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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6 04:23:43 조회 : 64         
서울의존강의20220414b 베드로후서 2장 4절(회수되는 자기 의)-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219.251.37.139)
서울의존강의20220414b 베드로후서 2장 4절(회수되는 자기 의)-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범죄한 천사, 악마 그리고 그 악마의 설침, 악마의 활동. 여기에 대해서 벌벌 떨고 겁을 낸다는 것은 여전히 육적인 것, 성령 받았음의 가치를 아직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군을 제대하고 난 뒤에 못된 선임하사가 뭘 하든 말든 자기는 이미 빠져나왔잖아요. 저 군대 때 어떤 사람은 소대장이 자기를 괴롭히니까 제대하고 난 뒤에 복수한다고 찾아갔어요. 너 나 있을 때 괴롭혔지? 괴롭혔잖아. 이제 더 이상 부하가 아니니까요. 따라서 하나님의 천사가 활동하는 데에 대해서 나는 무관한 상태에서 그들 악마를 느긋하게 즐기면서 볼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야 돼요. 벌벌 떨면서 보게 되면 이것은 도리어 악마가 원하는 바죠.

예를 들면 어떤 집이 있는데 깊은 산중에 자살한 사람이 서너 명 있어가지고 밤마다 귀신 나온다 하면 일부러 거기에 한번 자본다든지... 뭐 자볼 필요까지는 없죠. 이것만 알면 돼요. 말씀이 뭔가. 말씀전파는 순전히 예수님의 일이에요. 말씀전파가 나의 일이 아니고 예수님의 일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은 알아서 스스로 말씀전파를 하는 겁니다.

전파를 해버리면 이 말씀전파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나설 이유가 없는 것은 악마가 주님께 직접 강력하게 반발하고 대항하거든요. 대항할 때 악마가 그냥 대항하는 게 아니고 자기 편에 속한 인간들을 총동원해서 예수님의 말씀전파를 저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소위 구원 받은 자가 5절, 6절, 그다음에 7절 나오죠. 5절에 노아 나오죠. 6절, 7절에 롯이 나오죠. 노아, 롯 이런 사람의 특징은 본인이 믿음 좋아서 구원 받은 게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생산된 사람이에요. 주님께서 일방적인 말씀을 줌으로써 등장된 인물이에요.

노아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삽입되는 겁니다. 언약은 노아가 만든 게 아니에요. 노아 속에 그냥 쳐들어와 꽂힌 거예요. 노아가 있는데 말씀이 와서 노아의 중심부를 후벼파서 말씀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노아가 움직인다는 말은 찰랑찰랑~ 말씀이 움직이는 거예요. 입만 떼면 자꾸 노래가...... 또 말씀이 넘치면 찬찬찬 되겠죠. 소돔과 고모라에 롯도 마찬가지죠. 아브라함의 언약이 들어온 거예요.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 세상 악마에 속한 인간들은 자기가 열심히 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서 멸망, 저주를 대비하고 방어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애를 쓰는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은 그냥 말씀이 그 인간을 잠식해버려요. 장악해버렸습니다. 무언가 낯선 것이 쑥 들어와버린 거예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말씀이 주인공이 된 겁니다.

신약에 오면 그런 사람 중 또 한사람이 세례 요한 같은 경우에요. 세례 요한은 출생부터가 말씀에 의해 출생해요. 그 세례 요한의 모습이 마지막 때의 성도의 원형이에요. 네가 구원받은 것은 창세 전에 아버지하고 아들이 생각한 대로 사랑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라는 말씀의 위력이 너하고 사전에 아무런 상의도 없이 그냥 너에게 쳐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게 성도에요.

수요일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는 거예요. 구원하려고? 아니요. 말씀이 이렇게 실제로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증거용으로 우리에게 온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하는 게 아니고 그건 말씀이 약속대로 약속이 약속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내가 구원받은 것이지 내가 뭘 했다고 구원받겠습니까? 그냥 약속이 쑥 들어온 거죠, 쑥. 쑥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그 들어온 노아로 하여금 뭐를 목격케 하느냐. 악마와 이 세상의 육적인 것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있는가를 목격하게 만들죠. 그 목격되는 저주받는 현장에 노아로 하여금 말씀을 전파하고 외치고 그렇게 하게 하신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있는 말씀이 그렇게 노아를 시켰기 때문에 그냥 외치는 거죠.

구약에는 말씀, 신약에는 성령. 성령께서 우리를 이 육의 현장에다 두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복음이 터져나오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우리가 안 느긋할래야 안 느긋할 수 없어요. 느긋해요. 내 일이 아니니까요. 내가 혼신을 다하여 뭘 해야 획득할 수 있는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내 일이 아니고 남의 일, 주의 일이기 때문에 느긋하게 언제든지 거기에 동참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겁니다.

5절 보겠습니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세상에 홍수를 내렸다는 말은 이 세상 실정을 홍수라는 언약 체계가 동원되어야 세상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걸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을 내린 거예요. 소위 경상도 말로 디벼버린 거예요. 썩어빠진 것들이 안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뒤집어버려요. 확 뒤집어버리죠.

그런데 거기서 구원받은 사람이 몇 명입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아무 일없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렇게 살아왔어요. 이게 평온한 일상이죠. 사람들은 자기 빼놓고 남들은 다 행복한 줄 알아요. 자기만 힘들고 남들은 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이게 평온한 일상이거든요.

이 평온한 일상에 갑자기 뭐가 닥쳤습니까? 홍수가 내렸는데 그냥 홍수가 아니고 홍수 심판이에요, 홍수 심판. 심판을 하는 거예요. 이 평온한 일상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대상인 거예요. 심판 받는 자들이 평온하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이렇게 해왔던 겁니다.

같은 육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거죠. 영의 사람이라야 이 평온한 일상이 망할 세상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죠. 그렇지 않고 육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어요. 영의 사람들이 일상 속에 들어가 보면 각자 각자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불행하게 사는지를 다 느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욕심 때문에 그래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 이 욕심은 아까 분홍신 동화처럼 본인이 감당이 되지 않아요. 통제가 되질 않아요, 욕심은. 욕심은 몇 억 가졌다고 욕심이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또 건강하다고 욕심이 멈추는 법이 없어요.

남자 여자들 필라테스 한다고 완전히 몸 가꾸는 것에 중독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김종국인가 가수도 있잖아요, 모기소리 내는 가수. 나는 장가보다 몸. 그 자체가 마약 같아요. 중독됐어요, 자기 몸 가꾸는 것에. 여자들도 몸 가꾼다고 몇날 며칠 굶고 닭가슴살 먹고 고구마 먹고. 그렇게 몸 가꿔놓고는 기껏 사진 몇 장 찍고 난 뒤에는 그다음 걱정거리가 도대체 이 아름답고 우아한 몸매가 며칠 만에 와르르 무너지는가, 그게 또 걱정이네요.

자기가 자기의 노예가 된 겁니다. 내 욕심에 내가 노예 된 이상은 인간에게 행복은 없습니다. 어느 집구석 어느 집안에도 행복은 없습니다. 어디에도 인간에게는 행복이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욕심 없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기 때문에.

욕심은 탐심을 낳기 때문에 탐심은 계속 더 끌어 모아야 돼요. 멈추지를 못합니다. 악마가 계속 뒤에서 채찍질하고 있어요. 더 당깁니다. 네가 그래서 만족하겠어? 늘 결핍을 느끼고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그 사마리아 여인처럼 남자 다섯 명 사귀어도 먹어도 먹어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갈증이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거기서 나오는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것은 이 결핍을 내가 못 채우면 지금보다 내가 더 불행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것으로 인해 바들바들 떨고 있어요. 왜 떱니까? 내가 망할까 싶어서.

나라는 것은 없어요. 나라는 것은 아예 없고 제대로 이야기해야죠. 육이 망해질까봐 그러는 거예요. 육은 이미 망했거든요. 악마는 뭐라고 거짓말하느냐 하면 잘하면 안 망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인간 스스로 계속 이런 덫에 빠지게 만드는 거예요. 자신의 야망으로 인해 스스로 덫에 빠지게 만들었어요.

유튜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유튜브 만들어가지고 구독자가 7명이라면 와, 세상에. 내가 이렇게 관심을 많이 받는 거야? 좋아했죠. 구독자. 그런데 ‘좋아요’가 왜 하나도 없어. 그런데 ‘좋아요’가 2명이면 아, 정말 이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야. 어떻게 생각이 같을 수가 있어. 좋아요. 나중에 구독자가 한 9명 되면 언제 마지막 하나 차서 두 자리가 되느냐. 나중에 99명 되면 언제 세 자리 되느냐.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 육에 스스로 자기가 노리개 감이 되는 겁니다. 늘 결핍을 느끼고 행복은 없는 거죠. 성립되지 않습니다. 지옥가기 전부터 이미 지옥생활을 벌써 시작한 겁니다.

5절에 보면 “이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라고 되어 있죠. 이 이야기는 어렵지 않아요. 아주 쉽습니다. 인간을 통해서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모든 인간은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이것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저주에요. 그런데 말씀이, 약속이 어떤 사람에게 오게 되면 이 사람 빼놓고 다 저주에요. 이 사람 빼놓고는. 이게 하나님의 의거든요.

그러면 말씀에 뭐가 있느냐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나오잖아요. 후손을 떼어버리면 여자 남고 뱀이 남습니다. 뱀은 여자를 상대하고 여자는 뱀을 상대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여자가 나타나야 뱀의 정체가 노출되고 뱀은 여자가 나타날까봐 늘 의식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는 이 세상에 있느냐, 없느냐?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옛 세상에는 여자가 없어요. 여성은 어디에 종속되느냐 하면 남성에 포함이 되어버려요. 여성은 없고 남성의 비-남성화라 해요. 남성과 비-남성화만 있어요. 남자와 관계없는 여성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성이 등장하려면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 들어와야 되는데 그 다른 세상이 오는 것이 바로 여성이에요. 여자의 후손이에요. 이 세상은 이미 선악과 따먹고 저주 받아요. 죄밖에 없어요. 그런데 다른 세상은 뭐가 있느냐? 이 의가 있습니다.

따라서 노아나 롯이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을 통해서 무슨 이야기가 들려지느냐 하면 이 옛 세상과 다른 새 세상이 그들을 통해서 소개되었다는 이 사실,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을 통해서 서로 대비되는 두 개의 세상을 비쳐 나타내 보이는 역할을 하나님의 성도들이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이 이 일을 해야 돼요.

이 일을 한다는 말은 우리가 일을 한다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세요. 옛 세상과 새 세상의 차이점을 분간할 수 있는 안목을 성도는 간직하고 있어야 됩니다. 옛 세상 사람은 어떤 누구도 용서치 아니하고 새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도 다 하나님의 의가 되는 그러한 결정이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제공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노아 때 홍수가 뭐냐? 분류죠, 분류. 영원히 같이 할 수 없음을 알려주는 분류. 이 분류를 율법에 보면 거룩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분류되는 사건 중 하나가 출-애굽 사건. 애굽에서 탈출함으로 말미암아 홍해를 중심으로 애굽 사람들, 군사들은 홍해에 빠져 죽죠.

애굽 사람들이 바다에 빠지는 이유가 뭡니까? 전에 이야기했는데요. 애굽 사람이 바다에 빠지는 이유는? 사람은 물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에요. 너무 간단한 문제죠. 너무 간단한 문제에요. 물인데 왜 기어들어가? 해녀도 아닌 게 왜 들어가요. 물에 들어온 본인들이 주제넘은 거예요. 어딜 감히 인간이 땅에 살지, 물에는 왜 기어들어가요. 죽는 게 마땅하죠.

그때 애굽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쟤는요?’ 손가락 가리키면서 이렇게 하겠죠. 저들은 왜 물에서 살았느냐. 하나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뭐가 물에서 살았어? 그때 바다가 갈라져서 물이 양쪽에서 스톱이 돼서 안에 길이 났어요. 전부다 박태환도 아니고 물 헤엄쳐서 건넌 게 아니고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땅을 건너갔죠. 바다 속에 길이 나 있어가지고 간 거예요.

그럼 애굽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왜 우리 건널 때는 길이 없느냐? 그건 내 마음대로다. 그건 하나님 마음대로죠. 네가 뭔데 길을 내줘야 돼? 이 길은 그들이 말씀의 증인이기 때문에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길을 열은 것이고 인간에게는 그런 게 없어요. 그냥 너희 살던 대로 살아. 용서 안 해줄 테니까 그냥 살아. 먹고 마시고 잘하잖아, 그거.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냥 살아. 살아서 지옥이나 가, 그냥. 이게 옛 세상입니다.

부러워할 거 없어요.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뿐이라고 하잖아요, 사도 바울이. 십자가가 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허락한 길이에요, 그 십자가 길이. 십자가 피가 우리를 용서했으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믿음으로 용서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 자체적인 효과를 증명하기 위해서 임상 실험용으로 우리를 자기의 택한 백성에게 찾아온 거예요. 실험 정도가 아니죠. 확실한 거죠.

십자가가 십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일방적으로 용서를 해주신 것. 피와 우리의 죄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 시스템에 우리를 집어넣은 거예요. 누구를? 노아, 롯 그리고 택한 백성들을. 그렇게 하게 하신 겁니다. 활동하신 주체는 주님 쪽이에요. 우리는 그냥 주님 하신 일에 증인으로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증거하는 용도로 그냥 채택될 뿐이에요. 주님이 하는 일의 실습용이죠, 실습용.

의과 대학이나 생물학에서 실험할 때 실험용 흰 쥐를 키우잖아요. 한 열댓 마리 중에서 누구 하나를 딱 선택해서 데려갈 때 나머지가 왜 저는 안 뽑혀갑니까? 그걸 뽑혀가는 자보고 물으면 안돼요.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돼. 왜이래? 내가 손 들어서 뽑아달라고 한 게 아니야. 교수님이 나를 그냥 뽑았어. 그게 노아에요. 그걸 택함이라고 하는 거예요, 택함. 너는 내 십자가 증거하라고 그냥 채택한 거예요. 채택당한 거예요, 그냥.

그러니까 이거는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뛰어나다든지 성질이 좋다든지 하는 것과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예수 믿었으니까 성질 좋아야 된다. 그게 바로 마귀적인 거예요. 채택된 그 자체로 종결되어버렸는데 채택된 걸로 모자라고 성격이 온화한 성격으로 바뀌어야 구원받는다는 이게 바로 악마가 발목 잡는 거예요. 무슨 할 일이 남아있는 것처럼.

6절에 봅시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여기에 음란, 무법의 기준이 뭐냐 하면 이 기준은 육의 선악기준이 아니에요. 이 기준을 인간이 아는 그 기준으로 생각해버리면 그것은 구원되지 않는 육적인 한계에 그냥 머물러 있는 거예요.

이 기준은 언약에서 나온 거예요. 음란이라든지 불법은 언약이 기준 되어서 언약이 나왔을 때 음란과 불법이라는 것이 비로소 성립되는 겁니다. 그럼 언약의 최종 주인공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3장 36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어요?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 맞죠? 얼마나 깔끔합니까? 얼마나 깔끔해요.

뭐 맛있는 빵 그거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깔끔합니다. 빵 한번 안 먹으면 어때요. 지금 그게 구원하고 관계없어요. 하나님의 일은 내가 살을 빼느냐 안 빼느냐, 뭐 관절이 아프다, 언제 병원 가느냐 안 가느냐 지금 그게 문젯거리가 되지 않아요. 그래서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여기서 행함책이 동원됩니다. 행함책은 하나님이 남긴 모든 율법과 선악체계에 의해서 처벌받게 되어 있어요. 선이라는 것은 단 하나도 없고 모조리 악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최종 기준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일이 의가 된다면 예수님이 하시지 않은 일은 뭐가 되겠습니까? 이게 악이 되고 음란이 되고 불법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있는데 ‘나는 음란하지 않았다. 나는 불법 안했다.’ 가 되어버리면 그 가치가 주님께 갑니까? 본인의 의로 되돌아옵니까? 본인의 의로 되돌아오는 거예요. 이게 선악체제의 딜레마에요, 딜레마. 악을 저지르지 아니하면 선한 자가 누구입니까? 악을 저지르지 않은 자가 선한 자가 돼요. 그러니까 자기 한계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내 잘남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자, 그게 바로 악한 천사가 하는 짓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보고 평가하지 말라, 심사하지 말라는 거예요. 나는 선악체제를 알아서 내가 심사하고 내가 심판내리고 내가 평가하겠다는 겁니다. 자기 혼자 야구하고 자기 혼자 세이프하고 자기 혼자 야구하고 자기 혼자 안타하고. 자기가 출제하고 자기가 정답이고. 이거 미친 거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미친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에요, 이 세상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를 내세우는데 보면 미쳤어. 모든 평가가 자기 정당성에서 멈추고 말았어요. 그게 최종 종착점이 되고 말았어요. 나의 의. 이게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이 자기 의에 미쳐가지고 그리스도의 의를 배격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저주받게 하는 거예요.

악마가 지배하는 옛 세상의 치명적인 약점은 모든 가치와 판단이 악마에게 또는 인간 자체적으로 거기에서 스톱이 된다는 그 점이에요. 제3의 심판자를 인간들은 용납 안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언젠가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인간이 제일 기분 나쁜 것은 누가 나에게 지적질 하는 거예요. 제일 기분 나쁜 게 지적질 하는 거예요. 부부싸움의 99.9%가 지적질 때문에 싸우죠. 네가 나한테 뭐했다고 지적질 하느냐. 너 돈 얼마 벌어온다고 나한테 지적질 해? 결국은 돈 문제가 나오죠. 너한테 시집와서 고생한 거밖에 없는데 그것도 남편이라고 나한테 지적질 하나? 이런 식으로. 반대도 마찬가지죠.

깔끔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 더 이야기할 게 뭐가 있어요? 없죠. 이 악한 마귀를 언급하는 것은...... 다시 하겠습니다. 마귀가 왜 자꾸 등장하느냐 하면 인간이 옛 세상, 새 세상이 뭔지를 전혀 감 잡지 못하고 그냥 있는 이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마와 함께 있는 옛 세상이라는 규정을 인간들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착실하게 살면 되잖아요. 앞으로 잘할게요. 잘할게요. 맨날 이런 식이에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회개하고 반성한다는 것은 자기 의를 감추기 위한 어설픈 연출이고 속임수에 불과한 거예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사실은 그 뒤에 말이 있어요. 이것만은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자꾸 뭐 앞으로는 잘할게요. 그러니까 나의 자존심과 나의 가치만큼은 좀 훼손되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거예요.

이 선악체계가 그만큼 독소요소로 우리의 뼛속까지 완전히 박혀서 이것을 못 빼냅니다. 차라리 옷을 벗으세요. 우리 옛 생활, 우리가 우리하고 헤어지세요. 바이바이. 안녕. 야곱과 에서가 쌍둥이죠. 우리는 우리와 쌍둥이 되었어요. 우리가 하나 더 생겨버리면 옛 쌍둥이는 잘 가, 인간아. 이 옛 세상에 속한 나야. 하고 좀 이제 보내주세요. 그 옛 세상에 속한 내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질책하고 벌 내리고 나무라고 꾸중하고. 너 그 따위 식으로 살아가지고 네 인생 성공하는가 보자. 너 정신 좀 안 차리나? 이런 식으로 계속 잔소리하고 있어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악마가 선악을 들먹여가면서 그런 식으로 우리를 온전케 하라고 보다 더 진전된 모습을 보이라고 계속해서 우리를 나무라고 촉구하고 있죠. 우리에게 할 일을 자꾸 만들어줄려고 하는 거예요. 끝났는데.

성령이 와야 지금 제 말을 이해합니다. 성령이 안 오면 이런 소리해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성령 받습니까?” 아이고 참내. 주시는 분은 내가 아닌데 왜 저보고 이야기해요. 성령은 선물로 그냥 주시는 분인데 그분한테 이야기해야죠, 그분한테. 그러면 그 사람이, “예수님 저에게도 성령을 주시옵소서.” 그러면 예수님께서 “너 안 받았나?” “안 받았습니다.” “안 받은 주제에 왜 나한테 달라고 해? 안 받았으면 그걸로 끝났지.” “언제쯤 옵니까?” “네가 뭔데 내가 줘야 되는데. 나의 신은 나의 성령은 육과 함께 할 수 없는 거야. 성령을 달라하는 그게 바로 육이야. 너는 선악과처럼 그냥 망하면 되지 왜 그걸 네가 너를 살리겠다고 그런 노력을 하느냐. 그게 바로 육이야. 나는 너와 함께 할 수 없다.” 이런 판정을 받죠. 물론 그런 시나리오까지는 상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음성조차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악하고 불법이고 음란하다면 성도는 뭐냐. 성도에게는 감사가 나옵니다. 감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전부다 음란이고 불법입니다. 어려운 사람 도와주면서 속으로 씩씩거리면 감사가 아니고 짜증을 내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막 기도 열심히 하는데... 또 어떤 사람은 금식하면서 일부러 인상 찡그려가면서 금식해요. 나 벌써 일주일째 굶었다는 티를 다 내는 것. 어떤 사람은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아는 식으로 구제하는 거.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서 기도 티 내는 거.

이게 뭐냐 하면 느긋함도 아니고 완료성도 아니고 그냥 아주 애를 쓰는 거예요. 막 힘 주어서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감사와 기쁨과 고마움과 느긋함이 있어줘야 되고 이 일은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 나를 덮친 것이라는 사실을 본인이 기꺼이 수용해야 돼요. 집안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일조차도 주께서 일으킨 일이라고 느긋하게 받아들여야 돼요. 옛 세상에 속한 것들은 고민과 걱정이 늘어지죠.

8절에 봅시다.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롯의 특징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게 창세기 19장에 보면 나옵니다. 창세기 19장 29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아브라함에게 준 언약을 돋보이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조카가 있는 소돔과 고모라를 불바다로 만든 거예요. 하나님은 그만한 권한이 있습니다. 자기 언약을 언약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거칠 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가 이때쯤 태어나게 하시고 살게 하시고 왜 이 지역에서 서울이면 서울, 대구면 대구에서 왜 살게 하시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하신 것처럼 주님을 생각해서 그들의 멸망하는 모습과 대비되는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아서 말씀전파의 일원으로서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9절에 보겠습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이렇게 되어있죠. 여기 4절도 그렇고요.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형벌 가운데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까지’라는 말은 그때부터 나온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형벌 속에 있고 이미 지옥 속에 있고 이미 심판 속에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에요. ~까지. 주욱- 끝까지 간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을 시간의 흐름이라 하지 않고 이걸 ‘시간의 공간화’라 하는 거예요, 시간의 공간화. 시간이 어떤 공간 속에 이미 잠식되어 있는 거예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이 공간 밖을 못 벗어나는 거예요.

지옥 안에서 시간은 흐르고 천국 안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은 이 세상의 경우에 아직까지 모든 것이 세상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미 시작된 천국과 이미 시작된 지옥 사이에서 나름대로 시간이 흘러가는 거예요. 흘러가지만 이미 속성은 지옥은 지옥까지, 천국은 천국까지라는 말로 해서 이 속성은 달라지지 않고 그 안에서 진행되는 천국의 속성, 지옥의 속성인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롯의 경우에는 이렇게 보시면 제일 쉬워요. 롯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너희들이 마음껏 하나님 없이 살고 자기 욕심과 탐욕대로 해도 너희의 끝은 지금 하는 행세를 봐서 끝까지 그 행세를 유지할 것이고 ‘끝났다, 애들아. 끝났어. 너희들의 운명은 끝난 거야.’ 이런 뜻이에요.

어떤 남자가 그냥 그림을 그린 게 아니고 문신을 새겼다고 봅시다. 몸에 문신을. 그냥 그려버리면 목욕탕에서 목욕할 때 이게 지워져버리잖아요. 그게 아니고 몸에다가 이미지를 완전히 박아 넣은 거예요, 먹물로. 그러면 그 몸 가는 곳에 문신은 자동적으로 같이 합세해서 가게 되어있죠. 이게 지옥 가는 운명이고 이게 천국 가는 운명 같은 거예요. 나에게 천국 가는 요소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것을 내 힘으로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목사님, 제가 성도입니까, 성도 아닙니까?” 일부러 한번 해보세요. 그게 뽑히는가. 십자가의 고마움이 여러분의 힘으로 뽑히거든 그건 그림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내 뜻이 아니고 문신처럼 내 몸에 아예 자리 잡고 박혀버렸으면 이 십자가 은혜가 주님의 용서가 뽑히는 게 아니에요. 성령도 마찬가지에요. 성령이 와버리면 ‘성령, 나가. 훠이 훠이.’ 나가라고 한다고 ‘알겠습니다.’ 나가면 그건 장난치는 거죠. 그런 성령은 없어요.

인간이 여기 지옥 가는 문신이 있는데 아무리 교회 가서 말씀 듣고 성령 받았다고 아무리 행세해도 결국 그 사람은 자기의 문신따라 자기 운명이 확정됩니다. 바뀌지를 않아요. 바뀔 수가 없어요, 그것은.

나쁜 짓을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깔끔하지가 않다는 거예요. 항상 뭐 예수 믿고 다 해놓고 늘 지저분해. 뭔가 깔끔해야 되는데. ‘아들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진노가 있다.’ 얼마나 깔끔합니까? ‘예수의 십자가 피로 용서받았다.’ 얼마나 깔끔해요. 뭐 군더더기가 필요합니까? 군더더기가 필요치 않잖아요.

정리가 되잖아요. 성도는 정리가 된다고요. 온갖 복잡한 일이 있지만 마지막 깔끔하게 한다는 것은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피 흘림으로 유월절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가듯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넘어간다. 이것을 여러분 힘으로 ‘아니야. 이건 낭설이야. 이건 착각이야. 그건 기독교 교리에 불과한 거야. 그건 내가 배운 거야.’ 라고 스스로 자신을 의심해보세요. 의심해서 ‘내가 미쳤지. 내가 현실을 봐야지. 내가 왜 복음에 빠져가지고... 지금이라도 발 빼자.’ 빼세요. 그게 빠질 수 있거든 그동안 지식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꾸 마귀를 통해서 흔들기를 하는 거예요. 몸에 새긴 문신이 내 힘으로 지우개로 지운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사랑은 연필로 써야 돼요. 빨리 바꿔야 되니까. 후딱 지우고. 하지만 성령은 우리가 지울 수 없도록 아주 박아놓은 거예요. 말씀이 우리보다 세니까. 옛 사람은 악마가 더 세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교회 다니고 성령 달라고 아무리 해도 마귀가 놔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게 10절에 나옵니다.

9절에 보면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까지’라는 말은 계속 간다는 뜻이에요. 그때부터 거기서 그만, 이 아니고 반대말이에요. 심판 때까지 계속 간다는 뜻이에요. 10절에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육체가 있는데 정욕이 없을 수가 없죠. 육체가 있는데. 육체만 있어요. 성령은 없어요. 영은 없고 육체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보고 뭐라고 나무랄 수가 없죠. 지옥 갈 행세를 하면서 지옥 가지 말라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육체밖에 없는데 그럼 지옥 가야지요. 어디 가는데요.

선악을 아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면 자기가 선을 행해도 악이 돼요. 왜? 감사와 고마움이 없어요. 나올 수가 없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감사와 고마움은 대상이 있어요. 내가 하지 않았는데도 이게 웬 떡입니까? 한다면 이 감사와 고마움은 누구한테 나아가느냐 하면 주님이 하신 십자가 다 이루었다, 거기에 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의 선악은 이 종착점이 누구입니까? 선을 행하고 악을 안 행하는 그걸 누가 했어요? 육신의 공로로 나의 잘남으로 결국 이게 귀속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자기 가치만 챙기고 있어요, 자기 가치만.

불신자들이 지금 이 시대에 위로받는 것이 주로 어디냐 하면 개와 고양이에요. 자기도 고양이 흉내 막 냅니다. 야옹~ 해가지고. 거기에 돈을 엄청 투자하고 하죠. 누가 나를 위로해줍니까? 여러분입니까? 누가 나를 위로해줘요? 내 공로, 내 성과의 업적과 실적은 내가 키운 개와 고양이가 가장 확실하잖아요. 내 작품이에요, 내 작품. 내가 공들인 것으로 나 스스로 내 가치를 확정짓겠다는 거예요. 나는 존재의 이유를 거기서 찾겠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잘났으니까 나는 지금 죽기 싫다는 겁니다. 더 살아야겠다는 거예요. 그게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사는 거예요.

10절 끝에 보면 결국 그 결과가 누구를 훼방한다고 했습니까?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한다고 했죠.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누구로부터 훼방당하거나 손해당하는 일은 없습니다.

11절에 봅시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은 악마가 설치는 것에 대해서 힘센 천사도 그냥 놔둬버리죠. 계획이 뭐냐 하면 끝까지 심판 가야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들에게 이게 없어요. 구원이 없어요. 구원을 안 줍니다. 그들을 구원하지 않아요. 그게 주의 뜻이에요. 구원 받지 못할 자는 구원하지 않습니다. 생명책에 이름 없는 사람한테는 그걸 악마에게 위탁해서 악마의 손에 운명을 같이 하게 하셨어요. 구원이 없는 자에요. 나밖에 모르는 자와 구원이 없는 자는 같은 말입니다.

연세 많은 부모님 교회 데려가려고 얼마나 애를 많이 썼습니까? “어머니, 이제 나이도 많은데 마지막에 천국 지옥이 있어요. 자식 소원이니 교회 한번 가주세요.” “내가 거길 왜 가는데? 내가 평생 뭐 나쁜 짓 한 거 있다고? 내가 너 잘 키운 죄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하죠. 그럼 자식 된 도리에서 그게 안타까워서 그렇게 하는데 사실은 그걸 안타까워하면 안돼요.

자기는 구원받은 것이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교회에서 애써서 간절히 기도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그건 마귀들이 하는 짓이고요. 구원받은 이유가 없어요. 결정을 내가 한 게 아니고 사전에 협의한 게 아니고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서 십자가로 용서받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유월절 피로 말미암아 넘어감으로써 일체 정죄가 없고 있는 것은 천국의 복락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내가 알았기 때문에 이것이 너무나 기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부모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부모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나한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교회 가서 열심히 기도하시면 어머니 구원받으실 수 있습니다, 가 아니라 교회 안가고 가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좋을 대로 하세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노아의 이웃집에 사는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를 알겠죠? 노아가 당대의 뭐라 했습니까? 당대의 의인이죠. 의인이 어떻게 이웃집 한 사람도 구원 못 했어요? 그래놓고도 의인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이렇게 막 달려들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노아 가정만 구원되는 것이 뜻이기 때문에 그 뜻에 노아는 충실한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하자가 없고 잘못이 없기 때문에 몇 명이 구원받든 주님한테는 퍼펙트한 겁니다. 완벽한 겁니다.

그러니까 괜히 오지랖 부려가지고 자기 좋아하는 사람만 이뻐하는 사람만 천당 보내려고 노력하지 마시고요. 그러지 마시고. 꼭 자기 싫어하는 사람은 전도 안 하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가가지고 이게 작업 거는 건지 전도하는 것인지 분간도 안 되는 그런 짓할 게 아니고 주께서 마주치게 하실 때가 있을 거예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마주치게 하시는 상황 속에서 ‘내가 아는 복음은 주께서 살아계셔서 이런 식으로 자기 백성을 일방적으로 건지십니다.’라고 함으로써 악마가 인간한테 시키는 모든 일 있잖아요. 열심히 해야 구원받고 교회 다녀야 구원받는다는 이 모든 악마의 그 거짓을 폭로시켜버리는 그 일에 여러분들이 주저하지 말고 달려드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일한 게 아니고 주께서 살아 일하심을 우리는 자주자주 잊어버립니다. 마치 내가 설치지 않으면 아무 일이 안 되는 것처럼 자주자주 오해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는 육신에 속한 마귀의 일이고 마귀의 유혹인 것을 깨달았사오니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세상에 나설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220414b 베드로후서2장 4절(회수되는 자기 의)-이 근호 목사.hwp (99.0K), Dow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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