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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3 11:43:15 조회 : 194         
2강-오바댜 1장 2-5절(장자의 명분)210512-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180.11)
2강-오바댜 1장 2-5절(장자의 명분)2105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오바댜 1장 2-5절입니다.

오바댜 1:2-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를 열국 중에 미약하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바위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찌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혹시 도적이 네게 이르렀으며 강도가 밤중에 네게 이르렀을찌라도 그 마음에 만족하게 취하면 그치지 아니하였겠느냐 혹시 포도를 따는 자가 네게 이르렀을찌라도 그것을 얼마쯤 남기지 아니하였겠느냐 네가 어찌 그리 망하였는고.”

구약은 이스라엘 중심의 내용인 줄 알았는데 오바댜 선지자는 에돔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에돔나라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내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에돔이 목적이 아니라 에돔을 통해서 ‘이스라엘 다시 보기’ 이스라엘이 도대체 어떤 나라냐, 라는 것을 에돔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돔은 멸망하면 그게 끝이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무너짐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나옵니다. 호두껍질을 깨야 호두가 나오지요. 이스라엘이 무너져야 거기서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만들게 된 하나님의 계획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게 나옵니다. 깨지지 않으면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에돔은 깨어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쫑난거예요. 더는 없어요. 그걸 보통 ‘꽝’이라고 하지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동전으로 긁어봐야 ‘꽝’ ‘박카스 한 병 더’ 그런 것이나 ‘비타 500 한 병 더’ 그런 것이 없어요. 그냥 그걸로 끝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에돔도 하나의 나라고 이스라엘도 나라니까 이 세상의 나라가 존립하는 그 원칙에 의해서 다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사람들은 생각하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현실을 제대로 비추는 것은 그냥 나라와 나라만으로는 현실이 드러나지 않고 진짜 현실을 알려면 이스라엘을 하나의 거울이라 보고 이스라엘을 안에서, 이스라엘 중심에서 또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다른 말로 하면 구약 안에서, 그 구약에 등장하는 나라들이 어떤 식으로 망하고 어떤 식으로 흥하느냐? 그것이 바로 현실을 압축해낸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빼버리면 현실을 모르게 되어 있고, 이스라엘을 집어넣고 그것과 관련되어서 벌어지는 일들 그 벌어지는 일들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스라엘 빼놓고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어요. 기도원이나 깊은 산속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이여, 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것은 우리나라의 옛날부터 내려온 조물주에게 비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이스라엘 요소가 없잖아요.

왜 이스라엘 요소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그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고 언약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진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약속의 하나님이고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약속을 앞장세우고 언약을 앞장세워서 그 언약대로, 약속대로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입니다.

약속 없이, 언약 없이 오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약속 없는 하나님, 그것을 이스라엘 역사,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거울, 이 세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유일한 풍경은 그것을 가지고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들은 아무리 신을 복종하게 충성해도 그냥 우상이지요. 힌두교도 신이 많고 이슬람도 알라신을 믿잖아요. 그냥 우상입니다.

모든 종교는 다 우상이지요. 신이 아니다 그 말이에요. 가짜다. 인간이 자아를 투영해서 그걸 다시 자기 것으로 가져온 거예요. 자기를 확대한 겁니다. 오목렌즈는 확대하잖아요. 볼록렌즈는 모든 빛을 모으는 것이고 오목렌즈는 퍼지게 만들어요.

나는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인간이 신봉하는 신입니다. 굳이 신을 보고 싶다 하거든 여러분 대구지방에서 만드는 소주인 금복주나 아니면 미국의 치킨집 KFC 할아버지, 그게 하나님이에요. 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그게 하나님입니다. 인자하고, 자비하고, 복스럽고. 금복주 보세요. 볼때기도 푸짐하고 뱃살은 튀어나오고, 그 모습이 얼마나 인자하고 자비롭습니까? 불국사 옆의 석굴암에는 아예 신을 만들어놨잖아요. 돌로. 너무나 인간적이지요.

그래서 오늘 이스라엘을 다시 보려면 성경에서 이끄는 대로, 오늘 오바댜가 이끄는 대로 에돔부터 살펴야 됩니다. 에돔의 입장에서 에돔 자신에 대해서 변호하고 변명하는 그러한 모습을 우리는 살펴봐야 돼요.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에돔에서 태어난 에돔의 국민, 백성 중 하나라고 했을 때 그 에돔의 백성이 오늘 오바댜에 나오는 이 예언서를 봤을 때 오늘 읽은 본문에 대해서 얼마나 할 말이 많겠습니까? 터무니없다. 너무 일방적 독단적인 이스라엘 관점이다. 그런 식으로 막 반박하겠지요.

우리가 성경 본문 읽은 지 벌써 몇 분 지났잖아요. 오늘 본문 내용이 뭡니까? 다 잊어버렸지요. 그래서 제가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돔이라는 나라, 이스라엘 남쪽의 나라입니다. 지금의 요르단이라고 보면 돼요. 지금의 그 요르단, 이스라엘 남쪽의 에돔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까불다가 망했다. 그리고 모든 나라들이 너를 못 잡아먹어서 환장했다. 그런데 너희들은 망해도 아주 에누리 없이 완벽하게 망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너희들의 운명이다.”라고 예언하는 겁니다. “강도가 와도 그렇게 다 털어가지는 않을 정도로 망했다.” 또는 “포도원의 포도 따는 사람이 약간은 남겨두는데 너희들은 주변 나라한테 완벽하게 다 털렸구나. 너희들의 신세가 그렇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끝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유는요. 이런 말이 있잖아요. 마지막에, 끝에 웃는 사람이 이긴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간과정에서 함부로 자기의 성과를 말한다든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성급하게 단언하면 안 돼요. 마라톤 경기에 출전한 어떤 선수는 뛰어가다 지쳤는지 버스 타고 갔어요. 결승선 근처에서 내려서 3등으로 들어갔답니다.

힘들기는 힘들었던 모양이지요. 물론 메달 무효 되었습니다. 얍삽하기는 하지만 그 선수가 달리다 말고 버스를 탈 정도로 다급했던 것은 어떤 목표가 있었던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 에돔을 충분히 이해를 해야 이스라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에돔은 언약이 없거든요. 언약이 없는 나라가 어떠한 관점으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보고 있느냐, 그들이 목표하는 것이 뭐냐, 이걸 우리가 아셔야 됩니다.

아는 방법은 쉬워요. 평소에 에돔처럼 살아왔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는가? 인간은 그냥 인간다우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게 에돔입니다. 인간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났다. 이게 뭐가 문제냐? 아주 극히 정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에돔이라는 그 나라가 생각하는 인간다움이라는 것은 세상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평준화되어 있다고 보는 거예요.

평준화되어 있다는 말은, 어떤 평준화됨으로써 이 세상 자체가 그냥 고만고만한 인간들의 집합체로 보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인간이라는 것은 극히 인간답게 살게 되면 충분히 잘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요게 에돔의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에돔 생각에는 뭐가 없느냐? 에돔은 그저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면서 측정하고 평가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외부,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측정하는 그 기준이 따로 있어요. 이스라엘은 내가 나를 평가할 자격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이 성도입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여러분을 평가하지 마세요. 그건 에돔입니다. 끝이 멸망 당할 대상이에요.

오늘 본문에 멸망 당한다고 되어 있지만 에돔사람들이 이 책을 봤으면 절대로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뭐냐 하면,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렇게 살다가 나라가 망할 수도 있고 또 죽을 수도 있는 게 그게 인간이지 천년만년 사나?’

그러니까 여기서 “너희 나라는 망한다.” 해도 ‘우리나라가 망하든 말든 내가 한평생 살다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냥 인간으로 죽으면 그만이지 뭐. 우리나라 망하는 것과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데? 나는 내 나름대로 우리나라에서 살면서 이게 팔자다, 운명이다,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지 뭐 머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이게 바로 에돔입니다.

그러니까 에돔사람들, 우리 보통 인간들은 무엇이 납득이 안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한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이 안되는 거예요. 내가 뭐 신이 되겠다, 천사가 되겠다 하면 “이놈 건방지구나. 자기 주제 파악도 못하고.” 이렇게 해서 책망받는 것 그것은 우리가 동의한다 그 말이에요. 우리 인간 입장에서.

그런데 약하디약한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보잘것없이 살다가 그냥 허무하게 객사하든지 늙어 죽든지 죽겠다는 거예요. ‘나 이래 살다 죽을래. 내비 둬. 그만 이렇게 살다 죽을래.’ 이게 뭐가 문제냐는 말이지요.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뭐 복잡하게 누가 와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뭐 다 귀찮다. 돈이나 대주면 요양병원에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천당이니 지옥이니 그것은 지금부터 걱정할 필요 없고 한평생 좋은 데나 놀러 다니면서 산다. 설악산 놀러 가고 제주도 두 번 갔다 오고 그걸로 충분해 됐어.’ 보통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그걸 가지고 네가 교만하다는 거예요. 3절에서. 무엇이 교만한데? 사람이 신이 되겠다 한다면 그것은 교만인데 사람으로 와서 사람으로 그냥 밥이나 먹고 돈이나 벌고 자식 키우고 살다가 그냥 죽는 게 이게 어떻게 교만이 될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이 안 풀리고 성경 봐도 잠만 오는 거예요. 무슨 취지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를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인간세계에서는 교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실패하는 것을 문제 삼지요. 성공과 실패가 그렇게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까짓 거 얼마든지 겸손할 용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성공하기 위해서 겸손한 것을 교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해 보면 에돔사람들 또는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고 약속을 모르는 사람한테는 정말 환장할 노릇입니다.

성경이라는 것이 너무 억지처럼 여겨집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이란 이거에요. “너 왜 혼자 살았어?” 이게 교만이에요. “너 왜 혼자 살았어?” 그냥 알기 쉽게 말씀드릴까요? 화물차를 타고 가는데 경찰이 잡습니다. 화물차 운전사보고 “차량 등록증 봅시다.” 운전사가 하는 말이 “나 속도위반 안 했습니다. 규정 속도 다 지켰습니다.”

경찰이 하는 말이 “속도위반으로 잡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 차 적재함 어디 있습니까?” “적재함이요?” 보니까 화물차인데 뒤에 적재함이 떨어지고 없어요. 뒤에 실어놓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 평생 운전석 그 옆의 조수석 그 앞부분만 덜렁 온 겁니다. 이건 화물차도 아니에요.

뒤에 아무것도, 짐칸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마치 컨테이너 트럭인데 컨테이너는 없고 앞에 운전석만 가는 경우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적재함이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실어나르는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그 적재함 없다고 교만하다는 거예요. “너는 너로부터 시작해서 너로 인생을 끝내버리느냐?”

운반할 게 하나도 없어요, 운반할게! 우체부가 와서 “택배요!”라고 하는데 가방 안에 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뭐가 있었는데 뭐 없어. 도둑맞았는지 가방 안에 편지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게 교만이에요. 성경에서 지적하는 교만이라고요. 인간은 아담의 자손으로서 범죄하고부터 악마를 닮았기 때문에 혼자 와서 홀로 가버려요. 홀로 와서 홀로 가버립니다.

그러나 혼자서 홀로 가는 이 인생의 그 끝장은 마태복음 8장 32-33절에 보면 나와 있어요. 31절부터 보면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 찐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 대”

그러니까 귀신이 어떤 짐승이나 사람이나 물체에 들어갔을 때에 귀신이 주도해서 한, 그래서 나타나는 행적, 돼지는 돼지 사람이면 사람 그 행적의 끝장을 보여줍니다. 귀신이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없는 사람이 귀신이 있는 거예요. 성령 아니면 악령, 악령 아니면 성령 둘 중 하나밖에 없어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은 없습니다.

귀신이 돼지에 들어갔어요. 돼지는 일종의 실험용 쥐, 실험용 mouse라 보면 됩니다. 실험용 마우스에 귀신이 들어갔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8장 32절에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그러니까 이 돼지가 평소에 바다를 좋아했으면 수영을 하려고 들어갔다고 생각하겠는데 돼지는 물을 안 좋아하잖아요. 돼지의 삶의 목적이 바다에 빠져 죽는 게 아니잖아요. 자살하는 게 아니지요. 그러나 돼지의 자아성, 돼지의 그 본성 안에 귀신이 들어가니까 실험용 쥐 같은 돼지, 돼지가 어떠냐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간 귀신은 그 돼지를 어디로 몰고 가느냐, 어디로 끝장을 내게 하는가를 보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렇게 보게 하십니다.

돼지 떼에 귀신이 몇 마리나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돼지가 미쳤어요. 미쳐 가지고 바다에 들어갔는데 그 결과는 몰살이었습니다. 죽음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적재함이 없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사람의 운명입니다. 마지막 그 미래에요. 돼지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비탈길을 내리달아서 바닷물 속에 빠졌다면, 이것은 짧은 시간에 함축해서 보여준 것이라면 우리네 인생이라 하는 것은 90 평생이니 약간은, 약간은 길어요.

90 평생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희미한 등불 밑에서 울든지 웃든지 관계없이 그렇게 살았던 그 모든 것을 빨리 돌려버리면 돼지의 팔자하고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쪽,에서 쪽과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야곱, 이스라엘 쪽을 구분하십니다.

언약이 있다, 혹은 없다, 여기서 에서를 뭐라고 표현하느냐? 히브리서 12장 16, 17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음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망령되었다는 말은 네가 미쳤구나, 그런 뜻이지요. 네 안에 괴상한 괴물이 들었다 할 때 망령되었다 하잖아요. 그런데 이 이스라엘 역사가 현실을 보여주는 거울이라 했잖아요. 유일하게 현실을 말해주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예요. 그 역사를 통해서 에서와 야곱을 비교시킵니다. 에서의 태도와 행동 중에 어떤 것이 있었느냐 하면, 바로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과 교환시켰어요.

대등하게 교환시켰다는 말은, 장자의 명분이라는 것이 자기에게는 팥죽 한 그릇 밖에 안되는 거예요. 팥죽 한 그릇 칠성시장에 가면 4천 원 주면 살 수 있어요. 4천 원짜리 팥죽. 왜 그러냐 하면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가는 사람에게 지금 내가 원하지 아니하면 장자의 명분이라는 것도 나에게는 4천 원 가치도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지금 당장 배고픈 것보다 더 가치가 없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성경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에서는 망령되다, 하고 이걸 오바댜 본문에서는 교만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만은 뭐냐 하면, 보여줄 실어나를 것이 없는 것,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이 없는 것을 교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에돔이나 이방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애당초 그걸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오바댜의 이러한 규정에 대해서는 황당한 거예요. 설교 다시 할까요? 인간으로 태어나서 소박하게 조용하게 살다가 조용하게 죽는 것, 이게 왜 교만이냐는 거예요 이게 왜 교만이지요?

나라 시책에 따라서 마스크 쓰라면 마스크 쓰고 백신 맞으라 해서 백신 맞고. 이게 왜 교만한 겁니까? 야곱도 마찬가지지요. 처음에는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나중에 홀로 사는 것이 아니고 둘로 나누어지는 요소가 언약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에돔은 처음부터 끝까지 에서 본인부터 시작해서 본인으로 끝나버려요. 둘로 갈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둘로 갈라지는 것이 인간세계에서는 없지요. 둘로 갈라지면 이게 특이현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에게는 그 특이현상이 일어나요. 그게 뭐냐 하면, 열두 지파 가운데 유다와 요셉이 유난히도 두각을 나타내는 특이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언약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49장에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축복하는 대목입니다. 야곱이 마지막 죽기 전에 열두 아들을 불러서 축복하는데 다른 열 지파는 축복이 간단해요. 단순합니다. 그런데 투 톱, 두 개의 지파가 두각을 나타내요. 서로 경쟁상태이면서 돋보이는 축복을 받습니다.

이 축복의 결과로서 나중에 이스라엘이 두 나라로 나누어지는데 남쪽 나라는 유다지파 유다 나라라 하고 북쪽은 요셉중심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로 둘로 나뉘어요. 야곱에서 두 조각이 나눠진다는 것, 왜 그렇게 두 조각으로 나뉘어야 되는가? 그것은 야곱이 장자가 되는 순간에 부여받았던 하나님의 계시가 야곱의 화물차 적재함에 실려서 실어나르게 돼요.

야곱은 그 적재함에 도달이 되게 되고 야곱의 인생을 통해서 그 적재함에 실린 하나님의 약속이 운반이 되는 겁니다. 그 운반되는 내용이 뭐냐 하면, 큰자가 어린자를 섬긴다는 내용이에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내용이 되려면 큰 자 따로 나와야 되고 작은 자 따로 나와야 돼요.

그래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함축시켜 버리면 열두 지파는 어떤 중심체를 갖고 있는데 그 중심체가 뭐냐 하면, 누가 큰 자인자 누가 작은 자인지, 그것이 역사가 진척되는 과정을 통해서 점차 점차 윤곽이 드러나는 식으로 이스라엘 역사가 꾸려져 나간다는 겁니다. 전개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지금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축복할 때는 막상막하에요. 어느 정도로 막상막하인지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49장 10절에 “홀이……” 홀이라는 것은 임금이 쥐고 있는 지팡이가 홀입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사이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러니까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 유다의 왕이 이어지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뒤에 보면 왕이 출현하면서 왕에 대한 대우, 왕의 영광에 부합되는 합당한 복들이 죽 나와요. 11, 12절에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이 축복을 듣는 순간 유다와 유다 자식들도 있었겠지요. 야곱이 나이가 많으니까요. 이 축복을 하는 자리에서 유다집안 쪽에서 함성이 터져 나올 거예요. 와~, 와~. 만약에 영국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토트넘하고 맨체스터유나이티드 하고 두 팀이 결승전 할 때 야곱이 나타나서 예언을 하는데 “토트넘이 우승컵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토트넘쪽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끝났어. 우승컵이래. 와~” 할거라는 말이지요. 왕, 통치자, 메시아가 온다고 하니까.

그런데 요셉은 어떨까요? 창세기 49장 22절에 보면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여기서 지금 유다가 “끝났어. 우리가 승리자야.” 하고 있는데 요셉 차례가 오니까 이번에는 요셉 집안에서 “와~, 목자가 우리에게서 난다! 목자가 우리에게서 난다!” 지금 축복을 받는 두 아들 사이가 열두 지파 가운데서 혼돈이 되어버린 거예요. 이스라엘 지파의 완성이 야곱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냥 예언 던졌는데 거기에 항상 과도기적으로 넘어가는 순간이 오는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들이 열두 명이 있는데 넷째 아들인 유다에게 “이 집과 그리고 내 땅은 넷째 아들 준다.” 할 때 “와~” 아 참,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너무 이런 티 내면 안 되겠지요. “아버님, 어떻게 그것까지 신경을 써주십니까?” 이런 겸손의 티를 내면서 표정 관리하면서요. “아버지, 지금 그럴 때가 아니고 건강하셔야 됩니다.” 아까 성공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겸손할 수 있다 했지요.

그러고 난 뒤에 요셉은 열한 번째 아들이지요. 다른 아들은 “끝났어. 다 끝났어. 넷째 아들 한테 다 준대. 끝난 거지.” 그런데 “열한 번째 아들 요셉아!” 요셉은 속으로 ‘아버지가 넷째 아들 다 준대놓고 제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는데 “내가 숨겨놓은 부동산이 있다. 그거 네가 다 해라.” 이런 격이에요.

왜 열두 지파 가운데 하필이면 유다와 요셉지파에게만 그런 식으로 드러내느냐? 그들 지파에게만 어떤 언약적 요소가 가미되었느냐 하면, 큰 자가 어린자를 섬기고 강한 자가 약자를 섬길 것이라는 그 역전되는, 뒤바뀌게 되는, 그러니까 세상의 원리 즉 에돔의 원리, 우상의 세계에서만 통하는 그 원리가 뒤바뀌는 언약적인 특이성이 그 두 지파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선 요셉 지파를 보게 되면, 이건 지난번에 했는데요, 48장 17절에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불러놓고 축복을 합니다. 잘 들어보셔야 돼요. 17절에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할아버지가 요셉의 두 아들인 손자한테 복을 주는 그때 야곱은 너무 늙어서 눈이 안 보여요. 아들 요셉이 ‘눈이 안 보여서 아버지가 큰아들 작은아들 구분을 못하셨나?’ 이렇게 생각해서 억지로 아버지의 손을 들어서 강제로 이걸 바꾸려고 했어요. 18절에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거기에 대한 야곱의 답변은 뭐냐? 19절에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나도 안다. 다시 말해서 요셉 너는 모른다. 내가 내 인생 적재함에 실어나르는 하나님의 하나님 됨의 원리원칙을 내가 너희에게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너희들의 운명, 미래에 내 적재함에 있던 복을 너희의 적재함으로 옮겨타기를 하겠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창세기 48장 19절에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를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나중에 오신 분이 인류의 최초가 되는 겁니다. 큰 자가 되고 시작점이 되는 거예요. 최초의 근원자가 나중에 오는 거예요. 이 암호, 이 비밀을 이스라엘이라는 그 인간들의 공동체 그 민족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는데 집어넣은 한 지파가 요셉지파입니다. 그러면 요셉지파가 그 복이 있기 때문에 요셉 중심으로 이스라엘 복이 돌아가야 되는데 그러면 유다지파는 왜 그 왕의 홀이 왜 있느냐? 창세기 38장에 보면 유다지파에도 그 비슷한 요소가 있습니다. 창세기 38장을 죽 보게 되면 유다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이 죽고 둘째 아들도 죽고 그다음에 셋째 아들밖에 남지 않았어요.

첫째 아들의 부인인 다말이 자식이 없어요. 이럴 때 남자가 씨받이가 되는 거지요. 시동생과 형수가 합방해서 자식 없는 형의 대를 잇는 겁니다. 그래서 얻고자 하는 것이 뭐냐? 장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장자라 하는 것은 어떤 요소를 품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거기에 담겨 있는 자만이 장자가 돼요.

그래야 약속이 파급돼야 그게 복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계획이 계획대로 죽지 않고 살아 있어야 그게 복된 사람입니다. 그게 오늘날 성도에요. 성도 쪼개면 주님의 복이 들어 있어요. 복이 뭐냐?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 있고 다 이루었다 하신 약속이 들어 있는 이게 성도입니다.

그러나 에돔, 즉 보통 사람들은 뭐냐? 내가 하나의 인간으로 태어나서 조용하게 살다가 그냥 죽을래. 뭐 없어. 나라는 것 외에는 없어요. 약속에 의하면 그런 자는 귀신이 들려서 바다에 빠지는 돼지처럼 그렇게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지옥 가는 사람은 뭘 내놓을 것이 없어요. 코미디언 이주일은 맨날 뭔가 보여준다고 했는데 끝까지 안 보여주고 결국 죽었잖아요.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Suzie-Q라는 노래에 맞춰 춤추면서 나와서는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뭘 보여주는데? 성도는 뭘 보여주는 게 아니고 뭐가 보여지도록 주께서 성도의 인생을 관리하지요. 특이성. 내가 아닌 다른 것.

따라서 나는 나를 위해서 나만 있으면 된다. 나만 독처하면 된다. 오늘 오바댜 본문 말씀처럼 나는 든든한 바위 위에 나 하나만 사수하고 지키면 된다. 복잡한 것 싫고 시끄러운 것도 싫고 나 하나 조용히 살래. 마치 독수리처럼. 그게 바로 에돔의 생각이고 모든 인간들의 생각이에요.

그러나 에돔이 망해야 될 이유는, 이스라엘과 에돔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관련되어 있거든요. 같이 계시를 받은 집안사람이기 때문에 저주가 무엇인지 복이 무엇인지, 에돔은 이스라엘 옆에서 저주가 무엇인지 보여줄 그 역할에 충실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에돔 입장에서는 그냥 조용하게 사는데 그게 저주에요. 우리는 에돔의 입장을 충분하게 이해해야 돼요. 그리고 우리가 그거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육신이 요구하는 게 바로 에돔같은 거예요. 그리고 오늘 본문 1장 3절에 보면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누가 나를 감히 끌어 내려?’

그러니까 이것은 혼자 생각만 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다말이라는 유다의 며느리가 이방 여자거든요. 남편이 죽고 아들이 없을 때 둘째 아들마저 죽자 셋째 아들과 결혼시켜 달라 하니까 유다가 둘째 아들까지 죽는 것을 보고 셋째 아들마저 잘못될까 싶어서 애 클 때까지 기다리라 했어요. 사실상 안 되겠다 한 거지요.

그러니까 다말이 창녀로 변장해서 자기 시아버지하고 관계를 맺어서 역시 쌍둥이를 낳았어요. 쌍둥이 될 때 먼저 된 자 나중 된다는 그 하나님의 원리대로 먼저 나오는 것을 새치기하듯이 뒤에 있던 애가 앞서 나와버렸어요. 제치고 나왔다, 새치기하고 나왔다. 그래서 먼저 나온 애가 베레스고 나중 나온 애를 세라 그렇게 됩니다. 29절에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 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출산하기 전에 다말이라는 며느리의 언약적 입장을 모르고 자기 며느리가 임신했다 하니까 유다가 듣고는 그런 여자는 불태워 버려야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대체 누구하고 붙어서 애를 배었느냐, 하니까 이런 인간의 애를 배었습니다, 해서 보니까 유다 자기의 소지품이거든요.

창세기 38장 25절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보니까 바로 본인이에요. 자기가 언약을 방해한 사람이에요. 복 받았다고 좋아한 자신이 도리어 언약을 훼방한 자가 되었어요.

바로 이것이 특이성이 바로 유다에게 주입된 겁니다. 내가 주의 일을 방해한 죄인입니다. 그 언약 정신, 언약의 맥락에 의해서 주님께서는 모든 자기의 택한 백성이 죄인이라는 것을 일깨워줄 수 있는 바탕을, 그 원천이 우리의 적재함으로 제공된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도가 되고, 언약의 백성이 되고,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그게 없으면 우리는 에돔과 동일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에돔을 통해서 다시 이스라엘의 위상과 처지가 그 형편이라는 것,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어서 완전하게 이 세상과 차별화되는 그러한 숙명, 운명, 그걸 지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고 오늘날 성도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그냥 평범하게 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저 천국 가는 것은 내가 결심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인공 되어서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교만하고 자만스러운 하나님의 약속을 위반한 그런 자인 것을 고백케 하시니 이 고백을 통해서 오직 다 이루심만 죄사함만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강-오바댜 1장 2-5절(장자의명분)210512-이 근호 목사.hwp (92.5K), Dow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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