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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1 19:50:35 조회 : 87         
강남-누가복음 9장 40절 (영생은 저주다) 220208b-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9장 40절 (영생은 저주다) 220208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아까 두 아들 죽여서 복수를 했던 그 여자 이름이 메데아라고 하는 여자입니다. 신화에 나오는 메데아. 아까 첫째 시간에 상징이라는 말이 상당히 어렵지요. 인간은 상징할 수 없도록 무력하다는 말은 내게 딱 내가 없다는 말이에요. 내게 딱 맞는 나.


인간은 남한테 내세울 때 또는 스스로 생각할 때 이게 나야 라고 하는 딱 맞는 나이고 싶어 하는 이유가 인간은 주체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에 그래요. 주체, 주도적으로 살고 싶어 해요. 그런데 어느 곳에도 내가 나는 주도적인데 남들이 나를 주도적으로 인정을 안 해줘요. 왜냐? 남도 자기 일이 바빠가지고. 자기 자신이 주도적이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은 뭡니까? 전부 다 경쟁적이죠. 경쟁적이니까 주체와 주체가 경쟁 중에서 내 주체가 주체 될려면 저쪽 주체를 이겨야 혼자 있을 때 주체에서 나하고 경쟁해서 나한테 진 사람이 되게 되면 내 주체가 더 확고해지고 더 확실히 증명되는 거에요.


혼자 있을 때 나는 잘났다 이것도 잘난 거 맞지만 나보다 못생긴 사람하고 같이 붙어서 남들이 당신 저 사람보다 잘났네 할 때 갑자기 기쁨이 되는 이유가 내가 평소에 했던 내 주체적 주도적 그 생각이 그게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는 기회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계속해서 또 다른 사람을 또 찾게 돼요.


자, 두 사람은 꺾었는데 세 번째 한번 보자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는 잘났다 나는 훌륭하다 나는 착하다 나는 멋있다 나는 신자 맞다. 계속 주위에서 끌어 모으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걸 끌어 모으는데 아까 그 나한테 자기도 자체적으로 잘났다고 생각했다가 나한테 감히 겁 없이 대들다가 다른 사람이 공개적으로 에이~ 너는 저 사람보다 못났네 하고 우사당하고 간 사람 있지요?? 그렇지요?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은 뭘 느끼느냐 하면은 자기의 무능력을 느끼는 거에요. 무능력. 자기는 잘나고 싶은 사람이고 싶은데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 뒷받침되지 않으니까 그 사람한테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거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걸 이렇게 일반화시키면 이렇게 됩니다. 주체의 끝 지점은 순수한 나를 만난다. 순수한, 순결한. 주체의 끝 지점은 순결한 나를 만나는 거에요. 또 다른 말은 내가 한 모든 행동과 태도와 행위는 순수한 나와 조우하는 것. 나와 만남의 시간을 갖는 거에요.


그러기 위해서 이 주체는 순수한 나를 위해서 여기서 노력을 하게 되고 노력의 의도는 뭐냐 하면은 내 주체의 주체다움을 보장해줄 환경 전환에 몰입하게 되어있어요. 환경 전환. 나 잘났다. 나 잘났다고 떠벌려봐야 사람들이 안 알아주잖아요.


그러면 내가 어느 정도 잘난지를 진짜 잘난 나의 순수함을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100평 이상 대지 2천평 이상의 거대한 집을 지어놓고 거기에 사람들을 초대했을 때 자기는 무슨 사람이 되느냐 하면은 성공한 위대한 개츠비가 되겠지요. 위대한 사람이 되겠지요. 소위 귀족이 된 거에요. 그때 자기가 초정한 사람들은 뭐냐? 들러리죠. 처음부터 내 친구들은 들러리였던 거에요.


왜? 나의 나 됨을 박수 칠 사람들을 은근히 내가 잠복해서 갖고 있었던 거에요. 그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누굴 만났습니까? 예수님만 만났습니까? 또 누굴 만났습니까? 모세와 엘리야 만났지요. 이것은 상상 이상의 순수성을 지니고 있는 거에요. 신자라면 저 정도 돼야 돼. 신자라면. 성도라면 믿음의 사람이라면 저 정도 돼야지.


순수한 자가 되어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저 사람에게 뭘 지어준다고 해요? 내가 초막 셋을 지어준다고 해서 이 모세 엘리야하고 자기하고 이걸 동질화시킨 겁니다. 바로 저거야! 내가 원했던 것 바로 저거야 라고 했는데 주님은 그들을 어디다 내보냈습니까? 산 밑에 내 보내서 개차반 됐지요. 순수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귀신 들린 애도 못 고치면서 그게 순수하냐?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 핑계대고 하나님 핑계대고 백날 해봤자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 말의 그 끝자락은 뭐냐 하면은 역시 나는 이렇게 나는 순결하고 순수하고 위대해. 그걸 본인이 확인하고 싶은 거에요. 그걸 위해서 자기는 평생을 두고 거기 합당한 환경조성에 나선 겁니다. 환경조성. 여러분 학교 다닐 때 환경정리 많이 했지요.


군에 가 본 사람 있습니까? 장로님 군대에 갔다 오셨어요? 군대에 사단장 뜨면 어떻게 됩니까? 사단장 뜨면 제일 먼저 뭐해요? 청소하지요. 청소하는 거에요. 청소. 왜? 사단장 보시기에 이 부대는 정말 착실하게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구나 칭찬을 받는 거에요. 칭찬 받는 거에요. 교회에서도 목사가 교인 떠받드는 이유가 뭡니까? 헌금 많이 하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 순수함에 내가 보태줄게 이런 뜻이거든요. 서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 이 말이죠. 당신 순수한 것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거 내가 도와줄게. 칭찬해줄게. 위로해줄게 그거잖아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런 거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죽어도 천당 갈 겁니다 이런 것. 헛소리. 본인도 헛소리하면서 헛소리인지 뭔지 모르지요.


주님께서는 그 환경 말고 다른 환경으로 돌변시켜버려요. 그럴 때 인간의 주체는 뭐냐? 주체는 환경의 증상입니다. 인간이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은 그만큼 썩었다는 거에요. 이 세상 자체가. 불신자보고 썩었다. 절에 가는 사람보고 당신 지옥 간다 그거는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뜻은 뭐냐? 그 이야기를 예수 안 믿는 저런 사람보고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에요. 너 보고 너 자신 보고 이야기하라는 겁니다.


제자들이 뭐랬는줄 알아요? 저 사람들 우리의 말을 듣지 않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할 때 예수님이 “너나 잘하세요. 너나.”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여기 나와요. 9장에 나옵니다. 9장 54절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할 때 주님께서 누굴 꾸짖었습니까? 제자들을 꾸짖었지요.


왜 제자들이 그런 소리했느냐 하면은 49절 봅시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는데 제자들하고 합세를 안 한 거에요. 본진에 합세를 안 해. 본진에. 복음은 전하는데 십자가 마을에 들어오지를 않아. 우리교회 등록을 안 해.


그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죽여버릴까요?’ 이렇게 나온 거에요. 그때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이 요한이 누구냐 하면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잖아요. 그 변화산을 봤던 사람이잖아요.


그때 산 위에 있었을 때 마치 자기가 모세인 냥 엘리야처럼 지금 한껏 들떴어요. 그걸 들뜬 상태라 해요. 이 반대말이 뭡니까? 바닥 상태. 가라앉힐 줄을 몰라요. 내가 평소에 내 주체로서 이렇게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 따랐으니까 예수님 보시기에 내가 얼마나 순수한 신앙인가 이걸 보장해주고 증명해주는 환경이 필요했는데 마침 주님께서 예상치도 않게 변화산에 올려주니까 붕 떴지. 이것은요.


떴으니까 자기가 본진이에요. 본진. 자기가 본부가 되어 버린 거에요. 그러니까 자기 따르지 않는 사람 죽여버릴까 이렇게 된 거에요. 불로써 태워버릴까 이렇게. 주체는 뭘 유지하는가? 무력함. 주체는 무력함을 유지하는 거에요.


자, 이 무력함은 어디 나오느냐? 누가복음 9장 47절에 나옵니다.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무력함, 무능함. 인간의 무능한 것.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왜 변론합니까? 46절 왜 변론합니까? 우리 중에 누가 크냐? 제가 아까 경쟁한다 했지요. 인간은 눈만 뜨면 경쟁해요. 인간은 눈만 뜨면. 모든 게 경쟁이에요.


쇼트트랙도 경쟁이고 심지어 트롯트 노래 부르는 것도 경쟁이에요. 나이 많아가지고 ‘아 옛날이여’ 불러도 필요 없어요. 6살 먹은 아이가 불러줘야 저 아이가 천재가 이렇게 되는 거에요. 쟤가 똑똑하다. 모든 게 경쟁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48절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지금 이 뜻은 지금 제자들은 아무도 이 뜻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왜 무슨 뜻인지 몰랐냐 하면은 이걸 설명해드릴게요. 이 설명이 오늘 강의 중에 핵심 부위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하기 전에 먼저 성경구절 한번 보고 해드리겠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 너무 중요해서 쓰겠어요. 너무 중요합니다.


로마서 8장 10절에 보면 “몸은 죄로 인하여” 그 다음에 뭡니까? “죽은 것이다” 이게 성령 받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거에요. 지금 마태, 마가, 누가복음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가복음에서 ‘어린아이 영접하라’ 그런 이야기겠지 이 정도까지 하지 않았어요.


인간의 몸은 그다음에 뭡니까? 끝에 뭡니까? 죽었지요. 무력하지요. 무능하지요. 무력, 무능은 뭡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없다?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설치면 설칠수록 내가 죽어 마땅함만 계속 티를 낼뿐이에요. 설치면 설칠수록. 인간의 몸은 죽었잖아요.


아니 이 이야기한다고 그렇게 욕을 얻어먹어요. 목사님 다른 건 이해되겠는데요 우리가 죽었다는 건 이해 안돼요. 맨날 이런 소리 들려요. 목사님 다른 건 이해되는데 우리가 왜 죽었습니까?? 안 죽었는데 왜 죽었다고 합니까? 여기 나오잖아요. 로마서 8장10절에 나오잖아요. 나만 욕 얻어먹고 이야기는 사도 바울이 해놓고 욕은 내가 다 먹네.


사람이 죽었잖아요. 사람이 죽었잖아요. 사람이 죽었다. 죽은 인간이 뭘 해요. 죽었는데. 죽은 티만 내지 죽었는데 뭘 해요. 언제 주일 낮 설교인가 설교 한번 했지요. 아 주일 낮 설교 맞아요.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 이야기할 때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 이렇게 하니까 그 이야기를 알아들은 니고데모가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내가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서 도로 아기로 엄마 몸에 다시 갔다가 오면 됩니까’ 라고 이야기했지요. 그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가 평소에 내가 나에게 어떤 일을 가하고 노력을 하고 뭘 하게 되면 내가 달라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에요. 몸은 이미 죽은 거에요. 죽은 것은 달라지지 않아요. 백날 노력해봐야 죽은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오징어 구울 때나 붕어빵 구울 때 오징어 구울 때 오징어 한쪽만 하면 너무 타잖아요. 그러니까 젓가락 가지고 오징어를 이렇게 굽는 사람이 뒤집어줘야 되지요. 오징어가 지가 뜨겁다고 지가 알아서 이렇게 아이고 뜨거워라 이렇게 합니까? 그건 살아있을 때고. 죽은 오징어는요 계속 타고 있어요. 바보 같애. 바보 등신 같애. 그걸 뒤집어줘야 돼요.


그건 오징어를 위함이 아니고 주를 위함이거든요. 주께서 우리를 이렇게 오징어 굽듯이 구워주는 것은 주를 위함이에요. 우리 구원 받으라고 한 게 아니고. 이래도 죽었고 저래도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내가 다시 어린 아이 몸속으로 방향을 반대쪽으로 틀수가 없어요. 인간은. 인간은 비가역적 존재입니다.


한번 증가하게 되면 다시 원형이 될 수가 없어요. 한번 혼란하면 더 큰 혼란으로 갈 뿐이에요. 우리는 죽음을 향하여 지금 달려가고 있습니다. 달려가고 있지 그걸 빼기 위해서 사는 쪽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오늘 문구 영생은 뭐다? ‘저주’다. 나를 죽게 하기 때문에. 영생은 나를 죽게 하기 때문에. “죽어라 인간아” 이게 영생이에요.


나를 위해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다 성경에 있는 이야기에요. 성경에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없는 이야기를 해서 문제지 성경에 원래 있어요 이게. 사람이 날 위해 죽으면 살리라. 그 외에는 다른 사는 길 있다? 없다? 없어요.


주님께 충성한다고 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제발 좀 그냥 죽어줘 그냥. 제발 좀 나대지 날고 그냥 죽어줘. 그것도 못하냐 이 인간아. 왜 그러느냐 하면은 주체는 환경의 증상이기 때문에. 환경이 안 바뀌면 인간은 환경에 따라서 그 옛날 환경, 옛 세대 환경은 자기 자랑하는 거에요. 자기 자랑하는 겁니다.


중국이 금메달 뺏어가니까 화나지요. 여러분은 요새 뭐 해요? 이러면 뭐 화낼 것도 없지요. 요새 베이징에서 뭐 합니까? 무슨 일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은 화가 났지요. 심판 오심 때문에 맨날 뉴스 나오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은 이 세대가 옛 세대, 심판받을 찢어져야 될 옛 프레임 속에서 전부 다 빠져 나올 생각을 안 하죠 아예.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그걸 그들은 사실 또는 현실, 그걸 실제 세계로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는 뭐가 됩니까? 그들에게 뭐가 돼요? 거짓, 저주가 되는 거에요. 그들에게. 나한테 저주 이야기 그만 해라. 이런 식이에요. 살릴려고 하는데 안 받아들여요.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찾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나를 미워하는 것을 찾아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지독하게 주님 밀어내고 배척하고 주님 싫다고 이야기하고 반발하고 반항하는 그걸 결국은 그게 예수님에 대한 배신인데 12제자 도망하고 가룟 유다 배신하고 주께서는 딱 지켜보고 있었던 거에요. 그게 옛 세대의 환경이에요 그게. 옛 환경이라고요.


옛 환경이 제자들 속에 다 들어있었던 거에요. 제자들만 몰랐지요. 그러니까 제발 좀 무력한 존재, 무력한 존재가 뭡니까? 세 자로 하면 뭡니까? ‘어린이’. 어린이라고 누가 이야기했어요? 소파 방정환 선생님. 일제 시대 때. 최초로 쓴 사람이 어린이에요. 애도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어린이일 뿐이지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그때 5월 5일 어린이날 제정되었는데.


어린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 어린이를 영접한다는 것은 무력한 존재를 영접하는 거에요. 너, 나하고 같은 급이네. 너, 나하고 동급이다. 세리와 창녀 보니까 동급이다. 동급이네. 동급이 될 수밖에 없는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인간이 낮아질 수 인간의 힘으로 낮아질 수 없는 어떤 인간보다 더 낮아지는 십자가, 죄인이 되셨잖아요. 죄인이.


죄인이 됐으니까 거기에 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양쪽에 두 강도가 기다리고 있었지요. 대구강의 때 했잖아요. 두 강도가 있었지요. 한 강도가 메시아가 자기와 동급이 된다는 사실을 화들짝 받아들인 거에요. 내가 점프해서 갈 수 없지만 내려오신 분이 이렇게 있다는 말은 당신의 나라에 나를 생각해달라. 위에서 못 봤지만 옆에 있으면 눈높이를 낮춰버리면 동급이 되는 거에요.


이걸 제자들이 할 수가 없어요. 제자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이게 안돼요. 무력한 존재가 안 됩니다. 제자들은 귀신들린 자라 칭하기를 거절해요. 자기는 예수와 함께 있기 때문에 지금 누가 크냐? 저 하늘나라에 누가 크냐 이게 관심사지 뭐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참 그 이런 모든 이야기의 일을 예수님은 사도 바울에게 그걸 풀이하도록 계시를 내려줘요. 그 계시 중에 하나가 로마서 8장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 그런데 이 죄는 무슨 죄냐 하면은 모든 인간의 예외 없는 죄. 모든 인간에게 예외 없는 죄.


그래서 이 죄를 죄라고 규정하기 위해서 로마서 7장에서는 율법을 줘 버리죠. 율법을. 율법을 주니까 모든 인간은 죄로 이미 죽은 거죠. 죽었지요. 이 사실이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는 율법의 저주를 받은 거에요. 그게 십자가죠. 그래서 십자가는 무슨 기능을 하고 있다? 율법 기능의 완료가 됩니다. 율법 기능의 완료. 십자가 자체가.


그 십자가 앞에 섰을 때에 나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은 맞고요 그 죄인 중에 괴수가 누구냐 하면은 바로 나 자신이 맞는 이유가 내가 남보다 나쁜 짓을 더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프레임, 내 환경, 내 사용하는 모든 의미가 나를 위한 주체적 의미에서부터 출발을 했다는 그것 때문에 그게 죄가 되는 거에요.


예수를 믿던 뭘 믿든 누구 좋아라고요? 나 좋아라고 하는 거에요. 나 좋아라고.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뭐냐 하면은 공장에 하도 놀기 좋아하는 자식이 있어가지고 부모가 공장에 취직을 시켜놨어요. 취직을 하라고 하는 그 날에 지가 또 어디서 알아봤는지 공장에 가면 현장에서 산업재해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안 갈라고 하는 거에요.


“엄마 나 공장 안 갈래.” “왜?” “사고 많이 일어난데. 사고 일어나면 안 되잖아. 엄마 나 다치는 거 싫어? 좋아? 싫지. 나 엄마 소원대로 효도하는 셈 치고 공장 취직 안 할게.” 이런 식이에요. 자, 이 말을 그대로 복음의 세계에 적용시켜 봅시다. 사고 나는 것 맞지요. 사고 있는 건 맞는 이야기죠. 확률이 적든 많든 간에 무조건 사고 일어납니다.


그러면 복음 세계에서 뭐냐 하면은 성령 받는 일이 성령 세계에서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령 받는 일이. 분명히 일어나지요. 성령 받는 일이 일어나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 성령 안 받으면 구원 못 받으니까 나 교회 안 나갈래. 이렇고 있단 말이죠. 그 말이 뭐가 문제지요?


사고 나기 때문에 나 공장에 취직 안할래 하고 성령을 받아야 구원받는다면 그럼 성령 못 받으면 나는 교회 다녀도 소용없잖아. 그럴 것 같으면 성령 받고 난 뒤에 교회 오지 라는 그런 아이디어를 발휘할 때 뭐가 잘못입니까? 성령 받는 다는 것은 자기가 지금 성령 받아서 구원 받는다 할 때 그 사람이 뭘 모르느냐 하면은 나한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지요. 그렇지요?


그러나 절대적 최초의 모든 우연적 사실 말고 모든 사실, 확고한 필연적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이 뭐로 보느냐 하면은 이걸 사고로 보는 거에요. 사고난 거에요. 사람들 기피하는 사고로 본다니까. 이 십자가 사건을.


십자가 사건을 자진해서 제자들은 갔습니까? 안 갔습니까? 십자가 그 현장에 제자들 지켰습니까? 안 지켰습니까? 도망쳤지요. 왜? 사고 났으니까. 사고 났으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서 성경을 100독하고 1000독을 하고 배워도 성령이 나한테 이익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성령 받은 것이 십자가 사건에 참여된 사실이라는 사실을 몰라요. 우리는 내가 지금보다 내일 내일보다 모레가 더 훨씬 더 행복하고 좋아지고 싶어요. 우리는.


왜? 나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없다? 있지요. 그리고 그렇게 괜찮은 내가 마지막 만나고 싶은 것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성공했던 구원이고 뭐고 모든 일에 성공한 그것이 나한테는 그 모습이 진짜 순수한 나의 본질 그대로 라고 우리는 자부하고 싶은 거에요.


그런 보람도 없이 그런 희망도 없이 기도하고 교회나 오겠습니까? 헌금하겠어요? 돈 줘놓고 남 좋은 일 시키는 그런 일 하겠어요? 안 하지요. 방향을 그 쪽으로 나의 순수, 이 정도로 나는 괜찮은 존재였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끌어당기는 거에요. 그럼 이 가는 방향은 무슨 방향과 반대 방향이에요?


부모가 자식보고 제일 당부하는 게 뭐냐? 제발 사고치지 마라고 하지요. 이게 예수님은 십자가 죽고 싶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할 때 뭐라고 했어요? 할 수만 있거든 이 사고가 나한테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했지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그 다음에 뭡니까? 아버지 뜻대로. 그러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사고 난 그 사람만이 성령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체험을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령 받고 난 뒤에 자랑질할라고 생각했다가 진짜 십자가의 영을 받고 난 뒤에는 그 자랑질할려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사고를 낸 가해자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거에요. 그래서 한번 정리해봅시다. 주체란 성령 안에서 주체란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성도란 구원받은 주체란 사고 난 뒤에 파악하는 거에요.


내가 죄인이었습니다. 내가 죄인이면서 의인인줄 내 주체가 의인인줄 착각을 했었습니다. 뒤 돌아보면서 확인되게 하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도가 할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것도 없지요. 다 이룬 것을 그냥 확인할 뿐이지요. 그것도 매일같이. 매일같이 확인하는 겁니다. 매일같이 확인하는 방법은 뭐냐?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봅시다. 누가복음 9장 이거는 너무 많기 때문에 그냥 아무거나 해도 다 돼요. 46절 봅시다. “제자 중에 누가 크냐” 했지요? 제자 중에 누가 크냐 했지요? 그렇죠? 이 말씀 있지요. 이거 저와 여러분의 일상 아닙니까? 한국하고 일본하고 축구하면 누구 응원하고 싶어요? 한국 응원하고 싶죠.


성경에 한국 이겨야 된다는 게 예레미야에 나옵니까? 에스겔에 나옵니까? 어디 나옵니까? 성경 어디 나오지요? 한국은 일본을 이겨라. 성경에 그게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성경에 한국이고 일본이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예 없지요. 보세요. 얼마나 내가 속해 있는 집단과 단체가 이 국가가 나는 괜찮은 존재인 것을 증명해 주는 국가이길 원하는 거에요.


전에 제가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나는 버스타고 가는데 택시하고 버스하고 박았다. 그러면 누가 응원합니까? 나는 버스에 타고 저 택시운전자하고 차 사고 났다 이 말이죠. 그럼 나는 누구 편을 드느냐 이 말이죠. 버스 편을 들지요. 그런데 그 택시 운전자가 우리 사촌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어떻게 돼요? 갑자기 계산하죠. 사촌 편을 들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그 사촌이 우리 엄마를 욕했던 사촌인데. 그럼 어떻게 할 거에요. 그게 모든 게 우연한 존재. 인간은 자기가 절대적이고 싶지만 상황 자체가 계속해서 상황이 바뀌고 바뀌는 바뀌는 거에요. 그때그때 마다 변신의 변신의 변신을 하지만 이게 뭐냐 하면은 가면이에요. ‘가면’. 가면 뒤에 가면, 가면 뒤에 가면. 벗겨도 벗겨도 자기 본 얼굴을 본인도 몰라. 페르소나 페르소나. 내가 나의 아바타고 그 아바타의 아바타의 아바타가 나고요.


또 벗기면 내가 어느 구석이 바뀌었는지 몰라요. 죽을 때까지 몰라요. 나 죽을 때 내가 왜 이러지. 몰라요. 본인도 모른다니까요. 아버지 왜 그런 소리했습니까? 나 돌았나봐. 본인도 몰라. 그래놓고도 자기는 순수하기를 원하고 자기가 사랑받기를 원하고 위로 받기를 원하고 있다고요. 도대체 인생 왜 사는지 몰라. 알고 살았겠어요. 그냥 마귀가 시키는 대로 가라는 대로 갔지 뭐. 남한테 안 질려고.


사람이 죽기보다 싫은 게 남한테 안 지는 거에요. 지다 지다 안 지면 마지막 카드가 뭡니까? 남한테 안지는 방법은. 자살이죠. 자살함으로서 자기의 정당함을 자기 죽고 난 뒤에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거에요. 너무너무 억울해서. 너무 억울해서 말로 다 표현하기 억울해서. 난 죽음으로 답한다. 난 그 돈 안 받았다. 이런 식으로.


그게 성경에 나옵니까? 그게 뭐에요? 그게 바로 옛 세대, 옛 부대 이게 찢어져야 될 이유고 심판을 받아야 될 심판의 불에 나답과 아비후처럼 마땅히 싸질러야 될 불살라야 될 대상입니다. 왜냐? 몸은 이미 죄로 인하여 뭡니까? 죽은 겁니다. 죽은 게 어디서 사는 척 했어요 그동안.


그래놓고는 스스로 신앙 좋다고 아이고. 귀신 쫓아내지도 못하고. 귀신이 웃어요. 너 우리 편이잖아. 왜이래? 갑자기. 같은 우리 편인데 뭘 쫓아내. 그럼 네 안에 있는 귀신은 어떻게 할거야. 사람은 항상 과거에서 내가 구성해놓은 그 모습을 과거에서 구성한 그 모습을 늘 그리워하게 되어있어요. 과거의. 과거에서 내가 상상했던 그 모습.


내가 5년 뒤에는 이렇게 될 것이다 하는 것을 5년 후에 과거의 그때 괜찮았던 순수한 내 모습을 지금 내가 늘 그리워하는 거에요. 그런데 주께서 뭘 원하는지 알아야지.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괜찮은 내 모습, 살만한 의욕을 제공하는 그것. 나로 하여금 또 하루를 살게 만드는 그 의욕 되는 희망, 그걸 인간은 원하지만 주님께서는 뭘 원하느냐?


중심부의 폭발을 원합니다. 우리 중심의 폭발. 화산 터지듯이. 죽은 화산이 아니고 살아 있는 화산. 마그마가 들어있어요. 내 안에. 이 억눌린 욕구, 욕망, 원통, 분통, 절통. 저 인간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이게 미필적 살인, 누구누구는 내 기억에서 지워버렸으면 좋겠다 이것. 저 인간 때문에 내 인생 조져놨다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데 지워버리고 싶은 그 대상 중에 주님이 끼어있다는 거에요.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님이 제발 간섭 그만했으면 좋겠다. 나도 예수 믿지만 예수 없이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다. 하나님 믿지만 하나님 없이 내 마음대로 내가 죄를 짓던 내 마음대로 활개 치며 펼치며 살아보고 싶다 그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중심부에 폭발하게 만들어요. 본색을 드러내는 거에요.


이게 누가복음에 22장에 나오는데 여기 보면 22장 31절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했지요.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야 네가 용기를 가지고 물리쳐라’ 이랬습니까? 자, 사탄은 악마를 노립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들었던 베드로가 ‘제 힘으로 사탄을 물리치겠습니다’가 돼요? 안돼요? 이게 안돼요.


주님은 악마와 상대하지 인간하고 상대 안하거든요. 잔소리한다고 제자들이 달라질 것 없어요. 그래서 뭐냐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누가 기도해요? 주님이 기도하신 거에요. 주님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핀트가 어긋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우리는 괜찮은 나, 순수한 나, 멋진 나, 그리워하는 내 모습 그걸 조기에 달성해 달라고 기도하잖아요. 남한테 주눅 들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고 다시 말해서 내가 ‘나’라는 주체가 승리적인 주체, 남한테 꿀리지 않는 승리한 늘 이기는 주체, 남한테 안 지는 그런 주체이기를 기도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게 무력한 존재가 아니고 유력한 존재. 강한 나. 버틸 수 있는 나.


그래서 ‘나’ 값을 하는 거에요. 내가 사람 노릇을 하고 사람 값을 하는 나를 원하는 거에요. 그래서 목사가 되어서 새벽기도하게 되면 생전 잘 안 나오다가 새벽기도 나와가지고 설교 끝나면 불 끄고 난로 끄고 가야되는데 엉엉 울면서 땅바닥 치면서 주여 주여 주여 이럴 때 목사가 뭐라고 해야 됩니까?


‘한나야 네가 뭐 억울한 게 있느냐’ 뭐 이래야 돼요? ‘네가 포도주를 먹었구나’ 이래야 됩니까? 그거 미친 거에요. 누구한테 미쳤어요? 자기 자신한테 미친 거에요. 자기 뜻대로 원대로 세상이 안 따라주니까 미친 거에요. 세상은 환경은 인간 중심, 내 중심 아니에요. 세상은 옛 세대는 악마중심이에요. 그리고 새 시대는? 새 시대는 내 중심 아닙니다. 누구 중심입니까? 예수님 중심이에요. 이래나 저래나 내 중심은 어디에도 없어요. 속은 거에요.


내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마귀가 우리를 속인 거에요. 주님께서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면 베드로는 더 이상 영생이 저주가 아니고 영생이 거짓이 아니고 영생이 거짓이 아니고 영생이 사실이 되는 거에요. 사실이 된다면 베드로는 어느 길로 갑니까? 변화산 길로 갑니까? 아니면 십자가 길로 갑니까? 십자가 길로 가잖아요.


왜? 이 땅에서의 유일한 성령 안에서의 사실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머지는 다 거짓이기 때문에. 거짓이에요. 십자가 빼놓고 거짓이에요. 그 길 외에는. 그런데 이 마귀의 세계에서는 누가 거짓입니까? 이 복음 십자가가 거짓이에요. 주님께서는 뭐냐?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어리석다 했거든요.


오직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무슨 능력밖에 없다? 오직 십자가 능력밖에 없다 한 거에요. 그 이야기를 누가 싫어하는 줄 알아요? 목사가 싫어해요. 목사가. 왜? 십자가만 자랑하면 돈 나옵니까? 교인들 들끓어요? 하나둘씩 눈치보고 다 가잖아요. 잘됐다. 코로나. 코로나 핑계대고 다 가버리고. 안 오잖아요. 다 갔잖아요.


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왜 제공을 안 하느냐. 교회라는 서비스 단체가. 교회라는 서비스 단체가 사람을 위해서 있는 단체가 왜 사람이 원하는 것을 고객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으면 그건 장사 문 닫는 거에요. 그만 두는 거죠.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겠다는 거에요. 우리를 위로해 주면 헌금하겠다는 거지. ‘몸은 죽은 것이나’ 뭐 이런 이야기하면 그들은 안 듣지요.


이제 가장 근본적으로 가봅시다. 누가복음 9장을 했는데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따먹는 이유가 나와 있어요. 선악과 2장에는 안 나오고 3장에 나오는데 왜 따먹느냐 하면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면 여러분한테 그냥 강의가 끝나가니까 물어보겠어요.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그 여자에게 있어서 무엇이 현실입니까?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가 현실입니까? 아니면 ‘참 보암직하다 먹음직하다 탐스럽다’ 어느 것이 현실입니까?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가 현실입니까? 아니면 ‘내가 지금 따먹고 싶다’가 현실입니까? ‘따먹고 싶다’가 현실이죠.


이미 인간은 그걸로 모든 주체가 굳어졌어요. 백날 복음 십자가 이야기해도 소용없습니다. 주체적인 행동으로 우리는 이 옛 부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나를 찢을 생각이 요만큼도 없어요. 나는 건사하고 싶어요. 챙기고 싶고 지키고 싶어요.


그리고 남한테 더 힘을 끌어 모아서 남한테 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고 돈도 없고 몸도 약하고 이것도 저것도 내세울 게 없다면 그저 자존감이라도 갖고 있고 싶어요. 자존감이라도. 자존심이라도 갖고 싶어요. 못 먹어도 go에요. 망한 줄 알면서도 go. 그 자존감.


그 자존감에 뭘 보태는가? 내가 심판받아 마땅함이 들어있는 게 아니고 나는 복음 안다. 나는 교회 50년 다녔다. 나는 권사다, 집사다, 목사다, 장로다 이게 담겨있어요. 이게 자존감으로 다 전환되고 말았어요. 나는 신학교 나왔다. 원어 안다. 헬라어, 히브리어 안다 이런 것. 아 이거 독합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뭐냐? 성령이 사고를 쳐야 돼요. 주께서 사고를 쳐서 내부가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자존심만 챙겼다 하는 이게 마그마가 폭발해가지고 나타나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말로 하는 것보다도 못 그리는 그림이지만 그려볼게요.


플랜카드가 있고 뒤에 내가 있고 플랜카드를 듭니다. 플랜카드 글씨에 뭐냐 하면은 ‘나는 불신자다’ 이거 나오면 신자입니다. 이거 나오면. 이게 폭발되거든요. 이게 사고친 거에요. 여러분들 이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나라는 그런 게 없는데 태국이나 어디가면 음주운전 단속 심하게 하는데 있어요.


그게 뭐냐? 나는 음주운전자입니다. 이거 들고 사거리 서가지고 우사당하지요. 그렇죠? 그러니까 성도는 음주운전까지는 안했지만 나는 뭐가 돼야 되느냐. ‘불신자입니다.’ 이것을 바로 세리와 창기 다시 해서 이거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거에요. 감사의 내용이 정서적으로 두 종류가 있어요.


두 종류가 뭐냐 하면은 1. 내가 고대했던 바가 응답받을 때 감사하는 것. 내가 고대했던 바. 자, 1번에 있을 때 내가 찢어질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찢어질 필요가 없지요. 내가 원했던 기도 응답받았으니까 나는 그만큼 기도 괜찮게 한다는 자기의 과시, 자기의 가치가 유지가 되지요. 유지가 되는 정도가 아니고 빛이 나고 그래 내가 원했던 바다. 내가 이 모습을 원했었어. 드디어 하나님께서 반응을 나타내는구만. 아이고 좋아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두 번째 감사가 1번이 이게 불신자라고 드러나는 때 드러나는 감사.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과정이 어떻게 됩니까? 2번 바로 갑니까? 1번을 통해서 2번으로 갑니까? 반드시 1번을 통해서 2번으로 가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 제자들을 데리고 갔던 그 경로와 동일한 경로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이 과거에 했던 경력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예수는 거짓이었다죠. 예수는 거짓이었고 무엇이 진실이다? 여호와는 진실이죠. 제 말이 아니고 사도 바울 말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와 예수와 같은 급입니까? 대립이 되는 거에요? 이 인간 세계에서. 하나님이 예수님께 대립이 돼요? 아니면 같은 급입니까? 대립이 되는 개념입니다.


왜? 이건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옛 세대의 하나님과 새 세대의 주님이 세대와 환경이 다르니까 그 주체가 달라진 거에요. 1번을 통해서 2번 내려오는 거에요. 어떤 인간도 왜냐하면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제가 주일날 설교 다시 해볼까요?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에요.


그럼 지퍼를 마지막까지 다 내려줘야 돼. 마지막까지 다 내려올려면 몸은 죄로 인하여 뭐다? 죽은 것이라는 것을 그것을 여기에다가 써야 돼요. 여기에다가. 불신자 이 말을 달리하게 되면 내 몸은 이미 죽었습니다. 이걸 기쁘게 울면서 이게 아니고 활짝 웃으면서 입 째져가지고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바로 불신자였고 내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며 나는 선을 원했지만 내 속에 무엇이 강했다?


로마서 7장에 “나는 선을 원했지만 내 속에 또 다른 내가” 뭐를 원했어요? “악을 원했다.” 악이 나의 선을 이겼어요? 졌어요? 악이 나의 선을 이긴 그런 인간이 접니다. 이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게 바깥에 나왔다는 말은 이게 뭐냐 되냐? 날마다 죽을 때까지 쏟아내는 나의 배설물로 쏟아내는 거에요.


내가 이렇게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신앙이든 신학이든 남한테 지는 건 죽기보다 싫었고 그리고 나의 약점과 나의 결점이 타인한테 들키는 것을 나는 용납치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도 지지 않을 정도로 나는 율법에 열심이었고 율법에 완벽했었어요. 누가? 사도 바울이.


그런데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에 보게 되면 그런 나를 주께서는 나로 하여금 포행자 살인자로 만들었다. 왜 만들었느냐? 내부적으로 폭발하라고. 바로 이게 주께서 주신 십자가의 심판, 너는 죽어 마땅함을 알려주소서 했는데 디모데후서 1장에 보면 “창세전부터 이 일이 이미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한 게 아니고 주님의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8절의 말씀. “내가 사도된 것은 내가 예상하지 않고 내가 성도된 것은 사도된 것은 주님의 예정된 뜻입니다” 라는 고백. 그러니까 이 플랜카드가 뭘로 바뀌겠어요. 주의 말씀으로 계속 바뀌면서 자기는 이제 불신자라는 전제로 계속 주의 일이 불신자는 나고 거기에다가 불신자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혜만 계속 플랜카드에 쓰시는 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도록 해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에게 들킬 수가 없지만 주님께서는 다 아시는 이야기, 그것이 제자들 통해서 우리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제자들 탓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탓하고 있는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강남-누가복음 9장 40절 (영생은 저주다) 220208b-이근호 목사.hwp (161.5K), Dow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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