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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2 18:17:05 조회 : 76         
136강-욥기 42장 10~17절(복의 전후)220522 이근호 목사 이름 : 송민선(IP:125.139.131.147)
136강-욥기 42장 10~17절(복의 전후)22052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42장 10~17절입니다. 구약성경 801페이지입니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그후에 욥이 일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욥이 후에 140년을 더 살게 되었던 그 140년의 삶이 장차 오실 메시아의 삶, 예수님 안에 포함되어있는 예수님 하실 일의 내용으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을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에 있어서 전과 후가 있는데 욥의 전을 욥 A 라고 하고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욥을 욥 B 라고 보면 그 가운데에 하나님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역기 드는 것과 비슷한데요, 예수님이 오셔서 역기를 확 들어버리면 양쪽에 바벨이라는 쇳덩어리가 달려있잖아요. 전과 후가 있다면 우리 개인적으로는 전은 구원받기 전의 모습이라면 전은 사라지고 후에는 성도가 되는 거예요. 우리 개인적 입장에서는 전은 사라지고 죽고, 후만 남아있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의 역기 입장에서는 둘 다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 구원을 위해서 주께서 오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시냐를 드러내기 위해서 오셨던 겁니다. 우리 인생은 내가 생각하는 내가 잘 되는 쪽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항상 질문을 던지고 그 답변을 얻고자 한다는 거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질문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성도 자체를 답으로 이미 간주를 해버렸어요. 전에 네 맘대로 살던 것도 답이었고 후에 새사람 된 것도 답이고, 이제 질문을 네가 한평생 살아가면서 네가 하라고 하시는 거죠. 하와이 네가 가라는 것처럼.

앞으로는 질문은 네가 한평생 살아가면서 왜 주님은 나로 하여금 나를 위하여, 내 중심으로 못 살게 만드는가, 왜 나는 어떤 지경에 있더라도 주님과의 관련성에서 그게 답이 되는가, 이걸 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나는 어떤 짓을 해도 의가 되는가, 어떤 짓을 해도 거룩이 되는가를 되새겨 보는 겁니다. 불신자가 보기에 이것은 미친 거예요. 완전히 돌아버린 겁니다.

욥을 통해서 세상이 그리고 있는 인간과 욥이라는 인간과 그 차이를 오늘 욥기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기를 한마디로 평하라면 이건 빈 병 수거입니다. 마트에서 50원 주고 하는 빈 병 수거. 욥을 빈 병으로 만드시는 거예요. 자식이 10명 있었는데 10명 다 죽었습니다. 그 자식이 못된 자식들이 아니에요. 욥이 정성을 들여서 잘 키우려고 애썼던 자식 10명이 다 죽었어요.

욥이 빈 병이 된 거죠.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어요. 알맹이가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그걸 수거하면서 그 안에 무엇으로 채우는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것으로 복으로 그걸 채우는 겁니다. 그러니까 욥의 입장에서는 복이 들어오려면 전에 있던 것이 몽땅 다 없어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옛 부대에 새 술을 담는 그런 격이 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기 때문에 새 부대를 따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기존에 있던 부대를 새로 만드시는 방법을 쓰시죠.

빈 병을 수거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것을 거기에다 집어넣는 방식으로 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것이 바로 복이 들어오는 방법인데 자기가 기대했던 복은 하나님께서 거부하시죠. 일체 안주고 인간이 복을 기대한다는 자체를 완전히 말끔하게 아무것도 못 가지게, 남들 보기에는 저주받은 모습으로 만들어 버리고 나서, 거기에 복을 집어넣을 때 복이 인간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욥을 통해서 온전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세 딸이 있는데 14절에 보면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비둘기라는 뜻)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향이 나는 나무)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아름다운 뿔)이라 이름하였으며” 뿔처럼 돋보인다는 것이죠. 이런 세 딸은 마치 예수님에게 처음으로 나타난 예수님의 신부와 같은 겁니다. 예수님이 남편이라면 이 세 딸은 그분의 아내가 되죠.

그런데 그 딸이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라고 나옵니다. 미모로 대결하자는 거죠. 여인들이 아름답다는 말은 특출나고 부각되게 아름답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이 딸들이 아름답다는 것은 누가 아름답다는 것이냐 하면 그 아빠의 위상이, 그 아빠의 존재가 그 시대에 전국에 빛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는 성도가 아름답다는 것은 성도의 남편 되는 주님이 특출나고 귀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표현한 겁니다.

남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이렇게 신부를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이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 나오는데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그러니까 남편의 가치를 위해서 남편은 어느 정도로 대단하냐를 위해서 거기에 격이 맞도록 신부를 더할 나위 없이 꾸미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이게, 아름답다는 것이 예수님 몰랐던 세상 적인 안목으로 아름답다가 되어버리면 그건 안됩니다. 아름다운 것은 중간에서 역기를 들 때 역기를 드는 사람이 양쪽에 바벨을 보며 아름답다고 하는 감상평은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기 아내를 말하는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다는 것은 주님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그 안에 담겨있고 반영되어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과연 세상 사람들 보기에 아름다우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람들 보기에 흠모할 것이 없다고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는 주님이 요단강 세례받으실 때 예수님을 귀한 아들로, 내가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로 말씀하신 이유가 아버지의 뜻과 영광이 고스란히, 하나 빠짐없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름다운 것이고,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신부도 예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건네준 거, 예수님이 그냥 무상으로 선물로 준 그것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신부는 주님께서 뭘, 어떻게 다루느냐 하면 주님이 준 아름다운 것이 그대로 있는지를 점검하겠죠. 예수님이 만약에 브로치(보석으로 만들어진 핀 달린 장신구)를 달아줬다면 주님은 뭘 보시느냐 하면 “이 아름다운 것아”라고 하실 때 누구 인물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주님이 달아놓은 브로치를 보신다는 거죠.

주님이 딱 집어넣어 준 그거, 그거 안녕하고, 오늘도 그거 잘 있었는지, 주님이 집어넣어 준 것에 대해서 주께서 안부를 건네죠. “오늘도 잘 있었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서 개를 키우기가 힘들어서 친척 집에 개를 주었다면 친척 집에 갈 때 친척들 보러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키웠던 개를 보러 가는 거죠. “뽀삐 잘 있었어?” 주님께서는 자신의 것만 관리하고 나머지는 제거합니다.

그런데 신부에게 주님이 주신 브로치가 있는데 자기가 보기에 디자인이나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든다고 거기에 색칠을 해버렸다면 주님께서 후딱 오셔서 브로치에 때 탄 거 지우개로 다 지워버리시죠. “내 아름다움, 완벽함, 완전함에 네가 어디 손을 대느냐. 너의 행함으로 거기에 때를 끼게 만드느냐”라고 하시면서 다 벗겨내 버리시죠. 이미 주님의 것 그 자체가 해답이라면 우리는 자꾸 거기에다 우리 인생을 살아가면서 옛날 습관들을 자꾸 거기에 묻히게 돼요.

묻히니까 주님께서는 이걸 지워버리시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주께서는 이 세상에 시험 속에 자라나는 성도, 시험 속에 통과 중인 성도의 삶. 성도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세상이 주는 시험과 테스트, 유혹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게 뭡니까. 그게 인간의 힘으로 자기가 잘 될 수 있다는 그것 자체가 유혹이 되고 시험이 되는 거예요. 기어이 내 의미와 가치를 챙기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욥기가 중요한 것은 과거의 욥이 하나님 만나 보기 전에 자기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욥으로 하여금 전혀 중보자적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고 탈락이에요. 오히려 중보자적 그것을 방해할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실컷 하게 해놓고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새로운 욥B를 통해서 그 시대에 욥이 갖고 있는 메시아성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KBS에서 아침에 방영하는 인간극장에서 백령도에 옹진군에 있는 대이작도에 사는 63세의 선장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동생이 과거에 어두운 뒷골목 생활을 했다고 나와요. 그런데 그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계속 그 어두운 과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 동생이 어두운 뒷골목 생활을 했는데...’ 사람들 만날 때마다 형이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좀 잊어줬으면 좋겠고 ‘쉿’하고 말 안 하면 좋겠는데 그걸 자꾸 들먹이고 들춰야 해요. ‘이제는 개과천선해서 이 힘든 어부 일을, 형님 일을 돕고 있다’라고 자꾸 그렇게 하게 하시는 겁니다. 만약에 그 동생이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그 이야기한다고 ‘나는 이제 형님하고 안 놉니다’라고 하면 그건 새사람 된 것이 아니에요. 어두운 뒷골목 이야기 더 해달라고 해야죠. 그래야 그 형님과 형수님의 사랑이 더욱더 빛이 나니까.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 사랑이라는 브로치가 빛나기 위해서는 내가 이 브로치를 달 자격이 전혀 안 된다는 사실이 더욱 가면 갈수록 세월 가면 갈수록 더욱더 이게 파헤쳐 져야 하고 부각 되어야 하겠죠. 마치 아이들 가방 뒤에 메고 가면 불러서 가방 속에 뭐가 있는지 다 끄집어내는 것처럼. 인간세계에서는 자꾸 플러스를 해요. 자꾸 더하기하고.

그런데 주님의 성령께서는 자꾸 빼내요. 마이너스를 해요. 우리가 교회 섬긴 거, 헌금한 거, 전부 다 빼내요. 자식 잘 키우고, 가장 생활 잘한 거, 전부 다 뽑아냅니다. 뽑아내서 항상 뒷 가방이 텅텅빈 수거해야 할 빈 병이 되게 만들어요. 빼내야 거기에 다시 채워지고 채워지고 하는 거죠. 그때 비로소 욥은 더이상 자기 것을 자랑질할 수 없는 거죠.

오늘 본문 보면 욥에게 준 복이라고 나오는데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본문 12~13절에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라고 나오는데 전에 복보다 두 배로, 처음에 준 것보다 곱빼기로 더하게 하세요.

그리고 전에 있던 아들과 딸들도 다 죽어버렸는데 다시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주셨고 이 자식을 대표하는 것은 아들 일곱이 아니고 딸 세 명이 아리따운 여인으로 소문난 사람으로 복을 주었습니다. 이 복은 욥 B에게 복을 주었기 때문에 욥 A에 입장에서는 전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죠. 왜냐면 건너왔으니까. 역기를 드는데 바벨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오는데 욥이 순종해서 복을 받은 것도 아니고 아무 한 것도 없는데 복을 받았어요.

그러면 욥 B가 아무 한 것 없이 복을 받은 입장에서 두고두고 욥은 뭘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왜 내가 욥 A로 있을 때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왜곡되게 이해했는가를 두고두고 이야기해야 해요. 내가 하나님께 순종해서 복 받았다는 것을 자랑질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잘못된 것을 살아가면서 계속 보게 하는 겁니다. 그 세월이 몇 년인가. 140년 동안.

나이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그 후에 140년을 추가해서 더 살았으니까 그렇게 살면서 너희는 옛날 내 식대로 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고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선지자예요. 그러면 이 복이라는 것이 뭐냐는 겁니다.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창세기 27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제 이삭이 야곱과 에서에게 복과 저주를 주는 장면인데 먼저 야곱에게 복을 줬어요.

창세기 27장 29절에 보면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라고 나오고 그다음 장면은 저주받는 겁니다. 저주받으면서 에서가 이렇게 의미있는 정말 진지하고 중요한 우리라도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렇게 꺼냅니다.

38절에 보면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라고 나오죠. “ 이 하나뿐이리이까”라는 이야기, 복을 이리저리 나눌 수 없냐는 말이죠. 동생이랑 나랑 형제간인데 동생에게 다 주지 말고 사이좋게 복을 나눠줄 수 없겠냐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이 뭘 모르느냐 하면 인간이 복 받을 자격이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모르고, 복이 사람 잡는다는 사실을 에서는 전혀 모르는 겁니다.

지금 에서가 생각하는 것은 욥 A 때, 처음 하나님을 모를 때, 그때 하나님이 주신다는 그 복, 그거는 내 소유가 될 수 있는 복만 생각하는 거예요. 복이 날 잡는다는 사실을 욥 B가 기다리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욥 A로 출발해서 욥 B가 받는 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욥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고통과 아픔을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복이 사람 잡고 복이 초 죽음 되게 만들었어요.

너는 복 받을 자격이 못 된다는 것을 철저하게 한 다음에야 이 복이 스스럼없이 정체를 드러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복을 이야기하는데 마태복음 19장 29절을 이야기하게 되면 이걸 제대로 듣는 사람은 듣고 계속 교회 나온다는 것은 뭔가 이 본문 할 때 잠을 잤던지 딴 생각한 사람이에요. 그 정도로 무시무시한 이야기인데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라고 나옵니다. 정말 소름 돋는 말 아닙니까?

날씨도 더운데 다시 소름 돋게 이야기해드릴까요?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뭐 집은 부흥회 때 속아서 갖다 줄 수 있고, “형제나” 형제는 뭐 맨날 싸우는 거 연 끊을 수 있지요, “자매나” 자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나” 부모는 시집 장가가면 자동 빠이빠이죠, “자식이나” 아...이거...특히 손자 손녀 절대 안 되죠,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뒤에 ‘여러 배’는 들리지도 않아요. 왜? 처음에 부모, 형제, 자식부터가 내 것이니까. 그러니까 내 것이, 이 욥 A가 날아가 버린다는 거,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가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50년, 60년 다녔는데 너같은 인간 안 받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 욥기를 통해서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주님, 왜 저를 안 받습니까?’

주님이 대답하시죠. “나도 천국 못 갔다. 됐냐?”라고. 나도 천국 못 갔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들을 법무연수원 같은 한직에 보내면 됩니까?”라고 하니까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나도 좌천돼서 그 생활 했다”라고 하는 거예요. ‘저 천국 가고 싶습니다’라고 하면 주님이 “나 저주받아서 지옥 갔다. 됐냐? 네가 그동안 알고 있던 예수가 도대체 어떤 예수야? 너만 챙기는 예수지. 주님이 저주받았다는 사실을 생각 못 했어?”라고 그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그게 신앙적으로 유명한 노래가 박강성이 부른 ‘문 밖에 있는 그대’예요. 여러분은 성도니까 가스펠송이나 찬송가만 불러서 노래 모를 거예요. 뒤늦게 와서 나랑 사귀자고 하니까 너에게 줄 사랑은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완전히 마태복음 25장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들 이야기 같아요. 그러면 그동안 교회 와서 무슨 생활 했습니까? ‘주여, 나를 버리게 하옵소서’라고 한 것이 아니고 세상 살면서 사는 게 힘드니까 친구 만나서 노닥거리려고 교회 온 거예요.

아직도 내게 슬픔이 우두커니 남아 있어요

그 날을 생각하자니 어느새 흐려진 안개(눈물이 난다는 거죠)

빈 밤을 오가는 마음 어디로 가야만 하나

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헤매는 미로

누가 나와 같이 울어 줄 사람 있나요 (여기부터 가사가 중요해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그 예수가 예수가 아니에요. 이건 최성수와의 동행이죠. 그러니까 그 예수가 그 예수가 아니란 말이죠. 그거는 내가 좋으니까 믿는 예수예요. 우리가 예수님 저주의 길로 가는데 따라갈 수 있습니까? 열두 명 제자 가운데 예수님 따라간 제자가 있었습니까? 다 도망갔습니다.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지니라.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데 예수를 믿을 재간이 있어야죠. 아무도 자기만 믿기 때문에 예수 믿을 재간이 우리 속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해답은 뭐냐. 한 번 죽은 자가 아직 안 죽은 자를 이긴다. 한 번 이미 죽었던 자는, 죽는 이유를 아는 자는, 죽어 마땅함을 아는 자는 이 세상에 아직도 안 죽고 있는 자에게 꿀리지 않습니다. 겁나지 않습니다. 주와 함께 십자가 죽은 자만이 욥 B가 될 수 있어요. B.C 3세기경에 디오게네스라는 일종의 궤변론자로, 견유학파라는 철학 학파에 속한 궤변론자로 소문난 철학자인데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이 그에게 찾아왔어요.

‘내가 지금 세상을 정복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까?’라고 철학자에게 물으니까 디오게네스가 묻는 말이 ‘정복해서 뭐 할 건데?’라고 하니까 알렉산더가 ‘정복해서 휴식하려고요’라고 대답했어요. 그 철학자가 하는 말이 ‘지금 내가 휴식하고 있잖아’라고 말 거예요. 그 당시 디오게네스는 집도 절도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얻어먹고 살아요.

그냥 매일 아침 죽이라도 얻어먹고 살아요. 어떤 사람이 디오게네스에게 와서 ‘당신이 임금의 뜻을 알게 되면 이렇게 빌어먹고 죽이나 먹고 살지 않을 텐데 안타깝네요’라고 하니까 디오게네스가 하는 말이 ‘네가 나처럼 죽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왕에게 아부 안 해도 되잖아’라고 했어요. 이 사람이 알렉산더가 오니까 햇빛 가리지 말고 비키라고 말 한 사람으로 유명해요.

성도는 이미 답입니다. 문제는 본인이 어째서 답인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어요. 성령이 오셔서 주님의 영이 오셔서 너의 존재 자체가 세상을 다 버린 자로서 네가 너의 집에 살고 네 부모를 만나고 형제를 만나고 자식을 만나도록 생활하게 해요. 나에게 그런 분이 없다고 할지라도 괜찮은데 그런 분이 생기게 해서 이건 욥 A에서 그 형제를 사귀는 것이 아니고 죽어 마땅한데 다시 살아서 새로 생긴 형제자매를 만나게 하는 욥 B의 입장에서 새 가족을 생각하게 만드는 이것이 바로 주께서 거저 주신 욥 B가 받은 복입니다.

욥기를 끝내면서 욥기가 참 길기도 했는데 끝내면서 제가 욥기에서 느낀 점은 이겁니다. 욥은 어쨌거나 저쨌거나 하나님께 초대받았다는 사실,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 여러분도 오직 그거 하나만,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고 선택되었다는 그거 하나만 있다면 주님께서 들고 계신 역기 안에 여러분들이 바벨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고 증거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사용하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내 것으로 만든 거 말고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라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 받아들인 십자가가 나의 모든 생각을 짓밟고 살아서 약동하고 작동하는 그런 남은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36강-욥기 42장 10~17절(복의 전후)220522 이근호 목사.hwp (69.5K), Dow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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