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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31 19:47:21 조회 : 67         
광주강의20220527b 누가복음12장 2절(사라질 성전)-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121.128.92.180)
광주강의20220527b 누가복음12장 2절(사라질 성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아까 쉬는 시간에 장로님께서 질문하셨어요. 시간이 뭐냐? 정의를 내려달라. 그것이 p.221 거의 중간에 보면 “이는 ‘사람의 손으로 지을 수 있는 성전’에 대한 부정(否定)을 내포한 성전개념으로서, 지상의 인간들이 염두에 둔 성전과 결합된다. 이처럼 성전의 의미란,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의 상호작용의 대립적인 틈을 통해 발생적으로 드러난다.” 대립의 틈에서 그다음에 ‘발생적’. 그래서 2번 제목이 p.219에 <발생적 성전관과 주체>라고 되어 있는 거예요. 발생적 성전관.

그러면 시간에 대해서 발생의 반대말은 존재에요. 그냥 있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기어 올라오는 게 아니고 감추어진 데서 만들어낸 게 아니고 한번 있는 게 계속 있음, 있음, 있음, 있음, 비록 늙어가더라도. 계속 있음은 존재다 이 말이죠.

인간 존재에서의 시간은 그냥 의식입니다. 시간이나 공간은 환경에 대한 의식. 자기가 존재하는 환경에 대한 의식 또는 의식을 위한 형식. 이걸 임마누엘 칸트가 정립한 거예요.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을 둘러싼 환경의 구조, 형식이다. 그걸 보통 성경 창세기 1장에서 시간이란 달과 별과 해의 변화, 그 위치 바뀜이다. 같은 이야기에요, 칸트가 이야기한 것과. 인간들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맞네, 맞아. 동의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럼 복음적으로는 뭐냐? 시간은 발생될 분의 활동환경이 되는 거죠. 발생이니까. 어떻게 발생?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의 틈 사이에서 나올, 틈 사이에서 새롭게 삐져나오는 거예요. 양갱 쥐면 양갱이 위로 삐져나오잖아요. 약간 젤 형식이니까 움직이죠, 올라오듯이. 틈 사이에서 마그마가 나오듯이 삐져나오는 거예요. 주님의 현존과 나의 현존이 마주치면서 삐져나오는 것이 내가 생각하지 않는 나.

‘나는 살았다.’가 주님 보시기에는 뭐냐? ‘너는 죽었고’. ‘주님은 죽었습니다.’ ‘아니야. 주님은 살았어.’ 이것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씀이 말씀되게 발생되는 거예요. 어디를 재료로 삼아서? 지금 우리가 까불고 살고 있는 이게 재료가 되어가지고 예상도 못한 새로운 나가 발생되는 겁니다. 성전이 발생되는 거예요.

누가복음 12장 2절, 하도 누가복음을 오늘 많이 찾기 때문에 시간 관계상 제가 후딱 읽어보겠습니다. 12장 2절에 보면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그럴 때 이게 복음이 된다는 겁니다.

같은 12장 51절~53절에 보면, 감추인 것이 나타나게 되면 이렇게 돼요. 51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화평의 반대말이 뭐죠? 분쟁이죠.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분쟁케 하는 겁니다.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그리고 56절에 보면 “너희는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모를 수밖에 없죠. 주님의 등장과 동시에 감추어진 게 드러나는 식으로 알려지기 때문에 주님이 등장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죠. 누가복음 전체가 그 이야기에요. 감추인 것이 기존에 나타난 것을 부정하고 공격하는 식입니다.

13장 4절에 실로암의 망대 무너진 이야기. 사람들은 이걸 뭐라고 하느냐? 망대 무너져 죽은 사람은 전생의 죄가 있든지 죄를 많이 지어서 이런 벌을 받는다 생각하잖아요. 예수님께서는 그 사건을 일으켜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는 그렇게 알아왔었지? 그 안 지식의, 어려운 말로 담지자라 하는데요, 담지자, 지식을 함유한 존재가 너였잖아. 지식을 품고 있는 것, 담지자가 너였잖아. 망대 무너져서 난리 나 죽은 사람 같으면 분명히 네가 잘못한 죄를 지은 것이 있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그런 사건에서 구사일생으로 망대 옆에 있다가 24분 전에 거기서 나왔던 사람한테는 뭔가 같이 죽어서는 안 되는 어떤 착함이, 아까운 착함, 의로움이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는 없는 게 너였잖아.

그게 아니라 깔려죽은 사람이나 거기서 빠져나온 사람이나 똑같다 이 말이죠. 뭐가 똑같아요?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른다는 점에서 똑같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모르면서 자기가 더 가치적으로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에요.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나오는데 7장 22절 보기 전에 아까 한 걸 다시 해봅시다. 누가복음 1장에서 마리아가 찬양할 때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고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혜택을 준다 할 때 누가 봐도 이건 혁명적이죠. 쿠데타 아닙니까? 아까 다들 보셨잖아요. 완전히 사회 자체를 뒤엎는 것으로 되어 있잖아요.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이건 누가 봐도 가난한 사람에게 높은 자리를 주고 그 권세 있는 자를 미천하게 완전히 자리바꿈 하는 거요.

캄보디아에 크메르 루즈 있잖아요. 공산주의 혁명. 자기 국민을 50만 명 죽인 사람. 모든 안경 낀 사람, 영어할 줄 아는 사람, 프랑스어 할 줄 아는 사람, 대학 물먹은 사람은 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시켰어요. 손 조사해서 손에 농민들처럼 굳은 살 없는 사람은 잡아 죽였습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50만 명이에요. 크메르 루즈.

지금 누가복음 1장에서 힘이 없는 사람은 높이고 힘이 있는 사람은 낮추고 주리는 자는 좋은 것으로 배불리고 부자는 공수로 보내고. 부자가 품고 있는 모든 부를 누구한테 나눠준다?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눠줘서 부자 되게 만들고 부자는 완전히 쫄딱 거지 만들고. 이 본문을 그대로 보면 누구나 이걸 연상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이 말입니다. 누가복음 진행을 보면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누가복음 7장 19절을 보면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이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세례 요한이 하도 의심이 들어 물어요.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또 기다려야 됩니까?” 이 말을 비추어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인물 보고 메시아라는 것을 알지 않았다는 거예요, 인물 보고. 세례 요한은 급격한 심판을 이야기했거든요. 그러면 세례 요한 자신이 선지자라면 자기 뒤에 오실 분도 자기와 똑같은 이론을 펼쳐야 되죠. 뭐라고? 급작스러운 대사회적 격동, 소위 말하면 혁명이 일어나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아까 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근대국가는 인간들이 조작한다 했지만 다른 말로 하면 인간들이 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1789년에 프랑스 혁명 때부터를 근대국가로 보는데 그때 왕의 목을 쳐요. 왕의 목을 쳤어요. 이제 왕 같은 건 필요 없다. 이제부터 인간들이 제작에 나섰죠. 인간들이 제작을 하는데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 과학+수학입니다, 과학과 수학을 통해서 자연을 정복하고 그 정복된 전리품을 세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세상. 자연은 인간 세상에 잡아먹힐 대상이 된 거예요. 옛날 조선시대나 중세 때하고 완전 달라요. 우리가 보는 세상이 옛날부터 그런 세상이라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다른 사상이 들어옴으로써 개조된, 새롭게 제작된 현실관이에요.

그리고 난 뒤에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누가 혁명가냐 하면 기업가가 혁명가입니다. 왕의 목을 쳤기 때문에 권력은 따로 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시민들 사이에 생산되는 것이 권력이에요. 시민들 사이에 생산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투표 벌써 했습니까? 각자가 투표를 하고... 그걸 민주주의 제도라 하거든요. 투표를 해서 선출된 사람으로 하여금 잘하나 못하나 한번 지켜볼 거야, 두고 볼 거야, 라고 하는 정치제도. 권력은 어디 있습니까? 모든 권력은 어디서 나온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게 헌법 제1조 아닙니까, 1조. 그게 제작된 세상이에요, 제작된 세상.

그런데 누가복음 뒷부분에 보면 므나 비유가 나와요. 한 므나, 두 므나 할 때 므나 비유. 누가복음 19장 27절 봅시다. 19장 27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이걸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주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주인이 주님이에요. “내가 왕으로 왔는데 나의 왕 됨을 인정하지 않아? 이 원수야, 내가 너희를 죽여 버리리라.”라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시는 거예요, 므나 비유. 만약에 충실한 종 같으면 이들에게는 열 고을을 주고 다섯 고을을 줘요. 그러니까 이건 왕정시대에요. 왕정시대로 돌아간 거예요.

누가복음에서의 신앙이라는 것.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신앙이라는 것을 성도라면 다 생각해요. 신앙에 대해서 생각 안할 수가 없어요. 안하면 이상한데...... 뭐냐면 믿음이거든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하는데 사람들 걱정이 뭐냐 하면 과연 나한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내가 천국 가느냐 지옥 가느냐의 관건이 되니까 수시로 자기 마음을 들춰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자꾸 점검하고 싶어 해요. 하면서 생각하는 게 뭐냐? 나 안 믿는 거 같아. 아무리 봐도 나는 나를 믿는 거 같아. 나는 나 말고 차선적으로 주님을 믿는지 모르겠지만 우선적으로서는 나를 믿는 것 같아. 나를 믿으면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성경에 보면 이게 믿음이 아니거든요. 자기 우상화잖아요. 믿을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이게 어떻게 신앙이 되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걱정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없는 믿음을 만들어낼 수 없고 남은 속여도 본인은 속일 수가 없거든요.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서 뭔가 일이 잘 풀리더라도 믿음에 관한 문제가 딱 생각나면 걱정이 늘어지는 거예요.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믿음 없는 것을 본인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믿음에 대해서 누가복음에서는 믿음이란 우리가 아는 믿음이 아니에요. 하여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모조리 100% 다 엉터리에요. 믿음이 뭐냐 하면 순종하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순종하는 거예요. 순종이라는 말은 나는 순종할 사람이고 나에게 지시를 내릴 사람은 따로 있잖아요.

그러니까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일은 나의 일이 아니죠. 그럼 나의 구원 일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죠. 내가 믿음이 있든 없든 거기서 내가 걱정할 입장이 아니죠. 내가 그럴 권리가 없죠. 현재 주어진 환경이 어떤 환경이든지 그걸 그냥 순응하면 되는 거예요. 이 관계가 믿음 관계라 이 말이죠.

본인이 믿음 있는 걸 자꾸 끄집어내려 그래요. 내가 지갑에 돈 넣어놨는데... 자꾸 본인이 믿음을 끄집어내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끄집어낼 수 있는 믿음을 주신 적이 없어요. 믿음을 왜 내가 관리합니까? 그 관계를 말하거든요.

히브리서 10장 16절 한번 봅시다. 오늘 참 성경 어지간히 많이 찾는다. 할 수 없어요. 10장 16절,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뭡니까? “기록하리라” 하죠.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의 노트죠. 빈 노트. 빈 노트에~ 무엇을 채워야 할까. 우리는 그냥 노트에요, 노트. 쓰여진 대로 주께서 쓰시는 대로 사용되고 쓰여질 뿐이에요.

노트가 글씨에 대해서 걱정하지 맙시다. 뭐를 새기든지 뭐를 집어넣든지 그건 우리가 걱정할 입장이 안 됩니다. 그걸 바로 수동적 자율성이라 해요. 시키는 대로 어딜 가든지 우리는 하면 되니까요. 그날 이후에 하나님의 법이 뭐냐? 아예 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생각 속에 주님께서, 지킬 필요도 없어요, 아예 주님의 완성된 법을 거기다가 새겨버렸다 이 말이죠.

새겨버렸으니까 내가 나를 지킨다는 것, 내 법을 지킨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그 선을 우리가 넘어서버리죠. 내가 내 법을 지키는 게 아니고 주님이 이미 완성된 법을 위해서 우리를 갖고 노시는 거예요. 활용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17절에 보면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치 아니하리라” 이 말씀이 사실 어려워요. 한번 들어보세요.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기억치 아니하리라는 이 말씀 있잖아요. 말씀을 우리 안에서 계속 생산하고 발생하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와 우리 불법을 기억하게 할까요, 안 하게 할까요? 하게 하잖아요.

기억을 하게 하시고 그다음 18절, “이것을 사하였은즉” 다 용서했다. 그러니까 용서를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와 불법을 늘 기억도 하게 하시고 기억 안 된 것은 더 살아서 경험케도 하시고. 위대한 용서의 승리를 위하여.

강남 강의에서 제가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옛날 최민수 나오는 드라마 제목을 이야기했죠. <여명의 눈동자>. 그러니까 우리 마음을 눈동자라 보는 거예요. 강남강의 할 때 누가복음 그대로 나와요. 우리 마음의 빛이 눈으로 들어온다고 되어 있어요. 그 눈동자가 이렇게 있는데 그걸 살포시 떠보는 거예요. 뜬 만큼 여명의 면적이 넓어지는 거예요, 뜬 만큼. 뜬 만큼 빛이 들어온 만큼 우리의 눈이 떠지는 거예요. 내가 구원 받았다,가 아니라 빛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빛아, 이리 들어왔어요? 할 필요 없어요. 여명의 눈동자 뜬 만큼 빛이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들어오게 되면 내 속은 완전히 어둡고 무의미하고 썩었다는 사실이 들통 나죠. 어찌 기뻐하고 뛰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 인생에 대해서 누가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에요. 내 인생이 내가 다룰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 내가 나에게서 손을 놔야 된다는 겁니다.

대구강의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대구강의 마지막에. 누가 너를 정죄하느냐? 아무도 없나이다. 누가 너를 정죄하느냐? 아무도 없나이다. 아무도 없어요. 스가랴 3장에서 여호수아의 옷에 대해 여호와 보는 면전에서 여호와께서 법을 주죠. 저 옷 벗겨라! 그리고 그다음에 뭡니까? 저 옷 입혀라! ‘벗겨라, 입혀라’ 하는 그 법이 현재 우리 성도의 마음에 스가랴 3장으로 들어와 있는 거예요, 이게. 그러니까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는 거죠.

그런데 이러한 감추어진 주님의 복음이 등장하면서 어떤 자들이 등장하느냐 하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는 자들이 어떤 결과와 어떤 파탄이 나는지 누가복음 17장 32절에 보면 나옵니다.

저는 옛날부터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여자는 남자보다 더 착하다는 그런 편견을 갖고 있어요. 이 편견을 없앨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편애가 있는데 누가복음 17장 32절에 보니까 그 편견이 좀 바뀌어져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롯의 처를 생각하라”

그다음 롯의 처가 뭐가 문제냐 하면 33절에, 정말 이건 참, 다 같이 하고 싶은데 나 혼자 하겠어요. 롯의 처가 뭐가 문제냐.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되어있죠.

자, 롯의 처가 왜 소금기둥 되어서 죽었습니까? 롯의 처는 무엇의 대변자냐 하면 자기 목숨을 보존하는 자의 대변자였고 그것이 감추어졌다가 발생된 성전, 숨겨진 하나님의 뜻의 복음에 의하면 잃어버리는 대표자로서 모델로서 롯의 처가 등장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걸 보고 우리 마음밭에 ‘롯의 처를 생각하라.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봅시다. 롯의 처가 평소에 자기 목숨 보존하겠다고 길길이 뛰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죠. 그냥 가정주부였어요. 제 편견에 의하면 그냥 착하디 착한 보통 여성들 중 하나입니다. 제 편견에 의하면. 제 잘못된 견해에 의하면. 그런데 천사를 보내어가지고 갑자기 잘 살던 자기 전셋집 빼라 하는 식으로. 그 집 사는데... 롯의 집 사는데 얼마나 애 많이 썼겠습니까? 영끌, 영혼까지 끌어다가 대출 받고 했겠습니까? 그리고 패물 같은 거, 결혼할 때 패물. 얼마든지 그것에 대해서는 신빙성 있게 상상할 수 있어요. 하나의 가정주부이니까. 가정주부의 할 일이 뭐예요? 가정을 건사하는 일 아닙니까? 대대로 내려왔던 이 가정의 모든 재산과 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 자기 할 일이잖아요.

그런데 천사가 와서 하는 이야기가 뭐에요? 천사가 남편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더니만 남편이 전하는 말은 뭡니까? “집 비워라.” 집 비우라는 이야기잖아요. 미쳤어요? 그걸 왜 비워요? 아니, 이 집을 왜 비워? 좀 이따가 여기 불바다 된대. 롯의 처가 그래도 처음에 따라 나온 것도요. 믿음이 좋아 따라 나온 게 아니고 남편 가니까 남편이 나중에 밥 먹이겠지, 이래가지고 남편따라 따라 나오다가 기어이 뒤돌아봤잖아요.

아니, 뒤돌아볼 수도 있죠. 있는데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고 미리 주께서 그런 법을 주신 것은 롯의 처를 롯에게 분리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빈틈없는 각본입니다. 네가 붙을 자리가 아니다. 네가 따라가서 천국 갈 게 아닌데 네가 거기 왜 붙어있어? 떼어내기 위한 하나님의 철저함의 표현이에요.

그 뒤에 17장 34절 한번 봅시다. 떼어내는 것이 그때뿐만이 아니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왜 방 하나에 두 사람이 잡니까? 혼자 자도 되잖아요. 혼자 살게 되면 뭐가 드러나지 않아요? 데려감과 남겨둠, 떼어짐이 안 드러나잖아요. 그 떼어짐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을 같이 한 방에 잠을 자게 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남자만 그렇게 한 게 아니에요. 35절,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잡초를 뽑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참 조(組)가 무섭네, 조가. 언제까지 같은 조라고 장담을 못하겠죠?

왜 자꾸 이렇게 주께서 말씀하시느냐 하면 바로 감추인 것이 드디어 이 세상에 드러날 때 이미 나타난 것을 죄로 정죄해서 없애버리는 작업을 동반해야 감추인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성전도 마찬가지에요.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이 드러날 때는 기존의 사람들이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성전을 짓고 그 성전에 본인이 노력했다는 의미를 거기다가 듬뿍 담게 돼요.

인간은 도구를 사용해서 노동을 추가함으로써 국가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헤겔이란 철학자가 그 논리로 쭉 얘기했거든요. 국가는 인간 노동의 결집이다 그렇게 본 거예요. 마르크스도 그렇게 이야기했고요. 헤겔의 제자 마르크스도 그런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성경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죠. 인간으로부터 자기의 의미를 키우면서 그걸 떼어내는 거예요. 방향이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떼내는 그 작업을 주님께서는 새로운 성전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그래서 p.221 밑에서 8번째 줄, 성전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지를 제가 말씀드립니다. p.221 밑에서 8번째 줄에 성전은 어떤 신에 의해서 만들어집니까? ‘전쟁하는 신’. 아, 이거 진짜 할 이야기가 엄청 있겠죠. 전쟁한다는 것. 전쟁하는 신이죠.

‘우리가 상상한대로 세상은 흘러간다.’ 이건 우리 생각이죠. 그런데 여기서 세상이 흘러간다는 이 말은 흘러간다, 안 흘러간다 이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여기에 ‘우리’라는 것이 과연 우리가 믿을만한 우리냐, 하는 겁니다.

이 우리에다가 주께서는 시비를 거시는 거예요. 이 우리대신 다른 우리를 하나님께서 출생시킵니다. 이걸 수요 설교에서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스라엘과 후(後)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남은 자, 짜투리라고 여기는데 그건 아니고 새로운 이스라엘.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몇 명입니까? 열두 명이에요, 열두 명. 기존의 이스라엘을 대체할 이스라엘.

기존의 이스라엘에서 그들은 왕도 인정하지 않고 선지자도 인정하지 않았죠. 그런데 후 이스라엘은 뭐냐? 왕이 다 해요. 그걸 다윗 언약이라 합니다. 다윗 언약은 중보자의 기능을 말해요. 다윗 언약이라는 것은 왕이고 선지자고 제사장이고. 제사장도 믿을 수 없고 선지자도 믿을 수 없고 왕도 믿을 수 없는데 주님께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홀로 다 하시는 거예요.

제사장 되시고 또 심지어 어디까지 되시느냐 하면 스스로 제물 되시고. 그다음에 또 스스로 성령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아서 주께서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사람이 되시고 그다음 승천하시고 난 뒤 자기 성과의 확장을 위해서 성령을 또 우리에게 친히 주시고자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북 치고 장구 치고 홀로 다 하시는 겁니다. 할 때 그 근거가 뭐냐? 주님 자신이 새롭게 발생되는 그 절차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을 시킴으로서 우리는 동일한 공간, 성전에 함께 계심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한 세상과 우리가 생각하지 않은 세상의 전쟁의 끝은 누가복음 23장 30절에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 아직 안 끝났어요. 누가복음 23장 30절, 이건 제가 읽겠습니다.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죠.

인간이 염두에 두었고 생각했던 모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그동안 우리가 예상 못한 다른 것에 의해서 같이 무너지고 함몰되어야 되는, 롯의 처(아내)처럼 전부다 파묻혀버려야 될, 우리를 없애 제거해야 될 그러한 일을 누가 벌이신다? 주님이 일관되게 일을 벌이고 지금 우리한테 오고 있어요. 그래서 국민의 힘하고 민주당 싸우면 나중에 땅에 파묻혀서 벙커 안에서 서로 싸우라 하세요. 어차피 다 파묻혀요. 오늘 제목을 ‘파묻힌다’고 보시면 돼요. 깜깜하지 않습니까? 주의 일은 우리를 파묻어버리는 거예요. 조폭도 아니고...... 파묻는 이유는 빚 안 갚았기 때문에 파묻는 거죠.

아까도 언급했지만 인간들이 그동안 얼마나 이 세상을 자기 위주로 인간 위주로 살려고 애썼습니까? 옛날 중세 때는 장날이 있었는데 이게 시장으로 바뀝니다. 시장으로 바뀌면서 시장에서 교환의 가치가 있는 것들만 남고 교환의 가치가 없는 것들은 도태되도록 시장 자체가 진화하고 진보, 더 발달하게 만들었어요. 발전은 아니고 발달하게 만들었어요, 시장 자체를. 시장의 경제적 바탕에 의해서 세상 현실이라는 것이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나 아까 봤던 누가복음을 보면 이것이 자연과 함께 전부다 함몰되고 파묻히고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 되는 거죠.

자,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정리해보면 숨어있는데 고정되어 있는 것이 서서히 등장하게 되면 모든 변화는 다 거기서 제거대상이 된다고 이야기했고요. 그 점에 대해서는 성전도 예외가 아니라 했죠. 다윗이 성전에 대해서 걱정하고 주의 일 걱정하는 것처럼 ‘집을 지어드리겠습니다.’ 하는 것이 성전에 대한 최초의 의견 제시에요. 하나님께서 그 인간적인 면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성전을 허락했고 그래서 만든 것이 솔로몬 성전이에요. 솔로몬 성전 다음에 역사적으로 나타난 것은 헤롯 성전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에 보면 성전을 측량하는 천사가 나오죠. 그 천사가 생각하는 성전은 인간 세계에는 감추어진 것이라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수련회 때 저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첫째 시간에는 성전을 측량할 때 측량하는 그 측도 있잖아요. 그걸 그대로 첫째 시간에 한번 그려보는 거예요, 전체를. 천사가 되어가지고 쫙- 천사가 움직이는 그 노선 따라서 같이 그려보는 거예요. 그려보고 그다음에 그것을 먹물로 하든지 쭉쭉 찢든지 해서 그걸 새카맣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천사가 만든 성전은 인간의 눈에 절대로 띄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안 보이니까 없는 거죠.

그러면 이제 드디어 헤롯 성전만 찾게 되겠죠. 그러니 헤롯 성전이 등장한다는 말은 인간이 이제는 죽을라고 환장했다 이 말이죠. 헤롯 성전만 등장합니까? 오늘날 예배당은 어때요? 마찬가지 취지죠. 성당이나 마찬가지 취지잖아요. 인간의 본성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예배당 지었고 우리 힘으로 성당 지었다. 먹을 거 안 먹고 아껴가면서 예배당 지었다. 이런 부동산 남겼다. 그런 태도, 그 태도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전쟁을 합니다.

자, p.221 이제 봅시다. 누가복음은 이제 그만 봐도 되지 싶어요. 파묻어버렸으니까. 성전도 망해버렸어요. 성전은 망합니다. 모든 성전은 다 망합니다. 거기 보면 p.221 밑에서 4번째 줄에 제가 읽어봅니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출애굽기 15장 17~18절. 이것은 언제 이런 성소가 차려지느냐? 전쟁하지 아니하면 이런 성전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그럼 전쟁의 끝은 언제까지냐? 인간의 이름이 용납되지 않을 때까지 전쟁은 멈추지 않죠. 인간의 이름.

“이름이 뭡니까?”라고 물으면 이름은 내가 여기 엄연히 존재한다는 표시가 이름이에요. 존재하지 않는데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건 반칙이죠. 예를 들어서 네모난 원. 네모난 원이 있을 수 있습니까? 명제하고 그 서술이 안 맞죠. 그런 것은 전부다 논리학에서 추방시키잖아요. 이걸 논리 실증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말 안 되는 이야기 좀 하지 말자. 그걸 빼다보니까 윤리, 도덕, 종교 다 빠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이건 말이 안 되죠. 하나님이 안 보이니까. 안 보이잖아요. 천지는 보이죠. 보이는 것에 보이지 않는 것을 연결시키는 것은 논리에 안 맞죠. 논리에 안 맞는다는 말은 ‘우리들의 합리적 이성을 괴롭히면 가만 안 두겠어!’ 이거에요. 인간들 생각이에요. 대학교수들, 박사들의 특징이 뭐냐? 우리들의 합리적 이성에 안 맞으면 박사 학위 없는 줄 알아, 이겁니다. 신학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신학 대학에 무슨 믿음이 있어요?

진짜 ‘계룡산 무당들 계시 받은 이야기 할래?’ 이런 식으로 현장에서 막 저보고 대놓고 욕했잖아요. 그들은 뒤에 것 읽어보지도 않았어요. 뭐보고 그들은 분노했느냐? 분노의 이유를 내가 모를 리 있겠습니까. 알죠. p.209 봅시다. p.209에 “전통적인 신학과 해석 방법은” 벌써 수상하잖아요. 전통적인 해석 방법이 뭡니까? 개혁주의 신학 방법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류 없는 해석력이 당연히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성경에 접근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다음 구절이에요. “설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오류를 유발하는 의도로 주실 리가 없다고 여기는 태도”.

그러니까 전통 신학에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죠. 귀신을 속여라, 인간아. 그들은 자기를 절대로 죄인으로 보지 않아요. 왜? 합리적 이성이 있으니까. 자신이 거짓이라는 생각을 못 하는 거예요. 자기 아비가 악마라는 생각을 하질 못해요. 그런데 주님의 뜻은 뭡니까? 처음부터 “너희 아비는 악마다.”부터 시작하잖아요, 모든 주님의 말씀이.

그리고 보면 “인간 이해력 자체가” 그 뒷말은 더 화나게 만들죠. “진리를 훼방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면?” 지금 작용하고 있다면 어쩔 건데? 이런 뜻이죠. “본인들부터가 늘 신앙심을 가장해야 하고 하나님을 조작하고픈(제작하고픈) 의식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하는, 이런 문제와 결부된 말씀 해석이 되려면, 인간의 주체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시간 가더라도 이건 내가 다 읽었어요. 시간 가더라도 다 읽었어요. 허리띠 안 끌고 나온 것만 해도 다행이죠. 인간이 자기에게 욕해도 욕한 줄도 몰라요. 어느 대목에서 욕한 줄도 몰라요.

인간의 이름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조건 하에 있는 거예요. 그럼 인간의 이름을 제거한다, 지워버린다는 말은 뭐냐 하면 너 없이도 너 따위 것 없어도 주의 일은 차질이 있다, 없다? 전혀 차질 없죠. 왜? 인간 자리에 누가 오면 되니까? 예수님 본인이 하나님 본인이 사람이 되면 되니까요. 간단하죠. 어차피 인간은 방해만 할뿐 열두 제자도 하나 도움이 안돼요. 사람 없으면 하나님 자신이 사람 되면 되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이 모든 율법을 언약을 다 이루면 되잖아요. 이제 그다음에 남은 것은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었다.’ 그걸 믿도록 주님께서 준비해놓은 성령을 은사로 선물로 주면 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진짜 신앙이 있는 사람은 내가 존재하는 것은 바로 누가 존재케 했기 때문에 존재했다. 내 존재 말고 나보다 선행된 존재가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있다. 그게 바로 순종이고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 반갑고 기뻐하고 뛰놀면서 그냥 고분고분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아, 주께서 의도적으로 이 일을 유발했구나. 일으켰구나. 뭐 하라고? 끽- 내 이름을 지우기 위해서. 우리를 산에다 묻어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 전쟁.

p.222 봅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한 강의를 조목조목 따지면 할 이야기가 많이 있어요. 여기 위에서 5번째 줄 보면 아모스 9장 6절이 언급되어 있죠. “그의 전을” 어디에 세웁니까? “하늘에 세우시며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니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앞서 있던 노아 홍수부터 해서 모든 것이 이미 하늘에 성전이 고정되어 있는 거예요. 다만 인간에게는 감추어졌을 뿐이에요. 감추어졌는데 이미 그것은 확정되고 고정되었어요.

그럼 시간은 어디에 필요합니까? 하늘에서 시간이 내려와서 지상의 것을 묻어버리고 삭제하고 없애버리고 시간을 도로 딱 하늘에 갖다 붙여버리면 시간의 용도는 다 끝나고 공간의 용도도 다 끝나버리면 하나님의 성전은 하늘 나라에 보좌가 거기에 완성체로 있다. 그 작업을 시간 따라 누가 오셨습니까? 주의 이름이 따라왔고 그 주의 이름이 인격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고. 주님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도로 올라가는 그 절차. 절차에 따라 새롭게 발생된 사람들이 성도. 그러니까 성도는 주의 성전이 되죠. 성령이 있으니까 주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 뒤에 봅시다. “즉 본래의 성전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인간이, 인간의 그 더러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보조를 맞추어서 이루어진다.”고 되어 있거든요. 더러운 모습. 인간은 자기의 더러운 모습을 알아요,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인간은 죄가 뭔지 몰라요. 더러운 것도 몰라요. 선악 인식 자체에 갇혀있기 때문에 잘못된 인식 자체에 갇혀있는 그 자체가 더럽다, 안 더럽다를 판정할 수 없습니다. 그 안에 갇혀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걸 판정하려면 바깥으로 나온 사람만 판정을 할 수 있죠.

수요일에 한 것을 다시 한번 설명하겠습니다. 죄 안 짓는 것도 죄다. 죄 안 짓는 것도 죄인 이유가 뭐냐? 인간의 판정이 삭제되지 않는 상태라면 그 모두가 죄가 돼요. 인간의 판정은 선악지식에서 나왔거든요. 선악지식을 따먹은 자체가 죄라는 것을 모르면 그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은 죄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죄 안 짓겠다, 죄 짓겠다 판정 내리는 이것도 죄가 된다 이 말이죠. 그냥 순종하면 되는데 믿겠다, 안 믿겠다, 난 믿는다, 안 믿는다 이것도 죄가 돼버리죠. 왜냐하면 주의 일은 그걸 판정내리는 내 이름을 지우는 것이 주의 일인데 자꾸 뺀질이처럼 요령 부려가지고 안 지워지려고 하는 거예요.

수요일에 한 예를 들면 “어제 만든 계란말이 왜 남겼어?” 이걸 묻는데 “엄마, 오늘 수학 100점 맞아왔어.” 하는 거예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자기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괜찮은 것을 가지고 주의 뜻을 대체하려고 시도하는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이 한 짓이고 그게 바로 오만이고 교만이고 죄가 되죠.

그냥 주께서 사라지라고 환경을 만들어내면 기뻐하고 뛰놀면서 사라져주면 되는 거예요. 드라마나 특히 연극하는 데 그런 게 있잖아요. 오페라 같은 것에서 대본에 보면 ‘노래 부르면서 뒤쪽으로 퇴장한다.’ 그런 대목 있잖아요. 즐겁게 노래 부르면서,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니까, 노래하면서 손 흔들어가면서 퇴장하면 되잖아요. 인간의 이름은 주의 이름과 부딪혀서 박치기당해서 없어져야 될 이름으로서 주의 이름을 드높이는 기능, 이게 바로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p.222 위에서 10번째 줄 보면 “성전은, 애초부터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우호적인 격려와 협력 속에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인간대로,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각기 성전 의미를 고수함으로서 발생되는 영적 충돌 속에서 드러난다.” 영적 충돌, 이게 바로 십자가에요. 십자가. 성전의 의미가 너와 나에게 달랐다는 것을 그대로 까발려 보여주는 사건이 십자가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십자가를 자기 안에 법으로 새겼으니까 십자가가 자기 마음에 새겨졌으니까, 십자가 영이 이끄는 대로 내게 능력주신 자 안에서 모든 것을 그냥 순종하고 따라가면 돼요.

끝으로 이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럼 목사님, 순종을 어떻게 합니까?” 순종을 어떻게 합니까? 빛이 우리의 눈동자를 여명의 눈동자로 떼게 만들어요. 주의 말씀은 우리보다 힘이 더 세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보다 힘 세거든요. 눈 감고 있는 걸 잡아당겨서 기어이 우리 속에 성령의 빛이 들어오게 하시는 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이 왜 기쁜 소식인지를 이제 알았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며 엉뚱한 것만 찾았던 그런 우리를 우리가 스스로를 제거할 수 없는 이 슬픈 소식에 대해서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지워주시니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없는 줄을 저희들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광주강의20220527b 누가복음12장 2절(사라질 성전)-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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