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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5 07:13:40 조회 : 85         
26강-암 7장 10-17절(말씀의 허비)210224-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180.11)
26강-암 7장 10-17절(말씀의 허비)2102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7장 10-17절까지입니다.

아모스 7:10-17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하고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임이니라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계하지 말라 하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중에서 창기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줄띄워 나누일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반대가 있음으로서 실현된다는 어떤 역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해석이고요, 인간들의 해석이 아니고 주님의 해석은 인간들의 반대를 유발시켜서 도리어 성취되어 간다는 것이 주님의 해석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예언이나 말씀을 들을 때에 그동안 꼬깃꼬깃 감추어놓은 자기 본성 자기 본색을 그대로 노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본색이라는 게 뭐냐, 본 의도하는 것이 뭐냐? 그것은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이 성공하는 겁니다. 여기에 제사장 아마샤가 나오지요. 아마샤가 아모스 향하여, 선지자를 향하여 지금 비난하고 협박하고 공갈하고 있는 그 대목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거짓선지자라 할 수 있는데 아마샤가 아모스에게 지시를 한다는 것, 너는 이곳을 떠나서 다른 동네에 가서 예언하라, 이렇게 지시한다는 것은 그 지시한다는 그 자체가 너 자신이 거짓선지자인 것을 티를 내고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누구한테 지시한 적이 없어요. 선지자자체가 누구한테 지시를 안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들어와 버리면 하나님께서 그냥 외치는 대로 그냥 외칠 뿐이에요. 지시라 하는 것은 어떤 의도를 갖고 있을 때 지시가 되거든요.

그런데 그 의도를 갖고 지시한다는 자체는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한마디로 말해서 성공을 기대하기 때문에 지시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아모스가 예언을 할 때 아모스가 전하는 그 예언이 아모스 자신을 어떻게 만드느냐?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모스는 말씀을 전하는데 이미 본인 자체가 실패자, 실패자 될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을 전제로 해서 지금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아마 아모스의 친척이 있다면 아모스보고 이렇게 이야기했을 거예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일로 인하여 네 인생을 왜 망치려 하느냐?” 아무도 사람들이 환영하지도 않는 일 때문에 왜 네 인생을 망치려 하느냐는 말이지요.

더 알기 쉽게 말씀드릴까요? “우리 집안 봐라. 다 불도가 심하고 또 유교 집안인데 우리 집안에 어느 누구도 교회가고 예수 믿는 사람 없잖아. 우리 집안 아무도 환영하지도 기억하지도 않는 일 때문에 네가 왜 네 인생을 스스로 망치려 하느냐?”

그런 비난을, 비난까지는 아니어도 그런 눈치는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게 바로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이에요. ‘진짜 이게 말씀이 현실에 일치하는 것이 맞구나.’ 이래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말씀은 말씀 전하는 자를 망치게 만들어요. 엉망진창으로 만듭니다. 실패자로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이 복음을 알고 말씀을 알았거든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내 인생 조져 놨다, 실패했다, 그냥 실패자로 산다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어야 돼요. 내가 복음을 알고 말씀을 알았을 때. 어느 누구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어느 누구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나를 아웃사이더로, 소외자로 만들 것이다. 그것을 아주 기쁘게 당연시해야 돼요.

왜냐하면 말씀은 허비됨으로서 실현되거든요. 말씀이 계속 무시당하면서 말씀은 성취가 돼요. 무시당하지 않으면 그 말씀은 성취가 안 됩니다. 무시당한다는 조건하에 성취가 되고 말씀 전하는 자 복음 아는 자가 인간들로부터 거부당한다는 조건하에 말씀은 실현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여러분 보고 “아이고, 집사님은 깨끗하게 사시네. 아, 교회 다니고 복음 알더니만 참 바르게 사십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런 소리 하거든요, ‘에라, 오늘부터 지저분하게 산다.’ 지저분하게 살아야 돼요, 지저분하게. 깨끗하게 사시네? 그거 뭐 잘못된 거예요.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세상은 오직 성공만 추구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 현실은 성공 외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하이고, 깔끔하고 착하고 바르게 사는구나.” 그런 해석을 들어버리면 귀를 씻어야 돼요. ‘오오오오……, 나 잘못 들었다.’ 이거 뭐 내가 지금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내가 지옥가고 있는 거 아니야? 세상에 그런 소리를 다 듣다니.’

“아이고, 교회 다니더만 착실하게 부모한테 효도하고 가정에 충실하고……” 어어어어어……, 전혀 나와 상관없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들의 성공에 입각한 비평, 평가, 그것은 전혀 성도한테 해당되지 않습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내부로 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가지고 내 내부를 맞춰서 이렇게 정리정돈 하는 게 그게 신앙이 아니에요. 깔끔하게 정리정돈 하는 그것은 김 일우나 하라고 하세요.

절대로 신앙이란 깔끔 떨고 정리정돈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뭔가 세상 사람들이 성공 하는 것처럼 내가 천국입성에 성공하려 치면 그것은 바로 신앙의 슬럼프에 빠진 거예요. 왜냐하면 내 뜻이 강렬하기 때문에. 내 뜻이 관철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이것은 거짓된 신앙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내가 뭔가 성공을 향하여 조정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자기의 허위성, 자기가 말씀에 의해서 누굴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전파하면서 그 말씀이 나를 지시하거든요. 나를 파헤친다고요. 나를 점점 더 파헤치고 파헤치게 된다는 말은 내가 얼마나 허위적인 존재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를 날마다 파헤쳐가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의 종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일에 내가 아무 쓰잘데기 없고 주의 일에 끼어들 수 없다고 느낄 때 그 순간이 바로 주의 종이에요. 주의 증인이에요. 그게 ‘아, 내가 낄 자리가 없구나.’ 내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때 그게 선지자고 그게 성도다운 거예요. 가장 성도다운 거지요.

우리가 왜 자기가 허위적이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게 왜 중요한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 자체로 기뻐하기를 원하거든요. 성도한테는. 그런데 사람이 말씀 그 자체로 기뻐함이 없으면 자꾸 다른 기쁨을 찾고 있어요. 뭐 케이블에 중국드라마를 찾는다든지 자꾸 다른 기쁨을 찾아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세상이라는 것은 어떤 현실이냐 하면, 천국이 있고 하나님이 살아있고 말씀이 살아있다는 증거보다 반대로 천국은 없고 하나님도 안계시고 이 세상 이 모든 것은 그냥 자연 그대로 흘러갈 뿐이라는 증거가 훨씬 더 많아요. 이 현실자체에서.

현실자체에서 천국이 있고 예수님 살아 계시다는 증거 찾아보세요. 없어요. 또 없어야 되고. 인간들에게 천국이 있다는 증거를 왜 제시하지 않느냐 하면, 인간은 천국이라는 기대, 천국가면 자기가 성공한 거잖아요. 자기성공에 대한 기대를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부지런히 탐색하고 찾아다니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성공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마다 않는 게 인간이라는 말이지요.

만약에 이 땅에 천국의 증거가 있다면 왜 인간들이 확 달려들지 않겠습니까? 달려들지요. 왜냐하면 그게 자기의 기쁨이고 인간은 자기 기쁨이 최우선적인 겁니다.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그냥 나 여기 있다, 그냥 조용하게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나를 배려하고 나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우샤우샤, 독려하고 나에게 힘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움직입니다. 어떻게 움직이냐 하면, 힘들을 선망하면서, 힘들이 나의 일을 일으키게 하는 힘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자기 일을 찾으려고 해요. 왜냐하면 나의 일이 없으면 내가 살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적으로 봐서 나의 일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아모스는 자기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요. 아모스의 뜻은 뭐냐? 모든 일이 주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라는 것은 아예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아마샤라는 사람이 등장하거든요. 거짓선지자라 했지요. 제사장인데 이 제사장은 아모스의 말씀으로 기뻐하는 자가 아니에요. 자기 성공을 기뻐하는 자에요. 여기서 하나 공식 나오지요. 자기성공을 고대하는 자는 전부다 거짓 선지자에요. 적그리스도 편에 섰다고 보시면 됩니다.

자기 성공을 고대하는 사람, 그런 예는 아주 많지요. 목사가 개척교회 하면서 개척교회 성공하기를 바랄 때 그것은 백퍼, 백퍼센트 거짓선자지에요. 백퍼센트 거짓선지자입니다. 기독교가 불교를 이기기를 원했을 때 그것은 백퍼센트 거짓선지자에요.

하여튼 이긴다, 성공한다, 기죽지 않는다, 버티고 있다, 이 현실 속에 아직도 나는 살아 있기를 원한다, 라는 이 모든 사고방식은 그 현실의 구성에 있어서 본인의 의사와 의지가 거기에 같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거짓선지자가 되는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하겠습니다. 말씀이라는 것을 딱 볼 때에 많은 사람이 말씀을 보면서 그냥 보지 않고 내 성공, 내가 잘되기를 바라면서 성경말씀을 보잖아요. 그래서 이 성경말씀을 귀하게 여기면서 성경말씀을 잊지 않고 실천에 옮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던가요? 말씀은 허비되면서 실현된다고 했지요. 인간의 손에서 실천되는 것이 아니고 허비되면서 실현되는 거예요.

참으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사람, 다시 말해서 나는 나의 성공뿐이며 하나님보다, 말씀보다 내가 성공하는 것이 최우선 기쁨이라고 아는 사람 같으면, 그런 사람 같으면 복음을 듣거나 말씀을 들을 때 피식피식 웃어야 돼요. 하~, 같잖아서 웃어야 돼요. 한심스럽다는 듯이 그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 그게 무슨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느냐, 피식피식 웃어야 돼요.

그렇게 웃었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었습니다. “1년 뒤에 당신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피식 웃었어요. 자기도 웃고 그리고 자기 아내 사라도 같이 웃었습니다. 같잖아서 웃었어요, 같잖아서. 기가차고 코가 차서 웃었습니다.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요.

왜 아브라함에게는 그 천사가 이야기하는 것이 말 같지도 않은 같잖은 이야기가 되느냐 하면, 자기 현실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각자 자기가 가꾸는 현실이 다 달라요. 동일한 대자연속에 있더라도 자기가 몰두하고 치중하는 자기 인생중심으로 현실을 꾸려나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옛날이야기에 그런 것이 있잖아요. 소금장사하는 아들이 있고 우산장사하는 아들이 있어요. 소금은 햇빛에 바짝 말라야 상품가치가 높은 소금을 팔수가 있는데 비가 오니까 소금장사 아들이 걱정이 돼요. 이번에는 햇빛이 쨍 하고 날이 좋아서 소금 질이 좋고 장사가 잘된다고 하면 우산장사하는 아들은 우산이 안 팔려서 걱정입니다.

전염병이 생겨서 의사 아들은 할 일이 많아서 걱정이지만 형은 마스크 공장하기 때문에 마스크 공장이 떼돈 벌어서 좋고. 인간의 현실이라 하는 것은요, 본인이 ‘나 이거 재미있어. 즐거워. 나는 돈이 목적이 아니라 나 즐거운 일을 할거야.’라고 하면서 만들어내는 현실이 따로 있어요.

촌에 가서 농사짓는 사람은 농토에 관심이 있다면 고기 잡는 사람은 바다의 풍랑에 관심이 있겠지요. 그 사람의 관심사에 따라서 현실은 다 따로 지만 공통점은 어느 현실이든 성공적인 현실이 되기를 고대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자기 현실이 없습니다. 자기 현실이라는 게 없어요. 거기에 비해서 아마샤는 자기 현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왕을 모시는 제사장이거든요.

소위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아야 국가로부터 고급공무원으로서 월급을 받는다는 말이지요. 국가가 곧 자기 자신이고 자기가 곧 국가에요. 국가의 희망이 자기의 희망이고 국가의 성공이 곧 자기의 성공이에요. 제사장으로 제사 지내고 그런 것은 자기가 기뻐하는 국가의 번영과 성공보다는 저 뒤 순위로 밀리는 겁니다. 뒤 순위의 말씀.

그러니까 이 아모스의 등장은 정말 타이밍이 멋집니다. 절묘합니다. 과연 아모스가 이야기하는 것이 실현될 것인가, 안 될 것인가? 아모스의 말 그 자체를 두고 보게 되면 ‘설마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을 작살낼 수 있을까?’라고 생각을 했는데 아까 제가 제시한 그 공식 있지요. 말씀은 무시당하면서 실현된다. 그 공식이 공식대로 되려면 진짜 말씀을 개무시하는 인간들이 등장해 줘야 되는 거예요.

아모스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얼~마나 기쁘게요? 정말 기쁜 거예요. 그런데 이 아마샤같이 거짓선지자가 참 선지자인 것처럼 행세해서 말씀을 전한다 칩시다. 신약의 고린도후서에 보면 악마의 일에 대해서 힌트를 하나 준 게 있어요. 사도바울이 말하는 그 공식에 보면, 사탄은 □다. 사탄은 ‘광명한 천사’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11장 13-15절에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사탄은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는 겁니다. 사탄이 “나는 사탄이다.” 이렇게 등장하지 않고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는 거예요. 그리고 사탄의 일군들은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고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악마를 구별할 때 좋은 힌트거리를 사도바울이 멋지게 제공한 거예요. 아, 악마의 일군은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그리고 광명한 천사로 그렇게 등장한다는 거예요.

그걸 예수님의 버전으로 바꾼다면 마태복음 7장에 나오지요. 넓은 길로 인도하는 것은 백퍼센트 거짓선지자에요. 13, 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넓은 길로 가는 것이 구원받는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통계학에 관한 거지요. 확률상 많은 사람이 찾고 선호하는 쪽이 진리에 가깝다는 겁니다. 그래서 맨 날 확률 제시하잖아요. 확률, 통계 제시하잖아요. 이 재명 몇 프로, 윤 석렬 몇 프로, 계속 몇 프로, 몇 프로……, 그게 뭐냐? 많은 사람이 하는 그것으로 확률이 높아진다는 거예요.

국가는 통계학입니다. 민주주의 자체가 통계학이에요. 다수결의 원칙이 진리로 통하기 때문에 통계학이에요. 현대국가의 모든 경영은 통계학에서 나온 거예요. 철저하게 인간의 행동과 생각들을 통계화해서 거기서 나온 게 현대국가고 그리고 보험제도라는 그것이 바로 통계학에서 나와요. 손해 볼 확률, 그런 것을 따지는 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36장에 보면, 거기 여호야김 왕 시대 때에 21-23절에 보면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그 때 당시 두루마리는 요새로 하면 성경이지요. 둘둘 말린 그 성경을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방백의 귀에 낭독하니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여후디(비서지요)가 삼편 사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작은 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가죽으로 되어 있는 그 성경책을 읽으면 그 읽은 것 잘라서 가져오라 해서 화로에 넣어버리는 거예요. 말씀 자체를 다 없애버리는 겁니다. 말씀을 없애는 이유는 단 하나에요. 간단해요. 자기가 소멸되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소멸되지 않기 위해서! 선지자는 말씀하고 자기를 바꾼 사람이기 때문에 말씀이 있다면 자기가 죽든 살든 전혀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말씀에 입각해서 볼 때 나라는 인간은 전혀 주의 일에 대해서 보탬도 없고, 도움 줄거리도 없고, 협조할 일도 없고,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고, 모든 것이 주께서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님 혼자 한다는 것을 말씀 전하는 사람, 복음 아는 사람은 알기 때문에 따로 자기를 챙길 의도도 없고 기대도 없어요. 소용없는 인간인데 그거 뭐하려고?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소실되고 말씀과 바꿔치기 하면서 사라지기 때문에 내 성공과 내 실패라는 감각 자체도 점점 더 사라져 가지요. 그것이 되려면 말씀으로 자기의 허무성을 계속 캐내야 돼요. 자기의 허무성에 주목해야 돼요.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서 말씀을 전하게 한다 그 말이지요. 나를 소비해서 말씀을 전하게 한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 여호야김 왕이 예레미야가 전했던 그 말씀을 적은 두루마리, 요새로 하면 책이라고 보면 돼요, 그 책을 찢어서 불에 던졌다 할 때 그 불속에 들어가는 것은 쉽게 말해서 말씀이라 하지 말고 그냥 예수님이라고 하세요. 예수님이 이 땅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그냥 사라져 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도 이 땅에서 말씀 하나만 믿고 말씀의 기쁨 때문에 내가 기꺼이 사라져 드리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말씀을 전하는 자가 누구냐? 선지자에요. 그러면 거짓 선지자는 뭐냐? 바로 이런 마음이 없는 모든 자가 다 거짓선지자, 선지자를 공격하는 안티 선지자로 보면 돼요.

여기서 우리가 조금 더 알아야 될 것은 현실이라 하는 것은, 대체 현실이라는 게 뭐냐? 현실은 내가 만드는 게 현실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잖아요. 농사짓는 사람들은 촌의 밭뙈기에 관심 있고 고기 잡는 사람은 바다 물결에 관심이 있듯이 현실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동일한 현실이 아니에요.

각자 자기가 몰두하고 신경 쓰는 것, 그게 나의 일이 되기를 바라는 조건하에 현실 재구성을 쉬지 않고 매일같이 해요, 매일같이. 지난 현실도 오늘 되면 또 바꿔요. 왜? 나의 기쁨이 되는 그런 세계를 내 곁에 두기위해서. 그러면 이 현실을 그런 식으로 규정이 가능한 것은 바로 자기 현실을 상실한 아모스 선지자 같은 사람들이 말씀을 전할 때에 사람들은 그 ‘말씀’에 대해서 시비를 안 걸고 ‘아모스’에 대해서 시비를 건다는 것이 굉장히 특이하지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들은 말씀을 대해도 ‘말씀 영순위 나는 2순위’가 아니라 그 말씀이 나를 위해서 뭘 해줄 건가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말씀이 나에게 뭘 제공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나에게 말씀이 오기 전에 먼저 그 말씀을 알았던 너는 그 말씀 듣고 어떤 점 어떤 점이 너에게 실제 이익이 되었고 손해가 되지 않고 네 인생이 잘 풀렸느냐, 그걸 요청하는 거예요.

네가 교회가고 복음 알고 난 뒤에 네 형편이 얼마나 나아졌는가, 나아졌으면 나도 너처럼 교회가고 너처럼 복음 믿을게, 라는 것이 이 세상의 자기 현실에 몰두해 있는 사람의 공통점이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거짓선지자면서도 진짜 선지자라고 위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이 자기에게 요구하는 대로, 현실이 요구하는 대로 거기에 부응하려고 애를 씁니다.

“교회를 다니시면 일단 가정이 화목하고 애들 공부 잘하고요, 취직은 다 알아서 하나님이 인도해주시고요, 복주시고요, 건강하게 해주시고 마음에 안정을 주시고요.”라고 거기에 부응해서 말을 한다는 것은 진정 나는, 결국 내 목적은 내가 이 땅에서 버티고 더 오래 살아야 되겠다는 자기지킴, 자기사수하기의 본색을 그대로 드러낸 겁니다.

나 사라질래, 그런 마음은 없어요. ‘내가 미쳤다고 사라져? 하나님이든 예수든 나 때문에 있는 거지 내가 왜 사라져? 하나님은 나를 도와줘야지.’ 이런 인간들입니다. 이게 오늘 내일 이야기가 아니고 옛날부터 죽 있었어요. 열왕기상 18장 26-29절에 보면, 갈멜산 배틀(battle)이 있었지요. 엘리야하고 850대 1로 붙어요. 17대 1 정도가 아니라 850대 1로 붙는 배틀이 있었는데 거기에 먼저 아세라 바알선지자가 애를 씁니다.

아침부터 한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면서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이게 26절이지요. 그런데 아무 소리가 없지요. 그래서 27절에 보면 극단적으로 나갑니다. 엘리야가 놀립니다. 너희들의 신은 지금 잠간 일보러 갔는지 묵상을 하고 있는지 혹시 잠들었는지 그러면 깨워야 될 것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하매” 그리고 28, 29절에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찌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라고 되어 있지요.

이게 오늘날 그대로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망할 세상이기 때문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기 몸을 상하기까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신을 부르고 찾느냐 그 말입니다. 자기 몸이 상하기까지 포기 못하는 그 무엇이 무엇이냐, 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에요. 이 현실. 오늘 본문의 아마샤 같으면 국가지요. 나라.

우리나라를 위해서 자기 몸을 치면서 우리나라가 잘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 참 다른 사람이 보면 굉장히 애국자요 진심으로 국가를 사랑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 보이겠지요. 노래도 그런 노래가 있어요. “잠자는 하늘님이여 조율한번 해주세요.”

잠자는 하나님이여 조율 한 번, 당겼다 밀었다, 그 조율 한 번 해주세요. 하늘과 땅이 조화롭게 자연과 인간의 조화롭게 되도록.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내가 행복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거예요. 신이시여, 내가 행복하게. 그러면 네가 왜 행복해야 되느냐? 내가 내 뜻대로 되는 게 행복이에요.

인간은 자기 의도가 있다니까요. 인간은 모든 행동과 생각에 자기 의도가 있어요. 인간은 내가 소멸되지 않는 그게 의도에요. 나는 사라져서는 안 된다, 나는 계속해서 살아남아야 된다. 그 의도 말고 다른 의도가 있겠습니까? 인간이 교회 나가고 절에 가고 하는 의도, 성당 가는 의도가 그거에요.

그동안 자기 뜻대로 안되었던 모양이에요. “잠자는 하늘님이여……” 한 영애가 부른 노래지요. 제목은 <조율>이라 하는 노래에요. 그냥 하소연하는 거예요. 한이 맺힌 거예요. “내 인생 언제 만회해 줄 거예요? 내 인생 언제 보상해 줄 겁니까?” 주의 뜻은 “사라져라 인간아! 너는 사라지고 말씀만 떠라. 말씀 뜨는데 너는 사라지는 게 전제야.”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나가지요. 말씀을 허비하면서 자기들이 살기를 원하는 그 본성을 아마샤라는 인물이 아니면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아마샤라는 인물은 이스라엘이라는 이 나라, 하나님나라가 잘되기 위해서는 네가 그 예언을 멈춰라, 그거예요. 적그리스도 또는 거짓선지자가 우리보고 뭐 이야기하라 할 때는요, 조개처럼 입 꽉 다물어야 돼요. 그리고 “우리가 협박하고 힘주니까 너도 무섭지?” 하고 뒤돌아섰을 때는 조개처럼 입 벌리고 말해야 돼요.

다시 아모스로 돌아가 봅시다. 아마샤선지자, 복음을 외치면서도 복음을 안 믿는 사람을 아마샤선지자라고 할 수 있어요. 복음을 전하면서 계속 자기의도를 뒤로 빼돌리고 몰래 감추는 거예요. 복음을 전하면서.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의 피를 믿음으로서 죄 사함을 얻습니다.” 오로지 정답만 이야기해요. 꼭 성령 받은 사람 같지요.

그런데 제가 고린도후서에서 뭐라고 되어 있다 했던가요? 악마는 어떻게 한다? 악마의 마지막 모습은 광명한 천사, 그가 오직 하나님의 의의 일군으로 행세하는 거예요. 정작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바로 네가 그 복음을 전해서 도대체 네가 뭘 얻고자 하는 지를 네가 스스로 한 번 물어봐라, 하는 거지요.

‘이렇게 복음 잘 전하니까 나는 오래오래 살아남아서 70 넘어 까지 해야 돼. 이것은 내가 아니면 안 돼. 나는 안 죽어야 돼. 왜? 복음을 아니까 안 죽어야 돼.’ 이건 뭐 거짓 선지자지요. 사람의 자아성이라 하는 것은 본인을 건성으로 알면 안돼요.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뭐냐 하면, 말해도 먹히지 않는 이 현실, 너무나도 먹히지 않는다는 이 사실이 분명하고 뚜렷한데서 오는 자기 자괴감, 하, 이거 성령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이거 못 견딥니다. 직장에서 회사에서 바른 소리 했거든요. 바른 소리 했는데 칭찬을 해도 시원치 않을 그 직원을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해야지” 하면서 잘라낼 때 그 얼마나 억울합니까?

“사장님, 제가 뭐가 잘못 됐습니까?” 또는 원장님……,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제가 하나라도 잘못됐으면 권고사직 하겠습니다. 제가 뭘 잘못한 겁니까?” 사회생활을 제대로 못한 죄지요. 뭐 사회생활 비비고 아부하고 그런 사회생활 못한 죄지요.

그런 식으로 따지고 물은 것이 바로 아모스가 아니네요. 그런 식으로 따지고 묻는다는 그 자체가 바로 바른 소리, 정의, 그리고 온 헌신, 그리고 바른생활, 이 자체가 또 하나의 내가 나로 인하여 즐거워지는 나만의 현실을 위해서 투자를 한거예요, 투자.

이게 인간의 고칠 수 없는 근원적인 악마성입니다.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는 것이 누구누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좋게 보는 거예요. 내가 이 땅에서 이름도 없이 소리도 없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왠지 본인에게 억울하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현실이 날 안 알아주는데 대해서 속상한 거예요.

왜 현실은 이렇게 우리에게 야박합니까? 그것은, 신앙의 세계는 그 현실 속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 신앙이라는 게 인간들이 현실이라고 하는 그 속에는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의 현실이라는 것은 힘의 다발이고 힘의 뭉치에요. 나를 나답게 만들어내는 힘들의 집합체, 힘들 에너지가 집합해서 그 안에 나오는 게 자아거든요

자아가 있다는 것은 누가 부인할래도 부인할 수가 없는 힘들이 모아진 거예요 그 아모스의 말씀이 이스라엘을 깸으로서 이스라엘을 살리는 겁니다. 그 말씀이 나를 깸으로서 나를 살리는 방법이에요. 당연히 깨져야지요. 당연히 무시당해야지요. 자괴감? 아니에요. 자존심이지요.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억울하고 원통, 분통, 절통, 그런 소리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대해서 우리 자신을 비춰보세요. 십자가는 이미 우리를 실패자로 규정을 했어요. 이미 실패자가 기정사실화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말씀 자체가, 말씀의 완성이 우리를 실패자로 규정했으면 실패자든 뭐든 간에 그 자체로 감사해야 되고, 황홀해야 되고, 고마워할 줄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내가 몰랐던 나를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때때로 살아가면서 내가 실패했다는 것, 남에게 졌다는 것이 기분 더러워요. 자괴감이나 느끼면서 기분 더러운 거예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복음이라는 것, 예수님 십자가 복음 가지고 계속해서 나만이 즐거울 수 있는, 내가 기쁨이 되는 나로 인하여 내가 기쁨 되는 신앙을 스스로 조종하고 있는 그런 짓을 한 거예요. 그게 사실은 나는 또 다른 나다운 힘을 구축하고 있었던 겁니다.

거짓 선지자입니다. 자기의 허무성을 발견해야 돼요. 오늘 지금 세 번째인가 네 번째로 이야기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알게 되면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자에요. 무능자기 때문에 따로 나에게서 기쁨의 요소를 찾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아모스처럼 이런 욕을 얻어먹어도, 너는 선지자 아니라는 욕을 얻어먹어도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말씀이 계속해서 우리의 더 깊은 허무성에 주목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이 계속 오고, 성령께서 말씀을 계속 줌으로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아모스 7장의 말씀이 아마샤와 아모스의 대결로 보이지요? 맞지요.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뭐냐? 아모스 자리에는 예수님 십자가 세우시고요, 아마샤 자리에 나를 세우면 돼요. 나 자신을. 거짓선지자 자리에 나를 세우면 돼요.

왜? 날마다 우리 자아는 거짓선지자기 때문에. 나다운 면모를 보이기 위해서 힘을 모으기 때문에. 따라서 이 말씀은 남을 위해서 하는 말씀 같지만 사실은 매일같이 우리 자신을 겨냥한 살아 있는 말씀이 되는 겁니다. 16절에 보면 “이스라엘에 대해서 예언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렇게 예언하지 말라는 것은 뭐냐 하면, 아마샤 선지자가 우리가 기대하는 이 이스라엘, 이스라엘 나라가 튼튼해야 되는데 너는 어떤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럴 때 17절에 보면 비로소 아모스가 이야기합니다. 네가 그런 소리를 했기 때문에 드디어 이스라엘 망한다는 그 말씀은 실현되는 수순에 돌입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17절에 “네 아내는 성읍 중에서 창기가 될 것이요.” 전쟁 통에 그렇게 된다 그 말이지요. 먹을 것이 없으니까.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줄띄워 나누일 것이며……” 땅이 전부 측량이 되어서 남의 땅으로 잘려나갈 것이고,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자기 본색을 드러내버린 거예요. 이 이스라엘이.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려버렸어요.

아모스는 누구더러 지시한 적이 없는데 아마샤는 지금 아모스보고 지시하는 거예요. 너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예언하지 마라, 너는 남쪽에 가서 예언해라, 여긴 왕의 땅인데 왕의 땅에서 뭘 예언하느냐, 왕은 내가 모시지 아모스 네가 모시는 것이 아니야, 국가는 그렇게 운영하는 것이 아니야, 이런 식으로 잔소리 해 대니까 그 잔소리로 인하여 말씀은 드디어 허비되면서 실현되는 거예요.

‘그래. 너희들에게 이 말씀은 아무짝도 소용없는 쓰레기 같은 거지.’ 그 쓰레기가 바로 하나님의 이 세상이 쓰레기라는 것을 증명해줄 그러한 용도로서 말씀은 본격적으로 실현에 나서는 겁니다. 바로 이 과정에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들이 가담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어떤 누구로부터 공격받더라도 자괴감이나 슬퍼하거나 자기 인생을 노하지 마시고 그럴 때마다 내가 말씀 앞에서, 주님 앞에서 그렇게 당해도 싸다, 아무것도 아니다, 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온전하게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 백 프로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 하는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안다 하는 그것이 또 다른 나의 성공으로 이끄는 밑천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이 자아의 악마적 본성을, 우리가 허무성을 주목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오직 모든 것이 주께서 홀로 하셨음을 증거 하는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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