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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3 07:05:49 조회 : 88         
20220411b 부산강의 : [시편]47(31:19)-문제해결책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20220411b 부산강의 : [시편]47(31:19)-문제해결책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 끝에 사울의 등장인데 사울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나를 위한 환경이 주님을 위한 환경을 가로막는다.]는 겁니다. 왜 사울을 등장시키느냐 하면 죄란 무엇인가에요.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해결책은 하나님 자신이 죽는 것이 해결책이에요. 인간들의 죽음은 해결책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으면서 뭘 드러내느냐 하면 내가 죽는 것은 세상의 죄 때문에 죽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죽음을 먼저 던지고 그 이후에 하나님의 죽음에 인간의 죽음이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재수 없다고 죽거든요. 재수 오지게도 없다고 죽는다고요. 어떤 자기 죽음의 정당성, 이유를 인간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의 죽음은 거기에 어떤 목적이 있습니다.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죽는 거예요. 따라서 죽음을 확정짓고 난 뒤에는 그 다음에 죄를 확정 시켜놔야 돼요. 그래야 그 죄와 그 죽음의 관련성이 형성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죄를 위해 필요한 인물들이지만 저는 이걸 인재들이라고, 엘리트들. 이 세상에서는 잘나고 똑똑하기 때문에 더욱더 죄답지요. 죄란 주님의 단독적인 죽음의 의미를 가리는 그게 죄에요. 예수님 십자가 복음을 가리는 것이 죄에요. 복음이 오지 않으면 또는 믿지 아니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들이 자칭 의인으로 간주했어요.

우리가 왜 죄냐? 우린 죄에 속박되지 않았다, 죄로부터 해방되었다, 우린 죄로부터 자유롭다, 우린 애굽에서 나왔던 그러한 종족이고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요한복음 8장에서 아주 강력하게 예수님 대적하면서 그런 이야기하거든요.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 그러니까 죄지, 이렇게 된 거예요. 죄가 아니라고 하기 때문에 죄가 된다는 겁니다.

사울이 등장한 것은 인재들, 영웅들, 잘난 자들, 더 구체적으로 해서 본인의 일에 업무에 의미를 실어보는 자들, 내가 하는 일이 어리석은 일이 아니고 가치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 사울입니다. 인간의 일은 내용 없는 형식들뿐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매일같이 주께서 일하기 때문에 인테리어, 환경이 바뀐다고 했지요. 환경이 바뀌면 어제 했던 어리석음 따로 있고요 오늘은 오늘 어리석음 따로 튀어나와요. 내일 되면 내일 어리석음 따로 튀어나와요.

내용은 없으면서 그럴싸한 형식들은 갖추고 있습니다. 금요철야기도하면 처음에는 야무지게 3분내지 5분 간 하다가 좀 하게 되면 본인이 자고 있는지 꿈을 꾸고 있는지 기도하는지 본인도 몰라요. 그러다 깨면 본능적으로 주여, 주여, 주여, 남 뭐하나 다 보고.

그러면서도 어떤 자기 형식의 내용을 다 채우는 것은, “주의 거룩하신 사자님 시키는 대로 금요철야기도 나와 줬잖아요. 그러니까 다음 주에 우리 얘가 시험 치는데 이번 주에 열심을 보이니까 주님도 양심이 있으면 나의 열심을 감안해서 점수라도 좀 더 받게 하옵소서.” 그런 태도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나를 위한 환경은 때려죽여도 포기 못하겠다는 이거는 끝까지 나를 위한 환경에 대해선 죽으면 죽었지 포기 못하겠다.

그게 누굽니까? 사울이에요. 그러니 사울의 등장은 반갑다 사울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의 모습이 사울이 그대로 재현해주고 있습니다. 그냥 닮은꼴이에요. 그대로에요. 그런데 그 사울이 일생일대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건 뭐냐? 다윗을 죽이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오는 게 시편 31편이고 31편뿐만 아니고 많은 시편에 나왔고요.

이걸 오늘날로 하면 인간의 자기를 위한 환경을 추구하고 못 버리는 사람의 일생의 목표는 뭐냐?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그것도 밟아 죽이는 거예요. 어제 낮 설교에 선한 사마리아인할 때 나 같으면 밟는다 하니까 굳이 그렇게 과격하게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데 여러분 그걸 몰라서 그래요.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핍박했지요. 그 사울이 구원 받았어요.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일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울을 찾아와 하는 말이, 네가 쓸데없는 내용 없는 형식 한다고 네가 고생이 많다. 네가 그렇게 날 믿는 사람들 잡아 죽인다한들 너만 고생이야. 네가 맨발로 선인장 가시를 밟으면 네 발만 아프다는 식으로 주께서 네가 고생이 많다 부질없는 시도한다고. 그게 뭐냐 하면 주님에 대한 핍박이에요.

하나님의 일은 어떤 외부가 개입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훼손해도 하나님의 일은 훼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훼손되는 법은 없어요. 인간에 의해 훼손될 것 같으면 하나님 아니지요. 내가 택한 자는 반드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어떤 방해공작이라도 끄떡없이 내 일은 성사되기로 이미 확정이 나버렸습니다.

확정 났다는 것, 이걸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도 안정되는 게 마땅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놓고 불안정한 사람은 이해가 안 돼요. “내가 죄 지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겠나.” 주의 일은 훼손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낙서한다고 낙서가 쓰이지 않아요. 어떤 짓거리를 해도 주의 일에 요만큼도 흠이 나지 않아요. 확정됐기 때문에.

사울의 등장은 나를 위한 환경이 주님을 위한 환경을 가로막는다고 설쳐대는 거예요. 그래서 사울은 무엇이 문제냐 하면 ‘나’ 이게 문제에요. 다윗은 사울로 인하여 쫓겨 다니지요. 그냥 사울이 다윗을 쫓아내기만 하면 됩니까, 죽이기를 원해요? 사울의 입장에서는 다윗을 죽이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다윗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고 죽으라고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러면 사울의 입장, 죄인의 입장을 다윗이 그냥 받아들여야 돼요. 왜냐하면 죽음 안에서만 성도는 죽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죽음 안에서만 성도는 죽지 않는데 누가 죽이는가? 세상 사람들, 불신자들이 나를 너 같은 것은 죽어 마땅해, 라고 우리가 요청하지 않는 죽음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부여받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부부 싸움할 때 빈말이라도 하잖아요. “죽어, 죽어, 인간아!” 처음에는 여보~ 나오다가 한 몇 년 살면, “죽어, 죽어, 나가 죽어. 보험금 걸어놓고 죽어, 인간아.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 낙엽 같은 것 던지면서, CF에 그런 것 있잖아요. “가라, 가란 말이야! 네가 나한테 와서 방해만 된다.” 그건 뭔 뜻이에요? 나를 위한 환경은 그 누구라도 나는 침해받지 않겠다는 야무진 다짐이 있지요. 그게 누구라고요? 사울. 그게 오늘날 모든 인간입니다.

사울이 나를 위한 환경, 이게 놀랍게도 네 자로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로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사울이 하나님 믿는다는 말은, 내 것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믿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 교인들과 똑같은 거예요. 내 것 지키기 위해서 내 가정의 행복, 내 인생의 편안함 이것 지키기 위해서 교회 가는 거예요. 그게 사울이에요.

지키고, 지키고 싶었는데 나에게 좋은 조언을 해준 사무엘이 죽고 난 뒤에 그 사무엘을 잊지 못해서 다시 사무엘에게 찾아가는 거예요. 사무엘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 것 지키는 데 사무엘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울이 누구까지 찾아갑니까? 엔돌에 나오는 여자 무당이죠. 여자 무당 좋아서 찾아가는 게 아니에요. 그 사무엘 좀 살려내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김성수 목사 좀 살려내라 이 말과 똑같은 거예요. 살려내죠, 뭐. 김성수 목사 동영상 틀어놓고 예배드리니까. 그런 사람 없었어요, 노래도 있지만. 이건 뭐 김성수 목사뿐만 아니고 한경직 목사, 손양원 목사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나를 위한 환경, 교회에선 이 환경이 뭐냐? 천국 가 있는 나를 위해서 그런 환경을 고수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다윗은 무엇과 관련돼 있느냐 하면, 31편 17절을 봅시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뭡니까?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너는 지옥 가서 쭈그려 앉아, 그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너의 출발지가 음부, 죽음의 자리에요.

그 당시 같으면 언약 밖의 자리, 다윗을 해롭게 하면 이것은 언약에 의해서 부정적 존재가 되거든요. 반 언약적 존재가 된단 말이죠. 반 언약적 존재로서 다윗이 뭘 사용했습니까? 음부를 사용했어요. 스올. 이 스올은 뭐냐 하면 일종에 구약으로 말하면 지옥이죠. 너는 지옥에나 가서 쭈그려있어. 영원히 나오지 마, 이런 뜻이란 말이죠.

그렇다면 지옥이란 것은 불신자가 가는 나라 정도가 아니라 시편 31편에 보면 그 지옥으로 가야 될 자들이 해야 될 업무가 있어요. 그거는 뭐냐 하면 소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자기를 위한 환경을 포기하게 만드는 업무에 그들이 동원돼야 됩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한 환경을 지가 알아서 포기할 수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하실 때에 기도 중에 하나가 뭐냐? 내 뜻대로 마옵시고, 라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죄인을 대신해서 기도하거든요. 그리고 하신 업무가 죄인의 죄를 받아들여서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어디에서 어디까지? 내 뜻에서 어디까지? 아버지의 뜻까지에 이동경로와 절차를 보여주는 거예요. 기도 내용이.

그래서 복음 알고 난 뒤에 기도할 게 없어서 안 합니다, 하지 마시고 기도를 하세요. 기도를 해서 그 기도 내용 속에서 여기까지가 내 뜻이고 주의 뜻은 무조건 이미 십자가에서 확정 났어요. 겟세마네 기도에서 확정 났습니다. 내 뜻은 무조건 그게 아무리 좋은 명분이고 취지라도 내 뜻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아프리카를 가던 알라스카를 가던 그거는 자기 뜻이지 주의 뜻이 아닌 거예요. 부산에 그냥 남아있어도 주의 뜻이 아니에요.

관심사의 이동, 이게 뭐냐 하면 시선의 이동에 사울 같은 사울의 세계, 세상 사람이 여기에 유혹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럴싸해 보이고, 건전해 보이고, 대단해 보이고 주의 일에 내가 조금이라도 긍정적 의미로 섞어 넣을 수 있는 그런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삐이익. 이 세상에 인간이 끼어들 주의 일은 남아 있은 적이 없습니다. 일체 없어요.

어제 낮 설교한 것 잠시 해보겠습니다.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스라엘에 칠월 십일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만 지성소에 들어가요. 들락날락 자기 집처럼 들어가면 안 돼요. 한 차례만 하나님이 허락하거든요. 지성소에 들어가는 목적은 뭐냐 하면 내 백성의 죄를 일 년에 한 번씩 씻어내기 위해 간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내 백성은 아무리 그 사람이 평소에 주께 영광 돌리고 바르게 살아도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씩 들어가는 이 일로 인하여 그들이 아무리 착하게 바르게 순진하게 살아도 졸지에 뭐가 돼요? 한꺼번에 보편적으로 뭐가 됩니까? 죄인으로 확정 나버린 거예요. 어제 그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의인은 없습니다.

무슨 새삼스럽게 죄는 죄지만 그래도 남보다 덜한 죄는 없는가? 선교하는 것, 전도하는 것, 예배당 벽돌 몇 장 나른 것, 그것도 착한 일일거야. 이런 건 없습니다. 그거는 일종에 나를 지키기 위한 내 환경 지키기 위한 아직도 나의 의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 같은 거예요. 물론 우리가 그걸 안 할 순 없지만 아까 첫째 시간에 배운 어떤 원칙이 있지요. 이 어리석은 놈아, 하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돼요.

“아이고, 이 어리석은 자야. 선교한다고 돌아다니는 꼬락서니하고는 쓸데없이.” 이렇게 하면서 하면 되지 뭐. 제사장이란 것은 죄와 관련된 직업입니다. 제사장이 필요 없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이란 것은 모든 성도든 성도 아니든 이미 죄인으로 확정 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무슨 업무가 있습니까, 죄인인데요. 죄인인데 업무해서 의인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없어요.

다윗은 사울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어떤 문제가 발생되지요. 괴로움이 발생됩니다. 그런데 사울 배후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스올, 그냥 지옥이라 합시다. 지옥과 관련돼 있어요. 지옥과 관련된 이 존재가 살아서 펄떡인다는 말은, 이 지옥이 다윗 삶의 현장에 끼어들었단 말이죠. 그럼 지옥이 다윗에게 죽어라. 이렇게 돼요. 그럼 다윗은 죽으마. 이러면 돼요.

다윗은 세상에서 말하는 죽음 안에 죄가 지적하는 그 죽음 안에 죽어있음으로서 비로소 인간이 끼어들 수 없는 하나님만이 죽을 수 있는 그 죽음 안에 거기 생명이 있거든요. 그 생명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복의 결정체, 복이 뭐냐에 대해서 5장 10절, 11절에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 자신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울에게 핍박은 받은 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복음을 핍박하는 자, 이게 누구냐 하면 바로 납니다. 내가 복음을 핍박해요. 생명이 모양을 갖춘 자가 누구냐 하면 성도거든요. 복음을 핍박하게 되면 복음의 주인공 되신 예수님이 핍박했다고 말씀으로 마태복음 5장 11절, 12절에 근거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지요. 그러면 생명 되시는 복음, 예수님 생명 되신 몸이 모양을 갖추면 이게 바로 성도에요.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가 납니다, 하는 그게 성도에요. 자신이 재빨리 불신자임을 알아채는 사람이 신자에요. 그게 신자가 되는 거예요. 야아 때려죽여도 말씀 지킬 수 없구나, 라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그걸 알아요. 아까 왜 그러냐 하면 나를 위한 환경을 내가 조건을 스스로 그걸 벗을 의향이 전혀 없어요.

그저 사울처럼,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라 했지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의미가 뭡니까? 내 소유의 나라가 잘 돼야 될 텐데, 그걸 요청하는 거예요. 그리고 사울이 보기에 인간세계가 너도나도 그러하다고 본 거예요. 수준이 다윗처럼 하나님 수준이 아니고 세상 수준, 나 수준이기 때문에 그걸 정당화하는 겁니다.

옛날 노래인데 지금도 살아 계신 하춘화 그분이 불렀던 노래가 있어요. <잘했군 잘했어> 그게 그 사람 첫 히트곡인데 자기들끼리 죽이 맞아요. 영감~ 왜 불러~ 장에 가서 뭘 바꿨는데, 아내는 볼 것도 없어. 잘했군, 잘했어. 그러니까 내 영감이라지.


<잘했군 잘했어>(하춘화‧고봉산)
영감 왜 불러
뒷뜰에 뛰어놀던
병아리 한 쌍을 보았소 보았지
어쨌소
이 몸이 늙어서
몸 보신 할려고 먹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마누라 왜 그래요
외양간 매어 놓은
얼룩이 황소를 보았나 보았죠
어쨌나
친정집 오라비
장가들 밑천에 주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마누라지
영감 왜 불러
사랑채 비워 주고
십만원 전세를 받았소 받았지
어쨌소
방앗간 차릴려고
은행에 적금을 들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마누라 왜 불러요
복덕방 골영감이
장기를 두자고 왔었나 왔었지요
뭐랬나
장기는 그만두고
태권도 배우러 갔댔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마누라지


이 세상은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예요. 잘했군, 잘했어. 서로 입이 맞고 서로 죽이 맞으면 그게 만사 오케이에요. 특징이 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특징이 사울에게는 한계가 뭐냐 하면 절대로 내가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이스라엘 왕인데 내가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죽으면 안 된다는 사울을 전쟁이 일어나서 죽여 버렸어요. 자기 아들 세 명과 더불어서. 길보아 산에서 죽입니다.

사울은 자기가 안 죽기 위해서 누굴 죽이려합니까? 다윗을 죽이려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잠시 성경을 멈추고 여러분들이 자꾸 다윗 입장에서 생각하는데 사울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나는 대통령이다, 이 말이죠. 요새로 치면 이스라엘의 대통령이에요. 대통령인데 윤석열이 0.7프로 인기가 더 있었단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벼락이 떨어져서 윤석열 벼락 맞아 죽어버리고 차점자 이재명이 대통령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할 수 있잖아요.

그게 살인죄에요. 생각만 해도 살인죄에요. 자, 그 생각을 왜 합니까? 뭘 지키기 위한 일입니까? 자기를 지키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하는 살인죄, 간음죄, 기도, 금식 이 모든 것은 그 가운데 누가 주인공으로 자리 잡고 있어요? 나 잘되기가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선 나 잘되기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예수님 복음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도하는데 열두 제자 중에서 그 시도에 따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간이 무슨 주의 일을 합니까? 말이 안 돼요. 자기 엉덩이가 무거워서 꿈쩍도 안 해요. 살아온 게 있는데요. 한 오십 년, 육십 년, 칠십 년 살아보세요. 자기가 고생한 것 얼마나 많습니까. 미싱사 해서 발로 밟고 소매달인가 뭐 해서 그런 험한 현장에서 일하면서 자식 셋 키우고 대학 보내고 맨날 노인정에 모여 하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 아닙니까. 이젠 손자까지 맡아 키운다고. 힘들다하면서도 어떤 보람을 느끼는 거예요.

내 새끼들 봐라. 내 환경은 내가 인테리어 하는 거예요. 주님이 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합니까? 아직은 죽기 싫은 거예요.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이미 너는 죽었고 네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러니까 그 말씀이 이제 우리에게 경험으로 다가온다면 이거는 내가 나 위주로 살면서 다가오는 게 아니고 뭔가 나 위주의 환상을 찢으면서 추방시키면서 그 자리를 차지하겠지요.

그래서 죽음은 네 번째 인칭이라고 볼 수 있어요. 1인칭은 나(I)에요. 2인칭은 너(You), 3인칭은 그것(It), 4인칭은 아무개에요. 1인칭, 2인칭, 3인칭으로 규정할 수 없는 아무개. 이게 바로 우리가 끼어들 수 없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낯선 죽음, 이게 십자가 죽음이에요. 여러분 십자가라는 것은 세 자자잖아요. 두 자로 고치면 그냥 죽음이에요.

독특한 죽음, 다른 말로 하면 언약에 의한 죽음. 이 죽음에 와야 이게 부활이 돼요. 부활과 연관돼 있습니다. 죽고 난 뒤에 부활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부활했기 때문에 부활한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생명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의 헛되고 나 중심의 모든 것도 생명을 증거하는 재료가 되는 겁니다.

촌에 가면 나뭇조각 태우는 난로 있지요. 그 난로만 사놓으면 불이 붓습니까? 뜨겁습니까? 뭐가 있어야 돼요? 나무 난로가 있으면 거기에 재료가 되는 나뭇조각들이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그걸 넣어야 되잖아요. 그 나뭇조각 때문에 얼마 전에 산불 났어요. 그 재료로 들어간 게 우리의 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 짓는 게 잘했다는 게 아니라 나는 잘했다가 없어요. 나 자체가 죄임을 감사해야 되지요.

그 죄 중에 하나가 우리가 불신자에요. 그것도 죄 항목에 들어가요. 교만, 불신, 죄. 이 교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게 겸손하다는 뜻이에요. 교만과 겸손이 동의어에요. 같은 말이에요. 자기를 생각 안 하면 되는데, 나는 겸손할까? 이게 교만이에요. 내가 들어가면 전부 다 교만이에요. 내가 희생해야지, 그게 교만이에요. 내가 들어가면 교만이에요. 희생은 주님이 해야지 니가 왜 하는데, 왜 그걸 흉내 내고 있어요? 뭘 노리고 흉내 내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복음을 위해서 핍박 받았다는 그 말씀 지가 지키려고?

사울 같은 이런 존재, 세상이 그리고 나도 거기에 한 몫 하는 나 자신이 나에게 왜 필요하냐 하면 자꾸 나뭇조각, 죄라는 나무를 양산해내기 때문에 주께서 자꾸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래도 죄 아니냔 말이죠. 이래도 너만 생각하잖아.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시키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관심사가 죄 안 짓는 나에게 있어야 됩니까, 관심사가 주님의 독특한 유일한 죽음에 있어야 돼요? 관심사가 뭡니까? 십자가의 죽음에 있어야 되겠지요. 시편 31편은 바로 그 십자가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그 다음에 시편 31편의 전체적인 그림은 이겁니다. 낯선 시공간. 낯선 시공간 하면 어려워 보이지요. 쉬운 말로 이걸 환경이란 말로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이 자꾸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자기 자신이 아무리 말씀 들어도 자기만 주장하는 이유가, 이미 몸 자체가 나를 위한 시공간에 익숙해져서 그래요.

그러니까 인간은 형식만 만드는 게 아니고 그 내용까지 나를 위한 내용을 고스란히 다 만들어요. 만두소 따로 만들고 만두피 있듯이 그 만두소와 만두피가 나한테 적절하게 나를 높이기 위해서 딱 이렇게 만나는 식으로 평생을 인간들은 살아왔습니다. 이게 낯선 시공간인데 낯선 이 아니고 우리는 뭐냐? 익숙한 시공간이죠. 그것을 사람들은 뭐라고 이야기하는 하면 이걸 현실이라고 이야기해요.

현실이란 말은 그 안에 뭐냐 하면 내가 엄연히 살아 있음을 확인해줄 수 있는 것, 이걸 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폭탄주를 많이 마셨다. 그러면 기억이 필름이 끊어졌다 하지요. 그런데 아침이 되면 술 깼다 하지요. “어제 저녁에 나 뭐했는지 모르겠어.” 그러면 아침 되면 다시 현실로 돌아왔지요. 현실로 돌아오면 뭐합니까? 또 그날 저녁에 술 먹으면 필름 끊어지듯이 기억이 끊어질 건데요.

인간의 현실은 마지막 보루 같은 거예요.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냐 하면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주님의 것이 제대로 오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복음을 오십 년, 육십 년 듣고 아무리 해도 다시 어디로 돌아옵니까? 현실로 돌아와요. 잠시 교회 나들이했다. 교회 놀러갔다. 잠시 성경에 발 한 번 담가봤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실은 없다. 이리로 돌아와요.

특히 여기에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목사와 특히 신학교 교수들이에요. 저는 신학교 교수들 중에서 아직은 신자를 본 적이 없어요. 그들은 현실로 돌아와 있습니다. 성경을 가르침에서 삶을 도모하는 것, 이거는 설명할 것도 없이 유일한 현실로 보는 거예요. 성경 가르치면 많은 사람들이 성경 가르침 받아서 하나님께 도움 되겠지요. 그럼 하나님께 도움 주는 그런 건전하고 보람된 일을 하는 나는 현실에서 삶을 누리는 거예요.

신학 교수나 목사 이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서 죽을 사람입니까? 미쳤어요. 이 귀한 현실을 스스로 포기한다 이 말입니까? 이 사람들 사울 곁에 있는 거짓 선지자, 제사장들이에요. 세상에 현실의 힘과 권력을 부정 못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속마음입니다. 여기다가 하나 보탠다면 교회 장로들. 현실 똑바로 보란 말이야. 복음은 이론이고 현실을 봐라, 현실을.

그래서 제가 어제 낮 설교에 그런 것 한 기억이 나요. 초반에 이야기했죠. 하나님께 도움을 받았다고요? 오십 년 동안 도움 받은 것으로 손으로 꼽아봐라. 무슨 도움 받았어요? 여러분 힘으로 살아왔어요. 무슨 도움 받았어요? 없지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무슨 도움을 받아요. 하나님의 도움은 도움 받으려고 손 내미는 우릴 보고, “제발 좀 죽어줘, 인간아.” 이게 유일한 도움이에요.

그 도움 받으면 내가 죽어야 돼요, 살아야 돼요? 도움 받은 게 아까워서 더 살아야 돼요. 히스기야 왕처럼 십오 년 동안 더. 인간 망쳐버립니다. 못 볼 걸 십오 년 살아서 보지 말아야 될 것을 다 봤어요. 자기 죄의 깊이와 자기 죄의 넓이와 높이를 본 거예요. 사랑의 높이와 넓이를 본 게 아니고.

시편 31편 4절 보겠습니다.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자, 이 사울의 특징이 뭐냐 하면 다윗을 노린다는 점에 있지요. 집요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그 당시 이스라엘이 안고 있던 죄의 대표자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여러분들이 성도라면 악마는 딴 걸 노리지 않아요. 우리로 하여금 관심사를 자꾸 현실이 최종적이다. 이게 참 중요한데 현실만이 최종적이다. 이 점을 절대로 잊지 말라고 계속해서 우리를 주지시킵니다. 그건 어떤 마음이냐 하면 놀랍게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주위의 식구들, 신랑이나 아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꾸 보다보면 누가 누굴 안타까워하느냐? 내가 나를 안타까워해요. “네가 제발 좀 그만 미쳐라. 네가 도움 받은 것도 없어.” 그야말로 복음 앞에 뭘 붙이느냐 하면 내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허황된, 그러니까 이 말은 비실제적이고 비현실적인 허황된 십자가 이야기 그만 해라, 많이 먹었다. 하와이 니가 가라는, 천국 너나 가라는 식으로 전혀 현실성이 결여된 그런 이야기 그만 해라. 사람이라 하는 것은 현실에서 행복하면 그만이다 인간이다, 라고 누가 누굴 설득하느냐 하면 내가 나를 설득해요.

이게 신앙생활 몇 십 년 한다고 설득 안 되지 싶지요. 끊임없이 설득해요. 왜?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내가 정신 차려서 구원 받는 일은 없게 만들기 위해서. 내가 각오에 각오를 다져서 내 의지로 구원 되는 게 없게 하기 위해서. 날마다 구원입니다. “주여, 악인의 그물에서 저를 오늘도 건져주옵소서.” 이걸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님의 해결책이 십자가로 결정 났기 때문에 우리는 넉넉하게 안정적인 가운데서 충분히 시편 31편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악인의 그물 중에 한 고리가 나 자신이에요. 그래서 나는 무엇과 헤어지는가? 나와 헤어져야 돼요. 날마다 헤어져야 됩니다. 이게 뭐냐? 나의 죽음이에요. 나는 나의 죽음을 주께서는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던 나의 죽음을 우리 안에서 가동시킵니다. 남보다 우리 안에서부터 가동시켜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다는 것을 살아 있는 육신이 죽었다는 나를 설득시켜요. “너 죽은 게 아니야. 내가 살아 있잖아. 쌍둥이 내가 있잖아. 내가 살아 있는데 니 복음 알아 좋겠다. 얘 점심 먹였어, 안 먹였어? 그것 봐. 복음 안다고 라면도 안 먹이고. 아이고, 사는 꼬락서니하고는. 니가 지금 뭔가 단단히 미쳤어. 안타깝게 너한테 이야기하노니 제발 현실로 돌아와.”

그럼 우린 묻지요. 현실이 뭐냐? 현실이 뭡니까? 그게 환상인데. 내가 꽂히는 것은 현실이고요 내가 죽는 것은 진짜 현실이고. 서로가 환상이래. 인간이 사는 것은 현실이고 내가 없는 것을 환상이라고 보는 쪽이 내가 사는 게 환상이고 그리스도와 죽는 이런 묵시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이게 실제라고 내가 내 안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어요.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설교하다가 복음 전할 때는 은혜 받았지요. 복음 전했는데 다음 주 헌금 얼마 나왔나? 갑자기 현실로 돌아와 버렸어. 이거는 목사만 아니죠. 목사를 언급하는 것은 대표적으로 이야기한 거고 일반인들도 똑같은 삶을 삽니다.

그래서 한 순간도 시편 31편대로 적용시켜주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말씀 없이는 그리고 사랑의 충만 없이는 우리는 사랑을 비현실로 간주해버리고 내가 주인공 되는 내가 가라 하면 내가 가고 내가 멈추라 하면 내가 멈추는 그것을 유일한 현실로 간주하는 환상 속에 우리가 놓이게 돼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서는 어떤 순간도 구원 되는 것을 주께서는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왜 알아야 되는가? 싱긋이 웃을 수 있도록 그런 여유를 가지는 거예요. “나의 업무는 없어.” 내가 나보고 나무랄 수 있어야 돼요. “그게 바로 육신이야.”

고린도후서 봅시다. 1장 19절에서 20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사도 바울이 편지에서 뭐라고 하는지 보세요.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이 참 쉽지요. 오케이하면 돼요. 예수님의 해결책 십자가로 오케이 한 거예요. 이미 우리는 죽었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은 없는데 내가, “너 앞으로 한 달 뒤에 어떻게 살래?”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가지고 자꾸 설득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육신이. 그런데 그런 갈등이 있더라도 그거는 주님의 예를 취소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훼손시킬 수가 없어요. 망칠 수가 없습니다. 파리 한 마리 붙는다고 건물이 무너지고 이런 것 없어요.

저는 오늘 이 강의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해방되고 난 뒤에 독립운동 하는 거예요. 이미 구원 되고 난 뒤에 독립투사로 나서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유가 있지요. 독립운동 하던 안 하던 결과가 달라질 건 전혀 없잖아요. 왜냐하면 내 인생이 없기 때문에. 내 인생을 주님 자기 인생에 가로채서 집어넣었기 때문에 나를 위한 내 인생이란 것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선 독립운동을 하게 함으로써 뭐만 계속해서 더 크게 하느냐? 이미 자유, 해방. 이미 우리가 죄의 그물에서, 또는 나로부터의 해방되었음을 확인하는 차원해서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망상에 불과한 이 현실 속에서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 갈등하게 만듭니다. 그래야 시편 31편이 살아나니까요.

이미 구원 받았으면 책 볼 것 뭐 있어요. 구원 받았는데 성경 왜 봅니까, 이래 되거든요. 시편 31편을 통해서 나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구원 받고자하는 내가 죽는 게 목적이죠. 나로서는. 구원 받고자하는 나 자체가 죽어버리는 게 나의 목적이고 없어지는 게 나의 목적이고. 그 없어질 때 주님의 일에 합류함으로써 주의 일로서 우리가 벌써부터 천국의 생활을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가 갓난아이처럼 내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 그냥 아버지 품에 주님께서 사랑으로 넓이와 깊이로 지키시는 이끄시는 그대로 가면서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그러니까 이 세상이란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그 지독한 합리성과 이성적인 것, 지독한 윤리적인 선악체계, 지독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부터 그게 복음을 가리고 복음에서 관심을 돌리게 만드는 그러한 스올, 음부, 지옥의 유혹이란 사실을 깨달으면서 오케이라는 말하면서 아멘 하게 하죠.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께 뭐가 된다 했습니까? 아까 고린도후서 1장, 하나님께 아멘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했잖아요. 하여튼 영광 돌리려고 몸부림을 쳐. 그냥 모든 게 오케이가 된 상태에서 영광이 되지 새삼스럽게 우리가 끼어든다고 해서 더 영광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다시 시편 31편 11절 봅시다.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이 말씀대로 먼저 당한 분이 누구지요? 예수님이죠. 다윗은 시간적으로 먼저라 하면 안 돼요. 예수님이 먼저에요. 알파요 오메가는 예수님이고 그 다음에 다윗은 나중이에요. 인간 시간과 다릅니다. 시작은 예수님이 시작이에요.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이 당한 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할 것이란 것을 다윗을 통해서 미리 그 시대의 복음으로 나타나게 한 거예요. 오늘날 우리 시대는 우리의 경험으로 복음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터져 나오게 하는 거예요. 복음을 말로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느껴야 되지 않습니까. 관심을 십자가에 돌린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남들부터 얼마나 우리를 매일같이 못 살게 핍박을 합니까.

인간아, 인간아. 길을 잘못 들여서 복음, 십자가 우리를 막 설득하는 거예요. “이 바보야. 성경에는 십자가만 있는 게 아니야. 부활도 있고 성령의 열매도 있어. 왜 너는 뭔데 십자가만 고집해.” 그런 세상에서 들어왔던 모든 것을 심히 지금의 내가 죽었다는 그 사실을 자꾸 그걸 부인하게 만들고, “너 잘할 수 있어. 너 살아 있는 거야.” 오늘밤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그때 우리는 싱긋이 그냥 웃지요. 오늘 제목은 그냥 웃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처음부터 인간세상이 아님을 마귀가 자꾸 감추고 인간들의 세계, 너의 세계, 너를 위한 현실, 너의 행복을 위한 환경이라고 거짓말하는 거짓말에 우리는 느긋하게 대처하면서 십자가 복음으로 다 이루심만 찬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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