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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5 05:35:46 조회 : 183         
서울의존강의20210513a 베드로전서5장 8절(악마추격자)-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124.254.211.180)
서울의존강의20210513a 베드로전서5장 8절(악마추격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5장 8절-9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여기 나오는 여러 가지 단어들이 하나로 엮여져 있습니다. 그 중심점은 마귀의 활동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그 마귀의 활동에 의해서 성도에게는 고난이라는 특별한 상황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을 세상 사람들은 찾아낼 길이 없습니다. 세상은 모든 뉴스에서 정치적인 이야기 나오고 경제적인 비트코인 이야기 나오고 이렇지,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완전히 깜깜한 거죠. 그런데 여기 8절에 보면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라고 하는 걸 봐서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이 본문을 보려면 마귀가 활동하고 있는 증거, 흔적 그것을 도대체 어디서 찾아내야 되는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마귀 추적자에요. 서부 영화에 보면 현상금 노리고 살인자들 찾아다니는, 그것 가지고 생활해 먹는 무법자들이 생기잖아요. 개척시대에 경찰 치안은 안 되어 있고 보안관 숫자는 적고. 그러면 범인들이 설치니까 돈으로 현상금 걸어서 아무나 나쁜 사람 잡으면 되지. 그러면 현상금 추적자가 등장하겠죠.

‘마귀야, 오라’고 기다리는 게 아니고 마귀를 찾아나서는 겁니다. 누가? 믿는 자가. 성도=믿는 자죠. 이 믿음의 내용 속에는 마귀의 활동이 그들에게만 확인된다. 그들만 알아챌 수 있다. 이게 오늘 본문 5장 8절-9절에 나오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성도한테만 이 마귀의 활동이 포착되는데 왜냐하면 성도는 특별한 고난을 받기 때문에, 성도만. 성도는 특별한 고난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 고난은 마귀로 인하여 맞닥뜨리면서 생긴 고난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 자체가 허황돼도 보통 허황된 게 아니에요.

악령을 청소해주는 악령 청소대행업체가 있어요. 귀신을 청소해주는 대행업체. 그 영화가 있었는데 노래도 유명해요. <고스트 바스터즈> ‘고스트 바스터!’ 노래에 나와요. 청소기 돌아다니면서 귀신을 빨아당기며 소제(掃除)해주는 겁니다. 어디 흉가에 귀신 들었다고 하면 고스트바스터가 출동해서 청소기 윙~하면 그 안에 다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귀신이 상당히 물질적이죠. 유물론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요. 귀신을 포착하는 데에 있어서 이 우주를 구성하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4대 힘으로 가능하다는 거예요. 전자기력, 강력, 약력, 중력. 이것 가지고 귀신을 뽑아내겠다는 겁니다. 참 그걸 보면 그런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이 신앙생활을 설명하는데.

옛날에 영어로 된 영화 <고스트(Ghost)>, 우리말로 하면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데뮈 무어하고 패트릭 스웨이지 나오는. 그 남자가 죽어서 귀신이 되었는데 귀신이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동전 가지고 그것도 아주 애를 써서 힘주어서 튕기니까 동전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통해서 죽은 남자 애인이 살아있다는 것을 데뮈 무어가 알죠. 그 유명한 장면 있잖아요, 도자기 굽는 장면. 뒤에서 팔로 앉아서 하는 그 장면, 음악도 유명한 음악이죠.

그런 악령, 유령, 귀신 이야기가 왜 비신앙적이냐 하면 이런 귀신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 자체가 죄인이다’ 를 증명해내지를 못해요. 증명 자체를 못합니다. 귀신을 추방하는데 급급해요. 재수 없는 거 저리 가. 이런 식으로. 지가 더 재수 없는데. 자꾸 재수 없는 거 떠나라 하면 본인 스스로가 종교재판 벌인 게 돼요. ‘인간 자체가 죄인이다’를 증명해내지 못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마귀 추적자. 마귀가 오도록 소극적으로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마귀를 찾아가는 거예요. 왜? 성경에 나오니까. 마귀 너 어딨니? 마귀 까꿍. 마귀하고 숨바꼭질하는 거예요, 성도가. 그러니까 성도라 하는 것은 믿는 자잖아요. 성도는 믿는 자거든요. 믿는 자라는 말은 마귀가 활동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 이게 성도죠.

일단 공식 한번 봅시다. 공식 중요합니다. 1. 성도는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이게 성도에요. 성도는 같은 시시한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질병관리청하고 상대 안 해요. 성도는 정은경 관리청장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스트 바스터이기 때문에, 귀신 추방자이기 때문에. 코로나 추방자가 아니잖아요. 귀신 추방자잖아요. 그러니 성도는 인간하고 상대를 안 해요.

그러니 아내가 성도고 남편이 성도 아니라면 아내는 남편하고 상대 안 합니다. 상종할 가치도 없어요. 이거 봐요. 고개 끄떡이잖아요. 벌써 신앙인이잖아요. 상대가 뭐 말할 가치가 있어야죠. 남편 상대하라고 믿음 주신 게 아니잖아요. 상대하지 말라고 믿음 주신 거예요.

두 번째 공식이 중요한데 두 번째 공식은 성도가 마귀를 어떻게 찾아내고 어떻게 박살내느냐, 그 공식입니다. 그 공식은 뭐냐 하면 처음에 마귀가 인간을 지배하게 된 이유를 성도한테 없애버리면 돼요. 그 이유는 선악과에요. 선악에 대한 지식이에요. 선악에 대한 지식 때문에 인간은 꼼짝 못하고 악마한테 휘둘리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선악.

그래서 마귀를 이기는 방법은 성도가 알아서 죄인 되면 되죠. 참 쉽죠잉? 성도는 알아서 죄인 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사람하고 상대 안하죠. 성도는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왜 사람하고 상대 안 하냐면 이 불신자들은 자기 의를 주장해요, 자기 의를.

성도는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는 이유가 사람들은 선악과 따먹는 순간 이미 악마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악마가 부리는 대로 하는 거예요. 너 선해야 되잖아. 악하면 안되잖아. 악하면 저주받잖아. 이런 식으로 악마가 인간을 갖고 놀거든요.

성도는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다 할 때 이 사람은 뭘 주장합니까? 선악의 지식이 있기 때문에 자기 의를 포기 못하죠. 그러면 마귀를 이기는 방법은 성도가 알아서 자기 의를 포기하면 되잖아요.

무슨 뜻이냐 하면 성도가 만든 성도의 자리는 성도가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여기에 휴지통, 쓰레기통을 마련하는 거예요. 쓰레기통을 마련해가지고 자기의 모든 행위를, 지금 하는 또 과거에 했던 모든 행위를 이 더러운 쓰레기통에다가 다 집어넣으면 마귀를 이깁니다. 마귀를 이겨요.

만약에 내가 부모께 효도했다. 효도를 하잖아요. 효도했으면 그 효도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효도한 것도 죄가 된다는 거예요. 효도한 것도 죄가 되니까 성도는 항상 큰 쓰레기통을 갖고 다녀요. 자기가 하는 모든 행동은 알아서 이것도 죄고 이것도 죄고 전부다 죄를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겁니다. 컴퓨터에 휴지통 있죠? 파일들 커서로 다 끌어당겨서 휴지통에 넣어 없애버리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선악구조가 되어있는 이 체제, 시스템에서 마귀가 인간을 전부다 붕 뜨게 만들었어요. 누가누가 착하냐, 누가누가 선하냐, 누가누가 많이 훌륭하냐, 악마가 시합을 붙인 거예요. 배틀을 붙인 거예요.

그러면 성도라 하는 것은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죠. 이 땅에서 십자가는 저주입니다. 예수님이 저주받았기 때문에. 성도의 있는 위치가 그 저주의 구멍 난 지역에, 선악체제에 구멍 난 지역에 위치해버리면 내가 한 어떤 일도 전부다 저주받을 짓으로 간주해서 그 빈 구멍에다가 다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쓰레기통에 다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한테는 선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선한 일 없~다. 가 되죠. 그게 바로 원천적으로 악마를 이길 수 있는 방법입니다. 참 쉽죠잉? 그쵸? 되게 쉽죠. 그래서 불신자 남편을 신자 아내가 상대할 필요 없는 이유는 남편은 입만 열면 뭘 주장합니까? ‘나 잘났잖아’ 에요. 나 정당했고 나는 정당할만해서 정당하고. 이런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내는 복음에 대해 관심이 있고, 아내가 복음에 대해 관심을 두는 그만큼 나한테 관심이 소홀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뭔가 불만을 갖고 있는 남편이 아내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나는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 그 모든 취미생활, 여가생활 다 자진해서 반납하고 포기하고 오직 이 더러운 세상에 돈벌이 위해서 희생을 다했다. 그래서 이 가정을 이만큼 건사했다. 그런데 이 가정을 건사하는데 있어서 당신은 어떤 점에서 기여했는가?” 라고 불신자 남편이 복음에 관심 있는 아내한테 이야기한다면 아내는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문제가 모호합니까? 다시 할까요? “나는 결혼할 때 당신과 함께 이 가정을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기 위해서 다짐을 했고 그렇게 결심을 했고 그 결심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지금도 변함없이 이 가정에 대해서 희생하고 봉사하면서 온갖 설움 받아가면서 돈 한 푼 더 벌려고 애를 썼다. 거기에 대해서 당신은 이 가정의 한 책임자로서 어느 정도 호응을 해야 될 임무가 있지 않느냐? 적어도 인간적으로 양심적으로 호응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당신은 복음이나 그런 데에 빠져버리면 내가 당신에 대해 어떻게 신뢰성을 가지고 자식이나 당신을 위해서 또다시 헌신할 의지와 용기가 생기겠는가. 당신도 내가 한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이 가정을 위해서 이렇게 희생하겠다는 그런 약간의 의사는 보여야 마땅하지 않느냐?”라고 했을 때 복음을 아는 그 여자분은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객관식으로 했으면 좋겠지만 객관식은 너무 길고 주관식으로 답변해보세요. 십초 드리겠습니다. 귀한 시간이기 때문에. 포, 쓰리, 투, 원, 땡! 정답 알려드리겠습니다. 방금 이거 답변 못하면 1번 공식 안돼요. 성도는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이게 이해 안 됩니다. 답변: “네가 감히 나한테 명령을 하다니! 요즘 많이 컸대이” 이게 답변이에요. 이게 답변입니다.

그럼 남편이, “너무 과격하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왜 이런 답변을 했는지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한다면 아내는 이렇게 해야 돼요. “결혼은 남남이 만나서 결국 남남임을 확인하는 게 결혼이야. 네가 뭐 가정을 위해서? 개뿔같은 소리하고 있네. 인간은 자기 자신 외에는 목표가 없어요. 당신은 복을 모르기 때문에 자꾸 조작하지 마. 당신은 선한 이데올로기, 선한 신념, 선한 명분 가지고 그 뒤에 당신의 자기 위주, 자기 잘남을 간교하게 숨기지 마.” 윤리도덕 뒤에 숨지 말란 말이죠.

당신이 가정을 위한다는 그걸 가지고 아내가 남편을 혼내주면서 그게 바로 ‘집착’이라고 하는 거예요. 쉽게 할까요? 그게 정신병이에요. 환상을 쫓는 정신병이에요. “당신은 결혼해서 아직도 시건 안 났어? 그거 몰라? 솔직하자 이 말이죠. 솔직해. 누구 좋으라고 결혼했는데? 뭐 나 좋으라고? 가정? 가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당신 좋으라고 결혼했어. 감히 누구보고 명령질이야, 이게. 내가 좋아서 가는데 니가 왜? 뭐 동정을 유발하면 따라갈 줄 알았지롱? 당신이나 자격을 가져. 애초부터 나는 나의 의를 가질 자격도 없는, 철저히 나밖에 모르는 죄인이야. 됐냐?!” 이게 마귀를 이기는 방법이에요.

어디서 어쭙잖게 동정을, 그것도 이기적 동정을 유발시키려 하지 마세요. 이것을 인간은 모르지만 귀신은 압니다. 왜? 귀신 같거든요. 귀신은 귀신같아요. 어떤 인간도 선악체제, 자기 의, 자기 착함에서 발을 뺄 수 없고 포로가 되어있다는 것은 악마가 귀신이 자신만만해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고 인간의 선한 윤리에 호소하게 되면 어느 누구도 그 앞에서 할 말을 잊을 것이라고 악마는 자신만만해합니다.

그러나 이 신자 된 아내는, “난 개거든. 개인데 주님의 개야. 지시받아도 주님한테 지시받아. 너한테 지시 안 받아.” 이걸 선빵 날린다고 이야기해요. 이게 선빵 날리는 거예요. “싫으면 갈라서든지.” “뭐 당신이 믿는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이 맺어준 것은 한 몸이니 갈라서지 말라고 하던데.” “어디서 불신자가 성경을 언급해! 니가 복음을, 십자가를 알아? 알고서 언급해! 개뿔도 모르면서 어디서 써먹을라고. 그게 윤리책인 줄 알아?” 갑자기 제가 지금 누구보고 나무래나. 미안합니다.

악마의 실체를 들추어내는 것은요. 성도가 누구보다도 내가 개 같은 죄인이라는 그러한 자리를 확보하지 않으면 악마를 이길 생각하지 마세요. 대적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파생된 공식, 성도의 자리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아무것도 아닌 일을 발생시키는 자리’가 성도의 자리에요. 따라서 이것이 무의미가 되죠. 이 무의미가 세상에 유포되어 있는 모든 의미를 이깁니다. 모든 의미의 바탕에는 자기 의, 자기 잘남이 깔려 있기 때문에. 자기 잘남이 깔려있거든요.

남편이 과거에 미션 고등학교 나와가지고 아는 체하면서 “성경 에베소서 5장에 보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하라 하는데 니는 같은 예수 믿는 교회 가서 뭐 배웠노? 남편에게 복종을 해야 내가 교회 가줄까 말까 하는데 너는 뭐 배웠노?” 또 이래 나오죠. 그러면 이렇게 해야 돼요. 마귀도 성경 인용한다고. 마귀도 성경 인용하죠.

그 말씀은 어느 누구도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단 말씀이야, 이 인간아. 이제 알아들었나? 그 어떤 인간도 말씀 앞에서 내놓을 수 있는 의미 있는 것은 전무하다.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기에 주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발생시켜요. 기포 발생기 있잖아요, 뽀글뽀글 올라오는 기포.

아무것도 아닌 것이 올라옴으로써 그 자리가 이 땅에 남긴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 완성의 자리, 곧 저주의 자리입니다. 그 저주의 자리를 우리가, 성도가 사랑하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 사랑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기에 모든 것을 이기는 거예요. 역설이죠. 역설입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 어떤 것도 이기는 거예요.

자식한테 “밥 차렸다. 빨리 먹어라.” 하니까 말 안 들어요, 사춘기 돼가지고. “엄마, 저 게임하고 밥 먹을래.” 엄마가, “빨리 밥을 치워야 내가 그 다음 일을 한다. 내가 지금 안 치우면 내 일이 네 일 때문에 미뤄지잖아. 피해보잖아.” 그러면 “내가 하겠다는데 엄마가 왜 내 일에 간섭합니까? 나 엄마 말 안 들어요. 엄마는 무식하고 내 친구들은 유식하고. 엄마한테 이야기해봐야 아는 것도 없고 엄마하고 이제 나 이야기 안 해.” 하니까 몽둥이 들고 와가지고 문 잠그면 그 문을 아예 통째로 박살내고 패죠. “엄마 신고한다, 경찰서.” “신고해라. 나 엄마도 아니다. 나 네 엄마 아니다. 나 죄인이거든. 나 엄마 아니야.”

진정으로 상대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 사랑한다는 것은 본인이 망가질 때나 가능한 일이에요. 본인이 하나님한테 철저하게 존재가치가 없을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있으나마나한 존재. 그럴 때 나의 결심과 의지로 주의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일하셨기 때문에 그 결과로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어떤 업적이나 실적을 가질 자격조차 없는 겁니다.

주께서 아무것도 아닌 성도를 보내가지고 악마의 존재성과 그 활동성을 들추어내는 작업에 자기 사람들을 동원시킨 겁니다. 어느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냐하면 선악을 따져볼 때 따질 가치조차 없는 그런 존재로 만드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 도적 이런 사람들이죠. 배신자. 베드로 뭐 이런 사람들이겠죠.

그래서 성경 읽을 때, 성경의 모든 말씀은 성도가 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를 무의미하고 아주 죄인으로 박살내시는 그 주님이 모든 성경 말씀을 현실화시키고 실현시켜나가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2장 10절의 한 대목을 제가 적어보겠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 말씀이 있죠.

방금 이론에 의하면 이 말씀을 누가 지킵니까? 주의 말씀을 주님이 지키죠. 주님이 지키면 성도는 이 말씀을 본인이 지킨다, 못 지킨다? 본인이 지킬 수 없죠. 주님이 이 말씀을 지켜 나가겠죠. 그러면 성도는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 하면 “죽도록 ‘네 일’에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시리라”

죽도록 네 일에 충성하는 거예요. 그러면 죽도록 얻어맞겠죠. 주의 말씀과 틀리니까. 왜 ‘죽도록’이냐하면 인간의 본성이 최우선 관심사가 자기 일뿐이거든요. 죽도록 내 일에 충성하는 거예요. 시험 칠 때는 시험 공부하고. 죽도록 자기 일에 매진하는 거예요. 돈 한 푼도 아끼고 시장가서 상인들하고 막 싸우면서 당신 100원 빼준다 했잖아. 이렇게 싸우고. 이 모든 일이 누구 일입니까? 전부다 죽도록 나의 일이죠. 버스가 왔는데 버스가 왜 나를 놔두고 그냥 가버려? 이런 거. 전부다 누구 일이에요? 전부다 내 일이죠. 비트코인 누구 말 듣고 샀는데 그 다음날 폭락해서 같이 폭락하고. 에이, 팔았는데 그 다음날 다시 급등하고. 도대체 아주 나를 갖고 놀아.

주께서 일으키는 모든 일은 성도로 하여금 주의 일은 하나도 없고 순전히 자기 일만 했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식으로 일을 하셔요. 자기의 가오, 자기의 자존심, 자기의 명예, 위신 결국은 그거 챙기면서 어쭙잖게 주의 일 했다는 핑계 대는 이 위선적인 모습을 성도를 통해서 마음껏 들추어내십니다.

그러면 성도는 주님 앞에서 감히 본인이 주의 일했다는 얘기를 할 수 없죠.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성도한테 누가 보이느냐 하면 악마의 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요. 윤곽이 잡힙니다. 저기 나 같은 인간 또 있네. 지밖에 모르는 인간 또 있다고. 지 잘난 체, 자기 의 주장하는 사람 또 있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를 활용하시는 거예요.

자,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처음에 인간이 악마한테 꼼짝달싹 못하게 된 이유가 그 원인을 보면 간단해요. 선과 악에 대한 지식확보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왕 확보된 지식을 어~한다고 잊어버립니까? 약물 주사해서 그게 사라집니까? 죽을 때까지 선악이 사라지지 않죠.

선악지식은 의미를 유발해요, 의미를. 이건 선하다. 이건 악하다. 의미를 유발한다고요.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 돌아서서는 반드시 거기에 대한 자평이 있기 마련이에요. 스스로 평을 해요. 잘했나 못했나, 잘했나 못했나. 그러니까 악마의 권세에서 빠져나갈 어떤 대안도 없죠. 무슨 대안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차라리 죽도록 자기 일에 충성하세요. 충성했는데 뭐가 주어졌습니까? 세상에,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져버렸네. 세상에 이런 횡재가 어디 있어요? 죽도록 내 일만 했는데 생명의 면류관 얻었을 때에 그 성도는 누구 자랑하겠습니까? 십자가 자랑하겠죠. ‘나 같은 죄인~’ 노래 부르면서 십자가 자랑하겠죠.

그게 악마의 약을 올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진해서 죄거든요. 자진해서 죄인이잖아요. 알아서 손 들었다 이 말이에요, 알아서. 알아서 손 든 거예요. 교회에서 하는 짓 중에 제일 어리석은 짓이 인간이 자기 믿음으로, 자기 의로 악마를 이기겠다고 설치는 것. 그것이 악마가 원했던 바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서론이고 이제 본격적으로 악마를 찾아 나섭시다. 악마 어디 있나? 어디 있어요? 악마가 벌벌 떨도록 악마 한번 찾아나가 봅시다. 악마 추격자니까. 크게 쓰겠습니다. 악마가 어디 있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악마는 역사 안에 있다’. 악마는 역사 안에 있어요, 역사 안에. 역사를 다른 말로 하면 시간의식 안에 악마가 있습니다. 시간의식이라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이 계속 흘러간다고 생각하죠. 제가 과거, 현재, 미래라고 말씀드렸는데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이미 이루어진 것, 지금, 그리고 아직 안 이루어진 것 있죠. 그 사이에서 의미가 생깁니다.

자, 악마는 역사 안에 있으면서 무엇을 계속 생산해낸다? 의미를 생산해내는 겁니다. 의미라는 것이 어려우면 다른 말로 하면 가치 있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쓸모 있는 것을 생산해내요. “하나님, 나 쓸모 있죠?” 그럼 하나님께서 “네가 네 스스로 자평하기를 스스로 쓸모 있다고 하니까 그 근거를 대봐라.” 그럼 성도라 할 것도 없이 그 교인은 “과거에 내가 선교사 했잖아요, 과거에. 과거에 내가 교회 충성했잖아요. 과거에 내가 주일학교 했잖아요. 성가대 했잖아요.” “방금 뭐라고 했어?” “과거에. 과거부터 지금껏 계속 성가대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너는 날마다 안 죽었구나.” 내가 너한테 시간 속에서 과거를 준 것은 날라가버린 거예요. 소실되어버린 것이 과거죠. 끊어진 거예요. 인간에게는 항상 시간이라는 꼬리가 생기면 생길수록 현재가 과거를 가위가지고 생길 때마다 싹둑싹둑 끊어줘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경험했던 겁니다.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당부하는 것은 과거와 단절시키라는 거예요. 애굽과 단절시켜라. 이것은 성경을 봐야 돼요, 그냥 설명하는 것보다도. 출애굽기 15장 26절,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그 다음부터 중요해요.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자, 보세요.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이 말은 그 질병이, 그 재앙이 너희한테 유보되어 있다는 거예요. 조건이 있어요. 모든 율례와 계명을 지키는 경우에 그 재앙은 유보되어 있는 거예요. 안 내리겠다는 게 아니라 유보된 거예요. 그러면 그 율례와 법도와 계명 안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치료하는 효과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치료하는 효과.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럴 거예요. “우리에게 마음껏 율례와 법도, 계명을 이야기해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주님께서는 “애굽 생활을 잊어라. 끊어내라. 끝내라.” 그 애굽 생활을 끊어내고 이제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주께서 함께 하사 약속의 땅이라는 앞을 보고 들어가야 되는데 과거는 끊어내야 되는 거예요. 과거란 잊으라고 있는 것이고 앞은 기대하라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물 없고 양식 없을 때 그들 입에서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말은 Go to the 애굽. 고 투 더 이집트. 이집트로 돌아가자.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의 자아는 기억덩어리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아는 기억덩어리에요.

기억은 인간의 두뇌 해마에서 만들어져가지고 다른 곳으로 퍼져요. 기억과 연관되어 있는 쪽으로 쭉쭉 퍼져나간다고요. thalamus라고 하는 시상, amygdala라고 하는 것은 편도체, 그런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어요. 기억이 인간의 두뇌에서 쓸모가 있는데, 무수히 들어오는 감각에 대해 인간이 다 소화를 못 시킵니다. 그럼 그것을 어디서 관리하느냐 하면 시상에서.

thalamus라고 하는 시상에서 조절해가지고 이것은 새롭다 싶으면 받아들이고 안 그러면 제어를 해요. 통제를 해버립니다. 하나의 conductor,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stop한다고요. 새로우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안 받아들이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내 자아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감각과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걸 차단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자아는 어디에 들어있는가? 그 자아는 인간 속에 없어요. 그러니까 뇌과학적 설명이 이게 혼돈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분명히 누가, 인간 속에 뭔가 주인공이 있는데, 주인공이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 조절이 되는데, 조절자를 나와 보라고 하니까 그 조절자가 없어요, 인간의 두뇌 속에. 귀신같아. 인간 속에 누가 영적인 귀신이 지배하는 거 같아요.

저건 유리하다, 불리하다를 누가 결정해야 되잖아요. 결정하는데 결정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기억된 것 가지고 참고적으로 한다는 거예요. 누가? 셀프(self). 자아가. 자아가 어디 있는데? 없어. 도대체 이게 보통 문제 아니죠.

과학을 하는 인간들이 사기꾼 아닌 것 같은데 살짝 사기꾼들이에요. 해답도 없으면서 되게 큰소리치거든요, 해답도 없으면서. 그런데 오늘날 믿을 구석은 과학밖에 없어요. 철학도 종교도 믿을 게 없고 오직 믿을 것은 과학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떤 철학자가 이야기합니다. 자아는 어디에 있느냐. 내 바깥에 있다. 바깥 어디에? 환경에. 환경 어느 환경 말이고? 자연? 아니. 뭐? 국가. 바로 다니엘 7장 짐승의 등장입니다. 짐승의 등장.

악마가, 귀신이, 마귀가 어디에 있느냐고 할 때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왜냐하면 영적 존재에 대해서는 어디 있느냐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인간은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디 있느냐는 국소적인 질문이 성립돼요. 데카르트가 말한 좌표 속에서 x,y의 좌표점을 찍을 수가 있어요. 존재니까.

그런데 귀신은 천사거든요. 천사라서 이 좌표를 뛰어넘어 우발적이에요. 우발적이고 돌발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질문을 바꿔야 돼요. 악마가 어디 있느냐 하지 말고. 있으면 뭐 찾아갈래? 네비게이션으로 찾아가면 거기 있습니까? 흉가 아니에요. ‘악마는 어디 있느냐’가 아니라 ‘악마는 무엇을 가지고 활동합니까?’ 또는 ‘어느 속에서 활동합니까?’라고 할 때 다니엘에서 인간은 국가를 통해서 활동합니다.

그러니까 그 철학자의 말이 맞죠. 인간 개인이 듣고 보고하는 모든 것은 다 어디서 주어지는 겁니까? 지가 소속되어 있는 국가로부터 주어지는 거예요. 북한 김정은이라는 젊은 사람 밑에서 늙은 할아버지들이 박수치는 것 좀 한번 보세요. 무겁게 훈장 달고 박수치고 있어요. 만약에 억지로 친다 그러면 그 다음날 아오지탄광 가는 수가 있기 때문에. 카메라 비디오 다 찍어서 어느 인간이 억지로 웃는 척하고 박수치는지 다 조사하기 때문에. 또 그 일하는 기관이 있잖아요, 북한에서. 그래서 전부다 그렇게 박수치는 거예요.

여러분들 뉴스에서 봤죠? 그게 어느 점에서 비정상입니까? 어느 점에서 비정상이에요? 비정상은 맞잖아요, 분명히. 100% 투표에 100% 찬성. 이건 말도 안 되죠. 인간이 기계도 아니고 붕어빵도 아니고. 그러면 여러분 보기에 어느 점에서 그들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관심도 없어요? 그런 거 내 일 아니라고, 우리 아이 키우는 거하고 관계없다고 이야기를 안 하시는 겁니까?

우리하고 어떤 차이가 나느냐고 묻는 게 아니고 어느 점에서 그들이 문제가 되느냐. 또 알려드려요? 오늘 알려드리는 게 왜 이리 많노. 북한은 우리가 하는 혼잡스러운 노선을 통과해서 최종적 짐승이에요. 극단적 짐승입니다. 한결같죠. 균일화되어 있죠. 개성 없죠. 그런 북한 욕하지 말고 우리가 추구하는 바가 바로 그 세계에요.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서, 희한하게도 그 나라는.

여러분들 히틀러 알죠? 나치 한번 보세요, 나치. 히틀러가 콧수염 달고 연설하잖아요. 그 사람 나이 오십쯤 더 됐는데 그 사람이 연설할 때 그 많은 군중들이 반발합니까? 반발 못 하죠. 그냥 미쳤죠. 집단 최면에 걸렸죠. 그런데 그 히틀러가 얼마나 많은 자국민들을 죽였는가 생각해보세요. 무지무지하게 죽였어요, 정치범들. 자기의 정치적 정적을 많이 죽였습니다. 공포정치죠.

죽이는 이유가 그것이 악마가 쓰는 무기입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종노릇한다 (히브리서 2장 15절). 딱 그 구절이 가장 우리 가슴에 와 닿는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죽기를 무서워한다면 비록 우리가 이 남조선에 살아도 우리는 북조선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를 바 없어요. 뭐 이만갑, 삼만갑해도 소용 없어요. 죽기를 무서워한다면 한국이 아니고 미국 가도 마귀의 품에서 벗어나지를 못한 겁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국가,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세계, 그게 인간의 희망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 세계.

그 세계의 특징을 말하라면 목숨을 보장해주는 세계에요. 국가 없이는 죽잖아요. 그러니까 목숨을 보장해주는 세계이고 주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죽으라고 하는 거고. 반대도 그렇게 반대일 수가 없어요.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라하시죠. 십자가 지고 가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이에요. 죄인 주제에 어디서 살려고 깝쭉대? 죄 지었나? 죄 지었습니다. 그럼 죽어. 그게 바로 악마를 파악하는 유일한 지점이에요, 그게. 내가 죽어야 될 이유는 천하의 죄인이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성도죠. 그 사람이 바로 구원되는 사람이에요.

아까 예를 들어서 남편이 아내한테 징징대면서 나는 이렇게 희생하는데 당신은 좀만 도와주면 안 되느냐. 복음 같은 취미생활 하지 말고 같이 협조해서 내 말 잘 들어라. 그러니까 가부장제도가 옛날처럼 술 먹고 엎고 때리는 가부장제도도 있지만 요즘 현대판 가부장제는 싹싹 빌어가지고 자기의 통솔 아래 노예로 만드는 그러한 가부장제도. 그 사람에게 동정심을 유발하고 늘 징징대면서 난 너 없이는 못 사는 거 알지? 그치? 그런 가부장제도. 수법은 달라도 노리는 것은 ‘나 죽기 싫어’란 뜻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과 따먹은 자는 이미 죽은 자이죠. 그런데 악마는 살 때까지 한번 살아봐야지. 버텨라, 너의 착함과 너의 선함과 너의 우수함과 너의 훌륭한 자질, 그거 아깝지 않냐? 널 죽여버리면 하나님도 아까울 거야. 하나님도 쓸모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네 착함을 유지해라. 그러면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실 것이다. 이게 바로 악마가, 살고자 국가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외치는 그들의 교리입니다. 종교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210513a 베드로전서5장 8절(악마추격자)-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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