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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8 04:48:43 조회 : 50         
서울의존강의20220915b 베드로후서 3장 3절(자기 조롱)-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219.251.37.139)
서울의존강의20220915b 베드로후서 3장 3절(자기 조롱)-이 근호 목사

우리 주님은 자기 백성이 끝까지 타인을 신경 안 쓰는 이야기만 들려줬어요. 다 불질러버리는 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과격하죠. 물로 싹쓸이해버리고 불로 싹쓸이해버리는데 남이고 뭐고 어디 있어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남 없으면 나도 같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남을 무시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도 무시해준다는 거예요. 나를 무시해도 괜찮아요. 나는 나를 무시한 분의 종이기 때문에 영광스럽기 때문에 그 관계 자체가 감사하기 때문에 날 무시해줘도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나를 무시해주면 줄수록 더욱더 주인님이 빛나죠. 야, 역시 주인답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조롱이라 할 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조롱한다는 것은 그들 수준에서 조롱하는 거거든요. 그들의 세상 보기의 기준에 맞춰서 우리를 조롱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기준 자체를 주님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는 기준인 것을 우리가 아셔야 돼요.

그 기준을 제거할 때 이렇게 이 문장을 보시면 이해하기 쉬워요. 비 오면 우산 쓰죠. 비 오면 우산 씁니다. 그러면 나는 우산 안이 나의 세계 전부에요. 그런데 비가 그쳤다. 그럼 계속 쓰고 있으면 안 되죠. 우산 걷고 뭘 봐야 됩니까? 하늘을 보라 이 말이죠.

우산을 쓰고 있으면 이 우산 안이 하늘이 돼버려요. 이 안에서 울고불고 난리라. 우산 안에서. 그런데 이 우산을 왜 씁니까? 누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남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니에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예수 믿고 교회 가고 신을 믿고 하는 거예요.

나와 신이 무슨 관련성이 있는가를 우리는 계속 탐구하는 거예요. 어제 기도했는데 기도 효과는 나에게 어떤 이익으로 주어지나, 계속 그 성과를 찾고 있는 거예요. 성경 공부했는데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왜 그런 짓 하는데? 내가 주인이니까. 나에게 주인이 따로 없으니까.

그게 바로 세상 사람들이 본인들이 신을 선택한 거예요. 오늘부터 나의 주인 되라고. 그러니까 신을 다섯이나 믿는다는 뜻은 좋은 우산 다섯 개 쓰고 이 신이 나를 지켜줄 것인가, 저 신이 나를 지켜줄 것인가와 똑같은 거예요.

물론 현대인들은 그 신을 보험으로 대체하지만. 보험 한 10개 들어가지고 이거할 때 이걸로 막아주고 저거할 때 저걸로 막아주고. 보험은 통계적이고 과학적이지만 신은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보험도 들고 그다음에 신도 믿고.

옛날 우산 쓰고 새 우산도 쓰고. 그 안에서 숨이라도 쉬어보려고 하는 거예요, 숨. 숨은요. 주님이 쉬게 하는 것이지, 자기가 쉬고 싶다고 숨 쉬는 게 아닙니다. 숨 쉬게 하시는 분 따로 있어요.

그래서 두 번째 시간에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숨 쉬는 방법을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숨 쉬는 방법을 알려드리면, 제가 첫째 시간에 예고한 대로 세상 사람들이 나를 조롱할 때 어떻게 조롱하는가를 우리 자신도 미리 알아서 그 조롱방법을 우리 자신에게 한번 적용해보겠습니다.

강의가 너무 어렵지 않도록 쉬운 동화 같은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있는데 못된 할머니가 성질 더러운 할머니가 지옥 갔어요. 성질이 더러우니 지옥 갔겠죠. 갔는데 천사가 그 할머니를 불쌍히 여겨서 마지막 기회를 하나 준 거예요. 천사가 찾아왔어요. 컴퓨터로 조회해보니까 그 할머니가 늘 성질이 나빴는데 딱 한 가지, 착한 일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할머니가 젊었을 때 어려운 사람에게 양파를 준 게 있어요. 그 외에는 착한 일이 없어요. 얼마나 성질이 못됐던지.

그래서 그 천사가 마지막에 기회를 주기 위해서 양파 준 선행 하나를 검색해가지고 찾아내가지고 당신 진짜 이렇게 가면 지옥불에서 영원히 못 빠져나오니까 당신을 천국 보내줄려고 당신이 한 선행을 내가 찾아냈다. 그래서 이 양파를 가지고, 천사가 양파를 쥐고 할머니는 양파 끝을 쥐고 양파를 잡아 당길테니까 딸려오면 되는데 조건이 있다. 절대로 끊어지면 안 되는 조건 하에 따라오면 된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아이고, 감사히 여기면서 따라갔어요. 따라가서 거의 다 왔어요. 지옥에서 벗어나는 경계선에 거의 다 왔는데 그때 다른 지옥 간 사람이 할머니 뒤에 갖다 붙은 거예요. 어? 지옥에서 빠져나가네. 야, 이 지옥에서 빠져나가는 수가 있구나. 하고 붙으니까 할머니가 뭘 걱정하느냐 하면 그 무게에 의해서 양파가 끊어질까봐 걱정이 되가지고 발로 뒤에 온 사람을 막 차는 거예요. 차면서 “이 양파는 내 거야!” 하고 떨어뜨렸습니다. 떨쳐냈는데 그 순간 양파가 끊어져서 할머니는 영원히 지옥불 들어갔다는 이야기.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이 비슷한 이야기가 불교에도 나와요. 한국의 불교에서도 나오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게 왜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조롱하는 방법이 되느냐 하면요, 방금 한 이야기에서 이런 요소가 들어있어요.

첫째, 천사가 할머니를 동정하고 있어요, 연민. 연민인데 연민할 때 단서가 붙어있는 동정을 합니다. 양파가 끊어지면 안 된다. 그런데 동정에는 근거가 있어요. 착한 일을 한 가지라도 했다는 그것마저 없으면 동정할 수 있는 기회도 없는데 착한 일 한 게 있기 때문에 그 착한 일을 살리기 위해서 양파 줬던 그 양파를 가지고 동정한 거예요.

두 번째, 할머니가 끊어진 결정적 이유는 뭐냐 하면 ‘이 양파는 내 것이다’에요. 그러니까 이 양파는 나를 구원하는 용도의 양파지, 너를 같이 구원하는 용도의 양파는 아니라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성경을 다 읽고 성경을 아무리 백독 천독을 해도 이 두 가지 요소가 우리 육신 속에 계속 꾸역꾸역 위산 과다할 때 갑자기 욱하고 올라오듯이 끊임없이 지금 우리 내부에서 이게 올라오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완전히 이걸 저는 선악체계로 보는 거예요, 선악체계. 선악체계를 다시 한번 잠깐 설명하게 되면 선악체계는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벌하시고 선한 자에게 복을 주는 게 선악체계입니다. 그걸 수요일에 도덕신이라 했죠, 도덕신.

그런데 제가 수요 설교에서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를 벌하고 착한 사람은 복 주는 게 아니고 선이고 악이고 모조리 다 심판해버립니다. 왜냐하면 선악지식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잘 나가나 못 나가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식으로 모든 것이 심판 받을만한 인간으로 이미 성경적으로 확정됐죠. 그럼 그 확정된 이유가 뭐냐? 선악체계 때문에 그러죠. 이게 바로 선악체계잖아요. 이게 우리한테 없을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이런 구원관이.

특히 여기서 첫째로 뭐라 했습니까? 뭐라도 동정을 받고 사랑을 받으려면 뭐 하나 착한 건덕지가 있어야 된다는 이 한 사실과 두 번째, 이 양파는 누구 구원하는 용도다? 나를 개인 구원해요, 개인 구원. 나를 구원하는 용도로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이 두 가지 요소.

이 두 가지 요소가, 우리 자신이 충분히 우리 자신을 조롱할만한 이유가 돼요. 너 아직도 복음, 복음, 십자가 하지만 너 선악체제 그대로 있잖아, 있어. 남들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이걸 계속해서 추궁해보세요. 들쑤셔보세요. 우리가 들쑤시지 않아도 일이 터지면 들쑤셔져요.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갑자기,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이 말 자체가 잘못됐어요. 이미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잘못되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뭐가 잘못되었느냐. 이번에는 실수고 다른 일은 잘못된 게 아니잖아, 그런 뜻이에요, 이게. 이 선악체제가 무심코 모든 행동과 말씨에서 선악체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상대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를 상대해서 구원하지 않는 이유가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의 양파로 생각한다니까요. 나를 구원하는 양파. 그것도 조건부로 끊어지면 안 된다는 조건.

그리고 또 한 가지 보탠다면 천사가 할머니한테 제안을 했잖아요. 그럼 구원문제는 누구 결단에 달렸습니까, 그 다음부터는? 할머니 나한테 달린 거예요. 그러면 선악체계는 맨날 누구를 살펴야 돼요? 내 행동을 살펴야 돼요, 내 행동을. 살피는 이유가 뭡니까? 더 망하라고 살피는 게 아니에요. 혹시나 착한 일을 무심코 할 수도 있잖아. 그거 있으면 그거 하나 근거로 구원을 해야겠다는 생각, 그 생각을 갖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산입니다. 그 우산 뒤에 하늘이 있다는 건 모르고 우산 서너 개 해가지고 깜깜해. 어두움이에요. 내 세계가 항상 어두워요. 우산으로 둘러싸였거든요. 이거 오면 이걸로 커버하고 저거 오면 저걸로 커버하고 방패가 너무 많아요. 열댓 개 있어.

자기가 완전히 지구 지키는 영웅들 영화, 그 영웅들의 특징이 뭐에요? 완전히 공격 수비가 다 되는 갑옷 입고 돌아다니잖아요. 방패라든지 무슨 마스크라든지 있잖아요. 심장이 기계로 되어있다든지. 어벤져스 영화. 독수리 5형제도 아니고. 왜 그 영화를 보느냐 하면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는 주인이 필요치 않아요. 내가 주인 되길 원해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지키는 그게 우리가 편해요. 그 속에 결단과 결심은 내가 하고 다만 주께서는 동정이라든지 연민, 사랑 어떤 제안만 하면 하나님은 그걸로 멈추라는 겁니다.

사무엘하 6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참... 언약이 어려운 점이 여기에도 나와요. 사무엘하 6장. 6장 끝에 보게 되면 6장 20절. 누가 한번 읽어보라고 말하기도 싫어요. 전부다 지금 침묵하고 있으니.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쉽게 말해서, 왕이 주인이고 거기에 있는 여종은 종인데 어떻게 주인님의 벌거벗은 신체를 그 하녀들 앞에서 그 몸을 드러냅니까. 무슨 뜻입니까? 이 다윗이 언약궤 오는 것이 너무 좋아서 춤을 추려고 하니까 왕복이 거슬린 거예요. 브레이크 댄스 하려고 하는데 이게 안 되니까 옷을 가볍게 입고 춤을 췄다 이 말이죠. 신체가 약간 노출됐겠죠.

“어떻게 체신머리도 없이 그런 짓을 합니까? 천한 것들이 다 보고 있는데.” 이게 지금 누가 누구를 조롱하는 거죠? 왕비가 다윗 왕을 지금 조롱하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 다윗이 “어이쿠, 내가 정신이 없었구나.” 이랬습니까? 21절,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러니까 사람 앞에서 한 게 아니죠. 아까 제가 말했죠. 하나님의 예언은 너, 나 자체를 완전히 무시하고 일어난 이야기로 되어 있다고. 그들의 평가와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는 이야기에요. 누가 궁시렁 궁시렁하고 누가 평할 때 그것을 귀담아 듣지 말라 이 말입니다. 지금 주께서 시킨 일인데 주님 앞에서 내가 종으로 하는 일에 주님만 보이지 다른 사람은 눈에 보이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절 한번 들어보세요.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이게 낯선 공간이잖아요. 낯선 공간이죠. 다른 사람들은, 미갈의 눈에는 사람들만 있는 공간이죠. 이건 다 익히 아는 공간이에요. 그러나 다윗은 여기다가 낯선 공간인 다윗 세계를 형성합니다. 이게 언약의 공간이에요.

언약은 이런 거예요. 언약은 일어나게 되면 반드시 언약을 조롱하는 자도 같이 자기 정체가 들통나게 되어 있습니다. 언약은 적들의 정체를 들통내지 않으면 언약이 활동하지 않아요. 다윗이 그것을 오히려 기쁘게 내가 남한테 욕을 얻어먹더라도 언약이 나를 강권적으로 작용하는 것에 다윗은 너무 좋아서 염치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옷을 벗고 춤을 춘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오니까.

그다음에 23절 봅시다. 드디어 벌칙이 주어지죠.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이렇게 되어있죠. 자,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하면 돼요. 제가 방금 20절, 21절, 22절, 23절 이렇게 했잖아요. 그렇게 하지 마시고 23절부터 딱 먼저 표제로 거는 거예요. 수능 국어 제7번 문제. 사무엘하 6장 23절을 딱 제시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딱 해놓고 그다음에 뭘 제시하느냐 하면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는 이유를 대세요, 라고 주관식으로 써보라 하는 거예요. 주관식으로. 이게 신앙 아닙니까. 이게 신앙 있음과 없음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럼 문제를 바꿔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여,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말하면서 돌아가셨어요. 자, 그게 문제입니다. 다음 중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를 주관식으로 쓰세요. 한번 써보세요. 뭐라고 씁니까? 1번, 정치꾼에게 대들다가 너무 경솔했다. 좀 참을 걸... 우리는 그런 식으로 답안을 작성해요. 그런 식으로 작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 되기 위해서 그는 죽어야 됐다.’는 말을 쓰는 순간, 출제자인 하나님이 “맞아. 그다음 네 차례다.”라고 그다음에 나를 잡아당길 수가 있어요. 정답 이야기해서 자칫하면 그 길을 갑자기 강제로 끌려갈 수가 있다니까요. 차마 말을 못하고 침묵하죠.

아까 누가 성경 읽어보자고 하니까 전부다 침묵하는 것처럼 말을 안 해. 말을 안 해요. 성경 한 절 읽었다고, 성경도 그렇게 알면서 왜 네가 읽은 말씀대로 안 지켜, 또 이렇게 나올까 싶어서 겁나가지고 입을 다물고 있는 거예요, 전부다. 그걸 가지고 세 자로 뺀질이라 합니다. 요령꾼. 우리는 뺀질이, 요령꾼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뺀질뺀질해요. 얼마나 뺀질뺀질한지 눈이 부실 정도로 요령꾼들이에요.

우산 내리면 되잖아요. 왜 자꾸 우산을 씁니까? 나를 지키는 우산을. 우산에다가 ‘성경말씀 읽었음’ 이런 것 써놓고... ‘기도했음’, ‘헌금했음’ 그 우산을 왜 자꾸 갖고 있느냔 말이죠. 그걸 내려야 하늘이 다 보이는데, 우산 쓰면 자기가 행한 그 천장이 자기 하늘의 전부에요. 내 세계의 천장이 자기가 행한 것으로 가득 차있어요. 우산을 칼로 찢든지 무슨 조치를 해야 되겠죠.

바로 언약이 인간이 내세운 하늘을 대체합니다. 주어졌던 하나님의 언약이 대체하면서 우리가 왜 사울의 딸 미갈처럼 우리가 그 현장에 있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 여러분,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한테 이렇게 반격 들어왔죠. 그때 이 여종보다 내가 더 천하게 할지라도 나는 여종이 보지 못한 하나님의 영광을 본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런 이야기할 때 그 현장에서 사울의 딸이 회개했겠습니까? “아이고, 여보. 내가 잘못됐어.” 이렇게 나왔겠어요? 택도 없는 소리에요. 회개했으면 자식이 생겼어요. 안 생겼다는 말은 그 고집이 대단하죠. 이 이야기 주일 낮 설교 때...... 바쁜 가운데 챙겨야 되죠. 안 그러면 다 잊어버리니까. 주일 낮 설교 본문하고 딱이에요.

이제 우리가 우리를 조롱해야 되죠. 그럼 우리는 잠시 사울의 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울의 딸의 관심사는 뭡니까? 우리 남편은 임금이다. 따라서 우리 남편이 어디 현장에 가는 것은 나를 대신해서 나의 위신과 체면을 대신해서 나서기 때문에 왕이 만약에 우사를 당하면 그 우사스러움은 왕비인 나한테 다 오기 때문에 항상 남편 단도리를 해야 되겠죠.

그런데 그 대단한 남편이 자기보다 한참 계급이 낮은, 왕궁에서 일하는 천한 여자 종 앞에서 나한테도 너무나 귀하고 귀한 남편이 천한 여자 앞에서 행동을 그 천함보다 아주 더 낮춰서 했잖아요. 그럴 때 우리가 그걸 그냥 지켜봅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갑자기 왕비가 나서서 “전부 다 눈 감아! 눈 감아.” 일단 눈 감게 만들고. “눈 가려!” “예, 왕비 마마.” 이미 다 봤는데...... “당신 옷 좀 입고. 당신 내가 이해해.” 또 이해한대, 또. 당신이 하나님만 사랑하고 어떻게 복음을 사랑하고 다 이해하는데 행동을 그렇게 주체 못하게 경솔하게 하면 안 되지. 남들 보는 눈이 있잖아.

참 중요한 말이다. 남들 보는 눈이 있잖아. 이게 우리들의 진리 아닙니까. 남들 보는 눈, 이 눈이 진리 아니에요? 남들 보는 눈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나가 되잖아요. 남이 있을 때 나가 되잖아요. 남들 보기에, 망했다. 아이고 나 같으면 진즉 죽었다. 그렇게 우에 사노. 쯧쯧쯧. 이거. 남들 보는 눈이 있는데 남들 보는 눈은요, 남들이 나를 보지 않고 내 안에 내재되어 있고 내장되어 있어요, 이 장치가 육신 안에. 이게 손으로 후벼도 빼내지를 못해요. 남들 보는 눈.

그러니까 이 성경에 나오는 사울의 딸 미갈의 행동은 지금 우리 안에 살아있는 겁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냐. 이런 관점에서 누구를 조롱한다고요? 우리 자신을 조롱해야죠. 그게 말씀의 작용이잖아요. 말로만 죄인 중의 괴수 아니잖아요, 말로만.

자꾸 조롱거리를 감추지 마세요. 위선자가 됩니다. 독하게 조롱하고 앞으로 취미를 바꾸세요. 취미가 뭐고? 나 조롱하는 거. 나를 낮추는 것, 고상하게 말해서 나를 낮추는 것. 나를 아예 천하디 천하게 만드는 것. 나로 하여금 남들에게 전혀 내세울 게 없는 존재인 것을 내가 실감나게 만드는 게 나의 취미다.

남들 보는 눈이 있잖아요. 그게 바깥에 보이는 남이 아니고 내 안에 남이 있어요. 그 남 안에 나를 지켜보고 있는 눈이 박혀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담 자손치고 정신병 아닌 자가 없어요. 전부다 정신병 환자에요. 남들의 눈이 내 허락도 없이 내 안에 박혀있으니까 이거 뭐 꼼짝마라죠.

그 중에 한 사람이 누구였다 했습니까? 욥이었어요. 욥이 기가 찼죠. 심지어 욥은 나중에 몸이 너무 아파가지고 욥기 19장 18절에 보면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나를 업신여긴다고 하나님 앞에 대들고 있어요. 하나님, 내가 전에 가르쳤던 내 제자들이, 그 당시에 어르신네니까, 나한테 교훈 배웠던 애들이 이제는 역전되어가지고 나를 조롱하나이다. 나 이거 견딜 수 없습니다. 이럴려면 저를 빨리 이 세상에서 나를 일찍 죽여주옵소서.

아, 요 근래 자기 죽여 달라는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그만큼 살기가 빡빡한 모양이죠. 복음 버리고 세상으로 나가면 되잖아요. 그럼 더 살 수 있는데. 수고하고 무거운 복음 들고 가려다 보니까 살라고 하니까 복음대로 못 살고 안 살라 하니까 복음이 무섭고. 이 갈등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뭐 죽으면 해결되는 줄 알아요?

그런데 복음은 기쁜 소식이잖아요. 이렇게 나로서는 한계에 이르렀어요. 내 안에 남이 이렇게 볼까봐 두려워하는 그 눈 때문에 내가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대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창세기 16장 4절에 보게 되면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그 여주인을 멸시하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조롱하는 것은 세상 자체의 본질이에요. 세상 자체의 본질입니다. 방금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임신을 못하고 종은 임신이 되가지고 주인님의 아들 가졌다고 으스대면서 유세떨면서 본 부인 사라를 멸시하는 것, 이거 뭐 타고났죠. 어느 인간도 나는 아닙니다, 할 수가 없어요. 타고난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언약으로 일할 때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옛날에는 물로 심판한다. 우리는 “그 당시에 저는 빼줘야 됩니다.” 이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럴 잽이 못됩니다. 물로 심판받을 때 심판 다 받았어요. 노아도 마찬가지고 물로 심판받아야 되는데 방주 취지를 살리기 위한 용도로 노아를 건진 거예요. 언약을 위해서.

우리도 지옥 가야되는데 예수님이 천국 갔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뽑아서 그리스도 안에 구원시켜준 겁니다. 우리 문제가 아니에요, 아버지와 아들 문제이지. 우리는 그냥 걸려든 거예요.

구원은 어떻게 하는가? 이 한마디로 구원은 끝났어요. 뭐 나 혼자 일방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강제로 끌려들어간 거예요. 주께서 강제로 위에서 잡아당겨버려요. 강제입니다, 강제. 강제로 끌려들어갑니다.

강제란 자발적이 아니다 이 말이죠. 무슨 자발적이 있어요?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면 우리는 지옥가야 되지. 우리의 자발성과 주님의 강제 중 항상 누가 이긴다? 주님의 강제가 나의 자발성을 이기면서 구원의 길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전체 이야기에요.

멸시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하나님이 여기서 강제로 어떻게 하는가. 하갈과 사라의 운명을 잘 됐다, 둘을 전부다 끊어내 버려요. 갈라서게 딱 끊어내 버려요. 한쪽은 주님께서 강제로 구원하고 한쪽은 내어버려두고.

그렇게 할 때 그들을 강제로 끌어당기는 기준, 그건 아브라함 때는 잘 안 나타나죠. 물론 우리가 설명은 해요. 이삭을 바치는 쪽이 아브라함과 사라 쪽이다, 설명은 가능한데 보다 구체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53장 3절 보겠습니다.

이사야 53장 펼치면 저는 벌써 이거 펼칠 때부터... 손 보입니까? 부들부들 떱니다. 떠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빌립 집사하고 에디오피아 내시가 만났을 때 성경의 어느 대목부터 시작해서 전체로 잉크 퍼지듯이 확 성경해석을 다 풀이했는가. 바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사야 53장 이거에요. 성령이 이것 질문하게 했고 이 질문에 답변하면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세례 받고 구원받았어요.

2절부터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주님의 작전이죠. 주님의 작전입니다. 우리가 흥미롭고 당길 게 없는 거예요. 선악과처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지도 않아요. 선악과와 정반대입니다. 선악과는 아름답지만 생명나무는 아름답지 않아요.

아름다움은커녕 3절에 봅시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무슨 뜻이냐. 예수님을 자발적으로, 자발적으로 우리의 본성에 입각해서 자발적으로 예수님께 찾아 나올 사람은 의도적으로 단 한사람도 없게 만들었어요. 자발적으로. 구원받는 것은 강제입니다. 강제지, 자발적이 아니에요. 자발적으로 나올 수 없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조치를 하신 거예요.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했던 겁니다. 그러면 그분은 메시아는 구원자는 일단 인간세계에서 왕따 당하고 멸시받은 거죠. 따로 노는 거예요. 같이 함께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 멸시받는 메시아를 통해서 인간들은 어떤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태도를 보이든 간에 인간의 결심과 결정의 성격은 메시아하고 전혀 무관한 결정을 내렸다고 판정이 나버렸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혀 우리와 우리의 결정과 관련 없습니다. 일방적인 주님의 의지입니다. 이거 감격스러워야 돼요, 정말. 우리의 결심하고 아무 상관도 없어요. 우리의 각오하고 관계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결정한 거예요.

주님의 결정이 이 더럽고 더러운 내 안에까지 들어왔다는 것이 이게 놀랍고 신기할 지경이에요. 신기할 지경. 나를 잃어버리고 남의 평가를 잃어버리고 내 평가도 잃어버릴 정도로 신기해요, 이게. 왜 들어오십니까, 우리 집에. 이런 식이에요.

마치 삭개오가 자기 집에 오라 했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들어가겠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이야기했죠. “삭개오야,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 되겠다.” 나무 위에 있는 거 딱 쳐다보고. 지금 여리고에 가면 삭개오의 뽕나무가 이천 년 된 나무가 있답니다. 구라를 쳐도 참. 관광가려 하면 가겠죠. 그 소리 듣고 올라가고 싶었어요. 삭개오 옷도 팔고 다 팔아요, 거기. 그런데 올라간 나무가 한 나무가 아니고 여러 나무 돼요. 그러니까 어느 나무인지 몰라요, 지금. 우리가 봤던 그 나무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 데 가면 다른 나무 있고 그래요. 하여튼 둘 다 수령이 이천 년 됐다는데......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겠다. 그때부터 삭개오는 더 이상 자기가 홀로 살지 않습니다. 자기는 주님께 예속된 종이 되는 겁니다. 주인님이 찾아온 거예요. 주인님이 알아서 찾아온 거예요. 우리 집에. 이 안에. 사울의 딸 미갈의 집에, 돈만 아는 삭개오 집에 주님이 오신 거예요.

왜 그렇게 오시느냐. 너의 그 본능, 본질을 누가 이긴다? 나의 강제성이 이긴다는 것을 너를 통해서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너같이 고집 세고 너같이 너밖에 모르는 거. 내가 너를 기어이 데려갈게. “저는 고집이 굉장히 센데요.” 주께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너만 세냐? 다 세. 남보다 더 세다고 하지 마. 둘 다 다 아담의 후손들이야. 똑같은 인간들이야.” 똑같은 인간들인데 일방적으로 집에 오신 거예요.

구원이 너희에게 이르렀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구원이 너희에게 이르렀다. 내가 믿어서 쟁취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을 칭하여서 구원이에요. 예수님이 움직인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 움직여서 우리 집까지 들어와서 내 속까지 들어왔다. 내 속에 주님의 구원이 들어오신 거예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독하고 신나게 우리 자신을 주님의 안목으로 조롱 좀 하세요. 괜찮아요. 벌써 구원이 이르렀으니까 조롱해도 괜찮습니다. 조롱할 때 어떻게 조롱하라 했습니까? 또 다 잊어버렸죠.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세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조롱할 때. 나는 무슨 착한 일 있어서 주께서 오셨다는 것. 두 번째는 뭐라고 했습니까? 이거는 내 주님이야. 니 주님 아니야. 나의 주님, 나의 십자가야. 나 구원하려고 왔어. 이거하고 세 번째 마지막 뭐라고 했습니까? 이제부터 구원은 내가 관리해. 내 결심과 내 열심으로 들어온 구원은 내가 관리한다. 이 세 가지.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첫째, 뭔가 의미 있는 착한 일을 했을 것이다. 두 번째, 내 양파야. 내 구원보다 기억하기 쉬우니까 내 양파라 하면 돼요. 이건 내가 착한 일한 내 양파야. 세 번째는, 이제부터 구원 관리는 누가 한다? 내가 열심을 내서 내가 한다. 라고 했던 나를 이렇게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롱의 드라마의 끝은 늘 그렇게 끝나시기 바랍니다. 실컷 나를 조롱하고 놀리면서 나를 그렇게 기만하면서 끝은 그렇게 다 이루었다, 로 끝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이사야 53장이에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유명한 구절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그 다음에 뭡니까? 아... 그거 놓치면 안돼요, 그 다음 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아무리 침묵이지만 침묵의 수도원이지만 이야기해보세요. 그다음 뭡니까? “제 갈 길”

아까 내 양파죠. 제 갈 길. 24시간 자기밖에 몰라요, 몰라. 주님 생각 안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거예요. 제 갈 길. 이게 양의 양다움이에요. 이거 알았으니까 마음 놓고 이제 우리 자신을 놀려먹어도 괜찮죠? 매일 놀리세요. 니가 예수를 믿어? 내가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 이런 식으로. 너밖에 모르는 인간이 무슨 예수를 믿어? 마음껏 놀리세요. 실컷 놀리세요. 어차피 감사할 걸.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하니까 마음껏 놀리란 말이죠.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그릇 행하여할 때는 나는 나쁜 짓 안했는지 여기까지 되죠. 그다음에 그릇 행한 게 뭐냐 하면 제 갈 길 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그릇 행하는 거예요. 모르는 영어지만 여기서 영어하나 써야 되겠죠. 크게 쓰겠습니다. 제 갈 길, 영어로 뭡니까? My way. 프랑크 시나트라 노래 .

나가 없어요. 주님의 길이지, 내 길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조롱할 때는 나는 나밖에 모른다고 조롱하세요. 어차피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에요, 해프닝. 나중에 싱긋이 웃죠. 그럼 내가 나한테 얘기해요. 벌써 밤 10시 넘었다. 잘 때 되었는데 이제 조롱 고만 해라. 우리 같이 오늘 웃고 나머지는 또 내일 하자. 이런 식으로 그렇게 좋게 자기하고 화해하시면 돼요. 조롱 많이 했지? 많이 뜯어먹었지. 오늘 그냥 자자, 그만. 자고 내일 또 으싸으싸하자. 내일 또 시작하면 또 시작할 거리를 주셔요.

그다음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갑자기 강제로 누가 투입됩니까? 여호와께서 누구를 파견시켰어요? 예수님을 파견시켰죠. 그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기위한 장소로서 삭개오 집이, 또 우리 집이, 그리고 베드로가, 베드로의 길다란 신장이 긴 다리가, 주께서 베드로를 이용하신 겁니다. 사도로서.

그 사도가 전한 내용은 너, 나를 무시하고 이미 확정된 사실을 그냥 갔다 거기다가 깔아버리죠. 너는 믿든 안 믿든 내 소관 아니고 이런 식으로 모든 스케줄은 잡혀있다. 그냥 밀어버려요. 그냥 밀어버려요. 이게 베드로가 바로 변화산에서 영광 중에 봤던, 본인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주님이 해같이 빛났던... 그렇게 해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부끄럽게 만들 듯이 똑같이 부끄럽게 만드는 계시를 장차 이제 불바다 된다고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뭐 신나죠. 이것보다 속 시원하고 신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정말 신나죠.

이제 신약에 한번 들어와 봅시다. 신약에 들어와서 고린도전서 1장 28절,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그다음에 뭡니까? “택하사 있는 것들을 패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까 그 다윗이 한 이야기하고 맥락이 똑같죠. 미갈은 하나님 앞에 서질 않았고 남들 앞에 섰어요. 그러나 다윗은 본인이 언약맨이니까 언약 사람이니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 육신, 더러운 육신 가지고 뭘 할 것인가를 생각한 겁니다.

남들한테 의논할 필요 있다, 없다? 없어요. 여보, 나 춤추려고 하는데 옷 어디까지 벗으면 되나? 아내하고 의논할 필요 없어요. 아내가 주인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시킨 거예요. 남들이 여러분을 시키지 않도록 하세요. 제가 주일 낮 설교 때 했잖아요. 죽은 자의 명령을 들으라고. 산 자의 명령을 듣지 말고 죽은 자의 명령과 지시를 받으세요. 그게 언약입니다. 언약 설명할 때 그렇게 설명되는 거예요.

이제 정리 한번 해보겠습니다. 시편 22편 6절에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언약 사람 다윗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었습니까? 벌레로 다뤘고 사람 취급 못 받고 사람에게 훼방거리로 만들었고 백성의 조롱거리로 만들었죠.

노아는 그냥 방주를 뚝딱뚝딱 제작해서 잣나무로 만들면 돼요. 그러나 다윗의 언약은 다윗의 몸으로서 언약을 만들어내야 돼요. 주께서 그런 식으로 만드는 겁니다. 이 다윗이 만드는 방식이 시편이고 시편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그대로 말씀을 이루어서 십자가에서 이런 수모를 당하시면서 돌아가셨죠. 그게 새 언약이죠.

그러면 새 언약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구원이 되는 거예요. 새 언약이 들어와버리면. 우리는 벌레 되기 싫고 난 사람 대우받고 싶고 남한테 조롱받기 싫어요. 그것과 새로 우리 안에 들어오는 주님의 조롱받으심과 같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들어와서 우리가 나는 아니요 예수님입니다, 라고 말하게 만드는 그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정리하면 베드로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 복음을 말씀을 듣게 되면 필히 너희들은 세상으로부터 기롱, 놀림의 대상이 될 것이다.” 라고 아주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 본인이 그렇게 사도로서 경험했고 베드로와 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도 베드로와 똑같은 그러한 대우를 주님 떠나버린 이 세상에서 그대로 받게 되어 있어요.

이제 총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중요한 것 다시 한번 쓰겠어요. 말로 적을게요. 너무 중요해서. 베드로가 둘째 편지를 통해서 전달한 내용은 세 자로 이야기하면 이겁니다.【끝까지】 또는【끝까지 가는 예언】 인간의 어떤 훼방이나 방해나 조롱에도 굴하지 않고 이미 끝까지 가요. 그럼 이건 뭐냐 하면 확정나버린 사실이에요. 이게 바로 현실이 되는 겁니다. 이게 현실이 되는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 인간은 이미 선악적인 구원관을 갖고 있죠, 이거 받아들이겠습니까? 못 받아들이죠. 뭔가 착한 일이 있어야 되고 이건 내 구원이어야 되고 그리고 내가 관리해야 되기 때문에 ‘끝까지’라는 것이 보장될 수가 없어요. 열심히 하면 몰라, 가능성 있을지도. 이렇게 돼요.

그러나 이미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너하고 상관없이 끝까지 가요. 끝까지 가는데 여기에 뭐가 따라붙어요? 끝까지 밀어붙이면 주변에서 갑자기 있는 귀신들이 뭐라고 해요? 조롱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끝까지 가는 복음이 얼마나 귀하냐 이 말입니다. 이 끝까지 가는 이것.

끝까지 간다는 것은...... 진짜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나와 무엇을 고려하지 않는다? 나와 남을 고려하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그 계시하신 일만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나와 남을 고려하지 않아요.

그래서 계시가 계시답게 우리에게 발현이 되게 되면 무엇이 잘립니까? 나도 잘려야 되고 남도 그냥 잘려야 되죠. 나도 잘리고 남도 잘리는. 거기에 대해서 이쪽 세상은 드디어 나와 남을 잘라내니까 세상은 가만있지 않죠. 발악을 하죠. 남들이 나보고 조롱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너는 왜 이상하게 살아가느냐. 너는 배알도 없냐?

주님이 들었던 그 조롱과 멸시를 희한하게 같은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똑같이 느껴지는 느낌 같은 느낌, 진짜 똑같은 느낌을 베드로가 갖고 오늘날 우리가 지금 그 길로 가도록 구원이 우리 속에 강제로 쑥 들어왔습니다. 그냥 쓱 들어와버린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갔는지. 독하디 독한 나 지킴, 나 느낌... 주여 이걸 완전히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진행하는 끝까지 가는 계시. 변화산의 그 주님의 영광스러움, 우리가 눈을 들어 그것이 진짜 하늘인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220915b 베드로후서3장 3절(자기 조롱)-이 근호 목사.hwp (99.0K), Dow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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