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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8 10:22:33 조회 : 128         
안양20211014A슥9장8절(대재난을 앞두고)-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119.207.152.148)
안양20211014A슥9장8절(대재난을 앞두고)-이 근호 목사

오늘은 스가랴9장하겠습니다. 이웃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그 이웃나라를 언급하면서도 8절에 보면, 이웃나라, 이웃나라 계속 거론하시면서 8절에서는 바로 내 집에 대해서 하나님의 내 집에 대해서는 특별 관리에 나서는 겁니다. 하나님의 특별 관리는 하나님의 구원이라 할 수 있는데, 구원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심판, 심판, 심판, 계속해서 심판, 또 심판, 심판, 심판 끝에서 나타나는 거예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심판은 됐~고 나는 그저 바로 갈래.” 이런 구원은 없습니다. 심판을 경유해줘야 돼요. 경유하고, 이 심판 받는 게 이방나라거든요. 이방나라가 심판받는 이유에 대해서 필히 아셔야 돼요. 이방나라가 심판받는 그 이유에 대해서 몰라버리면 구원이라는 것도 그냥 모른다, 라고 하는 말이 맞아요. 그냥 알지 못하는 겁니다. 이방나라가 심판 받는 이유는 뭐가 있기 때문에, 이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목적이 있어요. 자기 목표가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전부 다 무엇을 못 벗어나느냐 하면 자기 목적성에서 못 벗어난 채 행동하고 말하고 의식하고 그런 겁니다. 자기 목적이 있고, 자기 목표가 있어요. 목적과 목표가 언어상 개념이 좀 달라요. 목표라 하는 것은 골, “아~ 골인이에요.” 할 때, 골 있잖아요. 골. 목표. 이 목적이라 하는 것은 그 쪽을 향하는 지향적인 것. 의도하는 걸 목적인데, 뭐 그렇게 같이 나눌 필요 없이 그냥 같이 하면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목적에 착 달라붙어 삽니다. 이 말은 자기 목적, 자기 희망, 희망 있는 곳에 내가 있어요. 그래서 희망이 상실되면 내가 없는 거예요. 내가 없던지 자살하던지 해야 돼요. 내가 없던지 자살해야 돼요. 그렇게 해야 돼요. 그러면 이 목적과 희망이라는 것은 목표는 어디서 제공받는가, 이 이방나라 자체가 이게 어디에 둘러쳐 있느냐 하면 자연세계에 둘러쳐있습니다. 인간이 이리 있으면 자연세계를 360도 슬라운딩 이렇게 죽 둘러보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잖아요. 눈에 보이는 것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고 같은 인간들끼리 있다 말이죠. 인간들끼리. 여기서 인간은 여기서 뭘 찾느냐 하면 자기의 이상향을 찾아내요. 내가 찾고자 하는 나의 이상형. 인간은 자기가 이리 있잖아요. 자기가 있지요. 그러면 항상 무슨 칸을 비워놓느냐 하면, 나는 저렇게 되고 싶고 하는 요 칸을 항상 비워놔요. 비워놓고 7살 때, 8살 때, 9살 때, 10살 때 되면 요 빈칸에 수시로 여기에 들락 달락 새로운 이상형 자아상으로 계속해서 교체가 되면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평생을.

나이 80먹은 사람들을 젊은 사람들이 보면, ‘나이 80이나 먹었기 때문에 이젠 인생 다 정리하고 아무 희망 없이 그냥 뒷방 어른으로 그냥 살 거야.’ 라고 생각하는데 천만에 말씀입니다. 이 80넘어도 이순제가 드라마에 나오고 80넘고 연기하고 양복입고 나오면 “그래, 80도 내 인생은 저래야 돼!”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살 이유가 생겨버린 거예요. 나이 90돼도 마찬가지에요. “그래, 내 나이 이리되어도 늦지 않았어. 나도 전국노래자랑 사회 볼 수 있어. 송해 다음에 내가 사회 볼 거야.” 이런 거. 사람은 계속 이 자리를 비워놔요. 이 자리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 자기를 둘러싼 자연세계 속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딱 편집해 가지고 이 자리에다가 항상 꽉꽉 채워 넣는 겁니다. 왜, 희망이 있어야 살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희망이 있어야.

그래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인간은 자기의 희망과 목적은 지금 이야기한 이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세상에서 왔거든요. 세상에서 온 거예요. 요한일서2장에 나오는 것은 세상에서 온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기로 작심한 거예요. 어쨌든 간에 사람은 하나님이 좋아하든 말든 그건 관계없고 내가 세상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각종 좋은 그 목적과 희망에 짝! 달라붙어 있어요. 나라는 게. 붙어가지고 사람들이 내 얘기한다는 게 내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짝 달라붙은 나의 이상형, 나는 이런 것을 꿈꾸고 있어. 라는 그 이야기를 가정주부 같으면 전화기 붙들고 2시간동안 이야기하는 거예요. 낮에. 계속 자기 이야기는 아니고, 내가 되고 싶은 이야기를 짝 달라붙어서 계속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듣는 쪽은 그걸 참조하지요. 나도 저렇게 사회 패턴을 바꿔 봐. 괜찮지. 괜찮지. 괜찮지. 이리 하거든요. 이리 살면 괜찮지. 커피 이리 먹으니까 멋있다. 너도 그 커피 바꿔 봐. 괜찮지. 괜찮지. 어? 괜찮네. 그 이야기로 벌써 전화 2시간 반 지났어요. 그 이야기하는데. 핵심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 이야기한다고 온 자식이야기 다하다가 2시간 반 다 지나간 거예요. 아파트 인테리어 어떻게 한다고 그 이야기하다 다 보낸 거예요. 자기 목적성입니다.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이게. 이방나라에게 심판이 주어졌다고 했을 때에 그 심판의 이유를 모르게 되게 되면 우리가 말하는 이 구원이라는 것도 모르게 돼요. 왜냐하면 이방나라 심판을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남의 이야기 들을 거 없어. 나만 구원 받으면 되잖아.” 라고 심판이 가버리면 이 구원받는다는 이 모습이 평소에 내가 잘되기 위한 나의 이상향 중에 하나의 요소가 되어버려요. 나의 목표가 되고 나의 목적이 된다고요.

그래서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나 교회에서 항상 교인들 만나게 되면 “목사님, 저 어떻게 구원 받아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개인구원이거든요. 교회에서는 얼씨구나 해서 잘 걸렸다 해가지고 개인구원 방법이야기해가지고 낚아채고. “어떻게 나는 구원받습니까? 어떻게 나는 천국 갑니까? 영생 얻습니까?” 그 질문은 이미 이방민족이 했던 질문이에요. 이방민족이. 방법을 알려달라는 거예요. 방법을.

내 간절한 소망은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그것인데 방법을 몰라서 내가 안타가운데 그 방법을 알려주신다면 다이아몬드라도 빼어드리겠습니다. 하는 그런 식으로 그리 나오는 거예요. 자기 목적과 자기 희망을 갖고 있는 짝 달라붙어있는 내가 이제는 세상 것뿐만 아니고 세상 것 위에 있다는 하늘나라까지 탐을 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마귀가 아담보고 선악과 따먹어! 따먹어! 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런데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냐 하면, “하늘나라는 오면 죽인다.” 하는 나라에요. 창세기3장에.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뭐한다? 죽으리라 했잖아요. 생명나무가 인간하고 격리가 되고 말았어요. 쫓아냈다 말이죠. 쫓아내고 못 오도록 파수꾼을 불검 가진 천사로 가로막았다는 말은 “니 하늘나라 탐내면 내가 죽여 버린다.” 이거예요. 기존교회에서는 죽여 버린다는 이야기는 빼지요. 그걸 상품화시켰어요. 상품화.

선지자는 말합니다. 이방나라부터 차근차근하게 다 심판하고 조지고 다 저주하는데 이게 바로 9장1절에서 7절까지 그 이야기입니다. 아까 얼른 읽어보셨지요. 그렇게 하나, 하나씩 다 심판함으로 말미암아 그 심판하는 이유에 대해서 제가 방금 알려드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 거기에 탐을 냄으로서 인간은 인간 속에 있는 욕망은 자체적으로 한계가 형성되어버렸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 중에 하나, 또는 여럿이라고 굳히고 들어가는 겁니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에 자발적으로 농락당한 대상이 되어버렸어요. 눈에 보이는 것.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 가지면 나는 만족해 라는 게 안돼요. 내가 전에 몰랐던 새로운 신상, 신상은 신제품을 신상이라고 해요. 신상이 나왔을 때 새로운 욕망은 자극받습니다. 전에는 교회 나올 때, “천부여, 손들고 나옵니다. 천국만 보내주신다면 내가 이 교회에서 허드렛일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했다가 좀 한 6개월 갈 것도 없어요. 1개월 2개월 다녀보게 되면, ‘저 사람들은 나보다 앞서온 집사님인데 천국도 건지고 명품 샤넬도 건지고 이게 다 되네. 아~ 이게 다 되는구나!’ 연예인들이 지옥 생활하다가 하나님의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알고 은혜를 받아가지고 이제는 주를 위해서 오직 찬송가만 부르겠습니다, 하다가 한 6개월 보니까 예수 믿는 천국 가는 형제도 찬송가만 부르겠습니다가 아니라, ‘야~~ 이건 트로트도 되네.’ 가수하다가 목사님 돼도 방송에 나가 트로트 부르네. 이리 되거든요. ‘야, 이거 구애받을 필요 없구나!’ 새로운 목표가 또 생겨버리는 거예요. 목표가.

천당 가는 걸로 이걸로서 족합니다. 더는 내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노래에 나오잖아요. 내 일은 나는 몰라요. 이렇게 하면서 그렇게 은혜를 받다가 나중에는 내 일을 알아야 되겠어. 왜냐하면 우리교회 장로님이 소개해가지고 좋은 땅 나왔다 해가지고 평신도보고 한 이천만 보태라 하면 이자 5%준다 해놨기 때문에 이건 오늘저녁에 재림하시면 안돼요. 왜냐 하면 지금 땅값이 올라야 하거든. 그래서 내일 일을 알아야 되겠어. 내일 일을. 내일 일은 몰라요. 아니라 내일 일은 알아야 되겠어. 이제는.

그런데 그 장로가 사기꾼이라서 지 뿐만 아니고 교인들 스물댓명 믿게 해놓고는 몇 억 해먹고 도망갔다. 도망가가지고 그 장로 다른 교회 등록해가지고 또 사기쳐먹는다 할 때, 아이고! 아니고! 또 이러고 있다 말이죠. “주여, 어찌 저에게 이런 환란을 주십니까?” 주님께서 “니 자체가 환란이다.”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을 끌어당겼잖아요. 주님은 주님이 계신 곳에 우리는 갈 수가 없어요. 죽여 버려요.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고 성경을 백독을 봤다하는데 무슨 어떤 입장에서 성경을 봤는지 나라는 인간은 멀쩡하게 있고, 거기다가 밥 하나 추가요! 하는 것처럼 예수님 하나 추가할 수 있다는 그 발상 도대체 누구한테 어디서 보이스피싱을 당했는지. 이건 말도 아니거든요.

이방인의 심판을 경유하지 않고 이렇게 구원을 탐내버리면 이것 노리는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순도 99.999%입니다. 전부다 이거 노리고 목회하는 거예요. 천당 가는 비결 4가지. 성령 받는 비결 이런 거.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비결. 비법. 우리교회에만 있습니다. 이런 거.

우리교회 오면 여러분들은 진리를 알아서 여러분들이 당신보다 먼저가신 여러분의 어머니 권사님 가신 나라에 여러분들이 합류할 수 있습니다. 먼저 5년 전에 죽었던 남편이 천당 가있는데, 천당에 같이 당신도 같이 천국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이리 한다고요. 그렇게 남편을 사랑하는데 천국 가서 애기아빠 만나야지요. 듣고 있는 아내가 “또 그 남자인가, 아우~ 지겹다. 이건 천국이 아니고 지옥인데. 이번 한 번 갈아봐야지. 천국 가서 딴 남자하고 살아야지. 또 그 남자인가.” 이리 되거든요.

천국은 오면 죽습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죽듯이 이미 천국은 가면 저주받게 되어있어요. 못가요. ‘천국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다.’ 내가 살아서 발견하는 게 천국이 아니고 내가 천국을 발견하는 내가 다른 사람으로 주님에 의해서 새로 지음을 받아야 돼요. 그것 때문에 성령이 오신 겁니다. 성령께서 니 내로 새로 시작하자. 니가 이야기하는 거 다 옛사람이다. 니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희망으로 잡고 그게 삶의 보람과 의미로 몰빵했거든요. 애를 낳으면 애에다가 몰빵하고 사업하면 사업에 몰빵하고 결국에는 남편 죽고 떠나고 난 뒤에는 자기가 자기한테 몰빵해요. 인간은.

희망 없이는 못 사니까. 내가 나의 희망이에요. 인간은 두 개거든요. 이걸 어려운 말로 하면 안 되는데. 규정하는 나와 규정받는 나라고 그렇게 어려운 말을 해요. 여러분은 여러분만 알고 계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돼요. 카메라 보고 이야기하는데. 규정하는 나와, 규정받는 나. 나는 한결같지만 이 규정받는 나는 늘 변화를 추구하는 겁니다.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는 뜻이에요. 쉽게 말해서 정신병자라는 말이죠.

그래서 불안정하기 때문에 모든 최후를 모르기 때문에 불안정하기 때문에 뭘 하느냐 하면 이것, 저것해요. 자꾸 이것, 저것해요. 남편이 퇴직하고 난 뒤에 아내한테 자꾸 설계도를 갖다 들이 대는 것은 지금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뜻이에요. 나 안 놀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조금 기다려주면 내가 ‘아이구, 옛날보다 더 낫네. 당신 이런 능력 있었어?’ 그러한 진짜 남편다운 남편으로 내가 턱하니 다시 거듭난 것 까지는 아니지만 다시 멀쩡하게 내가 해가지고 남편 책임 다 할 테니까 그 정도 양심은 내가 갖고 있으니까 실망스러운 남편 되지 않기 위해서 할게.

그 때 현명하고 똑똑한 아내는 이런 이야기하지요. 나한테 말하지 말고 실적을 보여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실력은 말이 아니고 딱 손에 돈 들고 와야 돼요. 이게 자본주의 사회에요. 눈에 딱 보여야 된다고요. 통장이라든지 뭐든지. 이게 되어야지 이게 안 되니까 말로 대충 때우는 거예요. 말로. 비겁한 사람.

그러니까 당신이 안정되어있으면 굳이 나한테 이야기할 필요 없는 거예요. 이야기한다는 것은 조금만 기다려 봐! 내가 아는 친구가 있는데 옛날부터 하자고 하는데 지금 재고 있다. 자꾸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서 이것, 저것 하는 거예요. “니는 그걸 왜 말을 하느냐?” “니가 나한테 위로라도 팍팍 밀어줘야 내가 박카스 먹은 것처럼 힘나가지고 힘을 내서 밖에 나가서 얼마나 일을 하잖아.” 아내가 말합니다. “내가 니 엄만가”

규정받는 나, 이 세상은 아무리 괜찮은 것을 내 것을 집어넣어서 이상형을 집어넣어서 나 이걸로서 이제는 확립했다. 나는 나답게 정립했다고 아무리 우겨도 새로운 유혹의 요소가 와버리면 또 변해요. 정신병 안 될 수가 없어요. 이거는. 그래서 이것, 저것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그래서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주에 뜻이 뭡니까? 주의 뜻을 알아서 제가 맞춰드릴 테니까 제가 무엇을 해야 됩니까? 이렇게 또 간절히 새벽기도 안 나갔다가 가가지고 하는데, 주에 뜻 알려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대재난을 앞둔 자의 사명감’ 이거에요. 재난은 나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자기 일을 위한 목표와 목적, 자기의 이상형 그게 아무리 거창하든 소박하든 관계없어요.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규정한 나의 일이에요. 나의 일이라고요.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좀 괜찮다 싶으면 딴 것으로 바꾸거든요.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이걸 바꿔 나가는 거예요. 공부는 하기 싫지, 중학교, 고등학교 6년은 보내야 되겠지. 그런 자식들이 계속 엄마, 아빠한테 붙드는 게 뭐냐 하면 이것 배울래 저것 배울래 취미생활 바꿨다가 맨 날 이런 거예요. 그 애 그대로 나가다가는요, 그 애 나이 70가면은 60, 70될 때까지 누구 이항구 죽을 때까지 계속 지 취미생활만 목표로 살아갈 거예요. 계속 바꿀 거예요. 이거 하다가 저거 집적하다가.

절대로 들어주면 안돼요. 휴대폰 바꿔 줘. 10대 되면 자전거 바꿔 줘. 조금 있으면 20대 되면 차 바꿔 줘. 나중에 아파트 바꿔 줘. 그 가운데서 남자는 또 여자를 얼마나 바꿀까요. 직장 다니다가 6개월 만에 때려치우고 야근 시킨다고 때려치워버리고. 또 하다가 월급이 다른 데보다 십만원이 적다고 때려치우고. 이건 뭐 지 취미생활하고 싶어 환장했고. 직장생활은 지 취미생활 못하게 하니까 이건 미치겠고. 그 버릇을 누가 들여놨어요? 부모가 다 허용을 한 거예요. 부모가. 시킨 대로 다 해줬으니까.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착각에 곱하기 착각을 해버린 거예요. 세상을 제곱 착각을.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어디서 이따위 소리는 들어가지고요. 대재난을 앞두고 난 뒤에 나의 취미, 나의 목적, 나의 희망, 이 딴 것은 대재난 속에 하나의 쓰레기 같은 거예요. 다 타버릴 쓰레기 같은 거 밖에 안 되는 거예요. 나의 소박한 나의 이상, 희망. 10년 후에 뭐가 된다? 5년 뒤에 뭐가 될게. 이런 프로젝트 계획 같은 것은 대재난 앞에서 이건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대재난이 뭐냐 하면 이 대재난 다음에 지옥이거든요. 대재난이 뭐냐 하면 모든 걸 무효로 하겠다는 거예요. 모든 걸 무효로 하는 거예요. 무효. 뭘? 눈에 보이는 그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그게 재난이라는 그 한계에 둘러쳐져 있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게 무한이라고 여겼어요. 무한. 끝이 없다고 여겼어요. 끝이 없는 게 아니고 끝이 있었어요. 지옥의 불에 포위된 상태로 마귀가 눈에 보이는 것을 계속해서 제공한 거예요. 한 번 이거 해봐라. 마음에 안 들지. 식상하지. 그럼 딴 거 해봐라. 욕망은 키워놨지. 지금 있는 형편과 처지는 지 마음에 들지 않지.

나는 멋있고 싶은 규정하고 싶은 게 있는데 실제로 멋있게 규정하고 싶은 나는 사람인데, 규정하는 나는 거울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고 방은 단칸방에 있고 세월은 자꾸 늙어가고 있고. 주위에서는 취직 안하느냐고, 시집 안가느냐고 닦달내고 환장하지요. 환장해. 이쯤해서 인생 종칠까. 끊어 버릴까.

이 이방나라를 심판하는 것은 이게 자연심판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방나라를 심판하는 거예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연이지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오는 거.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 되면 뭐 하는 거 있지요? 그거 쓰레기입니다. 자연 세계 자체가 쓰레기에요. 자연 자체가. 여기의 특징은 뭐냐 불안정, 난장판, 넝마들의 집합. 넝마주의. 그걸 쳐다보고 있는 산책자의 시선. 그냥 구경삼아 쳐다보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인간은 세상에 살면서 절대로 누구하고는 헤어져도 본인하고는 헤어지지를 못해요. 자기에서 자기를 아무리 떼어놓고 싶어도 결국은 인간은 자기가 마지막 돌아갈 자리는 자기의 규정하는 나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어떤 노래의 가사를 개사를 해봤어요. 개사. “자기가 떠나갔으나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데 왜 그리 힘들었을까. 이제 나는 알았어. 죽는 날까지 나는 나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은 결코 자기를 떠날 수 없어요. 이런 노래도 있어요. 늦은 밤 쓸쓸히 창가에 앉아 꺼져가는 불빛을 바라보면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취한 눈, 눈 크게 뜨고 바라보면서 반쯤 찬 술잔에 어리는 얼굴. 아~ 마시자. 한 잔의 술. 이게 바로 제가 주목하는 것은 늦은 밤 쓸쓸히 창가에 앉아,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지만 지가 지한테 술을 권하는 거예요. 친구 만나면 술값내기 아까우니까 지가 지 집에서 술 먹는 거예요. 여자는 술 대신 커피 먹겠지만.

늦은 밤 쓸쓸히 창가에 앉아, 꺼져가는 한 밤중에 다 자고 있는데 지는 안자는 거예요. 꺼져가는 불빛을 바라보면서 지는 술하고 친구가 되어가지고 마시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러한 이방 상태를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 메시아주의 라는 것은 언젠가는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다보면 언젠가는 빛 볼 날이 올 것이다.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에요.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기약 없이. 이리 살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뭔가 기다린다는 것. 뭔가 기다렸다는 그 자체로 나는 더는 욕심내지 않겠다. 누굴 기다리는데? 나를 위한, 내가 규정한 평소에 나를 규정했잖아요. 마찬가지로 출발을 나부터 하는 거예요.

나부터 신을 규정해요. 누굴 규정해요. God. 신을 규정해요. 독일어로 하면 고도. 결국 고도를 기다리는 연극 주제곡이에요. 그 유명한 노벨 문학상 받은 사람. 고도, 신을 기다리면서 그러니까 신은 오면 안돼요. 신이 오면 안돼요. 무조건 신은 거기 있어야 돼요. 내가 다가갈 거예요. 교회 다니던지, 십일조 하던지, 봉사하던지, 선교하던지, 신이시여! 오면 안 돼! 내가 다가가야 돼요. 왜? 그래야 그 기간이 내가 멀쩡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내 꿈을 내가 안 놓치고 꿈을 놓치지 않는 한 나는 내가 꿈꾸는 자가 있다는 그 자체로서 나는 그 자체로 나는 온전한 덩어리라고 자기 자신을 보는 겁니다. 온전한 것이라고. 바보에요. 바보.

그런데 성경은 모든 이러한 자연 속에 갇혀있는 인간이 메시아는 메시아인데 성경에서는 인간을 아주 심하게 다룹니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와버렸어요. 이게 사단난 겁니다. 나는 내 맘에 맞는 메시아, 내 맘에 맞는 예수, 내 맘에 맞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진짜 주님이 오셔버렸어요. 오셔버린 거예요. 오시는데 어떻게 오시느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오신 거예요. 심지어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못 알아봤어요. 12제자가.

그 열두 제자부터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메시아 오는 것은 날짜까지 계산하고 언제 올 것이라고 다 구약 성경 품으로 있는 게 아니다. 연구하고 있는 거예요. 연구 왜 하느냐 메시아를 영접하기 위해서 우리는 미리 준비해야 된다. 그런 마음으로 구약성경을 철저하게 연구해 가지고 메시아는 어디서 태어나고 어떻게 되고, 어떻게 되고, 다 안다. 라고 했는데 메시아가 막상 오니까 이건 이구동성으로 메시아 죽이고 죽이는데 찬동했고 제자들은 도망치기 바빴고 난리도 아니지요. 엉망진창 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규정한 내가 메시아 그리고 하나님을 내가 믿기 때문에 그래요. 이 믿음이 문제에요. 내가 믿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갖고 있는 믿음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분을 보내신 거예요. 니 믿음에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니가 믿는 것은 너의 이상향으로서 조작된 조성된 가짜 예수, 가짜 하나님이다. 나 자신의 욕망과 희망을 들어줄 그걸 충족시킬 메시아를 인간은 믿음의 내용으로 자기 자신이 규정을 한 겁니다.

믿음은 내가 믿는 믿음이 아니고 오시는 분이 내 믿음 끄집어내고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를 믿는 믿음으로 이게 밧데리 교체하듯이 바꿔줄 때 그게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인간이 제일 아픈 게 뭐냐 하면 자기의 믿음이 빠져나올 때 성령은 밧데리 빼내려고 하고 우리는 밧데리 기존의 살던 내 방식을 마이 웨이 내 방식을 안 빼앗기려고 할 때 그 때 그게 그렇게 아파요. 왜냐하면 그게 나의 희망이었고 나의 소망이었거든요.

어떻게 내가 나에 대해서 늘 좋게 보고 살아왔는데 잘 될 거야, 내가 나를 격려했잖아요. 내가 나에게 연민을 주었고 내가 나에게 위로를 줬는데 그 내가 나에게서 뽑혀져 나갈 때 얼마나 아프겠어요. 희망이 없고, 희망이 절망이 되고 낙관이 참담함이 될 때 그게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믿음 교체할 때 그렇게 아파요. 이빨도 앞니 빼는 것도 아프지만, 어금니 통째로 빼보세요. 그것도 치과의사가 기술이 없어가지고 마취를 덜해가지고 안 아파야 되는데 그냥 마취 덜 취했는지도 모르고, 했는지도 모르고, 빼버릴 때 혼이 나갑니다. 제가 경험자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주님이 오실 때 뭘 몰랐느냐 하면, 나한테 가장 나를 아프게 한 것이 나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그동안 몰랐어요. 마귀가 자기의 친구인 줄 알았지요. 마귀와 결별해야 될 건데, 내가 마귀하고 결별하기 싫어요. 왜? 날마다 희망을 주니까. 주님께서 이놈의 마귀야 나가라! 하는데 내가 아군과 적군도 분간을 못하게 왜 그 좋은 나를 그냥 가만히 두시지 복이나 주시지 왜 그걸 아픈 이빨 빼듯이 빼십니까? 하고 발악하듯이 달려드는 거예요.

발길질 하니까 아픈 것은 주님이 아파. 주님은 강제로 빼내고 우리는 안 빼앗기려고 주님께 발길질하고. 내가 이런 예수 믿는가 봐라. 그걸 조선말로 겁박. 나 이 교회 안 다닐 거야. 주님을 아예 협박을 해요. 이러려면 하나님과 관계를 끊겠어. 헌금한 거 다 돌려줘! 창조라는 게 그런 거예요.

창조라는 게 안 아프고 창조되는 법이 없습니다. 창조라는 게. 안 아프고 창조라는 게 없습니다. 왜냐, 이미 쓰레기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께서는 자기 백성 찾아올 때는 이 대재난 있잖아요. 이방인들에게 하는 이 대재난을 우리한테 그대로 실습시킵니다. 실습시켜요. 언젠가 그런 예를 들었는데 내과 의사가 수면 내시경도 있지만 그냥 생 속으로 내시경 하는 거 있거든요. 그걸 환자가 마취제 없이 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의과대학에서 실습시키기 위해서 교수가 의과대학에서 학생들한테 생 속으로 내시경을 다 시켜버려요. 이 정도로 아프다는 거.

이방인들이 당하는 그 마지막의 재난, 이방인들은 자꾸 도망치는데 그 재난을 성도에게 생 속으로 그대로 성령께서는 앞뒤 안 가리고 까불지 마! 가만히 있어! 딱 쥐고 그냥 집어넣어버려요. 생 속으로. 평생 동안 일궈왔던 나의 희망과 나의 목적, 목표가 도리어 나로 하여금 넓은 길, 절망의 길, 지옥의 길에 저주의 길로 몰아넣는 괴물이었다는 거예요. 브루트스. 괴물이었다는 것을 그것을 알려주는데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 어금니 뽑아낼 때 우리의 믿음, 소망, 사랑도 다 뽑혀 나옵니다. 쓸데없는 믿음하고 있네.

믿음 뽑아가면요, 우리는 또 이런 식으로 또 공부했다고 반항해요. 로마서에 나오잖아요.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요. 나는 그게 진짜인줄 알고 믿었지요. 그래? 니 믿음이 뽑히는 것이 믿음이야. 니 믿음이 뽑히는 게 믿음이야. 어디서 들은 구석은 있어가지고. 왜 그렇게 어려운 힘든 이것을 성도에게 주느냐, 그게 간격 문제이기 때문에 그래요. 간격. 다른 말로 하면 거리. 공간 문제. 어차피 성도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돼요.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나라에 함께 산다는 뜻이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직사게 고생하신 분이에요. 그 고생한 것을 모르게 되면 예수님께 천국가도 고마워할 근거가 없어져요. 당신은 우리를 위해서 뭘 한 게 있어? 이런 식으로 시큰둥하게 나올 수 있어요. 정말 주님 아니면 안 됐습니다,를 알려면 우리로 하여금 탕자의 경험, 집 나간 경험, 그리고 유명한 거 여러분이 좋아하는 거 있잖아요. 불의한 청지기. 그거 되게 좋아하데요. 불의한 청지기, 그 경험을 하는 거예요. 죄 짓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본능이 뭐냐 하면 살아야 되니까 “하나님, 이 참에 눈 한 번 질끈 감아주세요.” 지 할 거 다 하는 거예요. 그게 불의한 청지기에요. 하나님 잘 믿을 테니까 내가 잘 될 때 헌금 듬뿍 할 테니까 요번 일만 질끈 감아주시면 그 다음부터는 3배 4배 착한 일로 그 악한 일한 거 다 만회해 드리겠습니다. 그 정도 양심은 저한테 있습니다. 이런 거 있잖아요.

주님께서 불의한 청지기 예를 들면서 바로 그 사람이 사실은 모든 천국 백성의 공통점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불의한 청지기. 비겁한 변명과 변명으로 일관하는 그 불의한 청지기. 돈의 유혹에서 못 벗어난, 돈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 이건 여러분이 상상도 못했지요. 적어도 “돈 저리 가! 나는 주님만 섬길 거야.” 이런 사람만 천국 가는 줄 알았지롱. 바로 나는 돈은 모르고 오직 주님만 안다는 그 썩은 어금니를 빼내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나름대로의 자아가 유지되면요, 괜찮은 자아가 유지되면 천국을 자꾸 발견하려해요. 지식으로 신학지식으로 성경지식으로 발견하려해요. 그리고 나한테 손대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하나님한테 잘해드릴테니까 내 몸은 지금껏 내가 알아서 했으니까 손대지 말라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강아지가 집 나가는 게 지 탓입니까? 주인 탓이지요. 그렇지요. 인간은 본인이 강아지인 줄 몰라요. 지는 잔다고 하지만 지는 벌써 집 나가 있어요. 주인이 어떻게 하겠어요? 강제조치 해야 돼요. 이게 마태복음1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니가 백날 까불고 잘한다 못한다 백날 그거 때문에 울고불고 해도 너는 내 강아지야. 강아지라고 제가 순화했지만, 사실은 개라고 되어있지만. 좋게 넘어갑시다. 그냥 주님의 강아지에요.

주님의 강아지는 강아지의 사료부터 해가지고 모든 운명과 팔자는 강아지 본인이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평소 우리의 행동은 뭡니까? 나의 규정은 누가 한다? 내가 하잖아요. 내가. 그러니까 이 썩어빠진 어금니를 주께서 가만 둘리가 없지요. 뽑아내는 거예요. 뽑아낼 때 주어지는 거 아까 잠깐 언급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사명감입니다. 사명감. 무슨 사명감? 지옥이 오고 있다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명감. 그거 하나로 게임오버. 게임 끝났어요.

게임 끝났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이 전에 내가 알던 이 세상에 사람으로서 출세 성공하고 싶은 나로의 입장에서는 “아! 이건 잘됐다. 이건 하나님의 은혜다. 이건 하나님의 감사다.” 백날 하던 백날 무슨 소리해도 주께서는 어어어어. 안 들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어어어 안 들어요. 왜냐하면 그건 자기 존재를 자기가 쥐고 있는 것이지 사명감이 아니거든요.

대재난. 지옥이 있다는 그 엄청난 자연세계 인간들이 보고 있는 한계, 자연세계 그 자체를 불 질러 버리는 그 날이 오는 그 대재앙에 모든 게 일거에 참화되는 그 순간이 올 때에 나라는 존재 자체도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무의미한 거예요. 이 무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존재성은 무게는 영그램이에요. 새털보다 더 가벼워요. 이게 사명감이에요. 내가 살고 싶어 사는 게 아니고 지옥이 있다는 걸 외치기 위해서 지금 우리는 이 시대에 이 공간에 이 시간대에 그냥 하나님께서 계속 사명자로 살려주는 겁니다.

사명자이기 때문에 자기가 해야 될 일은 대재난과 거기서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십자가로 대신 죽으시는 그 이야기. 그 이야기만 새로운 나의 내 자아에 중심이 된 거예요. 그 중심이 내 자아에 박혀있게 된 거예요. 그럼 나머지는 뭐 취직하고 잘 먹고 잘살고 어떻게 하고 애 공부 잘하고 이건 뭐냐 하면 부스러기입니다. 부스러기. 여분의 것, 나머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있는 것은 그런 것들이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것을 주어지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옆에다가 붙여주신 거예요.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런 일이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지옥 불이 들이닥치는 그 사태 앞에서 나의 어떤 고민거리 같은 것은 이건 고민거리조차도 안돼요. 그것 때문에 내 심상이 상한다든지 내가 고민이 된다든지 잠 못 이룬다든지 그런 부질없는 짓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내 일이 아니고 대 재난이 오고 마지막에 심판이 오고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는 엄청난 하나님의 관심사와 비교하면서 이건 그동안 내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비교하면서 큰 것을 큰 것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그냥 같이 부스러기로 붙여놓은 거예요.

식당에서 밥 먹을 때 밥풀이 자기 바지에 묻었다. 식당 주인이 붙인 게 아니고 지가 밥 먹다가 칠칠맞아가지고 나이가 많아가지고 손이 마구 떨려가지고 지 맘대로 안 되니까 떨어진 거예요. 그 하나 떨어진 것 때문에 “나, 밥 안 먹어. 밥 맛 없어. 내가 이 정도로 내가 노망했는줄 몰랐다.” 이러지 마시고 밥만 참 맛있더라. 하면 끝날 문제에요. 툭 던져버리면 되잖아요.

이 지옥에서 면제된 것. 지옥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사명감을 받고 사명 받은 자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거든요. 예수님의 안목이니까. 예수님 안목만 참 맛있더라. 하면 끝날 문제에요. 나머지 문제는 중요하지도 않는 오히려 안 중요하다고 여기기 위해서 갖다 붙여놓은 일이에요. 이 점을 제가 어렵게 하겠습니다.

참, 어려운데요. 면적은 선이 되고 선은 점이 된다. 면적 space. wide space. 넓은 스페이스 우리는 항상 자아를 내가 여기 있고 내가 평생 벌려놓고 모아놓은 이 모든 것들을 면적으로 여기면서 버텨나가는 거예요. 면적으로. 실제로 하나의 개인 평수가 50평, 60평 면적이 있잖아요. 주님께서는 이 면적을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뭐로 바꾸느냐 하면 선으로 바꿔요. 선으로 바꾸면 이건 흔적이고, 자취입니다. 이리 설명하면 잘 안되니까 예를 들겠어요.

볼펜의 잉크의 양은 어떻게 측정하는가, 몇그램 들어왔다. 이렇게 측정할 수 있지만. 회사는 이렇게 합니다. 이거 50m 쓸 수 있습니다. 요거 100m 쓸 수 있습니다. 50m 얼마 안 되는 거 같지요. 볼펜으로 죽 선으로 그어보세요. 50m가도 볼펜 잉크 많이들은 거예요. 100m가면 이건 정말 일제도 그리 안 될 거예요. 면적을 양을 뭐로 표현한다? 선으로 표현해요. 그런데 선은 조사를 해보면 선은 이어진 게 아니고 딱 딱 끊어졌어요. 끊어지니까 한 선, 한 선이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의 하루일과에요. 하루일과. 이게 점이 돼요. 포인트. 점이 돼요.

그럼 이 점은 뭐냐 선은 주님이 나를 이끄시는 흔적이고 자취니까 나의 자취가 아니고 주님이 나를 이끄신 자취. 주님이 나한테 관여했던 흔적으로서의 선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 인생을 자랑질하면 안돼요. 이건 주님의 인생이지 내 인생이 아니에요. 나는 다만 하루, 하루 포인트 점에 불과한데, 이 점들을 모아서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이끄셨다는 것을 선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도의 인생이지요. 성도의 가는 길입니다. 하루, 하루 딱 딱 끊어졌어요.

끊어졌다는 것을 어떻게 자부하느냐, 어떤 설거지를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선으로 생각해가지고 지금 저녁 먹었지. 평소에 패턴대로 설거지하고 그 다음에 다른 일 하면 된다. 라고 했는데 갑자기 정전돼버렸어요. 갑자기 전기가 안 들어와서 설거지를 못하게 됐을 때 나의 목적과 이상은 요거 한 뒤에 저녁 먹고 설거지해서 마무리하고 다니려고 한다. 이게 나의 선이거든요. 이 선을 하나님께서 이걸 끊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느냐 이건 원래 저녁 먹고 설거지하는 것은 이건 내가 원래 하는 거야. 원래 하는 건 없어요. 주께서 허락이 되어야 돼요. 나는 저 계단 10개. 아이구 뭐 저거 올라 가. 아니에요. 나중에 류마티스 관절염에 걸리면 못 올라갑니다. 원래부터 나는 싱싱 날아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다만, 아직까지 관절염 되는 때가 아니 됐음에 잠시 허락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내가 원래 건강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나에 대해서 잘못 해석한 겁니다. 이방인들은 이게 개입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언약의 개입, 하나님의 개입이 없기 때문에 항상 눈에 보이는 것을 집결해가지고 그저 내 나라, 내 조국, 내 국가, 우리끼리, 우리끼리, 맨 날 우리끼리에요.

이제 두 번째 시간에는 그 우리끼리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를 가지고 그것을 작살을 내는지 왜 유대나라는 하나님이 자기 집이라 하시고 보호하시는지 그건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첨부파일 : 안양20211014A슥9장8절(대재난을 앞두고)-이 근호 목사.hwp (38.0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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