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22-05-23 16:17:34 조회 : 83         
강남-누가복음 11장 22절 (육의 해석) 220510b-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11장 22절 (육의 해석) 220510b-이근호 목사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오셔서 귀신이 나감으로서 귀신이 노출되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싫어해요. 왜냐하면 본인들이 귀신을 이미 장악한 걸로 그렇게 알려져야 되기 때문에. 자기가 귀신에게 눌려있는 게 아니고 자기가 귀신들을 마음대로 나가라고 하면 나갈 수 있다고 봄으로서 귀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걸로 자신의 거룩함과 성결함과 온전한 구원을 자랑질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냄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허락도 없이 귀신을 쫓아냄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귀신 쫓아내는 주도권 싸움에서 예수님이 쎄냐? 자기들이 쎄냐? 새로운 경쟁이 붙어버린 거에요.


그들은 귀신 쫓아낸 것이 구원이지만 주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귀신 쫓아내도 나머지 자체가 귀신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거에요. 귀신은 항상 되돌아온다. 귀신한테는 실종이 없다. 왜? 귀신의 나라는 분열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귀신의 나라를 분열할 수 있다고 바리새인들은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논리라면 귀신의 나라는 스스로 무너져야 돼. 무너지게 되면 너희들이 귀신 쫓아내지 않더라도 귀신은 스스로 없어지게 되어 있는데 귀신이 생긴 다는 이 말은 귀신은 절대로 스스로 무너지는 법은 없다는 이 사실을 너희들은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귀신을 무너뜨릴려면 귀신보다 더 강한 자가 와야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내가 귀신 쫓아내는 것에 대해서 지금 귀신의 왕이 쫓아낸다고 할 수밖에 없는 자기 한계를 드러내는 것은 너희들에게는 새로움이 없기 때문에. 환원이라고 하는 것은요 자기 역량대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자기 역량대로.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재주는 다 피우는 게 그게 환원이에요. 환원. 재주.


그래서 환원된다는 말은 결코 자기로부터 자기가 벗어나는 길은 없습니다. 20절에 봅시다. 너희들이 하는 귀신 쫓아내는 것은 쫓아낸 게 아니고 잠시 자리를 옮겼을 뿐이고 귀신 일곱이 다시 올 수 있는 그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말이죠. 깨끗한 자리가 남아 있으니까 이게 무슨 귀신 나간 거에요. 귀신 보고 잠시 자리 비켜주시기 바랍니다 이랬을 뿐이지. 네가 쫓아낸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귀신이 알아서 자기가 잠깐 비켰다가 필요할 때는 일곱 귀신 다 데려와서 다시 올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20절에 보면 “내가”에요 “내가”. 너희들 말고 내가.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에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이미 귀신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했다”는 거에요. 왜? 이미 나는 귀신보다 유일하게 더 강할 수밖에 없는 귀신으로 뒤덮어진 이 세상 바깥에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이게 뭐냐? 이게 진정한 영이에요. ‘진정한 영’.


그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는 영이라고 하는 것은 육이에요. 저희들은 육인지도 모르고 영이라고 우기고 있어요. 그러면 새로움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그것이 두가지인데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하고요. 요한복음에서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올 때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첫 번째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이삭이 참으로 아브라함에게는 소중한 존재에요. 하나님의 약속의 집결체라고 보지요. 너의 씨가 하늘의 별만큼 많아질 것이다. 약속해서 주신 이삭이거든요. 그러면 약속이 멀쩡하게 살아있지요. 유지되지요.


멀쩡하다면 이삭도 다칠 리 없고 죽는 일은 없어야 되지요. 이삭이 갑자기 죽는 일은 없어야 되지요. 이삭이 자식을 낳기 전에 죽는 일은 없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삭에서 하늘의 별 만큼 자식이 나올 때까지는 이삭은 사라지면 안돼요. 왜? 약속이 멀쩡해야 되니까. 약속의 내용이.


그러면 약속은 뭐냐 하면은 약속은 내 씨가 아브라함의 씨가 하늘의 별만큼 많다 했지요. 여기에 대해서 주께서 묻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걸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 뭐 해석할 게 뭐 있어요. 내 자식이 하늘의 별 만큼 많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많다는 말은 약속의 자식을 줬으면 이거는 계속 그대로 발전하고 성장하고 계속해서 나아가야 되지요. 중간에 사라지는 경우가 없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너한테 믿음이 있느냐를 보는 거에요. 너한테 믿음이 있는가를 시험하는 겁니다.


이 말은 이삭이 올 때 이삭이 등장함으로서 아브라함의 해석에 아브라함의 약속 해석에 변화가 생겨야 되는 것이 약속이 약속답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육에서 와서 계속 육으로 가고 있는 거에요. 그럼 보통 육의 사람 같으면 이삭을 해석할 때 이삭이 중간에 죽는 일이 없이 계속 유지되야 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슨 해석이다? 육적인 육의 해석이에요. 육의 해석이요. 육의 해석은 번식이에요.


아까 프로이드 본능을 이야기한 게 두 가지 이야기했는데 한 가지 이야기 안 한 게 있어요. 하나는 번식본능 또 하나는 뭐냐? 무기물이 되는 내가 먼지가 되는 죽음 본능 두 가지 있다는 겁니다. 안되면 자살하면 되지. 내가 번식할 자신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기 때문에 마포대교에 빠져 죽으면 되지요.


사람이 자식을 낳을 때 자식이 육에서 나온 생물체가 아닙니다. 자식은 내 정신을 이어받아야 돼요. 그럴 때 자식이라고 하는 거에요. 아버지는 교회 장로인데 자식은 술 먹고 더러운 짓하면 너 호적판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가만있자 너 세포가 있나? 없나? 이거 보는 거 아니잖아요. 나의 같은 정신 세계를 네가 공유하고 있나 이걸 본다고요.


그러면 자식이 받을 것은 내 신체만 받는 게 아니에요. 내 정신도 함께 받을 때 내 자식답다고 인정하는 것이 인간의 육적인 본능입니다. 본성이에요. 왜냐하면 내 자식을 번식할 때 아무 자식이 번식하는 게 아닙니다. 나의 정신 사상을 받아줄 때에요. 이거는 인간의 육체적 자식보다 정신적 자식을 인수인계 받는 것을 인간은 더 원하고 있어요.


그래서 양자라도 좋다. 내 사업체를 물려받을 수 있는 정신만 또렷하다면 나는 자식 대신 양자에게 줄게. 정 양자도 안 되면 강아지한테 준다. 아 강아지는 안되겠다. 인간이 이 정도로 육적입니다. 이게 영물인데 약한 영물이죠. 마귀에게 속한 거죠. 마귀의 뜻은 인간이 육으로 남는 거에요. 육으로 계속 남는 겁니다. 파멸될 걸 알기 때문에. 악마가 알거든요.


마귀는 영이기 때문에 육이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요. 귀신은 실종되지 않습니다. 다시 자기 집으로 다시 돌아와요. 약속이 이삭을 줄 때에 아브라함 자손이 육으로 해석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이삭 입장에서 해석할 것인가? 자, 아브라함은 이삭이 없는데서 생겼지요.


그러면 있음의 세계에서 이삭은 외부인입니다. 외부인. 외부인은 새로움이에요. 새로움. 다시 있음으로 환원될 이유가 없습니다. 있음이 환원될 곳은 사라지는 거에요. 그 사라지는 자손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걸 사라지는 장소를 지정해주는 거에요. 모리아 산에 가서 네 아들 바쳐라. 그래서 그게 믿음의 내용이 되는 영적인 사건이 터집니다.


어떤 사건이냐 하면은 아버지가 아들을 잡는 사건 말고 외부적이라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건너뛸 수 없는 논리적으로 건너뛸 수 없는 다른 경우를 있어요. 그게 뭐냐? 옆에 수풀에 숫양이 생겨난다는 것은 이것은 아브라함의 육의 능력을 뛰어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뭘 믿는가? 이번 일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제가 믿은 게 아니고 믿음의 주인이 저보고 믿음 안에 저를 집어넣은 일입니다. 그분이 누구냐? 요한복음 8장에 아브라함이 내 때를 보고 기뻐했느니라. 아브라함이 벌써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거에요. 나와는 다른 분. 나 육 말고 다른 육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다른 분.


마치 누구와 같이? 이삭과 같이. 육의 세계에 없는 존재가 나타나서 나로 하여금 육의 세계에서 나타나신 그분의 세계로 전환시켰느냐를 증명해주기 위해서 아들 이삭을 잡으라는 일을 시킨 것을 아브라함은 받아들인 거에요. 그 사건이 양이 대신 죽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육의 세계에 파고 들어오신 거에요.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귀신의 오야붕까지 끝까지 가보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고 너희 아비는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다. 그리고 가룟 유다라는 제자가 있지요. 가룟 유다는 어디에 속했습니까? 사탄에 속했지요.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너 할 일 해야지. 너 할 일 해야지. 네 할 일이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사탄이 사탄답게 해야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잡아 죽였을 때에 그때 정리할 수 있는 멘트는 뭐냐? 가룟 유다가 가룟 유다 했다.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사탄이 사탄한 거에요. 그 사건이 꼭 필요한 사건이에요.


그리고 모든 제자들은 도망쳤습니다. 가룟 유다의 행위를 저지하거나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 모르니까. 마귀에 대해서 모르니까. 악마에 대해서 아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인간은 통합을 원하고 융합을 원해요. 평화를 원하고. 그 속에 내가 일부니까. 내가 평화로운 사람, 내가 화평한 사람, 행복한 사람 되기 원해서. 자기의 번식 본능을 자기가 버릴 수가 없어요. 육의 본능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삭, 아브라함, 예수님 공통점은 전부 다 이 땅에서 부재죠. ‘부재’. 부재의 존재. 없는 존재. 부재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제가 4가지로 한번 정리를 해봤습니다. 제가 적어드릴께요. 부재 증명. 우리 자신이 과연 이 땅에서 부재인가 외계인인가? 부재의 존재냐 증명하는 것. 첫 번째, 유용성으로부터 bye bye. 유용성으로부터 bye bye. 나한테 얼마나 이익이 있느냐로부터 bye bye.


두 번째, 세상에 있는 것 다른 것으로 대체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지금 남편하고 이혼하고 다른 남편하고 결혼해서 팔자 고쳐볼까? 아이고 그 자가 그 자에요. 차마 놈이라는 말을 못하겠다만. 그 자가 그 자에요. 갈아봤자 역시에요 역시. 이 세상에서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고 귀신 안 따라갑니까? 이거는 세상 부러울 것 없다는 거에요. 세상에 부러울 것 아무것도 없어요.


세 번째, 언어 공동체에서 벗어난다. 이게 설명이 필요한데 언어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요 언어로 구성된 커뮤니케이션 사회에요. 커뮤니케이션, 의사소통. 인간이 사회에 가입하는 거에요. 교회 등록하는 것부터 해가지고 동호회라든지 하는 것은 그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인정받기 위해서.


특히 교회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하나님은 안 보이시니까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신앙 좋다고 하면 내가 신앙 좋은 줄로 아는 거에요.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은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내 욕망이 생겨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그러느냐 어릴 때부터 우리는 말을 배울 때 어린애가 욕하면 부모가 가만히 있습니까? 말립니까? 어떻게 합니까? 안돼! 그 말은 안돼. 이렇게 해야 돼. “할아버지 밥 먹었어?” “아! 안돼 안돼. 할아버지 진지 잡수셨어요?” 라고 해야 돼. 언어의 세계에요.


그러니까 어느 날 할아버지 밥 먹을려고 할 때 가만 들으면 “할아버지 진지 잡수셨어요?” 하니까 할아버지 감격해가지고 오만원 줘가지고 아이고 가정교육 잘 받았다 하면서 돈을 주니까 돈 주고 머리 쓰다듬어 주니까. 개 훈련할 때 사료주고 머리 쓰다듬잖아요. 사회를 배우는 거에요. 언어 공동체에요. 남들로부터 좋은 존재로 인정받는다는 것.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하는데.


또 반대말도 가능해요. 언어,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 욕설이 그 사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살하게 만들어버려요. 인터넷에 댓글 달 때 인터넷 안하면 되는데 그 댓글 보고 죽은 연예인이 한둘이 아닙니다. 한둘이 아니에요. 많습니다. 연예인 자체가 바로 언어 공동체의 희생물이에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자기가 살 맛을 느끼는 괴상한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괴상한 존재.


그냥 조용히 자기만 살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남들의 인기에 유투브 조회수에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게 예술이에요. 예술 또는 연예, 연예 세계, 스포츠 마찬가지입니다. 정치, 경제 다 마찬가지에요. 이걸 사람들은 정신 세계라고 해요. 그 정신 세계 어디서 나왔는가? 육이에요 그게. 육적 본능에서 벗어난 정신 세계는 없습니다. 특히 언어 공동체가 이스라엘이잖아요.


여러분들이 언어 공동체에 대해서 좋은 예가 있으니까 그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질문을 하나 할 테니까 성경을 한번 같이 봅시다. 사도행전 5장 34절부터 40절까지 제가 읽고요 제가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5장 34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베드로하고 사도를 체포했다 이 말인데요. 예수 전하는 사람 체포했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이 사람 가말리엘이 나선 거에요.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았으니”


보셨지요? 무슨 뜻인지 감이 오지요? 질문 들어갑니다. 이 가말리엘 사람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이야기해보세요. 첫 번째 구원받은 사람이다. 두 번째 구원 안 받은 사람이다. 어느 쪽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구원 안 받았지요. 구원 안 받은 사람 맞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뭐를 거론해요? 하나님 거론하지요. 하나님이라는 용어만 거론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일하시는 원리까지 거론합니까? 원리까지 거론하지요. 가만 두어라.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스스로 무너진다. 이 사람은 신자입니까? 신자 아닙니까? 신자 아니지요.


왜 오늘날 교회에 이런 신자 아닌 사람이 왜 이리 많습니까? 칼빈의 주권사상 언급 하면서. 왜 그렇게 많은 거에요? 이게 육입니다. 이게 마귀의 생각이에요. 그러면 질문합니다. 무엇이 이 사람으로 신자 아닌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이 사람은 자기가 환원되는 되돌아가는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가 뭐냐? 하나님 자리에요.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자리에요.


사실은 마귀의 뜻인데. 뭐가 없는가? 새로움이 없어요. ‘새로움’. 새로움이 없으니까 통합하고 융합하는 거에요.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끼리 통합하고 융합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새로움입니까? 환원되는 거에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을 때 한결같이 그들은 의견일치를 봤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신자 맞습니까? 아니잖아요. 의견일치가 의견일치로 인하여 너희 아비는 악마다가 증명되어 버린 거에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어떻게 하면 신자 됩니까 라고 질문을 한다면 오늘 강의 헛들은 거에요. 아무도 신자가 될 수가 없어요. 그 누구도. 아무도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신자 나옵니다. 네 번째 부재증명, 이름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이름을 붙일 수가 없어요. 부재하니까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 땅의 이름은 의미 없습니다. 이름이 없어요. 이름이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 이제 말합니다. 어떻게 신자 되느냐? 이름을 떼어버립니다. 빼앗아가요 주님께서.


빼앗는 자리가 뭐냐? 주님께서 인간이 악마한테 속한 인간이 악마한테 사로잡힌 그 감옥, 감옥 같은 세상 제일 바닥에 가서 거기에 있는 자기 백성의 이름을 떼어버립니다. 그 이름을 떼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주의 이름으로 바꿔지지요.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그 말은 더는 내 이름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겁니다.


주의 이름은 나한테 찾아온 활동성을 내가 인정하는 거에요. 주님은 쉬지 않고 활동할 그 결과물로 내가 만날 수 없는 주님을 지금 이 허접한 악마한테 속해가지고 구원받을려고 이 난리도 아닌 나를 헛짓하고 있는 나를 이게 얼마나 육적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더러운 곳까지 오셨습니다. 그걸 자인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돼요.


이 말은 더 이상 자기 이름에 어떤 의미와 목적을 두지 않는 거에요. 그것을 아브라함에서는 뭐냐? 죽여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삭 죽이고 아브라함 죽이고 둘 다를 죽이는 겁니다. 그리고 누가 죽느냐? 하나님 자신이 죽어버립니다. 우리 다 같이 죽자.


이불 뒤집어쓰고 우리 소주 까고 죽자. 아버지 부도났다 남매들아 이리 오너라. 오늘 너희들 미안하지만 학교 가야 되고 친구들 있는 거 알지만 아빠 부도나서 쫓겨나 더 이상 못 산다. 아빠 오기 전에 우리 약 먹고 다 같이 죽자. 엄마 싫어요. 내일 소풍가는데. 소풍이고 뭐고 소풍이 중요한 게 아니고. 삼모자 집단 자살.


주님이 우리와 함께 죽습니다. 죽으면 우리한테는 믿음의 내용이 내가 믿을 내용은 어디에도 없지요. 예수도 못 믿고 하나님도 못 믿고 십자가도 못 믿고 내가 믿을 내용은 하나도 없어요. 주님의 믿음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안 믿어도 되는 안 믿는다는 게 믿음이 되는 놀라운 기적이 더 이상 나의 어떠한 행함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외부에서 온 믿음이라는 사실. 너의 믿음은 내가 일체 안 받는다 라는 사실을 일깨워지는 그 내용. 그걸 믿는 거에요.


도마가 자기 쪽의 믿음을 먼저 제시했지요. 나는 보고 믿겠다. OK! 콜! 네 식대로 보여줌으로서 도마는 내가 신앙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믿는 자가 되고 말았어요. 이게 주의 방법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는 방법이에요. 죽지 아니하면 부재의 존재가 될 수 없는 거에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살았다고 너희들 이야기하지 마라. ‘주님이 내 안에 있다’고 이야기해라. 네가 살아 있다고 하지 말고 나는 죽은 걸로 보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것으로 봐라. 이거는 인간의 언어 공동체에서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신학은요 마귀가 만든 거에요. 인간의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도신경이라든지 교리라든지. 주님이 언제 신학보고 구원합니까. 그러면 신학교 다 갔겠다.


제가 소위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은 네가 복음을 안다면, 진짜 복음을 모르지만 복음을 안다면 개척교회하지 신학 교수 안합니다. 신학 교수해도 벌써 쫓겨나오지요. 언어의 공동체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너는 고백할 뿐이고 자백할 뿐이고 목격할 뿐이지 해석할 문제가 아니에요. 해석한다고 설득될 문제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장 4절의 말씀에 나오잖아요. 내가 말한 것은 사람을 납득시키고 설득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나타남이 성령 그대로만 성령께서 하셨다는 것 주님이 하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한다. 따라서 성령 안 받은 사람은 해석할려고 하지도 마 이런 뜻이에요. 어딜 감히 해석할라고.


또 한 가지 두 번째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 거지 나사로 말고요. 마르다 오빠 그 나사로가 부활될 때 다시 태어날 때 다시 살아날 때 자기가 한 게 뭐가 있습니까? 나사로가 무덤에 들어간 것은 나사로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그 절차, 나사로가 한 절차를 예수님 본인의 절차로 미리 보여준 거에요. 내가 나사로처럼 무덤에 들어갔다 나온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나사로가 부활될 것을 믿지 말고 네 오빠 살아난 것을 믿는 게 아니고 너 오빠가 부활이 아니고 내가 부활이라는 거에요. 내가 부활이에요. 예수님 본인이 부활이에요. 본인이 생명이고 나사로가 생명이 아니고. 오빠 그러다 또 죽었어요. 예수님이 부활이고 예수님이 생명이에요. 그런데 마르다 마리아는 육의 번식관계에 가족 관계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마르다 마리아가 언제 남의 집 오빠 남의 집 아는 아저씨 죽었다고 그렇게 예수님께 달려듭니까? 자기 오빠 죽었다고 달려들지요. 자기 오빠 죽었다는 말은 오빠하고 자기는 한 가족이고 오빠가 죽은 것은 무엇에 대한 빼앗김? 나의 행복에 대한 빼앗김이죠. 그러니까 주님 보시기에는 빼앗겨야죠. 하나의 역할은 죽어서 나흘 동안 무덤에 있는 역할.


지금 연극 무대를 생각해보세요. 연극무대 한쪽에 무덤을 만들어 놓고 나사로한테는 무슨 역할을 맡겼다? 병들어 죽는 역할, 이쪽의 두 여동생 역할은 뭡니까? 예수님 보고 멱살 잡고 달려드는 역할. 그 셋 중에 구원받는데 기여된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그냥 역할이죠. 그때 등장한 인물이 있는데 예수님. 각본대로 갑니다. 예수님 오자마자 예수님 멱살 잡는다.


자기가 아는 자기 육에서 나오는 해석을 해요. 해석을.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나는 내가 다시 살아난다고 했잖아 했을 때에 예~~ 압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 오빠 살아날 줄로 제가 잘 믿습니다. 그때 당신 나 비꼬는 거지? 청문회에 나왔던 것처럼. 너 비꼬는 거지? 예~~ 압니다. 꼬라지 좋다~ 예수 믿고 마지막에 다시 사는 것 그게 뭔데 우리 오빠를 죽입니까?


주께서는 네 해석이 문제다. 네가 마지막 때 내가 부활한다는 그 부활을 예수님이 부활시켜주는 걸로 해석한 거에요. 여전히 자기 자신이 자기한테 빼앗기지 않았어요. 아까 다시 봅시다. 1번 뭐라고요? 유용성에서 부터 bye bye. 안녕이에요 안녕. 자기 이익을 벗어난 거에요. 왜? 자기는 부재하니까.


다시 말해서 없는 존재인데 누구 때문에? 영원히 계시는 예수님의 존재 때문에 이 땅에서 몇 년도에 태어났어야 했어요. 이 없는 존재가 있음이 된다면 있음의 환원됨은 어디로 환원되야 돼요? 있음으로 환원돼요? 없음으로 환원돼요? 주님으로 환원되고 세상의 모든 것은 주로 말미암아. 주님 안으로 환원되야죠.


그래서 성도끼리는 상호익명성. 상호익명성. 주의 이름으로만 연락을 취하고 주의 이름으로만 사귀는 사이. 주의 이름 때문에 도와주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거에요. 주님의 종이라는 이유로 참아낸 세월이 너무 길어요. 이런 노래 있지요.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울고 싶어도 못 울고 참은 세월이 너무 길다’고 했잖아요.


주의 이름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물 한 그릇 대접하는 것이 곧 누구한테 대접하는 것이다? 나한테 대접하는 것이다. 주님은 부재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재하기 때문에 보이는 거에요. 늙어죽을 때까지만 코로나 걸려 죽을 때까지만 보여요. 보이는 거에요.


그러나 죽을 때 그 사람이 죽은 게 아니에요. 주의 이름대로 그 사람은 살은 거에요. 죽은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잠자는 거에요. 그래서 살아 있을 때부터 내 이름으로 하게 되면 죽음이 성립되지만 주의 이름으로 하게 되면 죽지 않습니다. ‘죽어도 살겠고’가 되는 거에요. 나사로가 그걸 보여준 거에요.


시작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자기가 육으로 아는 해석을 뒤엎어버려야 돼요. 나의 해석이 아니고 앞으로 오실 주님의 역할을 미리 보여주는 식으로 해석되야 돼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은 따로 계시고 그 주인공이 주인공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자식을 잡아 죽이는 이 절차를 보여주는데 주님이 오시는 절차에 미리 우리가 합류한 거죠. 성도가.


그래서 성도의 인생의 길은 이미 이루어진 다 이루어진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시는 거에요. 이게 영적 해석입니다. 이게 영적 존재의 활동이에요. 23절 한번 봅시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누구 이야기하는 거에요? 지금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가 이미 확정되었지요. 이미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벌써 공격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주님께서 반대라는 말은 뭐냐? 너희들 집합에 나를 포함시키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게 반대에요. 그렇다면 그 뒤에 봅시다. 나와 함께 하는 자 있지요. 함께 하는 자는 주님 때문에 어느 공동체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다만 거기에 출현된 사람이지 나타나서 같이 사는 사람이지 거기에 소속될 수가 없어요. 성도는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주께서 소속을 달리 했습니다. 세상 부러운 거 없이 살아요. 세상 부러운 거. 그건 마귀에게 속한 거에요. 악세사리같은 거 뭐 그리 탐이 납니까? 아무리 이재용 부자가 되도 그거는 하늘나라의 것처럼 악마 안에 악마 밑에 있는 하수인인데 악마 하수인이 그렇게 김중배의 다이아가 그렇게 좋던가요? 젊은 사람들은 김중배가 누구인지 모를 거에요. 돈 가지고 심순애 꼬실려고 한 사람이 김중배에요. 옛날 신파극에 나왔던 일부입니다.


26절에 보면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왔지요. 이 말은 악마가 인간에게 지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제는 알고 싶다. 알려주마. 뭐냐? 악마가 인간에게 쫓겨나는 경우는 없었다 이 말이죠.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인간들의 소원은 자기 관리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나쁜 요소를 제거하게 되면 나머지는 멀쩡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거는 악마를 몰라도 귀신을 진짜 개무시한 거에요. 악마를 개무시한 겁니다. 인간에게 멀쩡하지 않은 게 없어요.


꼭 치과에 온 환자 같애. 이빨 하나 빼고 선생님 감사합니다. 멀쩡하지요. 한 달도 안 되서 이쪽 이빨 임플란트. 그 다음에 이쪽. 나중에 25개 다 해야 돼. 견적 나오면 수천만원 나와요. 63세는 세 개밖에 안돼. 나머지 자비, 자기 돈 내야 돼요. 그러지 말고 이삭처럼 죽지 차라리. 자기 몸을 죽여야지 몸을. 뭘 딴걸 해요.


그래서 주님께서 마태복음 10장 보면 주님께서 인간의 한계, 소위 영적이라는 것 정신적이라는 한계를 주님께서는 그걸 질타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와요. 유명한 말씀인데 마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5장 29절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이게 지금 예수님이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겁니까? 바리새인 보고 이야기하지요. 바리새인 누구냐 하면은 그 당시 하나님 믿는 사람 중에 제일 높은 경지에 인격 도약에 성공한 사람이라고 소문난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을 보고 얼마나 주님께서 지금 조롱하듯이 이야기하는 거에요. 지킨 것 90%, 못 지킨 것 10% 해가지고 그렇게 하지 말고 잘라버려라 이 말이죠. 왜 그걸 못 하냐 이 말입니다. 눈, 오른손, 오른눈 얼마나 귀합니까? 잘라버려라.


얼마나 귀하냐 하면은 마태복음 10장을 보겠습니다. 10장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그러니까 이게 뭐냐? 네 몸이 너 지옥 가는 것을 방해한다는 생각을 왜 못하고 있느냐 하는 거에요.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러니까 이 말이 뭐냐 하면은 인간들이 귀신들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추호도 못해요. 이게 인간이 무능해서 그래요. 해석 못해서 그래요.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이든 철학이든 악마가 우리보다 쎄다는 생각을 언어에 생물학을 하든지 인공지능을 연구하든지 컴퓨터를 연구해도 이게 악마가 나보다 더 쎄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어쨌든 간에 멀쩡하게 멀쩡하게. 조폭들도 차카게 살자. 그냥 착하게 살고 멀쩡하게 복 받을거다. 자기 존재 증명이죠. 부재 증명이 아니라 존재 증명이에요.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자, 27절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이 여자가 또 쓸데 없는 소리를 하는 거에요. 이게 패밀리 의식이거든요. 패밀리 의식. 이게 생존 본능 아닙니까. 아이고 예수님 엄마 참 좋겠습니다. 당신 가정 참 좋겠습니다. 왜? 이렇게 똑똑하고 총명한 자식을 낳아서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말은 부러워라 부러워라 우리 집안은 당신 같은 자식 왜 없습니까. 이게 무슨 경쟁입니까. 인정받고자 인정 투쟁이에요. 우리 가정이. 내가. 전체의 일부는 결코 전체를 볼 수 있는 더 큰 전체의 안목이 없습니다. 내 새끼 내 자식은 남의 새끼보다 더 잘났다 할 때는 이거는 전체를 본다고 생각하는데 만약에 그 자식이 맘에 안 들면 나가라 하잖아요. 그 자식 나가면 나머지 멀쩡한 자식들하고 전체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게 멀쩡하다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까? 그걸 더 높은 데서 그걸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요 인간은? 전부 다 자기 위주지요. 더 높은 안목을 악마가 가르쳐주지 않았어. 가르쳐주지 않았어. 그래서 주님의 방법은 뭐냐? 그냥 죽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죽어버려. 전체 안목을 볼 때 너는 죽어야 돼. 그게 최종 해답이에요. 멀쩡하게 할려고 하지 말고. 그냥 죽어. 그냥 부재해. 존재하지 말아.


그럼 자살하겠습니다. 가만 있어. 내가 죽일 때까지 가만 있어. 아이고 나이 많아 죽어야 돼. 가만히 계세요. 더 사세요. 지금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권사님 한 120세까지. 내가 욕을 한다 욕을 해. 욕을 한다 정말. 만약에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으면요 주님께 어떻게 하겠습니까? 분노하겠지요. 내 패밀리니까. 내 새끼잖아요. 남의 새끼는 죽여도 내 새끼는 못 죽인단 말이죠. 못 죽이잖아요. 분노하잖아요.


그래서 안 믿는 사람은 주님께 분노하잖아요. 복음에 분노하잖아요. 아마 이 강의에도 분노할걸요. 듣는 사람이 싫어요 막 누르고. 분노할걸요. 왜 분노하는 줄 알아요? 나는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데?! 누구세요? 그거 당신의 목소리 아니에요. 악마의 목소리입니다. 마귀의 목소리죠. “나는요.”


믿음 없는 사람은 주님께서 문 앞에 오라면 오고 내 속 안에 들어오지 마라는 거에요. 내 속에 무의식이 들어있기 때문에. 나의 본능이 있어요. 내가 어쩔 수 없는 본능이 있어요. 나도 어쩔 수 없는 본능이 있어요. 내 새끼 잘되고 우리 집안 잘 되는 것 이거 본능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이길 수 없는 자식을 죽이는 것을 요구할 때 해석 제대로 하고 해석 새로 하라 이 말이에요. 살아있는 너로 해석하지 말고 죽은 네 손에 죽은 자식의 입장에서 새로 해석하라. 그 죽은 자식 입장이 바로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의 입장입니다. 이 여자가 또 철딱서니 없는 이런 발언을 한 거에요. 좋겠네 저렇게 똑똑한 사람.


28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자, 복이 있다는데 이 복은 이미 구약에서 복이 나왔습니다. 복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말씀, 율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시편 1편 복 있는 사람은 뭐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율법과 말씀을 바깥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죠. 내가 말씀을 지켰다가 아니라 이게 바로 말씀이 나를 이렇게 지키도록 했습니다 라는 거에요.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고 주께서 예수 믿게 했습니다. 왜? 그게 주의 일이니까요. 당신이 어떤 식으로 그걸 알아? 내 식으로 몰랐지요. 나는 주님이 나를 믿게 했다는 것을 나는 몰랐는데 그 전에는 당신하고 똑같은 생각 갖고 있었지. 그전에 당신 같은 소리했다고.


주님 어떻게 하면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으니까 저에게 믿음을 주시고 제가 어떻게 믿으면 됩니까? 믿을만한 것을 주시옵소서 이런 식으로 철딱서니 없게 내 존재 중심으로 해석했는데 내가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존재하지 않는 분이 계셨고 실은 내가 존재 아니고 그분이 존재했는데 그분이 나로 하여금 우리로 하여금 주님 믿게 하셨다는 거에요.


우리를 어떻게 우리를 X표 침으로서 너 아니야 너 행함과 실천력과 너의 의와 너의 목적 아무것도 아니야. 이걸 제거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하신 사람으로서 다루어지게 했다는 것, 이게 바로 오순절 날 성령 왔던 의미입니다. 무서워서 도망치는 그들, 성령 오니까 그들이 이방인의 말을 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의 언어 공동체에서 해석되지 않는 다른 이야기를 해버리는 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한 것 재림하는 것 이거는 인간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의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은 ‘지키라’가 아니라 주께서 지금 지키고 말씀하시고 주께서 실행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통보하는 겁니다. 우리의 허락을 받는 게 아니고 그냥 통보하는 거에요. 그 통보의 결과가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고 복음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이게 복 있는 사람이에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원했던 기도했던 복이 아니라 주께서 준비된 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이 드러나게 말씀대로 되게 쓰여지는 그래서 말씀이 영원히 말씀대로 완성되었음을 알리는 그 증인 일에 우리가 늘 감사하고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강남-누가복음 11장 22절 (육의 해석) 220510b-이근호 목사.hwp (157.5K), Down:3
게시물9,794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10214   울산 성경공부 안내 서경수 22-07-07 52
10213   수련회 안내 관리자 22-07-06 149
10212   399강-YouTube강의(무덤 마태복음 27:53)20220705-이 … 이하림 22-07-06 73
10211   398강-YouTube강의(해석 에베소서 6:12)20220705-이 … 이하림 22-07-06 53
10210   강남-누가복음 12장 10절 (미래의 영) 220621b-이근호… 홍민희 22-07-04 65
10209   강남-누가복음 12장 10절 (미래의 영) 220621a-이근호… 홍민희 22-07-04 58
10208   17강-데살로니가후서 3장 13-15절(형제와 원수)220703… 오용익 22-07-03 66
10207   6강-예레미야 2장 1~3절(시내산의 보석)220703 이근호… 송민선 22-07-03 47
10206   주일학교 설교 / 아브라함 언약 / 220703 정인순 22-07-03 47
10205   수요설교 요약 : 파수꾼(미가 7: 1-4),20220615 공은주 22-07-03 43
10204   안양20220616b슥12장10절(은혜로운 통곡)-이 근호 목… 공은주 22-07-03 43
10203   안양20220616a슥12장10절(은혜로운 통곡)-이 근호 목… 공은주 22-07-03 53
10202   강남 모임 안내 (장소: 양재동, 7. 5. 화) 이명직 22-07-03 42
10201   22 원주특강 / 천년왕국의 반복 / 질문과 답변 (1) 정인순 22-07-02 116
10200   22 원주특강 / 천년왕국의 반복b / 요한계시록 22:5 /… 정인순 22-07-01 64
10199   22 원주특강 / 천년왕국의 반복a / 요한계시록 22:5 /… 정인순 22-07-01 111
10198   대구 모임 안내 이근호 22-07-01 35
10197   25강-미가 7장 7-9절(선지자의 자리)220629-이 근호 … 오용익 22-06-30 74
10196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9강) 사도행전5:3(성령의 물… 한윤범 22-06-29 77
10195   대전-신명기(3강) 신2:34(미래의 종족) 20220627a 한윤범 22-06-29 58
맨처음 이전 [1] [2] [3] [4] [5] [6] [7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