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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4 17:16:38 조회 : 189         
35강-골 3장 16-17절(영적대화)210704 - 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180.11)
35강-골 3장 16-17절(영적대화)210704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3장 16-17절입니다.

골로새서 3:16-17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오늘 본문에 보면, 뭘 자꾸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여기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이 하라고 한 그것은 자기의 우선되는 과업 또는 일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다른 일에 바빠요. 다른 일이 더 급합니다.

그런데 방금 본 본문 3장 16, 17절 보게 되면 자꾸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하라고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신을 왜 믿습니까? 우리 주변에 신을 믿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굳이 신을 믿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인간이 이 땅에 살려고 한다면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가치, 그 가치에 합세해야 됩니다. 공유할 수 있는, 다 같이 용납이 되는 그런 세계를 먼저 우선적으로 생각을 해줘야 이 세상에 들어가서 한 자리라도 차지해서 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방금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우리한테 하나님의 계시로 이야기하는 것, 이것은 인간이라고 한다면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그런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신에 관련해서 일을 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굳이 다 해야 된다. 이 시대가 거기에 동의하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이 세계와 그리고 태어나면서 교육받은 이 세대 사이 그 중간에 끼어있어서 늘 주저하게 만들고 주춤하게 되는 그런 처지에 있어요. 우선순위가 자꾸 어느 쪽이냐 하면, 이 세상과 같이 하고 싶은 생각, 우선순위가 그쪽에 쏠리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일을 하라, 하는 거기에 대해서는 자꾸 뒤로 미루고 싶은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일이 그렇게 답답하지가 않아요. 시급하게 느껴지지를 않는 겁니다. 하나님 믿으라고 한다면, 대대로 3대째 믿는 가정이다, 그렇게 해가지고 ‘믿으라 하면 믿지 뭐. 하나님 믿지 뭐.’

그렇게 믿겠다 하는 그 말은 뭐냐 하면, 기존의 내가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공유된 가치관에 그냥 몸담아 두면서 숟가락 하나 그냥 얻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숟가락 하나 얻는 것밖에 안 돼요. ‘하나님 믿으라고요? 믿지 뭐. 찬양하라고요? 찬양하지 뭐.’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하지 뭐.’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 다녔으면 성경 지식 얼추 알잖아요. 하면 되지요. 하기는 하는데 이게 우선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그런 태도를 가지고 하게 된다 그 말입니다. 이게 제일 시급한 일로 여겨지지는 않아요. 왜냐? 우리 몸이 세상 쪽에, 이미 여기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이야기를 지금 사도바울이 하고 있다는 느낌이 확 들어오는 거예요. 신은 그냥 보험 하나 걸치고 있는 것처럼, 건강보험 하나 걸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나 교회 하나 걸치고 있는 거예요. 그 정도 느낌밖에 오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진지하게 본 사람 같으면 하나님 믿으라는 게 아니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그걸 간파해야 돼요. 하나님 믿으면 숟가락 얻는 게 되지만 주 예수를 믿어버리면 십자가 사건과 관련되어 있어요.

십자가 사건과 관련되어 버리면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 땅에 인간들에게 더럽게 짓밟혀버린 그 하나님을 믿으라, 가 되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사람들에게 거부당한 그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이에요. 사람들이 필요 없다고 내쫓아버리고 훌쳐내버린 그 하나님 쫓아가서 그 하나님을 믿으라는 겁니다. 쫓겨난 그 현장에서. 하나님이 달라요.

따라서 기존에 있는 하나님과 다르다는 말은 두 종류의 하나님 둘 다를 알고 있어야 돼요. 세상 사람들, 모든 인간이 공히 같은 가치관으로서 그렇게 마음먹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용납이 되는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진짜 하나님을 내쫓아버린 그 하나님이었습니다. 여호와라고 믿는 그 유대 사회가 추방시킨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이 말은, 모든 인간들이 진짜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는 채로 이 땅에 출생을 한 거예요. 이 땅에 그렇게 태어난 겁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말씀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를 못했어요. 여러분, 믿음 주지 못하는 예수님을 상상해 봤습니까? 예수님은 믿음을 주지를 못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믿음을 주지를 못했어요. 제자들은 끝까지 고개를 갸우뚱 한 겁니다. ‘갈 때까지 가보기는 하겠다마는 예수님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이상하게 미덥지가 않네.’ 일단 들어보기는 하겠다마는 미덥지가 않아요. 심지어 베드로까지도요.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서 그러한 경험을 했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이 경험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진짜 주의 백성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게 된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고 난 뒤에 성령이 올 때 그때입니다.

성령이 오니까 뭔가 예수님이 미덥지가 않은 것이 아니고 내가 나에게 믿음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기자신을 발견한 거예요. 내가 알던 내가 이게 엉터리였다는 겁니다. 내가 알던 내가 엉터리였다는 이야기를 같은 인간들끼리 대화하는 것,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내용이에요.

서로 권면하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 신령한 노래, 그것도 대화지요, 다 합해서 그것을 대화라 하는데 서로 대화해라. 어떤 대화를 하라는 말입니까? 내가 알던 나는 엉터리였다는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라는 말이지요.

내가 사수하고 내가 지키려고 하는 나는 그것은 진정한 나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동안 나는 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든 하나님이든 믿을만하면 믿겠다고 내 쪽에서 어떤 시도를 시작한 거예요. 나는 아무 문제 없다고 여겼거든요.

나는 아무 문제가 없고 건전한 사고와 건전한 지식을 갖고 있는 내가 본격적으로 하나님 믿고 천당 가볼까 싶어서 시도를 했는데 그 나가 잘못된 나였다는 그 이야기를 서로가 서로에게 끄집어내는 거요. 이게 성도끼리의 성령 안에서 대화입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엉터리였어.” 이 이야기는 성도끼리 밤새도록 이야기 해도요, 피곤하지를 않아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 이야기는 초반에 좀 듣자마자 피곤해요. 역시 나는 잘났어, 그 이야기를 반복하는데 그것 못 들어줍니다. 못 들어줘요.

오늘 본문에 ‘피차’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너와 나 ‘피차’ 이 말은 인간사회는 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너와 내가 존재한다는 거지요. ‘너와 내가 존재할 때에 너도 나의 주인이 될 수 없고 너도 나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자. 내가 너에게 주인 노릇 안 할게. 내가 너를 안 가르칠게. 왜? 내가 아는 나는 엉터리기 때문에. 엉터리가 뭘 너에게 가르쳐?’

내가 엉터리라는 것을 완전히 그것을 깨우치게 하는 그 내용, 전에는 내가 이랬는데 지금은 완전히 하나님 앞에 너는 이것 밖에 안 돼, 라고 깨우침을 받는 그 사실을 남에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저쪽도 마찬가지고요.

세상 사람의 모든 가치관이나 의미라 하는 것은 상호 만나서 대화하는 가운데 다 형성이 되게 되어 있어요. 그 대화 중에서 한가지 예를 들면, 담요 위에 내려치는 화투판입니다. 화투 칠 때 혼자 치는 것은 재미없어요. 그것은 오늘 손님 오는가, 패나 볼까 싶어서 치마 이만큼 걷어 놀리고 사창가에서 손님 오기 전에 패 보는 것, 그런 사람이나 하는 것이고, 그건 혼자 하는 것이지요.

화투는 같이 치거든요. 같이 화투 치는데 그러다가 성령 받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화투 치다 성령 받으면요 그 담요 확 뒤집어버립니다. 담요를 확 엎어버리면 그 담요 위에서 벌어졌던 그 역사, 그 모든 단어와 역사가 무효화 돼요.

내가 지금껏 어디서 태어났고 어디서 공부했고 어떻게 살아왔고 이만큼 했다는 그 모든 것은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대화를 시도하면서 그걸 전부 다 무효화시키는 겁니다. 내가 어느 교회 목사고 장로고 집사고 신학교는 어디 나왔고, 그걸 전부 다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라 그 말이지요. 그 이야기를! 성도라면!

우리가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로마서 10장에 보게 되면 그 구원하는 방식이 뭐냐? 대화입니다. 로마서 10장에 보게 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3절에 그렇게 나와 있고 14절에 보면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하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도 세상의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서로 마주 앉아서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그 가치와 의미를 끄집어내잖아요. 다음 대선에서 누구 찍어줄 거야, 이재명 찍을 거야, 누구야, 이런 것은 둘이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그 내용이 나오잖아요.

마찬가지로 구원을 하는 방식이 대화라면 그 대화가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듣는다 그 말이지요. 15절에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보내심을 받는다. 성령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은 그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잘났다, 가 아니라 본인 자체가 먼저 남하고 만나기 전에 주님하고 그 사람하고 만나서 주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네가 그 상태로는 천국 못 온다. 너도 똑같아, 다른 사람하고. 나는 너에게, 싫어 버린바 된 하나님으로 나는 너에게 찾아온 거야.” 이런 뜻이거든요. 너뿐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싫어 버린 바 된 그런 하나님이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교회가 다 싫어하는 바에요. 모든 교회가, 십자가가 걸려있는 모든 교회가 다 싫어하는 그분이 우리 구원자에요.

무슨 교회를 해요? 모여서 뭐할건데요? 자기 장난치는 이야기, 자기 잘난 이야기나 해서 뭐할건데요? 헌금해서 복 받으라는 이야기를 왜 합니까, 거기서. 우리가 이 점을 더 심도 있게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평소에 이 땅에서 말씀 전하실 때에 제자들도 못 알아들었다 했잖아요. 못 알아듣는 이야기만 했어요.

그럴 때 예수님이 하는 모든 말씀이 그 개념을 가지고, 인간사회에서 통용되는 그 단어를 가지고 트릭을 쓰는 거예요. 같은 단어인데 그 단어의 뜻이 의미가 상반되는 두 개의 의미를 집어넣어서 단어를 사용하는 겁니다.

그걸 중의적 의미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고 했어요. 26절에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마리아 마르다가 이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너무나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가 살려면 살아 있어야 되고요. 사는 자가 예수를 믿으려면 본인이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인간 단어에 없습니다. 방금 제가 무슨 이야기 했는지 훅 지나가서 무슨 이야기 했는지 잘 모르겠지요.

자기가 살았다는 자는 절대로 예수를 못 믿게 되어 있어요. 왜? 주님께서 앞으로 그렇게 일을 하실 거니까, 십자가 지실 거니까요. “살아 있는 예수 믿느냐?” “믿습니다” 소용없어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죽은 예수를 믿어야 돼요. 죽은 예수를 믿어야 살았다는 인간이 산 게 아니고 죽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살아 있다고 여기거든요. 멀쩡하게 살아 있다 그 말이지요. 오늘도 아침에 식사 들 하셨지요. 살아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살아 있는 자는 절대로 예수를 못 믿도록 예수님 쪽에서 그렇게 발언을 하시는 겁니다. 대화에 나서시는 거예요.

제자들이 못 알아듣는 것은 당연하지요. 마리아 마르다가 못 알아듣는 그것은 당연한 거예요. 그런데 죽은 자가 된다면 이미 죽어버렸으니까 자기가 죽었다는 말은 자기 믿음도 끝났다는 뜻인데 어떻게 죽은 자가 예수를 믿습니까? 안 되잖아요.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예수 못 믿어요. 너는 내 말을 못 믿도록 이 땅에 출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마찬가지로 개념트릭이 또 일어납니다. 41절에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보는 자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보지 못하는 자가 나를 볼 것이라고 그렇게 하시거든요. 제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에요. 예수님께서 본다 못 본다, 를 인간이 쓰는 한 가지 단어가 아니고 두 가지 단어로 겹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한쪽은 예수님이 겹쳐서 거기에 의미를 담고…….

다시 이야기할게요. 본다 안 본다, 가 이렇게 겹쳐져 있습니다. 우리는 보는 사람을 소경이라고 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쪽, 공통된 가치를 공유하고 싶어서 환장한 우리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즐기고 노는데 같이 합세 못해서 환장한 우리, 세상이 돈놀이하는데 거기에서 같이 돈 못 벌어서 환장한 우리들에게 통하는 이 단어 속에는, 보지 못하는 것을 소경이라 하지 보는 것을 소경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담요판을 뒤엎는 거예요.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뒤엎어 버리는 겁니다. 네가 네 주제 파악 안되니까 네 죄가 그대로 있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너는 네 모든 이야기의 모든 행동의 출발점이 죄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그것을 왜 자꾸 네가 모르느냐? 모른다는 말은 네가 딱 소경이야. 네가 소경이니 모르지. 그게 소경임을 볼 줄 아는 것은 나 예수밖에 없어.” 그런 뜻이거든요.

“죽이려면 죽여. 죽이려면 죽이라고! 나를 죽일 때 너의 너 됨은, 너의 본색은 드러날 거야.”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런 일을 하셨어요.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은 사랑이다, 뭐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마시고 이런 일을 했다고요, 이런 일을요.

이걸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실에다 적용시켜 봅시다. 내가 처음부터 이야기했지만 신을 왜 믿어요? 믿을 필요 없는 신을 왜 믿습니까? 이 현실 자체가 신을 믿는다 하는 것은 숟가락 하나 얹는 것뿐이고 신을 믿는 것 그것은 그다지 시급하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요.

이 현실을 압축해서 설명해주는 그런 것은 노래 가사 외에는 별로 없어서 노래 가사 하나 들고 왔습니다. 유행가만 공부한다고 탓하지 마시고요. 어떤 노래 가사에 이런 것이 있어요. “곱고 희던 두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라는 노래에요. 김목경 씨, 기타 잘 치는 그 사람이 만든 노래에요.

“막내 아들 대학시험 뜬 눈으로 지내던 밤들 어렴풋이 생각나오 …… 큰딸 아이 결혼식 날 흘리던 눈물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 그 눈물을 기억하오” 아내가 일찍 죽었던 모양이지요.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아내 장례식 때 그걸 생각해서 노래를 만들었어요. 이거요 판 확 뒤집어버려야 돼요. 담요 뒤집어야 돼요. 얼마나 청승입니까, 지금. 날 두고 당신이 먼저 이 땅에서 떠나버리면 그 떠난 장례식에서 막내아들 대학 시험 칠 때 뜬눈으로 지새던 밤이 생각나고, 큰딸 결혼식 날 당신이 아쉬워서 눈물 흘린 그 눈물을 기억한다. 그래서 같이 가야 되는데 왜 당신은 혼자 그 먼 길을 가고, 이렇게 날 혼자 두고 말 한마디 없이 그냥 가느냐, 그 말이거든요.

이게 지금 내가 알던 나를 계속 고수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알던 나를. 나는 이렇다. 이거 포기 못 하겠다는 거예요. <가고파>라는 가곡에도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이렇게 하잖아요. 그 고향 바다 불바다 되었어요. 성경에 보면. 고향 바다, 내가 가고픈 고향 불바다 되어 있습니다.

아내가 죽어서 “나 혼자 두고 왜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이거 아내가 죽을 때 하지 말고 아내에게 성령이 임해서 복음 알거든 안 믿는 남편이 이 소리 해야 돼요. “여보, 어디로 가는데?” 여러분, 어디로 갑니까? 왜, 이 세상에 모든 인간이 다 같이 인정하는 그 공유된 가치관 그 세계를 버리고 당신 혼자 어디로 갑니까?

그 어디로 가는 그 아내의 뒷모습이나 예수를 버렸던 베드로가 본 예수의 뒷모습이나 십자가 지고 죽었던 예수님의 그 모습과 동일한 거예요. 동일하니까 예수님과 그 성도는 서로 대화가 통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같이 버림받은 입장이기 때문에. 말이 통한다고.

그 대화 내용을 믿어야 그게 바로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은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일을 구체적으로 나타낼 때는 주의 이름으로 나타냈거든요.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해놓고 예수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그걸 풀이하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그러니까 자기 백성이 지금 어디에 처해 있느냐 하면,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죄에 빠져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이름은, 주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하고 달라요. 주의 이름은 우리에게 출애굽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애굽, 이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어요.

탈출할 마음이 있나, 그 말입니다. 이 세상 공유된 가치관에 못 끼어들어서 환장하지 말고 반대로 탈출할 의사가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것도 모르면서 무슨 하나님을 알아요. 추상적인, 관념적인, 허황된 하나님 말고 구체적으로 이 땅 인간들과 섞였던 그 진짜 하나님을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 하나님은요, 우리에게 납득 되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아무리 하나님 알려고, 예수님 알려고 신학교까지 가서 공부를 해도 결국은 돌아서기 마련입니다. 성령이 없이는 돌아서기 마련이에요. 해놓고 돌아서면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예수 믿어보려고 노력을 했는데 역시 나는 아닌가 봐.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나는 아닌가 봐.”

그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이 주의 이름이 어떤 이름이냐 하면, 우리 힘으로 우리 죄에서 못 빠져 나오니까 주님이 우리 대신 전쟁을 일으키신 하나님 이름이 구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고 신약에는 주의 이름, 예수의 이름이에요. 전쟁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전쟁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전쟁을 해? 하나님이? 하나님이, 나 이렇다, 믿어라, 믿습니다, 하면 끝날 문제지 조용하게 끝날 문제인데 전쟁을 왜 벌여야 되는가?’

창세기 6장에 보면 1-3절에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늘에 있는 천사가 사람의 딸들과 혼인해서 거인족을 만들었다 그 말이거든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번성하면서 섞이지 말아야 될 것이 섞인 거예요. 타락한 악마가 인간 속에 들어왔다 그 이야기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순수한 인간이 없다 그 말이에요. 이걸 언급해놓고 그다음에 노아홍수로 싹쓸이 다 해버려요. 노아까지 다 물속에 잠기는 겁니다. 노아는 구사일생으로 방주 안에서 피신해서 살았지만 방주 없으면 마찬가지예요.

태어날 때부터 인간성 좋았다 하는 것은 아담의 후손치고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단 한 명도 없어요. 의인이 없다는 말은 첫째는, 죄에 갇혀 있고 두 번째, 죄에서 못 빠져 나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와 성도끼리 이야기할 때는 첫째는, 죄에 갇혀 있었고 두 번째, 내 힘으로 죄에서 못 빠져 나왔다. 세 번째, 그 죄가 무엇인가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죄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섞이지 말아야 될 이질적인 것이 섞여 버린 겁니다. 그것은 타락한 천사가 섞인 거예요. 타락한 천사가 하는 일 그것은 아담에게 따먹어라, 한 그 뱀이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이겁니다. “높아지자. 신이 되자. 높아질 때까지 한번 높아져 보자. 위대해질 때까지 한번 위대해져 보자.”

이 말은 끝까지 나 자신은 나를 포기하지 말자, 그거거든요. 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나는 나를 포기하지 말자는 겁니다. 그 죄에서 누가 벗어납니까? 끝까지 교회 나오나 교회 안 나오나, 교회 나와서도 끝까지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는 겁니다.

옛날에 7, 80년도 미국영화에 <델마와 루이스>라는 두 아줌마 이야기가 있어요. 남편에게 학대받던 일반적인 미국의 여인상인데 남편한테 학대받다가 남편 권총으로 쏴 죽이고 경찰로부터 도망치는 영화에요. 여성해방 비슷한 영화인데 그 두 아줌마가 죽이 맞았어요. 대화지요. 죽이 맞는 거예요. 내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죽이 맞는데 문제는 살인을 했기 때문에 경찰이 막 따라오는 거예요. 아마도 뉴멕시코인가, 신고가 들어가서 남부의 경찰관들이겠지요. 그 영화 마지막 장면이 뭐냐 하면, 인간해방을 보여주는데 그게 뭐냐? 쫓기다 쫓기다 차를 타고 절벽 끝으로 그대로 질주하는 겁니다.

그건 뭐냐? 두 아줌마는 자기 기분 안에 갇혀 있었어요. 사회에서 학대를 하니까 기분 나쁘니까 어디로 몰려가느냐 하면, 자기 기분 안에 자기 자아를 집어넣는 거예요. ‘이래 사나 저래 사나 한평생 기분이잖아.’ 기분대로 살다가 에라 마지막이다. 우리 손 잡고 웃으면서 엑셀 밟으면서 핸들 놔버립니다.

차는 그냥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영화 끝나요. 마지막에 신나게 중력이 주는 쾌감을 느끼면서 영화 끝났습니다. 한평생 산 것의 마지막은 절벽 밑으로 추락하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절벽 밑으로 추락하는 거지만 델마와 루이스라는 그 두 아줌마 주인공 입장에서는 내 기분 안에, 내 안에, 내 기분 안에.

그래서 인생이라 하는 것은 10년 뒤에는 잘되겠지, 20년 뒤에는 잘되겠지. 잘 되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항상 내 자아가 있기 때문에. 저 지중해 크루즈 여행 해 볼까, 그 여행 배 안에 누가 있는데? 내가 있는데? 소용없어요. 인간은 자기 기분에서 못 벗어나요. 마지막은 역시 기분이다, 자기 기분대로 살아요. 그것뿐입니다. 인생 뭐 있어? 간단해요. 죽도 밥도 아닌 개죽 같은 인생. 그걸 어느 노래에서는 농담과 한숨의 농축액, 농담과 한숨밖에 없어요.

세상 이야기 주고받으면서 카페에서 두 시간 반 동안 정치 이야기합니다. 다음 선거에서 누가 되느냐, 이야기해도 결국 마지막 결론은 뭐냐 하면, 커피값 누가 낼래요. 결국 커피 값 문제고 술값 문제에요. 그리고 그다음에 나오는 멘트는 기분 더럽다. 결국 기분이잖아요. 전부 다 기분이에요, 기분. 내가 있는 한. 우리는 못 빠져나가요.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고 되어 있잖아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영적 노래, 신령한 노래는 바로 주의 이름이 한 승리의 결과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15장에 나와요.

홍해바다 건너고 난 뒤에 그 홍해 물가에 애굽 군사들의 시체와 쓰레기들이 널부러져 있는 광경을 보면서 모세의 누나가 선창하면서 했던 찬양입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말과 그 탄자 무기를 가진 그들이 어떤 자들이냐 하면, 바로 히브리인들이 지금껏 430년 동안 살던 그 애굽나라의 군대고 경찰들이에요. 치안질서를 위해서 있던 그 군대입니다. 자기들을 꼼짝 마라, 했던 그 권력자들이에요.

쉽게 말해서 홍콩에 주둔한 중공군이에요. 중공군이라는 말 오랜만에 씁니다. 중공군입니다 홍콩 주민들 아직도 꼼짝 못하고 있어요. 언론 같은 것 없어요. 민주주의 없습니다. 이게 비현실적입니까?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실을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권력을 피할 생각 안 하고 권력에 아부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그래야 내 기분이 좋아지니까. 내 몸이 편하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인간은 기분 그것뿐이니까요. 나라가 시켰다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어디 있는데요?

그것은 빌립보서 3장을 몰라서 그래요. 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골로새서 3장 2, 3절에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했잖아요.

도대체 성경 뭘 보고 있습니까? 찬양의 이유가 우리가 이기지 않았습니다, 하는 그 고백이에요. “내가 이기지 않았습니다. 내가 구원하려고 그렇게 애쓰게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할 자’에요. 그 구원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분으로서 그동안 나의 오해의 소지가 있던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제 1순위가 아니고 저 10순위 20순위로 밀렸던 그분이 나의 0순위보다 더 중요한, 나를 오늘날 나 되게 하신 그분입니다, 라는 이런 대화를 하라는 말입니다. 이런 대화를 끄집어내라는 겁니다. 이게 신령한 노래요 신령한 대화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이미 이런 언급을 하셨어요.

언급을 하셨는데 성도 자신을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도라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미리, 십자가 지고 난 뒤의 이야기를 미리 이야기를 해요. 왜냐하면 모든 주의 말씀은 미래 시점에서 과거를 해석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살아도 과거입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시점은 주님의 시점, 성령의 시점, 그것만 미래지 우리는 아무리 해도 제자리 뛰기이기 때문에 과거 안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그 주님의 미래에서 볼 때 자기 백성을 뭐로 보느냐 하면, 소자라고 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소자 또는 예수님과 대화가 되는 소자, 소자는 어린아이라는 뜻이에요. 아담은 처음 출발할 때 성인으로 태어났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너희가 어린아이처럼 되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 하는 거예요. 공식을 세우면 ‘어른은 지옥, 어린애는 천국’이에요. 공식 너무 간단합니까?

마태복음 25장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하실 때 양과 염소 이야기 죽 하면서 35, 36절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할 때에 천국 간 사람이 주님한테 반문을 해요. “제가 언제 주님한테 먹을 것을 주었습니까? 제가 언제 주님께 마실 물을 드린 적이 드린 기억이 없습니다.”

이 기억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고 난 뒤에 그 세상과 결별한, 세상 사람이 같이 공유하는 가치관을 형성하는 이 세상과 결별했을 때 그 결별의 마지막 색깔, 그 색깔이 바로 나는 이런 기억을 갖고 있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내가 있음, 나는 아직까지 괜찮다, 나는 건전하다, 나는 문제없다, 하자 없다, 라고 했을 때 그때 내가 내세울 수 있는 마지막 것은 뭐냐? “내 기억은……” 이라고 해요. 내 기억은……, 내 기억에는……, 이런 말. “내 기억에는 주님한테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실제로 주님께 찬양하고 주님께 헌금하고 주님께 예배하더라도 그 주인공은 괜찮다고 여기는 나 자신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우리 교회 20년 다녔고……, 이게 뭐냐 하면, 내가 내 주인공이었으니까 나와 결별 된 상태에서 주님께서 일을 벌여 버리면 내가 마지막 쥐고 있는 것은, 나는 내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억 속에는 내가 주님한테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는 말을 할 때 그게 성도에요. 그게 소자입니다. 다시 태어난 거예요. 출애굽 된 거예요.

천국에서 찬양이 일어나는데 그 찬양에 성도들이 마지막 기억하고 있는 것은 바로 불바다된 세상입니다. 요한계시록 15장, 영적 출애굽을 하고 있는 장면이에요. 2절에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그 유리바다에 짐승과 우상들이 거기 속해 있는 거예요. 거기에 진노와 저주가 있고 그걸 지켜보면서 건너 오는 거예요. 3절에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성도는 드디어 천국으로 진입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그들이 있던 마지막 기억은 뭐냐 하면, 이 세상 내가 살던 고향은 불바다 고향, 그리워라, 그리워, 불바다 고향. 그 불바다 된 그걸 우리는 몰랐어요.

같은 인간들끼리 지혜를 끄집어내서 그들의 노력과 애씀, 장구한 역사와 문명을 자랑하는 시대라고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던 것, 그렇게 배웠던 그것이 여러분의 마지막 기억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을 몰라서는 안 돼요. 왜 우리가 살던 곳이 그곳이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살았었었지, 가 되는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우리는 얼른 어린아이로 변해야 됩니다.

시간이 좀 가더라도 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울산강의에 좀 이르게 가서 거리를 걸으면서 약간은 놀라운 체험을 했어요. 새순교회 뒤쪽 골목이 있는데 거기에 울산에서도 유명한 점집이 한곳에 집결되어 있는 곳입니다. 어떤 점집은 노골적으로 간판 이름이 ‘무당’이에요. 내가 안 봤으면 못 믿을 뻔했어요. 한글로 간판 두 글자 ‘무당’이에요.

그런 집부터 서른 몇 집이 죽 있는데 그 거리를 지나면서 뭘 느꼈느냐? 제가 어릴 적 9살 때 10살, 열두 살 그때쯤 봤던 그 골목의 풍경이 그대로 살아 있어요. 사람들이 다 떠나서 개발이 안 되는 지역이라 집값이 헐기 때문에 무당들이 많이 몰려든 거예요.

거기 있던 아저씨 아줌마들 볼 때 내가 잊었던 어릴 때 봤던 아줌마 아저씨들이 그대로 그 모습으로 있어요. 제가 어릴 때 어른들은 전부 다 위대하고 훌륭하고 똑똑하고 착하고 모든 것이 존경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어른들에 대해서는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고요, 그리고 어른들이 하는 말은 말만 해도 까르르 웃고 싶고, 그런 친근함이 있어요.

동네 어른들, 아줌마들, 아줌마들도 전부 다 천사고 아저씨들은 전부 다 훌륭한 사람들이고. 그때 그 모습이 확 기억이 치밀어 오면서 그 만나는 뒷골목 점집 거리를 한 10분간 지나가면서 전부 다 내가 먼저 인사하고 싶어요. ‘그때 그 시절을 유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문 여니까 노가리 굽는 냄새 나는데 야, 저 노가리에 막걸리 조합, 생각해 보세요. 그 냄새와 막걸리 그 조합 생각할 때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절로 찬미가 될 정도에요. 그러나 신학적 지식으로 보게 되면 인간 나이 50깨나 먹어 가지고 퇴근했으면 빨리 집구석에 안 들어가고 처자식도 모르고 저기서 술이나 먹고 있고 저거 혼나야 돼, 아이고 인간아, 왜 사냐, 이런 신학적 평가가 될 것인데 이상하게 그 순간 만큼은 존경스러워요.

내 마음이 어린애 마음이 된 것 같아요. 아무것도 비판하기 싫고 따지기도 싫어요. 그냥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이 이 시대를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꽁초 버려도 그 모습도 멋있어 보였어요. ‘야, 제임스 딘이다.’ 저 쓰레기 저거 얼마나 더러운데, 그런 생각이 안 나요. 담배 연기조차 감미로울 정도로. 담배 연기조차.

어떤 아저씨는 몸빼 입고 돌아다녀요. 그래도 그 패션이 멋있어. ‘나도 저렇게 몸빼 한 번 입어봐야지.’ 어릴 때 ‘나도 크면 저 노가리에 막걸리 한번 원 없이 마셔봐야겠다.’ 장기 두고 앉아있던 그 모습, 둘이 앉아서 장기 두는 그 모습 아시지요. 잘못하면 장기판 다 엎어지는 그런 받침 있잖아요. 그런 60년대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어요.

그 점집 골목. 아줌마 화장하는 그 꼬라지 하고는! 완전히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그런 대목, 마담의 화장……, 그대로 다 보여주고 있어요. 아, 어릴 때 어떤 누구도 비판하지 않았고, 어떤 누구도 평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았던 그 어릴 때 모습, 그대로 그 환경에 들어와서 아, 어린애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이 네가 누굴 비판할 잽이 안된다는 사실,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 어느 누구도 판단하지 않고 평하지 않고, 그래, 네 꼬라지나 내 꼬라지나 죄를 못 이기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마찬가지!

그것이 바로 대화입니다. 성도끼리의 대화에요. 골로새서 3장 13절에, 서로 용납하고 서로 참고 서로 용서하고. 우리가 남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내가 이렇게 지적질 잘하는 내가 이렇게 바뀌었어요. 달라졌습니다. 복음 아닌 것은 복음 아닌 것 맞고요. 그것은 그거고요. 바로 내가 나를 알았다고 하는데 내 안에 타락한 천사가 있다는 사실을, 섞인 피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몰랐었습니다.

노아 때는 물심판이지요. 마지막 때는 불심판이에요. 섞여 있다는 겁니다. 악마의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악마의 요소가 뭐냐? 우리 주님께서 악마를 어떻게 심판했습니까?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냥 떨어진 거예요. 높은데 기어 올라가다가 바닥으로 떨어진 겁니다. 그 바닥으로 떨어진 것 그게 바로 어린아이 마음 아닙니까?

어린아이가 되게 되면 바닥이 없어요. 그 자체가 본인이 바닥인 것을 알고 모든 어른들은 존경스러우니까 뭐든지 배울 게 있고 인생 나보다 더 살았으니까 하나라도 나보다 더 똑똑하고 아는 게 많은 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것은 바닥에 있을 때나 나오는 안목이에요.

마지막으로 예수님 당시에 찬양이 있는 대목을 찾아보겠어요. 마태복음 21장 9절이에요.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천국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땅으로 이동했어요. 그리고 지금 우리의 진짜 하나님, 인간들이 몰랐던 하나님은 지금 나귀를 타고 오시는 거예요. 왕이기 때문에 왕 값을 해야 돼요. 왕이기 때문에 왕 자체를 보여 줘야 되는데 왕은 왕인데 왕 같지도 않은 왕, 이 이중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타기는 탔는데 나귀를 타는 거예요.

왕 같으면 절대로 타지 않을, 이 세상 왕 권세자는 절대로 타지 않을 그런, 타기는 탔는데 세상 왕은 타지 않을 것을 타시는 그것이 나귀입니다. 스가랴 예언대로 나귀 타고 오시는데 5절에 보면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이 이중 플레이, 이 이중 개념의 트릭 때문에 저 사람은 지금 메시아 흉내 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했지 인정 못했어요. 마태복음 20장 28절에 보면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따라서 “제자들아, 너희들은 세상 집권자처럼 높은 자리에 가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어라.” 제자들 너희 처지와 현재의 현상은 뭐냐? 뚝 떨어진 거예요. 네가 잘못이 아니라 네 안에 이질적인 악마적 요소 때문에 땅에 뚝 떨어진 거예요. 바닥까지 떨어진 거예요.

이 떨어진 것을 네가 성령을 받게 되면 그걸 알게 될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이 소자, 제가 언제, 제가 언제 주님한테 했습니까, 그 정도로 자아가, 내가 나한테 구원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게 바로 그 소자들의 집합을 가지고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소자들의 집합, 예수님과 먼저 대화가 성립된 자들의 집합체,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거기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영적인 노래와 영적인 대화가 오고 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얼추 교회 흉내 낸다고 교회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시고, 하나님 믿는다고 숟가락 걸친다고 신자 아님을 깨닫게 해주시고, 화투판을 뒤집듯이 주여, 날마다 우리의 판을 내 잘남의 판을 높아지고 대단한 판을 날마다 엎어서 어린아이같이 소자처럼 도리어 주님한테 늘 반문하면서 반전된 기쁨으로 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35강-골 3장 16-17절(영적대화)210704 - 이 근호 목사.hwp (72.0K), Down: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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