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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5 20:20:09 조회 : 139         
38강-골 3장 22-4장 1절(상전과 노예)210725 - 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70.35.67)
38강-골 3장 22-4장 1절(상전과 노예)210725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3장 22-4장 1절입니다.

골로새서 3:22-4:1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찌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찌어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

지난 시간에 아내와 남편의 관계, 그 다음에 자녀와 부모의 관계를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혈연관계입니다. 혈연관계라서 이것은 자식을 내 자식 아니라고 할 수가 없고 부모를 내 부모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고요. 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다 보니까 정말 낯선 사람이지만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혈연관계지요.

그런데 오늘은 혈연관계가 아니고 상전과 종의 관계로 주님의 개입이 확장됩니다. 주님의 하는 일이 인간의 모든 일상에서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어요. 삽입되지 않는 곳이 없어요. 모든 곳에 주님의 일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25절에 보면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심판받는다는 이야기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사회는 혈연사회와 이익사회로 나누고 있어요. 퇴니에스(F. tonnies)이라는 독일의 사회학자가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와 게젤샤프트(Gesellschaft)로 나눴습니다. 사회를 가족끼리 있는 혈연사회, 게마인샤프트, 옛날 농촌중심의 사회와 근대에 들어와서 인간의 이익과 합리적사고를 요구하는 직장, 이런 것을 가지고 게젤샤프트라 해서 지금은 어느 것이 중요하냐 하면 가정보다도 이익사회가 우선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19세기 말에도 벌써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런 구분 자체가 뭐냐 하면, 나한테 어느 것이 이익이 될 것인가, 라는 것을 평소에 사람들이 늘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구분을 짓는 거예요. 옛날 같으면 부부에 충실하고 자식이 행복하면 그것을 행복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행복이 거기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바깥에서 얼마나 수입을 이득을 얻느냐에 따라서 사람 사는 것 같이 사는 그런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본문에서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회, 이익사회지요, 직장, 상전이 있고 거기에 부하직원이 있고 그런 사회에서 주님은 어떤 식으로 관여하고 있느냐, 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혈연사회나 이익사회에서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만나느냐 하는 그런 문제에 대한 해답이기도 한 겁니다.

보통 회사의 본부 건물에 이런 것이 붙어 있어요. “회사는 직원을 내 가족처럼 직원은 회사를 내 일처럼.” 이렇게 커다랗게 붙어 있어요. 이건 뭐냐 하면, 이익사회가 혈연사회를 완전히 삼키는 겁니다. 흔히 또 여자들이 시집가면 며느리를 내 딸처럼 그리고 시댁식구를 내 친정식구처럼.

이것은 뭔가 사람을 옭죈다 할까요, 구속한다 할까요, 그런 사회, 모든 것이 일률적으로 합리적으로 처리당하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이것은 사회뿐만 아니고 국가도 마찬가지고요.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나라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라.”

이거 외운다고 애먹었어요. 케네디가 대통령 취임할 때 한 유명한 연설문이에요. 영어참고서에 나옵니다. 국가가 날 위해서 뭘 해줄 건가 생각하지 말고 백신이나 잘 맞아라 그 말에요. 국가를 위해서 네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이것이 모든 현대의 조직사회에 다 적용이 돼요. 그러면 주님은 뭐하시나 그 말이에요. 주님은 놀고 있느냐? 어른이 잘돼야 네가 잘된다. 이것은 어릴 때부터 늘 들어왔잖아요. 자, 성경에서 주님이 개입하게 되면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 좌표가 바뀌어요. 판이 바뀐다고요 판이 인간자아 중심의 안정된 좌표를 갖고 있는 그 체제가 아니에요.

절도 있는 체제가 인간의 모든 고통과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판이 바뀌고 좌표가 바뀌는 것을 감안해 보면 요한복음에서 기적을 설명할 때 첫 번째 나오는 기적이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 들어와서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에 대해서 더 높은 안목에서 해석이 들어가는 거예요. 판이 바뀔 때는 낯선 해석이 투입되게 되면, 내 인생에 낯선 해석 주님해석이 투입되게 되면 우리의 판이 완전히 바뀌어버려요.

그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병을 고치는 게 아닙니다. 팔자 고치는 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하던 모든 병 고치는 모습 보이고 여러 가지 기적을 보이더라도 진짜 정답은, 해답은 예수님 세계의 그 체제나 그 판이, 좌표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의 체제 판하고 너무나 다르다는 겁니다. 뭐 병을 고치는 게 아니고, 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고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거예요.

이것은 너한테 무엇이 필요하냐가 아니라 정작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이 예수님 내가 이 땅에서 어떻게 변화되어서 왔고 어떤 절차를 거쳐서 어떻게 이 세상을 빠져 나왔는지를, 그 예수님의 세계가 네가 현재 알고 있는 세계하고 너무나 다르다는 그것을 보여주는 그 기적이 진정한 기적이에요.

그러면 거기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 인간들은 자체적으로 어떻게 해서 자기사회를 구성하느냐? 우리가 그것을 먼저 알아야 되겠지요. 요한복음 13장 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 날 떡을 떼시면서 발을 씻겨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발을 씻겨줄 때 예수님의 그 행위 하나 하나 속에서 미처 내가 몰랐던, 나는 어떤 존재이냐를 여기서 핵심요소로서 파헤쳐 버려요. 여기 13장 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 발을 씻기려고 수건을 몸에 감고 오시니까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해요.

이게 바로 예수님의 어떤 일이 그 인간에게 다가갔을 때, 접촉이 될 때, 만남이 될 때 인간은 예수님의 행위에 의해서 자아의 본색이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탁 튀어나옵니다. “제 더러운 발을 예수님이 씻는 것을 제가 절대로 용납 못하겠습니다.” 이 말은 “더러운 제 발은 오직 나만이 씻을 수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 인생 책임은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주님 제가 알아서 괜찮은 사람 되어서 주님 앞에, 이정도 하면 괜찮겠지요, 하고 제가 주님 앞에 다가서겠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그 자아가 자율성과 절대적인자아를 지금 추구하고 있고 그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거예요. 자아는 절대적인 자유, 내가 뭐든지 나한테 뭘 해도 상관없는 절대적 자유를 행사하는 나, 그게 이미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전면적으로 모든 인간이 그런 인간이 되고 말았어요.

못 고칩니다. 베드로가 이것이 정상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발을 씻기려고 할 때 자기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탁 튀어 나왔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지금껏 이런 식으로 살아왔었습니다. 누구한테 짐 지우기 싫습니다.’ 그 속마음이었습니다.

골로새서 오늘 본문에 보면, 여기 주님께서 개입하면서 당부하는 것이 있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23절에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여기 22절에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전달하는 주님의 성도에게 당부하는 것은 인간사회에서 주고받는 식으로, 그런 식으로 는 네가 살지 말라. 이미 그 판은 깨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요한복음 13장으로 돌아오게 되면,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 8절에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고 주님이 고집을 부려서 기어이 베드로의 발을 물로 씻습니다. 지금 이 때는요 물로 씻지요. 나중에 십자가 지고 난 뒤에는 피로 씻어요. 우리의 죄를.

이 말은 뭐냐 하면, 베드로는 베드로 본인의 구원문제와 절대적인, 천국 간 절대적인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추구하지만 주님의 뜻은 그게 아니에요. 베드로의 구원에 있는 게 아닙니다.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 인간들이 생각하는, 인간들이 사람이 사람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그런 상투적인 것 말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베드로를 차용한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은 절대로 베드로의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베드로의 요구사항을 거부합니다. 왜? 베드로에게서 나온 것은 기껏해야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그런 범위 내에서 못 벗어나고 있어요.

‘제가 알아서 깨끗하게 되어서 천당 가겠습니다.’ 지금 자아의식, 절대적 자아의식, ‘내가 나에게 자율성이 있고 자율성을 절대적 자유로서 활용해서 뭘 해도 죄가 안 되는 그런 지경, 그런 상태까지 제가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괜찮게 되어서 주님 앞에 건전한 모습으로 다가서겠습니다.’ 인간세계에서 줄곧 그거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렇게 되면 너와 내가 상관이 없는 거예요. 상관없다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이야기에요. 내가 주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마태복음 8장에서 마귀가 그런 이야기 하잖아요. 주님과 상관없으면 이것은 안 돼요.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자꾸 거부합니다. 내일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추구하는 바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제 솜씨나 구경하세요. 뭐 이런 식이지요. 제가 얼마나 반듯하게 사는지 격려나 해주세요. 그런 식이다 그 말이지요.

그러나 주님이 보고 싶은 것은 예수님의 자기 피를 우리의 발과 손과 우리를 씻겨 내릴 때 거기서 빠져나가는 우리의 죄, 인간이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죄가 드러나고 씻겨 나가는 그 순간을 예수님은 보고 싶은 거예요.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인간이 모여서 아무리 협의해도 상상할 수 없는 기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 받고 성도가 되었으면요, 주님한테 ‘왜’ 라는 말을 하지 마세요. 왜 나는 아파야 되고, 왜 나는 가난해야 되고, 내가 왜 하는 일이 항상 내 뜻과 어긋 납니까, 그 왜, 라는 말을 하면 안돼요. 모든 일에 만족해야 돼요.

고마워해야 되고 감사해야 되지 거기다가 자꾸 토를 달아서 왜, 왜, 이렇게 하게 되면 그것은 주님 따로 나 따로, 가 되는 거예요. 상관이 되어야 되는데 내 쪽에서 ‘주님 더운데 좀 기어 붙지 마세요.’ 자꾸 이런 식이에요. ‘더운데 나 혼자 좀 가만 놔두면 되지 않습니까’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과도한 자기 노력의 응고에요. 굳어진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는 모든 행위 속에서 미처 우리가 몰랐던 자아성이 그대로 노출이 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유심히 보세요. 22, 23절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 말씀을 탁 한번 느끼시고 그 다음에 4장 1절에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찌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찌어다.” 이 말씀을 할 때 이것은 단박에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돼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인간의 자아 때문에 전부다 비켜가고 있고 어긋나고 있다는 그 사태 그 상황을 지금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너희 인간들끼리 어떤 평형심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것 같으냐? 종과 상전 그 관계가 인간들이 노력으로 노동법을 동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해소될 것 같아? 사회불평등이 해소될 것 같으냐? 그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그 원인은 바로 너 인간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라.” 하는 말씀으로 주신 거예요.

교회 다니면서 사람들은 어떤 유토피아를 생각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평등 되기를 원하는데 오늘 본문 보세요. 분명히 성도들아, 해놓고는 어떤 사람은 사장되게 해놓고는 어떤 사람은 부하직원 되게 하잖아요. 성도들아. 그래서 주님께서 부하직원하고 사장하고 월급 똑같이 가져가라, 그런 이야기 하는게 아닙니다.

종이라는 것은 노예거든요. 사장, 상전은, 주인은 노예를 해방하라,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노예해방 그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노예 해방은, 인간들의 자아절대성에 나온 그것은 해결할 수 없는 하나의 기능이에요. 노예 해방 자체가 아무 해결책이 되지를 못합니다.

인간은 자꾸 평등을 원하는데 그것은 주님의 방식이 아니지요. “노예냐?” “예” “계속 노예 해.” “네가 사장이야?” “예” “계속 사장해” 지금 주님께서 하시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에요. 왜 어떤 사람은 노예가 되어야 되고 왜 어떤 사람은 귀족이 되어야 되는가?

그 속에서 인간이 제일 간절히 원하는 고통 문제가 인간 내부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도 이게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이렇게 갈라놓고 체험케 하는 거예요. 그걸 다 느끼게 하는 겁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만 “회사는 직원을 내 가족처럼 직원은 회사를 내 일처럼” 이런 플래카드를 붙여놨다는 이유가 이게 잘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장은 직원을 볼 때 분노의 대상으로 봐요. 사장이 직원들을 볼 때 내 돈이나 빼먹는 잠재적 도둑놈들이에요. 내 돈이나 빼먹는. 사장이 안 되어 봤으니 뭐 압니까. 월급날 되게 되면 정말 직원들에게 돈 주기 전에 한소리라도 하고 싶어요. 다시 말해서 ‘사장이 너희들 보기에 호구로 보이냐? 내가 만만해? 내가 호락호락해 보이지? 그지? 너희들 놀 것 다 놀면서 내 돈 빼먹으니 너희들이 승리라도 한 것 같지?’ 늘 사장은 그 마음이 자기 속에 있어요.

그러면 직원은 사장을 뭐로 보느냐 하면 개주인으로 봅니다. 내 목숨 줄을 딱 묶어 놨거든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힘 좀 쓰려고 하면 목줄 잡아당겨요. 이랴, 이랴, 목줄을 잡아 당겨요. ‘싫어? 목줄 끊어버려. 싫으면 나가고. 회사가 전쟁터라고 보지. 이 바깥은 지옥이야. 나라도 되니까 너 같은 인간 밥 먹여 주는 거야. 이 직원아, 이 노예들아’

사람이 일을 하고 직장을 구하는 것은 자기의 고통을 면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사람이 지금 일하는 것은 고통을 면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 직장 다녀봤자 그 직장에서의 나는 나, 자아, 나 절대자아의 변형체고 내가 그냥 변신한 거예요.

절대자아라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요, 나가 있고 또 내가 되고 싶은 절대적인 나가 있어요. 그 절대적인 나는 어떤 자아냐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나에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가 있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이것은 어린애든 어른이든 할 것 없어요.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악마의 변형체로 인간은 그렇게 달라졌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나는 그 절대적 자아에 다가가면서 그 중간에 그걸 얻기 위해서 남들 찾아가게 됩니다. 직장생활 한다는 말이지요.

그 남들은 뭐냐? 나만이 자아고, 나만이 진짜 인간이고 나머지는 전부 다 사물이에요. 나머지는 다 물건이고 소유대상입니다. 그래서 사장은 자기직원들을 자기 집의 가구나 강아지 개처럼 하나의 물건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그리고 직원도 사장을 나에게 돈을 제공하는 어떤 물건으로 보는 거예요. 인간을 소유대상으로 보는 거예요.

이 고통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나만이 덜 고통 받는 방법은, 나만이 좀 숨 좀 쉬고 싶은 방법은 나는 절대적인 자유를 행사할 권리가 있고 권한이 있다는 것을 사회에 나가서 공인받고 인정받고 싶은 겁니다. 이래서 어울린 것이 바로 이익사회에요. 게셸샤프트, 이익사회, 각자 각자가 자기밖에 모르는 것, 모든 사람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서로 투쟁하는 것, 만 명이라면 만 명이 서로 투쟁하는 것, 만인투쟁에요

친구를 만나든 동창을 만나면 그게 투쟁관계에요. 왜? 내가 주인이니까. 내가 주인이니까요. 이유를 묻지 마세요. 무조건 나는 주인이라는 거예요. 내가 주인이면 되는데 그걸 사회에 나가서 동의를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회에 나가고 직장생활을 하는 거예요. “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줘야 해.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날고 싶어.”

날아봐라. 추락하지. 세상에 나가고 싶다. 왜? 집구석에 앉아 있으면 자기가 최고잖아요. 아니 아니에요. 사회의 동의를 받아야 돼요. 너 최고야. 너 대단해. 바로 그게 절대 자아에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심지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내가 언젠가는 이 피자가게 사장 될 거야, 알바 돈 모아서 사장될 거야, 이게 하나의 목표로서 딱 나와 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주인이라는 것은 그 목표에 가기 위해서 지금은 아르바이트 하면서 자기의 등짝을 맞깁니다. 아부를 하지요. 감내하고 참아내면서 ‘언젠가는 나도 세상에 나가서 보란 듯이 성공할거야.’ 그렇게 살면서 나이 80돼요. 그 생각하면서 벌써 80년이 훅 지나가요. 90년이. 요양병원에 가서 ‘나는 그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자식 만나면 ‘집에 가고 싶어라.’

요양병원에 주인이 또 있거든요. 간호사 의사가 주인이거든요. 자기는 노예고. 절대자아의 노예로서 현실적 인간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백 명 만나면 백 명 다 주인이에요.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보이냐? 내가 호구야’ 그런 말은 안하지만 내부에 그걸 깔고 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뭘 한다 이 말은 네가 사람을 사랑한 적도 없이 사람을, 타인을 이용할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주인이니까 나 빼놓고 다 노예에요. 사물이고 물건이고. 아닌 척 하지만. ‘내 발에 흙 묻히지 않기 위해서 너희는 내 앞에 꿇어 앉아 내가 밟고 지나갈 거야. 그래서 건너가게 되면 내가 그리워하고 그리워했던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사회적으로 천명할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모든 인간은 이걸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왜 인간들에게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인간이 인간들에게 하는 그런 식으로 하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 현장에 주님이 개입하시거든요. 이게 어렵기 때문에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이걸 매개자 또는 중개자, 성경적으로 하면 중보자가 되는데 어떤 분이 한의원에서 10년 동안 일했어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원장이 수련회 간다고 빠지곤 한 것에 기분이 나빠 가지고 10년 만에 그냥 쫓아내 버렸습니다. 정규직원도 아니니까 나가라 해서 나갔어요. 잘렸어요. 잘리고 난 뒤에 이분이 중재자를 세웠습니다. 노동노무사를 세워서 한의원을 상대로 고소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 사람은 퇴직금도 한 푼도 못 받은 상태였고 유류수당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그 수당도 못 받고 그냥 나갔어요. 노무사 그 중재자를 통해서 9백 50만원 받았습니다.

자, 중재자, 중보자, 이게 뭐냐? 인간들끼리 나둬 버리면 다들 주인공이고 자기가 전부다 돛대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이것은 악마 천지가 되고 말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중재자로 들어가는 겁니다. 할 때 너도 개입하지 말고 다른 사람도 개입하지 말고 빼버려요. 사람이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가 그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어떤 사람은 사장되게 하고 어떤 사람은 직원 되게 하는 거예요. 사장되고 직원 되게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정말 네가 성도라면 사장도 성도고 직원도 성도라면 네가 어떤 네 고통의 문제를 네가 해결하려 하지 말고 중재자 되시는, 매개자 되시는 예수님을 네 속에 들어가도록 네가 허락을 하라.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모든 인간은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내가 최고다, 라는 이 사실만 가지고 상대와 대화하고 이야기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스스로 종으로 들어가요. 성경에 주께서 개입한다는 말은 신약에서 물론 주님께서 종으로 오신 것도 맞지만 그 전에 구약에 보면 종으로 나온 게 있어요.

시편 105편 17-19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요셉의 특징은 종으로 팔린 거예요. 요셉은 모든 우리 인간하고 똑같아요. 자기가 주인공이고 자기 인생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런 절대자아를 추구하는 그런 사람 맞아요. 같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꿈이 요셉을 찾은 순간 요셉은 꿈의 종이 되는 겁니다.

요셉이 꿈의 종으로서 이 세상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밝혀내느냐 하면,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면서 팔려가기 전에 형제들이나 아버지나 그 때부터 해서 애굽에 팔려가면서 만나는 족족 이 세상은 모두가 자기가 주인행세 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그 죄를 까발리는 역할을 해버려요. 요셉은 본인이 주인공 노릇을 의도적으로 못하게 만들어서 그럽니다.

꿈은 꿈대로 되어지는데 뭘 밝혀내느냐? 인간들은 요셉을 소유하려고 해요. 왜? 요셉이 만났던 모든 사람은 요셉 앞에 자기의 본색을 드러낸 거예요.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내가 주인이니까 주인은 사물과 어떤 물건이 필요해요.

내가 주인이라는 것을 증명해줄 어떤 소유적인 것, 나에게 소유당할 그런 것들이 필요해요. 인간은 타인이 자기 소유물이에요. 나의 절대성을 증명해 줄 소유물이라고요. 그런 인간들밖에 없다는 것을 인간들은 몰라요. 적당히 협상하고 적당히 타협하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자진해서 “하나님, 저 노예생활 할래요.” 이런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자진해서 “하나님, 저 평생 종이 되어서 살겠어요.” 이렇게 손들고 나올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니라”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세계는 이미 하나님께서 지켜볼 때에 불의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려고 작정한 이 세상에서 인간들은 너무나 철딱서니 없어서 자기가 여전히 주인노릇 주인행세하려고 설쳐대고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들이. 나는 왜 최고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평생을 거쳐서 자기가 자기를 증명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런 마음에는 다른 아무 마음이 없어요. 세상 앞에서 자기 잘난 것 자랑하고 싶어요. 그런데 여기 요셉은 요셉에게 꿈이 찾아옴으로서 이제 요셉이 가는 길은 꿈이 요셉을 앞장세워서 요셉을 하나의 모양새로 만들어서 요셉 안의 꿈이 요셉을 몰고 세상을 후집고 다니는 겁니다.

그 후집고 다니는 것이 직업이나 가정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영역에 다 인간들은 거기에 절대자아라는 이 악마성을 내뿜고 있다는 사실을 요셉을 앞장세워서 전부 다 까발려 버리는 거예요. 모든 영역에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가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자기 정욕의 소유물로 삼으려고 했잖아요. 감옥가도 그렇게 국무총리가 되어도.

그러니까 여러분이 아셔야 될 것은,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이후에도 요셉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는 것을 버린 적이 없다는 거예요. 국무총리라는 최고의 자리에 앉아도 절대로 자기는 주인이 아니에요.

창세기 50장 18절에서 21절에 보면 야곱이 죽고 난 뒤에 요셉이 자기들에게 보복할까 싶어서 형들이 걱정이 늘어졌어요. 그래서 창세기 50장 17절부터 이야기가 죽 나옵니다.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그렇게 하니까 요셉이 하는 말이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 살리기 위해서, 당신들 구원하기 위해서, 여기 구원이란 말은 없지만 당신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본문 그대로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종으로 사용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내가 당신들 주인노릇 하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뜻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아, 참, 이 세상 인간들에게, 막 본인들에게 맡겨서 생명을 얻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아까 베드로처럼 자기의 발, 내 발은……,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한 그 행위를 잘 보세요.

내 발은……, “주님, 잘 들으세요. 내 발은 내 발이기에 내가 씻습니다. 뭐가 더럽고 깨끗하다는 것은 내가 잘 아니까 내가 내 발 씻겠습니다.” 이게 얼마나, 주님만 그 자리에 없으면 얼마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우리는 그게 저주받을 짓이고 심판받을 짓이라는 생각을 언제 했습니까? 한 적이 없지요. 그게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고백인가를 베드로는 알 길이 없어요.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주님이 그런 베드로를 보고 하는 말이 “베드로야, 너 지금 나한테 발 안 씻기면 네 죄는 그냥 있어. 너 좋으라고 씻겨주는 줄 알아? 내가 이 땅에 뭘 하러 왔는지를 내가 너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그냥 나한테 붙잡힌 것이다.” 그 말이지요.

왜 우리는 그렇게 못 살아갑니까? 주님의 안목처럼 살아가야 되지 않습니까? 왜 자아를 그렇게 숨기며 살아갑니까?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이 세상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일을 하셨어요. <슈퍼맨 3> 영화에 보게 되면 화가 잔뜩 난 지구의 영웅 슈퍼맨이 어디로 날아가느냐 하면, 이태리 피사의 사탑으로 갑니다.

피사의 탑이 기울어져 있는데 그걸 똑바로 세워버려요. 똑바로 세워버린다고요.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가 바로 뭐든지 ‘똑바로’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그 ‘똑바로’라고 생각하는 그 인간들의 절대자아의 그 안목을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삐딱하게 만들어버려요.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알아들을 턱이 없지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수님, 죄 씻음 한번만 하면 되겠지요?” 여러분, 죄 씻음이 한번만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매일같이 죄 만들어내고 매일같이 그 죄를 주님의 피로 우리의 손발을 씻어내십니다. 주께서 보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의 육신은 하나님의 거룩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흔히 아시는 말씀을 제가 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인간이 반듯하게 세워놓은 모든 것을 다 삐딱하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인간은 절대자아라는 그것을 대환영을 하고 있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그것은 하나의 인간을 옭죄는, 자아라는 그것이 인간을, 자기의 절대자아라는 주인이 인간자체를 옭죄고 구속하는 거지요.

<양들의 침묵>이라는 영화를 제가 두 번 봤는데요. 안소니 홉킨스라는 배우, 상을 몇 번이나 받았다는 그 정도로 연기를 잘한다는 그 사람의 복장이 굉장히 기괴하고 흉측하게 나와 있어요. 그 포스터에 보면.

백 년 전부터 유럽에서 정신병자 미치광이 사이코패스 이런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감옥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구속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구속하는 옷. 그게 뭐냐 하면, 자살할까 싶어 자살 방지용 옷, 입을 약간 벌리도록 창살 같이 해놓고, 가면 쓰고 눈만 나오게 해놓고, 그 다음에 팔과 손을 가지고 무슨 짓거리를 할 까봐서 팔을 뒤로 제켜놓은 채 위로부터 통으로 옷을 뒤집어 씌워 잠가버려요.

<양들의 침묵>이라는 포스터 여러분이 찾아보세요. 꼼짝 마라, 지요. 꼼짝 마라. 지금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이 전부 다 그러고 있어요. 그게 히브리서 2장 14, 15절에 나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종노릇 하는 모든 자,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완전히 죽음의 공포, 두려움, 그리고 그 배후의 악마, 악마의 종이 되어 있는 거예요. 참, 이 문제 이거, 인간……, 그래서 인간들은 마귀의 종이 되어서 마귀가 인간을 뭐라고 속이느냐?

‘너는 절대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권한이 있어. 하나님은 너를 사랑해.” 이것, “너를 대접하는 자를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고 선지자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뭐든지 잘해주면 돼. 이것이 사람 사는 거야. 네가 조금 허물이 있어? 그러면 네 손으로 네 발을 씻으면 돼. 네 문제는 네가 해결하는 거야.’

그런 생각으로 인간의 고통문제를 인간에게 넘겨 버렸어요. 해결 됩니까? 인간이 아무리 부자 되어도 해결되던가요? 인간의 고통, 그 공포, 사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에요. 여러분이 ‘곡기 끊고 뭐 깍 굶어죽지.’ 인간이 곡기 끊고 번개탄 피우고 넥타이로 매서 자살은 할 수 있어요. 인간이 자기 죽는 것은 겁나지 않은데 내 자아가 소실되는 것이 두려운 거예요.

인간의 죽음의 고통은 육체가 굶어죽는 게 아니고 이 자아가 사라지는 거예요. 이걸 제일 무서워하는 거예요. ‘네가 나를 때리는 것은 용납해도 네가 나에게 모욕을 주는 것은 나는 용납 못해.’ 이거거든요. ‘사장이 월급 좀 못주는 것은 괜찮은데 사장이 나를 개무시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개무시 당하는 것.’ 이거잖아요. 이게 절대자아 아닙니까? 이게 있다고요.

그래서 악마는 ‘그 절대자아를 항상 곱게곱게 지키고 유지하라.’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자아를 삐딱하게 만들었어요. 이 세상에 정상인 자는 아무도 없다. 이유가 뭐냐? 내 육신은 하나님의 거룩을 버텨내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작전은 뭐냐? 하나님의 작전은 이겁니다. 오늘 핵심 부분에 왔는데 잘 들으세요. 하나님의작전은 뭐냐? 첫째 죽음을 주시고 첫째 부활을 주시는 겁니다. 첫째 죽음 그것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급을 했었어요.

마태복음 20장 26-28절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더 쉽게 해서 너희들은 내 잔을 마셔야 된다. 그 잔을 마시는 순간 그것은 사약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우리가 안 죽고 싶은, 잃어버리지 않고 싶은, 내가 소실되기 싫은 내 자아를, 주님께서 내 발을 씻는 순간 나는 날아가 버려요. “주님이여, 왜 제 죄를 씻어줍니까?” 라고 말하지 마세요.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 내 발을 이용하신 거예요.

우리의 손발을 주님 앞에 드리세요. 주께서 쓰시도록. 그래서 가나안 혼인자치에서 처음부터 포도주가 아니라 물을 가지고 가라는 거예요 이 물 같은 인간들이 물을 가지고 그 다음에 포도주 되는 몫은 내 몫, 예수님 자신의 몫이에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은 첫째죽음에 참여해야 돼요. 이 자아는, 이 끈질긴 자아는 이미 주님 보시기에 이것은 없는 거예요. 그리고 주께서 준비해놓은 새로운 자아는 단독자아가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을 드러내기 위해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첫째죽음과 첫째 부활, 이것이 계시록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20장 4, 5절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죽었는데 살았다는 겁니다. 죽었는데 살았다. 그러니까 우리 육신이 죽는 이것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건 잠자는 것이니까 그것은 문제 삼지 않고 주께서 문제 삼는 것은 악마가 집어넣어준 게 있어요.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말씀을 감당도 못하면서도 나는 나로서 버티려고 하는 이 악마적인 계획, 획책,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먼저 오셔서 우리 자신을 가위표 찢어버린 겁니다. 너를 위한 너의 용도로서의 자아는 이 예수님에게 필요치 않다는 겁니다.

지금제가 몇 번째 이야기하는지, 너무 이게 중요하기에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13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 그냥 베드로에게 발을 씻어주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로 하여금 베로의 말을 유도해 내지요. 경상도 말로 “와 이카십니까, 주님. 저는 스승님이 오히려 종이 되어서 제 발을 씻는 것을 제가 제 자아로서는 염치없어서 도저히 허락을 못해드리겠습니다.”

굉장히 점잖지요. 상당히 인품이 되었지 않습니까? 훌륭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거기에 대고 주께서 하신 말씀은 너무 나 명백합니다. “이러면 나는 너와 상관이 없다.” 다시 말해서 내가 찍어 바르는 물, 나중에 피가 됩니다, 내가 너에게 찍어 바르는 피가 네 속에 없으면 너는 너 따로 나는 나 따로다, 그 말이에요.

악마가 우는 사자와 같이……,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악마가 베드로와 제자들을 삼키려고 할 때 주님의 기도 제목이 뭐냐 하면, “악마가 내가 택한 자들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그 자아를 계속 갖고 있지 못하도록 내가 기도한다. 네가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누가복음에서 주께서 그렇게 이야기하셨어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인생 사는 게 공포에요.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서 자꾸 기회를 엿보는데 살아가면 살수록 이유도 없이 그냥 공포스러워요. 젊어서도 공포스럽고, 중년도 공포스럽고, 늙어도 공포스럽고, 백신 두 번 맞아도 공포스럽고, 모든 게 하루하루가 공포에 가득 차 있는 터널 속으로 매일같이 눈만 뜨며 기어나가는 그 생활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자아를 내가 포기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옳고 그른 것도 다 애정이 있을 때 하는 이야기에요 주님께서 이 말씀 주시는 것도 아직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말씀 우리에게 허락하신 거예요. “네가 주인이라고? 너 주인 아니야. 주인은 하늘에 있는 상전이 따로 있어.”

그렇다고 사장이 아르바이트 하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노예가 되어서 ‘왜 저는 날 때부터 노예생활 해야 됩니까?’ 그 ‘왜’라고 묻지 마. ‘왜’ 라고 묻지 말고 너는 노예가 되어야 돼.” 그래야 내 뜻이 나올 수 있고 너는 사장이 되어야 돼요. 사장이 되어야 내 뜻이 나와요. 어떤 형편이 있든지 그 역할 맡은 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대들지 마세요.

주님께서는 어떤 자리든 네 육신으로 내 거룩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겁니다. 네가 내가 요구하는 기준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어느 자리에 있든 우리는 악마에 들린 그냥 죄인이지요.

끝으로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은 에베소서 4장 8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선물 주셨다, 그 말은 현재 누리고 있고 갖고 있는 게 다 네 것이 아니고 선물이다. 하나님이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 매개물로 너를 사용했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절대자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든 타인들을 매개로 삼아서 역시 나는 잘났잖아, 라고 사용하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 죄인을 통해서 그 죄를 만들어내고 씻어주고, 만들어내고 씻어주고, 어떤 환경이든 네가 이것밖에,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주님’ 이것밖에 나올 수 없는, 그런 식으로 공포를 이겨보려는 그런 하잘 것 없는 그런 것을 통해서 귀한 예수님의 피가 발리는 대상으로 주께서 우리를 안아준 겁니다.

이게 바로 주안에서의 새로운, 주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회형성, 이것을 이 세상 모든 구석에, 이런 식으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도 주께서 지금도 관여하고 있음을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무서움에 치를 떨고 알 수 없는 공포에 맞닥뜨리면서 내 힘으로 나를 설득해서 나는 괜찮다고 자꾸만 나를 옹호하는 이 더러운 버릇을 주께서 소실시켜 주시고, 주께서 피로 마련한 새로운 저희자리에 주께서 일하심으로 죄가 나오고 주께서 그 씻으시는 그 피만 만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38강-골 3장 22-4장 1절(상전과 노예)210725 - 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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