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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20:13:21 조회 : 113         
243강-여호수아 23장 1~3절(말씀과 책임성)20190714-이 근호 목사 이름 : 송민선(IP:1.250.70.32)
243강-여호수아 23장 1~3절(말씀과 책임성)201907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3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355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 주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곧 그들의 장로들과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나이가 많아 늙었도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전쟁을 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여호수아가 전쟁한 것이 아니고 천사들이 전쟁한 겁니다. 그러면 여호수아는 별 할 일이 없지 아니하냐고 할 수 있는데 여호수아가 하는 일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가 전쟁에 승리한 그것을 눈에 보이는 자기 함께 있는 백성들에게 통지해 주는 일을 했어요.

그 통지할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말씀, 말로 한 겁니다. 그 말이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준 언약이라고 이야기하고 또는 맹세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오실 때 말로 하셨다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연결체, 말이라는 것은 요한복음 1장에도 그게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지난 낮 설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세례요한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례요한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가를 지켜보았습니다. “너 뭐야? 네가 메시아야?”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너는 선지자야?” 아니라는 거예요. 이렇게 바리새인과 세례요한이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같은 언어인 아람어를 쓰면서 그 당시 그 시대의 표준말을 쓰면서도 의사소통이 안 되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세례요한이 속해있는 세계와 바리새인이 속해있는 세계가 다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요한의 말을 못 알아듣고 세례요한은 그들이 어디 갇혀있음을 알았죠. 오늘날 우리가 똑같은 입장 안에 있습니다. 사실은 똑같은 입장이어야 복된 사람인데 똑같은 입장 안에 서 있습니다. 같은 대한민국에 산다고 해서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소속되어 있는 세계가 달라요.

그걸 무엇으로 아느냐는 거예요. 세례요한은 자기에 대해서 언급했죠. “너는 누구냐?” 할 때 누구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대변자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그걸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자꾸 나 붙들고 닦달 내고 시비 걸지 마라. 나도 내 맘대로 안돼. 나도 정말 미치겠어. 주님께서 나를 주님의 대변자로 세우셨다. 똑똑해서가 아니라 공부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나는 그분이 어떻게 일하는 지를 이 언어로 소리로 전할 뿐이다”라는 겁니다.

사도행전에 스데반 집사가 나오는데 스데반 집사는 분명히 사도가 아니에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일곱 집사 중의 집사입니다. 그냥 집사 중의 하나예요. 집사 중의 하나인데 그분에게 성령이 임하니까 우리 오늘날 같으면 목사나 장로나 사도가 할 일을 다 해버려요.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마지막 돌아가실 때도 뭐 반역적인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국가에 반정부적인 쿠데타를 시도해서 죽은 것이 아니고 그냥 설교했다가 죽었어요.

그것도 현장에서. 주님의 소리를 내다가 돌아가신 거예요. 그리고 스데반 집사는 죽어가며 주님의 얼굴을 보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일을 주님이 시키셨잖아요. 주님이. 나 죽으라고 주님이 시켰잖아요”라고 말해요. 스데반 집사는 내가 살 일이냐 죽을 일이냐조차도 고려하지 않은 겁니다. 내가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내가 미치겠어요. 살아 있는 것이 고역이고. 이건 죽든 말든 그건 내 소관 아니고 지금 내 소관은 주님이 이렇게 계시다는 것을 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스데반 집사의 성령 충만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성령 충만이라고 되어있어요.

창세기 1장 여러분 잘 아시잖아요. 말씀에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더라”라고 되어 있잖아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이 땅에서 전쟁에 승리하게 하는 것은 천사가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되어있어요. 하나님이 하시는데 천사가 한 거예요. 하나님이 지시해서 천사가 움직여 승리하게 한 겁니다.

그래서 내 편이 내 몸을 내 편이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빈약하고 초라해요. 엘리사가 저쪽에 아람 군대가 왔을 때 엘리사의 매니저 게하시가 한다는 말이 “우리는 이제 죽었습니다. 저쪽 몸 숫자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까 우리는 죽었습니다. 우리에게 쳐들어온답니다”라고 할 때 우리에게 속한 천사가 저쪽보다 숫자가 더 많다고 이야기했어요.

엘리사가 평소에 외친 것이 뭐냐 하면 자기 몸 하나 간수하고 건사하기 위해서 외친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성신을 통해서 주님께서 시킨 것을 외칠 뿐이에요. 외쳤다는 결과에 대해서는 일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게 힘들다고 하는데 왜 힘듭니까? 알아서 책임지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자식은 잘 키워야 하고 가수는 인기를 얻어야 하고 목사는 교인들 많이 끌어모아야 하고 전부 다 책임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책임지겠다는 것도 사실은 가만히 따져보면 수상하고 얄팍해요. 왜냐 하면 사람이 어떤 사람을 부러워할 때는 그리고 어떤 사람을 좋아한다고 할 때는 그 사람의 현 모습이 부럽기때문에 좋아하는 거예요.

그런데 병원에 아픈 사람들 한번 돌아보세요. 건강할 때는 아끼고 싶죠. 아플 때 어떠합니까? 어떤 짐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플 때. 지금 이상규 집사님은 전혀 그런 마음이 안들 거라고 자신만만하실지 모르지만 아프게 되면 그 앞에서 자신의 본심을 감출 수가 없어요. “좀 건강하지. 왜 아프고 그러나. 아프지 말지”라고 표현을 하면 아픈 사람은 “내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가? 나는 세례요한이다. 이것도 주의 뜻이다”라고 하면 어떻겠어요?

그러니까 사람은 사람을 볼 때 그냥 순수하다 하는데 순수하지 않습니다. 얍삽하죠. 절대 순수하지 않습니다. 내가 되고 싶은 상황을 내가 얻고자 하지 그렇게 순수함이 나올 수가 없어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신약에서는 세례요한이지만 구약 이스라엘은 세례요한 근처도 안 갔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의 얍삽함을 감추면서 하나님께 믿는 척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이 전쟁을 승리하도록 하신 겁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뭐냐 하면 너희가 사는 땅, 천국이죠, 그 당시는 약속의 땅이고, 그 땅은 너의 공로로 네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내가 내뱉은 나의 말씀을 내가 알아서 말씀대로 실행하는 과정에서 너희가 이곳에 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내 덕이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말씀 스스로 성취한 결과물입니다”라고 고백하라고 그들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집어넣은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그 이치입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 보고 “네가 뭐가 잘 나서 천국 가느냐?”라고 이야기할 때, 뭐 복음 믿고 교회 열심히 다니고 이런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자기 천국에 자기가 책임지지 마세요. 내가 천국 가는 것도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책임지겠다고 나서서 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부담을 좀 덜어주세요. 떨쳐버리세요. 내가 아니고 내게 도달한 말씀이 알아서 말씀 되게 하기위해서 구차하게 우리를 끌고 가시는 거예요. 너 같은 못난 존재도 천당 간다고.

이 모든 것이 책임감만 놓으면 돼요. 참 쉽지요. 내 인생에서 내가 책임 안 지면 되는 거예요. 표정 보니까 별로 쉬워 보이지도 않네요. ‘내 가족은 내가 먹여 살려야 한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자식 굶길 남자 아니다’라고 자꾸 책임지지 마세요. 그건 허당이고 허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이 땅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셨는지는 오늘 본문 그대로예요.

주께서 다 하시고 빠져나오시고 남아 있는 것은 국물이란 말이죠. 여러분 국물에 대한 예의가 뭡니까? 거기에 밥 말아 먹는 거예요. 우리 몸을 국물에 푹 잠기게 하는 거예요. 갑자기 라면이 댕기는 데, 라면 먹고 난 뒤에 그 국물, 주님의 피 국물 속에 이 몸을 잠기게 하는 거예요. 국물이 내 몸에 쏙쏙 배도록.

그래야 내 인생이 내 책임 아니잖아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 사실을 예수님 따라다닌 제자들도 감당 못 했습니다. 제자들도 아침 설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개별자니까 맨날 “어찌할꼬, 저찌할꼬, 저쪽 편이 더 많은데”라고 주님 따라다니면서도 계속 주님의 실체에 자기가 도움 되는 책임 있는 인간이 되려고 한 거예요.

제가 강사 하고 목사 하면서 많은 동료 목사도 같이 목사 되었고 노회에서 심사받고 그럴 때 목사들이 우리 후배 목사들에게 하는 말이 “너는 앞으로 목회 어떻게 할래? 어떤 식으로 제대로 해볼래?”라고 자꾸 그런 걸 물어요. 심사는 아니지만 자꾸 그런 걸 묻는다고요. 물을 때 어떤 목사들은 “제 마음을 낮춰서 찬송가의 가사처럼 아골 골짜기에도 복음 들고 가고 순교하는 자세로 가겠습니다”라고 하는데 그 당시에도 제가 보기에 이거는 성경에 예수님한테 주님께서 책임을 묻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이 선배 목사가 후배 목사한테 목회 어떻게 할지 책임을 주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후배 목사가 들었던 풍월대로 철딱서니 없이 목회 세계가 어떠한 사업세계인지를 모르고 어떤 사업인지를 모르고 자기는 예수님 본받는다고 아골 골짜기 가겠다고 하는데 그래서 간 사람은 없어요. 해외에 나가서 선교하겠다고 나가는 목적이 전부 다 자식들 공부시키려고 가는 거죠. 전부다.

성경 말씀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예수님께서 오히려 들떠있는 제자들을 낮춥니다. 여기 누가복음 12장 32절에 보면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적은 무리여. 쉽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선배 목사이고 제자들이 후배 목사들일 때 “너 목회 어떻게 할 거냐? 될 수 있는 대로 교인 수가 없는 쪽으로, 그 방향으로 목회해라”라는 말씀이 주님의 뜻이에요.

적으면 적을수록 나에 대한 책임과 기대가 적어지거든요. 포기하게 되거든요. 내가 포기하는 현장에 주님의 미래가 벌써 안착한 주님의 미래가 보입니다. 주님의 준비된 미래가 나의 거창한 미래에 다 가려지는 거예요. 손가락을 접어야 그다음 손가락이 보이잖아요. 내 고상해 보이는 목회 성공담 같은 이런 것을 미리 예상하면 그건 참담한 미래예요.

아마 악마가 도와주겠다고 서비스해주겠다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야 그게 그 미래가 돼요. 많은 교인, 많은 헌금, 많은 숫자,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악마와 협상하지 않으면 이거는 이룰 수 없는 겁니다. “적은 무리여”라고 할 때는 주님께서는 세상이 추구하는 그 다수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많은 사람이 외치고 이게 진리라고 할 때 주님은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거예요.

오히려 그냥 소수 되지 말고 쫓겨난 소수, 그 다수로부터 핍박받는 소수가 되라는 겁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과 다른 소리를 냄으로 말미암아 여지없이 밉상 당하고 비난받는 자가 되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가서 비로소 누가복음 12장 32절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가 깊이 박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인간이든 적게 되면 두려움에 벌벌 떨기 마련이다. 내가 그걸 안다.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네 편이 없으면, 네 소리 듣는 사람 없으면, 너는 벌벌 떨면서 인생 실패했다고 생각할 거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들리는 게 뭐냐 하면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 너는 너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에 의해서 너는 본의 아니게 적은 무리에 소속되어 있다”라는 겁니다. 이게 복 아닙니까? 이게 복이거든요. 이게 주님의 국물 아닙니까? 바르게 산다는 이것도 일종의 책임감입니다. 나는 내 몸 하나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자기에게 자꾸 책임감을 부여하지 마세요. 그냥 나는 주님에 의해서 살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약속의 땅에서 그런 마음으로 살면 ‘이제는 편안한 미래가 보장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거죠?’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언어 말씀 율법을 버린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들의 선택의 폭이 넓어질 때입니다.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은 뭐냐 하면 현실에 안주해서 이만하면 괜찮다는 의식이 솟아날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여유로움이 위기예요. 내가 이 정도 같으면 안전빵이라는 생각이 위기라고요. 인간이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세상 적인 사고방식인데 세상 적인 사고방식을 예로 든다면 이렇습니다.

야식을 시켰는데 음식이 좀 늦게 온다면 사람들은 화가 나서 주문한 음식 취소시키겠죠? 이것이 인간이 나에게 나로서의 고유한 권한을 행사하는 순간입니다. 소위 주문자가 갑질하는 거죠. “짜장면이 왜 늦게 오는데? 다 불어 터져가지고 어떻게 먹으라고. 도로 가져가세요”라고 하는 거죠. 젊은 아이들 오면 반말로 “가져가”라고 하고.

그게 과연 하나님이 거저 주신 약속의 땅에서 용납이 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용납될 수 없습니다. 내 선택이라는 자체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천국 가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나야만 가능한지 정말 상상하기도 힘들죠. 내가, 우리 자신이 깜짝 놀랄 정도로, 내가 그런 인간일 줄 생각도 못 할을 정도로 자기에게 책임감 주지 않고 자기 선택에 대해서 일체 의미 주지 않는 그런 정도의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냐 해요.

그러면 그러한 변화를 내 방식대로 도 닦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기도원에서 기도해봐야 자기 메아리밖에 안 돌아오니까 안되고 기도하고 난 뒤에 그 결과에 대해서 멋있게 왕왕하면서 영광의 아우라가 넘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또 흐뭇해한다고요. 내가 생각한 미래 때문에 주님이 주신 미래가 자꾸 가려지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약속의 땅은 고생했으니까 이제 그냥 편안히 쉬라는 곳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줄기차게 주어지는 곳이 안식의 땅입니다. 매일같이 말씀을 주세요. 매일같이. 우리는 매일같이 기피 하고 있지만 그래도 주께서는 매일같이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을 주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몸에 책임을 지지 말고 말씀의 결과로써 지금의 내가 있다면 그 말씀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느냐를 증거 하라는 거죠.

내 몸이 있느냐를 생각하면 내 몸 증거 하느라 바쁘고 내 변명하기 바빠요. 그러나 내가 말씀 위주가 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말씀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그러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겁니다. 몸에서의 언어입니다.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죠? “네가 누구냐?”라고 할 때, 몸을 두고 이야기할 때, “나는 예수님의 소리다. 이사야의 말씀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라고 말했어요.

몸은 몸인데, 세상 사람들은 자기 몸 간수하기 바쁜데 성도는 뭐냐 하면 내 몸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난데없이 주님이 주신 약속, 언약, 맹세, 말씀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이거는 여호와증인처럼 성경 구절 많이 외운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말씀으로 건드려줘요. 지금 이 상황이, 이 말씀과 말씀이, 말씀 되게 성취하는 현장이고 사건이라는 겁니다.

“너는 이 사건에 말려들었어. 그러니까 이 사건 속에서 너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너를 그렇게 활용했다”라는 그런 체험이 모든 우리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일어나는가. 우리 몸이 뭐냐 하면 우리는 우리 몸을 그냥 버리지 않아요. 활용해요. 어떻게? 우리 몸은 뭘 원하느냐 하면 내 몸 편한 것을 최고로 여깁니다.

그걸 두 자로 ‘행복’이라고 이야기하죠. 건강하지요, 돈 되지요, 쇼핑하는 재미로 살지요, 자랑하는 재미로 살지요, 바로 이런 상태. 그런데 이게 모순이거든요. 그렇게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 벌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학대해야 해요. 그러니까 이게 모순 아닙니까? 내 몸을 학대해야 내 몸이 편하다. 얼마나 학대해야 얼마나 돈을 모으겠는가? 이게 바로 모순이란 말이죠.

적당히 학대해서는 적당한 돈이 안 생기니까 돈을 많이 벌려면 더 심하게 학대해야 해요. 나중에 회복 불가해야 해요.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 보면 참 학대 많이 하죠. 왜 합니까? 돈 벌어서 편히 쉬려고요. 언제까지? 90 너머서 까지. 요양병원에서 링거꼽고 있으면서 돈 많이 벌었다 자랑하려고요? 그 균형을 맞추기가 힘든 거예요. 균형 맞추기가. 언제 사표를 낼지.

그 전에 제가 설교에서 말씀드렸잖아요. 다슬기 잡다가 사람 잡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제 또 죽었어요. 돈이 보인다니까요. 돈이. 요 정도만 하려고 했는데 점점 더 빠져들어 가는 거예요. 그게 도박인 줄 모르고, 판돈인 줄 모르고. 도박에 환장했어요. 이 세상 사업 자체가 판돈이고 도박이에요. 아내는 잡아당기죠. “여보, 그만해라. 당신은 사업보다 취직하는 게 제일 좋더라”라고 하면서. “그래서는 아이들 세 명 못 키운다. 돈 보일 때 무리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대출받아서 빌린 돈 왕창 다 날리고.

“내 친구 중에 주식 하는 친구가 있는데 이거는 나한테만 알려준대”라고 하는데 친구는 빠지고 뒤늦게 참석한 사람들은 다 망해버리고요. 그걸 누구 탓합니까? 나의 몸의 행복.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는 그놈의 책임감 때문에. 제발 책임지지 마세요. 우리는 말씀의 결과물이지 내 인생 내가 책임질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신명기 8절에 나오죠.

“40년 동안 너를 걷게 한 것은 너를 낮추시고 너를 주리게 하시며 너도 알지도 못하고 너의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이신 것은” 뒤에는 안 나오지만 제가 미리 말씀드리면 “애굽에 살던 때는 너는 네 몸 위주였다”라고 보시면서 뒤에 말씀 보세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깨닫게 함이라”

너는 애굽에 있을 때 버릇이 뭐냐 하면 내 몸은 내가 굴려야 산다는 거, 내 노동이 나를 살린다는 거예요. 내 노동의 대가, 돈이 있어야 산다는 거예요. 애굽에서는 그랬어요. 애굽이라는 그 구역에서는, 그 영역에서는 그랬어요. 그러나 우리가 가는 하나님이 준비한 그 미래의 약속의 땅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노동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로 살아요. 안식일로. 노동하지 못하는 날로. 말씀이 말씀대로 너는 결과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의 집합체가 그 땅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면 간단해요. 이제는 여러분 문 열고 밖에 나가세요. 나가면 거기에 애굽과 이미 안식에 도달한 우리가 만나게 될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몸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 몸 편한 것이 최고니까, 편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모두 그걸 위해서 삽니다.

그러면 우리도 우리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몸이나 우리 몸이나 똑같은 몸이죠. 그 몸은 세끼 먹고 우리는 안 먹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굶고는 못 살잖아요. 밥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되,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되 우리는 다른 것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주여, 이것조차도 우리가 얼마나 못된 인간인 줄을, 애굽적인 마음을 낮추고, 주리게 하시고, 이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무대지요? 그렇지요? 이걸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이런 감사가 나오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몸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저희들이 다시 깨닫게 하옵소서. 말씀이 육신이 된 이유를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 자체가 말씀인 것을, 약속이고 언약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43강-여호수아 23장 1~3절(말씀과 책임성)20190714-이 근호 목사.hwp (67.0K), Down: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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