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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8 15:51:10 조회 : 196         
안양20210415A슥6장1절(징후적 해석)-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119.207.152.148)
안양20210415A슥6장1절(징후적 해석)-이 근호 목사

스가랴6장1절에서 4절, “내가 또 눈을 들어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산이더라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둘째 병거는 흑마들이, 세째 병거는 백마들이, 네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별로 어려운 건 없지요. 별로 어려운 건 없는데, 성경해석 할 때, ‘성경해석은 징후적이다.’ 징후라는 말 알지요?

허리가 안 좋다. 그러면 찍어봐야지요. 찍어보면 실체가 나오겠지요. 디스크 자리가 안 좋다든지 이리 나오겠지요. 허리가 아픈 것을 징후적이다. 또는 같은 말이 증상적이다. 증상이 있다. 그래서 한의학에서 진맥할 때 증상보고 하거든요. 느껴지는 거예요. 안에 있는 어떤 벌어진 일이 바깥에 나올 때 나오는 그 현상을 징후라고 하고 증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럴 때는 눈으로 본다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진단한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의학에서 진단한다. 징후를 통해서 안에의 실체에 접근해 들어간다. 파악한다, 이리 되는 겁니다. 왜 이게 징후적이냐 하면 성경 자체에 저자가 있어요. 저자가 누구냐 하면 성령, 하나님이 저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성경 저자가 되겠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은 그 모든 활동이 징후적이에요. 하나님께서 인간 + 짐승 + 그리고 모든 꽃, 별, 등등의 많은 것들을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이것도 뭐가 되느냐 하면 징후적 존재에요. 징후적 존재. 또 이쪽에 하나님은 뭘 주셨느냐 하면 성경을 주셨잖아요. 성경책이 있으니까 성경도 이 땅에 주신 거니까 인간들이 성경해석 할 때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 안쪽에 들어있고 우리는 징후적으로 다가설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또 본문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성경이 징후적이다, 징조다 이 말이지요. 그 징조의 현상가운데 성경 내용을 인간들이 직접 징후적으로 파악하려면 성경 내용에서 나오는 여기 이 세상에 관여한 점선으로 할게요. 이 하나님의 대리인, 하나님의 대리 존재. 하나님이 하시는 대리 존재가 여기서 이들이 무엇입니까? 물으니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이다. 네 바람이다.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그 성경 내용과 이 인간의 현실 속에서 인간 자체가 징후적이다, 이 말이지요.

자, 징후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자체로서 독립되어있지 않다는 겁니다. 징후는 이 징후가 나타난 그 곳을 찾아가야 되겠지요. 허리가 아프다. 그러면 허리 아프면 “보자. 허리 아픈데 한 번 보자.” 보니까 피부는 고대로 있어요. 그런데 아파요. 그건 내부에 무슨 일이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래서 이 바깥에 있는 피조세계를 뭐로 보느냐 하면 외부로 보자, 이 말이지요. 외부. 외부에는 징조가 있고 외부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내부로 들어가는 거예요. 내부. 내부로 들어가면 여기 마중 나온 분들이 있지요. 대리존재. 하나님의 일을 시키는 대로 대리하는 존재. 그것이 여기 5절에 보면 이것을 천사 나오고 그리고 이 스가랴 선지자가 누구와 대화를 합니까? 천사보고 대화하고 천사가 말하기를 저들이 누굽니까? 하니까 바람이다. 바람.

바람이니까 징후적이겠지요. 하나님은 안 보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내용이 바람이었다 말이죠. 그러니까 허리가 아프다 말이죠. 그러니까 바람이 분다는 뜻이에요. 오늘 허리 많이 써먹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이 성경을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겁니다. 그러면 바람이다. 바람이면 이것을 첫째는 바람을 징후적으로 독해한다. 또는 해석한다. 해석하는 경우 두 번째는 이걸 실체적으로 해석하는 경우. 실체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바로 이게 뭐냐 하면 봄날에 바람 불 때 바람은 안 보이지만 옷깃 날리잖아요. 가수가 노래 부를 때 바람 부는 걸 묘사해가지고 자기 옷을 이리 떨지요. 빰빠밤바 빰빠바~~ 옷을 막 떠는 겁니다. 바람 분다 이 말이지요. 묘사를 그렇게 한다 말이죠. 바람이 불면 떨리지요.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사물을 흔들고 지나갑니다. 그러면 그 나뭇잎이 떨리는 거. 내 머리카락이 날리는 거. 옷깃이 날리는 거 전부 다 이게 바람이라 하는 것을 실체로 보지요. “아~ 바람 많이 부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아~ 천사가 활동을 많이 하는구먼.” 그렇게 이야기 안하잖아요. 그래서 바람 분다. 이것이 징후적이라면 여기서 뭘 나가냐 하면 어디로 나가느냐 하면 천사로 나아가는 겁니다. 천사로.

자, 여기서 힘들고 어려운 이야기가 천사라는 이 실체가 바람으로만 묘사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여기에 오늘 6장 2절에 보면, 첫 째 병거는 홍마 붉은 말, 둘 째 병거는 흑마 검은 말, 세 번째는 백마 흰말, 네 번째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 요리 되어있거든요. 그런데 이 말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병거라고 되어있지요. 병거. 병거는 수레가 되지만 어떤 수레냐, 어디 놀러 다니는 꽃구경 다니는 수레가 아니고 전쟁하는 거예요. 전쟁하는 거.

그래서 여기 다시 봅시다. 천사는 뭐하는 중이다? 전쟁 중이다. 전쟁이 되려면 반드시 아군과 적군이 있고 그냥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아니고 아군이 적군을 공격하면서 보내지는 것, 이것이 바로 병거에요. 수레, 마차다 이 말이지요. 엘리야를 묘사할 때 하늘의 병거라 했거든요. 하나님의 무기요, 병거 그리되어있어요. 그래서 역사학자는 말하기를 기능이 있잖아요. 말이 있고 그 다음에 말과 결합되어서 수레 있는 병거가 나중에 나왔다고 보통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는데 그게 아니고 반대로 되어있어요. 병거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기병이 나와요. 병거가 먼저 나오고 기병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그만큼 초장기의 전쟁에서는 수레를 앞장세워서 전쟁하는 겁니다. 그러니 공격하면서 한다는 말은 공격할 대상이 있다는 거예요. 바람=말들. 말들이 시들시들한 말이 아니고 어느 말이냐 하면 스트롱한 말. 건장한 말. 건강하고 건장한 말들이 씩씩하게 이 세상에서 나타났다는 말은 이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이 끝났다. 이제는 총공격을 당할 그런 입장에 있구나! 하는 이 피조세계가. 끝났다. 총공격 당한다.

누가 보냈느냐 이 천사를. 하나님이 보냈다. 그러면 당하기는 누가 당하느냐, 인간세계가 당하는 겁니다. 이 사실을 미리 징후적으로 성경 말씀을 스가랴에게 계시를 주셔가지고 징후적으로 깨닫게 했다면 그 깨달은 편이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아군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군.

지금 뭐 2년 뒤에 대선이라든지 지금 이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스가랴가 중요한 문제이지. 정치적 누가 이제명이 되는가, 지금 그 문제가 아니에요. 좌파, 우파 지금 그 문제가 아니에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문제라고요. 그게. 우리 일상에 나타난. 자꾸 우리는 이 세상을 징후적으로 볼 줄 모르고 실체적으로 봐요. 눈에 보이는 게 다라고 보는 겁니다.

허리가 아프다. 허리가 아프다는 뜻은 징후적으로 해석해서는 뭐냐 하면 처음부터 인간은 이리 죽든 저리 죽든 아파죽든 건강하게 죽든 죽게 되어있다 말입니다. 봄나물 뜯었으면 데쳐먹든, 볶아먹든, 끓여먹든, 쪄먹든 국에 넣어먹든 어떻든 간에 소비용이잖아요. 소비용. 그러니까 인간의 모든 것은 소비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하나님의 되시는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 필요에 의해서 이 땅에 출현한 겁니다.

아프다는 것은 나으면 해결되는 게 아니고 ‘내가 망가져서 소실되어야 되고 소멸되어야 될 대상으로서 주께서 그렇게 아프게 하셨구나!’ 이리 되어야 돼요. 아픈 이유가 아파야 합당하다는 뜻이거든요. 아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공격했다는 뜻이고, 공격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이유는 뭐냐,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고, 그러나 인간이 기억하는 죄는 죄가 아니에요. 인간이 지었던 죄는 자기가 해석했던 실체적으로 해석했던 죄고. 실제적인 죄는 징후적으로 파악하는 것. 다시 말해서 내가 태어난 자체가 이미 죄라는 것을 아는 것까지 이르러야 그게 바로 죄에 대해서 아는 거예요. 태어난 자체가. 그러니 인생사는 자체가 죄에요. 죄.

오늘 또 얼마나 죄 짓는다고 보세요. 더 이상 이야기 안하겠습니다. 왜 바쁘냐, 안 죽으려고 바쁜 거예요. 왜 안 죽어야 되는데?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왜 니는 살아야 되는데? 나는 의롭거든. 나는 그래도 완전한 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은 죄보다는 선한 게 많다, 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거 자기에 대한 해석 잘못한 거예요.

실체는 나타나 줘야 되는 겁니다. 실체는 나타나 줘야 돼요. 그래서 이 징후라는 말은 이제 첫 번째 나오는 핵심적인 내용이 들어옵니다. 오늘 강의 핵심적인. 징후라는 말은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니고 바로 사건에 관한 겁니다. 그래서 존재와 사건은 서로 반대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으키는 것은 전부 다 사건이라서 존재가 사건을 파악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스가랴 같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는 사건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징후적으로 사건에 대해서 해석하려고 다가서는 동시에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나의 존재는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야~~ 이게 나 좋아라고 일으킨 일이 아니구나! 이게. 하나님이 하나님 일을 하기 위해서 벌어진 일이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이렇게. 오늘날 성도도 해당되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애시당초 내 일이라는 것은 있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나의 일은 이 땅에 없어요. 비를 내가 요청할 때마다 하나님이 비를 주시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거는 하늘이 아니고 샤워장에서 샤워하는 거지. 틀 때마다 물이 나오는 것은 그것은 샤워하는 것이지 그게 뭐 비겠어요. 비는 전혀 우리의 샤워와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비오는 것도 이건 사건이에요. 허리 아픈 것도 모든 배고픈 것도 전부 다 사건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를 실체로 보기 때문에, 징후로 들어가야 될 사건으로 접근해야 될 것을 전부 다 사건을 다 차단시켜버렸어요. 그래서 인간은 징후적 해석대신에 무슨 해석을 하느냐 하면 지식 모으기. 지식 모으기에 나섭니다. 지식을 모아 놓게 되면 내 존재를 단단히 할 수 있는 파워, 힘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힘 모으려고 애쓰는 겁니다. 힘 모으려고. 내 존재를 강화하는 거예요. 내 존재를. 아는 것이 힘이 되는 거예요. 아는 것이 힘이다.

마치 상대성 원리처럼. E=mc²같아요. 에너지는 질량과 교환되는데. 광속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이러한 원자력공식처럼 공식화된 거예요. 아이고~ 우리가 단체로 죄지은 것이 드러났다. 후딱 지워버리자. 방금 시작한 것처럼 지워버리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연기해도 소용없어요. 동영상 다 찍혔는데 뭐.

오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존재와 사건이에요. 존재와 사건이거든요. 존재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존재란 말을 다른 말로 고치면 이걸 실체라고 이렇게 합니다. 실체. 손에 만져지는 거, 눈에 보이는 거 실체. 그래서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은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관찰에서 법칙을 끄집어내가지고 내가 관찰하고 법칙을 끄집어내서 그 법칙을 누구한테 적용시키느냐 하면 나한테 적용시켜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실체기 때문에. 내가 실체 중에 실체기 때문에.

그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부한 게 있어요. 인간들이 모든 것을 세상을 보면서 이해할 때 그것과 하나님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과의 차이를 하나님은 이렇게 아주 명쾌하게 설명했습니다. 이게 이제 출애굽기32장에 보면 그게 나오는데. 뭐냐 하면 너를 위해서와, 하나님 나를 위해서와 단호하게 이게 구분된다는 겁니다. 제가 한 번 질문 던져볼게요.

하나님을 위한 것이 나를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것이 나를 위한 겁니까? 하나님을 위한 겁니까? 둘 중에 하나에요. 뭡니까? 이건 제 말이 아니고 출애굽기32장에서 하는 이야기에요. 너희를 위하여 신을 믿지 말라 말이죠. 모세가 시내산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난 뒤에 시내산 밑에 있던 그 남자만 사십만 되는 그 사람들에게 했던 일을 두고 모세가 다시 내려와서 지적질하는 그 대목이에요.

거기서 하는 말씀이 뭐냐 하면 우상이란, 그들이 지금 뭘 섬겼어요? 금송아지 섬길 때 그 신의 이름이 뭐였습니까? 금송아지 섬길 때 그 신을 뭐라고 불렀지요? 여호와지요. 여호와. 여호와 섬겼지요. 여호와 섬겼는데 모세가 내려와서 하는 말이 우상이란 여호와를 섬기던 예수를 섬기던 무엇을 섬기던 간에 나를 위하여가 연계되어 있으면, 링크되어 있으면, 연결되어 있으면, 이건 무조건 이게 우상이라는 거예요. 나를 위하여. 시간 가는데 성경 찾지 맙시다. 다 아는 이야기에요.

나를 위하여. 왜 이런 말씀을 하느냐 하면 모세가 시내산 내려올 때 뭘 들고 왔습니까? 율법을 들고 왔지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율법이라는 것을 마주할 때 인간은 본인이 실체라 했잖아요. 반드시 뭔가 여기서 찌짓! 눈초리를 마구 쏘아대는 거예요. 율법을 해석하는 순간 인간은 해석을 경유해서 최종적으로 누굴 위한 해석이 되는가 하면 실체가 되는 나를 위한 해석이 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 타고난 한계라는 거죠. 이게 율법의 기능이에요.

율법을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아무리 제대로 지키려 애를 써도 그 마지막 결과물이 어디에 도달합니까? 마치 잃어버린 편지처럼. 항상 그 주소지가 자기에게로 온다는 거예요. 그 주소지가. 아무리 남의 집에 편지를 해도 그 어떤 사람이 편지를 받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수신인만 찍혀있는 게 아니에요. 발신자의 주소가 있지요. 그러면 그 타인은 발신자의 영역과 링크 연결되어있는 겁니다. 이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든 예수님을 믿던 하나님을 믿든 뭐를 하던 간에 자기를 자기로부터 끊어낼 수가 없다. 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뭘 주냐, 율법을 줘버린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준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공식을 하나 만들어 내봅시다. 실체하고 자아하고 맞지 않을 때 이 틈에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주체입니다. 실체하고 자아하고 맞지 않을 때 이게 주체에요. 나이 80넘은 권사님들보고 사진 찍으라 하면 거부하지요. 왜냐하면 사진에 나와 있는 그 모습을 자기가 평소에 꿈이라든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자기 모습과 여기서 차이가 나요. 차이가 납니다.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자아를 가지고 나라고 하고, 주체를 가지고 나라고 하거든요. 나가 졸지에 몇 개 됐습니까? 두 개가 된 거예요. 그럼 여기서 나의 내부는 격하게 투쟁합니다. 무슨 투쟁하느냐 하면 내가 생각하는 나와 요걸 상상하는 나. 상상하는 나와 요 주체는 뭐냐 하면 남을 대할 때 타인으로부터 변동을 받는 주체. 그 나가 주체에요. 이게 말로 하면 굉장히 어려운데 실제 오늘날 사정을 들어보면 굉장히 쉬워요.

왜냐하면 나는 나잖아요. 그러면 평소의 선택 결정은 최종 결정 선택은 누가합니까? 내가 하지요. 내가 한다고요. 그런데 요즘 시대에 옛날 한 3년 전에는 길거리에 마스크 쓴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환자 아니면 잘 안 쓰거든요. 그런데 작년부터인가 모든 사람이 취미가 마스크 쓰는 거였어요? 밥 먹을 때도 마스크 쓰고 먹고 이런 거 모든 것이 마스크 쓰는 것이었습니까? 언제부터 그렇게 됐어요? 주체를 파악하는데 요즘에 멋진 예가 돼요. 본인의 인생은 본인이 결정하잖아요. 나는 마스크 안 쓴 사람 보면 속이 안 편해. 이래서 다들 유행처럼 마스크를 쓰는 겁니까? 나는 잘 때도 마스크 쓰고 싶어. 잘 때도 두 개, 세 개씩 덮어 씁니까? 누가 시켰어요? 누가 시킨 거예요? 본인이 자발적이었습니까? 누가 시킨 거예요? 시켰지요. 그게 주체에요.

남을 타인으로 된 자아가 조정 받고 변동 받는 거예요. 변동에 들어가는 겁니다. 따라서 뭐가 허구냐 하면 이 상상한 내가 날마다 허구에요. 날마다 허구입니다. 요양병원에 가서 연세 많은 분이 곧 돌아가시는데 “아버지, 이제는 한 시간만 있으면 의사가 한 시간만 있으면 지금 숨도 못 쉬고 돌아가신답니다. 정신은 말짱하지만 한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저 아파트 하나 하고 땅 있는 거 하고 빨리 결정을 해주세요. 도장 다 가지고 왔습니다. 주민등록증하고 사진하고 다해서 도장만 찍으면 됩니다. 아파트 있는 거 자식 누구 줄 거고, 땅은 누구 줄 거예요? 빨리 결정 하세요 .” 하면 “나는 10년간 더 살 거야.” 이게 뭐가 돼요. 이미 실체로서 의사가 확정해서 2시간밖에 못 산다고 확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아는 뭡니까?

이 자아는 어디 속에 있느냐 하면 옛날 장기기억 살람미스라 하지요. 해마. 인간의 두뇌의 장기기억 속에 그대로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거예요. 유령이. 인간의 자아는 유령이에요. 귀신이 따로 없어요. 내가 귀신이에요. 그 고집스러움과 자존감, 버티기, 만약에 이 유령 같은 자아가 손상이 온다. 그러면 어디에 가느냐 하면 서울의 관악산 옆에 유명한 절이 있는데, 그 절 뒤로 등산로 올라가가지고 조금이라도 손상이 되어버리면 자살해요. 이런 소리 한다고 좌파 아닙니다. 좌파 그거 따지는 게 아니에요. 우리 자신을 실체로 봤을 때 우리는 얼마나 환상적이냐를 보는 겁니다. 우리 인간을 실체로 볼 때. 그래서 여기서 내리는 결론은 뭐냐 하면 실체는 뭐를 유발한다? 실체는 환상, 허망함, 허구를 날마다 달고 다니는 거예요. 몸과 그림자처럼.

따지고 보면 우리의 이 근육질 있는 육신밖에 없잖아요. 그 육신밖에 없는 내가 실제로서는 몸이 내가 아니고 몸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실체만 있다면 상상된 허구라면 그러면 허구가 아닌 진짜 실제적인 거. 실제적인 나는 뭐냐 그건 이 사회에서 내가 정할 수가 없어요. 남들이 어! 하면 아~ 예! 그건 그 때 그 때 달라요. 그래서 이렇게 환경이 나를 그 때마다 맞춤양복처럼 맞춰주는 거예요. 환경이 맞춰주는 거예요. 마스크 쓰세요. 아~ 예. 예. 예. 써야 되는 거예요. 맞춰줘야 되는 거예요. “아내면 아내답게 해야지.” “예. 알았어요. 저녁에 뭐해드릴까요?”이런 거. 이 모든 것은 환경에 맞춰드려요.

나는 나 편한 대로 산다. 라고 자부하다가 우연히 길에 가다가 불쌍한 길 잃은 강아지 만나고 난 뒤부터는 강아지 데리고 산다고 그 다음부터는 강아지 시집살이하는 거예요. 갔다가 줘 버릴 수도 없고 죽여 버릴까. 안식사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이걸 어려운 말로는 관계성이라고 하고 쉬운 말로는 준비된 환경이 내가 예측 못한 나를 이렇게 작품으로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찍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 플러스 존재 말고 뭐가 있느냐 하면 사건이 주어지는 겁니다. 사건은 때려죽여도 존재는 이 사건을 이해를 못해요. 왜냐하면 존재는 뭐만 생각하느냐 하면 결국 나라는 실체로 돌아오기 때문에 나라는 이 몸둥아리 존재만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에서 사건으로 사건을 해석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모든 성경은 뭐냐 하면 존재밖에 사건이거든요. 존재밖에 사건이니까 이걸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일어난 일을 하나님께서는. 자, 다시 배웠으니까 봅시다. 우상이란 뭐다? 우상이란 나를 위하여 세상을 해석하는 것. 요 앞에 뭐를 붙이느냐 나를 위하여. 나는 뭐냐 하면 이게 주체가 아니고 이게 자아가 돼요. 자아가 된다고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버리면 나라에서 마스크 쓰고 다니세요. 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누가 강제했어요? 누가 강제로 한 거예요? 국가에서 했지요.

그런데 국가가 어디 있어요? 국가가 없지요. 국가가 없어요. 국가가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이것을 무슨 세계라 하는가 하면 실제세계라 하는 거예요. 실제세계. 이것도 하나의 환상입니다. 국가가 죽을 때 나한테 뭐했다고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요. 그리니까 우리네 인생이라 하는 것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거기에 기능적으로 놓여있는 무대에서 한평생 연극배우로 살다가 그냥 늙어죽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유명한 노래가 있잖아요. 연극이 끝난 뒤에. 연극이 끝나고 조명이 꺼졌을 때에 연극이 끝났어요. 연극이. 연극이 끝났는데 남은 것은 캐릭터밖에 내 역할밖에 없어요. 나는 없어요. 애초부터 나는 없어요. 나는 알아요. 시름시름 알아요. 있잖아요. 나는 없어요. 아니 없어야 돼요. 그래서 어제 수요 설교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공포에 휩쓸렸을 때에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간다고 했습니까?

내가 나인 척 한다고 했지요. 내가 나인 척 하고 있는 거예요. 환경이 나를 조성했잖아요.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은 사건 개념이거든요. 죄가 무엇이냐, 의가 무엇이냐, 천국이 무엇이냐, 구원이 무엇이냐, 주님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사건이 터져야 알아요. 이미 사건은 터졌는데 그 사건을 내가 존재 때문에 내 존재로 데려오기 때문에 내가 우상이기 때문에 이해를 못했는데 다시 그 뒤에 그 사건을 이해하는 사건이 터질 때 앞에 있는 사건을 이해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냐 우리는 후 사건적 존재라 하는 거예요. 후 사건적 존재.

용어 자체가 어려운데 들어보면 쉬워요. 후 사건적 존재. 그러니까 성령을 받았고 십자가를 알고, 복음을 안다면 그 사람은 이제는 존재의 세계에서 벗어난 거예요. 그 전까지는 성령을 받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전까지는 누굴 위해 살아갑니까? 이 허구적 나를 위해 살았지요. 저게 나한테 실익이 있는가, 손해가 되는가, 이익이 되는가, 나한테 얼마나 보탬이 되는가, 그래, 참자. 마스크 쓰고 참자. 그러면 좀 더 오래 살겠지. 그러면 사는 것에 주인공이 누가 사는데. 그건 내가 살지. 어떻게? 내가 나를 관리해서.

그러나 사건이 이어지게 되면 참새와 잡초도 키우시는 분이 누굽니까? 참새 하나님이 키우신다 하지 마시고요, 이제는 여러분이 성령을 받았으면 참새가 스스로를 살게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부정적으로 설명해야 돼요.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누가 키웁니까? 일단은 주님이 키운다고 하지 마시고 뻔한 답변 말고요, 아닌 쪽으로. 누가 자기를 못 키워요? 잡초, 풀, 참새, 본인이 본인을 못 키웁니다. 솔로몬의 입은 옷은 누가 입은 거예요? 솔로몬 본인이 입었지요. 그러니까 솔로몬 입은 옷이 뭐보다 못하다? 들에 핀 들풀이나 백합보다도 오히려 하나님께 만족스럽지 않아요. 솔로몬 옷이 더 예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금으로 보면 이쁘면 이쁘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원인은 바로 자기의 있음, 존재로부터 존재로 마감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존재로 사건을 할 때 과연 내가 사건의 세계로 옮겨졌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아느냐, 그게 바로 말씀을 해석할 때 징후적으로 해석해요. 징후적으로. 징후. 허리가 아프다. 오늘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허리가 아프다. 눈에 안 보이지요. 아프다가 눈에 안 보여요. 아프다는 눈에 안 보여요. 증상이고 징후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게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느끼는 것뿐이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요. 징후적이라니까요. 징후적. 외부는 징후적이고 그 실체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실체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 내부에 있겠지요. 그 내부의 세계가 무슨 세계냐, 사건이 터져 나오는 세계. 오늘 스가랴6장 5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자, 됐습니다. 어디 앞에 있다가 어디로 나가지요. 어디 앞에 있다가. 누구 분 앞에 있다가 우루루 지금 쏟아져 나갑니다. 나가는 거죠. 나간다.

나갈 때 여기에 스가랴6장 2절에 보면, 첫째 병거는 홍마, 둘째 병거를 말로 합시다. 말에 달린 수레니까. 둘째 말은 흑마, 셋째 말은 백마, 넷째 말은 아롱진 것, 그리고 건장한 것. 건장한 것은 사실은 말 넷이 다 포함되는 거예요. 스트롱. 건장한 것. 어디 앞에서 나가는 거예요. 어디 앞에서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계가 그냥 말을 볼 때에 그냥 말로 보면 실체가 되잖아요. 말을 실체로 이해해 버리면 이게 어느 세계에서의 해석이냐 하면 존재의 세계에서 보는 게 말의 실체에요.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해석하라 했습니까? 실체로 보면 안 되고 징후적으로 보라. 징후. 실체는 따로 있는 거예요. 실체는 따로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이걸 징후, 증상적으로 보게 되면. 참, 이런 게 어렵다. 어려워요. 이왕 어려운 거 어렵게 하겠습니다. 사건은 존재의 입장에서 보면 없어도 되는 과잉입니다. 과잉. 또는 잉여. 과도한 거예요. 과도. “하나님이여, 사건을 일으켜 주옵소서.” 지금 과도한 것을 지금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니가 평소에 니가 알아서 잘 했잖아. 니가 알아서 해.” “하나님 제가 힘이 딸립니다. 알아서 하려니 내 뜻대로 안됩니다. 그러니까 추가적이고 넘치는 여분의 것을 주시옵소서.” 라고 할 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지금 배운 공부에 의하면 “그게 바로 니가 우상이라는 징후야.” 그러니까 우상이라는 징후를 지적 받음으로서 본인의 존재가 존재에서 뭐로 보느냐 하면 징후로 바뀌어요. 사건으로 바뀐다고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나를 위함이 아니고 그 누구를 위한 사건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참 다행스러운 복을 받은 거예요. 이런 안목을 갖고 있는 게 정말 천만 다행한 겁니다. 인간이 무슨 능력으로 자기가 여기 있음에서 벗어나겠어요. 들어봤지만 또 잊어버렸으니까 다시 한다면. 만약에 존재가 되어버리면 인간은 어디에 묶이느냐 하면 내 몸 실체에 묶인다고요. 그런데 실체는 필히 뭘 끄집어낸다고 했습니까? 허구. 허상. 허망한 것들을 끄집어내요. 실체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어제 수요 설교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뱀의 실체는 배를 땅에 엎드려서 기는 거죠. 이게 저주지요. 왜 땅에 엎드리느냐 땅과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땅은 이미 저주받았어요. 왜냐하면 이 땅은 멸망 받을 땅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멸망의 이유와 원인이 거기서 마구 품어져 나와요. 그래서 땅에서 사는 모든 인간은 흙에서 와서 어디로 돌아갑니까?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걸 온 몸으로 제일 가까운 근접적인 거리에서 온 몸으로 받아내는 존재가 뭐냐 하면 뱀이고 악마다 말이죠.

악마는 극히 세속적이에요. 악마의 뜻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비로소 악마는 자기의 본색이 드러났는데 딱 세 가지입니다. 사람은 배불러야 된다는 것과 두 번째는 뭐냐 인간은 초인적인 것을 노린다는 것. 세 번째는 모든 것을 지배해야 인간은 만족한다는 것. 이것이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 세 가지 악마가 제안한 거예요.

배불러야 사는 맛이지. 그러면 뭐 돼지 되라는 말입니까. 배부르고 난 뒤에 뭐할 거예요. 내가 초과적인 존재. 남이 놀랠만한 존재가 될 때 사람 사는 맛이지. 성전에서 뛰어내릴 때 안 다쳐보세요. 이건 얼마나 초과적인, 초인적인 존재입니까. 세 번째는 뭐냐, 그냥 재주나 자랑하려고 하는 아니에요. 그게 되게 되면 세 번째는 뭐예요? 보이는 모든 것들을 그걸 소유화시켜서 거기 안에 있던 것을 그걸 통제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 가인의 후예들이 하고 싶었던 그 것.

그게 가인의 마음이 아니고 누구의 마음입니까? 가인의 존재의 마음이 아니고 실체의 마음이 아니고 배후에 악마의 마음이지요. 그걸 징후적으로 뽑아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징후적으로 보는 거예요. 악마는 이 존재가 다룰 대상이 아니에요. 악마라는 이 존재. 악마라는 이 실체를 다루는 것은 이건 따로 있어요. 주님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는 악마가 시키는 대로 그 악마의 마음. 배불러야 되고, 남이 우러러보는 초인이 되어야 되고, 초인이라는 것은 남들이 부러워서 바라보는 거고, 마지막에 통치라는 것은 내가 좋아서 남을 지배하는 거고. 화살표가 다르지요. 좋아하는 것과 그걸 이용해서 그 사람을 지배하는 것. 그 일을 지금 누가 하고 있다? 악마가 그 이야기를 한다는 말은 예수님한테 그 이야기했다는 말은 누가 그 일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악마가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세계? 인간이 알고 있는 과학의 세계, 학문의 철학의 세계, 이 세상 눈에 보이는 세계 전부의 내용이에요. 그게. 악마의 세계라고요. 전부 다. 내가 그런 마음을 니한테 줬잖아. 자신감이 있어요. 악마한테는. “니가 그 세계 빼놓고 니 사는 보람 있으면 내놔 봐!” “그거 말고 그게 사는 목표가 아니고 나는 다른 목표야!” “있으면 내놔봐!” 없어요. 없다고요.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그 세계에서 본질에서 빠져나갈 재주 있거든 한 번 빠져나가 보세요. 없어요.

아까 거 다시 하겠습니다. 이게 어려운 내용이기 때문에. 나는 나를 위해서 내가 결정할 절대적 권한이 있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을 때 이게 바로 뭡니까?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고서 그게 나라고 하죠.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상상한 나다 말이죠. 이걸 자아라고 하고 에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나가 있지도 않은 국가의 말을 듣고 마스크 쓰는 거 보세요. 마스크 쓴다고요.

내 본심은 뭐냐 하면 지금 봄날에 하와이에 여행가는 거예요. 하와이 여행 가는데 하와이 여행 가자마자 2주 격리 들어가는데요. 놀기는커녕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예요. 뭔가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사람들은 그걸 국가가 있다고 이야기 하거든요. 국가가 도대체 몇 번지에 있습니까. 국가가 어디에 있어요? 지배체제지요. 지배체제. 이걸 가지고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이념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인간이 환경이 만들어 조성한 그 정신세계에 굴복당하기 전에 이미 굴복당한 상태에 있어요. 여자가 시집가면 이래야 되고 남자가 결혼하면 남편은 이래야 되고. 이래야 된다, 이래야 된다는 것은 전부 다 내가 습득한 게 아니고요, 이건 기성세대가 나한테 강요한 거예요. 거기에 맞추어서 내가 살게 되게 되면 나는 서브젝트라고 하는데, 나는 주체가 된 동시에 나는 알 수 없는 이념에 종속된 대상이 돼요. 종속된 대상에서 주어지는 것은 뭐냐, 밑에서 올라오는 알 수 없는 공포에요. 공포.

이 공포를 이용해서 뭐냐 하면 율법을 준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낸 결론은 뭐냐, 율법은 무엇을 공격하는 무기다? 존재의 세계를 공격해서 와해해서 불로서 멸망시키는 겁니다. 자, 한 번 물어봅시다. 물어본 질문이 좀 어려워요. 노아 때 홍수 나기 전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았지요. 노아 때 홍수나기 전에 거기에 뭐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사람이든 짐승이든 뭐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너무 쉽다 이거. 있었어요.

홍수 나고 난 뒤에 거기에 뭐가 있었습니까? 뭐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아무것도 없지요. 이게 진리입니다. 왜 홍수라는 것을 링크해서 왜 세상을 볼 줄 모르느냐 이 말이에요. 홍수라는 걸. 홍수나기 전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이게 그들의 전부라고 여겼던 거예요.

그러나 홍수가 오니까 있음이 뭐로 변했어요? 없음이지요. 유명한 말이 사자성어 뭐가 나온다 합니까? 영구 없다. 영구 없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하면 노아 같은 경우에는 자기 존재가 아니고 뭘 증거 하는 사람이냐 하면 홍수사건을 사건을 증거 하는 징후적 인물이 노아가 되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가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 입장에서.

내가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이 존재를 공격하는 사건이 활발하게 지금 활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 스가랴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이고 계시의 내용이에요. 그 성경 말씀해서 천당 가라고 준 게 아니고 천당 갈 대상이 없어요. 이 땅에는. 왜? 존재자체가 없는데 천국 갈 사람도 없어요. 있는 존재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 영원한 이름은 오직,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가 있다는 말이고 영원한 존재는 영원한 이름을 가질 때만 영원한 존재로서 하나님께 인정받습니다. 그 존재가 누굽니까? 누구 이름이에요? 예수님이라고 하지 말고 누구의 이름입니까?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은 이 세상에 있을 때만 붙이는 거예요. 하늘나라에는 이름이 없어요. 이 세상 피조세계에 들어올 때만 이름이 붙어요. 1:1 대응이 되니까. 대응이 되어야 이름이 있거든요.

이 땅에 개입했던, 잠입했던 그 분. 그 분의 이름이 바로 구원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걸 바로 이사야 7장14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의 내용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 그 인물 외에는 아무도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안양20210415A슥6장1절(징후적 해석)-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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