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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9 00:03:26 조회 : 182         
강남-누가복음 7장 32절 (미로) 211005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7장 32절 (미로) 211005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7장 26절 보겠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성경을 보면서 특이한 인간이 등장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 너도 지킨다 나도 지킨다 지켜봐야 거기에서 거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이한 인간을 딱 거기에다가 꽂아버립니다. 그 특이한 인간이 등장은 일반인들이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지킨다는 것과 너무나 차이가 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특이한 인간에 실려 있는 그 운명에 실려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재현은 그 특이한 인간 말고 다른 사람이 나름대로의 말씀 지킨다는 것하고 큰 대조가 일어나죠.


그렇게 되게 되면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도 바쁜 일상 가운데 주의 뜻대로 영광을 위해 살아갔습니다 하는 그 모든 궁시렁 궁시렁하는 소리가 이건 자신의 그냥 한계를 보여주는 것밖에 안돼요. 나름대로의 할 도리 다 했습니다. 그걸 하나님께서는 안 받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특이한 인간을 통해서 말씀은 이렇게 지키는 게 말씀이다라고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일반 교회에서는 그 비교 대상이 성경을 안 보니까 성경을 안 보고 먼저 교회 다닌 사람들 교회 직분자들 목사들 어떻게 지키는가 그걸 보면서 저 정도 같으면 따라잡겠다 그런 생각 들지요.


자기 목표 대상이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삼지 않고 오랫동안 신앙 좋다 뭐 남들이 신앙 괜찮다 그런 사람들을 모델로 삼아서 그 사람과 나의 거리는 어느 정도고 어떻게 노력하면 비슷하게 따라 잡겠다 이렇게 생각해놓고 나도 말씀은 한 말씀 지켰습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는데 성경을 보세요. 성경을 보면 거기 선지자 나오잖아요. 세례 요한 나오잖아요.


이 세례 요한의 특징이 벌써 26절 27절 보면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러니까 사도 바울도 그렇고 모든 것은 성경의 특이한 인물들은 기존의 모든 인간 본인을 특이하게 보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소시키는 겁니다. 너는 백날 해봐야 특이한 인간 못돼. 그냥 그렇고 그런 인간류에 속해.


따라서 그들끼리 너희들끼리 잘했다 못했다 경쟁 자체가 이거는 하나님께서 수용될 수가 없습니다. 바쁜데 열심히 지켰으니까 그거라도 열심히 했다고 봐주세요 이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본다는 것은 나를 잊어버리는 거에요. 나에 대해서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겁니다. 소거한다. 음소거 있잖아요. 음소거. 소멸시키는 것.


성경은 우리 자신을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소멸시켜요. 소거시키는 거에요. 음소거는 음이 들리지 않잖아요. 내가 느껴지지 않는 것. 내가 느껴지지 않게 만들어요. 그러면 내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내가 누구하고 경쟁하거나 따라잡아야지 하는 것도 다 소용없는 일인 것을 미리 알게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는 것을 부담을 느끼는 이유는 단 하나지요. 성경의 인물을 따라잡기는 따라잡아야 되고 그리고 자기 생업이 있기 때문에 시간을 거기에다가 다 쏟지는 못하고 그래서 스스로 본인 보기에 자기 점수를 미리 예상해가지고 미안스러워가지고 늘 부끄러워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소거가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너무 의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에 세례 요한이 등장하는 이 모습은 바로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낸다” 뒤에서 이렇게 떠미는 사람의 정형적인 인물, 세례 요한입니다. 선지자죠. 내가 세상에 보낸다. 네가 네 인생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내가 보냈으니까. 보낸 자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타난 자가 선지자에요.


그래서 선지자에서는 ‘너 똑바로 해 너 잘해’ 가 아니라 선지자는 이렇게 해요. ‘누가 너를 보냈더냐?’ 이렇게 해요. ‘누가 너를 보냈더냐.’ 그게 중요해요. 나 아무도 안 보냈는데 나 알아서 왔는데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여전히 자기한테 집중하겠지요. 消去(소거). 한자로 이거에요. 자기 자신을 없애버리는 것.


그래서 세례 요한을 볼 때 세례 요한은 어땠다고 보지 말고 세례 요한의 보냄을 받을 때 그 구조를 알게 되겠지요. 그 구조만 알면 되겠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여기 인간.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세례 요한을 인간 세계에 보냈어요.


그러면 세례 요한 중간에 세례 요한이 주어지는데 세례 요한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인간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입니다. 세례 요한은. 인간이 보낸 게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이 보냈기 때문에 인간 세계에 어울리지 않지요. 그럼 세례 요한은 어디에 어울리느냐 하면은 세례 요한은 예수님 세계에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동그라미 그리면 이렇습니다. 이쪽이 하나님 세계고 이쪽이 인간 세계라면 겹치는 부분, 이게 세례 요한이 되는 거에요. 그런데 이 겹치는 부분은 예수님께서 보내심을 받아야 가능하지 인간 쪽에서 너 하라고 추천하게 되면 이건 탈락입니다. 다윗은 인간이 선택한 게 아니에요. 꼬맹이가 어른들 전쟁하는데 끼어드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버리니까 그 꼬맹이가 그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의 전쟁 막중한 결과를 낳는 그 전쟁에 그냥 뛰어든 거지요. 잔 다르크 비슷하게 해가지고 그냥 뛰어든 겁니다. 만약에 다윗이 그 골리앗 전쟁에서 골리앗 거인한테 발에 밟혀가지고 허망하게 죽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인간 세계에서 통하는 원리는 계속해서 유지가 돼요. 애들은 어른들 하는데 끼는 게 아니야. 애들은 어른들 일에 끼어드는 게 아니야! 그게 계속 유지가 되겠지요.


그러면 이 인간 세계의 한계가 안 드러날 겁니다. 인간 세계는 전부,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가 곧 전부야 전체야 라고 단정 짓게 되겠지요. 그런데 소년 다윗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렇게 전체라고 문을 닫아두었는데 문을 닫는 것이 경솔하다가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 섬기는 이 자체가 이게 가짜고 경솔한 거에요. 하나님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이렇게 섬기자고 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어울리지 않지만 인간들의 모든 사고를 엎어버릴 낯선 새로운 인물,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침투될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 세계와 우리 인간 세계의 조인하는 결합하는 유일한 방식이 되는 거에요.


그 방식을 진행, 작업되면서 누가 부정됩니까? 우리 인간 세계 이 전체가 전부다라고 하는 생각 자체가 이것이 잘못이라고 들통 나겠지요. 바로 이 세례 요한의 기능이 그거에요. 인간 세계에 어울리지 않고 주님의 세계에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특이한 사람이죠.


그러면 그 당시에 인간 세계에서 시도했던 것이 뭐냐 하면은 우리 쪽에서 괜찮은 거룩과 괜찮은 하나님께 영광될 만한 어떤 종교적인 성스러움을 이걸 생산해서 이것 가지고 하나님 나라로 밀어붙이자라는 시도를 그 유대사회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선지자를 보냈다는 말은 ‘그거 아니야. 그거 아니야. 그런 거 안 받아’ 라고 그걸 하나님께서 그걸 강조하시면서 세례 요한을 통해서 인간 세계에 여기에 당도한 거에요. 보냈다 했으니까 당도한 거에요. 도착한 겁니다 인간 세계에. 세례 요한을 보내가지고.


그래서 그림 한번 보세요. 동그라미 두 개 겹치지요. 한쪽은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 세계가 겹치지요. 자, 이렇게 겹쳤을 때에 이렇게 겹친 부분이 있다는 말은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에 관여했다는 겁니다. 관여했다는 것. 그래서 선지자의 출현, 그 자체를 우리는 놀라야 되고 감사해야 되고 고마워할 줄 알아야 돼요. 선지자가 등장하지 않으면 나 잘났다 식으로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 한계를 드러내요. 나한테 문제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한대로 하게 되면 이건 나중에 낭패다. 그걸 일깨워주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선지자를 보냈으니까 낯선 우리 인간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고 인간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분을 보내준 것에 대해서 고마워해야죠.


그 선지자가 아니면 주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면 나는 나 잘난 맛에 살아갈 뻔했구나. 아휴 큰일 날 뻔했구나. 그래서 선지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하늘나라의 제일 인간에게 싫어하는 게 뭐냐? 악마가 악마를 저주하고 인간 세계를 파멸시키는 이유가 뭐냐? 이겁니다. ‘패망’.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다. 잠언 16장 18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16장 18절.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다”


여기서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특이성이 없고 인간들끼리 생각하는 그러한 그게 바로 교만입니다. 인간들이 하는 선과 악의 기준 이게 교만이에요. 왜? 특이성이 없으니까. 선과 악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의 진리는 뭐냐? 선과 악을 그 갈라짐에서 그 바닥에서 올라옵니다. 선과 악, 그 바닥에서 올라오죠.


그러면 세례 요한은 누가 공격하느냐? 선하다고 하는 쪽에서도 공격하고 악하다고 하는 쪽에서도 세례 요한을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7장 31절 32절. 제가 읽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한다”


어울리지 않지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겁니다. 선지자가 왔는데 그들은 그들의 이데올로기, 이념과 사상 체제에 있어가지고 어울리지 않는 거에요. 그러면 선지자는 어떻게 하느냐? 이들 모두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되지요. 그래야 그들의 한계가 드러나니까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거에요. 가만있으면 미움을 안 받겠지요. 미움 받는 짓거리를 유발시켜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선지자는 고생 많이 해야 되는 거에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하면 선지자 노릇 못합니다. 이렇게 분란을 일으켜버려요. 물론 선지자가 알아서 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만들지요.


그게 선지자 본인의 의지로 되는 게 아니고 위에서 누가 밀어붙여야 되니까 그걸 하늘로부터 온 권세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지상에서 지금껏 알던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해버리는 거에요. 인간에서 나올 아이디어가 아니고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다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새로운 거니까 받아들이면 되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하겠지요. 이런 게 좀 어려워요.


뭐냐 하면 인간들로 하여금 아마 선지자는 이러한 자일 것이다 라고 그들로 예측하게 만들어요. 관찰하고 추측하게 만든다고요. 추측하게 만들어 놓고 추측한 그걸 아니라고 해버리는 겁니다. 이 말은 선지자의 그 고난과 핍박 속에는 인간들이 그냥 몰랐다가 아니라 기어이 인간은 이것은 안다 라는 것을 다 끄집어내게 만드는 그러한 작업으로서 선지자가 등장하는 거에요.


초반부터 좀 어렵지요? 어려워도 참아내야 됩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역학에서 독약이 들어있는 거기에 고양이를 함께 집어넣어요. 실험하는데. 사고 실험이죠.그 고양이가 죽었을까 살았을까 확률은 반반이었을 때에 양자세계.


아주 작은 이 세상의 미세 중에서도 원자보다 더 작은 그런 양자세계에서는 아무도 모르는데 아마 살았을 거라고 열면 죽어있고 죽었을 거라고 열면 살아있는 거에요. 이게 현대물리학이에요. 이건 미신이 아니고 과학이에요.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입자가 누굴 갖고 노느냐 하면은 덩치 큰 인간이 관찰과 추측이 오기를 고대하다가 그들이 결정한 마음으로 그래 죽었어 죽은 거야 딱 관찰한 순간 그 관찰 자체를 뒤엎어버리는 겁니다.


어떤 경우도 인간의 관찰과 추측이 주도권을 못 쥐게 만들어요. 이게 미세세계, 양자세계에요. 양자역학세계. 가장 작은 최소입자세계입니다. 과학자들이 그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어요. 이게 슈뢰딩거 학자가 주장해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라고 하는 거에요. 자기 집에 고양이 키우는 게 아니고요.


그냥 우리가 살면서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고 허무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고 참 허무한 거야. 왜? 전도서 보니까 인간은 헛되고 헛되다 하니까 인간은 허무한 거 맞아. 그래서 구약 전도서를 보고 헛되고 헛되니 인생은 헛되다. 인생은 허무하다. 헛되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이걸 교만이라고 하고 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 되게 하는 거에요.


헛된 게 정답이 아니라는 거에요. 네가 성경을 보고 전도서를 보고 헛되다고 하는 것은 네가 평소에 인간 세계에서 갖고 있던 한계를 드러낼 뿐이에요. 그래서 노래도 그런 게 있어요. 돈도 부질없어 사랑도 부질없어 인생도 부질없어 교회도 신앙도 부질없어 훨훨훨. 훨훨훨 뭔지 알아요? 김용임이 불렀던 훨훨훨.


노래 가사에 사랑도 부질없어 미움도 부질없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 훨훨훨 훨훨 벗어 버려라 훨훨 사랑도 미움도 버려라 벗어라 훨훨훨. 김용임이 히트 쳤어요. 뭔가 세상을 초월한 무상의 세계, 불교의 도 세계가 그렇잖아요. 그걸 성경에서 뭐라고 한다고요? 그게 바로 ‘교만’. 이게 교만이에요. 패망의 선봉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겸손하게 사는 게 교만이고 순교하는 게 교만이에요. 인간은 그 정도는 알거든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인간에서 끄집어내는 그 모두를 교만하게 만들어요. 왜? 주께서 보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인간을. 주께서 보내지 않는 인간들이 끄집어낸 아이디어는 어떤 경우도 이렇게 겹치는 부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자에요.


보낸 자 세례 요한은 출생의 비밀이 있습니다. 출생의 비밀이 누가복음 초장부터 나오는데 레위지파에 속한 그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있어요. 사가랴인데. 제사장 계열의 사가랴가 아버지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자식이 있어야 아버지죠. 자식도 없는데 아버지가 되겠어요? 그냥 사가랴 선지자에요. 자식이 없습니다.


그 아내의 이름은 예뻐요. 엘리사벳. 뭐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엘리사벳. 둘이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에요. 자식이 없으니까. 대가 끝난 겁니다. 끝났는데 그들이 생각하기를 만약에 자식을 주게 되면 우리끼리 낳은 자식이니까 이름을 누가 짓겠다? 내가 짓겠다고 이렇게 분명히 이야기할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식을 줍니다. 애 못 낳는 것을 분명히 하고 천사가 와서 자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자식을 주는데 이름 붙일 권한을 부모로부터 뺏어가 버려요. 말도 못하게 만들어요. 아버지가 벙어리가 되는 거에요. 벙어리가 되어서 말을 못 한다 1장 20절에 나오지요. 그래서 친척들이 아버지가 사가랴니까 사가랴 2세 해라. 사가랴니까 하니까 “으으응~~” 말을 못하니까 쓰라고 하니까 그때 썼지요. ‘요한’.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아들 세례 요한 때문에 아버지도 그 친척에 어울리지 않는 그 친척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로 변했어요. 아버지가 아들을 양육,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고 없었던 아들이 아버지를 아들의 세계 속에 빨아들이게 하는 겁니다. 그 이름 쓰게 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에. 이름을 지어준 것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소유권이 엄마 아버지 소유권이 없어요.


그래서 여기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천사가 등장하지요. 천사가 등장하는데 그 천사가 요한이 해야 될 일을 1장 17절에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있는데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말라기에 4장에 나오는 말라기 선지자가 구약 마지막에 예언을 했어요. 자기가 마지막 선지자지만 이 마지막 선지자에서 나오는 그 선지자.


그게 누구인지 모르고 말라기는 누구인지 모르고 다만 해야 될 일만 나오는데 그게 말라기 4장 5절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크고 두려운 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 4장 1장에 보면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는 거에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나님은 파괴의 하나님. 창조는 파괴 없이는 창조가 안 된다. 파괴의 하나님이에요. 파괴 없이는 창조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 세계는 뭡니까? 그냥 그대로 밀어붙이려고 하는 거에요. 파괴를 무서워해요. 죽음을 무서워해요. 멸망은 이건 일이 잘못됐기 때문에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필수 절차인데 그걸 모르고 “안돼요 안돼요”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파괴될 이유를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제가 뭐라고 썼어요? 인간 세계 파괴될 이유를 교만이죠. 교만이 파멸의 이유니까요. 패망의 선봉이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려고 하는 거에요. 겸손의 극치가 인간 내부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모르는 채 나오기 때문에 새로운 낯선 침투에서 보면 이게 뭐가 되느냐? 겸손의 극치가 뭐가 돼요? 교만이라니까요. ‘교만’. 교만이 돼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청춘남녀가 교제를 하다가 맨날 음식은 떡볶이 사주고 떡볶이 얻어먹고 이런 식으로 하다가 어느 날 진짜 결혼할 때 되가지고 남자가 자기 정체를 밝힙니다. “자기야 내가 실은 재벌이거든” 이게 무슨 뜻이에요? “그동안 가난한척 했어. 미안해.” 여러분 이게 교만이에요? 겸손이에요?


그러면 여자가 화내면서 “너 날 시험한 거야?” “미안해. 하도 요새 괜찮은 여자가 없어가지고. 좀 시험했어. 사실은 내가 재벌이거든” 사실은 내가 재벌이라는 말은 주의해서 들으면 내가 사기꾼이거든 그렇게 트릭을 쓸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이게 은혜로운 말인지.


우리 성도가 세상 사람들과 사귈 때 이런 말을 해야 되거든요. 남편이 복음을 알고 여자가 복음을 모를 때 남편이 진지하게 어느날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보 당신한테 그동안 말을 안 한 비밀이 있어.” 여자가 “뭐야?! 이거 뭐야? 안 그래도 요새 수상하다 싶더라. 뭔데?!” “사실은 내가 천국 백성이야. 그동안 숨겨서 미안해.”


이게 겸손이에요. 어울리지 않음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 물론 이걸 그냥 써먹으면 미친놈 되겠지만. 그게 얼마나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자유합니까. 세례 요한의 이러한 등장,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어려운 데 해보겠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선지자를 투입했지요. 겹치는 부분 투입하지요.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고 누구한테 어울린다? 하늘나라에 어울리는 사람을 보내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역할을 맡지요. 천사가 무슨 역할을 하느냐 하면은 말라기 4장에 예언된 대로 그대로 세례 요한을 보내서 자식의 마음을 아비가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일을 개시하는 거에요. 인간 쪽에서 못하니까.


왜? 인간 체계 자체가 교만하니까. 교만의 결과는 뭡니까? 패망이거든요. 멸망이에요. 파괴되야 돼요. 인간은 자기 것이 파괴된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습니다. 살 이유도 없고 살 희망 자체가 날라가 버리니까 이걸 극구 반대하겠지요. 아까 봤지요. 아이가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다.


애곡하는 이유를 모르고 피리 불 타이밍이 아닌데 그들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거에요. 너무나 이질적인 세계에서 왔기 때문에. 그게 납득이 안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인간 세계는 스스로 갇혀가지고 바깥에 하늘나라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전혀 안다? 모른다?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나름대로의 선과 악을 조장하는 거에요.


아마 겸손은 선이고 성경에 보니까 겸손하라고 하니까 겸손은 선일 것이고 교만은 악일 것이다. 자기들이 스스로 결정한 거에요.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성경 열심히 지켜서 구원 받겠다 하는 자체가 이게 교만이라고요. 이게. 자기 성경 열심히 지켜버리면 관심사가 누구한테 집중돼요? 본인한테 집중돼요.


본인한테 집중되어 버리면 본인은 폐쇄적 자아관이에요. 갇혀버려요. 스스로. 여기 잘 안 쓰는 소거란 말 했잖아요. 성경은 뭘 소거한다? 없애버린다? 나를 생각나지 않게 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어느 정도까지 훌륭하냐라는 자체를 생각 못하게 만들어요. 성경이 그래야 돼요. 내 쪽에서 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안 받기 때문에 선지자가 왔기 때문에.


자, 그러면 그 다음에 중요한 질문입니다. 중간에 끼어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인간 사이에 끼어있는 것이 세례 요한인데 세례 요한이 보통 인간과 차이점이 뭐냐? 차이점 뭐냐? 코가 두 개고 아이큐가 높고 이런 겁니까? 차이점이 뭘까? 없지요. 편식한다든지 그런 게 있습니까? 피가 다른 사람은 붉은 피인데 하얀 피 나오고 그런거? 우유가 막 튀어나오고 그런 거 있습니까? 없지요? 없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없다는 게 차이점이에요. 없다는 게.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셜록 홈즈 탐정이 조수보고 가보라고 하니까 무슨 일 있나? 아무 일 없어요. 개가 안 짖어요. 개가 안 짖는 게 이상하다. 개가 안 짖는 게. 그럼 분명히 범인은 뭐냐? 내부인이지요. 같은 아는 사람이 침투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죽었으면 살인자가 내부에요. 왜? 개가 방비를 안했으니까. 아는 사람이니까.


뭐 반가워요 보고 싶어요 문자보낼 때는 이거는 별로 문제없어요. 문제 보내다가 어느 날부터 보고 싶다 자기야 하는 문자가 없어요.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문자한 게 문제가 아니고 없는 게 문제가 되죠. 왜? 같이 동거생활하기 때문에. 동거생활하니까 할 필요가 없잖아요.


이런 게 우리가 따라잡을 수 있으면 따라하겠는데. 세례 요한이 훌륭하다 하면 따라잡겠는데 그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인간이 따라할 수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인간들은 말씀을 지킬려고 하는 거에요. 지킬려고 하는데 세례 요한한테는 말씀을 지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지킬 필요도 없어 너희는 이미 깨졌어 너는 이미 파멸의 대상이야. 이게 특이한 거에요. 이게. 이게 특이한 거에요.


더 알기 쉽게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한테 말씀 지켰다고 숙제 내밀까요? 아니면 세례 요한이 빠지라고 하는데 빠질까요? 어느 쪽이 세례 요한이 원했던 겁니까? 여기 29절에 “모든 백성과 세리들이” 성경에서 모두라고 하는 것은 다수에요.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세례를 받지요?!


세례가 중요한 것은 소급, 나 자신을 말소하고 말살하고 없애는데 제거하는데 세례 주는 자가 핵심이 되어버리는 거에요. 세례 받는 자가 의미가 없고 세례 주는 자만 있으면 되고 거기에 합류하는 식이에요. 세례라는 게. 성령의 세례가 뭡니까? 육으로 살던 인간이 육에 대해서 미련 뚝 끊고 이제부터 성령의 지시를 따르는 게 성령 세례거든요.


성령이 갖고 있던 그 혜택 있잖아요. 그 성과에 내 성과를 포기하는 겁니다. 내가 열심히 했던 모든 성과를 성령이 했던 성과에 섞이지 않고 갖다버리는 거에요. 세례는 뭐냐 하면은 버리는 거에요. 그래서 로마서 6장에 세례 이야기할 때 뭐라고 합니까? 나를 죽이는 게 세례라고 합니다. 나를 죽이는 것.


받아주는 쪽이 모든 것을 갖추었기 때문에 네 보따리 싸고 캐리어 끌고 오지 말아라 이 말입니다. 여기 다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요. 뭐 속옷 3개하고 양말 다 버리고 와. 양말이고 뭐고. 머리 빠졌다고 가발도 써. 아! 가발도 쓰지 마. 다 빼고 와. 그냥 와. 그냥 와. 하나님 것 더하기 내 것 더하기가 아니라 하나님 것 1이잖아요. 그러면 내 것은 1 앞에 못 더하고 버리라고 하는데 물속에 버리라고 하는 것이 물세례고 불속에 버리는 게 불세례고 십자가 앞에 버리는 것이 이게 성령 세례가 되는 거에요.


그걸 가지고 다른 말로 뭐냐 하면은 세례를 심판이라고 하는데 심판. 세례는 뭐다? 심판이다. 이걸 세례 요한은 타작마당이다. ‘타작마당’. 한바탕 놀이마당 아닙니다. 타작마당이에요. 내가 나를 버리면 이걸 아까 뭐라고 했어요? 훨훨훨 사랑도 부질없어. 미움도 부질없어. 내가 나를 버리면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교만이에요. 아이고 헛된 것, 못 살면 자살하면 되지. 그게 바로 교만이라고요. ‘교만’.


자기 죄에 대해서 속죄한다고 목숨 바치는 것. 그거 누가 시킨 짓이라고 했던가요? 가룟 유다한테 시킨 악마, 악마 짓이에요. 악마 짓. 편지 하나 써가지고 자식들아 미안하다. 못난 남편 해서 내가 퇴직하면서 50억 밖에 안 벌었는데 사람들이 뭐라고 해가지고 내가 장렬하게 죽는다. 실제로 그런 일은 아니고요. 퇴직금 50억 밖에 안 받았다. 50억 받았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 내가 자존심 상해서 죽을께 해서 죽었다면 사탄의 짓이죠.


뭐 회사 이름도 어려워. 대표직 사직하라. 사직하면? 그게 겸손이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 일절 하나님께서 안 받습니다. 그게 겸손이 됐든 순교가 됐든 헌금이 됐든 예배가 됐든 안 받습니다. 찬양이 됐든 안 받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할 때가 되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세례 요한이 인간하고 전혀 다른 부분이 없어요. 그런데 뭐가 다르냐 하면은 세례 요한의 좌표계가 달라요. ‘좌표계’. 환경이 달라요. 환경이. 같은 인간인데 환경이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덮쳐진 환경입니다. 좌표계 어려운 말 나왔는데. 또 환경이라는 말도 어렵고요. 한번 들어보세요.


아킬레스란 고대 마라톤 선수가 있어요. 마라톤 선수. 인간 중에 제일 잘 뛰어요. 그런데 거북이가 있어요. 거북이. 아킬레스가 거북이 하고 달리기를 하는 겁니다. 제논이라는 철학자가 내놓은 모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북이하고 하는데 아킬레스는 어떤 경우라도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 이유가 뭐냐? 거북이가 아킬레스보다 앞서서 달리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듣는 사람은 이게 무슨 소리냐? 한번 붙어봐. 거북이보다 빠르지. 아니야. 절대로 못 이겨 해놓고 아킬레스 뒤쪽에 출발하잖아요. 뒤쪽에. 그럼 거북이를 앞에 둔다고요. 거북이를. 거북이가 앞에 가게 되면 아킬레스 마라톤 선수가 거북이 처음에 지점까지 오게 되면 거북이는 이만큼 갔겠지요. 이만큼 더 갔겠지요? 요만큼 갔겠지요.


그러면 앞서지를 못 하는거에요. 그러나 아킬레스가 이만큼 오게 되면 거북이는 이만큼 갔겠지요. 그런데 앞서지를 못하는 거에요. 아무리 따라가도 못 따라가는 거에요. 이게 제논의 모순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담긴 철학적 의미를 모르고 오늘날 과학은 앞선다고 되어 있어요. 아킬레스가 거북이보다 10배나 빠르다고 한다면 거북이는 10분의 1. 아킬레스가 1이 된다면 거북이의 속도는 10분의 1밖에 안 될 거에요.


아킬레스가 이 지점에 오게 되면 여기 또 100분의 1 더 가겠지요. 아킬레스가 이 지점 오면 1000분의 1 가겠지요. 그래서 10분의 1은 0.1. 100분의 1은 0.01. 1000분의 1은 0.001.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은 1.1111.. 중학교 때 나오는 순환소수. 1.1에다가 점 찍은 거에요. 이걸 분수로 하면 9분의 10. 그래서 9분의 10 자리에 오게 되면 그 때부터는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있다. 이거 증명했다는 거에요. 이 증명 틀렸습니다. 잘못된 거에요.


제논이 무슨 뜻에서 이렇게 하는 것인지 그 당시 철학에서는 심오한 의미가 있지만 이게 하나님의 말씀에도 절대로 이게 빠른 아킬레스가 느림보 거북이를 못 따라가는 이유가 우리 인생관에 나옵니다. 인생에 아무리 젊은 사람이 늙은 사람보고 돈도 더 벌 수 있고 출세도 더 할 수 있는데 늙은 사람의 경험, 인생 경험을 젊은 사람이 못 따라옵니다. 왜? 시간이 개입. 제논이 하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시간이 개입해버리면 시간계는요 인간이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젊은 사람이 예를 들어서 젊은 사람이 바둑이 9단이다. 늙은 사람도 바둑이 9단이다. 늙은 사람 중에 바둑 잘 두는 사람 서봉수 9단, 이쪽은 신진서, 현재 세계 1등 신진서 있다. 바둑하면 누가 이깁니까? 젊은 사람이 낫지요. 기억력 좋고 낫지요. 인공지능한테도 이기는데. 보통 실력이 아니잖아요. 낫지요.


하지만 서봉수 9단의 나이가 얼마냐 하면은 나이가 70이에요. 신진서는 21살인가 그래요. 그 세월 다 들어있어요. 그 세월 언제 따라잡을 건데? 못 따라 잡아요. 이걸 여기에다가 적용시켜 봅시다. 세례 요한과 인간과 경쟁이 안 되는 이유는 인간을 둘러싼 그 시간계가 세례 요한이 둘러싼 시간계하고 이게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세례 요한의 시간계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은 예수님으로부터 온 거에요. 예수님 말씀으로부터 온 거에요. 그러면 세례 요한은 말씀을 지키는 겁니까? 아니면 말씀이 지켜 이미 완성 되었다를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완성 되었다를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데 한번 봅시다.


요한복음 1장 15절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보세요 시합하잖아요. 내 뒤에 오시는 분. 6개월보다 늦게 오시는 분. 늦게 출생한 분이 예수님이죠. 인간의 시간상은 누가 앞섭니까? 누가 시간계가 앞서고 인생 경험이 많습니까? 세례 요한이 6개월 앞서잖아요.


그런데 그 경험이 세례 요한은 그 경험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은 나보다 앞선 분의 경험일 뿐이라는 거에요. 자기 앞선 분이 누굽니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죠. 예수님이 자기를 보냈다는 자체가 예수님 일이 하늘나라에서는 이루어질 것이다가 아닙니다. 다 이루어진 거에요. 이루어진 것. 믿거나 말거나 모르겠어요. 내 소관 아니니까.


로마서 8장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걸 다시하게 되면 “이미 정했고 이미 정해진 그들을 정하시고 이미 불러낸 그들을 부르시고 이미 의롭다 하게 하신 사람을 의롭다고 확인시키시고 이미 영화롭게 된 사람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만 나오는 게 아니라 에베소서 2장 5절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살려줄게 강림할 때 살려줄게 재림할 때 그 때 해줄게 가 아니라 “이미 살리셨고” 6절에 또 함께 일으키사 하늘나라 앉혀줄게 가 아니라 “이미 앉히셨고” 성도는 앞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 이미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에요. 중첩된 거에요. 세례 요한처럼.


인간의 시간과 주님이 주시는 성령 안의 시간이 중첩된 자가 성도에요. 성도. 성도 안에는 인간이 해볼까? 구원받아볼까도 있고 뭡니까? 이미 구원되었음도 구원도 함께 들어있는 거에요. 실제 상황이 이러니 뭐 사람 꼬실려고 복 받을 겁니다 잘 될 겁니다 이렇게 구라 떨면 안돼요. 교회가 사람 끌어모으는 데가 아니고 이미 구원받기로 작정된 숫자는 이미 정해져버렸어요.


구원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만약에 구원받고자 한다면 이것은 교만입니다. 패망의 선봉이에요. 구원받고자 한다면 집중도가 모든 관심사가 누구한테 쏠립니까? 나한테 쏠리지요. 왜? 이 따위 모습이 무슨 구원이에요. 지옥이지. 지옥이죠. 그런데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은 주께서 보내심을 받고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 꼬라지가 이미 완성된 꼬라지에요. 그 꼬라지가.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자기한테 집중합니까? 안 합니까? 할 필요가 없지요. 주께서 시키는 대로 살면 되니까요. 우리가 미리 주의 일을 예측하고 추측해서 감사할 준비를 하면 안돼요. 하나님, 저한테 이런 일 있으면 제가 꼭 감사할게요. 꼭 이 기도 응답해주면 진짜 내가 감사 안하고 내빼면 나는 개라고 해도 할 말 없습니다. 정말 꼭 감사할게요. 감사하는 것 미리 정해버리면 그거는 교만입니다. 우리 성도가 할 것은 이미 주어진 그 자체가 내가 예상 못한 감사거린 줄 받아들여야 돼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 모든 일에 감사하는 거에요. 내가 관찰하고 추측하는 것을 빗나가게 하십니다. 어긋나게 하시는 방법이에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그 앞에 있는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가 몸이 움직이는 게 아니고 제논은 거기까지 몰랐지요. 몸이 움직이는 게 아니고 시간계가 움직이는 거에요. 앞선 시간계를 뒤에 시간계가 못 따라잡으니까 이게 따라잡을 수가 없는 거에요.


거북이가 이렇게 가고 있는데 총알같이 아킬레스가 따라 왔잖아요. 따라 왔지만 거북이가 경험한 시간계하고 따라와도 이건 별개에요. ‘별개’. 오늘 제목을 별개라고 하고 싶어요. 별개. 별개라는 말은 우리 뜻 따로 별개로 주께서 일을 해버려요. 그래야 우리 한계가 드러날 게 아닙니까? 평생 우리 한계가 드러나줘야 돼요. 한계가.


구원은 주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야 깨닫게 되거든요. 뭐 세상 다 부질없는 거 이거는 교만입니다. 겸손은 뭐냐 하면은 내가 이미 주의 일에 한 일로서 참여됐다는 사실을 보는 거에요. 너는 누구를 증거하는 것이지, 내 인생 아무것도 아니고 세상을 초탈한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은 교만이에요. 그거는.


십일조해도 구원받고 안 해도 구원받고 하면 뭐하겠노. 교회 가도 안 가도 구원받는데 유투브보면 되겠네. 지금 유투브보고 십일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여전히 관심사가 자기가 소거가 안돼요. 소거, 음소거. 너는 별개야 너는. 별개 너한테 왜 관심을 둬? 관심 둘 필요가 없는데. 악마는 자꾸 우리 자신에게 관심 두게 만들어요.


가룟 유다도 자살하라고 부추기고. 스승을 팔아먹다니. 그래도 네가 인간이야? 양심이 있다면. 죽어 인간아. 죽으면 네가 양심 있다는 소리를 남들이 할 거야. 이게 바로 악마가 인간에게 그런 교만을 준거에요. 스스로 자기 죄책 안고 자살하라는 교만을 준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점을 도대체 세례 요한을 어디서 왔는지를 이 점을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있어요. ‘소실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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