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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9 12:06:26 조회 : 167         
35강-암 9장 13-15절(배상의 원리)210428-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180.11)
35강-암 9장 13-15절(배상의 원리)2104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9장 13-15절까지 입니다.

아모스 9:13-1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그 때에 밭 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저희가 황무한 성읍을 건축하고 거하며 포도원들을 심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내가 저희를 그 본토에 심으리니 저희가 나의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

아모스의 마지막은 “뽑히지 아니하는 백성이 나타날 것이라” 그건 언제 이야기냐 하면 13절에 그날 “보라 날이 이를찌라” 그러면 지금은, 이 아모스에게 계시를 줬던 지금은 뽑혀야 되는 처지에 백성들이 있습니다. 뽑힐 때는 뽑힐만한 이유가 있고 다시 뽑히지 않을 때는 뽑혀야 했던 그 조건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다시 그 땅에 심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모스에게 준 계시 그 끝 장면이 다시 그 땅에,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 백성으로서 다시 심어진다. 바로 그것이 본 내용이에요. 다시 심어진다. 그러니까 이것은 씨뿌리는 자도 있고, 추수하는 자도 나오고, 포도원 경작하는 자도 있는데 여기에 누가 없느냐 하면, 밭 주인이 없어요.

인간에게는 주인이 없습니다. 이것은 뭐냐? 이 땅에서 인간이 밭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그러한 사고방식의 세상은 날아 가버린 겁니다. 밭 주인이 내가 될 수 없고 너 가 될 수 없고, 우리 인간 가운데는 일절 밭 주인은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내가 내 주인의식이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냥 우리는 경작자예요. 밭을 누가 제공하게 되면 그 밭을 경작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 나타나야 된다는 그 이야기로 아모스의 계시가 마감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계시에 대해서 반기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내게 일체 없게 된 것에 대해서 굉장히 고마워하는 사람이에요. 내 것이 없는, 내 소유의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대해서 ‘세상에 이런 날도 다 오네. 내 것이 없다니! 내 소유의 차도 없고, 밭도 없고, 아파트도 없고, 내 소유의 강아지도 없고,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내게 없는 세상이 온다니 이런 좋은 세상이 또 있을까!’ 하고 감지덕지 감격하는 사람, 경탄해 마지않는 사람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심어 놓고 본문에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했으니까 일단 뽑아낸다는 뜻이거든요.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뽑아내는 거예요. 그러면 뽑아내는 이유는 당연히 나타났지요. 뽑히는 이유는 내게 뭔가 있기 때문에, 나의 것이 있기 때문에 뽑아내는 겁니다.

나의 것이 있다는 것은 어디에 어울리지 않느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천국을 이루는 데 있어서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주는 거나 먹어라, 그런 식이지요. 주는 거나 먹으라는 정도가 아니고 주는 거나 경작해라. 밭 갈고 추수하고 그렇게 해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아모스의 계시의 마지막에 그날에 일어날 하나님의 일이 모든 일의 마감이 되는 거예요. 완벽이라는 것은 더 뺄 게 없을 때 완성이 되는 겁니다. 더 빠질 것이 없을 때, 갖춰야 될 조건을 다 갖췄을 때 완벽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아모스 앞에 두꺼운 구약성경이 죽 나와 있습니다. 방금 제가 아모스의 마지막 대목을 소개해 드렸잖아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자기 땅도 아닌데 남의 땅에 심어서 거기서 경작하는 것이 끝, 하나님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 장면이에요. 미나리 키우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 아니고 그 끝 장면은 포도원을 경작하는 것이 끝 장면입니다.

대단원의 막은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앞의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로 되어 있는가? 여기 힌트가 나와 있어요. 지금 몇 번 이야기합니다만 15절에 “저희가 나의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으니까 일단은 뽑혀야 돼요. 왜 뽑혀야 되는가? 하나님이 주신 땅에 들어갔다가 뽑혀야 되는 이유는 땅은 도대체 어떤 땅인가, 에 대해서 뽑히고 다시 심어지면서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신 땅, 하나님이 사시는 땅이 어떤 땅이고 어떤 밭이라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 뽑히는 과정이 필요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는 다 뽑히는 거예요. 뽑히고 다시 심어지는 그러한 역사가 이스라엘을 거쳐서 신약에 성령 받은 성도의 출현, 교회가 바로 백성이 되는 그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뽑힌다는 것은 상당히 좋지 않은 일이고 인간적 입장에서 서글픈 일인데 왜 그렇게 힘들게 뽑혀서 그 땅에서 쫓겨나는 일이 일어나야 되는가?

그것은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 최초의 인간이 죄를 지어서 땅이 저주받는 겁니다. 저주받는 그 모습은 17-19절에 보면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땅이 인간을 규정해 버립니다. 땅의 속성을 인간이 버텨낼 수 없어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땅에 태어났으면 땅으로 묻혀 버려야 돼요. 함몰되어 버려야 합니다. 함몰, 땅의 일부로서 함몰되어야 돼요. 그럴 때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신 그 이유가 만개하고 그 이유가 표출되는 겁니다.

나는 어떻게 됩니까, 묻지 마세요. 이렇게 물어야 돼요. 땅은 스스로 어떻게 다시 새로운 땅으로 달라집니까.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왜냐하면 인간은 땅에 종속되었으니까. 이런 사고방식은 상상도 못하지요. 현대과학에서 상상도 못합니다. 인간이 땅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땅이 인간을 지배할 줄은 생각도 못했지요. 인간의 맞춤 땅이 되도록 인간은 노력합니다. 사람들은 그걸 경작이라 하잖아요.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땅이 먼저고 그 다음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땅의 성질에 맞는 인간이어야 내가 준 땅에서 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여지없이 뽑아내 버리지요.

그러니까 인간 입장에서는 그 땅이 참 특수하다고 느껴지지만 땅이 특수한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땅이 그런 거예요. 창세기 4장에서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가인 등장하고 아벨 등장하고. 형이 동생을 죽이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지 다른 쪽에서는 여기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 우리 생각이잖아요.

그런데 창세기 4장 11절에 보면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땅이 인간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내 나와바리에서 저주를 유발케 하는 일을 왜 벌이느냐, 하고 지금 닦달 내고 땅이 인간에게 나무라고 있는 거예요. 네가 어느 안전인데 함부로 그 짓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아모스, 하나님의 계시의 흐름을 이해하려면 거기다 뭘 집어넣으면 이해가 다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의 모든 과정에 뭘 집어넣느냐? 배상한다는 것, 이 사실만 집어넣으면 다 풀리게 되어 있어요. 배상한다.

다른 이방 민족을 제쳐두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땅을 허락하셨는데 그 땅은 이스라엘에 무엇을 가르쳤느냐? 배상해야 될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 그걸 가르치는 땅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입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땅은 유월절 어린양의 그 값을 먼저 치르고 난 뒤에 주어진 땅이기 때문에 그래요.

참, 이러한 의식은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세계에요. 납득이 안되는 거예요.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피자를 하나 시켜도 내가 먼저 배달의 기수 앱에 이야기해서 11시 반에 피자가 한판 배달 왔다. 그러면 그건 내가 주문한 거예요. 내가 선택한 거지요.

내가 선택해서 피자 먹고 싶다고 했고 그 피자는 지금 먹든 내일 아침에 먹든, 햄만 골라서 먹든 밀가루만 떼서 먹든 그것은 내 맘대로에요. 내가 주문했으니까요. 왜? 이 집은 내가 사는 나에게 소유권이 있는 내 땅이에요. 내 아파트고 내 집이고.

그런데 아무도 아무것도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딩동, 초인종 눌러서 “피자 왔습니다!” 하고 왔다 그 말이지요. 신난다, 하고 피자 먹으려고 하니까 피자 배달온 사람이 “단 피자를 주신 분이 당부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걸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기 식구 몇입니까?” “네 식구입니다.” “네 식구 다 꿇어앉아 들어. 배달 온 사람 앞에 다 꿇어앉아 들어. 피자 먹을 때 햄부터 먼저 먹지 말고 고추냉이부터 먼저 먹을 것……”

지시사항이 들어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물건을 먼저 들여놓고 그 물건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조건 하에 그 물건에 대한 혜택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이미 배상이 다 끝났어요.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피를 흘렸거든요.

피는 저주받은 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요구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배상을 치렀던 그 구역이 있어요. 배상을 치렀던 그 구역.

이걸 좀 어려운 단어로 쓸게요. 그 영토, 영역, 그 공간, 어린양의 피를 흘린 유월절은 사건입니다. 사건이 새로운 존재를 쏟아놓기 시작해요. 사건의 취지를 계속해서 유지 시켜 주고 그걸 높여줄 수 있는 인간들을 거기서 쏟아놓는 거예요.

외국의 만화에 그런 것이 있어요. 커다란 움직이는 깔대기 속에서 뭔가 계속 물건이나 크리스마스 선물 또 인간들이 막 쏟아지는 그런 만화영화가 있어요. 깔대기 고깔콘 비슷하게 생긴 그런 것이 있어요. 그 입구가 하나의 점이거든요. 존재가 아니에요. 하나의 점이에요. 점에는 어떤 공간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의 사건이에요.

유월절 사건으로 인하여 거기서 마구마구 뭔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남정네만 5십만 명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에게만 허락된 영토 그 영토에는 바로 하나님의 배상체제가 가동되는, 배상체제가 운용이 되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영토가 마련되는데 그걸 가지고 약속의 땅 언약의 땅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 주의사항 같은 것을 받은 적이 있어요. 아까 일방적으로 피자 받은 이야기 했지요. 그러니까 물건부터 먼저 들여놨어요. 물건부터 먼저 들여놓고 그 물건의 취급주의, 이런 식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 물건은 뭐냐? 너희들에게만 이미 배상, 하나님에 대해서 값을 치렀기 때문에 그 값의 가치를 너희가 모른다면 더 이상 그 약속의 땅에서 다 뽑힌다. 그런 조건이에요.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약속의 땅에서는 어떠해야 하는가가 죽 나오는데 거기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22장 1절에 보게 되면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여기에 ‘갚고’라는 말이 나오지요. 배상입니다.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찌니라” 갚으라는 말이 또 나오고 3절에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이라는 말을 하고요. 또 4절에도 “도적질한 것이 살아 그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무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찌니라.”

그리고 5절에 봐도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먹이다가 그 짐승을 놓아서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제일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제일 좋은 것으로 배상할찌니라.” 배상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뭘 배워야 되느냐 하면, 이미 확보된, 이미 주어진 죄용서에 대해서 심판면제에 대해서 이제는 그 값어치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실생활을 통해서 배상하는 그 과정 그 절차 속에 그들이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여기서 성경 전체의 핵심이 나옵니다. 뭐냐 하면 죄책감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책감을 유도하시는 겁니다. 애굽에 살던 너희들, 노예로 살 수밖에 없던 너희들, 약속의 땅은 구경도 못하고……, 더구나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거든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곳이에요.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권한에 대해서 일체 예측하거나 예상도 못한채 너희들은 애굽에서 살아야 될 히브리 족속이었다. 그런데 내가 너희에게 특혜를 베풀어주잖아. 무슨 특혜?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곳이에요.

레위기 26장에 보면 그 약속의 땅에 대해서 뭐가 중심이 되느냐, 에 대해서 잘 나와 있어요. 10, 11절에 “너희는 오래 두었던 묵은 곡식을 먹다가 새 곡식을 인하여 묵은 곡식을 치우게 될 것이며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이 말은 뭐냐 하면 3, 4절에 “너희가 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내가 너희 비를 그 시후에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수목은 열매를 맺을찌라.”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경작을 하는데요.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서 비를 내리고 풍부한 결실을 내게 되는 것, 그렇게 될 때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내가 노력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우리 가운데 무엇이 있기에 땅이 이렇게 풍족한 결실을 내는지를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창세기 3장에서 이 대지 자체가, 이 땅 자체가 모든 인간을 잡아먹는 땅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깔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약속의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우리는 저 애굽땅에 살지 않고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하나님께 풍부한 결실을 맺어서 우리는 이렇게 풍족하게 먹어서 기분 좋다.’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누락이 되었느냐 하면, 바로 주의사항이에요. 그 땅에서 곡식 낟알 하나 얻는 것, 그 땅에서 풍족하게 결실하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배상체제로 인하여 가동되었기 때문에 주어진 결과인 거예요. 하나님의 배상체제.

그러면 그들이 약속의 땅에서 이걸 먹으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죄책을 느껴야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양심의 가책이라는 겁니다. 성경 전체에서 한국말로 딱 하나 끄집어내라면 피입니다. 피! 피의 의미는 뭐냐 하면, “너희들 나한테 갚을 것이 있었잖아. 너희들 나에게 배상해야 돼. 그러나 그 배상에 대해서 이것으로 배상해.” 그게 뭐냐? 피에요.

그런데 이것을 그냥 피로서 배상한다 한다면 왜 피흘림이 천국에서 살만한 권한을 보장하는 최종적 배상책이 되는지는 우리가 잘 납득이 안 되잖아요. 구약 이스라엘 시대에 실제로 그 약속의 땅에서 경작했던 사람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되돌아가게 되면 그 땅의 모든 속성, 성질은 그들이 얼마나 호미질을 잘하고 많은 비를 뿌리는가와 전혀 상관없어요.

율법을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이미 배상을 치렀다는 사실, 그걸 은혜라고 하는데 그 은혜성을 잊어버리면 아무리 땅을 열심히 갈아도 땅은 생산물을 내지를 않게 되어 있습니다. 희한한 땅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와서 그 은혜를 잊을 리가 있습니까?”라고, “그만큼 은혜를 받았으면, 홍해기적을 수많은 기적 받아서 약속의 땅에 들어왔으면 정신차리고 살겠지요.”라고 하는데 여러분 알다시피 구약성경 보세요. 그들이 얼마나 매를 많이 맞아요? 그 이유가 뭐냐?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그 땅의 소유주가 생겨요. 바로 자기의 노력, 경작이니까 자기의 노력이 거기에 투입이 되었잖아요. 자기 노력이 투입되니까, 다른 이웃과 비교해서 이것은 내 고생과 노력이 들어갔으니까 이것은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이 발생 된 겁니다. 그래서 뽑히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서 다 뽑히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그 소유의식을 안 느끼면 되고 내 것이라고 생각을 안하면 되지 않겠느냐, 라고 하는데 구약의 이 배상의 논리라든지 이 모든 배상율법이 들어오게 되면 인간 본래의 무엇이 자극받느냐 하면, 인간의 욕망이 자극을 받게 되어 있어요.

아까 출애굽기 22장 이야기 죽 말씀드렸지요. 실제로 도적질 당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일으켰고 그리고 이웃과 여러 가지 배상을 주고받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으켜요. 일으키게 되면 배상해줄 때 아까워요. 인간의 소유욕이라 하는 것은 없는 건데 만든 것이 아니고 땅에 함몰되어서, 저주에 함몰되어서 저주 받아야 될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과 우리에게 물려준 게 소유욕입니다. 이것은 내 거야, 하는 겁니다.

내 거야, 를 동그라미 칠 때 그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존재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존재감은 내게 없을 때는 존재감이 없어요. 그러나 내 것이 생기면 그 내 것에 대한 존재감이 확 본능적으로 벌써 발생 되었습니다. 소유가 없으면 존재가 없어요. 그러나 소유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존재가 있는 겁니다. 이것은 타고난 거니까 말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은 어린양의 피로서 약속의 땅이라고 분명히 규정을 시켜놓고 그다음에 율법을 줘버리면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배상체제에 대해서 반발하고 거기에 대해서 기쁜 마음으로 응하기 싫은 본성들이 자극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땅 싸움이 일어나는 거예요. 소유권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율법대로 안 하고 싶은 거예요. 내것이 아까우니까.

대표적인 것이 십일조 아닙니까? 십일조 이야기하려니 내가 참 민망합니다, 민망해. 목사님 입에서 십일조 이야기 나오면 교인들이 앉아서 마음속으로 ‘미쳤나? 너 그 이야기 왜 하는데? 돈 빼먹으려고 환장을 했어? 율법 지나간 시대에 십일조를 왜 거론해?’ 죄책감 느끼라고 하는 겁니다. 죄책감이 없으면 피가 의미가 없어요. 죄책감이 없으면.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 ‘값없이’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의롭게 되려면 네가 나에게 값을 치러야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은 손해보는 장사를 안 합니다. 의롭게 되려면 반드시 값을 치러야 돼요.

값을 치러야 됩니다. “값을 치를 필요 없어. 내가 값이 되게 해 줄게.” 이것은 나중 이야기에요. 나중 이야기라고요. 철저하게 값을 치러야 됩니다. 그게 율법이에요. 레위기 26장 14-17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치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찐대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것이요 너희의 파종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그리고 28-30절에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배나 더 징책하리니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그렇게 해서 네 모든 대적들은 너를 공격할 것이고 너는 도망치기 바쁠 것이고 네 나라 민족은 잃어버리고 땅이고 강이고 다 없어질 것이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네가 주문하지 않은 피자, 똑바로 그 가치를 알고 먹어라. 그 말이거든요. “내가 배달원에게 준 그 주의사항 있지?” 너는 그걸 멸시한 거예요.

왜 멸시했는가? 그것은 애굽사람하고 동등한, 똑같은 인간의 본성, 다시 말해서 땅의 저주를 아주 무시해 버리고 나는 살아야 되겠다, 를 유지하려는,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이 마귀의 심성이 율법 앞에서 여지없이 다 폭로된 겁니다. 뭐 피 여기 저기 찍어 바르고 헤헤거리고 사는 그게 성도의 삶이 아니에요.

그 배상에 대해서 하나님은 채권자가 되고 우리는 채무자가 됩니다. 그 채무의식을 뭐라고 하느냐? 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죄에 뒤따라오는 것이 뭐냐? 공포에요. 무서움이에요. 지옥 불입니다. 신은 뭔가를 요구하고, 그 요구는 신의 법에 담겨 있고, 양심의 법에 담겨 있고 우리는 거기에서 제대로 부응하지 못할 때 주어지는 공포, 지옥이지요, 지옥의 저주를 받는 공포, 바로 이스라엘 역사는 이게 실제상황이라는 겁니다.

이번에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받은 윤여정이라는 74세 된 배우가 참 성경적인 멘트를 날렸어요.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다양하게 일곱 색깔이 있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라고 한 거예요. 윤여정 그분은 평등을 이야기했지요. 인종의 피부색에 차등 두지 말고 이제부터 아카데미상은 모든 인종을 망라하고 문을 열어줄 때 더욱더 아름다운 아카데미 시상이 될 겁니다. 그런 조로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본인의 의도와 전혀 관계없이 너무나도 성경적입니다. 어떻게 성경적이냐 하면, 유대인들이 일곱 가지 색깔을 가졌어요. 제일 위에 사두개인, 바리새인, 평면의 일곱 가지 색깔, 높낮이 없는 평면에 땅 정해서 일곱 가지 색깔이 아니고 유대 사회는 하늘에 제일 가까운 자리와 하늘에서 제일 먼 자리까지 일곱 가지의 계층과 계급을 나눈 거예요. 그걸 현대인이 볼 때 불평등의 세계라고 보지요.

제일 꼭대기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있고 제일 밑바닥에는 세리와 창기와 도둑 강도가 있는 거예요. 이방인들이 있고. 다 하면 열 몇 단계가 되지만 대체로 일곱 단계라 칩시다. 누가 봐도 그걸 불평등이라 하지 평등이라 누가 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게 평등한 거예요. 그게 아름다운 거예요.

왜? 일곱 단계 다 저주 받아야 되기 때문에. 저주의 공평함. 인간의 어떤 계층과 어떤 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인간은 대지 위에서, 땅 위에서 딱 저주 받아야 될 이유가 율법이 제시하는 그 채권자의 요구에 어느 누구도 거기에 부합되는 채무자가 한 명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로마서 7장에 의해서 모든 인간은 전부 다 죄에 대한, 신에 대한, 알 수 없는 초월자에 대한 채무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성경 전체가 다 하나로 뚫리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실제로 농사짓고 경제활동을 하고 생업에 종사하면서 실제로 하는 그 삶 속에서 애굽에 있을 때의 노예 생활에서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내 소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것이라는 것, 이 땅뙈기는 내 땅이라는 것, 그러한 소유성이 스멀스멀 올라오지요.

우리 교인들은 십일조 할 돈도 없고 십일조가 뭡니까, 밥먹고 살기도 힘든데요. 그런데서는 삼성 욕하고 부자 욕할 수 있지만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쪽 분 SK 하시고, 그쪽은 LG, 여기는 전경련 회장, 그리고 삼성도 하시고, 한화그룹, 이렇게 앉아 있다면 청와대에서 대통령 앞에서 재벌들 회의 할 때 그들 생각은 뭐냐?

‘내 것 건드리지 마. 나는 많은 재산을 갖고 있어. 유산만 12조야. 건드리지 마. 이건 내 거야.’ 이게 약속의 땅 백성 답습니까? 그게 재벌한테만 해당되는 사항이에요? 돈이 없으니까 주님만 쳐다보는 것 같지요. 주께서 “25억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30억 드리겠습니다. 76억 가져가세요.” 이렇게 하게 되면 76억 가져 가놓고 다시 76억 다 내라. 이것은 미치는 겁니다.

76억 줘놓고 그 다음 날 “미안합니다. 잘못 줬습니다.” 하고 도로 회수한다면? 인생이라는 것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주께서 회수하는 삶입니다. 회수하는 일입니다. 그게 마지막 때에요. 결국 마지막 날 그 날이 되게 되면 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겁니다. 다만 우리는 그저 공짜로 죄 씻음 받는 피자 조각 먹어서 죄용서 받은 거예요.

우리는 그 죄용서를 보여주는 하나의 물증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의 물증이에요. 사건은 존재를 포위합니다. 존재를 제한해요. 압박해서 그 사건의 속성 안에서만 살게 한다는 것 이게 얼마나 십자가 사건의 종입니까? 천국 백성의 본질이에요. 바로 이거예요. 십자가 사건에 매여서 그 안에서 즐거워하면서 주님 주신 밭에서 경작하는 것, 내 밭이 아니라는 것이 즐거운 거예요. 내 밭이 아니기 때문에 즐거운 거예요.

따라서 그 밭에 경작하면서 내 희생을 거기다가 집어넣지 마세요. 이것은 시건방진 짓이에요. “하나님, 제가 이렇게 보답하겠습니다”라든지 “하나님, 죄용서에 대해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갚겠습니다. 제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희생하겠습니다.”라는 그런 시건방진 짓은 하지 마세요. 그냥 누리세요. 내게 없는 상태에서 내 자식 없고 내 재산 없고 내 집 없고 내게 없는 삶, 아무것도 내게 없는 상태에서.

그게 바로 로마서 3장에 나오는 대로 값없이 은혜받은 거예요. 값없이 은혜받은 것. 이것은 타고난 저주받은 인간의 본성과는 너무나 다른 이야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뽑아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뽑아내서 어디에 집어넣느냐 하면 이 소유를,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다 까먹고 이것은 내 것입니다, 한 그 당시 이스라엘, 그들이 빈부차가 많았어요.

빈부차가 많다는 말은 뭐냐 하면, 선지서에 그 대목이 무지무지하게 많이 나오는데, 가진 자가 더 가지기 위해서, 소유한 자가 더 소유하기 위해서 없는 소유를 빼앗아 간다고 선지자들이 고발하고 있는데 그들을 뽑아서 너희들이 어디에 적합하냐 할 때 약속의 땅에는 적합하지 않아요. 저주받을 이방 민족들이 있잖아요. 왜 괜히 있겠어요.

제가 지난 대전강의에서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태만하게 그냥 두지 않는다고요. 게으르게 하지 않아요. “야, 천국 가지 말고 이리 와. 너는 우리 과야.” 불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로 하여금 불신의 생각을 융성하게 하도록 주께서 부지런히 일 시킵니다. 그들에게 가게 하는 거예요. 포로 잡혀가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생활하느냐? 그들은 군주가 있습니다. 군주, 왕이 있어서 땅이며 모든 백성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에요. 권력을 쥐고 있으니까. 권력자에게 매여서 죽일 수도 있는 왕이 안 죽이고 혜택을 입게 해 줄 때 백성들은 죄책감을 느끼고 군주에게 종속되는 그런 체제입니다. 시스템이 그래요.

‘세상에, 왕이 오셔서 내가 맛있게 끓인 육개장을 드시다니. 다음에 오시면 육개장 또 해드려야지. 우리나라가 농사 잘 짓고 잘 사는 이유가 이웃 나라에게서 잘 보호해준 왕의 타고난 은혜로운 자비와 통치력에 의해서 우리가 이렇게 밥 먹고 사니까 우리는 왕에게 잘해야 돼.’ 이게 바로 배상체제입니다. 채권자에게 채무감을 느껴요.

그래서 황제에 대해서 무례히 행한 사람은 옛날에 어떻게 했느냐? 그냥 죽어도 안 돼요. 시체가 되어서라도 갚으라고 무덤까지 다 파내고 사돈의 팔촌까지 보복이 가해집니다. 황제가, 보이는 군주가 실제적으로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그들에게 내면화시키는 거예요.

군주의 권력을 인간에 내면화 시키는 겁니다. 내부에 자리잡도록 한 거예요. 그게 왕이 통치하는 시대에요. 이스라엘 왕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의 그 자비가 통치하는데 이방 민족 따라서 우상 섬기면서 완전히 이방 민족 쪽으로 달라졌지요.

그런데 그것이 군주 시대가 지나고 자본주의 시대가 되면 자본주의는 어떤 시대냐? 인간의 욕망을 전부 다 해방시켜 버립니다. 인간의 욕망을 해방 시켜 버리면 그 욕망이 모든 대지 모든 영토 모든 땅 위에 도배를 해버려요. 도배를 해버리면 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제 눈에 보이는 군주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돈 있는 자에게 순응하고 복종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놓고 성질나고 기분 나쁘잖아요. 그러면 어디에 도피하느냐? 가족주의에 도피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이유도 모르고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 돈은 뭐냐? 돈은 소유를 계량화해서 숫자로 바꾼 거예요. 돈이 얼마냐, 하는 것은 내 소유가 얼마냐, 하는 거예요. 내 소유를 측정하는 매개체가 돈이라는 말이지요.

돈으로 모든 인간의 욕망의 양을 달아요. 저울에 달 듯이 단다고요. 너 돈 얼마 있어, 네 욕망은 어느 정도야, 현재 네가 챙긴 욕망의 양은 어느 정도 되는데, 이게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는 교회가 되었든 군대가 되었든 병원이 되었든 학교가 되었든 모든 것은 돈 하나로 전부 다 소통이 되게 돼요. 돈이라는 욕망으로 소통이 되게 되어 있어요. 전체가 돈에 머리를 조아리고 굴복하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은 이 시대를 이미 내다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죄책감은 뭐냐? 자기 집에 돈이 없는 것이 죄책감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해서 돈 있으면 의인이 되고 돈 없으면 죄인이 돼요. 그 양심의 죄책감 이런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뽑힐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아모스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에는 뭐냐? 그날이 되면 누가 대신 채무를 다 이뤄줘요. 땅 주인이 따로 있어요. 바로 로마서 3장에 있는 말씀 다시 볼까요? 25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구약에 있는 제물,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채무, 그걸 다 치렀기 때문에 자기도 의롭고 자기 믿는 자도 의로운 거예요. 그래서 자기 행함이 아니고 은혜인 거예요. 로마서 4장 4, 5절에 그게 나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다시 말해서 네가 예수의, 어린양의 피로 용서받았다는 것을 믿게 된 그것이 네 소유에 속한 것이 아니고 은혜에 속했다, 주님에 속한 것, 주님에 속한 믿음이다. 네게 속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선물 안에 들어 있는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걸 경작하는 겁니다. 그걸 만끽하는 거예요. 즐거워하는 거예요. 그걸 오늘 본문에서 경작하면서 포도원을 가꾸면서 늘 감사하고 기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의 마지막 모습이 이런 모습이에요. 그리스도 십자가 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도 계시고 백성들과 있는 바로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것 때문에 얼마나 마음 상하며 살아왔습니까? 내 자존심 상했다고 하나님께 닦달 내고 내 돈 상실했다고 하나님께 대들고 내 몸이 아프다고 하나님께 저항하고. 우리의 본성, 내 소유밖에 모르는 이 저주받은 모습을 향하여 주님이 피로 거저 주시는, 값없이 주시는 피로 말미암아 저희들의 마음이 내면적으로 도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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