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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8 18:41:00 조회 : 64         
10강-디모데전서 2장 7-10절(당당한 시시함)220918 - 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180.11)
10강-디모데전서 2장 7-10절(당당한 시시함)220918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2장 7-10절입니다.

디모데전서 2:7-10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사도가 스스로 이르기를 “자기가 사도로 지음을 받았다.” 그리고 7절에 보게 되면 “나는 이방인의 스승이다.” 스승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누구의 스승될 수 있느냐? 그 점이 논쟁거리가 되겠지요. ‘같은 죄인 주제에 뭐 잘났다고 가르치느냐? 가르치는 것은 성령이 가르치고 주님이 가르쳐야지 네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누굴 가르치겠는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도가 무엇과 관련된 사람으로 사도가 되었느냐 하면, 이 계시, 성경 말씀의 완결과 관련된 임시적 지위가 사도입니다. 사도가 있기 전까지는 성경이 완결되지 않았어요. 열두 사도가, 사도바울이 나타나야 비로소 사도가 죽고 난 뒤에 이 성경 말씀이 완결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요한계시록 끝내고 그걸로 성경도 같이 끝났습니다. “내가 너에게 이야기한 성경외에 더 다른 것을 보태거나 빼지 말라 그러면 생명나무 천국에서 널 빼버릴 것이다.” 했지요.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그 정도로 사도의 지위는 본인이 요구하거나 원해서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이 땅에 사도를 두셨습니다. 그 두신 이유가, 예수님이 왔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와 같은 인간으로 봤지요. 그래서 무시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얼마나 적대적인 그러한 공간인 것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는 이 시대에, 예수님 재림하기 이전에 이 시대에는 사도들이 그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사도들에게 박해했을 때 그게 계시가 된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예수님을 공격한 것만 계시가 아닙니다. 사도의 말한 것을 가지고 공격하는 것도 역시 주님을 공격하는 바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성경입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폐하고 이제는 성경만 남아 있다.(고전 13:8)

그렇다면 그 이후에 오늘날 이 시대에는 성경말씀 안에서 모든 것을 주님께서 반복적으로, 예수님과 사도로 했던 이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적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골라내십니다. 말씀은, 구원은 들음에서 오고 그 들음의 말씀은 오직 주님께로부터 나온다.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말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0)

구원은 있어요. 있는데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 말씀의 제작에 있어서 사도가 관여했습니다. 사도가 스승이 된다는 이 말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일임하지는 않았어요. 예수님이 여전히 스승입니다. 마태복음 23장 8-11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랍비는 스승이라는 뜻이에요.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이 대목 마태복음 23장 8절, 특히 9절, 10절의 이야기가 교인들에게 성도들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교주개념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너희한테 구원 갖다 줬잖아. 그러니까 너희는 나한테 다 바쳐야지.” 이런 교주개념이 튀어나올 때 성경을 잘 모르는 교인들은 이상하기도 한데 반박할 수도 없고, 아마추어가 되어서 프로가 이야기하니까 맞는 것 같기는 한데…….

그러니 이런 성경 구절 같은 것은 교회에서 안 가르쳐 줘요. 교회 기둥에 이런 것 붙이지 않아요. 선지자를 섬겨라, 이런 것이나 붙이지 “어느 누구도 지도자 아니고 이 땅에는 아비가 없다.”는 그것을 이야기를 안 해줘요. 그러니까 그것을 목사책임이라 하지 말고 교인 본인도 책임이 큽니다. 시키는 대로 한다고 구원되는 것 아니거든요. 시키려면 성령님이 시켜야지 뭐 사람이 시켜서 되겠어요? 아닌 것은 아닌 거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자기를 스승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이 성경 말씀과 관련한 직능을 그대로 실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요즘 시대 입장에서 보면 바보지요.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게 진짜 현실이라고 믿게 하는 이 바보 만드는 스승이 누구냐? 사도바울이에요.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3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활동한다.

사도바울이 알아요. 성경이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고,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고 그냥 누구의자기 나름대로의 경험에 불과하지 이게 다가 아니다, 라는 그런 생각들이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너무 잘 알아요.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살해당했으니까 이 세상이 보통 악한 세상이겠습니까? 그걸 알고 미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내 말을 들을 때 ‘아, 저건 일개 견해야. 저건 일개 의견에 불과해.’라고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로 들으니 진실로 그러하다.”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말씀대로만 돌아간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이것은 바보지요. 바보등신이지요. 왜 다른 의견은 안 듣느냐는 말이지요. 왜 성경 말씀만 고집하느냐는 말이지요. 심지어 교인들끼리 이야기해도 성경말씀은, “성경말씀은 됐고 그거 빼고 이야기하자.” 현실은 성경말씀대로 돌아가고 있는데 그거 빼면 그러면 가상이나 환상 이야기나 하자는 이야기에요?

사도바울을 스승으로 거부한다는 말은 나는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안 받겠다는, 그래서 바보 되지 않고 똑똑한 사람 되겠다는 그런 주장에 불과한 겁니다. 이 세상에 정말 무서운 일은요, 진리를 이야기해줘도, 진리가 밝혀져도 그 진리가 덮여버리는 더 큰 세력을 사람들이 요청하고 있다는 거예요.

진리보다 더 큰 거짓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세대에요.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아서 ‘야, 미쳤지. 성경말씀 이걸 왜 몰랐을까? 이걸 전해야 되겠다.’라고 전하는 순간 듣는 사람은 ‘더 큰 다른 의견 없나?’ 이렇게 돼요. 누가복음 24장 5, 6절에 보면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무덤에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여자 둘이 예수님의 무덤이 걱정되어서 가 봤어요.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여기 두 사람, 4절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이 두 사람은 천사가 나타난 거지요. 그래서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6절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참, 이게, 이게 사람의 말로 들리십니까? 이게 주의 말씀이에요. 어릴 적 철없는 남자애들, 한참 까불고 촐랑대는 애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을 개야 될텐데, 두툼한 솜이불 있잖아요, 그걸 그대로 펴놓고 거기서 철없는 형제들 어린 삼촌들까지 막 거기서 장난칩니다. 이불을 볼록하게 산처럼 만들어놓으면 산봉우리가 되고 또 골짜기도 되거든요. 거기서 작은 이불로 형상화된 지형으로 만들고 거기서 총싸움하고 전쟁놀이 한다고요. “두두두……, 으아악!” 자기들끼리 뒹굴고 재미있게 논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 아침 다 해놓은 엄마 입장에서는 그 노는 게 그야말로 애 노는 거지요. 시시하지요. 문 활짝 열고 “밥 먹으로 온나! 그만 까불고.” 이게 뭐냐 하면, 지금 왜 너희는 산자는 죽은 자에게서 찾느냐 그 말이에요. 인간들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 까불고 찢고 고민하고 근심하는 것은 전부 다 애들이 이불 펴놓고 자기 딴에 자기 세계에서 그게 소꿉놀이하고 전쟁놀이 하는 것 밖에 안 돼요.

그래서 인간사 시시해요. 전부 다! 굉장히 심각해도 다 시시해요. 시시한 것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시시한 인생이 끝날 때 어디서 끝나는가? 화장터 보면 굴뚝 있거든요. 거기 그 연기에서 내 연기 찾으세요. 결국 시시하게 이불 위에서 까불고 찢고 하다가 나중에 죽으면 화장터 연기에 섞여서 같이 날아가요.

인생 뭡니까? 인생 시시하게 태어나서 시시하게 살다가 시시하게 죽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기 딴엔 소꿉놀이하는 거예요. 그게 뭐가 그렇게 심각하고 뭐가 그게 대단합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뭐냐? 대단함에서 시시함으로 옮겨지는 것을 가지고 구원이라고 합니다. 뭐가 고민이고 짜증을 왜 냅니까? 시시하게 살아놓고 시시한 일로 보내면서 ‘아, 고민이다.’ 뭘 고민이에요? 고민할 게 뭐가 있습니까!

서울강의에서 제가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우산을 드느냐? 우산을 드니까 우산의 그 까만 천이 그게 자기 딴엔 하늘이에요. 그래서 사람마다 다 자기 우산을 들고 있으니까 사람마다 하늘이 다 달라요. 그런데 우산을 한번 접어보세요. 하늘은 따로 있어요. 그러나 우산 속은 나만의 하늘이에요, 나만의 하늘. 그 나만의 하늘, 우산 들고 있으면 비닐우산이라도 짐이 되고 힘들어요.

내 우산 거두세요. 그냥 내 우산, 내 주장 거두시고 사람의 말 듣지 마세요. 그거 사람의 말은 현실과 괴리됩니다.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현실이 이루어지지 누구 주장, 누구 주장가지고 되는 게 아니에요. 어차피 살다가 죽으면, 화장터에 가면 연기에 섞여서, 그 조상들 연기에 같이 섞여서 가요. 이게 우리의 아버지의 연기인지 몰라요. 다 똑같아요.

하늘이 다 같은 하늘입니다. 남하고 비교해서 자기 우월함, 우수함, 그거 생각하지 마세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 하는 노래 있잖아요. 전부 다 같은 하늘입니다. 똑같은 하늘이요. 너도 시시하고 나도 시시해요. 대통령 떨어져도 시시하고 되어도 시시하고요.

남자와 여자라는 것은, 오늘 본문에 남자 여자 나오지만 남자 여자라 하는 것은 임시조치입니다. 부활의 날에, 영광스러운 날에 그때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습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조금만! ‘여자의 일생’ 아는데 여자의 일생 아는데 조금 참으세요. 그때는 남자도 여자도 없고 천사와 같다(마 22:30)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의 말씀을 가지고 주님께서 계시 차원에서 사도가 너희를 다뤄야겠다는 거예요. 내가 너희 스승으로 가서 너희들이 나한테 반항하고 대들 때 그게 하나의 계시가 되거든요. 하나님의 계시 만들기 작업이에요. 대단함을 사도는 지금 시시함으로 바꾸려고 하는데 여기서 예상 못할 강력한 반발이 나옵니다. 대단한 반발이 나오지요.

원래 인간은 그냥 화장터 연기 속으로 사라진다고 했지만 야고보서 4장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있다가도 없어지는 물방울, 안개라 했어요.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안개나 연기나 마찬가지겠지요. 입자물리학에서요, 전자나 광자는 질량이 없어요. 질량이 없는데도 힘을 발휘하는 것은 가속도 때문에 여분의 힘이 발생됩니다.

그러니까 이게 아무것도 아닌데 뭔가 분주하게 싸대고 설치니까 자기가 뭐 긴가, 자기가 뭔가 대단한 것으로 여겨요. 벌써 인간이 가짜인간이죠. 뭔가 잘못됐지요. 자기의 무게가 제로(0)인데 그냥 연기고 안개 질량이 없어요. 자체적인 내 것이 없다 그 말이지요. 없는데 자꾸 설치니까 그게 마치 자기가 설쳐서 얻은 그걸 내 것이라고 여겨서 그 소유성을 지키려고 하면서 자기가 갑자기 시시한 존재가 아니라 대단한 존재가 되고 말았던 거예요.

대단한 존재가 되어버리면 여기에 부작용이 뭐냐? 상처가 생겨요. 인생은 원래 없는 건데 인생이 있다고 여길 때 그 뒤에 나오는 게 상처에요. 인생은 상처뿐입니다. 인생은 상처뿐이에요. 서로 찢고 싸우고 네가 뭔데 내 것 건드리냐, 이렇게 또 상처받아요. 복수하면서 상처받고, 맞으면서 상처받고, 때리면서 상처받고, 때리는 사람도 아프고, 맞는 사람도 아프고.

본인의 질량은 없어요. 무게는 없는데 인간들은 그 순간 궁극적인 나의 최후의 모습을 미리 간파하지를 못해요. 그게 불가능해요. 자기가 죽는 것은 알지만 그 죽는 순간을 미리 당겨서 지금 순간으로 옮겨놓을 재주가 인간에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에 안 죽었으니까 남는 것은 상처뿐이에요. 인생은 상처투성이에요. 짜증을 남에게 퍼부을 수밖에 없지요. 상처가 생겼으니까.

사도바울은 남녀 사이에 갈등과 상처를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하고 있어요. 그러면 도대체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은 뭐냐? 하나님의 말씀의 대책은 뭐냐?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 이전의 존재로 돌리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꾸 자기가 자기를 낳아요. 자기가 자기를 출생시켜요. 발정해서 똑 닮은 자기 모습을 상상해서 계속해서 번식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걸 절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절단시키는 것이 율법인데요. 그 율법이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신체에 대한 할례를 신약에서는 마음의 할례(롬 2:29)로 전환시킵니다. 자, 할례가 뭐냐? 끊어내는 거예요. 신체에서 남성의 생식기 일부를 끊어냈다고 해서 사람이 새사람 되거나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구약 유대인을 통해서 증명이 되었어요. 확인이 되었어요.

신약에서는 뭐냐? 뭘 끊어내느냐? 자기 마음을 끊어버려야 돼요. 사도가 스승으로서 작동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끊어버리는 겁니다. 끊는데 뭐냐? 내가 원하는 나의 이상형을, ‘내가 기어이 만들어내고야 만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날마다 나를 새롭게 내가 만들어내겠다.’ 그 과정을 절단 내는 거예요. 잘라버리는 겁니다.

그 잘라버릴때에 사도가 계시하는 것은 뭐냐? 사도가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 그때를 시작점으로 해서 내가 예수님 만나서 시작된 그 성도의 삶을 너희들도 똑같이 전철을 밟아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마치 모세를 물에서 건져냄과 같이 모세를 따르는 이스라엘도 단체로 홍해 물에서 똑같이 건너야 될 운명을 공유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면 사도 본인은 뭐냐? 우리가 지난번에 이야기했어요. 사도는 죄인 중에 괴수라 했습니다. 이것은 사도가 공부만 해서 된 것이 아니에요. 부활하신 예수님, 그야말로 산자를 죽은 자에서 찾을 수 없고 지금도 활동을 활발하게 하시는 그 부활하신 주님이 사도에게 찾아왔을 때에 사도가 감지한 것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였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핍박한 괴수였다는 겁니다. 그게 시작점이에요.

시작점을 영어로 하면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의미가 확연하게 반대에요. 하나는 start가 있고 하나는 begin이 있어요. start라 하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새롭게 출발하는 것,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을 영어로 start라 합니다. 일본 말로 “요이 땅” 하지요. 움직이지 않는 것에서 움직임을 주목하는 것이 start고 영어의 begin이라는 것은 이미 목표를 다 알고 있어요. 확정되어 있어요.

확정되어 있는데, 그 확정되기까지 여러 가지 단계가 있고 과정이 있는데 그 과정의 첫 번째 과정, 확정된 것의 방향, 이미 고정된 방향을 정해놓고 가는 것, 그걸 begin이라 해요. begin. begin 뒤에 ‘er’을 붙이면 beginner, 초보자란 뜻입니다. 이미 목적에 초점이 있어요. begin은요.

그런데 start는 뭐냐 하면, 목적은 가봐야 아는 거고 지금 내가 움직였다는데 의의가 있다는 거예요. 사도는 어느 선상이냐 하면, start시키는게 아닙니다. begin시키는 거예요. 이미 도달할 것을 다 알고 그 출발선상에 딱 서게 하는 거예요. 초보자로서 여기에 스승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사실은 스승이 필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겠지요.

히브리서 5장 12절-14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여기 ‘초보’라는 말이 나오지요.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이미 장성한 자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 복음이며 무엇이 복음 아닌가를 그동안 자기 몸이 계시화 되어서 그걸 경험하지만 초보는 모호하다는 거예요. 애매하고 모호하다는 거예요. 흐릿하다는 거예요. 그냥 더듬어보는 거예요. 왜 beginner니까, 초보자니까.

그러니까 초보자니까 스승으로서의 사도바울이 해야 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모호하니까, 어느 것이 잘못이고 옳은지를 몰라요, 어느 것이 비진리고 진리인지 모르니까 스승은, 사도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 오류를 지적하면서 오류의 가는 길로 이끄는 사람이 스승입니다. 오류의 길, 잘못의 길을 가야 거기에 진리가 기다리고 있어요.

계속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오류, 잘못이 아닌 경우가 없게 만들어버려요. 사도가. 물론 그 환경은 주님이 조성하지요. “이게 잘못이야. 이게 지금 네가 복음 오해한 거야. 곡해한 거야. 그거 인생 잘못 산 거야.” 그러면 사도가 오류라고 하는 그 기준은 뭐냐? 그 기준은 이미 사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최종상태, 골인 상태, 마지막 상태에 인간은 어떤 인생을 살아도 그것은 시답지 않고 시시한 애들 소꿉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다 알고 있는 거예요. 심각할 것도 없고 진지할 것도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이 초보자들은 숨고, 피하고, 도망치고, 내빼고, 좀 복음 안다고 교회 안 나오고, 복음 안 듣고, 성경 안 보고, 삐지고요, 자기 몸을 숨긴들 말씀의 세계 안에서 숨을 데가 있습니까? 뭐 대단하다고 숨습니까? 뭐 대단하다고 피합니까? 다른 견해, 다른 견해는 없어요. 다른 견해는 똑같은 죽은 인간들끼리의 견해에요. 죽었다가 살아난 죽은 자들 속에 있는 견해가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그분의 말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예수님을 핵심으로 한 그 말씀이에요, 그 말씀!

그래서 이 과정을 달리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비언약에서 언약으로 이동한다. 비언약에서 언약으로 이동한다. 사도바울은, 너희들이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없고, 언약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이 뭐냐? 드라마 보게 되면 범인이 피 흘리면서 가게 되면 형사는 그 범인 찾기 쉬워요. 그 핏자국만 따라가면 되잖아요. 주님이 가신 그 최종 골인 지점은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어요. 그 피를 따라가면 돼요. 그게 핵심내용입니다. 피 따라가는 것. 그 피 앞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삶은 얼마나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고, 시시하고, 장난도 그런 장난이 없지요. 그 작업을 처음부터, 이제는 하나님의 계시로 언약 속에 없던 사람 언약 속에 집어넣어 놓고 그 언약대로 따라가게 합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시작이 창세기에 나오지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과 선악과 따먹었다고 되어 있어요. 창세기 3장에 선악과를 따먹었다고요. 선악과는 누구를 위한 거냐 하면 하나님 거예요. 하나님 것을 인간이 따먹었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따먹은 이 모든 인간들이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아주 등짝을 때려버립니다.

“도대체 뭘 먹은 거야? 이게 얼마나 처먹은 거야?” 하고 등짝을 때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웩!” 하고, 아침부터 죄송합니다만, 먹었던 것을 다 토해내야 되지요. 음식을 게워내도록 등짝을 두드리는 겁니다. 두드리니까 거기서 뭐가 나오냐? 계속 매일같이 뭐가 나오느냐? 나 잘났다, 나 의롭다, 나 의인이다, 나 대단하다, 나는 독자적으로 나의 삶을 내 인생을 스스로 꾸려나갈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나는 남한테 화내고 짜증 내고 성낼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이런 뭐 악마가 집어넣은 음식물이 나오는 거예요.

이걸 언제까지 하느냐? 죽을 때까지 등짝을 때리는 겁니다. 복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시시한 존재인데 복음, 주의 말씀 안 들으면 갑자기 대단한 존재로 바뀌어버려요. 또 뭘 먹었어요. 안에 또 먹었어요.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도 자기 것이고 생명나무도 자기 것이에요. 그러면 인간에게 도둑질당해서 빼앗긴 선악과를 끄집어내야 될 것 아닙니까? 생명 나무와 선악과 끄집어내서 그것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목적입니다. 왜? 자기 거니까, 되돌려 받아야 되니까.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끄집어내서 하나로 연결시키면 주의 일은 끝납니다. 그 작업을 누가 하느냐? 그 작업을 우리 예수님이 하셔야 되는데 그 이유가 예수님이 언약적 사람이에요. 이 작업을 예수님이 하신다고 말은 쉽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하신다, 라는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창세기 3장 8, 9절부터 우리가 시작을 해야 돼요. 거기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시작한다고 해서 성경 다 본다는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창세기 3장 8절, 9절에 보면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뭐 따먹은 죄인입장에서 숨는 게 주특기인 모양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어디 있느냐. 시작은 이거예요. 불러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아, 네가 어디 있지?” 불러냅니다.

그래놓고 끝은 어디 있느냐? 끝은 시편 22편에 나옵니다. 1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작을 “아담아, 어디 있느냐.” 시작했다가 그렇게 불러낸 자를 하나님께서는 절단 내 버립니다. 끊어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택한 자를 버려버리지요.

그러니까 이게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할 때 이게 구원해주려고 시작한 거지요. 그런데 구원이 시작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작은 뭐냐?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가 그게 원래 시작점이에요. 버림받았다는 것은 이미 그 존재가 무효가 된 거예요. 존재 이전의 존재부터 출발하려면 심판부터 출발해야 돼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게 십자가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에게 일어난 십자가가 철딱서니 없는 인간의 구원의 시작이에요. 구원의 begin입니다. 이걸 젖을 먹는 어린아이 초보한테는 이게 어려운 이야기에요. 왜? 자기 존재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그동안 내 인생은 내가 건사해 왔어요. 내가 간직해서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복음은 아예 우리를 이미 존재했다는 이유 때문에 이미 우리를 인간 취급하지 않습니다. 너는 왜 마지막을 거쳐서 안 왔느냐고 우리에게 질책하기 때문에 그래요. 네가 진짜 인간이라면 내가 원하는 너의 마지막 자리를 경유해서 와야지 그냥 태어났다고 낯짝 들이대지 말고 ‘내가 죽어야 되는데, 없어야 되는데 왜 있습니까?’를 이야기하려면 내가 존재하기 이전의 사건을 경유해서와야 돼요.

그 사건이 우리는 버림 받아야 될 사건부터 출발하게 하는 겁니다. 그게 start가 아니고, 초보예요, begin입니다. 이 사실은 사도행전 8장에 나옵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이것부터 시작하고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 22편 1절에 나오는 그 말씀이나 바로 마태복음 26장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그 말씀이나 똑같은 말씀이에요. 십자가에서 했던 그 말씀.

사도행전 8장 32절에 보면 스승이 한 명 나옵니다. 여기서 빌립집사가 스승인데 스승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강제로 어떤 낯선 곳에 가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사막에서 모래바람 날리면서 무슨 마차가 한 대 오는 거예요. 마차가 떡 오고 보니까 진짜 우발성이지요, 우연히 만난 사건 속에서 둘이 벌판에서 만났어요.

만나서 이야기지요. “어디 가십니까?” 이런 이야기하다가 그 사람이 대뜸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 사람이 에디오피아 고급 관리인데요, 그 사람이 마차 타고 가면서 이사야의 글을 읽었다고 되어 있어요. 28절에. 이사야의 글을 읽으면서 이렇게 합니다. 내가 이 글을 읽고 있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를 도대체 모르겠고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군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ㄱ래서 “이게 무슨 구절입니까?” 32-34절에 보니까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라고 물은 거예요. 누구입니까.

구원의 작업을 예수님만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 아는 상태에서 불쑥 이야기 하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는 누군가가 오셔서 인간이 못하는 것, 버림받아야 될 인간은 그 버림받은 속에서 새로운 피조물 만드는 그 작업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선을 해줘요. 해가지고 어느 대목이냐? 이사야 53장 대목부터 시작합니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게 바로 진리에요, 이게! 이게 진리입니다. 성경을 떠날 수가 없어요. 말씀을 떠날 수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찾아왔던 주님, 계시받아서 하나님이 찾아왔다는 그거, 하나님은 계시가 아니에요. 시작을 꿈속에 하나님이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는 것처럼 ‘아무개야’ 이렇게 구원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begin, 시작은 내가 계시받은 것, 내가 주님 본 것, 그게 아니고 바로 십자가부터, 바로 예수님부터 출발을 해야 돼요. 예수님이 우리 대행자에요. 모든 팔자의 대행자, 인생의 대행자입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이 스승이 되었다는 것은 나의 상처로부터 주님의 상처로의 옮김, 그게 바로 구원이에요. 맨날 상처받았대. 맨날 상처받았대요. 우리는 상처 때문에 못 살겠대. 그 상처를 왜 당신이 갖고 있느냐는 말이지요. 그건 존재 이후의 상처지 존재 이전의 상처는 당신 몫이 아니고 주님 몫이에요. 상처를 받아도 주님이 받지 우리가 받은 그 상처는 소꿉놀이에 불과합니다.

그 둘, 찾아오심과 버림받음이 예수님의 모든 행적 가운데서 이게 하나로 완성이 됩니다. 완성이 되면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야기가, 이 세대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이 세대 인간들이 군집되어 있는, 인간들이 통용되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사야 53장 6절처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는 그 내용을 인간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진리를 모르지요. 진리를 모르니까 거짓이 진리를 완전히 질식하듯이 온 학교 교육이나 사회나 매스컴을 통해서 질식시킨다. 그러니까 이 복음을 질식시키는데 악마는 총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눈 돌리지 말라고. 그런데 사도는 주님이 보낸 스승으로서 총력을 다해서 “너는 네가 망하고 죽는 이유를 찾아라.” 어떻게? <헨델과 그레텔> 동화에서 계모가 쫓아내니까 애가 집에 다시 돌아오려고 돌멩이 던져놓았다가 그 돌멩이 따라 돌아가듯이 숨겨진 하늘에서 오신 그 하나님의 진리가, 오직 진리를 숨막히게, 진리를 못 듣게 하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 예수님의 가느다란 핏자국만 똑, 똑, 똑, 떨어지지요.

우리가 그 핏자국 볼 마음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중간에 등짝을 때리는 거예요. “이게 도대체 뭘 처먹은 거야? 안에 뭐가 들었어?” 켁켁, 해서 보니까 선악과 따먹고, 선악과는 뭐냐? 선과 악에 대해서 나도 좀 압니다, 나도 양심대로 삽니다, 이런 짓 하고 있다고요. 그걸 등짝을 패 가지고 그걸 토하게 만들어요. “시시한 게 어디서 시시한 것도 모르고 대단한 것처럼!”

사람이 진리가 없으면 억지에요. 억지면 해답도 없으면서 그저 인간끼리 서로 동정하고 사랑하고 난리도 아니지요. 그거 둘 다 같은 편입니다. 인간의 동정, 애정, 편들어줌, 믿지 마세요. 그거 둘 다 같은 화장터, 연기가 같은 연기끼리 도와줘요. 바람에 다 날아가 버리는데요.

어떤 서부영화 끝 장면에 이런 게 있어요. 둘이 원수지간에 만나면 으르렁거리는데 ‘너 나중에 만나면 끝장낸다’ 하는 두 원수지간인데 그 남자가, 아주 험악한 인상을 가진 남자가 주인공하고 둘이 만났어요. 만나서 최후의 결투, 총 버리고 주먹다짐을 합니다. 서로 치고 때리고 하니까 거기에 한 남자의 애인이 둘을 한심스럽게 보다가 권총을 들고 공중에 대고 꽝! 쐈어요. 둘이 한참 붙들고 치고 하다가 총소리 나니까 둘이 붙든 채로 쳐다보거든요.

여자가 하는 말이 아주 가관입니다. “안 그래도 너희 둘이 사랑하는 거 다 알거든! 둘이 좋아하는 거 다 알아. 치워라! 시답지 않은 그 결투.” 이거 비슷하게 패러디 된 영화가 안성기하고 박중훈이 나왔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탄광촌에서 비올 때 비 주르륵 맞으면서 둘이 주먹 가지고 이렇게 하는 장면이 있어요.

남자들이 남자 기개를 드러내고 멋있게 인생 산다고 주먹다짐하고 서로 그러는데 아이고, 둘 다 같은 편입니다. 아무 무의미한 거예요. 인생은 백날 성공과 출세해봐야, 그냥 백날 달려봐야 놀이터에서 애들이 소방차 운전할 때 그 회전목마 있잖아요. 실컷 시간 지나서 돌았는데 맨 그 자리에서 뺑뺑이 돈 것밖에 안 돼요. 애들이야 소방차니까 좋~다고 하지요. 하지만 인생 백날 살아봐야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어요. 다 소용없는 겁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남자 여자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한 것은 뭐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 전 인간이 존재하기 전의 사건,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 따먹기 전에 하나님이 원래 하나님의 것이었던 것을 되찾는 그 작업에 인간이 거기에 휘말려 들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양보 없이 하나님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되찾아서 완성시키는 것이 주의 뜻이다. 지금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러면 남자 여자는 오늘 본문에서 왜 구분했는가? 이게 계시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다시 보시면 남자들은 이렇게 하고 여자들은 이렇게 하라. 남녀는 구분 지어 놨어요. 8절에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9절에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소박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염치와 정절이라 하는 것은 나대지 말고 자기가 실수할 수 있고 못날 수 있고 늘 어설플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렇게 남자 여자를 따로 구분시킨 이유는, 제가 아까 이야기한 대로 남녀구분은 한시적이고 이 땅에 육신으로 있는 한 조치기 때문에 좀 여자들이 남자한테 서러움 받더라도 조금만 참으세요. 연기가 되어서 나중에 천당 가면 그런 것 없습니다. 자, 남녀 구분을 왜 했는가? 그것은 여자가 먼저 악마와 근접해서 여자 쪽에서 악행을 했다(딤전 2:14)는 그 언약 사건을 남녀를 통해서 계속해서 그것을 반복시키기 위함이에요. 계시화시키기 위해서.

그러니까 남자 여자 자체가 내 인생 어떻게 살까, 나는 얼마나 행복하냐, 가 아니라 주께서 그 남자 여자 하나조차도 계시의 일부로 사용하는 거예요. 계시의 일부로. 인생이라 하는 것은 이 지옥 같은 세상에 파도치는 하나의 운동에너지거든요. 인간 하나하나가 찰랑찰랑, 촐랑촐랑, 물결치고 파도치지만 그냥 원상복구 되어버려요.

그러나 그냥 파도치지 않고 그냥 촐랑대지 않고 처음 창세기 3장 때 여자가 먼저 선악과 손댔다, 라는 그 사실을 하나님은 놓치지 않고 그걸 되풀이하는 식으로 인간사회 남자 여자를 구분시키는 겁니다. 그런 경우는 고린도전서 11장에도 나와요. 여자는 머리에 뭘 쓰고 남자는 머리에 뭘 안 써도 된다는 그런 식으로 구분해서 여자 위에 남자 있고, 남자 위에 그리스도 있고, 그리스도 위에 하나님 있다, 이런 식으로 서열을 매겨 놓은 것은 여자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낮은 계층의 여자도 남자 올라타고 그리스도 올라타면 천당까지 간다는 아주 존대에요.

그러나 조건은 있어요. 뭐냐 하면,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시시하다는 것, 내가 어느 정도로 남자보다 더 시시하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 안 했어.’ 본인이 잘못 안 했지요. 본인은 잘못한 것 없어요. 자기는 아담의 속성을 물려받은 것뿐이에요. 아담의 속성을. 잘못을 해도 우리 조상 아담한테 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냥 운명적이에요. 팔자고 운명적이라니까요. 문제는 이 남자가 원하는 것과 여자가 원하는 것이 차이 나기 때문에 그 차이남에서 남자도 등짝을 얻어맞아야 되고 여자도 등짝을 얻어맞아야 돼요. 뭘 개코도 모르면서 자꾸 안다고 하면서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을 따로 챙기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그 원대한 구원작업은 모르고 자꾸 내 것만 챙기려고 하는 겁니다.

주님의 부활 앞에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습니다. 그걸 먼저 우선적으로 장착합시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함으로써 모든 인간은 죽었고 부활하신 분은 주님이기 때문에 죽은 자 앞에서 남자 여자 따로 가려낼 하등의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주께서 우리를 계속 살리는 것은 그 역할이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그 하나님 백성을 만드는 일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남자는 남자 역할, 여자는 여자 역할 하는 거지요. 남자의 오류를 오류대로 밝혀내고 여자의 오류를 오류대로 밝혀내는데 여자의 오류에 더 섬세하게 다가가는 것은, 악마가 연약한 여자와 먼저 결탁되어서 여자의 섬세함에서 악마가 노리는 바가 여자에게 더 뚜렷하게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그것을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 생각하다가, 남자는 여자를 유부초밥 알갱이로 봐요. 유부초밥으로 보고 자기는 그 유부초밥의 껍데기고요, 그 안에 있는 알맹이는 여자여서 남자가 여자를 폭 소유하는 식의 의식, 이게 남자의 의식으로 모든 남자는 타고난 거예요. 그게 범죄한 남자지요.

그런데 역시 범죄한 여자의 특징은 뭐냐? 남자를 자기의 그늘막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차양막, 그늘막, 너무 가까이는 오지 말고 저 멀리 있으면서 내 보디가드나 해주라는 말이지요. “웬 다이아~” 알지요, 웬 다이아. <보디가드> 그 영화, 나 보디가드나 해주고 내 하는 일에 쓸데없이 간섭하지말라.

그러나 남자는 뭐냐 하면, ‘너는 내 뒤치다꺼리나 하라’ 그 말이지요. ‘내가 저질러 놓은 것 네가 알아서 남자의 명예에 손상되지 않도록 네가 치다꺼리나 해라.’ 그 말이지요. 이것은 변하지 않는 남자의 심지 같은 겁니다. 뭐 아멘, 하실 분이 오늘 안 보이네요.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자기 뒤치다꺼리하도록 활용하기 위해서 잘해주는 척을 해요.

그럴 때 여자는 그 남자의 심보를 알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남편아, 네가 나한테 잘 해주는 것도 역겹다. 하지 마, 하지 마. 너는 너밖에 모르면서. 내가 너한테 원하는 것은, 업어달라기를 하나, 돈을 벌라 하나, 네가 내 마음이 어떤지는 그 정도는 알아다오. 그 정도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 소리 들어도 남자는 막무가내로 돌아다녀요. “너는 뭔데 나를 졸지에 이기주의로 몰아가느냐? 너는 ‘내가 다 해줬다.’ 그런 소리하려고? 너는 왜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음? 행동 하나하나가!” (어이구 이 인간아!) 그 소리는 이렇게 괄호 열고 속으로나 하지요.

여자가 이렇게 철딱서니 없을 때 남자가 유부초밥, ‘그러니까 너는 뭐라고 해도 내 뒤치다꺼리, 내 소유물이야. 까불어도 내 소유물이야. 뭐 백날 배우고 똑똑하고 아이큐 높아도 너는 내 소유물이야.’ 이런 의식이 남자는 변하지 않습니다. 아멘, 나올 때 되었는데……, 이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자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가? 그게 노래 가사에 잘 나와 있어요. 이 철딱서니 없는 여자의 모습이에요.

그대 내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땜에
내일은 행복할거야
얼굴도 아니 멋도 아니 아니
부드러운 사랑만이 필요했어요
지나간 세월 모두
잊어버리게
당신 없인 아무것도
이젠 할수 없어
사랑밖엔 난 몰라
--------------------------
(심수봉, 사랑밖엔 난 몰라)


이게 여자가 남자를 하나의 그늘막으로 생각하고 자기는 다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얼굴도 아닌 멋도 아닌 부드러운 사랑만이 필요했어요. 지나간 세월 모두 잊어버리고 당신 없인 아무것도 이젠 할 수 없어요. 사랑 밖엔 난 몰라.” 이게 여자의 본심이라면 주님 앞에서는 “부활밖에 난 몰라. 십자가밖에 난 몰라.” 이런 차이가 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여자 쪽에서 남자한테 “당신이 나에게 뭘 해줬나?” 하게 되면 남자 쪽에서 결국 뭐라고 하겠어요? “너같은 것은 지옥이나 가라.” 이렇게 하겠지요. 그때 제일 중요합니다.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렇게 네가 지옥이나 가라, 할 때 그다음에 여자의 할 말은 ( )다. ( )안에 뭐가 들어가야 되느냐? “너나 지옥 가라.” 아니 틀렸어요. 그럼 뭐냐? “나 벌써 지옥 갔다 왔거든!” 그게 정답이에요.

이 세상 살면서, 이 세상 살면서 누가 나를 비참하게, 같은 인간이 아니면 시시하게 만들어줄 사람이 없어요. 주위에 모든 사람은 대단한 나를 시시하게 만들어줄 사람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배치해 주셨습니다. 나올 답은 하나밖에 없어요. “나 벌써 지옥 갔다 왔어.” 그 말 말고 다른 말이 뭐가 필요하겠어요? 주보에 나온 대로 남자들은 그 시대에 자기가 주도권을 갖고 있습니다. 주보 내용 여기서 읽지는 않겠습니다. 남자들은 그 시대의 주도권을 쥐고 있어요. 그런데 그 뒤치다꺼리는 여자보고 다 하라는 거예요. 수고는 여자가 하되 그 영광은 남자 몫으로 챙기겠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 시대는 다르다,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시대상을 잘못 보고 있어요. 인간의 시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자 위주의 세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여자들이 출세했다는 것은 사실은 본인이 남자가 되고 싶은 거예요. 남자가 하는 것을 차지함으로써 내가 남자 못지 않은 자기 자긍심과 자존심을 갖춰서 내가 비록 여자지만 얼마나 대단한 것을 본때를 보이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 말씀이, 성경 말씀이 있다고 여기십니까? 아닙니다. 성경 말씀이 이 세상을 이미 장악하고 있어요. 세상의 모든 인간사에 일어나는 갈등과 구조와 상처와 배신과 아픔과 복수,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범주 밖에서 한치도 벗어나서 일어난 사건은 없어요. 전부 다 그 사건 속에 있습니다.

남자한테 기대 걸다 실망하고, 여자한테 기대하다 실망하는 것 당연한 거지요. 실망하면서 남자한테 실망했다, 여자한테 실망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시고 본인한테 본인이 실망했음을 기꺼이 수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기 때문에 그래요. 실망했다, 짜증 난다, 나 상처 입었다, 그게 얼마나 십자가 앞에서 시건방진 주장입니까? 네가 뭔데 네가 짜증을 내요? 네가 뭔데 함부로 상처라는 말을 합니까? 네가 뭐 대단하다고, 시시한 존재 네가 뭐라고 너 때문에 아팠다, 그런 아프다는 소리를, 어느 구석에서 그게 나오느냐?

그게 덜 토해서 그래요. 도둑놈이, 뭐가 덜 돼서 그래요. 주께서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어 놓고 그게 마치 내가 정당한 나인 것처럼 우기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두 남녀가 결혼한 거예요. 결혼해서 나 위주로 실망하는 것, 그거 초보입니다. 그것은 아직 단계가 한참 멀었어요.

제일 완성된 단계라 할 때 아, 내가 나는 지옥 가야 마땅하고 주님께서 지옥 갔다 온 사람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첨벙, 지옥에다 우리 자신을 집어넣었다는 사실, 이제 할 일은 왜 이 세상에서 내가 대단한 존재가 되면 안 되고 시시해야 마땅함을 이미 지옥을 갔다 와서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살면서, 진짜 스승이신 예수님에게 날마다 매우면서 그냥 감사하시면 그게 주의 은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세상에서 뭐 배운 것이 있어가지고, 들은 게 있어가지고, 본 게 있어가지고 대단한 존재로 자기를 생산하려고 시도하는 그 짓이 얼마나 우리에게 상처로 돌아왔는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세상 모든 문제가, 주의 말씀을 주의 말씀이 아니고 농담으로 여길 때 벌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0강-디모데전서 2장 7-10절(당당한 시시함)220918 - 이 근호 목사.hwp (97.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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