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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9 17:42:08 조회 : 120         
강남-요한복음 21장 15절(양과 목자)190702b-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175.195.96.96)
강남-요한복음 21장 15절(양과 목자)190702b-이근호 목사



나는 양입니까? 할 때에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지요. 앞에 뭐가 붙었습니까? 존재가 들어가는 거에요. 나는 여기 있는데 나는 과연 양입니까? 양 아닙니까? 이렇게 되는 거에요. 관심사 자체가 누구로 종속되고 마지막 최종적으로 누구로 돌아옵니까? 나 이렇다라는 것을 얻고자해서 질문을 던지는 거에요.


그런데 이것은 선행적 존재론이죠. 그냥 선행적 어려우면 존재론이죠. 그런데 뭐냐? 인식론이란 인식론이라 하는 것은 질문을 그렇게 하는게 아닙니다. 이렇게 해요. 뭐냐 하면 “주님 왜 이러시는데요? 주님 왜 이러세요? 왜 저를 가만두지 않고 왜 이렇게 찾아오십니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저는 그런 술집에 안 가봤지만 드라마 보니까 나와요. 자기가 여자친구 있는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과장이라는 인간이 술 처먹고 꼬셔가지고 룸살롱 가가지고 어이 미스김 술한잔 따라봐 이렇게 하니까 과장님 왜 이러세요!! 이렇게 하는거에요. 그럴 때 그 여직원은 자기의 존재를 더욱 더 감싸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인식론이라고 하는 것은 내 존재가 없어지는게 아니고 나는 여태껏 나만 챙기면서 내 존재만 지키면서 살아왔다라는 것이 완전히 발각되는 그 순간이 성령이 찾아온 순간입니다. “나 주님이고 뭐고 다 귀찮아요. 저는 저 세상 사람들하고 같이 그렇게 고요하게 살고 싶어요. 왜 이러시는데요? 왜 이렇게 자꾸 찾아오시는데요.” 이렇게 되는 거에요.


하나님이 먼 데 계신 하나님이 이웃으로 왔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게 얼마나 경악적인 이야기입니까. “나는 너를 내 양으로 삼는다.” “저는 아니라니까요 주님. 저는 그럴 위치가 안돼요. 그럴 입장이 못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걸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안 하겠지만 평소의 모든 행동은 뭐냐 하면 저 복음 아니까 교회 한주일에 한번 아침 예배만 참석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요 내가 복음 듣고 교회 가줄테니까 평소의 일에 대해서 주님이 너무 깊숙이 개입하지 마세요. 저 감당 안됩니다. 이런 식이에요. 교회 오면 내가 점심값은 드리겠는데 오천원 드리겠는데 지금 사정이 2억 대출받아가지고 지금 돈이 없어가지고 더는 교회에 헌금 만원 단위는 못합니다.


더 이상 내 존재의 영역에 침투하지 마세요 라고 할 때에 성령 안 받은 친구가 “너 지금 누구 보고 이야기하는데?” “너는 몰라도 돼.” 바로 하나가 아니고 어떻게 됩니까? 갑자기 하나가 아니고 계속 나에게 찾아오시는 주님, 두 가지 2가 될 때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뭐 끌어안고 이게 사랑이 아니라 나를 가만두지 않게 하시는 것. 내 존재를 계속 건드려가는 거에요.


우리는 우리가 내 존재로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그러나 요한복음 21장 18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 원치 않는 곳으로 너를..” 어떻게 하겠다? “데려가겠다”. 네가 원치 않는 곳. 주께서 관여하시는 거에요.


내 양을 먹이고 네가 내 양을 치는 목자가 되되 그 목자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내가 너를 계속 내가 너를 데리고 다니면서 목자 아닌 너를 목자 되게 하는 거에요. 그래서 양과 목자라 하는 것은 이 땅에 없습니다. 없고 성령이 와서 지난 시간에 했는데요. 그 현장성에 성령이 오게 되면 거기서 뭐가 되요? 양이 발생되고 목자가 새롭게 발생되는 겁니다.


먼저 된 자가 목자 될 수 있고 나중된 자가 목자 될 수 있고 목자는 그때그때 목자가 달라져요. 역할이 달라져요. 한번 목자가 영원한 목자가 아니고 한번 양이 영원한 양이 아니에요. 주께서 성령께서 작용하면 작용할수록 자식이 아버지 목자 될 수 있고 아버지가 자식 목자 될 수 있고 그때그때 성령 달라요.


역할이 존재 같으면 이것은 내 역할이 되지만 존재가 아니고 인식이기 때문에 주께서 그 현장에서 일으키는 사건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쓰여지느냐가, 쓰여지느냐가 주께서 약속하신 약속대로 말씀대로 그게 현실화될 때 이것은 내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다? 하나밖에 없는 존재, 주님이 하게 하시는 그 일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우리가 소급해서 우리가 인식하는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아는 거에요.


아 내가 주님한테 걸려들었구나. 주님께서 나를 그냥 놔두지 않으시는구나. 나는 장가가서 애도 키우고 뭐 어떻게 뭘 하고 자기 나름대로 계획이 많아요. 계획이 많은데 주님의 사랑이 나를 나 원하는대로 안돼요. 그러니까 인간은 또 이성이 있어가지고 꼼수를 쓴다고요. 그래 내가 원하는대로 안 해준다면 내가 내 원치 않은 일을 내가 일부러 원치 않는 일을 내가 일부러 해야지 라고 하거든요.


그럼 원치 않은 일을 하게 되면 진짜 원하는 것은 덤으로 해주시겠지라는 꼼수를 쓴다고요.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몸 아파서 감사합니다. 감사헌금 막 올리는거 그런 수작이 그 수작 아닙니까. 그런 전략 아닙니까. 남이 하지 않는 별다른 일을 해가지고 주께서 다 아시고 여분의 알아서 복 주겠지 보상해주겠지 만회해주겠지 하잖아요.


그 우리가 원치 않는 일도 안 이루어줘요. 절대로 존재로 나라는 1로 귀속되지 않게 합니다. 항상 1의 시스템이 유지되게 만들어요. 주님때문에 내가 하나의 결과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1이 유지되는거. 사랑은 뭡니까? 1이 아니고 뭡니까? 2 있을 때 그 사이가 사랑이에요. 내가 사랑을 가져버리면 사랑이 아닙니다.


왜? 그 사랑을 내가 가지면 1로 귀속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2로 가는 과정이었고 1이 마지막이기 때문에 도달점이지만 이거는 엉터리에요. 2가 계속 2로 남아있어야 돼요. 미우나 고우나 남편이 옆에 붙어있는 것은 그래도 부부라고 할 수 있어요. 붙어있는 것은 싸우든 말든 밥그릇 엎든 옆에 있으면 되는데 옆에 없어버리면 이거는 뭐 싸울 대상도 없을뿐더러 이거는 더 이상 부부라고 할 수 없지요. 하나 1을 위하여 그동안 타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게 되게 되면 양과 목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없고 성령이 와서 현장성을 만들어 낼 때 양이 생기고 목자가 생깁니다. 양 따로 생기고 목자 따로 생기는게 아니고 같이 항상 그 자리에 병행해서 생깁니다. 나에게 목자였던 사람이 어느날 나에게 양이 될 수 있는 문제고요.


중요한 것은 누가 했느냐가 아니라 우리를 1이 2되게 하게 하신 분이 누구냐?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그런 계속해서 그 사랑을 유지시켜 주는 겁니다. 당신 없는 나를 생각 못하게 만들고 내가 없는 당신을 생각 못하게 만들고. 그것이 2가 있어야 돼요. 2가 있다는 말은 1은 이제는 생각하지 말아라 이 말입니다. 나의 절대성은 2를 훼방하니까요. 나를 떼놓는 사랑은 없거든요. 사랑이 되려면 나는 없어져야 되거든요.


이제 두 번째 시간 본격적으로 해보겠습니다. 구약에서 양과 목자의 시스템은 구약에서 벌써 나옵니다. 유명한거 있잖아요. 기타에 붙어있잖아요.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지요. 그럼 나는 여호와 믿자 내 존재가 여호와를 사랑하자 이게 아닙니다.


목자가 등장하게 되면 양은 목자 품에서 나와요. 목자 품에 있다고요 목자 품에. 기생충이 등장하지 않아요. 숙주가 등장하면 그 안에 기생충이 필히 들어있게 되어있어요. 목자가 우리의 숙주라면 우리는 거기에 기생충이거든요. 봉준호가 만든 영화 기생충이에요. 나의 목자시니.. 하는 순간 이게 뭐가 돼요? 이게 양이 되거든요. 목자가 중요시 여기는 것은 양이 아니고 목자와 양 사이에 형성된 관계입니다. 연결이에요 연결. 이게 중요해요.


이게 안 중요하면 예수님은 혼자 천국 천국 혼자 하시면 돼요. 그렇지요? 천국은 혼자 계시는 분이 아니지요? 자기 사랑하는 양 떼가 있지요? 그것은 그만큼 관계가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관계가. 그런데 이 관계는 제가 아까 제가 요한복음 10장에서 보면 뭐냐? 목자는 양이 양 되게 하기 위해서 필히 뭘 집어넣습니까? 여기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게 되어 있어요.


이게 구약에 있었던 시편 23편에 있었던 양과 목자의 시스템에 있어서 인간 이스라엘이 해내지를 못하고 있는 거에요. 에스겔에 보면 목자를 굉장히 나무라고 있습니다. 목자 같아야 목자지 목자도 아닌게. 스가랴도 마찬가지거든요. 목자가 엉터리라서 내가 막대기를 짤라 버린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목자가 돼야 되는데 목자가 돼야 되고 제사장들이 목자가 돼야 되고 왕이 목자가 돼야 되는데 제대로 된 양들을 제대로 관리를 못해가지고 전부다 바벨론에 앗사 바사 나라에 전부다 바벨론이고 앗수르고 전부다 팔려가게 만들었다는 거에요. 목자라는 자들이 아예 우상을 섬겼으니까. 양들이 양다운 꼴을 먹을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럼 여기서 우리가 아는 상식 해봅시다. 자, 우상과 여호와 하나님의 차이점은 여호와 하나님은 반드시 앞에 뭘 내놓는다? 언약을 내놓는 반면에 우상의 특징은 뭐가 없어요? 언약이 없지요. 왜 언약이 없느냐 하면 우상이란 말은 뭐냐? 인간이 원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기 때문에 그 신의 내용물은 전부다 인간의 소원으로 가득 담겨 있어요. 소원으로.


제가 어제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은 이미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믿잖아요. 자기가 절대화니까. 악마 인질이니까. 내가 믿으면 나는 이미 신자에요. 신자이기 때문에 이미 신자인데 이미 믿음이 있는데 다른 믿음이 끼어들 여지가 없지요. 나는 사나 죽으나 나를 믿으니까. 사나 죽으나 나를 믿는데 무슨 다른 믿음이 끼어듭니까? 이건 개종이 필요하죠 ‘개종’.


만약에 이게 진짜 신앙이 되려면 뭐를 포기해야 됩니까? 내가 믿는 나를 포기해야 되죠. 이게 뭐냐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뭐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부정하고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했거든요. 이게 우상한테는 이게 안되는거에요. 인간한테는 이게 안되는거에요. 인간이 믿는 신에게는 자기 긍정만 있지 자기 부정은 없어요.


뭐 여러분 불교에서 공부 안 해봐도 상식적으로 그렇잖아요. 불교는 절은 왜 있습니까? 누구 좋아라 있어요? 부처를 위해서 인간이 있는게 불교의 교리가 아닙니다. 불교는 부처를 죽이고 중을 죽여라. 중요한 것은 내가 부처이기 때문에. 이게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게 불교다 이 말이죠. 그런데 불교는 만들어진게 아닙니다. 그냥 표현된거에요. 인간이 살아가면서 표현된거에요.


불교의 이론이라면 모든 인간은 다 부처에요. 교리를 알던 말던 절에 가든 말든 다 인간은 부처에요. 성철 스님이 하는 그 법학 이런게 있어요. 사탄님 고맙습니다. 어서 오시옵소서 그런 이야기 나온다고요. 악마여 어서 오시옵소서. 초파일날 이야기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사탄도 부처다 이 말입니다. 악마도 부처다 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이에요. 두자로 하면 인권. 이게 부처입니다. 안철수 후보자가 옛날에 무슨 스님? 얼마나 따라 다녔어요. 법륜 따라다녔지요. 하버드 출신도 있고 뭐 책 많이 팔려가지고 뭐 한 것도 있지요. 뭐 조용히 살기인가? 멈추면 보이는 것들 이런거 나오잖아요. 멈추면 뭐 보여요? 괴물만 보이죠. 자기 자신만 보이죠.


문제는 그런 불교가 그런 불교 하고 오늘날 기독교하고 차이점이 하나도 없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전부다 나를 절대화하기 위해서 교회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우상시해서 교회 나옵니다. 목사님 저는 어디까지 위로해줄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어디까지 착해질 수 있고 어디까지 거룩할 수 있고 어디까지 경건할 수 있습니까? 그거 지금 테스트 하러 온거에요 전부다.


도장에 사람들 왜 나옵니까? 자기 부인하러 왔어요? 십자가 지고 도장 옵니까? 내가 어디까지 건강할 수 있고 어디까지 살 빨래판 만들 수 있나 그것 때문에 오잖아요. 자기 강화죠. 자기 강화. 자기 강화 단단히 하는거죠. 복근도 자기 단단히 하잖아요.


그러나 복음은 뭡니까? 자기 존재를 잃어버리는게 아니고 이미 잃었다는 인식이에요. 내 존재를 어떻게 다루는게 아니고 나는 자기가 복권하고 뭐 백날해도 그러면서도 어디로 간다? 죽어가고 있음을 감사히 여기는 거에요. 죽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조금씩 조금씩 죽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성질 내버리면 그게 좋아서 너무 내버리면 자살해요. 김광석이 뭐라고 했습니까? 조금씩 멀어져간다~~ 했지요. 김광석은 자기가 30대가 피크라고 본거에요. 점점 더 30대에서 멀어져가는 거에요. 무슨 연기처럼? 담배 연기처럼. 점점 더 조금씩 멀어져 간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니지만 예수님처럼 33살에 죽었지요. 좋아하기는 자기 마누라만 판권 얻어서 좋지.


가만히 있어도 죽이는데 왜 그렇게 성질 급한지 몰라. 가만히 있어도 죽잖아요. 자기 존재를 자기 없애겠다는 말은 인식이 아니고 선행적 존재지요? 그럼 오늘날 목사도 뭡니까? 자살했잖아요. 아 설교 안 된다. 설교 끄집어내기 힘들다. 죽어버리자. 팬들은 수만명 팬들은 기다리고 있는데 새로운거 내놔라 새로운거 내놔라 하는데 자기는 새로운거 많이 내놨는데 베껴가지고 많이 내놨는데 아 새로운거 안 나와. 새로운거 안 나오니까 결국 도피하는 방법은 자살밖에 더 있겠어요?


새로운게 안 나오면 안하면 돼요. 왜? 주께서 안 나오게 하셨잖아요. 목자가 안 나오게 했으면 양은 목자만 좋으면 돼요. 양이 독자적일 필요 없다. 양이 1이 되면 사랑이 날라가 버리잖아요 사랑이. 사랑 날라가면 내 사랑만 남아요. 사랑 날라가게 되면. 제가 지난 대전에서 아가 수련회 할 때 몇몇 사람은 이렇게 우려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어요.


유행가 너무 많이 집어넣었다. 유행가 많이 집어넣었다 하는데 너무 천박해 천박해 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왜 그렇게 하느냐 하느냐 하면은 성, 속이 따로 없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거룩을 추구, 생각한다는 것은 추앙한다는 것은 감추고 싶은게 있어요.


실제로는 내가 이게 더 마음에 드는데 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억지로 이거는 압박을 가해 갖고 마치 없는 것처럼 하고 고상하게 하면서 내가 좀 이렇게 천박하게 놀더라도 좀 봐주세요 주님. 이거는 내 즐거움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그 선까지 넘어오지 마세요 라고 해서 따로 꼬불쳐놓는 거에요 그거는.


마치 성악과 교수들이 바리톤 테너 베이스 소프라노 하는 성악과 교수들이 회식하고 난 뒤에 노래방 가서 유행가 부르는 것하고 똑같아요. 얼마나 부르고 싶어서 참았겠습니까? 맨날 전공이 오페라 고상한거 부르다가 용두산아~~~~얼마나 부르고 싶었어요. 송가인이 부르는 그 노래 있잖아요. 대동강 한 맺힌 대동강 그런거. 거기 가서 은밀하게 부르는 거에요.


사람의 본성은 안 바뀝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이 거기까지 침투하는거에요. 인간이 이거는 신앙도 없고 천박하다 천박해 천박해 하는 인간들이 부르는 노래, 그 부르는 노래 속에 진심이 담겨있어요. 진심이. 나는 세상을 지금 이런 식으로 봅니다.


그 완전한 사랑이라는 책 보면 가사가 노래가 있는데 열 개도 넘어요. 팝송부터 해가지고.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싶은 그 세월 너무 길었다고 안합니까? 그 가사가 얼마나 간절한지요. 사랑한다는 것도 거짓말, 좋아한다는 것도 거짓말 하지만 다시 한번 기회줄게 해가지고 자기가 남한테 기회 막 주고. 그 모든 것이 사랑이 아님을 그건 사랑이 아니고 자기의 충동, 본성적인 나 절대성을 사랑이라고 포장한거에요.


그렇다면 과연 사랑은 뭐냐? 사랑은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냥 사랑은 안 되고 양과 목자 사이에서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랑을 원했건만 그런 사랑이 없지요. 목자가 잘못 됐고 양은 양대로 흩어지고. 그러면 양에서 뭐가 솟아나느냐 하면은 양의 부정형이 등장해야 되고 목자의 부정형 또는 부정성이 등장해야 됩니다.


양이 부정성이 뭐냐 하면 양이 아닌 염소요 또는 이리고 여기 목자의 부정성은 뭐냐? 요한복음 10장에서 이걸 강도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강도와 염소 또는 이리 이걸 이스라엘 속에서 끄집어내는 거에요.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들은 이건 강도다. 개코도 없어요. 천국 영생도 없어요. 없기 때문에 더욱 더 있는 척을 해야 돼요.


믿음이라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쳐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 나는 죄밖에 없음이 들통날 때에 그게 믿음이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믿음인데 믿음 없는 자가 뭐냐 하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믿는다고 할 수 있는 꺼리를 계속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게 지난 시간에 했지요.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의식이고 뭐라고 했습니까? 의례라고 했지요 ‘의례’.


교회 법 제도 같은거요. 교회법같은거 이런거. 재직회는 3분의2 통과해야된다 이런거 이런거. 이런 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손 들면 되니까. 성가대 하기 주일학교 하기. 전도하기 헌금하기 십일조하기 우리 할 수 있는 거에요. 이런 의식과 의례를 왜 합니까? 성만찬 세례식 왜 합니까? 이것 함으로써 이것으로 나의 믿습니다를 좀 대신하는 이것 먹고 떨어지세요 이 말이에요. 이걸 믿음으로 쳐달라는 겁니다.


믿음은 행함이 아니라고 했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행함 외에는 내놓을게 없어요. 유대인들은 여기서 발달해서 자기 의를 갖춘 겁니다. 자기 의를. 뭐 핑계야 좋지요. 안 믿는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상징적인 것 뿐이지 우리가 우상 섬기는게 아니고 법을 섬기는게 아니고 그냥 상징적으로 애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서 이렇게 뭐 그림하고 초 피우고 향 해가지고 신부가 이상한 복장 있잖아요. 애들 장구 따먹기하는 복장 옛날.


이거는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데 왜 그걸 그렇게 해서 그걸 꼬실려고 하느냐? 꼬시면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주께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놓칩니까? 그 정도로 주님께서는 바보에요? 아이고 쟤를 구원해야 되는데 내가 잠잔다고 구원 못했다. 그런 실수를 하실 분이에요? 아버지가 보낸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지요. 왜 그걸 못 믿어요?


왜 못 믿느냐 하면 자기 교회 교인 숫자가 줄으니까. 교회도 아닌걸 교회라고 딱 만들어 놓고 이제 주님을 테스트하는 거에요. 교인 수가 많아지게 되면 우리는 교회고 교인 수 없어지면 우리는 달리 생각해보자 이런 식으로 나오는거에요. 성경에 많은 사람은 어디로 갑니까? 많은 숫자가 천국 갑니까? 지옥 갑니까? 지옥 가잖아요.


적은 숫자여 두려워말라 천국은 누구의 것이다? 너희 것이다. 그런 말씀은 아예 안 들어와요. 이 세상에서 자기가 유명하려고 하는거에요. 사람한테 유명한 것도 하나님께서도 아마 칭찬받을걸 이라는 잘못된 생각. 도리어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유명한 것을 주님께서는 모른다 했지요? 주님은 류현진 몰라요 류현진. 손흥민 모른다니까요. 주님은 김정은 문재인 몰라요. 관심도 없어.


미미하기 짝이 없는 작은 소자의 진정한 복음, 그걸 주께서 더 귀하게 여기지 유명세 떠는 사람은 주께서 인간같지도 인간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니까요. 우리가 그걸 이겨내야 돼요 그걸. 세상에서 유명한 것은 절대로 유명하지 않다는 그런 진짜 절대적인 기준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주님은 싫어 버린 바 되신 분이에요. 싫어 버린 바 되신 분이에요 결국에는.


우리가 너무 세상적으로 튀어보고 떠보려는 그런 악마적인 속성이 있다 보니까 그런 성질 갖고 있으니까 그런 것에 우리가 그런 것에 정신이 팔려가지고 이왕이면 큰 교회 이왕이면 대통령 이왕이면 판사 검사 의사 되야 내 자식 잘 훈련시켰다 하는데 자식은요 훌륭한 자식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죄를 아는 자식이 제일 훌륭한 자식입니다. 물론 너무 놀면 안 되지만. 자기 복음 안다고 맨날 밥 먹고 등쳐먹고 있는 아들도 있어요.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고 부인한다고 사랑이 아니고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돼요. 누구 앞에서 나는 못났다가 돼야지 자기 혼자 도 닦는다고 나는 못난이 나는 못난이 이건 뭐에요? 도 닦는 거지요. 하여튼 나는 못났다 나는 망해야된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라고 하면서 건드려서 화 안 내는 인간 나는 못 봤어요. 그렇게 못나고 죄인이라면서 그럼 건드리면 가만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나는 못났다고 여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인데 그런 나를 왜 건드려 이런 식이란 말입니다. 자기가 무슨 말하는지를 몰라 지금. 나는 스스로 못났다를 알 정도로 괜찮은 존재다 이거잖아요. 결국 1이 어디로 돌아옵니까? 1로 돌아오잖아요. 부정성을 양에서 부정성을 끄집어 내요. 목자에서 부정성을 끄집어냅니다.


이 부정성으로 주님께서 맞닥들이지요. 그러면 양이란 인간들이 주님을 버리고 목자라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그럼 이 땅에는 제대로 된 양도 없고 목자도 없음이 증명되었지요? 증명이 되었잖아요. 다윗의 자손은 이 세상에 왕들의 자손이나 제사장들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란 말이죠. 이 세상에 없어요.


혈통적으로 있을 수 있지만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이 아닙니다. 다윗은 혈통으로 죽임을 당한 분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분이 오셔서 양도 없고 목자도 없는데 그분이 목자가 되신 자기의 성령을 양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자기의 목숨을 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살과 피를 먹여서 없는데서 새로 등장하는게 뭐냐? 양이다 이 말이죠.


목자가 먼저 선행되기에 거기에 부수적으로 양이 따라오는 거에요. 양 되고 싶다고 손들고 양 되고 싶으니까 목자 보내주세요 그래서 목자가 되는게 아니고 목자가 등장하게 되면 양되기 싫어도 그게 양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를 먹었어요? 살점을 먹었습니까? 그럼 영생을 먹은 사람이에요. 내 살과 내 피를 먹지 아니하면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영생이 없다.


말을 달리 하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면 이미 영생을 얻은 거잖아요. 영생을 얻으면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없다 할지라고 떳떳하게 세상에 나갈 수가 있어야죠. 영생을 얻었는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먹을 수 없는 살과 피를 먹어서 영생을 얻었으면 더 이상 우리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목자와 함께 있기에 이 세상에 대해서 전혀 두려워할게 없지요.


인식론적으로 그걸 알아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의 몸은 아담의 몸이잖아요. 아직 까지 안 죽으니까 제가 말하면 여러분이 들으니까 아직 안 죽었어요. 안 죽었다는 말은 육이 살아있다는 겁니다. 육이 살아있다면 이러한 말씀을 듣고 여기에 자극받아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양의 부정형이 나오고 목자의 부정형이 우리 몸을 통해서 이게 스물스물 이게 올라오는 겁니다. 이게 성령 받아서 그래요. 성령을 안 받아서 그런게 아니라 성령을 받아서 그래요.


그럼 안 믿는 사람도 이게 올라오고 믿는 사람도 올라온다면 안 믿는 사람 믿는 사람 차이가 뭐냐? 믿는 사람은 이 사실을 인식하고 알고 있다는 거에요. 알고 있다는 거에요. 내가 복음 맨날 백날해도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살거고 나는 외로운데 나 사랑해주는 사람 없으면 내 중심으로 사랑할겁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게 한 바로 죄입니다 라고 그걸 아는 겁니다.


그래서 죄를 아는 사람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한번 적어 볼게요. 자기 죄를 아는 사람은 한번 따라해 봅시다. 자기 죄를 아는 사람은 모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할 수가 있어요. 이게 빌립보서 4장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에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게 부끄러운게 없으니까 쭈그려뜨리는게 없으니까 죽는 것이 겁 안 나니까.


강도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강의 위험과 육지의 위험과 온갖 비난과 이단소리 듣더라도 들을만하니까 왜? 죄인이니까. 죄인 중에 괴수니까 들을만하니까. 들을만하니까 그래 이야기 해 영생을 얻은 사람이 이미 챙길걸 챙겼는데. 그 관계 사랑 속에 있는데. 목자의 권능아래 빼앗을 자가 없다 했는데 어떤 권세도 이게 안 빼앗기거든요.


악마가 예수님 손가락 벌릴려고 해도 안 벌려져요. 우리는 예수님 손 안에 들어있고 악마는 벗길려고 백날 해도 안 벌려진다고요. 그런데 우리 모습은 현재 모습은 뭐냐 하면 바로 또 육적인 것이 내 위주잖아요. 그래서 어제 강의 월요일에 강의했지요? 백허그. 백허그라고 했잖아요. 뒤에서 안는거 있죠.


등치 큰 주님이 우리를 뒤에서 안으면 우리는 우리의 육적인 모습이 다 드러나더라도 주님의 품 안에서 목자의 목자됨의 희생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계속 짓는 경우를 맞닥뜨리게 되요. 그래서 내가 죄인이다 알았잖아요. 안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고 이게 과연 현실이고 실제라는 것을 실습해보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입장이 난처해지는 경우를 맞닥뜨리게 해요. 나로 하여금 화낼 수 있는 상황들을 자꾸 마주치게 만들어요.


알기는 천하에 백성이고 주의 양이지만 막상 세상에 나와서는 무슨 그런 독한 성질은 다 있는지 독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이 이게 실제라는 사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이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아양 떠는게 아니고 실제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남보다 더 낫다고 할 꺼리가 없음을 우리가 분명히 또 다시 그것마저 이 관계 시스템 속에서 양과 목자 가운데서 다시 내 입장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늘 그런 기회를 주시는 거에요.


그걸 가지고 요한복음 21장 18절에 뭐냐? 너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겁니다. 사람이 원하는 길로 가버리면 그렇지!! 나는 주의 종 맞구나 하고 얼마나 쾌재를 부르겠습니까. 절대로 쾌재를 못 부르면서 이런 일을 지금은 그 당시는 화가 나지만 또 돌아보면 이런 일을 당해도 싸다. 그래 나 같은건 아이 셋 낳아도 괜찮아. 그래 애 넷 낳아도 괜찮아.


모든 하는 일에 범사에 소급해서 어떻게 합니까? 감사하게 하는 거에요. 소급이요. 뒤돌아 봐야 비로소 아는 거에요. 그때는 몰라요. 이단같은 것이 어디서 언약도 모르는게 까불어. 싸우고 난리하다가 가만히 뒤돌아보니까 그것마저 누가 조종했어요? 내가 얼마나 내 성질만 챙기고 절대적인 나만 챙기는 마귀적인 속성을 갖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사건과 상황들을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자, 그 다음의 문제에요. 그 다음 문제 정말 난처한 문제인데 어려운 문제에요. 내 살과 피를 먹는다는데 몇 그램 잡수셨어요? 살과 피를 먹는다는게 무슨 말이냐? 예수님이 처음부터 이 땅에 아기 예수로 오실 때 양손에 살과 피 들고 오셨습니까? 아니지요. 살과 피는 예수님의 사역의 최종성입니다. 최종성이에요. 그것도 혼자서 살점을 도려낸게 아니잖아요. 누가 협조해야 되죠? 마귀가 협조해야 돼요.


예수님이 십자가 피 흘리고 살점이 찢겨나오도록 협조해야 돼요. 모든 구조가. 따라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말씀이 말씀대로 잘 진행되었다는 결과가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봅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할 때에 이게 그냥 지시사항이 아닙니다. 아니고 주님이 주님께 하는 본인 약속이에요.


그리고 베드로는 거기에 못 빠져나와서 양으로 말려든거에요. 목자가 누구냐 하면 목자가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베드로를 누구 만들었습니까? 예수님이 목자 앞에서 베드로는 양입니까? 목자입니까? 양이지요. 이 양이 뭐가 돼요? 양이 목자 되게 할 때 베드로는 목자 아닌데 성령에 의해서 그 현장성에 목자 되게 하시도록 내 양을 치라는 그 말씀이 베드로의 모든 결심보다 우세한거에요.


베드로 뜻보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이 베드로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걸 이뤄지게 기어이 이뤄지게 해내시는 겁니다. 그래야 모든 공로를 누구에게 돌립니까? 주님에게 돌릴 수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베드로가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거에요.


자, 여러분 알았다 치고 질문을 하겠습니다. 요나가 니느웨하고 정반대 방향으로 다시스로 갔습니다. 자,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것이 주의 뜻입니까? 주의 뜻 아닙니까? 주의 뜻이지요. 그게 주의 뜻인거에요. 요나가 다시스로 만약에 안 가게 되면 마태복음 16장에서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이 성사가 안 됩니다.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악한 세상이 악하다 이 정도로 악하다하는 것을 들추어내야 되고 선지자는 악한 세대의 일부로서 거기에 흠뻑 젖었다가 나와야 돼요. 그래서 우리 양이라고 하는 것은 양이라고 해서 양이 되는게 아니고 항상 버림받았다라는 경험을 거쳐야 그 경험이 내장된 그게 하나의 내용으로 담겨있어야 그게 양 다운 거에요.


그걸 지난 낮설교에서는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지난 낮설교에 제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세상 속담에 뭐냐 하면 등 굽은 소나무가 묘소 지킨다 이야기했지요? 등 굽은 소나무가 묘소 지키는게 아니고 제대로 아버지 지키려면 아버지 묘지를 파내야 된다고 했지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들됨의 진정한 본심이거든요.


그 본심을 누가복음 15장에서 누가 보여줬습니까? 탕자잖아요. 자, 탕자. 아버지가 있는데 아버지 옆에 누가 있습니까? 큰아들있지요. 큰아들과 탕자와 비교해 보세요. 인간이 볼 때에 누가 효자입니까? 집 나가지 않는 가출하지 않는 이 아들이 효자지요. 그러나 이 아들은 무슨 요소가 빠져 있습니까? 잃어버린 요소, 집 나갔다는 요소가 빠져있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지만 죄 많은 세상에 들어왔다는 요소가 빠져버리면 그 목자에서 나온 그 양이 아니에요. 조작된 양이에요. 악마가 조작된 양은 순수한 훌륭한 양이에요. 착한 양이에요. 나쁜 짓한 적 없는 양이에요. 늘 하나님 말씀대로 잘 살았던 양입니다. 그 양은 지옥 갈 양입니다. 지옥 갈 양이에요.


창자국 못자국이 살과 피가 의미가 없어요 그 사람한테는. 제가 그 낮설교 하면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어떤 사람은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 듣고 피하려고 하는데 피하면 안돼요. 우린 적극적으로 불의한 청지기 되려고 해야 돼요. 아마 지금 벌써 되어 있어요 벌써. 불의한 청지기를 피하지 말고 그게 바로 나란 것을 받아들여야 돼요.


왜?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기 때문에.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기 때문에. 평수 비교하지 마세요. 어차피 내 집 아닌데 뭐. 어느 텐트가 좋으냐? 텐트 입장에서는 철거할 텐트 입장에서는요 포크레인 해가지고 곧 지금 옆에서 무너뜨리고 있는데 “야 너 텐트 넓다.” “아 좁아서 음매 기죽어.” “넓어서 음매 기살어.” 옆에서 지금 철거중인데 그게 의미가 없다니까요. 둘 다 쓰레기인데.


몸도 쓰레기죠 집도 쓰레기죠 자식도 쓰레기죠 부모도 쓰레기. 쓰레기 패밀리 인데 자랑할게 뭐가 있어요? 중요한 것은 현장성이고 현장성을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면 뭘 어떻게 내 존재가 어떻게 되는게 아니고 이미 주께서 말씀대로 시행하고 있음을 우리가 아는 겁니다. 그냥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실감나게 알게 하십니다. 실감나게 알게 하시는 거에요.


뭘 아느냐? 나는 주님 앞에 내빼는 것이 주특기고 그 내빼는 탕자를 받아주는 것이 주님의 주특기고. 그래서 모든 영광은 주님의 살과 피에 있지 내가 주님을 찾아오는 나의 끈질김에는 절대로 없다는 것. 나의 끈질긴 기도와 금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왜? 나는 존재만 생각하고 나는 어떤 인식을 생각 안하기 때문에. 인식보다 존재를 먼저 우선하기 때문에. 내가 이 복음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는다 이런 엉터리 이게 엉터리거든요.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구원은 우리하고 의논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창세전에 정해버렸어요. 정해놓은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아 정해놨구나. 정해놨구나. 우리 아버지께서 내 자리 마련해놨구나. 그럼 이 땅에서 내가 개판 쳐도 괜찮네. 그 개판칠 때 내가 원하는대로 개판 못 치게 만들어요. 내가 원치 않는 개판치게 만들어요.


개판 쳐도 내 원대로 되는 개판은요 진짜 개판 되버려요. 주께서 개판되도록 개판되게 만듭니다. 뭐냐 하면은 착하게 살기, 바르게 살아놓고 복 받기,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이 하는 짓 있잖아요. 바리새인. 헌금 이만큼 했습니다. 선교했습니다. 전도했습니다. 주의 종을 대접했습니다. 이런 나쁜 짓들. 이런 나쁜 짓들. 전에는 기도 5분 했는데 지금은 두시간 끄덕없습니다 이런 나쁜 짓들 있잖아요.


그게 나쁜 짓이 된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지요. 존재 자체를 생각한다는 자체를 상상을 못했어요. 기도하게만 하신 것이지 몇 분 했느냐는 의미 없거든요. 헌금하면 내 돈 헌금한게 아니잖아요. 헌금하는 것이 그게 내 돈 헌금했다가 앞에 ‘나’ 라는 주체가 붙으면 안되는 거거든요. 옛날에는 나를 다 집어넣었어. 다 집어넣었어. 나를 위대하게 하기 위해서 교회 나왔거든요.


또 목사로부터 그런 격려를 받기를 원하고 이만큼 수고했으니까 주의 종이 좀 격려를 해달라 나 너무 외로워 이런 식으로 자기 외로움 달래려고 교회 왔는지 맨날 외롭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둘이 만남 속에서 형성되는 거에요. 서로를 바라볼 때에 나같은 인간에게 우째 오늘 제목을 ‘우째’ 라고 할까? 우째 저런 분이. 저쪽에서는 나같은 자에게 우째 저런 분이 주셨느냐.


자, 목자의 뜻은 양을 먹이는 겁니다. 그럼 목자 우리는 주님 앞에서 양입니다. 그런데 양은 임시적으로 뭘 만든다? 목자를 만들지요. 목자 또는 두 사람이 성도 있다면 둘 다 목자입니다. 목자라는 뜻이 잃어버렸다가 얻은 거죠. 그럼 자기 자랑 못하지요. 나같은 죄인입니다. 이쪽도 죄인입니다. 죄인이 죽어 마땅합니다로 만나니까 그 영광은 누구한테 돌아가요? 주님한테 돌아가요. 이게 성도의 사랑의 대화법입니다.


옛날에 웃으면 복이와요 구봉서하고 죽었던 구봉서하고 또 누구입니까? 배삼룡이하고 할 때 서로 상놈인데 양반 행세 한다고 대서소에 가가지고 둘 다 양반인사법을 베껴온거에요. 한 대서소에서 베껴온거에요. 웃으면 복이와요라고 MBC에서 하는게 있어요.


둘 다 주머니에 감춰놓고 인사하는데 인사 처음 할 때 어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럼 어험~하면 될건데 어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서로 인사합니다. 엎드려서 전부다 나는 죄인입니다. 저쪽도 죄인입니다. 이제는 죄인 배틀 누가 더 낮아졌느냐 누가 자기 부인하느냐 자랑질하고 있어요.


이거 누구 뜻입니까? 자기 뜻이죠. 이렇게 낮추고 부인함으로서 주의 백성이라는 것을 스스로 본인의 힘에 의해서 본인이 인식하려고 노력하는 것. 이거는 성령의 일이 아니죠. 가만 있어 보세요. 부딪혀주십니다. 죄인이 아니고 싶어도 또 두 시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부딪히게 되면 주님에 의해서 내가 양 될 수도 없고 죄인 될 수도 없는 그런 존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기본적으로 생각할 것은 뭐냐? 멀리 계신 하나님이 나를 찾아왔다는 이 자체가 충격 아닙니까? 시내산에서 내려오면 사람들 죽어요. 그런데 성령으로 얼굴을 수건 덮어가지고 성령이 있는 곳에 죽지 않는 자유함이 있다는 그 영이 옴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어요. 그 이웃이. 무서운 이웃이.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해야 돼요. 아까도 했지만 “왜 그러시는데요 도대체? 왜 저를 가만두지 않고 왜 자꾸 찾아오셔가지고 내 뜻대로 안되게 해주시는겁니까 이렇게 해야 되고 저 그럴만한 위인 안돼요 저는 나밖에 몰라요.” 그럼 옆에서 “너 누구보고 이야기해?” “몰라도 돼. 너는 그런 인식 없으면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 나 지금 주님보고 이야기하니까.”


저 주님 말씀 못 지킵니다. 해봐야 내 자랑하는 재주 외에는 재주 없습니다. 주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오늘밤 낙원에 가겠다. 강도의 재주는 뭡니까? 사람 죽이는 재주밖에 없어요. 그 사람 주님하고 낙원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말씀대로 뜻대로 되기 때문에.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자, 그 사랑 대목 끝으로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16절 봅시다. 16절.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그 다음에 뭡니까? 주님께서 아시지요. 자, 사랑 단계에 있어서 모든 주도권 주체의 주도권을 베드로가 자기를 주체로 하지 않고 주도권을 누구에게 넘겼습니까?


시작을 주님이 시작했잖아요 라고 주체를 넘겼습니다. 그러면 사도는 베드로는 자기가 객체가 돼요. 주님의 주님 되게 하는 하나의 시다바리가 되는 거에요. 내가 챙길 건 없어요. 지금 이 순간 베드로는 마치 신자 같습니다. 마치 신자같아요. 그러나 본격적으로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을 받아야 돼요. 이 고백은 맞아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고백은 맞습니다만은 돌아서서 주여 그러시면 안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욕 얻어 먹었지요.


어떤 순간에 있어서 어떤 순간에 있었던 그 현장성을 이 몸이 아담의 몸이 있는 이상 그게 오래 가지를 않아요. 따라서 성령께서 수시로 바람처럼 늘 들락거리면서 우리로 하여금 원래 시스템을 우리한테 가게 하는게 아니고 이미 왔고 알게 하시는 거에요. 그 시스템을 알게 하시는거에요. 너는 목자가 아니야.


그리고 누굴 구원해주고 안 해주고는 목사 너 권한이 아니야. 이거는 예수님 권한이 이미 끝났어. 복음전하면서 이 비밀을 전하는 것 뿐이지 이거 전하면 뭐 하고 내 팬은 몇 명이고 그걸 논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오늘 밤에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 밤에 네 영혼 도로 찾으면 월요일날 강의 했는데 ‘도로’ 강조했거든요.


도로 찾으면 원래 내 생명이 내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도로 찾으면 주인이 와서 주인이 도로 찾아가면 그 창고에 있는 그 모든 펀드는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누구 것이 되겠어요? 네 계획서 빽빽한 종이에 있는 뒷장에 있는 앞으로 올 12월달에 뭐하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내일도 내가 보장 못 받는데.


현장성은 주께서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양은 양대로 목자는 목자대로 그것이 인식되게 할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이 있는 이상 그 인식은 얼마 가지를 않습니다. 얼마 안 가도 괜찮아요. 왜 괜찮으냐 하면 얼마 안 가게 하신 것은 내일 되면 준비된 또 나를 죄인 되게 만드는 준비된 또 무엇이 있어요. 그걸 가지고 여기 18절에서는 내가 원치 않는 미래가 나를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원치 않는 미래’.


따라서 내가 기도해도 내 계획대로 안 되기 때문에 그냥 오늘밤에 잘 주무시면 되는 거에요. 내일 염려 내일하고. 그저 오늘까지 숨 쉬는 것도 과분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이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음을 내가 주체가 되어서 주님을 객체로 사랑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나만 사랑한다는 것을 더욱 더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사랑해 주었음을 지금 이 현장에서 다시 한번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강남-요한복음 21장 15절(양과 목자)190702b-이근호 목사.hwp (199.5K), Down: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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