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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8 06:55:45 조회 : 113         
25강-암 7장 7-9절(건축학개론)210217-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124.254.211.180)
25강-암 7장 7-9절(건축학개론)2102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7장 7-9절까지입니다.

아모스 7:7-9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훼파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

다림줄이라 하는 것은 밑에 추가 달려있고 추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우면 중력에 의해서 줄이 똑바로 땅 끝까지 내려옵니다. 이것은 주로 건축할 때, 제대로 집을 지을 때, 그때 사용하는 거죠.

그 다림줄, 추가 달린 그 줄을 누가 쥐고 계시느냐. 주께서 손에 추가 달린 그 줄을 가지고 어디에 나타나셨는가. 바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셔서 다림줄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8절 끝에 하시는 말씀이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한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멸망시키면서 주님께서는 제대로 조치했다는 것을 이 다림줄로 보여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멸망시키는 것은 정당했다. 옳았다. 그것은 할 만했다. 반드시 필히 하나님께서 하셔야 될 일을 너희에게 하셨다. 그래서 그 일로 인하여 너희는 이 세상에서 멸망당하고 심판받는다.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보았던 그 메뚜기 재앙과 큰 불을 주시는 그 재앙에서는 뒷부분에 ‘내가 뜻을 돌이키겠다. 용서하겠다.’고 하시는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용서치 아니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면 전에 메뚜기와 불 재앙에 대해서는 “내 뜻을 돌이키마. 내가 그 뜻을 시행하지 않겠다.” 하다가 이번 다림줄 환상, 하나님의 뜻에서는 “용서치 아니하겠다.” 이 말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가지고 다가서시느냐 하면 너희들이 용서의 대상인지 아니면 용서의 대상이 아닌지가 너희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겠다. 그래, 내가 용서할게.” 라고 하는 것은 너희들이 훌륭하고 용서받을 짓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을 용서한다는 자기 결심, 자기 계획에 대해서는 계속 내가 유지할 용의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얻어 챙길까, 무엇을 받아낼까.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주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우리는 받아 챙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무엇을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죠.

예를 들면 어느 가정이 있는데 학교 선생님이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이렇게 물었다면, 물론 볼때기 꼬집으면서 얘기하겠지만, “너희 아버지 뭐하시노?”. 어떤 친구는, “우리 아버지 빵집 합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그럼 너는 뭐 얻어먹었나?” “매일같이 맛있는 빵을 얻어먹었습니다.”, “느그 아버지는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는 치킨집 합니다.” “아버지 덕분에 뭘 얻어먹었느냐?” “매일 치킨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느그 아버지는 뭐하시노?” “저희 아버지는 전기공사 일하고 있습니다.” “너는 뭐 먹었노?” “아무것도 먹은 게 없습니다.”

세 번째 경우에, 하나님은 용서라는 것을 행사하시는 분이지 우리가 마땅히 용서받아야 될 대상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겁니다. 주님께서는 용서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지 나라는 인간은 용서받아야 돼. 라고 그걸 하나님 앞에 요구할 권한과 자격은 일체 없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두 번째 재앙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래 너희들 용서할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협박 또는 겁박 같은 말씀을 하시죠. “내가 메뚜기 보내서 너희들 다 싹쓸이한다.” 그러니까 아모스 하는 말이 “하나님, 그렇게 하시면 우리가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 내가 너희에게 재앙내린 것 철회할게.”

이것은 우리가, 이스라엘이 귀여워서 철회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먼저 언급하는 거예요. 심판할 수 있는 분이 심판을 유보하겠다는 뜻은, 너희들에게 정작 돌아갈 것은 심판밖에 없는데 너희는 그 심판만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뭐 하나님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처럼 맨날 선물이나 주고 사랑이나 베풀게 되면 그게 우리의 마음에 딱 맞는 하나님이라고 오해하고 있단 말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쉽게 나올 줄 몰랐습니다. 라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하나님하고 상대할 쨉이 아닙니다. 쨉이 안되죠. 하나님은 자기 용서를 사랑하지, 우리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용서의 값을 하고 있는 사람만 자기 백성이지, ‘하나님, 저 인간입니다. 용서해주세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거래하거나 협상하거나 타협할 용의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메뚜기 재앙에 대해서 내린다고 하다가 철회하시고 두 번째 불 재앙에 대해서도 내린다 하다가 철회하시고 세 번째 다림줄에서는 철회가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라고 이야기하세요.

그러면 용서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다림줄이에요, 다림줄. 용서하지 않는 이유가. 이런 게 참 어려운데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예 용서를 없애겠다는 뜻이 아니고 용서받지 못하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조건 하에 용서하겠다는 뜻이에요. ‘나는 주님 앞에 용서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자인하는 조건 하에 용서가 주어지는...... 그래야 용서가 용서다운 게 되니까요.

그러면 이 세 번째 ‘용서하지 않겠다’ 이 말은 다림줄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준 그 취지를 아는 자, 그 취지가 살아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용서가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이라 하는 것은, 추가 달린 그 줄은 어디에 써먹는 물건이냐 하면 이게 건축물에 쓰는 물건이거든요. 지금 주님은 건축학개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건축은 사람이 아니에요. 어떤 사물이고 물체입니다. 건물이니까 물건이고 물체지요. 주님께서 세 번째 재앙을 다림줄로 한다는 것은 그 다림줄을 나타내야 될 시점에서는 앞에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건축물이 있는 거예요.

다림줄로 해서 삐딱하게 지었다. 건축물에 하자가 있다. 그러면 그 건축물에게 묻거나 따질 필요 없어요. 건축물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어? 집이 잘못되었네. 헐어버리자. 그거 헐어버려도 건축물이 아니 저를 왜 허십니까? 이렇게 수고해서 만들어놓고 왜 헐어버립니까? 라고 대들 수 있는 그런 인격이나 이런 게 없어요. 그저 하나의 물체니까. 벽돌로 지은 물체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다림줄이라는 재앙을 하나님께서 제시했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생각하기에 네가 사람으로 보이냐?” 이런 뜻이에요. 우리 인간은 자신을 당연하게 하나의 인격체를 지닌 하나의 인간, 사람,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 준, 원숭이로 안 만들고 코끼리로 안 만들고 해바라기로 안 만들고 고~귀한 사람으로 만드신,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사람입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어 해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일방적 생각이고 다림줄 계시를 통해서 보여줄 때 주님은 우리를 사람 취급하지 않습니다.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고 건축물로 취급하는 거예요. 그래서 언제든지 허물 수 있고 세울 수 있는 권한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 건축물에게 물어 보고 “내가 다시 지어줄까?” 안 묻죠. 물체니까. 죽어있는 물체니까.

그러면 내가 사람이다. 신이 만든 사람이고 고귀하고 존엄한 인격이다.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려면 하나님을 믿어야 돼. 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죠. 그렇게 해서 내가 사람답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신을 찾는다면 그 신은 우상이 되는 겁니다. 거짓된 신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여기 9절에 나옵니다.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훼파될 것이라” 지금 여기에 이삭의 산당, 이름은 아주 거룩하죠. 이삭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있게 한 시조 아닙니까, 시조.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렇게 되잖아요. 시조급에 해당되는 사람이 이삭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대한민국 사람이 단군을 시조로 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단군 할아버지가 있었기에 우리가 있다. 개천절 노래 가사에 나오잖아요. 단군이 먼저 있고 그다음 우리가 있기 때문에 단군을 모시고 숭배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뿌리이니까, 뿌리. 미국에 흑인들이 있죠. 그들이 고난 받을 때마다 자신의 뿌리, 아프리카를 잊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뿌리를 잊어버리고 역사를 잊어버리면 그 인간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조상을 찾고 뿌리를 찾는 것은 나 지금 사람 맞습니다. 인간 맞습니다. 인간으로 대우해주세요. 사람으로 대우해주세요. 저희들도 인격이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우리하고 잘 협의하고 타협하게 되면 하나님이 원하는 좋은 사람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그러한 조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설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그러한 아이디어, 그런 생각은 어디서 배웠는가. 바로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이방민족들이 그들이 자기들 믿고 싶은 신을 섬길 때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고귀한 인격과 가치와 의미를 살리는 쪽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거예요.

하나님, 신이시여, 나 가치 있죠? 의미 있죠? 내가 하는 것이 무의미한 게 아니죠? 내 자식 키우고 나 착한 일 하는 거 하나님이 지켜보실 때에 훌륭하다 선하다 착하다 대단하네 그런 칭찬할 이야기, 그런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좋은 반응 주실 준비가 되어 있죠? 지금 그런 조로 신을 찾는 거예요. 그 신이 가짜인 줄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그런 신이 가짜라는 생각은, 그게 인간이 상상해서 조작해낸 거짓 신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한 거죠.

신비로움. 이 세상의 모든 우주가 아름답다. 신비롭다. 누가 만들었겠는가? 당연히 신이 만들었죠. 인간, 누가 만들었겠는가? 조상이. 그럼 조상은 누가 만들었는가? 신이 만들었죠. 그럼 그 신을 섬기자. 인간으로서는 그게 마땅히 해야 될 일이고 신을 찾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서 가장 고상한 것이라고 자기들끼리 우기고 있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정작 당사자는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를 않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거 궁금하지 않던가요? 성경이 이렇게 두껍잖아요. 성경이 두꺼운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있는데,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을 알아듣게, 이걸 전부다 함축해서 이걸 압축을 해가지고 딱 한마디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줬다는데 그 말씀의 내용이 요약해서 한마디로 응축하면 뭡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알아듣기 쉽게 하면 이런 겁니다.

죽으라는 말이에요. 죽으라는 말입니다, 그게. 살 생각하지 말고 죽으라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하나님마저 이 땅에 와서 죽었으니까. 하나님도 이 땅에 와서 죽었는데 네가 뭔데 살려고 하느냐.

이스라엘의 특징 중 하나를 잘 나타낸 것이 출애굽기 14장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나라가 처음 생겼거든요. 전에는 애굽에서 그냥 히브리종족으로 있다가 모세를 보내가지고 히브리종족을 따로 빼내어서 이스라엘의 첫날을 개시, 첫 이스라엘 1일을 시작한 것이 바로 출애굽이에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러한 독특한 특징적인 사건을 간직한 채 그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들은 전부다, 그 중에 이방민족도 섞여 있어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같이 살던 땅에서 벗어나서 다른 땅으로 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디로 인도하느냐 하면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그들을 홍해로 인도해요.

13장 18절에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출애굽기 13장 18절에도, 14장 16절에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바닷길로 이스라엘을 몰고 갑니다. 왜 바다로 몰고 갔을까. 건너지 말라는 뜻이에요. 건너지 말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릴게요.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조건 하에 용서받는 거예요. 나는 용서받지 못할 자. 나는 천국가지 못하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조건 하에 천국에 넣어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디로 몰고 가느냐. 장정만 사십 만이에요. 숫자가 엄청나게 많죠. 그들을 홍해로 딱 몰아요. 막다른 길로 가는 거예요. 그리로 보낸 이유가 건너지 말아야 할 바다라는 거예요. 건너지 말라.

그럼 안 건너면 의도적으로 그 뒤에서 애굽 군사들이 따라옵니다. 여기 출애굽기 14장 7절에 보면 “특별 병거 육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발하니” 애굽에 있는 모든 마차, 전쟁하는 마차를 전부다 동원시켰어요. 옛날 전쟁은 기병보다도 병거가 먼저 발달되었습니다. 말이 속도가 느려서 그래요. 말이 크기도 크지 않아서 전쟁할 때는 단독으로 말 타고 가는 것보다도 마차가 먼저 발달했어요. 그 마차들 육백 개와 모든 병거를 동원해서 곧 다 따라잡았어요. 뭐 그냥 손대면 이스라엘 사람들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막아놔서 그렇지 다 죽게 되어 있어요.

뒤에는 애굽 군사가 따라오고 앞에는 바다가 있고. 자 그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한테 원망하면서 ‘우리가 죽을 데가 없어서 바다 앞두고 광야 길에 다 죽으려고, 몰살되려고 당신이 우리를 이렇게 인도했느냐’ 라고 원망했죠.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들은 아직도 여호와에 대해서 굉장히 생소한 겁니다.

신은 알아요. 천지를 만드시고 뭐 줄줄 다 외웁니다. 신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고 뭐 다 외우는데 그것은 내가 지어낸 신이고 내 구미에 맞는 내 입맛에 맞는 신이고 진짜 신을 그들은 처음 경험한 겁니다. 그 신의 조치에 처음 맞닥뜨릴 때 그들은 무엇을 알아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죽인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돼요.

내가 살기 위해서 필요한 신은 있지도 않은 신이고 이것은 인간들이 지어낸, 서로가 서로에게 동의해서 고개 끄덕이면서 그 신 맞지? 그래, 사랑의 하나님. 저희들끼리 좋다고 만든 신이에요. 진짜 신은 내가 죽어야 되는 존재인 것을 인정하는 조건을 요구하고 독촉하고 촉구하는 하나님이에요. 살 생각하지 말고 죽어버려라, 인간아! 인간도 아니죠. 사람도 아니에요.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라는 거예요.

결국은 죽을 인간이 왜 자꾸 살 생각하는지. 네가 죽는다는 그 사실과 네가 지금 매일매일 살겠다는 사실과, 두 가지의 성향과 본성이 모순된다는 생각을 못했는가. 네가 평소에 그 생각을 왜 못했어, 그걸? 살려고 애써도 죽고 죽으려고 해도 죽고. 어느 것이 우세한데? 어느 것이 월등한데? 어느 것이 힘이 셉니까? 죽음의 힘이 세잖아요. 그러면 그 이유를 알아야죠. 우리에게 죽음이 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죠.

바다다. 건너지 마라. 너희들은 다 죽었다. 이 말은 성경을 압축해서 말할 때 하나님이 죄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죽어야 마땅한 인간이 살려고 하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없다는 거예요. 이제 죄에 대해서 분명히 알았죠, 함축해서. 죄가 뭐냐. 살려고 하는 게 죄에요.

살려고 하는 게 죄니까 샤워하는 것도 죄고 숟가락 들고 밥 먹는 것도 죄고 잠자는 것도 죄고 이 모든 것이 죄인데 새삼스럽게 뭐 두 살 먹은 아이 물에 빠뜨려 죽이고 뭐 어떻고 양자된 아이를 이사 가는데 방치해서 죽이고. 그 죄가 더 큰 죄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음주운전해서 사람 치여 죽인 죄, 그것만 죄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기본적인 죄는 뭐냐. 안 죽으려고 발버둥치는 그게 죄에요. 그게 아직도 나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이고. 주님은 우리를 사람으로 안 봐요. 하나의 건축물로 본다니까. 집단적인 건축물. 하나의 벽돌. 언제든지 무너뜨리게 되면 무너뜨리는 대상으로 본다 이 말이죠. 다림줄을 등장시킨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우리 자신의 인격화는 어디서 나왔는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아모스 7장 9절에 나오는 그것. 다시 말해서 유명한 이삭의 산당, 조상들이 제사 드렸던 그 산당. 창세기 26장 25절에 보면 이삭도 제단 드렸고 아브라함도 제단 드렸잖아요. 야곱도 물론 제단 드렸고, 벧엘에서.

그러니까 우리 선조들이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 제사 지내서 응답받는 그 귀한, 성스러운 공간, 그런 공간을 우리가 역사와 전통을 살려서 그걸 기억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도움 된다고 생각하는 그것. 그것이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내가 용서치 아니하고, 아니하는 증거로써 너희들이 알고 있는 여호와와 통하겠다고 여호와를 믿어보겠다고 여호와께 복 받겠다고 너희들이 귀하게 여긴 그 제단을 내가 완전히 싹쓸이해서 밀어버리겠다는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예배당 다 박살내겠다는 뜻이에요. 교회 다 없애겠다는 뜻이에요.

누굴 위한 교회이고 누굴 위한 예배당이냐 이 말이에요, 누구! 너 좋으라고, 너 밥 먹고 사는데 힘 모자라니까 신에게 살도록 힘 달라는 식으로 기도했고 철야했고 새벽 기도했고 예배드렸던 그것. 그게 바로 우상숭배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게 우상숭배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까 제가 언급한 용서의 지속성. ‘주님이 용서 한댔잖아요. 하나님의 약속은 용서 한댔잖아요. 그럼 어디 건물보고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하려면 어떤 인격체가 등장해야 되는데 사람을 사람으로 안보고 하나의 물건으로 본다면 그럼 용서의 대상이 되는 인격체는 어디 있습니까? 없잖아요.’ 라고 생각하겠죠.

이스라엘은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사람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지는 곳이 이스라엘이에요. 내가 교회 와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물건인데 새로운 인격체로 만들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존의 사람도 아닌 것은 버리고 내가 예상도 못한 새로운 사람을 주께서 새로 만드는 곳이 바로 이스라엘이고 교회다 이 말이죠, 성령으로.

그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환상 또는 하나님의 계시로 나타났습니다. 그 계시가 어떻게 나타났느냐 하면 이스라엘에서 이것이 건축이거든요. 하나님의 그러한 약속, 내가 용서할 대상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새로 만든다는 그 대상에 참여하는 자들이 있어요. 사람은 아니에요. 사람은 아닌데 스가랴 2장 4절에 보면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바로 천사들이 등장합니다.

사람 너는 빠져. 너는 빠지고 천사들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바삐 움직여요. 천사들이 움직이면서 이스라엘 자신은 자기를 인격체로 보잖아요, 사람으로 보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이스라엘을 하나의 중성적인 존재로 보는 겁니다. 이게 좀 어려워요. 스가랴 2장 4절에 보면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 ‘소년’이라는 말이 나오죠.

저는 ‘소년’이라고 하면 딱 생각나는 그림이 하나 있어요. <피리부는 소년>. 마네가 그린 그림이에요. 소년은 중성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남자냐 여자냐가 아니에요, 소년은. 소년의 반대말은 소녀가 아니고 어른입니다. 다윗. 소년 다윗. 소년 다윗의 반대말은 그 나이대의 여고생이 아니에요. 어른들, 기성세대를 말합니다. 그러니 소년은 남성이냐 여성이냐를 물어볼 대상이 안 되는 그런 중성적 의미를 갖고 있어요. 천사와 가까워요. 천사가 중성이거든요.

이 소년이 어디를 가느냐 하면 예루살렘에 가요. 자,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죠. 건축물이죠. 오늘 본문의 다림줄도 이스라엘을 말하는 겁니다. 스가랴 2장에 쭉 나옵니다. 거기 가게 되면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예루살렘이 만들어지는데 그 때 그 예루살렘을 스가랴 2장 10절에서는 여성성, 여성으로 봐요.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시온의 딸. 성경에 엄청 나오죠. 이스라엘을 홀로 두지 않습니다. 여성의 특징은 혼자서 여성이 될 수 없어요. 반드시 남편감, 신랑감이 있어줘야 됩니다. 호세아 2장 16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고 되어있고 20절에 보면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여호와 자신이 신랑이 되고 남편이 되고 이스라엘은 뭐가 되느냐 하면 아내가 돼요. 그런데 이렇게 현재 있는 내 인격체를 주님의 아내, 주님의 신부라 하면 안돼요. 중간에 하나를 거쳐야 돼요. 중성성을 거쳐야 돼요. 하나님, 저 신부로 해주세요. 안돼요. 우리는 인간으로 치지 않고 하나의 건축물로 보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흙이지 사람도 아니니까, 천국에서 예수님이 신랑이 되고 성도가 신부가 되어서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데 요한계시록 21장 혼인 잔치가 벌어질 때는 중간에 하나의 혼인 잔치라는 것을 거쳐서 신부, 신랑이 되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신부가 된다는 말은 우리 속에서 남성으로 대변되는 남자, 남성으로 대변되는 사람. 영어로 man이라 하잖아요. man이라는 것이 남성이라는 뜻도 되고 사람의 대표자가 돼요. 내가 사람이라고 인식되는 그런 남성적 인식은 이제는 우리는 바이바이해야 돼요.

우리 인생을 아담이 책임지지 못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조상이 벌써 선악과 따먹고 범죄해서 죽으라 했고 죽었기 때문에 우리도 마찬가지로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진다, 남자답게. 뭐 그런 거 없어요. 우리는 여성이 되는데 여성은 아까도 말했지만 혼자 있는 게 아니에요. 여성은 반드시 책임자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성이 있다는 것은 나를 책임질 남성이 따로 나타난다는 뜻이에요.

남성이 나타나는 그 작업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나의 건축학개론, 그러니까 하나의 집으로 보는 거예요, 하나의 집으로. 그 과정이 좀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에 제가 마태복음 22장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혼인 잔치가 나오거든요.

그런데 혼인 잔치에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시작이 된단 말이죠. 그 뒤의 내용은 여러분들이 혼인 잔치에 관한 내용이라고 생각하겠죠. 그러나 실제로 보게 되면 6절에,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이미 혼인 잔치가 또 일어났었습니다. 일어났는데 일어난 어떤 현상이 뭐냐 하면 13절,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제가 잠시 웃는 이유가 이게 결혼식장인지 아니면 아귀다툼인지 분간이 안돼요. 사람을 완전히 살육하는 살육의 현장입니다, 혼인 잔치가 아니고.

방금 보셨죠, 마태복음 22장 6절, 7절과 그리고 13절. 아니 무슨 혼인 잔치에 왔으면 고맙게 여겨야지, “감히 예복도 입지 아니하고”. 지금 결혼식장인데요. 지금 주인공이 신랑, 신부인데 그냥 신랑, 신부나 사진 찍고 반지하고 축가 부르고 그것만 하려고 하는데 아니 그 신랑 결혼식을 주최하는 임금님은 신랑, 신부에게 관심도 있지만 다른 관심이 또 뭐가 있느냐 하면 하객들에 관심 있어요. 저 인간들 어디 유니폼, 예복도 안 입고 여기 참석했어? 뭣들 하느냐, 천사들아. 와서 저것들 다 지옥불에 들여보내라.

이게 살육의 현장입니다. 잔혹사에요, 잔혹사. 혼인 잔치가. 사람 같지도 않은 걸 죽여 버리는 그 현장이 혼인 잔치에요. 기뻐하고 즐거워야 될 혼인 잔치가 한쪽은 통곡하고 난리도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당성이에요.

사람도 아닌 게 어디 혼인 잔치에 참석하려고. 이런 거예요.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뭐 혼인 잔치가 있지, 사람 같지도 않은 게 맨날 자기 위하는 신만 찾고 자기에게 잘해달라고 축복만 기도하는 그런 인간이 지옥가야 되지 무슨 천국을 넘봐. 이래가지고 아주 작살내는 그 현장이 혼인 잔치에요.

여기 혼인 잔치에 있어서 청했는데 안가는 사람이 있어요. 나도 장가가야 되고 내 장가 있는데 남의 장가를 왜 갑니까. 여기 소를 샀습니다 또는 자기 밭을 샀습니다. 장사하러, 또 출장 가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신부, 그러니까 신랑을 맞이할 그 혼인 잔치를 빛낼 그 신부의 정신 상태와 도저히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임금님이 화를 내는 겁니다.

혼인 잔치를 할 때 남자는 없어요. 모두 여성으로서만 참석해야 돼요, 여성으로서만. 신랑은 오직 예수님만 신랑이기 때문에. 유일한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것은 이 세상에서 인간다운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부각하는 거예요.

자 다시 스가랴로 돌아와서.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때에 하나님께서 만든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왜 멸망시켰는지요. 그들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이스라엘은 몰랐어요. 그런데 스가랴 5장 7절에 보면 “이 에바 가운데에는” 에바라 하는 것은 부피를 재는 그릇 같은 거예요. 대지비(대접)이라고 보면 좋아요. “이 대접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는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그 대접이 두꺼운, 도저히 인간 힘으로 열지 못하는 아주 무거운, 비중이 큰 납으로 갇혀 있는데 그 뚜껑을 강제로 여는 거예요. 강제로 열어 보니까 그 안에 여인이 하나 등장하는데 그 여인은 악이더라. 곧 악 자체가 하나의 여인으로써 예루살렘 속에 악이 들어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용서를 용서답게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뭐를 제거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친히 만든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서 뭐를 끄집어내야 되느냐 하면 그 악, 악마죠, 악, 죄, 그것을 끄집어 내고 끄집어 낼 때 비로소 예루살렘이 예루살렘답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답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백성답게 되는 거예요. 끄집어내는데 이것을 위해서 누가 동원되느냐. 여기 천사가 동원되고 천사가 동원시킨 어떤 두 여인이 나오는데 그 두 여인이 날개, 학의 날개 같은 바람을 해가지고 그 죄를 옮깁니다. 어디로 옮기느냐 하면 바벨론 시날 땅으로 옮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갔어요, 현실적으로. 이것은 하나의 계시이지만 계시대로 현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바벨론 땅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거기서 망합니다. 바벨론 땅에서 망해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의 신부로서, 주님이 우리의 남편 되고 우리가 신부로서 남편 되시는 그 분이 그동안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는 데 있어서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의 힘으로 바다를 건너간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바벨론에 잡혀갔던 그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참된 이스라엘 되려면 그 악을 처리하는 죄 값을 치러야 되겠죠.

이렇게 보면 됩니다. 용서는 치렀던 그 값, 죄를 사하기 위한 그 값하고 용서가 같은 가치를 지닌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용서가 주어지는 겁니다. 내가 죄 용서받기 위해서 치러야 했던, 신랑 되신 주님께서 이 땅에 와서 치러야했던 그 희생의 가치 있잖아요. 희생의 값, 그 값을 우리가 이해할 때 비로소 그건 용서가 되는 겁니다.

더 알기 쉽게 말해서 주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했던 그 값이 우리 안에 딱 들어오게 되면 그걸 보쌈, 감싸버리면 그게 용서에요. 그러니까 만약에, 만약이 아니고 진짜 그래야 되지만, 여러분들이 정말 용서를 받았다면 ‘용서 받았다’에 대해서 감격하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이 엄청난 값을 치렀다는 것에 대해서 감탄하고 감복하고 감사하는 거예요. 엄청난 값을 치렀다는 사실에 대해서.

왜 이게 중요하냐 하면요. 만약에 내가 용서받은 것을 좋게 여겨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까불락거리는지 나 용서받았다고 까불락거리면서 돌아다니겠죠. 용서받았다고. 설날 때 할아버지가 세뱃돈 주니까 할아버지 돈이 손자에게 주어질 때까지 할아버지는 할머니한테 얼마나 시달리고 잔소리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 값을 깨닫지 못하고 돈 받았다고 돈 소유한 것에만 정신이 팔려가지고 나 돈 받았다고 좋아들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손자는.

이 말은 이렇게 이해되는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진정 십자가 피 흘려서 죄 용서했다는 것이 진정 팩트, 사실이라면 이제는 내게 주어진 용서는 요지부동, 변함이 없는 거예요. 밥을 먹는 죄를 짓고 어디 가서 나쁜 짓하는 죄를 짓더라도 그 값이 있는 한 용서는 요지부동, 한결같이 용서가 되는 거예요.

용서가 계속해서 유지가 된다면 암에 걸려 죽든 뭐 차사고 나서 죽든 어떤 수모를 당하고 부도가 나도 가정이 깨어져서 뭐 박살나든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이 주신 용서에 대한 감격과 기쁨을 빼앗아가질 못합니다. 내 신상에 어떤 일이 있다 할지라도. 시험 쳤는데 분명히 100점 받았는데 실수 1개해서 96점 받은 그 아픔. 그렇더라도 용서 앞에서는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용서 앞에서는.

내가 용서받은 것이 아니고 용서를 위해서 내가 거기에 참여된 거예요, 하나의 신부로서. 신랑의 용서해주심의 그 가치, 그 사랑을 빛내기 위해서 우리는 신부로서 거기에 초청받은 겁니다. 참여된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예루살렘, 시온의 딸 예루살렘. 하나의 건축물로 표현하지만 그것이 인격화된 예루살렘, 인격화된 이스라엘.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성도죠.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이제 한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목사님, 용서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자기 용서받는 것을 챙기지 마세요. 우리는 용서 받을 자격도 없고요. 용서를 거론할 권리도 없습니다. 나한테 용서는 어울리지 않아요.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이 들어왔다면 그것은 비록 나 스스로는 구원받을 가치가 없지만 내 안에 들어왔던 그 용서하시기 위해서 치렀던 그 값이 십자가의 피와, 예수님의 살과 피가 들어왔다면 그걸로 이미 우리는 용서관계에 돌입된 하나님의 성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자랑거리가 있는지 아니면 주님의 십자가 피가 들어와 있는지 그래서 용서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돌아보면서 정말 무엇을 받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사용하여 주심 그 자체를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5강-암 7장 7-9절(건축학개론)210217-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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