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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7 09:16:33 조회 : 139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10강) 마태복음8:20(동질성) 20220725b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10강) 마태복음8:20(동질성) 20220725b
(강의:이근호 목사)


37페이지 밑에서 일곱 번째 줄에요. “하나님 심판의 구체적 경로가 ‘주의 이름’으로 확정되는 시점에서 제자들의 할 일은 구원과 심판의 범주를 새롭게 구획하는 일이다.” 그렇게 돼 있지요. 얼른 보면 무슨 일인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심판한다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심판하는 걸로 보통 상식적으로 그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주의 이름으로 심판한다는 말이 하나님 심판과 어떤 차이가 나는지 우리가 평소에 생각을 안 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심판이란 것이 없습니다. 그건 인간들이 상상하고 지어낸 거예요. 심판은 주의 이름으로 심판하는 거죠. 그래야 심판 가운데서 주의 구원이 생산되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구원이 되려면 주의 이름으로 심판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냥 하나님이 심판해서는 우리 구원이 되질 않습니다. 심판이 되기 위해서라도 또는 구원이 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주의 이름이 등장해야 돼요.

그러면 주는 주고, 이름은 이름인데 주의 이름으로 결합이 되는가? 이게 동질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이름을 가졌다, 이게 무슨 의미냐? 이름은 반드시 만들어진 것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게 돼 있어요. 만드신 분은 이름이 없어요. 만들어진 것에 이름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창조주기 때문에 이름이 없습니다. 인간들이 이름을 가지잖아요.

인간이 있으면 인간에게 하나님은 없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러줄 때에 이름을 지으신 그 창조주께서 이름을 불러줄 권한이 있기 때문에 그때 창조주와 그 인간은 연락이 됩니다. 선생님이 자기 제자 이름을 부르는 것과 자기 엄마가 동일한 아이를 부를 때 느낌이 다르지요. 왜? 내 자식이기 때문에. 내 자식 부를 때 이름과 선생님이 부를 때 이름이 다릅니다.

창조주가 자기 피조물을 만들면서 이름을 지었는데 그 이름을 불러주면서 그 피조물은 단독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창조주와 더불어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평소에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이미 죄인인 입장에서 범죄 한 입장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 하나님은 백 프로 엉터리 하나님이에요. 왜? 하나님을 찾는 우리 자신이 망가졌고 고장 났기 때문에 고장 난 채로 나오는 그 하나님도 있지도 않은 하나님이고 우상이고 고장 난 하나님이 되겠지요.

광주강의 때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이 이미 버림받은 공동체가 아무리 신학적으로 연구해서 버림받은 공동체 내부에서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했어요. 우리는 버림받은 것 맞아, 라고 주장하더라도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가 우리는 버림받았습니다, 하는 이유를 말함으로써 버림받은 않을 수 있다는 걸 내다보면서 그런 발언을 하기 때문에 그거는 하나님께선 안 받아줍니다. 받아줄 수가 없어요.

죽도록 충성하란 말이 있잖아요. 요한계시록 3장에서 죽도록 충성하란 말씀을 보고 제가 죽도록 충성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주께서 안 받아줍니다. 그건 지가 살려고 그 말을 도용한 바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죽도록 충성하란 것은 내가 죽일 때까지 가만있어. 내가 죽여줄게. 죽도록 충성하는 게 뭔지 내가 너를 통해서 보여줄게. 기다려 봐. 죽여줄 테니까. 이럴 때 발현되는 것이 죽도록 충성하는 거지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 뭐 남수단에 가서 톰즈야 울지 마, 해서 내가 의사로서, 그런 것은 죽도록 충성한 게 아니에요.

미국의 아이오와 주에 침묵의 수도원을 만들었어요. 머리를 홀랑 깎고 탁발과 노동과 가난, 이 세 가지를 모토로 삼아서 한 번 들어가면 평생 못 빠져나오는 그런 데가 있는데 한국 방송국에서 특별히 예수님 탄생 이천 년 기념으로 거기 가서 찍은 다큐멘터리가 있어요. 제가 봤거든요. **, 예수 탄생 2000년 침묵으로의 초대 ‘트라피스트 수도원’(KBS 20001224 방송) 취재팀은 미국 아이오와 주의 뉴메를레이 수도원, 미주리 주의 어썸션 수도원 2곳을 찾아갔다.

아이고, 참. 나도 거기 가보고 싶어요. 이게 왜 이단인지 알리고 싶어서. 그야말로 성경말씀대로 속에서 나오는 게 더러운지 모르고 겉을 닦으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 팔자 고쳐질지 아는 거예요. 인간의 팔자는 고쳐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인간 손에 운명이 달린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인간에겐 책임을 묻지 않는 겁니다. 니 마음대로 살라는 뜻이 아니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이 행동을 나를 변화시키는 요소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주님의 이름을 불러줄 때 우리 이름을 불러야 되는데 우리는 이미 죽은 이름이기 때문에 우리 이름이 없어요. 주님께서 죽어 마땅한 이 이름을 자기 이름 화시켜서 불러주게 되면 이게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 겁니다. 좀 빠르게 지나갔지요. 이걸 동질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 따라 나 따로 해서는 구원이 안 돼요. 왜냐하면 내가 따로 있으면 내 구원, 내 조직신학, 내 성경신학, 내 구원관, 하나님관 다 독자적으로 우리가 그걸 만들고 쥐고 있다고요. 그것 누가 만들었는가? 마귀가 만들었지 누가 만들었겠어요.

인간의 속은 한시라도 가만있는 적이 없어요. 울릉도 트위스트에요. 울렁울렁 울렁대는~ 항상 울릉도 가는 배가 흔들리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감정은 한시도 가만있는 법이 없어요. 요동을 친다고요. 파도가 치고. 그걸 어떻게 라틴어 하면서 상투스, 상투스 하면서 머리에 뭐 하나 덮어쓰고 옛날 수도원 모습으로 단체로 남자들 평생을 거기서 신의 음성에 순종한다고. 아이고.

인간은 자기가 행동한 것에 대해서 자기가 바둑으로 말하면 복기하게 돼 있어요. 반드시 잘했는지, 못했는지 내 행동을 내가 소환해서 점수 질, 심사 질한다고요. 이걸 말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일 낮 설교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사실은 내가 일으킨 변화라는 거죠. 주께선 그걸 우리한테 되돌려주지요.

왜 그러냐 하면 내가 그 일어난 일과 나는 무슨 의미인지 엮어보려고 애를 쓰거든요. 가을에 낙엽이 하나 툭 떨어졌다. 내 인생이 곧 죽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환자 병실 창문에다 스카치테이프로 마지막 낙엽을 붙여놓으니 내 인생 아직 안 죽는 모양이다. 그 스카치테이프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요. 그게 <마지막 잎새> 아닙니까.

인간이 괜히 사물을 보는 게 아니에요. 자기 의미를 가지고 사물을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게 니 한계야, 하고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겁니다. 너는 너를 감상하면서 평생 하다가 지옥에나 가라, 인간아. 너무나 감상적이고 에토스적이잖아요. 정서적인.

주님께서 어느 인간도 자진해서 주님과 동질할 자격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혼자 자기 꿈꾸듯이 인간은 태어나면서 꿈꾸기 시작해서 자기 꿈의 세계를 계속해서 확장지어가면서 평생을 고집스럽게 자기 고집에 준동해서 살아가니까 백날 자기가 지 마음대로 예수 이름 부르고, 지 마음대로 구원 받았다고 우기니까 이거는 엉터리거든요. 주의 이름을 한두 번 불렀겠어요. 또 주의 이름을 부른 것도 아니에요. 쭈여, 쭈여, 쭈여 쌍ㅈ이 세 번 들어가요. ㅈ으로 여섯 개 들어가고.

왜 이렇게 하느냐? 주님께서 밀착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기도원 원장들이 다 실험해봤거든요. 그러니까 쭈여, 라고 한 두 시간 부르니까 진짜 주와 함께 있는 것처럼 밀착돼 있기 때문에 부르라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원에 기도하고 부르다가 우리교회 대표기도하면 할 게 없지요. 이런 것 다 버려야 되니까 떨지요.

그러면 이 동질성은 어떻게 주의 이름을 하느냐? 제가 아까 첫 번째 이야기했어요. 심판을 통해서 하는 겁니다. 심판주로 오셨는데 심판할 만 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구원이 되게 만들어요. 심판주로 오신 것은 합당합니다. 마땅히 저를 심판해야지요, 라고 하는 주님의 심판 작용이 우리 안으로 스며들면 그것이 주님의 구원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경로가 우리 안에 동일하게 경로로 새겨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올 때 본인 자체가 아버지로부터 버림당하는 모습으로 오셔요. 이게 이상한 거죠. 심판주가 된다면 의기양양하게 무섭게 와야 되잖아요. 절 입구에 보면 사천왕 있지요. 사천왕 특징이 눈을 부라리죠. 겁을 주기 위해서. 우리 주님의 눈이 그래요? 사천왕 눈입니까? 진짜 알사탕 같아. 너무 커서. 그것도 색칠을 안 해서 뜨고 오래되면. 수금이 잘 안 된 모양이라. 관리가 안 돼서 사천왕 폼만 냈다 뿐이지 나무는 썩었어.

우리 주님이 그렇게 오셨습니까, 칼 들고 왔어요? 아니지요. 주님 쪽에서 심판자와 동질화되기 위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어요. 심판받는 자와 동질화되는. 옛날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당신도 울고 있네요> 나이 좀 든 사람이면 딱 들으면 아아 김종찬이 부른 그 노래 하고 나와요.


당신이 울고 있네요
잊은 줄 알았었는데
찻잔에 어리는 추억을 보며
당신도 울고 있네요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을
그 누가 알았던가요
옛날에 옛날에 내가 울 듯이
당신도 울고 있네요
한때는 당신을 미워했지요
남겨진 상처가 너무 아파서
당신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나 혼자 방황했었죠 음
당신도 울고 있네요
잊은 줄 알았었는데
옛날에 옛날에 내가 울 듯이
당신도 울고 있네요


이게 무슨 가사냐 하면 그 여자가 떠나고 난 뒤에 남자 울은 거예요. 그리고 나를 버리고 나는 울고 지는 신났어.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우연히 찻집에서 만나서 보니 찻잔에 어린 추억을 보니 당신도 울고 있네요. 날 버리고 도망가 봤자 결국은 내가 당신 떠나서 울은 울음을 당신도 같이 울고 있네요. 그 가사에요.

한 번 물어볼게요. 이게 같은 울음일까요? 같은 울음이 아니지요. 남자는 여자한테 당했다는 울음이고, 여자는 과감하게 차버리고 신났던 경험을 가졌는데 뒤에 또 다른 남자한테 걸려서 환승이별 당해서 도로…, 그러니까 남자의 경력과 여자의 경력이 차이 나는 데서 응결된 그 닭똥 같은 울음. 남자는 또 여자에 속아요. 당신도 울고 있네, 이 말은 내가 운 울음과 당신도 똑같이 후회한 울음을 운다고 본인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해석하니 속이 시원하냐.

이게 일방적 해석이거든요. 나 버리고 가더니만 당신도 울고 있네, 후회하고 있네. 꼭 이래야 지가 약간의 보상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인간 사이에는 동질성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모르고 너는 나를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사이에 동질감은 없습니다. 그럼 같아지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같아질 수 있는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동일함에 그 정보는 창조주만이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창조주가 아닌 이상 저 사람과 어느 점에서 같은지를 몰라요.

그래서 사람들은 같은 점을 모르니까 같은 점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지요. 그 찾아보는 방법이 뭐냐 하면 예배시간에 그게 작동을 해요. 앞자리에 있는 사람부터 할렐루야 인사하겠습니다. 찬송 부릅시다.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고 사랑으로 하나 되고~ 불렀다 칩시다. 하나 됐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 기도할 때 이기주의로 자기만을 기도하지 말고 옆 사람 보고 기도하세요. 그게 중보기도입니다. 중보기도하면 하나 됐습니까?

만약에 제가 옆 사람에 누가 있는데 목사가 시켜서 서로 사랑합시다, 이건 지식이 아니고 실천으로 보여줍시다. 같이 손을 붙잡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뭐라고 기도하겠습니까? 하나님, 이 집사님 성질 더럽습니다. 고치게 해달라고 하면 기도하고 난 뒤에 대판 싸울 판이에요. “네가 날 알아?” 이건 싸움을 붙이는 거지 기도해주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기도할 때 그걸 의도해서 이분이 착한데 너 착하게 하시고 예쁜데 더 예쁘게 하옵소서. 이거는 결국 안 싸우려고 발악을 하면서 기도하는 골라잡는 기도, 이거는 연기하는 것이지 이게 무슨 기도입니까. 내가 당신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고 울었는지, 당신도 울고 있지요. 어디 김종찬 노래 불러요? 당신도 울고 있네요. 잊은 줄 알았었는데. 이건 영어지만 간단한 말로 이거에요. show 뭡니까? 쇼. 예배가 하나의 엔터테인먼트 쇼가 돼요. 보여주는 연극단체가 되는 거예요. 예배가.

동질성 정보는 창조주만 갖고 있어요. 그리고 인간은 다양하게 마련입니다. 같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인간의 동질성을 한 자로 죄라고 합니다. 이 죄는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상황 속에서 색다른 죄들이 다양하게 다채롭게 나와 줘야 인간은 죄 안에서 못 벗어나고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증명이 되거든요. 인간은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용도로 인간의 죄를 활용하고 계신 거예요.

그러면 당신도 울고 있네요. 잊을 줄 알았는데. 이건 뭐냐? 이게 바로 죄지요. 일방적으로 동질한 울음을 우는 것도 아닌데 지 혼자 남자가 이제야 여자가 정신을 차리고 나한테 돌아왔구나. 그래 나는 승리자고 너는 패배자야, 속으로 이야기했겠지만 내가 너를 어떻게 하는지 내 처분에 맡겨야 돼. 이리 와. 안아줄게. 이런 식으로 왜? 나는 남자니까. 주의 사랑으로 품어줄게. 교회에서 얼마나 써먹어요. 살인자지만 양자로 삼아줄게. 손양원 목사가 그 일 했잖아요. 그게 죄인 줄 몰라요. 그게 또 하나의 다채로운 색다른 죄인 줄 모른 겁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해서 우리 죄가 무엇인지 누가 아신다고요? 예수님만 아시죠. 예수님께 이걸 구원시켜놓고 성령을 통해서 이걸 펼칩니다. 봐봐. 네 죄가 이런 거야. 티슈 뽑듯이 죄를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 방법이 있고, 구원시켜놓고 성령을 통해서 알게 하시는 죄, 이 방법 하나 있고, 두 번째는 내 능력으로 내 능력이란 내 선함, 내 이성적인 판단력, 총명하고 순수한 이성의 판단에 의해서 죄와 의를 판단하는 것, 이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이 내 순수한 이성적 판다, 총명함, 내 순결함으로 발견해서 죄를 안 짓게 하는 이건 누가 하느냐 하면 바로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이 했던 거예요. 따라서 구원시켜주고 어떤 죄인지 예수님만 알고 우린 몰라요. 이 상태에서 우린 뭘 먼저 알아야 됩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는 죄 결정에 대해서 우리가 존중해줘야 돼요. 왜냐하면 그들의 한계가 우리 한계이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안 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투를 피 흘리기까지 싸운 그 행위를 존중해준다는, 옳다는 게 아니고요 그들의 노력을 결국 우리가 평소에 하던 노력의 끝자락을 끝을 보여주는 심오한 노력, 처절한 노력이란 사실, 그 노력에 대해서 우리가 외면해서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노력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놀랍게도 오늘날 교회나 성당에서 그걸 찾을 수가 있어요.

목사가 하는 설교나 설교 듣고 있는 교인이나 그리고 기도회로 모이는 거나 철야기도회, 제직회, 구역예배 회의할 때 부교역자가 구역장 모아놓고 설교하는 내용 모든 것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했던 것을 그대로 다 해버려요. 여러분들이 인생이 꼬이는 것은 죄를 모르고 회개하지 않고 계속 같은 죄를 반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징계를 주십니다.

여러분 돌아보세요. 여러분들이 가정이나 사업이나 모든 일에 행복하십니까? 항상 문제가 있지요? 내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구역장, 전도사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괜히 중간에 이것 들어서 이 목사가 복음을 버렸나? 여러분들이 평소에 세상만 쳐다보고 말씀은 안 쳐다보니까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 큐티를 잘 활용하시면 말씀과도 엮이면서 말씀을 실제로 세상에 나가서 빛과 소금의 역할 할 수 있는 이 모임이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모임이고 이 모임에 주께서 함께 계십니다. 다 같이 통성 기도합시다.

이래서 보통 끝내는데 그 노력이 뭐냐 하면 죄를 내 능력과 내 이성과 내 윤리적 판단력으로 끄집어내는 이 시도를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라면 평소에 자연스럽게 해내면서 바리새인들이 노렸던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동질성이에요. 무슨 동질성? 구원 안 받은 내가 구원 받은 나와 일치하다고 자부하고 싶은 겁니다.

이만한 노력과 이만한 성의를 표하면 하나님께서 합격이라고 합격도장 받을 정도의 합치된 합당한 구원 받은 자의 동치 된 존재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요. 사람은 희망 없이는 일 안 하거든요. 그런 희망이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은 희망으로 사는데 교회 나올 때도 어떤 의도하는 게 있는데 그 의도하는 게 뭡니까? 내가 지금 개 떡 같은 인간성 말씀으로 정화되어서 당당하게 천국 가는 그 희망을 품고 왔고 교역자들은 그 희망에 부응해서 이렇게 하면 됩니다, 라고 처방을 내려주는 거예요.

전에 광주강의에서 했지요. 유엔사무총장이 기후재난을 집단자살이라 표현했지요. 이 사람이 뭘 모르느냐 하면 이미 인간은 집단자살 중입니다. 이미 인간들이 교회 모여서 집단자살, 성당 모여서 집단자살하고 있어요. 집단자살을 하는 걸 모르기 때문에 진짜 집단자살 쪽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아까 바리새인이 하는 게 ②번이라면 ①은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안다고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기만 아는 죄를 뭘 통해서 우리에게 죄 짓게 하신다? 새삼스럽게 죄 짓게 하는 게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 육신의 본성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경 안에서 어떤 식으로 죄로 드러나는가를 보여주게 돼요. 왜? 성령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할 준비가 돼 있어요.

그러면 그 의와 죄와 심판은 누구 몫입니까? 우리가 달성할 목표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이미 다 이룬 거예요? 이미 주님이 본인만의 행위로써 달성한 것이 죄와 의와 심판이에요. 이미 확정 났어요. 이미 의가 확정 났기 때문에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자기 백성의 명단을 본인만이 확보하고 있어요. 이걸 생명책의 명단이라 합니다. 주님께서 아무나 막 뿌리는 게 아니에요. 생명책에 기록된 명단이 있는 자기 백성에게만 주거든요.

예수님의 이름은 바로 자기 백성의 이름으로 이게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데 주의 이름 안에 하나로 통합이 되거든요. 통합이 되면 이게 폐쇄구조가 돼요. 주님은 성과를 이뤘다. 그러면 주님의 고생 고생해서 의를 이뤘잖아요. 고생 끝에 의가 있다는 말은 뭐냐, 이 고생은 왜 했는가? 죄 때문에 고생하신 거예요.

그럼 예수님만이 죄를 아시고 그 결과가 의라면 이미 자기와 하나 된 사람에게는 고생 고생한 이 죄를 그다음부터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체험케 하는 일이 일어나야 되죠. 이게 동질성이에요.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그 십자가의 길은 우리가 가야 될 길이고, 또 가게 하시는 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물어봅시다. 예수님이 죄 때문에 고생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예수님 본인이 죄 지었습니까, 아니면 죄인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형태에요? 핍박을 받는데 예수님을 핍박했던 주모자들의 누굽니까? 바리새인이죠.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바리새인을 우러러 보고, 대단하다 어떻게 같은 인간인데 저렇게 성스러울 수 있느냐.

그 자체가 죄의 극대화라면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바리새인이 하던 시도를 우리가 존경하면서 그 행위를 반복하도록 하지요. 바로 너 때문에 내가 따로이 혼자 일을 해야 될 이유가, 네가 내 일을 거들지 못하는 이유가 너와 바리새인이 똑같기 때문에 그렇다. 다를 바 없다. 그렇게 될 때 성경 마태, 마가, 누가복음 같은 경우를 볼 때 우리가 바리새인 이야기를 남의 일로 듣지 않고 동질, 같은 느낌으로 보는 거예요.

전에는 우리가 바리새인과 동질화 됐는데 동질화 된 이것이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저를 심판하고 죽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고백이 바로 예수님과 새로운 이름으로 동질화 됐다는 증거에요. 주님이 하신 그 아픔과 고통에 같이 동질하게 체험하는 겁니다. 그 체험을 하기 위해서 바리새인과 같은 육신을 여전히 우리가 갖고 있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2장 40절에서 52절까지 보게 되면, 어린 예수님이 유월절을 당하여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갔을 때 그 부모가 며칠 만에 찾느냐 하면 3일 만에 찾았지요.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48절에 부모가 한 말을 들어보세요.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아이 예수님에게 나무라고 있는 거예요.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부모 떠나서 홀로 돌아다니는 자식을 나무라는 것, 이 이야기를 만약에 바리새인이 보면 바리새인이 꾸중하겠습니까, 동의하겠습니까? 동의하지요. “애가 잘못했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부모가 걱정하는 걸 그 정도 나이면 알아야지.” 말도 안 하고 해버리면 다른 사람은 명절이 재미있겠냐 말이죠. 걱정이 돼서.

여러분 멀리 있는 손자, 손녀 하나 아프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잠을 못 자요. 막 카톡해서, “병원에 가서 어떻게 됐는데?” “아무렇지 안탑니다.” 그다음부터 잠을 잡니다. 이게 동질성이에요. “우리가 남이냐?” 부산 쪽 표 달라 이 말이에요. 이게 동질성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혈육적인 동질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의 주장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겠지요.

그들 바리새인 하는 행위를 티 잡을 수 없어요, 우리는. 나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말씀은 좋지 지켜야 되지, 구원을 받아야 되겠지, 이 말씀 지킨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해주겠지. 그러니까 열심히 말씀 지키고 온갖 충성을 모든 걸 하나님께 바쳐야 마땅하지. 이런 생각이 어떻게 죄가 돼요? 말이 안 되지요.

그래서 부모를 아이를 나무라는 것,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그런데 그 뒤에 49절 보세요. 여기에 역공이 들어옵니다. 다른 사람이 했으면 싸가지 없다고 했을 거예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이게 부모한테 할 소립니까, 이게. 젖 먹여 키웠고 칭얼대면 밤새 달랬고. 물론 예수님이 너무나 거룩한 분이라서 밤잠 잘 잤는지, 우리 아긴 안 운데요. “저 육축 소리에 아기 잠 깨나 그 순하신 예수 우시지 않네” 옛날 찬송가 113장(2절).

그게 맞을까요, 과연? 예수님 안 울고 했을까요? 예수님은 한 번도 애 먹인 적 없을까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부모와 예수님은 동질성이 아니었어요. 동질성이 없습니다. 누가 누굴 나무랬는지 같은 공통점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바리새인과 동질성이지 예수님과 동질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고백을 마땅히 해야 돼요.

여기 4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그래 알지 못했다. 너 잘했단 말이냐. 부모한테 대드는 거야?” 이렇게 반응하면 안 되겠지요. “아이고, 우리가 내 아들이라 생각했는데 내 아들이 아니고 아버지가 따로 있는 위탁해서 키우는 거지 내 아들 아니었구나. 왜 그걸 왜 몰랐을까? 내 아내가 성령을 통해서 임신한 줄 모르고 마치 내 아들처럼 생각했잖아.” 이렇게 나중에 후속담이 들려오면 다행스럽지요.

그런데 성령 오기 전까진 몰라요. “이상하다. 지금 무슨 소리야. 어떻게 보면 철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특별계시를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부모란 입장에서 다룰 수 있는 양육범위를 벗어났구나.” 그 정도만 해도 인간 쪽에선 선방한 거죠. 그러나 더 나가야 돼요.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양친 부모도 그때는 요셉이 죽었지만 죄인인 것을 인정해야 돼요.

51절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마음에 두었다는 말은, 내가 아들한테 한 것이 뭔가 너무나 인간적인 발언을 한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마리아가 마음에 간직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 태어나기 1년 전에 천사가 와서, 천사 둘 하나님 이렇게 볼 수도 있는데 하여튼 세 분의 천사가 와서 네가 내년 이만쯤에 임신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걸 엿듣고, 엿들을 줄 알고 이야기했지요, 천막 뒤에서. 천막이 무슨 방음장치가 되겠어요.

들었던 사라가, 그땐 사래가 속으로 웃었잖아요. 그런데 그 천사가 뭐라 하느냐 하면, “너 웃었잖아.” 사래가, “안 웃었습니다.” 논쟁쟁점이 이상하게 돼버렸어. 웃었다, 안 웃었다. “내가 감히 웃을 수 있습니까?” “아니야, 너는 웃었어.” “안 웃었습니다.” “아니야, 우리가 하는 일은 너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들어도 같잖을 일을 벌인 거야. 네가 웃은 것은 당연한 거야. 중요한 것은 너의 한계, 난 웃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일에 웃음으로 반항할 수밖에 없다는 그 한계를 아예 네 자식으로 삼아라.”

그 자식 이름이 뭡니까? 웃음. 이삭을 보는 순간 나는 죄인이 되고 이삭을 나를 구원하는 자가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나의 죄를 품었다는 조건 하에 동질성을 갖추는 겁니다. 내가 심판받아야 맞습니다, 라는 성령의 고백으로 이미 주와 하나가 되는 거예요. 얼마나 신기합니까. 너무나 신기한 일이죠. 동질화되기 위해서 애써 죄 안 지으려는 그게 아니라 우리는 집단자살해도 마땅합니다, 라는 그 고백, 놀라운 고백이 나오게 하는 것 그게 동질성이에요.

그래서 동질성이란 상대에서 나의 것을 찾는 것, 이게 동질성이에요. 예수님이 심판주입니다. 심판주가 아니면 구원자가 될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노아를 구원하려고 한다면 그렇게 거창하게 방주 만들고 그럴 필요 없어요. 따로 뽑아내면 돼요. 하나님께서 홍수를 보내서 방주를 만든다는 이 말은 반드시 구원이란 보편적인 전면적인 심판에서만 구원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노아도 그렇지요, 여러분 아시는 유월절도 그렇지요.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 같으면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써서 양 잡아서 문설주에 바를 필요 없어요. 너희는 따로 빼냈으니까 구경이나, 이랬을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도 피를 발랐다는 말은 이스라엘도 죽어 마땅함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만 어린양의 피를 보고, 약속을 보고 그냥 봐준 거죠. “죽었네, 이미. 야야 철수. 이 집 넘어가. 이 집 끝났어. 이 집 값은 받았어. 그다음 집 가. 그 집은 가지 말라니까 피가 있는데 넘어가라니까.” 천사1이 천사2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천사 대장이, “빨리 가. 보지 마, 보지 마. 피 보고 그냥 넘어 가! 너희는 죽을 뻔했는데 살았어.”

문제는 그 사실을 천사의 속삭임, 둘의 대화를 우리 속에 들어와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 변호하지 마시고, 우리가 우리 행동에 대해서 방어하지 마시고, 우리는 그냥 천사들의 대화, 대화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했다 치고 주님의 대화를 열어놓는 하나의 빈 라디오박스처럼 뮤직박스처럼 그냥 네모난 박스채로 제공되고 노니는 것은 성령께서 주님과 노시도록 장소 제공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 단락이 예배하고 있거든요. 예배는 주님과의 동질성으로 말미암아 성사되는 것이다. 그 이야기하고 싶었던 겁니다.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성령이 찾아오지 않은 바리새인을 모토로 해서 열심히 하면 다 되게 돼 있어, 이런 사람의 근원적인 문제가 뭐냐? 문제는 추상적인 하나님을 찾는다. 이게 바로 근원적인 문제점이에요. 추상적인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계시하실 때 이거는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지만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할 필요 있어요.

하나님이 계시하실 때 자기를 나타내실 때 어떻게 나타내십니까? 그거는 아시죠. 예수님을 보내셔서 계시했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안 보내면 하나님을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구약에는 주의 이름이죠. 그 점이 우리가 정말 이 세상에서 원자폭탄 터진 것보다 더 놀라워야 될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말로써 계시하지 않고 직접 몸으로 인간들을 찾아왔다는 사실요. 이거는 충격 중에 쇼킹한 쇼킹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것을 받으시는 게 아니고, 제사를 받으시는 게 아니고 그 제사 엉터리라고 싹 밀어버리고 실제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제사 밀어버리시고 본인이 제사장 되시고 희생제물 되셔서 그 제사 드려서 다 이루었다고 이야기해버린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번잡스럽게 요란스럽게 일을 해버리시냐 말이죠. 그것은 우리와 협력을 안 하시기 위해서예요. 죄인과 거래를 안 하시기 위해서예요.

그러면 우리가 구원 받습니까? 아니 구원은 심판 속에서 구원이 있어요. 따라서 구원 받는 자를 예수님의 생명책 명단에 새겨진 그 사람만 구원 받아요. 그런데 생명책에 기록된 그 사람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만 예수님의 성령을 가게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 생명이 안 옵니다.

그래서 복음은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용도가 아니고 화나게 만들어요. 화날 사람들은 화나야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 화날 사람 특징이 뭐냐? 추상적인 하나님을 따로 설정했어요. 예수님이 오셨음을 믿어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와 상대해서 구원해줄게, 가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자를 예수님 자신의 행위 속에서 새로 만든다는 그 점이 예수님 믿어서 구원 받겠다는 자들을 화나게 만드는 거예요.

전에는 하나님 믿었는데 예수님 이 땅에 오셨단다. 이제는 예수님 영접하세. “놀고 있네. 네가 영접할 자격이 돼?”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영접한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찍었다는 거예요. 딱 찍어서 찾아오는 거예요. 구원 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시고 예수님이 품고 있던 죄를 용서해야 될 대상체로 만드는 죄인으로 주님 자신의 십자가와 만나서 거기서 예수님의 공로가 드러나는 대상자로 따로 설정된 것을 우리는 몰라요.

다만 찾아오니까 아는 거예요. 우리는 알 수 없어요. 왜? 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만 알고 있기 때문에 찾아와서 성령 주셔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너는 죽고 네 안에 내가 사는 식으로 구원이 이뤄진다. 그것은 바로 들을 귀 있는 사람만 듣도록 주께서 모든 걸 폐쇄적으로 다 진행시켰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복음을 알고 써먹을 생각하지 마세요. 남한테 자랑하려하지 마시고. 십자가를 자랑해야지 구원 받은 나를 자랑하지 마세요. 그것은 하나님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기는 주께서 지시하실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이 찾아와서 복음을 들을 때 어떤 사울이 눈 봉사될 때 아나니아가, 헌금하다 죽은 아나니아와 동명이인이에요. 이미 하나님의 천사가 내려와서 사울을 만나게 해줬잖아요.

고넬료는 또 누구와 만납니까? 베드로와 만나죠. 그렇게 주선을 하시고 만나게 하시는 그것조차도 주님이 일방적으로 하시지 우리가 마음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를 고넬료처럼 아나니아처럼 베드로처럼 지금도 주의 지시를 따라서 늘 활용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과 하나 됨이 예수님의 심판과 구원 작업이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을 이제는 마음 놓고 감사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들 나서지 말고 주께서 시키는 대로 나설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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