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22-04-18 18:00:17 조회 : 65         
강남-누가복음 10장 36절 (텅빈 형식) 220405b-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10장 36절 (텅빈 형식) 220405b-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를 못 지킬까봐. 제대로 사람답게 못 지킬까봐. 내가 나한테 무서워하니까 나한테 주어지는 모든 사람이 벌레같이 느껴지고 두려움에 속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인생이라는 게 인공물이 아닌데 하늘의 원리를 적용해야지요. 하늘의 원리를 적용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뜻인데 오늘 10장 24절 말씀처럼 우리는 하늘의 원리를 몰라요. 임금도 모르고 선지자도 몰라요. 10장 23절에 보면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아 너희들 땡 잡았다 이 말이죠.


그러면 어떤 비밀을 알려주시면 비밀을 제가 채택하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나오지 말라 이 말이죠. 채택을 할 수 없어요. 왜냐 하면은 일방적으로 채워주시기 때문에 채택이라는 게 없습니다. 자, 하늘의 원리가 뭐냐? 이제 하늘의 원리를 확실히 말씀드릴게요. 뽑아버리는 거에요.


이빨 뽑듯이 뽑아버립니다. 뽑아버리고 뽑힌 자리에만 거기에 주의 일이 담기게 되어있어요. 뽑혀나갈 때 땡 잡은 거에요. 내가 내 자리에서 뽑혀나갈 때. 썩은 이빨이라고 간주되고 뽑혀나갈 때. 그러면 뽑힌 자리가 있을 거 아니에요. 빈자리에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거에요.


그런데 25절에 율법교사는 뽑힐 생각이 아니고 자기를 단단히 고정적으로 단단히 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뽑힐 생각을 안 합니다. 마태복음 15장 13절에 이런 말씀 있어요.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심는 것 마다 아버지께서 심지 아니한 것은 다 뽑힌다 했어요.


그럼 다 뽑히는 거에요. 하늘의 원리를 심은 게 없어요. 그거는 예수님 밖에 없어요. 다 뽑혀요. 일단 뽑자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일단. 일단 뽑는 거에요. 그러니까 강도 만난 사람은 다 뽑힌 거에요 그냥. 텅 빈 형식이에요.


성도라는 사람은 주변의 위로 같은 게 필요치 않습니다. 성도의 입장은 어떤 입장이냐 하면은 이런 입장이에요. 충분히 너무 깊이 아파서 안 안아주어도 되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너무 아파서. 너무 깊이. 너무 깊이 아파가지고 이제는 누가 다른 인간이 와서 날 안 안아줘도 상관없어요. 나는 충분히 아파야 될 사람이기 때문에.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어떤 아가씨가 있는데 아가씨가 자기가 상처를 입고 가정 환경이 안 좋고 아버지가 도박하고 어떻고 가정 파탄이고 불우한 환경이다 칩시다. 그럴 때 그 아가씨가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친구를 만났을 경우에는 은근히 기대를 하지요. 내가 망쳐버린 나의 과거 인생 저 남자가 내 인생을 어두운 인생을 만회할 수 있고 보상해주면 좋겠다. 기대를 하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기대하는 순간 그 남자는 떠나버리고 제1의 남자도 떠나고 제2의 남자도 다 떠나버리는 거에요. 그럴 때 그 여자가 아는 거에요. 나는 너무나 깊이 아파서 이제는 날 안 안아줘도 위로 안 해줘도 좋아요. 이 정도 될 때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인생을 다시 만회할 가치도 없음을 본인이 인정하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비어도 너무 텅텅 비어있는 형식만 남아있는 자여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뽑아주시는 하나님의 원리이기 때문에 그래요.


처음에는 날 버리고 간 남자 전부 다 죽어라 뭐 가평 계곡에 떨어져서 죽어라 이렇게 원망하고 저주를 퍼붓지만 자기 진짜 자기 자신을 알게 되면 이제는 어떤 사람도 나를 위로해줄려고 가까이 안 와도 저는 상관없어요.


왜? 나는 이미 너무 깊이 너무 아프기 때문에 그렇다. 너무 깊이 아프기 때문에.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아팠으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에 대한 기대한다는 자체가 나한테 내가 잘 될 것이라는 그 자체 조차도 욕심, 탐욕에 불과한 것을 아는 경우에는 몽땅 나의 것이라는 그 자리가 몽땅 다 뽑혔을 거에요.


우리 손녀가 어제 치과에 가가지고 이빨 하나 뽑았어요. 뽑고 난 뒤에 자꾸 침이 나오는 거 같애 할아버지 이러는데 비었으니까 뭐라도 나와야지 뭐. 뽑힌 자리에 이빨이 없어요. 충분히 깊이 뽑혔어요. 다 뽑혔어요. 더는 나의 How many가 되지 않아요. 나라는 개체 자체가 자리만 남기고 아무것도 없어요. 형식만 남기고 가버렸어요. 나라는 것이 빠이빠이 하고 없어졌어요.


그거 뽑아주시는 주님이 그 빈자리에 하늘의 것을 곧 예수님 자신의 것으로 거기에다가 심으시는 겁니다. 그 방법이 인공적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만든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제조하시고 생산해내시는 거에요. 뽑고 하늘의 것으로 채우고. 참 쉽지요. 코로나 걸려서 죽고 부활로 다시 태어나고. 참 쉽죠 잉.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에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강도 만난 사마리아인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요한복음 2장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가나안 혼인잔치에 갔는데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은 물이 포도주로 변했어요. 물이.


주님께서 포도주를 갖다 주라고 하지 않고 여섯 개의 항아리에 포도주로 채워서 포도주를 갖다 준 게 아니고 물을 채워서 포도주로 갖다 줍니다. 그냥 주는 거에요. 물을 채워서. 그러면 물어봅니다. 처음에 물 채운 항아리가 물 들었습니까? 포도주 들었습니까? 답변해보세요.


물이죠. 이동할 때 1.5m 이동했습니다. 자, 물입니까? 포도주입니까? 뭐 서서히 포도주 된 거에요? 포도주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이 뭐 그런 겁니까? 아니죠. 물이죠. 3m 갔습니다. 물입니까? 포도주입니까? 역시 물이죠. 자, 거기에 잔치집에 도착했습니다. 물입니까 포도주입니까?


이 세상에서는 주께서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뽑아낼 게 아무것도 없어요. 다 무의미하고 더러운 거에요. 구약 내내 율법을 주신 이유가 더럽고 더럽고 더럽고 더러워서 율법을 더럽다는 것을 티내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거에요. 율법을 준 것은 어느 것 하나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거에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율법을 주었다는 그 자체, 더럽다고 지적하는 그 자체가 바로 거룩이에요. 주님께서 너보고 더럽다! 할 때 거룩이 도착한 걸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너 죽어!” 하면 그게 뭐다? “너는 살았어!” 라는 뜻이에요 이게. 왜?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그래요. “너 죄인이야” 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의인”이에요. 참 쉽죠.


너는 더러워서 뽑아낼 거야 하는 순간 그 사람은 주님의 것으로 채워지는 자리가 텅 빈 형식이 확보된 거에요. 이 말은 뭐냐? 주의 명령 자체가 말씀 자체가 이게 포도주가 되는 거에요. 갖다 주어라 자체가 포도주가 되는 거에요. 물을 떠서 갖다 주어라. 그들이 마시는 순간 그들이 뭐가 되느냐? 포도주가 된 겁니다.


그 비슷한 이야기가 오병이어도 마찬가지에요. 도시락에 물고기가 몇 마리였죠? 두 마리. 보리떡이 몇 개였죠? 다섯 개. 그러면 이걸 가지고 축사 하시고 사람들에게 떼어주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몇 개 있습니까? 역시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죠.


이건 뭐냐 하면은 십자가 안에서 무한의 택한 백성에게는 무한의 죄 사함의 그 효과가 계속 나오는 거에요. 인간 치고 죄 안 짓는 사람 없어요.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넘칩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거에요.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 가지고 미리 혼자서 주님께서 기도해가지고 물고기 이만큼 해서 떡 이만큼 해서 그래서 나눠주는 게 아니고 나눠줬다는 그 행위 자체에서 무한의 요소가 전달돼야 그 떡을 먹는 사람이 떡을 먹고 고기를 먹는 게 아니고 주님의 무한함이 주님의 능력을 그들이 먹고 고기를 먹는 거에요.


내 살과 내 피도 마찬가지에요. 천주교에서 그거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살과 피가 나타나는 경우는 뭐냐 하면은 주께서 뽑아내고 내 것이라는 것은 모조리 매일같이 내 것이라고 모아놓는 것은 뽑아내는 거에요. 매일같이 네 영혼 데려간다. 네 영혼 데려간다를 액자로 만드세요. 집에 붙여놓으세요.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간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그런 것 좀 붙이지 말고.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그런 것 붙이지 말고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간다’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간다 좀 필체 좋은 명필가한테 해서 액자 하나 딱 만들어 붙이세요. 붙이고 그 밑에다 뭘 하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10장 24절을 달아놓는 거에요.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사람들이 교회 갈 때 능력 받을려고 가잖아요. 그렇지요? 능력을 받을려고 하면 안 되고 뽑힐려고 가야돼요. 왜냐 하면은 자기가 아프고 자기가 겁나서 자기가 자기 이빨 못 뽑아요.


주여 내 가치 있는 나의 가치를 뭐로 만들어 달라? 요한복음 2장에서는 나를 물로 여기게 하옵소서. 물로 여기게 하옵소서. 사람들은 그 잔치집에 포도주가 없다고 마리아도 그랬어요.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주님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나의 존재감이 떨어진 거에요. 예수님의 존재감의 효과가 떨어진 걸로 보는 거에요.


예수님 빠지고 인간들끼리만 있는 거에요. 즐기고 있는 거에요. 아직 주님의 때가 되지 않았다 해서 그 포도주가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바뀌지만 물에서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로 바뀌지요. 나중에 요한복음 마지막에 피로 바뀌지요. 나중에 요한복음 마지막에는 피로 바뀌어요. 다시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내가 하늘나라 올 때까지는 이제는 먹지 않아도 된다 그런 말씀 나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가 나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율법사의 경우를 봅시다. 율법사가 지금 주님하고 노닥거리고 있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율법사의 이야기는 뭐냐? 예수님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내가 잘 되있는 내가 더 잘 되어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이야기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마태복음 19장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왔던 이유를 알지요. 온 이유가 무슨 이유 때문에 왔습니까? 영생 얻으러 왔잖아요. 예수님이 영생 주는 카페입니까. 뭐 카페베네에요 뭐에요. 인간은 영생을 얻으러왔을 때 예수님 보기에 얼마나 기가 차겠어요. 저 주제 파악도 안 되는 인간. 저걸 뭐로 물 먹이지?


물론 부자청년은 물 먹었지요. 그야말로. 모든 걸 팔고 안 되는 건 알아요. 그래야 생명책에 How much에 포함이 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지금 이 율법사가 영생 얻었다는 것은 이거는 본인의 영생을 의미하는 겁니까? 남한테 나눠줄라고 하는 거에요? 무슨 뜻이에요?


일단 자기 거는 챙기겠다 이 말이죠. 율법사가 자기 영생을 챙기겠다는 말은 곧 자기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는 거에요. 영생 없는 나는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 나 영생 없이 사는 것은 내가 싫어. 내가 싫어. 나는 그런 인생 같으면 내가 아주 자살할거야. 이런 때가 오는 거에요.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가는 이유가 뭡니까? 뽑히러 가는 거에요? 이빨 뽑듯이 뽑아주세요 하는 거에요? 아니면 영생 얻으러 가는 겁니까? 일종의 그것도 노동이니까 영생 얻겠지요. 예수님께서 그 뒤에 사마리아 사람을 끄집어낸 이유는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방향이 다르다. 내가 가는 곳과 같이 있더라도 같은 한 자리에 같이 있더라도 주님께 관심 있는 것과 한쪽은 자기한테 관심 있는 사람, 같은 장소에 점유해 있어도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결국은 점점 더 멀어져가는 거에요. 점점 더 멀어져요 방향이. 한쪽 지옥 가는 방향은 뭐냐 하면은 자기를 뽑아낼 생각이 전혀 없어요.


쉽게 말해서 내가 강도 만난 사람 되기 싫어요. 강도 만난 사람도 되기 싫고 강도 만난 사람 도와주기도 싫고. 그런 사람이 오늘 몇 사람 나왔어요?? 두 사람 나오지요. 한 사람 누굽니까? ‘제사장’. 또 한사람은? ‘레위인’.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을 딱 한사람으로 지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아닌 사람을 같이 거론하는 것은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방향이. 그래서 제가 예루살렘에서 위로 간다는 것을 약간 거론하는 이유가 그들의 직업이 예루살렘에서 활동해야 존재감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볼 일 다보고 여리고로 놀러가는 사람 같으면 한가하잖아요. 자기 볼 일 다 봤으니까. 그러니까 바쁘게 그 현장을 피해야 할 이유는 없지요. 아 지금 바빠 죽겠다. 놀러 가는데 뭐가 바빠. 지금 자기 본업이 있기 때문에 바쁜 거에요. 본업 때문에. 무슨 일 하는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거에요. 제사장이 자기를 위해 일합니까? 그 제사장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강의하러 오는데 오다가 강도 만난 사람 그만 죽게 된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 옆에 예수님이 팔짱을 끼고 지켜봅니다. 너 어떻게 처신하는지 한번 보자. 그러면 어떻게 처신합니까? 강도 만난 사람한테 가가지고 모가지 밟아가지고 제대로 죽게. 죽이고 난 뒤에 강의하러 오지요.


왜? 죄인이니까. 뽑혀야 될 죄인이니까. 주께서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나게 하는 이유는 어떤 위인도, 아니 강도 만난 사람을 구원해줘도, 구출해도, 여비주고 병원에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시켜도 그 인간은 그렇게 착한 일 해도 중요한 것은 인간 자체가 내가 간직해서는 안 되는 인간으로 달라진다는 것은 어떤 인간도 그런 인간이 없다는 거에요. 어떤 인간도 없어요.


자꾸 그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이 눈에 밟힐 때는 차가 와서 어떤 사람이 치었으면 빠꾸해서 온전하게 죽이고 그래야 완전히 죽어야 나중에 장례만 치르면 되잖아요. 반만 죽으면 할 일이 많아요. 제대로 밟고 룰루랄라 강의하러 오는 겁니다. 욕하지 마세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병원에 급한 환자가 들어왔어요. 배에 칼이 찔려서 피를 흘리면서 응급실에 들어왔습니다. 병원에서 의사들이 하나 안 되서 두 명 와가지고 거의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의사들이 자존심이 있지 이 죽은 자를 열심히 간호하고 혈액 채우고 간호사 동원해서 수술해가지고 드디어 수술 성공해가지고 나중에 보니까 심장박동이 돌아오면서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의사들이 어떻게 됩니까? 환호성을 지르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러겠지요. 그런데 그 환자가 누구냐 하면은 극악무도한 살인자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생명의 모순입니다. 이 사람이 살아있으면요 사람들이 10명 죽어요. 지금까지 10명 죽여 왔고.


의사는 이 사람의 생명을 살렸다고 의료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고귀함을 가지지만 다른 사람 보기에는 생명을 살린 게 아니고 죽어가는 살인 의지를 되살려놨어요. 이 심술궂음과 이 포악한 마음을 살린 거에요. 우리나라의 역사에 연산군 있지요. 연산군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 죽였습니까. 그런데 연산군이 방금 응급실에 들어왔다고 칩시다.


의사로서의 도덕 윤리적 도리 때문에 살려놓으면 그 연산군은 뭐부터 하는 줄 알아요? 자기 살려준 의사부터 죽여버려요. 그런 폭군들이 이 인류사에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자기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 이런 것은요 권력과 권세 앞에 악신 앞에 악마 앞에서 그런 것은 기대한다는 것은 사치에요.


가정에서도 평생 동안 마누라 때리고 술 먹고 도박질하고 바람피우고 이런 인간 남편, 그 남편이 술을 너무 먹고 얻어맞아서 죽어갈 때에 아내가 신고 받고 가가지고 남편을 위해서 있는 돈 없는 돈 다해서 수술해놓으면 술 깨고 난 뒤에 그 남편이 아내한테 고맙다 할까요 행패 또 부릴까요? 어떻습니까?


인간의 고유의 성격은 과거에서 수집된 거에요. 과거에서. 의식이 있고 의식 배후에는 무의식이 있고요 이 무의식은 그 인간이 어릴 때부터 자라온 가정, 그 부모 거기서 만든 집단 무의식에서 무의식이 생기고 이 무의식에서 의식이 생긴다. 이것을 칼 구스타프 융이라는 분석심리학자, 프로이드보다 나이가 19살인가 적은 그런 사람이에요. 프로이드의 제자면서 나중에 프로이드 정신 분석하고 이렇게 결별, 헤어졌는데 이론이 안 맞아서.


그 사람의 이론에 의하면 프로이드가 이야기한 개인적 의식이 아니고 집단 무의식, 일류의 모든 역사를 통해서 같은 아담 같은 DNA 공통적인 무의식을 갖고 있다고 보는 거에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요 의식 다음에 무의식이 아니에요. 의식 다음에 전의식이 있고 전의식 뭐냐 하면은 과거에요. 과거.


그 다음에 무의식이 있는데 무의식에 있는 그 욕망이 전의식에서 와서 이게 꿈이 되는 거에요. 꿈은 무의식의 영향을 받아서 조작된 게 꿈이에요. 그걸 또 다시 해석한 게 이게 언어고. 그러니까 프로이드는 인간의 깊은 그 내면의 의식은 인간의 언어적 해상도가 낮아요. 무의식의 해상도보다 언어적 해상도가 낮기 때문에 언어로 다 표현을 못해요. 아이고 답답해라 이런 식이에요.


그럼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떤 사람을 살려냈다. 살려냈다는 것은 숨이 끊어졌다 안 끊어졌다 그뿐이지 그 사람을 개과천선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 말입니다. 그 사람이 정신 차려서 새 사람이 됐다 그거는 소설이고요. 어떻게 집단 무의식을 한번 병원 갔다 왔다고 이게 달라집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집단 무의식인데.


집단이라는 것은 개개인이 설정한 거 아니에요. 영향을 받은 거에요. 자기 집안에서, 자기 주변 친구에서. 북한의 아줌마들 김정은 보고 뭐라고 합니까? 욕합니까? 눈물 흘리면서 감격하고 있어요. 감격하잖아요. 전 세계가 다 욕하고 있는 푸틴은 국민의 80%가 푸틴을 지지한다는, 물론 그거는 언론이 조작한 거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거고요. 하지만 84%가 지지한데요. 우크라이나 죽던 말던.


이게 조직의 힘입니다. 조직은 내가 거기서 출생한 걸 의미하는 거에요. 애가 둘이라고 치고 둘이 집에서 막 싸운다. 형하고 동생하고 싸운다. 바깥에 나가서까지 싸울까요? 둘이 단짝이에요. 둘이 단짝입니다. 왜? 집단 무의식. 자매도 마찬가지고요. 그렇게 싸우다가 바깥에 나가서 누구 하나 욕 얻어먹으면 누가 도와줘요? 같은 일가친척이 다 도와줘요.


그래서 제가 지난 낮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에게 지옥불이 지옥 형벌이 기다린다 라고 할 때에 사실은 모든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가 살아가는 그 행태, 생활 태도 같으면 그 말 듣고 가만 있으면 안돼요.


사력을 다하여 그 사도 바울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전력을 다하여 반박을 해야 돼요. 지가 평소에 하는 행세가 그래요. 왜? 복음은 뒷전이고 우리 집단 우리끼리 복음 빼고 이야기합시다 이게 평소에 인생이 평화롭게 내 인생 편하게 사는 하나의 요령이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눈치 없이 그냥 질러버리죠. 아버지, 엄마, 자식, 조카, 아들, 딸 다 필요 없어.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는 뭐가 된다? 지옥 간다. 그 말을 못해. 왜 말을 못하느냐 다그치는 거에요. 그 말 듣고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있다면 예 예 하겠어요? 누굴 공격하겠어요? 사도 바울 공격하겠지요.


이게 뭐냐? 방향이 달라서 그런 거에요. 방향이. 평소에 얼마나 착실하냐 그걸 묻는 게 아니고요 바라보는 방향이 반대 방향이라 그래요. 그럼 사도 바울은 어떻게 알았어요? 집단 무의식입니까?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하는 것이 집단 무의식이에요? 의식이에요? 무의식 됐습니까?


그래서 심리학이라든지 정신분석학이 엉터리인 거에요. 사도 바울이 그걸 알게 된 것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자기가 아라비아에서 4년 동안 누구한테 배웠어요? 예수님한테 배웠잖아요. 그래서 내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에게 배운 게 아니고 선배에게 배운 게 아니고 직접 누구한테?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받았기 때문에 나는 사도다. 됐냐?! 심지어 내가 전한 복음에 우리라 할지라도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이걸 우리 집단, 우리 가족이라는 집단을 욕하는 이웃집 불교 신자한테는 퍼부을 수 있어도 이걸 우리 집안 식구 심지어 손자 손녀에게 이걸 퍼부을 수 있습니까? 퍼붓기 힘들지요.


왜? 우리 이빨이 안 뽑히니까. 내 자신이 안 뽑혔으니까 결국 궁극적으로 가장 소중하고 귀하게 지킬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에요. ‘self’죠. 내가 나를 지키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거에요. 심지어 복음까지 동원하면서. 그 방향이 어느 쪽입니까? 주님 쪽이에요? 나를 뽑아주는 주님 쪽입니까? 지킬려고 하는 내 쪽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그냥 물로 사세요. 그냥 평생 물로 사세요 포도주 되지 말고. 물로 사세요. 그냥. 주님 안 오면 물 돼요. 김물, 최물, 박물. 주님께서 포도주 없다는데 물 주신 이유를 알겠지요? 나 아니면 없다. 그러면 그때 사람들은 뭡니까? 누가 포도주 줬어?!


한번 보세요. 누가 이 맛있는 포도주를 마지막 때 내어놓았느냐. 누가 포도주를 주었느냐. 지금 이 질문은요 잘못된 질문이에요. 이 질문은. 잘못된 의문이라고요. 누가 포도주를 주었느냐가 아니라 주님은 어느 쪽으로 가십니까 이렇게 돼야 돼요.


물이 포도주 됐잖아요. 물이 포도주 됐다 이 말이죠. 포도주 다음에 포도주가 끝이었습니까? 포도주 먹은 사람은 천당 갑니까? 아니지요. 포도주 다음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피로 가야죠. 피. 십자가 피로 가야지요.


교회들마다 전부 다 기적 받은 사람은 왜 그리 많은지. 병 고치는 기적, 뭐 돈 버는 기적, 땅 값 올리는 기적, 예배당 짓는 기적 말고 그거는 물이 포도주도 아니고 물이에요. 물. 기적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뽑힌 그 자리에 피가 고여 있다. 주의 찢기신 살이 고였다는 이것만이 나의 뿌리요 나의 바탕이고 근본이 되는 거에요.


이게 바로 생명책에 합세된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어요. 다른 복음은 있을 수가 없어요. 사도 바울이 너무 심한 말을 한 거 같애. 사도 바울은 세상살이 안 했나? 이런 식으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직접 받은 거에요.


그럼 이 사도 바울의 말에 대해서 흔쾌히 기쁘게 동의 안 된다는 말은 결국은 우리가 사는 방향이 예수님 계신 곳이 아니고 반대쪽으로 가는 거에요. 반대로 가면서 예수님 찬양 이러고 있다고요. 방향은 반대로 가면서 찬양하고 있다고요. 코메디도 이런 코메디가 없어요. 그래서 요새 개콘이 안되는가. 이게 무슨 코메디에요. 예수님 없는 곳에 왜 예수님 찬양을 합니까.


36절 봅시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렇게 했지요. 여기 36절에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했지요.


그러면 이 사람이 이 율법사가 진짜 예수님 말씀대로 이웃이 될려면 “나는 이웃입니다” 하면 안 되고 “내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입니다” 이렇게 해야 된다고요. 그러면 강도 만난 자를, 있는 쪽으로 자기가 방향을 그쪽으로 틀어야 돼요. 강도 만난 자 .


그럼 강도 만난 자는 누굴 만난 자에요? 1번 강도를 만났다. 2번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을 만났다. 몇 번입니까? 일단은 강도 만난 자가 될려면 강도를 만나야지요. 그리고 그만 죽게 되었잖아요. 이분이 바로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 계신 곳을 봐야 돼요. 그리고 이웃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강도 만난 자도 아니면서 본인 자신이 강도 만난 자와 일체화시켰잖아요.


자, 다시 이야기합니다. 강도 만난 자는 모든 걸 빼앗긴 자에요. 뽑힌 자 입니다. 이 질문으로 오늘 강의의 핵심은 저는 다 되었다고 봐요. 이 질문 하나로. 질문이 뭐냐? 강도 만난 자는 둘 중에 하나에요. 움직이는 자입니까?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자입니까? 몇 번입니까?


강도 만난 자. 강도 만난 자가 손가락 이렇게 까딱까딱 합니까? 움직이지 못하지요. 이게 바로 성도 아닙니까. 성도. 다 뽑힌 자에요. 뭐 헌금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왜 그리 바쁜지. 움직임이 없어요. 그냥 죽었으니까. 결국 그러면 기도는 뭡니까? 죽었다는 것을 티낸다고 기도하는 거죠.


아까 낮에 기차 타고 오는데 전화가 왔어요. 어떤 분이 전화 왔는데 목사님 제가 기도할 때 마다 나 살려달라는 기도를 자꾸 하고 욕심적인 기도를 많이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제 답변은 간단하지요. 그러니까 그 기도를 하셔야지요.


왜? 이러한 나를 살려 달라 나를 지켜 달라 나는 마음이 편안하게 해달라 라는 그 기도하는 행위가 그게 움직이지 못하는 행위를 대변해주고 있거든요. 왜? 무의미한 행위이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 그걸 움직였다고 할 수 없는 움직임이거든. 죽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움직임이기 때문에 기도를 해야지요.


그리고 기도를 하고 그 기도가 잘못됐다는 그거는 주님께 맡겨야 될게 아닙니까. 이런 기도는 안해야지. 그럼 그 기도 죽은 자 티는 무슨 수로 냅니까. 엉터리 같은 기도든 뭐든 해야 자기가 죽은 자 티가 날 거 아니겠습니까. 뭐 가만있다고 점잖 빼는 그거는 죽은 자 아니에요? 어디서 꼼수를. 그건 꼼수에요 꼼수.


제가 낮 설교 때 마지막에 했잖아요. 즐겁게 살라고. 포도주는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요. 포도주 마셔가면서 즐겁게 아내와 함께 즐겨라. 전도서에서 하는 이야기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어차피 헛되잖아. 무의미하잖아 너. 뭘 해도 무의미하니까 가만히 있다고 무의미한 게 아니고 설쳐대면 설쳐댈수록 그 설쳐대는 것이 의미 없는 것이다 이 말이죠.


이미 주님 쪽에 가버리면 주님은 우리를 뽑는 사람이잖아요. 이미 뽑아야 그 자리에 주님의 효과가 주어지니까요. 오천 명이 모였지요. 예수님 설교 들으러 오천 명이 모였는데 그들이 점심 가져왔습니까? 없지요. 자기 먹을 거 자기가 가져왔습니까? 없지요.


그야말로 다 뽑힌 거에요. 점심 전에 주께서 돌려보낸 게 아니에요. 점심 때가 되도록 자기가 전혀 지금 아무도 식사할 것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계속 설교를 해버린 거에요. 우리에게 먹을 것을 줄 자는 우리 중에는 아무도 없음을 분명히 하는 거에요.


그 방향은 어느 쪽이냐? 방향은 주님만 쳐다보는 거죠. 그 자세가 오늘날 성도의 삶 아닙니까. 방향은 주님 바라보는 거에요. 어떤 채? 아무것도 못하는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한 상태에서.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한 상태니까 이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하는 상태가 뭐냐 하면은 되게 바빠요. 무척 바쁩니다. 쓸데없는 일이지만.


하지만 성도는 알지요. 이게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이걸 기껏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이거 한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님을 아주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쓸데없는 짓을 즐기는 거에요. 자전거 타고 돌아댕기고.


그러니까 다치고 그러고 난 뒤에 일이 잘 평화롭게 돈 문제 해결 다 되고 맘속으로 기도했는지 안했는지 모르겠지만 기도 나올 수밖에 없겠지요. 주여 살려달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주께서는 또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너는 뽑혀야 돼. 그러니까 너는 뽑혀야 된다고.


자, 38절 보겠습니다. 38절 아까 언급 약간 했는데 여기 마르다, 마리아가 나오는데 두 자매가 나오는 게 아니고 두 방향성이 서로 대비가 되는 두 자매가 나와요. 방향성이. 한쪽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요. 주님께서 내 음식 솜씨에 대해서 얼마나 만족하시고 감탄할 것인가. 줄곧 자신의 솜씨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솜씨는 뽑히는 대상이라고 보지 않고 이거는 장려돼야 될 이어줘야 될 어떤 재주 같은 걸로 생각하는 거죠. 마르다는. 그런데 마리아는 이런 경우를 가지고 싸가지 없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지 없는 거에요. 싸가지 없는 거에요. 언니가 얼마나 고생하는걸 모르고 동생은 마리아는 예수님 주님 발 앞에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부엌일 도와주지도 않아요.


원래 맏딸은 일하게 되어있고요 원래 그 맏딸 밑에 딸린 동생은 언니가 음식하면 부엌에 가서 낼름 낼름 먼저 먹기 바빠요. 원래 동생은 그렇게 크는 법이에요. 언니는 마땅히 해줘야 되고 동생은 마땅히 받는 것이 마땅하니이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아버지가 동생 보고 언니는 고생했으니까 유산 손 대지 말고 언니 다줘라 하면 나중에 여동생은 아버지 죽고 난 뒤에는 재판 걸어가지고 몽땅 다 가져오지요. 원래 언니는 엄마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당연한 걸로 생각하는 거에요. 언니가 고생했다는 생각은 거의 안합니다. 물론 말썽쟁이 언니가 있는 그런 경우도 있고요. 일반화하지 마세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서로 대비가 되고 방향이 서로 다르다 이 말이죠. 예수님의 답변을 우리가 보기 전에요 객관적 입장에서 우리 인간적으로 봅시다. 우리 인간적으로 따져가지고 마르다 마리아 둘 중에 누가 제대로 주님을 대접하느냐? 누가 대접해요 제대로?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동생이 대접해요? 언니가 대접합니까? 언니가 대접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 어긋나느냐 하면은 사도행전 17장 한번 봅시다. 17장 25절 “또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그 다음에 뭡니까? “친히”,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북한의 김정은한테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세요. ‘친히 주시는 자’에요.


다시 오늘 본문 봅시다. 예수님은 지금 받으시는 분이 아니고 주시는 방향이에요. 만약에 마르다가 음식을 내서 예수님께 줘버리면 마르다 방향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 돼요. 그러면 예수님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안 드러나 버려요. 차라리 텅 빈 형식과 같은 마리아는 아무것도 안 하는데 누가 뭘 줍니까?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뭘 줘요? 말씀을 주잖아요.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그게 옳다는 거에요. 42절에. “여러 가지 해도 다 되지만 한 가지만 하라면 마리아 하는 편이 옳다” 왜? 마리아는 주님의 방향과 동일한 방향이기 때문에. 주님의 주 되심의 본성을 잘 들추어내는 방향. 주여 염치없지만 주시옵소서.


그럼 주님께서 시험하기 위해서 네 것 나한테 주지? 그러면 마리아가 뭐라고 하겠어요? 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뽑혔는데. 저 텅 빈 형식이에요. 아무것도 없는데 뭘 줍니까. 주님께서 채워야지요. 절 주님께서 뽑았잖아요. 확 뽑았잖아요. 뽑았으니까 이빨은 날라가 버리고 뭐만 남았어요? 자리만 남아있죠. 그 자리가 무슨 자리냐? 죽음의 자리죠.


그래서 생명책의 연대는 A,B,C,D,E 이 모든 인간의 개별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이에 연결시키는 밧줄과 같은 뭐냐? 죽음, 예수님의 죽음이 생명책의 생명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 곧 자신의 생명을 자기 백성에게 밧줄로 사용하라고 주신 그 죽음이에요.


왜?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도 생명에 대해서 아는 바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거에요. 자기의 갖고 있는 생명을 죽음이라는 형식으로 줬다면 성도와 성도 사이는 죽음이라는 그 이름을, 생명이라는 이름의 그 죽음을 서로가 A,B,C,D,E 서로가 걸쳐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한 덩어리의 생명책 집단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그것이 우리가 드리는 충성과 봉사보다 월등하고 족히 비교되지 않는 다른 방향성에서 주어진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주님이 주시는 것만 크게 보이는 그 방향으로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강남-누가복음 10장 36절 (텅빈 형식) 220405b-이근호 목사.hwp (157.5K), Down:6
게시물9,725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10140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8강) 로마서3:21(하나님의 사… 한윤범 22-06-01 64
10139   대전-신명기(1강) 신1:38(비워있는 바닥) 20220530a 한윤범 22-06-01 60
10138   대전-질문 하나 20220530 한윤범 22-06-01 39
10137   광주강의20220527b 누가복음12장 2절(사라질 성전)-이… 이하림 22-05-31 44
10136   광주강의20220527a 누가복음12장 2절(사라질 성전)-이… 이하림 22-05-31 60
10135   12강-데살로니가후서 2장 15-17절(함께 가자)220529 -… 오용익 22-05-29 70
10134   1강-예레미야 1장 1~3절(주께만 범죄)220529 이근호 … 송민선 22-05-29 49
10133   주일학교 설교 / 영의 번식 / 220529 정인순 22-05-29 43
10132   대전강의 안내 김성은 22-05-26 51
10131   20강-미가 6장 1-5절(논쟁의 끝)220525-이 근호 목사 오용익 22-05-26 61
10130   광주 강의 안내 김을수 22-05-25 54
10129   393강-YouTube강의(있음과 없음 시편 74:7)20220524-… 이하림 22-05-25 63
10128   392강-YouTube강의(거짓말 요한계시록 22:15)20220524… 이하림 22-05-25 57
10127   강남-누가복음 11장 22절 (육의 해석) 220510b-이근호… 홍민희 22-05-23 60
10126   강남-누가복음 11장 22절 (육의 해석) 220510a-이근호… 홍민희 22-05-23 56
10125   주일설교220522 빈 공간(데살로니가후서 2:13-14)(자… 포항십자가… 22-05-23 53
10124   22년 5월 22일 복의 전후(욥기 42장 10-17절)자막설교 포항십자가… 22-05-22 60
10123   11강-데살로니가후서 2장 13-14절(빈공간)220522 - 이… 오용익 22-05-22 63
10122   136강-욥기 42장 10~17절(복의 전후)220522 이근호 목… 송민선 22-05-22 49
10121   주일학교 설교 / 사도의 세상 / 220522 정인순 22-05-22 41
맨처음 이전 [1] [2] [3] [4] [5] [6] [7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