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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5 18:28:08 조회 : 117         
20강-디모데후서 3장 13-15절(성경속경험)230625-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180.11)
20강-디모데후서 3장 13-15절(성경속 경험)230625-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모데후서 3장 13절에서 15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3:13-15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여기에 소개된 자를 먼저 전제해야만 이 성경 속에만 예수님의 믿음이 들어있고, 성경 속에서만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된다는 것이 성립 가능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악함만 존재한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으로 인하여 이 세상의 그 성질이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존재의 뿌리를 갖고 있는데 그 존재의 뿌리가 거짓된 자리에 깊이 기초를 파고 거기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속고 속는 그 자리, 그것이 영원한 자기의 토대라 이렇게 생각하고 거기에 맞추어 사람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왔을 때,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잖아요, 이게 성경 말씀이고, 그 성경 말씀이 완성이 되고, 그런데 못 알아들었습니다. 왜 못 알아들었는가?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가 그 당시 유대인들이나 그리고 일반 유대 모든 백성들이 듣기에는 거짓말로 듣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를 속이는 말로 듣기기 때문에,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과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에 제거할 필요성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달릴 때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이 십자가 달린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제자들은 자기 목숨 하나 살리기 위해서 도망치는 데 급급했죠. 세상 전체가 거짓된 세계를 이미 형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그 시대에만 거짓되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계속해서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파급되면서 그때 그 시절 사람만 나쁘고 거짓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계속적으로 거짓된 세계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십자가 사건이 복음의 핵심 내용으로서 성경을 통해 유포되면서 그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자체가 그때 예수님을 죽였던 그 사람 마음과 일치된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증명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성경을 보고 하나님 말씀 들을 때에 그 성경 말씀에 들어오려면 바로 우리가 남들을 속이고 그리고 거짓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을 하고 성경 속에 들어와야 돼요, 우리 자신이.

그래야 성경 안에 들어있는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 사건이 효과적으로 우리에게 넘어오는 겁니다. 거짓된 자에게만 제공되는, 거짓된 자라는 인식을 아는 자에게만 제공되는 구원의 기쁨. 사도 바울은 우리말로 하면 딱 한 자로 이야기했어요. 거짓된 자를 뭐라고 하냐면 ‘육’이라고 한 거예요, ‘육’

인간을 표현할 때 인간으로 표현하지 않고 ‘육’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물론 반대말은 ‘영’이에요. 육적인 인간이 육적인 애씀으로 육적으로 몰아세운다고 그 인간이 성령 받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육적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육의 되풀이에 불과하고 거짓됨의 되풀이에 불과하지, 그게 영적 세계에 들어가게 하지는 않는 겁니다.

이것은 구원에 실패한 거고 구원되지 못한 상태죠. 그래서 성경을 볼 때 구원받으려고 해서는 안 되고 왜 ‘나는 구원될 수 없는 존재인가’를 성경에서 찾아내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 속에 살아있는 십자가 사건이 다 이루었다는 말이, 지금 이 시대에 그때 처음 일어났던 십자가 사건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외에는 다른 영생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죠.

거짓이 무엇이냐? 거짓이 무엇이냐 하는 그 기준이 와야 견줌으로서 거짓이 등장하는 거예요. 인간들 자기들끼리 모아봐야 거짓을 몰라요. 거짓은 무엇이 거짓이냐? 하나님의, 예수님의 고통을 모르는 게 거짓이에요. 자기 고통에 정신 팔려있는 거, 이게 바로 거짓입니다. 편도선 암에 걸렸다든지 이런 것 전부 다 자기 고통에 바짝 독이 올라 신경 쓰고 있죠.

로마서 3장 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인간을 육으로 대하면서 왜 인간은 육이냐? 다시 말해서 왜 인간은 영의 존재가 될 수 없는가에 치중하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3장 4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모든 인간은 거짓된 거예요. 엉터리다 이 말이에요. 인간은 자체가 엉터리고 속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 시대에 살면서 교회 나오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지만, 거짓된 자들을 통해서 무엇이 뒤바뀌어 있냐면, 복과 저주가 뒤바뀌어 있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복이라는 것은 내가 되고 싶은 것이 복이라고 여기거든요. 하나님과 인간 쪽의 복과 저주가 완전히 바뀌어 있기 때문에 내가 되고 싶은 것을 해주지 않는 게 복이고 내가 되고 싶은 것이 바로 저주가 되는 겁니다.

간단하죠? 전혀 어려울 게 없습니다. 주님이 주신 복은 인간이 거짓이기 때문에, 저주받는 존재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복은 거부해버립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원하는 복은 하나님 쪽에서 거부해버립니다. 이게 저주죠. 정말 간단해요. 나는 안 아파야 되고, 부자 돼야 되고, 가정 화목되어야 되고, 일체 사고나 사기당하는 일이 없어야 된다, 이게 거짓이고 저주인 겁니다. 이게 저주받은 거예요.

안 아파야 되고, 부자 돼야 되고, 가정이 화목해야 되고, 일체 사고 나면 안 되고 사기당하는 일 없는 것, 이게 바로 저주받은 마음 자세입니다. 간단하죠. 자기 포부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면 안 되잖아요. 인간은 자기 내부에 자기가 자꾸 속고 싶은 거예요.

우리 자체가 이걸 바꿀 수가 없어요. ‘나는 아프고 싶어요, 나는 가난하고 싶어요, 가정 다 깨지고 싶어요, 계속 사고 일어나게 해주세요, 모든 사기는 다 나에게 덤벼들게 하옵소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걸 사도 바울 통해 ‘육’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했죠. 그 ‘육’이 있는 그대로 성경 속에 “들어와! 그냥 들어와!” 육으로 그냥 들어오라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느냐면, 인간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의 거짓된 것은 모르고 자기 불만스러운 것만 바깥으로 해소하기 위해서 손을 젓는 식으로, 이 촉수를 젓는 식으로, 육적인 모습이 그래요. 잡아당기고 그렇단 말이죠. 자꾸 끌어모으고, 미친 듯이 끌어 담고 미친 듯이 그것을 지키고. 육의 일은 그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육’은 계속 ‘육’으로 가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것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아요. 다만 늙어갈 뿐이죠. 전에도 ‘육’이었고 태어날 때도 ‘육’이었고 어린아이도 ‘육’이고 중간도 ‘육’이고 나중에 늙어서도 끝까지 ‘육’이에요. 근처에 지나가다 좋은 건 다 담고 그걸 지키는 거예요.

‘육’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요, 오르막길에 구슬 주머니 가지고 가다가 구슬 주머니가 한 번 터져보세요. 구슬이 밑으로 막 내려가잖아요. “어어어어!” 그때는 정신없이 주워 담잖아요. 그게 ‘육’이에요. 내가 평생 끌어 모아놓은 것 밑에 굴러가면 그거 허겁지겁 주워 모으는 것 그게 ‘육’이에요. 어른도 애도 예외가 없습니다.

본인이 구슬 주머니고요. 내가 나 됨에 의해 내가 귀히 여겼던 구슬들 담아놓고 사력을 다하여 그것을 지키는 것 그게 ‘육’입니다. 그게 거짓된 거예요.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존재 뿌리를 거짓에다가 딱 꽂아놓고 잘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끌어모으는 방법이 어릴 때는 물건 같은 거 막 주워 담겠지만 어른 되면 그걸 서류상 법적으로 지키려고 해요. 그게 대표적인 것이 주민등록이에요. 호적 정리를 하는 거예요. 호적 정리하고 집 팔 때나 살 때나 전세 나올 때 등기소에 가서 떼보죠. 혹시 나보다 먼저 건물 선점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경매 몇 번 유찰 됐는지 그걸 보잖아요. 이게 서류상이고 돈 주고 구입하면 법적으로 확실히 내 거 되느냐를 확실히 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이 땅에서 자기의 뿌리를 확고히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호적 정리, 서류상 법적으로, 그거 다 말짱 소용없는 짓이에요. 우리의 호적이 하늘나라 호적이 되어 있어야지 땅 위에서 법적으로 서류상 한다고 해서 그것은 육적인 인간이 육적인 인간으로 그냥 있을 뿐이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거짓되고, 거짓된 자체가 ‘육’이기 때문에 어떤 조치를 해도 육적으로만 조치를 할 뿐이에요. 할 수가 없습니다. 며칠 전에 사고가 있었잖아요. 애들 둘을 낳자마자 죽이고 냉장고에 갖다 놓은 엄마. “애를 왜 죽였냐?” 하니까 생활고 때문에 죽였다는 거예요.

아이가 이미 3명이나 있는데, 두 명을 더 낳은 거예요. 희한한 시추에이션이에요. 세 명 됐는데 애를 또 둘 낳았어요. 남편은 아내가 피임 한 줄 알았는데 피임이 안 됐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애 셋을 왜 낳았는가?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거예요. 여러분, ‘행복하기 위해서’와 생활고라고 하는 것을 한 번 비교해 보세요.

인간은 행복하고 싶어 합니다. 아이 많이 낳고 행복하게 오붓하게. 그런데 그 여자가 모르는 것은 내 행복에 대한 의지보다도 돈에 대한 의지가 더 강하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그 여자의 잘못은 돈을 우습게 본 거예요. 내 행복에만 정신이 팔렸죠. 옛날에 하는 말이 ‘애 낳으면 자기 물건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다’ 그걸 믿은 거예요. 그 여자의 잘못은 돈에 대한 모독죄입니다. 모욕죄에요. 어떤 개인이 돈을 모욕할 수 있습니까? 행복이라는 이유로? 감히 돈을 그렇게 우습게 보다니요, 돈을!

그래서 사람이 공부를 하고 이 세상의 지혜를 알면 알수록 이 세상에서 나의 행복보다 더 센 것이 있다는 것을 감을 잡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은 돈 없이는 못산다는 것 그게 모든 것의 주도권을 딱 쥐고 있었던 거예요. 그게 시건 난 것이고 이게 거짓의 완판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바르게 산다 할지라도 착하게 바르게 산다 할지라도 돈 위세 앞에서는 그 바르게 함이 아무짝도 소용없이 다 날아간다는 거예요.

따라서 이 세상에서 돈 없이 산다는 것은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면 참말은 뭐냐? 사람은 행복도 건강도 돈이 있어야 보장이 된다. 돈이 있어야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 이것이 바로 참말이고 진실된 겁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어요. 예수도 필요없고 하나님도 필요 없어요. 돈 만 있으면 돼요. 제가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주니 속이 시원하지요. 여러분 속 마음을.

그래서 이러한 시험을 할 수 있어요. 인간이 얼마나 거짓된가를 시험하는 방법은 쉬워요. 짜장밥이 있는데 “저게 뭐야?” “이게 짜장밥이야.” “이게 어디서 거짓말을 해? 너는 자체가 거짓인데 왜 거짓말 해?” ‘맞아. 배웠지. 내가 거짓이지. 거짓같으면 이런 참말을 하면 안되는구나.’ “그러면 이것은 카레밥이야.” “이게 어디서 참말을 하는 척을 하고 있어?” 이래도 거짓이고 저래도 거짓이고 인간은 말하는 것 자체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은 말을 하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본인이 모르게 되어 있어요. 짜장밥을 짜장밥이라고 해도 거짓이고요 짜장밥을 카레밥이라 해도 거짓이에요. 인간 자체가 거짓이기 때문에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거짓임을 그대로 드러내는 겁니다. 자기의 거짓임을.

왜 인간은 거짓말을 하느냐? 왜 인간은 거짓말밖에 못하고 거짓말만 해야 되는가? 정답은 인간은 참말을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래요. 거짓을 싫어하고 참말, 진짜 바른 말만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그 바른 말은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사회의 경험에서 나온 겁니다.

인간의 경험에서 나온 것은 인간이, 내가 살기 위해서 뭐든지 진실 되고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 이것만큼은 거짓이 아니라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돈이 있어야 살고, 살기 위해서는 내가 돈을 벌어야 된다는 이것만은 진실이다, 라고 하는 이 말은 누가 와도 이것은 거짓일 수 없어. 돈이 전부야.’

거짓일 수 없다는 이것은 우리가 바깥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겁니다. 바깥 경험을 통해서 아는데, 교회 50년 60년 필요 없어요. 바깥 경험이 최고예요, 이 바깥 경험은 우리 속에 있는 거짓의 속 경험을 하나님께서 바깥 경험으로 마주하게 만드는 거예요.

제가 사람들이 진짜로 믿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욥기 1장 9절에서 11절에 보면, 그게 누구인지 말은 나중에 해드릴게요. 어떤 이가 말하기를,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Really? 이거 진짜 아니에요, 이거? 어떻게 우리의 본심과 똑같은 이야기를 어떤 분이, 어떤 자가 하는 거예요? 또 욥기 2장에 ‘하나님이 말씀하기를 욥같이 정결하고 순진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악에서 떠난 이런 자가 없다’라고 하니까 또 어떤 자가 말하기를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건강문제 가지고 처 버리면 주께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가죽으로 덮힌 인간, 육적 인간의 본심입니다.”라고 어떤 이가 말했어요. 그자가 누구냐? 사탄입니다. 악마입니다. 악마는 참말 외에는 할 줄을 몰라요. 거짓말을 할 줄 모릅니다. 어디에서? 인간세계에서. 인간세계에서 참 말하는 것은 악마밖에 없어요.

그러면 반대는 뭐냐? 인간 세계에서 거짓말만 하는 것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어요? 무슨 배짱이야? 이게 배짱인거야, 아니면 불신인거예요? 분명히 정리돼야 해요. 남 믿고 천당 간다고 하니까 오기로 믿는 거예요, 아니면 우리가 가짜 예수를 제조해서 가짜 예수를 믿고 있는 겁니까? 사탄으로 안에 내용물이 꽉 차 있는 가짜 예수를 믿고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 자체가 거짓인데. 우리 자체가 거짓이에요.

그런데 거짓된 인간이 예수를 믿는 그 예수는 제대로 거짓, 악마적, 예수 다시 말해서 “예수여, 우리에게 진실만 이야기해주세요.” 이거 무슨 뜻입니까? 육적인 인간의 특징은 뭐냐? 인간은 어릴 때부터 어떤 타인에 대해서 호감을 느낄 때는 그 사람이 내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내가 채택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에요. 내게 기분 좋게 하는, 내가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가진 자에게만 내가 손을 내밀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그러니까 예수를 믿든 하나님을 믿든 내 맘에 드는 하나님, 예수를 믿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내’가 뭐냐, 거짓된 나거든요. 거짓된 나의 친구는 누구밖에 없느냐? 악마밖에, 사탄밖에 없어요. 그 악마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였잖아요. 지금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는 거예요, 상황이.

예수 믿는다는 것만큼 거짓말이 없어요. 그러니까 성경에 들어올 때는 예수 안 믿고 들어와야 된다니까요. 내가 믿는 예수를 버리고 성경 속에 들어와야 돼요. 그러면 성경 속에 모든 것이 “네가 거짓되다.” 할 때 “오케이, 거짓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돼요. 자꾸 신자라고 사칭하지 마시고요.

욥기에 계속 보게 되면, 욥에게 거짓된 친구들 3명이 딱 붙어요. 욥이 아프니까. 딱 붙을 때 데만 사람 엘리바스, 에돔 사람인데, 에돔 사람 엘리바스가 4장 6절에서 이렇게 합니다.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이 말은 뭐냐?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너의 경건은 어찌 됐지? 네가 그렇게 자랑하고 희망했던 그 흠 없는 생활이 어찌 됐지?”

그러면 욥에게 하나님께서 친구들을 붙여준 것은 거짓과 참은 견주어 봐야 알기 때문이에요. 겨뤄 봐야, 견주고 같이 옆에 대조해봐야 알아요. 우리의 거짓됨은요, 예수님이 우리 속에 개인 교습해가지고 예수님과 우리가 견주어 봐야 내가 거짓인 걸 알아요. 성경 자체가 예수님의 말씀이 완성되는 거거든요.

성경 속에 들어온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거짓된 자로 소환된 겁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 들어오지 않고 성경을 외부에서 관찰하고 관람하고 있어요.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내용이 어떻다 저쨌다 이야기하고. 우리의 속 경험이 얼마나 거짓되냐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육적이라는 사실은 성경 안에 들어와 성경 안에서 새로운 체험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빠져나오게 해서 약속의 땅에 갈 때 일부러 어디로 집어넣느냐면, 홍해 바다 앞으로 집어넣었어요. 그때 홍해 바닷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죽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시는구나.”

맞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는 분 맞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은 우리를 죽인다는 것을 기쁘게 여기지 않고 분노를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울분을 터트리고 있다는 거예요. 민수기 2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으로 개인 교습을 시킵니다. 무엇과 더불어? 불뱀과 더불어서. ‘불 뱀이 딱이야. 딱이야, 불뱀이 딱이야. 너희들에겐 불뱀이 딱이야.’ 불뱀과 더불어서 네 속에 있는 거짓됨을 바깥 현실화시키는 중인 거예요, 주께서. 이 얼마나 친절합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거짓됨을 감출 생각을 못 하고 그걸 드러내서 바깥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특별히 이스라엘에게만 사적으로 교습해주는 거예요. 개인 교습 해주는 겁니다. 비대면 수업 아니에요. 대면해서 실제 생활 속에서 매일같이 농사지으면서, 사업하면서, 직장 다니면서, 우리가 얼마나 거짓된 존재인가를, 우리가 얼마나 악마가 말한 것을 진실로 여기면서 살아온 그런 속마음을 지녔는지요.

부자고, 안 아프고, 그리고 무언가 가정이 화평할 때 그때서야 하나님께 감사하는 소리가 나오는 이것을 보고 악마가 우리를 얼마나 놀려댔겠습니다. “이 가짜야, 이 가짜야.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이 인간들아. 그러니까 네가 내 소유지. 그래서 나와 함께 지옥 가는 거야, 너희들은. 딱이야. 지옥 가는 모습이 딱 그 모습이야.” 성경을 몇 독 했습니까, 백독, 2백독, 아무 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 앞에 적치물이에요. 치워버려야 돼. 방해물, 교통방해물,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방해 놓은 방해물로 악마가 딱 주님 십자가 앞에 십자가 가리는 용도로 설치해놓은 존재가 우리 존재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그걸 치워버리는 거예요. 이 거짓된 거 치워버려요.

그래서 욥의 친구가 그렇게 놀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기 6장 25절에서 욥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냐? 네가 친구라면 나에게 깨우쳐줘. 내가 입 좀 다물게.” 욥기 6장 25, 26절에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그렇지만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뇨 너희가 말을 책망하려느냐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

더 나아가서 욥의 친구 이번에는 지금의 이라크 쪽에 살고 있는 수아 사람 빌닷이라는 친구가 등장해서 또 화를 돋굽니다. 뭐라고 하냐면, 8장 7절, 교회 다니면서 이거 모르면 간첩이에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거 진짜 물건이죠.

이 말은 그 말을 내뱉은 빌닷 본인이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창대하는 그것이 복이라는 겁니다. 잘되는 게. 진짜 유도 선수해서 엎어치기 좀 했으면 좋겠어, 정말. 엎어치든 뒤집어치든 패대기를 쳤으면 좋겠어요 정말. ‘네가 지금은 변변치 못하지만 나중에 창대하리라.’ 이건 마귀 말입니다.

어떻게 욥기 1장에 나오는 마귀 말이랑 똑같은 것을 되풀이하고 있는지요. 왜? 모든 인간들이 마귀의 노예고 거기에 소속되어 있고, 그러니까 마귀 생각과 인간 생각이 어떻게나 똑같은지, 그러니까 메시아가 올 때 인간들이 우르르 쫓아가서 예수님 죽였잖아요.

예수님께서 인간에 대해서 이 한마디로 인하여 끝냈어요. 누가복음 23장 34절 “아버지여, 저희가 하는 일을 저희가 모릅니다.” 예수님만 알아요. 아버지는 예수님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몰라요. “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욥은 본인도 기가 막혔어요.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받아서 이런 욕을 얻어먹는지.

그것은 인간세계에 사탄이 관여했기 때문에 그래요. 욥기 1장에 보면 인간세계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는 두 가지 유형, 하나님과 사탄이 개입해서 벌어진 결과물이 인간세계입니다. 요한 1서 4장 1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되어 있어요.

인간은 육의 세계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인간의 외곽에 영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영의 세계가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받는 천사가 있고 하나님의 말에 토를 다는 그러한 악한 천사가 인간 외부에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천사의 활동을 허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 내부에 있는 거짓됨을 바깥 경험으로 할 수 있도록 악마의 활동을 용납, 허락하는 겁니다. 우리는 바깥 현실을 만나고요, 그 현실을 만나면서 내가 얼마나 거짓된 존재인지를 파악해야 돼요.

성경말씀은 줄줄 외운다고 말씀이 아니고 그게 현실로 경험돼야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처럼. 그들로 하여금 죽음의 바다에 가고, 그들로 하여금 불뱀과 더불어 하나님을 배우게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성경 배운다고 하니까 어디 뭐 에어컨 켜놓고 배우는 게 아니에요. 불뱀과 더불어서, ‘불뱀이 너와 딱 어울린다. 물어뜯는 불뱀.’ 보이스 피싱이 너하고 딱 맞아요.

계속 욥의 진척 과정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 8장 지나 9장 33절에 보면 욥이 중재자를 요청합니다. “하나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게? 왜 저에게 엉뚱한, 난데없는 고난이 옵니까?” 9장 32, 33절에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이 중재자를 요청합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욥의 자리에다가 메시아를 꽂아주려고 하는 거예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비난을 당하는 분으로써 장차 우리의 구원자가 옵니다. 그러면 거기에 들끓는 예수님 주변에 있는 오늘날 우리까지 포함한 모든 인간들은 욥의 친구들이죠.

자기의 거짓됨은 모르고 자기가 세상 살아가면서 알았던 경험, 그 경험들, 그 구슬 주머니에 있는 구슬 지키려는 인간들, 미친 듯이 돈 모으면서 그게 행복이라고 여기는 인간들, 그 인간들과 비교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거든요. 사는 게 남는 거라고 여겼던 것, 그것이 참된 말이고 거짓이 아니라는 것. 그런 것에 익숙해진 인간들을 예수님 주위에 포진시키는 겁니다.

아까 누가복음 23장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분명히 했어요. “주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모릅니다.” 했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정말 성도라면 주께서 모른다고 했으면, 이제 성도가 됐으면 “주께서 하는 일은 우리에게 뭘 알려주기 위함입니까?”라는 말로 질문을 해야 돼요.

“주님, 저 바르게 살려고 애썼습니다. 짜장밥을 짜장밥이라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우기지 말고. 근원적으로 거짓됐어요. 왜? 악마와 한통속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거짓된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면에서 거짓되었습니까?”를 주님 앞에 이야기를 해야죠.

이 답답증을 미리 풀어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성도라고 하면, 이 거짓된 성도가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답답하죠? 미리 말씀드리면, 요한복음 21장 15절에 베드로가 대하는 태도가 나옵니다. 주님이 물었거든요. 베드로가 예수님 부인하고 도망치고 난 뒤에 고기 잡으러 갔을 때 주께서 부활하고 난 뒤에 찾아간 그 대목입니다.

“시몬아,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문제를 던졌어요. 그러면 이 거짓된 인간이 주님 앞에서 어떤 태도와 자세를 가지고 살면 됩니까, 에 대한 답변을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건 주께서 아시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거짓된 걸 이미 주께서 꿰뚫고 있다는 것을 제가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라는 뜻이에요.

‘따라서 거짓된 것이 거짓된 나의 인생의 주도권을 쥐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이 바통을 넘겨드리겠습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주께서 하고 싶은 대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라고 지시만 내리세요.’ 거짓된 게 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주님의 지시 따르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 지시 따랐다고 해서 우리가 진실 된 것은 아니에요. 그 지시에 따름으로서 미처, 마저 몰랐던 거짓됨이 죽을 때까지, 육신이 살아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바깥으로 경험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되고, 감사해야 돼요. 왜? 우리 호적 정리가 됐기 때문에.

우리 호적 정리가 동사무소가 아니고, 주민 센터가 아니라, ‘예수 안’에 이미 호적이 정리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성도에 있어서 모든 인생에 모든 문제는 근원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제거되었습니다. 빰빠라밤 빠밤~! 축하드립니다! 모든 문제는 해결됐어요. 암에 걸리든 갑상선 암이든 사기를 당하든 보이스피싱을 당하든 그게 아무 문제가 아니에요. 끝났어요. 끝났습니다. 호적 정리가 됐어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미 꽂혀버렸습니다. ‘너는 죽었고 너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 호적의 뿌리가, 우리 뿌리가 하늘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걸 골로새서 3장 5절에서는 탐심이라고 하고 우상숭배라고 했어요. “쓸데없이 아직도 네가 참될 수있는 가능성을 내다 보냐? 아직도? 아직도? 그렇게 너는 너를 몰라?” 욥이 13장 1절에 또, 계속해서 친구들이 거머리같이 달라붙어서 “네가 죄지었기 때문에 벌 받았잖아.” 뭐 이렇게 달라붙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기 13장 1절에서 하는 말이, “나도 자네들만큼 나도 알고 있어. 내가 지금 모르고 한 게 아니야. 내가 고난당하기 전에 너희들보다 더 많이 알았지. 무엇이 진실이냐, 진실 알았지. 그런데 내가 알던 하나님이 바뀌어져야 된다는 사실에 직면해있어.” 내가 알던 하나님이, 이게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지금 내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문제로 인하여 다른 하나님으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감 잡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이야기해줄 친구들이 없네.” 이렇게 욥은 나옵니다.

하나님을 교체했다는 말은 내가 교체됐다는 거예요. 전에는 진실 된 내가, 보다 진실 됨을 더 추구하게 되면 진실 된 천국 간다는 그런 사고방식만 있었는데 이제는 방향이 그쪽 방향이 아니고 반대로 바뀐 거예요. 매일같이 날마다, Everyday, 매일 우유 있죠, 매일 같이 집에 오는 거, 매일 같이 나로 하여금 거짓된 모든 것을 거짓되게 토해내게 만드는 그런 하나님, 어디 없습니까? 그런 분 없습니까? 왜 없겠어요? 어디 있는가? 성경 속에 있죠.

시편 14편 1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이렇게 되어 있죠. 시편 5편 6절에 보면 거짓말하는 자는 주께서 멸하신다, 했거든요. 여기에 대해서 성도가 아닌 자들은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거 싫어한다, 그렇다면 난 바른 소리, 참말을 해야 되겠네.’ 이거는 백 프로 지옥 가는 불신자입니다.

그러면 성도라면 어떻게 하느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베드로의 처신처럼 그렇게 처신하는 거예요. 5장 11절에 보면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께 피하는 거예요. 주님께 피하는 겁니다. 주님께 피한다면 주께서 준비한 것이 뭐냐? 시편 19편 3절과 4절에, 2절부터 보면,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한다고 돼 있잖아요.

이미 인간 빼고 나머지 모든 피조물들은 진짜 하나님에 대해서 이미 소식을 자기들끼리 전하고 있었어요. 인간들만 선악과 따먹고 악마 편이 돼 타락해서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이 모르는, 들리지 않는 소리가 들리는 소리를 집대성해서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제공된 것이 뭐냐? 이게 율법입니다. 흩어져 있는 소리를 하나로 집약시킨 것이 율법이에요.

시편 19장 계속 나오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인 거예요. 율법이고, 그 율법의 핵심, 율법 중앙에 제단이 있어요. 성전이 있어요. 성소가 있어요. 그 제단이 건축물인데 이 건축물이 인물로 바뀝니다. 시편 22편 1절에 나와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세상은 다 거짓된 것입니다. 거짓됐는데 이 자연 세계는 거짓되지 않은 하나님의 소리를 자기들끼리 소통하고 있었어요. 자기들끼리 소통하는 들리지 않는 소리가 이스라엘만큼은 특별히, 특별히 율법이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일으켜 시내산까지 오게 해 율법으로 주었습니다.

그 율법, 십계명 안에 들어있는 내용 중에 네가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거짓말 하지 마라, 이거예요. 이미 속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인간들이 속고 있다는 뜻이에요. 지키라는 게 아니라 그 율법이 너희가 평소에 하는 짓거리가 속는, 거짓말하는, 십계명을 위반하고 있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주께서는 율법을 주신 거예요.

그 율법의 핵심이 뭐냐? 제사법이에요. 제단이니까. 제단!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뭐라고 하냐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고 했어요.’ 어떤 양이 가는데 그 양이 뭐를 짊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게 보이는 거예요. 누구에게? 세례 요한에게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거예요. 세상은 죄 밖에 없으니까, 그 죄를 예수님이 지고 가고 있는 거예요.

이게 성경 속의 내용이에요. 성경 속의 내용에 가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예수님의 성경의 핵심이고 그분이 흘린 피가 전부에요. 성경 내용의 전부입니다. 세상 죄 때문에 돌아가신, 거짓된 우리 때문에 피 흘리신 그분의 내용이 성경 내용이 전부에요. 그래서 뭐 전도, 선교한다고 깝죽대고요. 안 돼요.

그렇게 해서 시편 22편에 왕이 됐는데 그 왕이 어떤 왕이냐? 고난받는 왕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래서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던 속임이 뭐냐? 예수님의 고통을 모르는 게 ‘속임’이에요. 예수님의 고통을 모르게 하기 위해서 악마는 인간을 인간의 사적인 고통에 매료되게 만들었어요. 예민하게 살도록 만들었어요. 뭐 “바람 불어서 과일 다 떨어지고 이게 뭐야?” 그런데 신경 되게 쓰게 만드는 거예요. “애 과외해도 성적 자꾸 떨어지고.” 이런데.

시편 30편 3절에 보면, 세상 죄를 진 어린양으로 오신 그 분이 우리에게 해주는 것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예수님에게 있었던 일만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 몽땅 거짓말입니다.

짜장밥을 가지고 짜장밥이다, 이게 거짓말이에요. 그러면 짜장밥을 보고 뭐라고 해야 거짓말이 안 되는가? ‘짜장밥을 먹으면서 짜장밥이라고 이야기하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나는 죽어 마땅하다.’ 이렇게 돼야 이게 진실이에요. ‘3 빼기 2는 1이라는 것이 맞는 답이라고 여기고 있는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주여.’ 이렇게 돼야 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는 속이는 자들은 속고 속이지만 반드시 뭘 경유해야 된다? 성경을 경유해야 진실이에요. 성경이 율법이잖아요.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거짓됨을 알고 그 성경 안에서 우리 때문에 애매하게 억울하게 피 흘려 죽었던, 세상 죄를 지고 가서 죽었던,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세상 죄를 지고 죽었던 그분을 만나는 거예요. 그분을 만나면서 우리의 속에 있는 거짓된 것이 예수님을 어떻게 아프게 하고 죽게 만들었는지 그 경험을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혹독하게 접해야 하는 거예요. 이것만이 진실이에요. 이게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그 취지로 어떤 여인을 찾아가는데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죠. 그 여자는 가족이 목말라서 우물 긷는 것이 거짓된 행동이라는 생각을 추호도 못 해요. 그것을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자는 말합니다. “목말라서 물 길러 왔는데 왜요? 그게 뭐, 시빗거리가 됩니까? 내가 목말라서 물 길러 왔는데 뭐가 잘못입니까?”

주께서 말합니다. “네 남편 데려와.” 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네 남편 데려와.” “남편 없나이다.” 요한복음 4장 16절, 17절. 지금 여자입장에서는 물 긷는 것이 거짓된 행동이라는 것을 생각을 못 했죠. 그러면 물 길지 말까요? 그러면 굶어 죽을까요? 그럴 수는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행동 하나를 통해서 자기 속에 있는 과거사가 경험되는 거예요.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 속의 거짓됨을 주님이 자기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 십자가 사건 앞에 소환시켜 경험시킬 때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거예요.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그 경험요, 그 경험! “너는 아직도 주도권을 네가 쥘래? 네 인생의 주도권을?” 그걸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남편 데려와라.” 여자가 말합니다. “심 봤다.”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 버려두고. 물 길러 와서 물동이를 버려두면 어떡해요. 물동이를 버려두고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하죠. 그게 억지였습니까, 기쁨이었습니까? 기쁨이었어요. 감격이었어요. 자기 호적 정리가 된 겁니다. 내가 주도권을 쥐는 그것이 이제는 내 속에 예수님이 샘물이 되어서 예수님의 성령이 나오는 그러한 장소로 주께서 나를 거기다, 주님이 내 안에 꽂아주신 거예요.

끝으로 요한복음 20장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했죠. “그것은 주께서 아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0장 보게 되면 거기 막달라 마리아가 나오는데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죽고 난 뒤에 무덤에 갑니다. 무덤에 왜 갑니까? 육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분명히 죽은 지 사흘만에 살아난다고 했지? 이게 진실이라고 했지?” 안 믿습니다. 육은 눈으로 확인해야 해요. 확인해도 몰라요. “아, 시체 누가 가져갔구나.” 이래요.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피 앞에서 개인 교습을 받아야 사람이 새사람이 되는 것이지 성경 백 독, 천 독 한다고 해서, 인생 오래 산다고 해서 새사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는 꿇어앉아야 해요. 안 꿇어 않고 평범하게 앉아도 괜찮아요.

십자가 앞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무슨 의미인지, 누구 때문에 흘린 피인지 알 때, 그 관계가 속임이 아니고 그게 바로 진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 안에 담겨 있었고 그래서 성경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자기 자신을 배워온 것이 그럴싸하게 꾸미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음을 자인하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존재든 상관없이 이미 십자가 피 흘리시고, 세상 죄를 해결하시고, 근원적으로 모든 문제를 영생으로 바꿔주시고 그리고 난 뒤에 우리를 소환시켜주시니 그 주님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보이는 생활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강-디모데후서 3장 13-15절(성경속경험)230625-이 근호 목사.hwp (98.5K), Dow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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