합창. 여자가 같이 나와요, 여자 파트너가. 다 같이 끝나요.

이게 주님의 계획이에요. 멈추지 않습니다. 멈출 수가 없어요, 성도는. “인자한 귀로써” 여자가 교체하면서 화음을 넣어줘요. 여기까지. 귀한 시간을 이렇게 빼앗아 미안합니다만 이것 해서 시간 때우려는 그런 노림수는 아니고요.

주께서 악마한테 속아서 자립적이고 독자적인 우리를 그냥 여자가 되는 게 아니에요. 뭘 거쳐야 돼요? 개 같은 종이 되게 하는 거예요. 종이 되게 하면서 우리는 물이나 철퍽철퍽 핥아먹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기본을 유지하게 만들어요. 그러면서도 뭐냐? 주님의 멈출 수 없는 지속적인 것을 해서 우리로 개 같은 여자를 자기의 여자로 만들어요, 신랑이. 그만큼 나도 너처럼 개였다는 것을 거쳐 가게 해요. 내가 죄인이었다는 것을.

내가 죄인으로서 주의 부활되어서 의인 되는 그 절차에 있던 모든 그 의, 그 의만 하나님께서는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일체 자립적이고 독자적인 존재에서 나온 의는 안 받습니다. 바로 이걸 위해서 그 당시 유대사회는 뭡니까? 악마의 힘의 농축이죠. 그 유대사회는 무슨 사회냐 하면 종교사회, 요새 같으면 교회사회에요. 종교국가. 종교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시겠지요. 30년, 40년 교회 다닌 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아시겠지요.

그 다니면서 얻었던 것은 뭐냐? 나 이 교회 장로다, 집사다, 목사다, 평신도다. 그러한 자긍심과 자의식, 주도권, 수동적이 아니고 자기가 주인인 양 행세하는 거예요. 이런 것을 철저하게 악마로부터 교육받고 양육 받도록 주께서 그렇게 허락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러한 시스템이나 종교마저도 어떻게 해야 돼요? 성령의 일은 뭐라고요, 마지막에?

성령의 일은 마지막에 뭐라 했습니까? 아까 악령과 성령의 차이점, 성령의 일은 뭐가 나온다고요? 감사하지요. 어떻게 감사하느냐 하면 항상 회고적으로 돌아보면서 감사가 되는 거예요. 내가 이 교회, 종교가 아니었으면 얼마나 개 같은 인간이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존재지요. 성경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액자 반듯하게 해서 집에 걸어놓고 마치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인 줄 착각했잖아요. 마귀가 만든 종교거든요.

어느 누가 자진해서 자기가 개 되려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인간에 마지막 남은 게 자존심밖에 없는데 자기 이름밖에 없거든요. 그걸 인간의 능력으로선 절대로 누구한테 양보할 수 없습니다. 챙길 것은 끝까지 자기 잘난 것만 챙기는 것이 인간이거든요. 바로 그런 자에게 목자가 우르르 달려들지요. 유명한 요한복음 10장. 요한복음 10장에서 양과 목자가 나와요.

그런데 그 목자가 뭡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그 목자가, 목자가 아니고 삯군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사람들은 궁금하지요. 삯군과 진짜 목자의 차이점은 이렇게 그 다음 질문 돼있지요. 차이점은 뭐냐 하면 바로 요한복음 10장 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목숨을 버리노라” 그러니까 죽음이죠, 죽음, 죽음이에요. 주님이여 뭐 건강해주고, 이게 아니고 그냥 죽는 거예요. 십자가 죽으심이에요. 죽는 것, 거기서 빠져나올 생각 말고, 알고 건너뛰고 이것 없어요. 그냥 영원히 계속해서 죽음 속에 죽음에서 죽음이 만남의 장소입니다. 제가 이렇게 죄 짓고, 이렇게 철딱서니 없고 은혜 줬지만 은혜도 모르고 또 세상사람 되었습니다.

“이리 와, 이리 와. 십자가에서 기다릴게.” 멀쩡하게 잘 된 착한 일 많이 한 선교사 한 그거 오지 말고 선교사고 뭐든 네 개라는 본성은 달라진 게 없어요. 그냥 여기 와. 다시 한 번 십자가 보게 되면 거기서 “아 주께서 날 구원했군요.”가 아니라 “나는 놀았고 주님만 일하셨군요.” 달랑 그것만 남아요. “주께서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군요. 나는 엉터리 일하지만 주께서 일하셨군요. 날마다 그 결과물을 내는군요.”

뭐라고?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는 결과물을 낳게 하시는 쉬지 않는 주님의 멈추지 않는 그 작업, 그것이 바로 주께서 구원이라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개념은 주께서 홀로 다 이루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거예요. 우릴 넣어준 거예요. 하나의 패밀리로. 신부로 넣어준 거예요. 우린 뭐 황공스럽지요. 뭐 면류관 쓴 것 던져버리고 이걸 제가 왜 씁니까? 시건방지게 제가 왜 씁니까. 죄인 중의 괴수가 이게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쓰셔야 되지요.

이 생활을 돌아가시고 난 뒤에 5초 후에 하지 마시고 이미 지금부터 하시는 겁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합니까? 그냥 성질대로 사시면 자극이 와요. 나는 착하다, 복음 안다, 나는 이래도 참아야지. 참자. 몇 번 참을까요? 용서해야지. 일곱 번 할까요? 일곱 번 안 되면 주께서 마흔아홉 번 더 늘입니다. 드디어 성질나요. “내가 참을 만큼 참았다. 너 같은 여자와 산다고 용 썼다. 도저히 못 참는다. 갈라서자.”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럴 때 걸려들었어. 너는 나에게 농락 대상이야. 내 일에 얼마나 성과 있는지를 이렇게 망가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자기 솜씨를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은 쉬지 않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면서 아무 차질 없이 일을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걱정할 상황 아닙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양과 목자의 개념이 우리가 주제넘게 가져올 개념이 아니라 주님께서 홀로 이루실 개념인 것을 알았습니다. 마귀가 필요했고 마귀에 속한 우리 자신 죄인도 주의 일에 꼭 필요한 재료가 된다는 것을 앞으론 더욱 더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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