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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1 15:16:25 조회 : 44         
강남-누가복음 13장 19절 (성도가 비유다) 221108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115.23.177.240)
강남-누가복음 13장 19절 (성도가 비유다) 221108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3장 18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라고 되어있지요.


여기 앞에 천국이라는 말을 뺍시다. 천국이라는 말 빼고 어떤 채소밭에 겨자씨 하나 심어놨더니만 나무가 컸고 나무 커지니까 자연적으로 공중의 새들이 들어왔다. 앞에 천국 빼고 그렇게 이야기하면 이게 이 세상으로 이해될까요? 천국으로 이해될까요?


그냥 이 세상의 자연 현상이죠. 그냥 알 수 없는 자연 현상이죠. 그러니까 방금 제 말은 뭡니까? 천국이라는 말을 예수님이 붙였을 뿐이지 천국 말하지 않고 빼고 그냥 이야기해버리면 이 세상이 뭐가 되어버리느냐 하면은 이 세상 현상이 천국 현상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 천국이라는 말 빼고 그럼 일반적으로 농사지을 때 풍경이 그대로 묘사되고 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천국은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세상 현상하고 일치되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어려운거에요. 어느 누가 이 세상을 천국이라고 합니까. 어딜 봐서 천국이에요. 천국 아니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걸 천국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러면 천국은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뿌렸더니만 나중에 나무처럼 되었고 각종 새가 와서 깃들였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 세상에서 천국을 따로 뽑아낼 수 없었던 이 세상은 주님이 천국이라는 말을 붙임으로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왜 너 뽑아낼 줄 몰라. 모르지. 나는 뽑아냈잖아. 나는 이 세상에서 천국이 이런 식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나는 뽑아냈는데 왜 뽑아내는가? 그들은 이 세상은 이 세상이지 천국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천국이라면 천국이 되는 거에요. 그리고 예수님이 천국이라고 하는 그 점에 대해서 인간들은 완전히 배제됩니다. 인간들은 배제돼요. 인간들은 아무리 봐도 천국이냐 아니냐를 구분을 못해요. 너무나 평범하게 오셨기 때문에 아무리 깊이 골똘하게 연구해도 이 땅에서 이건 천국이고 이건 세상이라고 떼어낼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능력 없으니까 심판받아야지요. 능력 없으면 심판받아야 되는 겁니다.


자, 인간세계에서 천국은 뭐냐. 문제해결책입니다. 문제해결책. 인간에게서 천국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 어떤 어려움과 우울한 것, 원통한 것, 분통한 것, 아쉬운 거 있으면 하나님이 천국에서 갚아주세요 이렇게 하지요. 인간은 문제해결책이에요. 주님께서 천국은 뭐냐 하면은 문제 제시. 없던 문제를 만들어 버려요. 이 세상에 문제 있다. 이 세상에. 나는 이 세상 가지고 천국을 설명할 수 있는데 너는 이 세상 현상 가지고 천국을 설명 못하니까 너희들은 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거에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럼 어떤 문제가 있는가?


20절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19절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이렇게 되어있단 말이죠.


왜 인간들은 천국을 뽑아낼 수 없는가. 인간 자체가 이게 명사에요. ‘명사’. 명사라는 말을 어려운 말로 하면 존재입니다. ‘존재’. 자기 존재 위주로 천국을 생각하는 거에요. 나 천국 보내줄거요? 말거요? 이게 인간이 자기 존재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나 죽어서 지옥이라는 존재에 갑니까? 천국이라는 존재에 갑니까? 나라는 존재는? 뭐든지 나라는 명사는 지옥이라는 명사에 갑니까? 천국이라는 명사에 갑니까? 이렇게 돼요.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19절 20절은 뭐냐 하면은 동사입니다. 움직임이에요. ‘움직임’. 천국은 그냥 움직이는 거에요. 움직임이 될려면 자기의 명사됨을 존재됨을 포기하고 자기가 동사화 돼야 되겠지요. 그 흐름에 같이 뛰어들어야 되겠지요. 내가 뭘 한다가 아니라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중이다가 돼요. ‘나는 뭘 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강조되고 내가 명사적인 존재로 뭘 한다가 아니라 어떤 분에 의해서 내가 휘둘리고 있고 휩쓸려 있다 이렇게 돼야 되지요. 이게 자기를 동사로 보는 겁니다.


그럼 지옥은 뭐냐? 전부 다 명사지요. 보는 사람도 내가 보고 판단도 내가 하는 거에요. 그래서 명사적 더 쉬운 말로 자기 존재, 존재, 존재, 존재들만 뭉쳐있고 존재들의 공동체만 생각하는 거기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천국은 너희들이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내가 제시하는 내가 보고 있는 천국은 파악이 안 된다는 겁니다. 천국은 파악이 안 되는 세계에요. 또는 천국은 파악이 안 되는 질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천국은 인간들이 파악할 수 없는 질서.


주님께서 천국을 봐도 인간들이 자기 존재로 그걸 이해하고 해석하는 거에요. 저 움직임이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을까? 전부 다 자기 존재 위주로 생각하면 저걸 내가 알게 되면 나에게 유리할거야. 구원받는데 더 유리하게 작용할거야. 자기 이익 중심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주일날 설교 때 제목이 뭐였지요? 오기와 감사였죠. 감사가 생기지 않으면 오기만 있어요.


오기는 뭐냐 하면은 나중에 이익이냐? 손실인가 꼭 이렇게 결산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오늘은 내가 어떤 이익이 있을까? 오늘 어느 손실을 봤을까. 성경에서 감사라고 하는 것은 어떤 분의 혜택을 입었거든요. 혜택, 그분의 혜택. 그분만이 존재가 되고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그분의 혜택을 덧입은 것이 되니까 내 존재를 생각하면 안되지요. 그 감사의 은혜에 내가 희석돼야 되고 녹아져야 되니까요. 감사를 매일같이 모아야 되니까요. 감사를 모으는 거에요.


성도를 쫙 갈라보면 안에 받았던 감사가 막 나오고 은혜들이 선물들이 막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감사는 선물이거든요. 그런데 선물 받은 적이 없으면 본인이 이익과 손실을 나중에 본인이 계산하고 결산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은 아까 동사, 명사로 생각한 것. 명사, 자기 존재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뭘로 표현했습니까? 동사로 표시하는 거에요. 동사로. 그건 의도적으로 인간들이 알 수 없는 세계, 인간들의 판단력을 피해서 천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 같은 경우 비유로 이야기할 때는 뜻이 뭐냐 하면은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 존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비유로 이야기합니다. 그게 이런 점이 어려운데요 “나는 너에게 비유로 이야기한다” 에서 그 비유를 빼버립시다. 그러면 “나는 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하면 사람들은 비유로 이야기한 것을 빼버리고 그 이야기를 바로 들어버리면 100% 전부 다 오해하는 거죠.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릴 때 예수님이 이야기하면 아! 저거 농사짓는 일이다. 분명히 비유라고 단서를 붙였는데 비유 빼버리니까 농사짓는 일이니까 이게 이해가 되는 거에요. 인간극장 보면 이해가 다 돼요. 거기 농사짓는 사람 많이 나와요.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거기서 대추나무 열리면 그거 뭐 이해 못할게 없죠. 온 식구 달려 들어서 대추밭에서 일한다 뭐 이렇게 다투기도 하고 서로 나중에 대추 퍼준다 그게 그렇게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런데 똑같은 이야기, 온 가족끼리 대추나무 해서 대추 나눠줬는데 “이게 비유니라” 이렇게 하면 그 다음부터는 멍~~~하죠. 이게 비유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계선을 넘어야 진리가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그 너머에 또 다른 숨어 있는 뜻이 명확해서 이미 명확한 뜻이 있기 때문에 저 뜻 말고 따로 남겨진 뜻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버리는 겁니다.


보기는 보아도, 사람들이 예수님 봤지요. 보기는 보아도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르는 거에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예수 이야기 들어도 우리가 이해하는 식으로 이해해버리니까 이게 비유여야 할 말씀이 비유가 아니고 아 우리 좋아라고 하신 말, 이렇게 하면 천당 간다는 말씀이구나 이렇게 곡해들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 곡해의 결과가 뭐냐?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질서에 대해서 결국 판단을 누가 해버렸습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판단했지요. 그 판단의 결과가 뭐였습니까? 예수님은 사형 당했습니다. 그 사형이 죽음이 비유의 실제 본 내용이었어요. 그게 실제 본 내용이었습니다. 오해했다는 사실이 본 내용이에요. 어느 누구도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 안 할 위인은 없다. 이게 비유의 본 내용입니다.


비유의 모든 뜻의 공통점은 뭐냐? 거기 예수님의 죽음이 거기에 있어요. 예수님의 죽음. 곧 하나님의 죽음이죠. 자, 그 시작을 왜 이렇게 예수님의 비유로 이야기했는가. 그 시작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받으실 때부터 시작이 되는데요 초반부터 어려운 이야기지만 여러분들은 감당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4장 한번 보겠습니다.


4장 6절에 보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는 그 대목이에요. 5절부터 보면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그 다음 마귀의 말 한번 보세요.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이야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이야기를 왜 집어넣었느냐. 그냥 뛰어내리라 해도 되는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인간들이 예수님을 이해할 때 꼭 이 멘트를 먼저 집어넣고 예수님을 이해한다는 거에요. 모든 인간이.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마귀로부터 온 수하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그래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나의 피를 믿으면 내 피로 죄 사함 받으면 너는 죄 없이 천국 간다” 라는 성경귀절이 있잖아요.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성경구절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그 말이 진실이라면, 그 말이 참말이라면’ 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성경해석을 접근해가게 되어있어요. 모든 인간은.


마귀가 인간이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미리 땡겨서 마귀가 대표적으로 예수님께 이 멘트를 날리는 겁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마귀가 이런 말했다는 것은 마귀 말고 나머지 모든 인간들도 예수님을 대할 때 반드시 이 생각을 집어놓고 이야기를 하고 성경을 봐도 이 말씀을 집어넣고 이해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말씀이 맞다는 그 내용은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없어요.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예수님은 우리는 틀렸고 예수님은 맞다는 생각이 인간에게는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셔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의 그 비유를 그 비유에 담긴 뜻을 알지 못해야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감히 도전하고 있어요. 우리는 몰아야 되는데 우리는 도전하고 있는 거거든요. 이 말씀 보고.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할 때 이 말씀을 사람들이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이 말씀 내 믿음에 나한테 무슨 이익이 옵니까를 생각해서 본다니까요. 이걸. 지금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되고 있는 눈치를 하는데.


자, 우리가 아는 상식이라고 봅시다. 세상은 말씀대로 됩니다. 이게 우리가 아는 상식이에요.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나를 위하여 세상이 말씀대로 되었으면 좋겠네 가 돼요. 앞에 이걸 빼지를 못해요. ‘나를 위해서’가. 이 ‘나를 위해서’ 누가 집어넣었습니까? 이건 마귀가 집어넣은 거에요. 우리는 마귀 입장에서 성경을 보고 있는 거에요.


그냥 말씀이 말씀대로 되면 되는데 우리는 나의 검증 시스템을 일단 거쳐야 한다고 고집하는 거에요. 일단 내 검증 시스템. 그 다음에 검증 시스템을 해놓고 ‘내가 믿어지면’이 아니고 나한테 내가 이익이 되면 나는 그걸 미끼로 누가 결정하느냐? 내가 결정해버려요. 그걸 미끼로 내가 결정해버려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이런 악마에 속했다는 것을 알까요? 모를까요? 알지요. 아니까 그걸 비켜가는 방식으로 비유로 이야기한 거에요.


그래서 비유해석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이거는 정답이 있을 수가 없지요. 나 빼야 되고 나의 이익 다 빼야 되고 다 빼버려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마귀가 어떤 의미에서는 마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존재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예수님 앞에서 거침없이 자기의 본색을 다 드러냈어요.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다 라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것 없이 마귀 내가 마귀 내 검증 시스템을 통과해야 된다 이런 뜻이란 말이죠.


“너도 신이냐? 그럼 나도 신이다” 이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잖아” 라는 뜻도 포함돼요.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잖아.” 그럼 하나님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에 맞도록 한번 나한테 한번 테스트해볼래? 성경 말씀에 뛰어내리면 누가 와서 받들어 준다? 천사들이 확 몰려와서 떨어지는 그 순간 발을 딱 받쳐가지고 발이 안 다치도록 딱 해주는 것, 이 이미지를 악마가 이미 그려내고 있어요. 인간들도 그려내고 있어요.


뭘 보고? 시편 92편 거기에 보면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받아준다는 그 본문 말씀을 유대인들이 봤잖아요. 봤으면 그 본 것을 대변자가 누가 되느냐 하면은 대변자가 인간이 갖고 있는 마음의 대변을 단독으로 마귀가 예수님께 나가서 인간들의 의사를 대신 전달해주는 양상으로 마귀가 인간들 안에 들었으니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이죠. 인간들이 갖고 있는 솔직한 마음을 그냥 마귀가 대신해서 예수님 앞에 그냥 내놓는 거에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우리가 이렇게 검증 시스템의 세 가지를 통과하면 우리가 믿어줄게. 주님께서 거기에 대해서 네가 비유를 알아? 네가 게맛을 알아? 네가? 네가 비유 맛을 알아? 이렇게 나오시는 거에요. 그래서 비유라는 것은 정체 모를 천국이죠. 인간들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천국이 온 겁니다. 정체도 알 수 없으면서 천국 가겠다는 것, 이것 자체가 이미 오류가 된 거에요. 잘못된 거에요. 천국이 뭔지 알긴 알아? 몰라. 그런데 천국에 갈래. 그 천국이 지옥이라면 어떻게 할 거에요.


자, 여기서부터 어렵습니다. 이 본문이 참 어려워요. 이 채소밭에 떨어진 이 겨자씨. 이것은 겨자씨는 겨자씨 존재는 겨자씨 존재로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이게 뭡니까? 동사라고 했지요. 움직임을 보는 거에요. 움직임을. 움직임을 나타내요. 그 움직임을 나타내는데 자, 처음에 있는 겨자씨는 어디에 속합니까? 그 밭에 속하지요. 그 밭에 작은 일부를 차지합니다. 처음에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느냐 하면은요 천국은 반드시 지옥을 동반해서 등장해요. 인간은 천국갈래? 지옥갈래? 나 천국갈래 할 때는 지옥은 완전히 생각 안하잖아요. 그러나 주님께서 나타내는 천국은 반드시 천국을 지옥과 같이 등장을 시켜요. 천국만 등장하지 않고 지옥도 같이 등장해요. 이게 언약의 원칙이에요. 언약은 복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뭘 한다? 저주받는 거에요.


그래서 비유로 이야기할 때 네가 알아채면 복 받는다가 아니라 네가 깨닫지 못할 경우에 네가 버림받고 저주 받는다라는 이미 그 항목이 나와 있어요. 비유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뭘 받는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반드시 저주가 찾아오는 방식이 되기 때문에 나는 좋은 것만 받을래요 그럴 자격 없습니다. 우리는 좋은 것만 받을 자격 없어요. 이 밭에 비해서 겨자씨는 작습니다. 작아서 존재감이 떨어져요. 존재감이 떨어지죠. 밭에서 겨자씨 찾을려면 힘들어요.


그런데 움직임의 끝이 뭐냐 하면은 깃들인다 에요. 깃들인다. 깃들인다는 사방에서 모여서 거기를 안식처로 여긴다 이 말아닙니까. 자, 깃들일 때 그 밭에 새들이 그 밭을 보고 몰려온 거에요? 나무를 보고 몰려온 거에요? 나무를 보고 몰려왔지요. 그 겨자씨 없었을 때는 그 밭에 나무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그러면 깃들인다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새들이 만족스럽다는 뜻이에요. 그냥 새들이 아낌없이 자기 한 몸을 다 맡겨도 괜찮은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뜻입니다.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다 맡겨도 되겠네. 이게 깃들이는 거에요. 깃들이는 것. 갑자기 나무가 주목을 받지요. 그 밭의 존재감이 뭐가 됐습니까? 갑자기 나무가 된 거에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새들이 와서 깃든다는 이 말은 새들이 올 때 여기 올려면 입장료 얼마에요? 물어보겠어요? 깃든다는 말은 그냥 날개 짓해서 그냥 그쪽을 향하여 푹 안겨버리죠. 모든 걸 맡겨버리죠 거기에. 겨자씨 있던 밭에 새들이 모든 걸 맡깁니까? 아니지요. 그냥 밭이지요. 그냥 밭이에요. 그냥 밭인데 밭에 새들의 최종적 안식처 등장했지요. 그냥 밭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새들의 최종적 안식처로 변했잖아요.


그런데 이게 처음에 밭에 이게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겨자씨 뿌리기 전에 이게 없었지요. 그럼 새들의 안식처 이걸 가지고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천국이죠. 그럼 그냥 밭은 뭐냐? 이 밭은 밭의 저주성이죠. 곧 이 밭은 바로 저주 받은 밭을 이야기하지요. 저주 받은 밭. 아무 새들도 깃들고 싶지 않은 그냥 순진무구한 따지지 않고 순진무구한 새들이 안심 놓고 모든 걸 맡길 수 있는 그것은 거기서 어떤 움직임에 변화가 있어서 그 변화의 결과로서 새들이 와서 여기에 이 나무에 깃들이는 거에요 이거는.


이거는 내가 노력해서 했다 이런 소리 안하지요. 그냥 공짜니까 모든 걸 맡기는 식으로 그냥 깃들여 버리는 거에요. 예수님은 이걸 천국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걸. 천국이에요. 그런데 그 천국의 시작은 어디입니까? 씨도 없고 씨도 없으니까 나무도 없지요. 어떤 새로운 변화가 없는 곳. 그 곳은 천국이다? 아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그거는 천국이 아닌 거에요. 천국은 깃들일 수 없는 이 곳에서 어떤 깃들일만한 변화가 유발되는 그 움직임이 천국이라고 보는 거에요. 그 움직임이.


그러면 이 논리가 이래요. 새들이 안심 놓고 안식처를 마련했지요. 그렇죠? 그러면 이 겨자씨가 없던 이 밭을 뭐가 없다는 말입니까? 안식처가 되지를 못한다는 뜻이죠. 이걸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단어가 이런 단어를 동원하면 이해됩니다. 상실, 결여, 결핍. 깃들이지 못하고 족하지 못하고 있는 이 세상의 일상성. 특히 겨자씨 같은 것은 무시할만한 극히 작은 거에요.


겨자씨가 작고 이것은 크다면 여기 앉기가 왜이리 편하노? 여기 깃들이고 싶어. 큰 씨가 안에 응축된 내용물이 큰 씨가 많을까요? 작은 씨에게 많을까요? 어느 게 많을까요? 양이. 잠재성이. 큰 씨가 잠재성이 많을까요? 작은 씨가 잠재성이 많을까요? 큰 씨가 많겠지요. 왜냐하면 큰 씨가 나중에 큰 나무가 될 가능성이 많아요. 그게 확장이 되면 큰 나무가 되잖아요.


겨자씨는 상대적으로 빈약하지요. 빈약. 빈약은 겨자씨는 큰 씨를 원하고 있는데 그들의 욕구를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해석이 가능 하느냐 하면은 이미 결론이 나와 있어요. 겨자씨에서 큰 나무 되었던 변화성 있잖아요. 이 변화를 주님께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천국이죠. 이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옥이 무엇이냐 이 천국을 표준점, 기준점으로 삼아서 이처럼 되지 못한 모든 것은 뭐냐? 저주 받은, 그러니까 천국이 아닌 거에요.


천국이 아님의 반대말이 뭐냐? 저주 받는 지옥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천국이라는 것을 딱 등장할 때는 지옥도 같이 설명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천국이 아닌 것, 모조리 지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의 특징이 뭐냐? 깃들이는 거에요. 안심 놓고 편안하게 깃들이고 새들이 대만족하는 거에요. 나 여기서 놀래 하고 여기서 마음껏 자유를 부과합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뭐냐? 만족함이 없어요. 마음껏 자유를 부과하지도 않습니다.


어디 깃들기는 너무나 모든 것이 불안하고 위험스러워요. 내 한 몸 이 옥체를 보존해서 뉘일 공간 없어요. 뭘 느끼기 때문에? 상실과 결여와 결핍을 계속 인간들은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밭은 무엇인가? 밭은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합류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 다스리는 유대 사회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누룩 이야기도 유대사회 그들의 죄를 언급하지요. 그리고 예수님 씨 뿌린 비유할 때도 밭에다 뿌린다 하지요. 예수님 자신이 겨자씨고 예수님이 씨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놓여 있습니까? 어디에 뿌려져 있습니까? 밭에 뿌려져 있지요. 예수님의 존재가 도달한 그 환경은 자연적인 생물학적인 밭이겠어요? 아니면 그 당시의 유대사회겠어요? 어느 쪽이겠습니까? 유대사회지요.


지금 예수님께서 자연시간 아닙니다. 초등학교 자연 공부 시간 아니에요. 밭에서 지금 농사를 어떻게 짓는가 지금 그 시간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거는 비유라는 뺄 때는 그게 돼요. 아동 여러분 밭에다 씨앗 뿌리면 크지요?! 네! 참 잘하셨어요. 제 말 알아들었군요. 지금 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못 알아듣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유대인의 사회는 그 밭에서 뭘 기다리느냐? 천국이 도래할 것을 고대하고 있었어요. 천국이 올 것을. 메시아가 와서 천국이 올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왔다는 거에요. 왔는데 이게 동사적으로 온 거에요. 명사적으로 온 게 아니고 동사적으로 왔다는 겁니다. 그 어떤 움직임을 보였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 움직임은 밭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천국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천국을 기다리는 이 쪽을 점점 더 뭐로 만들고? 지옥의 본 모습을 드러내면서 천국이 등장하는 거에요. 지옥의 본 모습을.


너희는 왜 겨자씨만한 응축력이 잠재력이 없는가. 너희는 왜 나무가 되지 못하는가. 너희는 왜 사람들이 깃들지 못하는 그런 안심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는가를 지금 지적하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이거는 오늘날 이 시대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의 욕망은 인간의 존재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가 없다. 이거는 상식이죠. ‘나’라는 존재가 내가 되고 싶은 것을 다 이뤄주던가요? 딱 취업하니까 딱 되던가요? 아니지요. 내가 내 존재를 원하는 그것을 이 사회가 다 충족시켜 주던가요? 아니지요.


아닌 그걸 뭐라고 합니까? 결핍. 결핍인 동시에 내 쪽에서는 상실, 나의 상실이죠. 내 꿈의 상실입니다. 인간의 원함을 다 들어줄 수 없으니까 인간은 그냥 하지 않고 그 상실,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요. 이 노력을 뭐라고 하느냐 이 노력을 문명이라고 해요. ‘문명’. 문명 알지요. 황하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알지요? 컴퓨터 문명. 근대산업사회 다 문명이에요. 문명. 인간이 건설한 이 세계의 모든 인간의 업적을 문명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왜 자꾸 문명을 키웁니까? 자기의 상실을 보충하려고 키우는 거에요. 계속해서 과학적으로 기술 발달하는 게 뭐냐? 계속 학문을 정진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 결핍과 상실을 보충하기 위해서 채우는 거에요. 그거 마저 채우기 위해서. 마저 채우면 어떻게 되는가? 채워집니까? 아니에요. 더 큰 상실이 기다리고 있어요. 인간은. 율법이 바로 그 기능이에요. 율법을 지키게 되면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게 되면 우리 유대인들이 원하는 식대로 세상이 세상 정치적 구조가 돌아갈 줄 알았지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매진하라고 외쳤습니다. 외쳤는데 어떻게 유대사회가 독립했습니까? 아니면 로마의 노예가 되었습니까? 로마의 노예가 되었지요. 압제받았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그걸 보충하기 위해서 뭘 기다립니까? 메시아를 기다리는 거에요. 그럴수록 메시아를 기다리는 겁니다. 그냥 기다리지 않았지요. 메시아가 원하는 바를 채우기 위해서 율법에 더욱 더 매진하는 쪽으로 메시아를 기다렸죠.


그런데 율법에 매진하면 매질할수록 점점 더 예수님의 비유를 못 알아듣는 거에요. 왜냐하면 인간의 방법은 뭐냐? 내가 이걸 모자란다. 이 모자란 것을 하나님 쪽에서 채워주시면 온전해진다 이거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뭐가 안 되느냐 하면은 그거는 깃들이는 게 아니에요. 힘 쫙 빼고 그냥 자기 몸을 던져 놓는 그 방법이 아니에요. 지금 나무에 새들이 와서 깃들이잖아요. 입장료 받습니까? 나무가? 그렇지 않지요. 그냥 와서 안식하는 그냥 와서 쉬는 거에요. 그냥 와서.


그러나 인간 사회는 그걸 이러한 방식에 인간 방법으로서는 이 시도를 실패로 끝나는 거에요. 이 시도가 자꾸 실패가 되는 거에요. 원인도 몰라요. 왜 나는 날마다 아무리 가지고 아무리 철저하고 완벽하게 말씀을 지키고 뭔가 복음도 지키고 해도 왜 나는 항상 마음에 결여가 생기는가. 모자람이 생기고. 생기면 우리가 그냥 가만히 있습니까? 다른 걸 채웁니까? 이걸 내 욕망의 모자람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방법을 하는 거에요. 대체하는 방법을. 끊임없는 대체하는 거에요.


다른 직업으로 대체하고 다른 돈벌이로 대체하고 아니면 산속에 자연인으로 들어가는 방법으로 대체하고. 내가 욕심이 많다 마음을 낮춰야지. 마음을 낮추는 걸로 대체하고 완전히 몸부림 맘부림을 쳐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은 주님이 이렇게 일방적인 움직임에 참여하지 못하고 항상 나한테 이익이냐 손해냐 결산을 고려하면서 항상 그걸 따지면서 어느 결정을 해야 나한테 보다 더 많은 내 만족이 보충이 마저 채워질 수 있느냐 그것만 계산하고 있는 거에요.


이게 어릴 때도 그랬어요. 어릴 때부터 인간은 늘 그랬어요. 어릴 때부터. 애 보고 묻습니다. 너 커서 뭐 될래? 이렇게 무심코 묻잖아요. 너 커서 뭐 될래? 나는 나무가 되겠어요. 이렇게 하면 이건 완전히 비유로 이야기하는 거고. 나는 겨자씨 될래요. 이런 아이는 없어요. 선입견, 기성 인식. 애는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선입견과 기성 인식에 의해서 포위되어 있어요.


그들이 돌잔치부터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못 뽑습니다. 마이크 할래? 줄 할래? 돈 할래? 이것도 이미 엄마가 미리 세팅되어 있는 그것 중에서 객관식이 아니고 주관식으로 나는 시인이 될래 글자 쓰고 그럴 수 없단 말이죠. 기성 인식 같은 게 있고 그중에서 골라잡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광야에서 예수님 만난 것처럼 유혹을 벗어난 어린 아이는 없습니다. 어린 아이가 어떤 직업을 선택할 때는 유혹에 빠져서 직업을 선택하는 거에요. 유혹에 빠져서. 그것이 내 결핍을 마저 채워줄 줄 알고 선택하는 거에요. 나 대통령 될래. 나 야구선수 될래 이런 거. 유혹에서 벗어나는 인간의 선택은 없습니다.


그 왜 그 선택을 할까요. 내가 유혹받는 그것이 나의 존재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다고 어린 아이 수준에서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한 거에요. 엄마 나는 커서 유명한 우주비행사가 될래. 초등학교 2,3학년이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엄마는 말합니다. 그래 그거 월급 얼마인데? 결국 월급으로 끝나요. 인간의 삶은 한 마디로 해서 그냥 고육지책.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살아갑니다. 깃들이는 것 그런 거 없습니다. 자기 존재를 자기가 포기 못해요.


자, 그러면 주님의 방법은 뭐냐? 주님의 천국에 밀어붙이는 방법은 뭐냐? 예수님의 출산이에요. 예수님의 출산. 예수님이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나버려요. 아기가 태어나서 예수님의 자기 노선을 가버립니다. 자기 노선을 가버리면 그 주변에 예수님 주변에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지요. 인간 존재의 그 자아성, 존재성을 예수님의 출산과 자기 노선은 이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게 해답이에요. 이게 해답입니다.


자, 비유란 뭐냐? 비유의 내용은 예수님의 죽음이에요. 왜 죽음이냐? 어느 인간도 죽게 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자기의 욕망이 멈춰 가 돼요. 자기의 결핍이 멈춰버려요. 왜? 더는 가능성이 없으니까요. 죽어버렸으니까요. 살아있을 때 갈망하죠. 죽게 되게 되면 그 갈망이고 뭐고 다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내용에서 예수님의 그 자기 변화 있잖아요. 자기 변화. 아이가 돼서 성인이 돼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자기 변화에 자기 변화 움직임에 같이 그 움직임에 동참하기 위해서 뽑아 세울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천국백성이 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주님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지요.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그 자체가 뭐냐? 예수님의 움직임에 동반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움직임에 끌어당겨버려요. 집어들어가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움직이는 것은 결국은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 존재는 내가 아니고 따로 계세요. 예수님이라는 그 존재자가 나로 하여금 이런 저런 움직임을 유발시키게 되죠. 그게 바로 이미 깃들인 상태에요. 이게 깃들인 상태에요.


지금 제자들도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 못합니다. 비유를 이해할 때는 제자들에게 누가 와야 돼요? 성령이 오셔야 돼요. 성령이 오시게 되면 자기 기억이 어디에 함몰되느냐? 주님의 기억에 함몰되어 버려요. 다시 한번 이야기하면 강도가 사람을 죽였잖아요. 사람을 죽여가지고 십자가에 사형 당했지요. 이거는 예수님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이것은 강도는 자기 기억이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한 짓이에요. 내가 한 짓.


그런데 옆에 어느 쪽인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이 강도를 받아들이고 강도가 강도 짓한 것은 본인이 한 게 아니고 주님께서 시켜서 한 일, 주님의 기억 속에 너는 강도가 돼야 한다는 기억 때문에 그거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거에요. 태어나서 강도 짓해야 되고 우연은 없습니다. 반드시 그 집에 찾아가서 그 집을 죽여야 되고 그 집이 고만고만 했으면 안 죽였을텐데 반항했어야 했고 반항한다고 죽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강도가 된 거지요.


그래서 강도가 뭐라고 합니까? “주님 저를 생각해주세요.” 이거하고 ‘당신이 만약에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거하고 완전히 달라요. 완전히 다릅니다. 내가 검증 시스템을 가동하겠다가 아니라 이미 강도는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은 존재에요. 그러면 죽은 존재는 뭐냐? 깃들이면 돼요. 그런데 자기 옆에 보니까 누가 있어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주님도 같이 죽어있어요.


그러니까 강도 생각에는 쉬운 거에요. 주님 죽음과 나의 죽음이 동시에 일어난 같은 사건으로 묶을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지난날 내가 강도짓 한 것도 내 기억이 아니고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 일어난 하나의 사태로 보는 거에요. 이게 깃들여진 거에요. 이게 천국의 상황입니다. 이게 벌써 와버렸어요. 죽어서 천당 가는 게 아니고 벌써 천국이 와버렸습니다. 와버려서 모든 매사에 주님이 관여하고 개입하신 주님의 자신의 일이 되어버린 겁니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일상 속에 천국이 숨어있었던 거에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첫째 시간의 결론은 뭐냐 하면은 성도는 이 시대의 비유다. 성도 자체가 비유에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성도를 다른 사람이 이해를 못합니다. 예수님을 봐도 이해 못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이에요. 성도를 봐도 이해 못해요. 저건 배알도 없고 저건 자기 점검 시스템도 가동 안시키나? 이래요. 따져보고 믿어야지 그냥 깃들이면 안 되잖아.


그러면 성도는 “나도 내 마음대로 안돼.” “너는 배알도 없고 자존심도 없나?” “나 동사야. 나 비동사야. 나는 조동사야. 나는 그냥 동사야.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냥 동사야.” 내가 스스로 이건 잘했다 못했다 이거는 손실이다 이익이다 평가할 수 있는 있다? 없다. 없지요. 비유니까요. 이거는 주님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내가 감히 나서서 이건 잘했습니다 못했습니다 표현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는 거에요.


‘성도는 비유다’ 다른 말로 성도는 곧 말씀이다 같은 말이에요. ‘성도는 말씀이다’. 성도는 뭐다? ‘기도’다. 다 같은 말이에요. 안에 주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너는 죽고 네 안에 주님이 일하기 때문에 모두 같은 말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믿어서 구원받지 못한 거에요. 그 믿음이 뭐가 돼요? 내가 믿었다는 믿음이 동사 돼야 돼요. 믿는 모습으로 움직여지는 거죠. 내가 믿음 하나 가졌다가 아니라 그거 치매 걸리면 다 헛방이에요.


움직임 자체가 믿음의 증상으로 나타나요. 믿음의 증상으로. 관계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거에요. 주님 주신 선물이니까. 믿음은 선물이니까. 내가 존재하는 자체가 이 땅에 태어난 자체가 선물이에요. 창세전부터 예정한 자가 이 땅에 여러분들 주민등록 앞에 있지요. 천구백몇년도. 1975년? 1992년? 앞에 있지요?


그때 왜 태어났습니까? 정답은? 우리가 왜 태어났어요? 주님 때문에. 왜 합니까? 이게 강도의 고백이에요. 내가 아니라 주님이 먼저 날 생각했음을 강도가 자기 죽는 순간에 주님이 함께 죽는 순간에 비로소 알게 된 거에요. 이게 주님께 속한 내 사형 당함이 이게 내 이야기고 주의 일이라는 사실을.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강남-누가복음 13장 19절 (성도가 비유다) 221108a-이근호 목사.hwp (161.5K), Dow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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