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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5 07:32:29 조회 : 139         
20210702b 울산강의-역대기상(2강) 1장 5절 : 있음과 없음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20210702b 울산강의-역대기상(2강) 1장 5절 : 있음과 없음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인간이 땅을 분할하게 되면 여기서 소유의식이 발생되죠. 부동산을 가졌으니까. 소유의식을 후손들에게 계속 물려줍니다. 조상은 사라져도 후손이 내가 일궜던 이 땅을 네가 해라. 이게 신의 복이야. 그리고 그걸 지켜내야 돼. 다른 인간들이 넘보면 그걸 결사적으로 싸워서 이겨내야 돼.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인간의 역사는 소유의 역사에요. 있음이 계속 있음을 있는 인간들에게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거예요. 만약 후손이 없으면 그 있음의 재산은 땅은 부동산은 다른 가까운 있음의 친척 몫으로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땅 있음으로 인하여 인간은 스스로 확정하고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가진 재산 없으면 이건 있어도 있는 인간 아니에요. 땅이 있어야 돼요. 거쳐야 땅이 있어야 돼요. 그리고 그 땅을 지키기 위해서 뭐가 생겼느냐 하면 소유를 지키기 위해서 여기서 정치적 구조화에 나섭니다. 힘의 구조. 이게 뭐냐 하면 국가로 발전하죠. 하나에 씨족으로 모자라니까 부족이 되고 부족이 모자라니까 부족국가를 이루고 협력하게 돼요. 협동하게 돼있어요.

세계 제1차 대전, 왜 1차 대전에 천사백만 사람이 죽었는데 왜 죽었는가? 1차 대전은 왜 일어났는가? 전부 다 자기 패거리 만들려하다 일어났어요. 독일이 그때는 프로이센이죠. 독일이 프랑스와 전쟁해서 독일이 이겼거든요. 비스마르크가 철혈정책으로 이겼단 말이죠. 이겨놓고 걱정되는 거예요. 또 반격 들어올까 싶어서. 프랑스 왕따 시키기 위해서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계약 맺고 러시아와 계약 맺고 이런 식으로 조약을 맺어서 프랑스를 왕따 시키는 겁니다. 꼭 학급에 애 하나 왕따 시키듯이 그렇게 왕따 시키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아까 배웠어요. 독일이 성립되려면 뭐가 있어야 돼요? 한 자로? 땅이 있음이 나 있음을 증명해주는 거예요. 땅 있음이 국가 있음이에요. 여러분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에 뭐가 없습니까? 땅이 없어요. 땅 없는 사람이 광야로 나간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에겐 땅은 없지만 뭐가 있느냐 하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있잖아요. 하나님이 동행하잖아요. 주님이 있잖아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선 땅 없는 곳으로 간 거예요.

열두 정탐꾼을 보냈을 때 이스라엘은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땅이 없고 젖과 꿀이 흐르고 포도나무 알이 큰 건 알겠는데 이미 그 땅에 누가 있었다? 그 땅의 소유자가 있었다는 거예요. 땅의 주인공이 있어서 우리는 못 들어가고 그 땅의 주인공이 힘이 우리보다 월등하게 세다. 우리는 오도 가도 못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가 뭘 봤습니까? 분명히 약속의 땅의 그들이 힘은 센데 뭐는 아니다? 그 땅의 소유자는 아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니까. 땅의 있음과 약속의 있음의 차이에요. “사모님 땅 있습니까, 약속이 있습니까? 아파트 있어요, 약속 있어요?” 어느 게 우선입니까? 어느 게 살려요, 어느 게 생명입니까? 약속이 생명이잖아요. 지식적으로. 시험 치면 백 점이에요. 뭐가 틀리고 다 맞아요.

문제는 약속은 인간에게서 뭐가 되느냐 하면 불가능한 인식이라는 겁니다. 약속을 믿는 나의 지식이 약속을 훼방해요. 그 약속을 믿는 지식까지 내가 약속에 의해서 파괴되지 아니하면 우린 약속의 땅에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아담의 분할된 구조가, 구조 파괴에 나서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거는 그거에요.

여기 역대상, 역대하의 그 줄거리는 뭐냐? 인간의 소유로 결성된 그 구조가 새로운 인간들과 그리고 변동사항에서 늘 그 구조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 이게 해체되고 재결합 되고, 해체되고 재결합 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겁니다. 그 해체시킬 때 개입되는 것, 그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단어 하나 동원해볼게요. 구원과 심판, 같은 말로 복과 저주. 복과 저주라 할 때 이것 참 어려운 건데 여러분 감당해야 돼요. 복과 저주할 때 우리는 여기서 복과 저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싶어 해요. 선택하되 저주를 선택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뭘 선택하느냐? 복을 선택하는 거예요. 또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가운데 어디 가고 싶어요? 천국 가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천국과 지옥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에서 나와요. 십자가에서 저주 나오고 십자가에서 복이 나오거든요. 십자가에서 천국 나오고 십자가에서 지옥이 나온다고요. 우리는 어느 둘 중에 하나를 고를 수가 없어요. 우리는 십자가 안에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나의 지식의 선택은 무너지는 거예요. 나는 천국 가고 싶어요, 하는 지식이 이게 십자가에 의해서 무너져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천국과 구원 사이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자아가 나오기 때문에. 처음에 우리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언약이 인간과 만나면서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거든요. 갈라지면서 헤헤 그러면서 뭐가 튀어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내 욕구와 내 욕망이 튀어나와요. 심판과 구원 사이에서 욕망이 튀어나오지요.

그러면 진짜 언약을 이루신 분은 어디를 겨냥하고 어디를 표적 삼아 공격하겠습니까? “너 천국 갈래, 지옥 갈래?”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뭐라 합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라고 이야기하지요. 우리는 천국 가고 싶어 환장했어요. 교회 나왔으니까 천당 보내달라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혀 문제 삼지 않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주님은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있어요. 언약이 언약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하고 이용할 뿐이거든요. 아담의 흙 조각의 일부기 때문에.

아담의 흙 조각이 악마가 다스리는 이 세상에 뿌려지는 거예요. 한 번 뿌려볼까요, 위에서? 뿌려지게 되면 여기서 만남이 일어나지요. 만남이 일어나서 이 게 떡이 되어 악마의 권세에서 벗어날 위인은 아무도 없어요. 들러붙어서 접착제에. 똑똑한 것도 소용없어요. 잘난 것도 소용없고 신앙 좋은 것도 소용없고. 떡 둘러붙어서 악마를 못 이겨요. 신앙 좋아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악마의 재주를 이길 수 없습니다.

악마가 우리를 어떻게 달래느냐 하면 땅 있잖아요. 땅 이야기, 오늘 제목을 땅으로 할까? 땅을 아담 후손에 의해서 분할되게 했다. 아까 분할되게 되면 처음에는 씨족이요, 부족하다가 나중에 국가 된다 했지요. 그래서 모든 지명은 뭐가 되느냐? 국가가 돼요. 조그만 국가든 큰 국가든 민족국가가 된다고요. 국가가 되면 이쪽은 가만있어요, 이쪽은 국가 안 생깁니까? 여기서 구조들의 생기기 시작하는 거예요.

물 위에 참기름이나 휘발유를 부어보세요. 휘발유가 어떻게 됩니까? 뜨는데 하나도 안 뜨고 전부 다 섬처럼 다 조각, 조각나서 제각기 떠돌고 있지요. 떠돌다 만나면 커지기도 하고 이게 통합되기도 하고 통합되면 작은 기름덩어리는 큰 덩어리에 통합이 되면서 없어지는 거예요. 사라지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어릴 때 고향 찾아보세요. 고향 여러분의 집, 놀던 골목, 여러분이 잘 갔던 문방구 한 40년 후에 가보세요. 도시계획 걸려서 그 자리에 문방구고 뭐고 골목 같은 것 없어요. 거기에 신축 아파트 들어서서 새댁들만 아파트 다 차지하고 있어요. 없어요. <가고파>라는 가곡 있지요. 가사에,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바다가 보이지요.

그 놀던 친구들 어디 갔습니까? 내가 내 고향 바다 가면 친구들 다 소환해야 돼요? 사실은 소환하고 싶어서 소환해도 늙수그레한 것 필요 없고 타임머신 타고 다 젊은이들로 변해서 나도 젊고 걔도 젊고 해변에 놀던 걔들 그때 그 시절 고대로 재현돼야 돼요. 그래야 그게 고향입니다.

인간의 운명이고 인생이란 것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떠돌아다니는 기름방울 같아서 어디 붙어서 내가 어디서 잘라지고 어디로 통합되고 어디서 소속되고 어디서 그게 떨어져 나오고 이거는 쉴 새 없이 하면서 마치 큰 망망대해 스티로폼 하나에 노 저으면서 그래도 인생 선방했다고 스스로 자기한테 위로하면서 이만하면 수지맞는 장사잖소 하하하 웃어가면서 빈손으로 왔다가 이 정도면 인생 잘 산 것이지.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고 변명해가면서 사는 거예요.

모든 분할되고 통합되고 또 분할되고 쪼그라지고 힘과 힘의 밀림 상태에서 힘과 힘의 충돌에 의해서 떠밀리고 본의 아니게 인생은 살아갑니다. 인생은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 나든지 갑자기 죽어버리고, 사라져버려요. 이 지상에서 땅에서 사라져버려요. 뭐 내가 있음이 죽는 순간에 나의 있음은 뭐로 변하느냐? 나의 없음으로 변해요.

60까지 살았잖아요. 61세 되면 60세까지 산 것이 61세 죽음 앞에서 이건 없는 인생이 됩니다. 이게 죽음의 위력이고 악마의 위력이에요. 안 죽으려고 아등바등 살았는데 결국 안 죽으려고 노력한 그 모든 노력의 결과는 뭡니까? 죽음이에요. 평생을 참 난 바보처럼 살았군요. 평생을. 안 죽겠다고 그 목적 자체가 잘못 정했어요. 안 죽겠다고 살지 말고 왜 사는지를 알아야지요. “내가 없어져야 되는데 죽어야 되는데 왜 있지?” 질문을 반대로 가져가셔야 돼요.

결론부터 알아야 됩니다. 결론 아시고 그 다음에 그 결론에 맞추어서, 결론이란 내 결론이 아니고 주님이 이 세상을 보시는 그 결론과 동일한 안목을 성령을 통해서 부여받게 되면 주님이 세상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세상을 이해하게 되고 그렇게 이해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런 주님의 이해를 증거하라고 없는 내가 이 땅에 있음으로 출현됐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이 하나님의 창세전에 정해진 거예요. 언약된 겁니다.

약속을 지키는 게 아니고 내 자체가 약속이 돼요. 약속 과정에 일부로 거기에 가담돼있어요. 이 프로젝트는 이거는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위해서 프로젝트가 진행됐고 그 프로젝트의 한 일거리를 내가 맡은 게 돼요. 나는 하청에 하하하청 업체에요. 아웃소싱이에요. 나는 하청업체에요. 도대체 이 계획을 누가 했는지 그건 모르겠고 하여튼 간에 이 계획은 윗사람이 알아서 결정할 문제라는 것. 그것 때문에 나는 이 땅에 태어나야 했다는 거예요. 언약적 역사적 사명을 띠고.

문제는 그 역사적 사명이 이게 결론을 주께서 주실 때 주님이 주신 결론은 그 안에 뭐가 포함됐느냐 하면 악마에 속한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결론을 내리는가? 응시와 이해와 결론, 그 코스도 나한테 함께 있다는 것을 같이 느끼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내 내부에서 끊임없는 충돌과 마찰과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이것 해서 나한테 오는 이익이 무엇이냐, 라고 했다가 바보같이 그건 아니야. 이것은 바로 사탄의 생각이야. 언약을 위해서 내가 있는 거야. 그래서 나는 이 일을 하게 되었어. 이 일은 내가 목적한 것이 아니고 내가 기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하나님이 알아서 조성해가는 거고 나는 이 상황에서 주님께 감사할 거리만 찾으면 돼, 라고 생각하고 일하다가 이렇게 주께 감사하는데 저한테 뭐해줄 겁니까? 방금 언약적으로 하자 없는 결론을 내렸다고 자부하는 자부가 결국은 또 다시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그런 본성이 또 튀어나와버려요.

있음과 없음이 날마다 매일같이 이게 반복됩니다. 나는 없는 거야. 없기 때문에 있는 거야. 있는데 없음이 또 방해되네. 없어질까? 맨날 내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언약이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내가 있는데 우리는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내가 있다고 해놓고는 그 있음을 나의 있음으로 다치기 싫은 거예요. 그걸 고이 간직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기존에 아담에 속한 육신의 속성이 여전히 우리에게 위세를 떨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더 나가봅시다. 땅에 아담의 후손의 관할은 여기서 구조조성이 일어나죠. 내 가진 것이 파괴되고 종으로 팔려가고 그렇게 될 때 나는 천국 가고 싶어요. 지옥은 싫어. 나는 복을 받고 싶고 나는 저주는 받기는 싫어. 나는 영원히 있음의 존재되었지 없어지는 거룩한 존재가 아닌 저주스러운 그러한 존재가 되기 싫어, 라는 생각을 가질 때 둘로 쪼개질 때 이것은 바로 언약 사건에 의해서 우리에게 쪼개짐 현상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천국과 복과 있음에다가 집착할 때 여기에 누가 등장합니까? 여기에 자아(나)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나는 영원한 있음을 지향하는, 지향이란 말 어렵지요. 그러면 바꿉시다. 있음을 내가 추구하는 나는 그냥 나가 아니고 이 나가 신처럼 절대자처럼 영원히 있고 싶은 나가 되는 거예요. 나 앞에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지 말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나가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게 맞아요. 처음 만날 때 사돈 상견례 할 때 아이고 사돈 누구십니까?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사돈입니다. 나 영원히 누구한테 다치기 싫은 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조용히 살지 못하고 흔들어대는 이유가, 여기 지명에 나오는 모든 민족이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지는 이유가 그 무너짐, 부서짐 속에서 뭘 발굴해내는 거예요? 각자 절대적인 자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게 배후에서 악마가 그렇게 병들게 만드는 거예요. 천상천하유아독존이에요. 이 세상에 나보다 더 귀한 존재는 없다. 이것이 언약에 나온 예수님의 자기 부인하곤 완전히 상반되는 거죠. 이걸 우리한테 매일같이 드러내고 노출시키는 겁니다. 나한테 이익이냐, 나한테 손해냐 이것만 따지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여러분 그걸 알았으니까 그러면 언약은 뭘 노리겠습니까? 바로 방금 노출된 자아를 향하여 나를 향하여 드디어 언약이 폭격을 준비해놓았습니다. 복을 따낸 잘난 야곱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가진 하나님의 천사가 누굴 노립니까? 야곱의 자아성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오는 거예요. 씨름하는 거예요.

그때 야곱은 자기의 힘을 자랑하다가 힘의 원천이 되는 환도 뼈가 작살나는 그러한 행복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나가 무너지는 거예요. 나가 무너지면서 나는 죽고 그 죽음 안에서 언약에 의해서 통합된 나, 그러니까 천국 갈래가 아니라 천국 가고 지옥 가고 결정권이 나한테 있지 않고 그냥 이것은 주어지는 거다, 라는 주어지는 다른 분이 내 안에 들어오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분의 이름이 이스라엘의 이름이죠.

이래선 어려우니까 성경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사도행전 3장 6절, 이건 쉬운 거니까 제가 알아서 할게요.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다가갈 때에 앉은뱅이가 뭘 달라고 했던 모양이죠. 돈을 줄 수 있습니까 한 모양이에요. 그럴 때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다.” 네가 원하는 것 안 줄란다, 이 말이에요. 왜냐? 언약적 인식은 불가능한 인식이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것은 천국을 주는 게 아니고 언약을 줘요. 예수님을 주신다고요. 예수님 안의 행하심을 주신다고요.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예수님이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영원한 거예요.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죽어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겠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이 말은 예수님 자체가 부활이고 예수님 자체가 생명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있는 내가 생명을 선택하려고 하는 거예요. 선택하려면 자아가 문제가 없어야 돼요. 천국 가는 것은 누구의 결정의 결과다, 누구의 성과다? 나의 성과가 돼버려요. 그러면 그 천국은 주님의 나라가 아니고 가능한 나라가 돼버려요. 여기 있는 내가 가능한 결정을 내려서 얻은 가능한 천국은 그런 나라는 그런 천국은 없어요. 교회 와서 예수 믿고 갈 수 있는 천국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는 천국만 있어요. 다른 천국은 없는 거예요.

교회 와서 우리 알아야 할 것은 내가 교회 와서 활동하는 것, 내가 존재하는 것이 내가 천국 가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돼요. 그걸.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이미 앉은뱅이 자아가 베드로 보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들이 달라는 거예요. 이런 자세가 오늘날 우리 신에게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 바로 이 자세잖아요.

기도한 자세가 뭡니까? 내게 필요한 것을 신은 줘야 될 책임 있다고 주장하잖아요. 그럴 때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일관된 기도응답 궁금해요? 궁금하면 말씀드릴게요. 네가 원하기 때문에 내가 너한테 줄 수 없다. 이게 정답이에요. 나가 죽어라 이 말이에요. 왜냐하면 살아 있으면 계속 본인이 원하는 달라하기 때문에 차라리 죽어버려라, 인간아. 그게 네가 사는 길이야.

죽을 자아를 내가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자아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을 언약적 일을 지금 방해하고 마귀 짓을 하고 있다, 라고 네가 그걸 받아들이란 말이죠. 살아 있는 것이 내 잘못은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니까. 잘못은 아니지만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이유가 내 잘못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아 있는 거예요. 내가 잘못해서 살아 있는 건 아닌데 살아 있기 때문에 내 잘못을 비로소 아는 그런 기회를 가져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는 것이 필요하지요. 프리즈 자살하지 마세요. 사는 것도 다 필요해요. 죽어 마땅함을 알기 위해서도 자살하지 마세요. 자살할 가치도 없다는 걸 알기 위해서 기어이 사세요. 자살할 권한도 없다는 것. 그러니 자살한 사람들은 정말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어요. 가룟 유다를 비롯해서.

자기의 가능성 안에서 자꾸 하나님과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거예요. 평소에 자기가 자기를 응시하니까 응시된 나를 하나님과 비교하면서 안 놓치고 싶은 거예요. 왜? 자기가 의식되니까 의식된 나를 하나님 앞에서도 내 의식을 유지한 채 하나님을 의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할 건 뭡니까? 이 앉은뱅이와 똑같은 거예요. 주세요. 뭐? 내가 필요하다고 결정 난 것을 주세요.

그때 베드로가 하는 말, 제가 굳이 이야기해야 되겠습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네가 달라는 것은 내가 줄 수 없으나 네게 없는 것 줄게. 네 자아가 있음으로 없다고 여겨지는 그분, 내가 여기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나한테 없는 존재로 취급받는 그분 줄게. 그분이 누굽니까? 살아계신 주님이잖아요.

그 앉은뱅이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앉은뱅이 팔자로 살아가야 했던 겁니다. 이게 이미 결론을 알고 다시 자기 처지를 보는 거예요. 이랬었어야 했다는 거예요. 내가 이랬어야 했다는 것. 집사님이 키가 좀 크잖아요. 다른 사람보다 크지요. 키가 컸었어야 했어요. 본인의 의사와 전혀 관계없습니다. 내가 인생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결코 내 의사에 준해서 내가 선택한 인생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살아계신 주님이 내 안에 살아 있기에 오늘부터 내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이게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요. 이걸 변증법적 관계라 하는데 어려운 말로. 주인은 노예 없이 못 산다는 법칙. 하지만 주인은 노예 없이 못 살지만 그러나 어쨌든 간에 그렇다고 해서 주인이 노예 되는 법은 없고 주인은 여전히 주인이고 노예는 여전히 노예에요.

자, 역대상 다시 돌아와서 봅시다. 한 번 정리해봅시다. 역대상은 지상에 아담의 몸의 조각들의 계속 위에서 뿌려지고 있다. 그래서 땅만 봐서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요. 그냥 언약을 생각한다면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아담의 조각이에요. 그래서 아담이 구원된 자라면, 물론 구원됐지요. 아담이 구원된 자라면 언약 속에 있다면 아담이 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담이 누구 안에 있는 게 중요한 거예요.

아담은 장차오실 예수님 안에 있는 거예요. 왜? 우린 결론부터 알아야 되니까. 성령으로 온 사람은 결론부터 아니까. 창세전에 예수 안에 있는 자만 구원받기 때문에. 그렇다면 아담이 예수 안에 있어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어야 한다면 아담 가운데 a형 타입, a형 인간이 있는 반면에 b형 타입도 있는데 a형, b형 다 합쳐서 하나님의 약속을 구현해야 돼요.

약속이 뭐냐 하면 여자의 후손 따로 있고 뱀의 후손 따로 있는 거예요. 이미 주께서 결론내린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을 위해서 인간들의 인류가 아담의 후손들이 이 땅에 점박이처럼 꽃가루처럼 떨어져야 되는 거예요. 떨어져서 그들의 b형은 b형대로 자기 할 일 해야 되고 a형은 a형대로 자기 할 일 해야 돼요.

b형 인간, 뱀의 후손들은 뭐냐 하면 자기의 소유에 의한 자기 영토를 분할시키는 겁니다. 여기서 여기까지 테두리 쳐서 우리 꺼다. 이름도 우리의 것, 해서 짓는 거예요. 전부 다 이름을. 지명을 대단한 조상을 따라서 지명을 짓는 겁니다.

여기 10절에 보면,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세상에 처음 영걸한 자며” 이게 창세기 10장, 11장 노아홍수 나왔던 이야기 간추려서 나와 있거든요. 앞의 이야기는 노아홍수 때 함과 셈과 야벳의 후손들 이름 나와 있고. 그것을 역대상이라는 약간의 결론적 입장에서 보게 되면 그냥 누가 누구 했다가 아니라 떨어지는 거예요. 그냥 이름만 기록된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 앞에 가면 이것은 마치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긴긴 인류의 역사가 의미 있게 펼쳐지는 것처럼 그렇게 보인다 말이죠. 위에서 보면 그냥 뿌린 거예요. 일방적으로 뿌린 건데 지상에 있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게 뭐냐? 이건 지평적이에요. 지평면만 보이죠. 수직적 안목이 없이 지평만 보이는 거예요.

지평면에선 뭐냐 하면 땅의 시작은 모르고 그냥 땅이 있다, 그 다음에 땅 위에 자기가 두 다리로 서있으니까 이건 뭡니까? 내가 있다. 내가 있으니까 그 다음에 누가 있느냐 하면 네가 있다. 네가 있으니까 합쳐서 뭐가 있다? 우리가 있다. 우리 합쳐서 뭐 만들자? 국가 만들자. 이 국가가 짐승인데요. 짐승이잖아요. 국가 배후의 역사란 것은 용이고. 아까 요한계시록 봤지요.

내가 자식을 낳게 되면 이건 가족이 돼요. 가족이 이건 일가친척이 돼요. 결국 나중엔 뭐냐? 사회를 이루고 국가가 된다고요. 작은 국가, 큰 국가지만 하여튼 국가가 돼요. 아까 물 위에 떠있는 기름방울 이야기했지요. 바다에 떠있는 섬들처럼 모였다가 합쳐졌다가 흩어졌다가 깨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깨졌다. 그냥 흥망성쇠 부침이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문제는 그들이 이 땅이란 것, 어디서부터 있고 왜 있는가를 모르는 겁니다. 땅은 누구의 땅이냐? 이거는 마귀의 땅이에요. 마귀의 권세가 모든 것이 땅에서 있는 이상 어떤 인간도 마귀의 세력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왜 죽었습니까? 아무도 없는데 혼자 자살하셨습니까? 아니지요. 누가 있었어요? 인간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가룟 유다 보고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가룟 유다야 했습니까, 뭐라고 했습니까? 가룟 유다 보고 사탄이라 했지요. 사탄이 네 속에 들어간다 했지요. 주님은 인간의 인식 불가능한 요소를 오히려 그걸 핵심요소로 인간과 엮어버려요. 연결시킨다고요. 어느 인간이 이렇게 엮습니까? 학교에서 그렇게 엮겠습니까?

자, 26번. 요새 학생들 스물여섯 명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17번, 악마와 엮여서 영어 한 번 읽어보세요. 악마의 톤으로. 이렇게 합니까? 학생이, “선생님 너무 무서운 것 같아요.” 그러면 7번 학생 네가 악마의 톤으로 해봐라. 왜? 악마는 존재하니까. 이러면 영어수업 못하겠어요. 무서워서. 이건 여고괴담도 아니고. 우리 악마 빼고 갑시다. 악마 빼고 가재.

주님의 안목이 아닙니다. 니 죽는 게 무섭나? 죽는 게 무서워요. 그게 바로 악마의 마음이야. 악마가 너한테 그 마음 줬어. 니가 나이 구십 넘어봐라. 역시 죽는 게 무섭지. 그래서 일단 제가 마음대로 정했으니까 b형 인간, 뱀의 후손을 땅에다 쫙 깔아놨어요. 여기는 힘과 힘의 대결이에요. 힘 센 사람이 장땡이에요. 힘 센 사람이 최고가 돼요. 그래서 당대의 영웅이 부각되는 거예요. 그리고 영웅이 나타나기를 사람들이 고대해요. 이제는 젊은 피를 원한다. 정치판. 정치판하지 맙시다. 아까 무슨 판? 의미 판. 땅의 의미 판에서 이걸 원하는 겁니다.

b형 인간이 여기 있을 때 하나님께서 여기에 뭘 보내느냐? 언약을 보냅니다. 자, 그림 평면이 있지요. 여기에 원의 일부가 보이는 부드러운 곡선을 같이 보냅니다. 자, 이건 평면이니까 땅이에요. 인간들은 땅밖에 안 보이니까 땅과 땅에 있는 인간들만 보여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중국 인구가 얼마냐, 미국 인구가 얼마나, 한국 인구가 얼마냐 하지 중국에 천사가 몇 명이냐 이야기하지 안 하잖아요.

여기서 위에서 내려와요.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겁니다. 하늘에서 율법이 오는 겁니다. 율법이 와서 지면에 있는 인간들 거쳐 갑니다. 그러면 율법은 아프리카 코끼리 사냥꾼들은 창을 어디다 겨눕니까? 코끼리 겨냥하지요. 그래서 이름이 코끼리 사냥꾼이잖아요. 그럼 율법은 무슨 사냥꾼이냐 하면 자아 사냥꾼이에요. 이것 오늘 제목으로 하겠습니다. 자아, 나 사냥꾼. 뭐가요? 율법이. 율법이 아까 자아를 낚아채는 자아를 공격하는 거예요.

로마서 7장에 보게 되면 이제부터 어렵기 시작하는데 참아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성령 받은 바울이 자아를 조사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7장에 보니까 자아는 무엇과 뭐로 이게 나눠졌다는 걸 알아요. 정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내 안에 나의 무능함을 지적하는 요소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는 뭘 좋아하느냐?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그러니까 뭘 좋아해요? 나는 선하기를 원해요. 하지만 더 우세한 게 있어요.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해서 균등하게 선과 악을 다 같이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자아가 가졌다는 게 선악의 결과가 아니고 선악의 결과는 뭐냐 하면 선도 알고 악도 아는데 그 악한테 버티지 못하는 자아가 그 선악과와 더불어 같이 엮여져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선악은 율법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선악의 그 악의 활동은 잠자는 악은 미친 듯이 발작을 일으켜요. 로마서 7장에. 율법이 와서 하지 말라하면 더 하고 싶은 거예요. 애들 하지 말라하면 더 하고 싶은 거예요. 애만 그렇게요. 애가 커서 어른도 마찬가지에요.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 하잖아요. 이게 잠언에 나오는가(잠9:17). 몰래 먹는 사과가 맛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 안 했으면 선악과 있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여기 보이지? 따먹지 말란 말이야. 참 보암직도 먹음직도 하지. 탐스럽지, 그지? 따먹지 마. 이건 뭐 따먹으란 이야기인지 따먹지 말란 이야기인지. “우리 학교에 이번에 너무너무 미스 롯데 가장 최고로 예쁜 아가씨가 입학했습니다.” 대학교 총장이, “이건 지금껏 우리나라 역사에 제일 예쁜 여학생이 왔는데 너희들 남학생들 넘보지 마.”

그 이야기를 왜 해요? 가만있어도 되는데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그러니까 갑자기 누구, 누구, 누군데. 이게 무슨 기능이라고? 이게 사냥하는 기능이에요. 나와 무엇과 연결되느냐?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 배후에 누가 작동했지요? 악마가 작동했지요. 악마가 우리한테 선악과 따먹고 악마가 우리 인간한테 손 뗐습니까? 아니지요. 아닙니다. 손 뗀 게 아니고 본격적으로 우리를 갖고 놀았잖아요.

가인이 동생을 죽이는데 배후에서 누가 작용했어요? 악이 가인을 지배하듯이 똑같은 현상이 사도 바울 본인한테 지금 작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무엇을 못 이긴다? 악을 이길 수가 없어요. 악마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곤란한 사람이에요. 곤고한 사람이에요. 이대로 가다가는 지옥입니다.

근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지요? 그 사실을 성령이 와서 알게 돼요. 성령이 와서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선한 것이 나한테 계속 선할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아가 수상하기 때문에 자아가 뭔가 고장 났기 때문에 선한 것이 나한테 들어왔을 때 선한 것이 선하게 돼야 되는데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선한 것을 죄로 변질시키는 요소가 내가 처한 현재 형편인 겁니다. 선한 것에 의해서 나는 심판 받기 딱 좋은 심판의 대상인 것을 알았던 거예요.

율법 사냥꾼이죠. 특별히 이건 다른 민족은 나중이고 먼저 어느 민족부터? 이스라엘 민족부터 왔지요. 사백삼십 년 후에 율법의 취지는 아브라함 약속이고 아브라함 약속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구체화시킨 것이 뭐냐? 율법이 와서 율법이 뭘 가져왔습니까? 지키면 뭘 받고?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고. 인간과 접촉하면서 복이 실현됐습니까, 저주가 실현됐습니까? 율법이 그냥 있으면 복과 저주 다 있지만 인간과 만남으로서 인간은 뭐가 됐어요? 저주로 실현됐지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율법이 왔을 때 바리새인들이 율법으로 여인을 돌로 치려 할 때 율법의 완성되신 예수님이 왔을 때 그 현장의 바리새인들 다 어디 갔습니까? 짱돌 들고 있던 바리새인들 어디 갔어요? 맞아죽겠다 싶어서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지요. 아무도 없지요. 율법이나 예수님의 본질은 어느 누구도 아무도 없고 굳이 있다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자만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십자가 받을 때 나를 저주되게 하시는 십자가로 받아들인 자만이 십자가의 죄 용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죄 사함을 받으려면 십자가로 죄가 형성돼야 돼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죄에요. 무조건적으로 저주가 우리한테 딱 맞습니다. 딱 맞춤이에요. 뭐 반찬 짜니 뭐니. 짜면 물 부어라.

누구한테 내 권리를 주장한다든지 나는 이거는 억울합니다, 라든지 우리는 그런 처지가 아닙니다. 왜 저는 암에 걸립니까, 나는 왜 코로나 걸립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지요. 나는 네가 원하는 걸 안 주기 때문에. 주님이 찾아왔다는 말은 네 주제파악 똑바로 하라 이 말입니다. 계속 진도 나가겠습니다.

율법이 오게 되면 이 코스가 주님이 따라오는 코스에요. 율법이 저주를 불러왔지요, 결과적으로. 왜? 우리가 엉망이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오셨다는 말은 우리를 어떻게 한다? 죄를 더욱 더 죄인 되게 하신 거예요. 네가 엉망진창인 주제에 뭐를 선택해, 뭐를 골라? 천국을 고를 쨉이 되느냐 이 말이에요. 그럴 처지가 되느냐 이 말이에요, 네가. 교회 나왔다고 천당 보내달라고? 말이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 안 돼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율법이 와서 모든 걸 저주 아래 두듯이 입을 막고, 우리 사모님 입 막았네. 아주 겸손하게 마스크 쓰고. 마스크 쓰고 할 말이 없는 거예요. 할 말이 있더라도 할 말을 잊었다. 노래에 나오는 거예요. 할 말을 잊었지만은, 할 말을 아예 잊어버려요. 김수희가 부른 <잃어버린 정>

할 말이 없어요. 대표적으로 할 말이 없는 사람이 구약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바로 이름도 간단해. 욥. 할 말이 없어요. 뭐 욥이 42장까지 얼마나 할 말이 많았습니까. 입에 나오면 전부 다 할 말이에요. 사람하고 상대하니까. 그런데 막상 사람하고 상대 안 하고 주님과 상대하니까 갑자기 그 많던 말 어디 있습니까?

재를 뒤집어쓰고 죄 속에 푹 해서 죄와 나와 동격입니다. 저를 한줌의 죄로 봐주세요. 나는 아담의 흙 조각 비슷하게 나는 그저 죄 조각에 불과합니다. 죄의 분말 조각에 불과합니다. 내가 고난을 왜 주셨습니까, 저는 의인인 것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 많던 말이 정작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십자가를 만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제가 입이 있어도 말이 없습니다. 참 그 말하는 것도 힘들었어요. 아예 말이 없어야 되는데 그 말하는 것도 힘들었어요. 이게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주지 못하겠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 주노니 베드로와 요한이 그리스도 안에 있거든요. 예수님 안에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를 포함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 세상의 모든 결론이 너를 덮치게 할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세상의 어느 것 하나 네가 앉은뱅이 된 그 처지 그것 누구 솜씨에요? 누가 준 복이에요? 주님이 준 복입니다. 이제 주의 이름의 그 다음 절차로서 지금껏 네가 앉아서 살았는데 내가 너한테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앉았다 했는데 이제는 한 번 걸어볼래? 걷는 기능을 역할을 해볼래? 지금까지 앉는 역할을 했는데 걷는 기능을 해볼래? 걸었잖아요.

병이 나은 게 아니에요. 인간이 다른 인간이 된 거예요. 전에는 없는 존재였는데 이제는 예수 안에서 있는 존재로 바뀐 거예요. 생명책 명단에 있는 존재였단 말이죠. 생명책에 들어가려고 애를 쓴 게 아니고 결론을 알아보니까 생명책에 있어. 생명책에 명단이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내 힘으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고 저주받아야 함을 알 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자의 명단이 생명책이에요. 귀신이 너한테 진다고 그걸 자랑질하지 마라. 네가 자랑할 것은 명단이 생명책이에요. 언약 책이에요. 말씀 책입니다. 그 구조, 그 구조에서 인간은 주인공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역대상, 역대하에서 주제는 뭐냐 하면 바로 이거에요. 성전 있음. 또는 결론은 성전이다. 이게 역대상, 역대하의 주제입니다. 그 성전을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서 완성을 하는 거죠. 성전에 누구 이름이 있느냐? 주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의 이름이 있는 곳, 그곳만 영원히 계시고 있고, 있는 것도 영원히 있는 것은 오직 주의 이름만 영원해야 된다.

그래서 모든 세상은 주의 이름을 위해서 땅이 있고 하늘이 만들어진 거예요. 인간의 눈에는 땅에 왜 있는지 하늘이 왜 있는지 하늘에 별이 왜 있는지 몰라요. 별이 뭔 줄 알아요? 별은 하늘에 떠있는 불이에요. 태양이 불이잖아요. 그런데 우주에는 태양 같은 별들이 많지요. 빛나니까 빛이 나오니까.

하늘에 별이 불덩어리 있을 이유를 인간들이 모여서 회의하면 그걸 알아챌 수 있습니까? 아니 지 몸뚱이도 많은데 하늘의 불덩어리 단 걸 왜 해야 돼요? 모르잖아요. 그걸 모른다는 말은 네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네 자신이. 그냥 살면 된다? 아니에요. 우리가 왜 있는지 그것 모르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 없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있을 때 우리가 있지 말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음으로서 우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 제목을 바꿔야 되겠다. “있음과 없음”으로.
 첨부파일 : 20210702b 울산강의.hwp (65.5K), Dow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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