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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9 13:27:31 조회 : 42         
강남-누가복음 12장 47절 (주님과의 공유) 220906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222.117.131.67)
강남-누가복음 12장 47절 (주님과의 공유) 220906a-이근호 목사



31절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절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백성이 공유하는 것. ‘공유’. 같이 하는 것이 그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 그리고 백성이 원하는 것이 일치될 때 그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천국에 이미 들어왔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하고 있어서 같이 원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 한 가운데 동일한 것이 있을 때 이미 그 사람은 천국의 입성했습니다. 들어왔습니다. 천국에 들어오지 않으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우리가 공유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친구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네 마음 속 한 가운데 있는 것과 내 마음 한 가운데 있는 것이 일치될 때 그걸 친구라고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나는 너희들을 이제 친구라고 한다는 것은 내게 있는 것을 너희에게 똑같이 있게 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 하는 것을 안 받겠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어떤 것을 해도 받지 않겠다. 그런 것들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율법가지고 이러면 되겠습니까? 저러면 되겠습니까? 이러면 기뻐하겠습니까? 이렇게 찬양하면 되겠습니까? 참 많이들 했어요. 대단히 많이도 했습니다. 다윗도 고백하듯이 제사도 드렸습니다. 번제 드렸지요. 속죄제 드렸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다윗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번제도 원하지 않고 속죄도 원하지 않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 공유되는 게 뭐냐 하면은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이렇게 해서 ‘십자가’라는 그런 똑같은 것을 갖고 있을 때에 이건 뭐 장차 천국 갑니다 가 아니라 이미 천국에 들어온 입장이지요.


하나님에게도 예수님에게도 십자가가 중요하고 성도에게도 십자가만 자랑하고. 그러니까 뭐 더 필요할 게 없지요. 더 추가될 게 없어요. 더 추가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 그대에게 별을 따가가 그대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딴 거 별 따도 안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안겨드리겠습니다. 치워라~ 별 준다고 너 천국에 들여주고 그런 거 없습니다.


똑같은 것을 가질 때 그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똑같이 되는 것 이걸 기원 또는 원천, 근본, 근원 영어로 오리지널 이렇게 설명할 수 있어요. 그래서 기원, 원천은 원천이기를 멈추지 않겠다. 나는 너희들 속에 원래 하나님의 취지가 들어있는 것을 내가 멈추지 않겠다. 단호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동일한 것을 갖는 그것이 최종 목표라는 이 사실을 성도 너희들을 통해서 성도 너희들에게 제공되는 것은 주님의 그 원천을 계속해서 주께서 유지시키겠다는 뜻을 멈추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원천에 대해서 제가 원천이라는 말을 쓰는데 왜 하늘나라가 원천이 되느냐. 32절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어떤 내용이 나오느냐 하면은 원천의 주도권은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은 원천은 처음이고 시작이기 때문에. 이게 원천, 기원인 동시에 최종 것이에요. 최종 것. 최종적인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 중간적인 것, 일시적인 것, 한시적인 것, 과정적인 것 가지고 이렇게 뭐 협박을 해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지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무서워 할 필요가 없는 거에요. 원래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들어온다면 하나님과 공유했다면 이게 해답이거든요. 진리거든요. 진리와 해답을 알고 있다면 나머지는 진리가 아니고 해답이 아니라는 겁니다. 해답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고 처음도 아니고 끝에 도달하지도 못할 것 가지고 협박 공갈하고 자랑질하게 되면 이거는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죠. 그게 협박감이 되지를 못하는 거에요. 왜? 가짜니까요.


진짜 명품 백이 자기 집에 있는데 자기 친구가 가짜 사 놓고 중국산 가짜 사 놓고 그걸 막 흔들고 으시댈 때에 속으로 웃지요. 참나. 저거 동대문에서 얼마 줬나? 한 2만원 줬나? 말도 못하고 친구 의리 때문에 못하지만 자기는 원천이 있거든요. 약을 올립니다. 내가 직구해서 600만원 주고 샀다는데 아닌데 아닌데. 너 내 명품 가방 보니까 무섭지! 무섭지! 이러고 있다고요. 미안한데 왜 무서워해야 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거 가짜거든요.


진짜를 이미 확보했으면 가짜에 주눅들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적은 무리거든요. 적은 무리. 소수정예죠. 적은 무리이기 때문에 큰 교회 교인 수 많다고 해가지고 거기에 기죽고 눌리고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교인 수를 내놓으면 안돼요. 주께서 적은 무리라고 했기 때문에 적은 무리지만 적은 무리 외에 다수의 기죽지 않는 요소가 적은 무리 안에 집중되어 있다는 뜻이거든요.


적은 무리 빼놓고 나머지는 허풍. 헛바람 들은 사람들. 끝까지 인생 살아보지도 않아 놓고 인생 다 살은 냥 아는 냥 여기는 허풍쟁이들, 허세덩어리들. 그들의 협박과 공갈과 큰 소리에 하등의 기죽거나 고개 숙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서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기뻐해야 하는데 33절에 보면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근원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면 항상 그것은 가졌다 할지라도 도적과 좀 먹는 것 손실되는 것 때문에 굉장히 아등바등 염려하면서 초조하면서 벌벌 떨면서 짧은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뭔가 가졌는데 이게 날라갈까봐. 이게 없어질까봐. 이게 다 사라질까봐 이게 두려운 거에요. 겁이 나는 겁니다.


따라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의 특징들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공유해야 되는데 그 공유하는 내용이 뭡니까 물으신다면 무서워할 필요 없는 것, 도적이나 사라질 염려할 필요 없는 것. 그런 것들이 마음 속에 있을 때에 그 사람이 적은 무리에 해당되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하늘나라 하나님과 동일한 것을 갖고 있는 그의 나라와 그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그 나라와 의, 입을 것 먹을 것 마실 것 그런 것 염려하지 말고 그 나라와 의만 구하면 된다. 그 나라, 의를 우리가 주님과 동일한 것을 갖고 싶은 생각이 우리가 들 거에요. 그럼 저도 그 나라, 의를 갖고 싶어요. 갖고 싶은데 줘야 되지요. 안주면 못 받잖아요. 그럼 주시는 그 구체적 방안이 뭐냐?


그 뒤에 35절부터 그 방식이 나와 있어요. 그 나라와 의를 주시는 방안 또는 방식은 공격입니다. ‘공격’. 공격인데 무엇을 공격하느냐 하면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의 계약 또는 관계, 이 자체를 주님께서 공격해버리지요. 그러니까 그 나라와 의라는 것은 없는 거에요. 공격하는 가운데 결과로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인간들은 그 나라와 의를 찾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이거는 예수님 빼놓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거는 본인이 이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 관계가. 그래서 예수님이 와서 건드려줘야 돼요. 건드려줘서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여기 이게 문제가 있구나 깨달을 때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 나라 의가 실패할 때, 실패 현장에서 비로소 새롭게 자기 자신의 결정을 부정하면서 그게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공격하는데 공격할 때 하나님께서 공격하게 되면 인간 쪽에서 가만 있지 않고 인간도 맞받아치지요. 그 맞받아치는 게 뭐냐 하면은 왜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은 약속을 깨십니까? 라고 반발하면서 공격하게 되어있어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 어떤 사이냐 하면은 우호적인 사이. 상호 우호적이고 친밀하고 잘 진행되고 있다고 여기는 것. 잘 진행되고 있다는 그 우호적, 인간 쪽에서 하나님하고 잘해볼라고 하거든요. 찬양 드리고 말씀 지키고 뭐든지 헌금 드리고 제사하고 예배하고 잘해볼려는 그 우호적인 관계를 왜 굳이 그걸 공격하고 깨십니까 반발하는 거에요.


이걸 달리하면 왜 막 들이대십니까? 들이대는 거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서 잘 경배하면 되는데 왜 주님께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먼저 선제공격을 하십니까 이런 뜻이에요. 그건 뭐 예수님께서 돌아다니면서 기존의 성직자들부터 율법 지키는 자들에게 사정없이 공격했잖아요. 왜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정상적인데 이 우호적인 관계, 좋게 잘 사는데 왜 의도적으로 왜 문제를 일으키십니까? 라고 이제 반발을 하는 거에요.


그 반발을 할 때 모든 사람이 이 반발에 가담을 해요. 심지어 12제자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체포될 때에 예수님이 체포되는데서 이건 아니라고 나선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역시 쎄기는 권력이 쎄요. 현실은 역시 현실다워. 우리가 꿈꾸는 자였었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우리 정신차려 고기 잡으러 가자. 고기 안 잡았으면 어쩔 뻔했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공격하는 이유가 뭐냐? 인간 나름대로의 나름 전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전체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에 대해서 이 우주에 대해서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본인들이 전체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모든 신학과 철학과 모든 사상이 최종적으로 전체가 어떻다고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인간은.


전체를 왜 아느냐? 여기서 중요한데요. 인간들이 전체성을 알고 있다는 말은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거에요.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라는 의도가 강해요. 왜? 우리도 알만큼 아니까. 본인이 본인 문제에 대해서 본인이 책임지겠다. 이 말은 뭐냐? 나는 끝까지 나를 믿겠다는 거에요. 그 유대신학의 정교하고 전통적이고 역사적으로 오류를 최대한으로 줄여가면서 그 순결, 순수한 진리 엑기스만 뽑아서 갖춰놓았다고 자부하는 것이 유대신학이에요. 구약 율법에 대해서. 하자를 줄이고 줄인 거에요.


그런데 그 하자를 줄이면서 남은 게 뭐냐 하면은 우리가 연구해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있어서 철저를 기했기 때문에 나는 그 신학을 믿을만하다 이 말은 나는 끝까지 나를 믿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거에요. 그런데 성경 전체에서는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성경 전체 내용은 ‘나를 믿어라. 예수인 나를 믿어라.’ ‘예수 나를 믿어라’ 에요. ‘나를 믿어라’ 가지고 ‘나’를 믿겠다는 인간을 공격한 거에요. 그게 예수님의 활동이고 모든 성경에 내용 속에 다 같이 포함되어있습니다. ‘나를 믿어라’에요. ‘예수님을 믿어라’


예수님을 믿어라가 그게 결과로 종결돼야 된다는 말이에요. 예수를 믿으면 뭘 주신다는 게 없어요. 예수님 믿어라가 결론으로 마감이 돼야 돼요. 예수 믿으니까 천국 주더라 자꾸 이런걸 끄집어내면 그건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역시 최종적으로 나를 믿는 게 되니까 그건 안되잖아요. 성경에 예수님의 말씀, 오늘 누가복음 본문도 마찬가지지만 본문 내용이 뭡니까? 모든 본문 말씀은 “나를 믿느냐” 묻는 질문입니다. 이 내용 전체가.


인간들이 자기를 믿게 되면 하나님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손님으로 봐요. 손님으로. 내가 마음이 정결하고 온화한 상태로 유지할 때 평정한 상태로 유지할 때 내 마음이 심리적으로 안정될 때 그 때 오시면 잘해드리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영접할만할 때 그때 오시면 하나님 극진히 대접해드리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것은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럼 나를 왜 안 잃어버릴까? 나는 나를 믿는 것이 가장 확실하기 때문에. 다른 그 외에는 믿음의 내용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해요. 최종적으로 나를 믿어야지 나 말고 다른 것이 들어오는 것은 우리는 내 믿음이 추방시켜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들어오시더라도 내 허락이 있어야 돼요. 아직 방청소가 안됐다든지 빨래감이 널려 있으면 안돼요. 정리하고 들어오라고 할 때 들어와야 돼요.


우리는 그런 심보에요. 내 마음은 내가 알아서 깨끗하게 정리함으로서 그 깨끗하게 정리된 내 마음을 나의 믿음으로 내가 갖고 싶은 거에요. 그러나 주님은 그것은 천지창조의 기원이 아니고 원천도 아니고 근원도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공유할 수 없는 그건 너의 일방적인 생각이지.


그 뒤에 나오는 35절부터 어디까지 나오느냐 하면은 48절까지 나오는 내용이 종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믿었고 내 마음을 잃지 않을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본인에게 본인이 주인이 돼요. 주인이 된다는 말은 자기는 누구의 종이 되기 싫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백날 애써봐야 너는 종에 불과하다는 말씀이 35절부터 48절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 다시 한번 정리하게 되면 그 나라 의를 구하라고 주께서 이야기할 때 그 나라 의는 하나님과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세계, 그 나라와 의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 의 특징이 뭐냐?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요. 그 나라 의는 도적이 오거나 그리고 썩거나 그런 것이 없는 곳입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은 그게 처음이고 그게 최종적인 것이 그 나라 의에 거기 다 들어있기 때문에. 중간에 없어지는 게 아니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 시작한 하나님의 계획의 취지가 그 나라, 의고 끝도 그 나라, 의였습니다. 그 나라였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공유케 함으로서 그 나라 의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 나라 의를 아무도 그 나라, 의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이미 자기 자신을 최종적으로 믿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에게 전부에요. 그걸 전체라고 하고 ‘전체’. 내가 나한테 전부고 전체고 almost. 나한테는 내가 전부에요.


따라서 예수님이 오시든 하나님이 오시든 믿으라고 하면 내 것 내 범위에서 다치지 않는 내에서 그 안에 손님으로서 주님을 모시려고 합니다. 손님으로 모셔버리면 한쪽이 한쪽의 종이 되는 게 아니에요. 둘 다 대등한 관계가 되고 맙니다. 나라는 주인집에 너라는 주인이 와서 잠시 찾아 인사 나누는 것밖에 안돼요.


이 말은 인간은 누구의 종이 되기 싫어요. 인간이 주인 노릇하는 여러 가지 경우를 쭉 나열해 보겠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내가 정한다. 종 아니지요. 주인이지요. 이걸 ‘주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불러도 내가 부른다. 불러도 내가 부른다. 내가 여전히 나의 주인임을 내 생애에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나에 대한 속죄 선언을 내가 한다.


내가 완전하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고 나는 비록 죄도 많이 지었지만 나 죄 없다 선언은 최종적으로 누가 내린다? 내가 죄 없다고 내가 내리고 싶다. 대충 이 네 가지로 나는 나에게 주인이 되는 겁니다. 종? 종이 뭐에요? 노예? 노예 나하고 상관없잖아. 난 누구의 노예 된 적 없는데. 바로 인간의 형편이 이런 형편입니다. 이런 주인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지요. 이런 주인들이. 그래서 교회에서는 어서 오십시요! 동대문 시장에 손님 오듯이 어서 옵쇼!


특히 개척교회 하는 목사한테는 뭐 고객이 왕이죠. 문간부터 나가가지고 인사하고 있지요. 가운입고 마중 나가지요. 아이고 태풍 부는 데 오셨습니까? 뭐 이런 거. 고객. 고객은 왕이니까. 종이 된 적이 없다. 이것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어느 인간도 누구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아담 후손 치고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두 종류가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본인의 자식은 사라, 자기 부인으로부터 자식을 낳기를 아브라함이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부인으로부터 자식을 낳게 한 게 아니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압박을 해서 종으로부터 자식을 낳게 했습니다. 종으로부터 자식을 낳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을 그런 식으로 몰아세워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네가 낳은 자식은 종이 나은 자식이다’ 종이라 언급을 해버려요.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자기의 분신, 종이 되버려요. 그리고 그 이스마엘 종 자식 외에는 자기 작품이 없습니다. 자기 자식이 없어요. 그런데 내가 낳은 자식이 정실부인의 아들이 아니고 종의 아들이에요. 그러면 종의 아들 등장하면 뭔가 괄호가 빈자리가 하나 생겨버렸어요. 참된 아들, 종이 아닌 아들 그 자리는 갑자기 새롭게 텅 빈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 자리를 누가 채우느냐?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이 그 자리를 채워버리죠.


그러면 그 이삭이라는 자식은 아브라함 보기에 결코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에요.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면서 내가 원했던 자식의 그 자리, 내가 죽고 난 뒤에 있을 자식의 자리에 하나님이 그 자리를 점유해버리고 차지해버리면 나는 자동적으로 내가 낳은 자식은 종 자식 밖에 없습니다 해서 종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종이 돼버립니다.


그 방법이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4장 24절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두 언약을 양산시키는데요. 두 언약을 양산시킴으로서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는 인간을 버리고 인간을 구원한다. 이렇게 되어버리는 거에요. 단일 인간을 두고 두 개의 결과를 말해버려요. 나는 아브라함을 버리고 아브라함을 구원한다. 나는 아브라함을 받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을 받는다가 되어버려요. 정확하게 말해서 아브람을 버리고 아브라함을 받는다 이렇게 되겠지요.


그것은 놀랍게도 아브라함의 자신의 재주나 노력과 시도하고 그런 결과를 낳는 것이 나는 아브라함을 버리고 아브라함을 구원한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나는 아브람의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죠. 그런 결과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이용당한 거에요.


그 이용당하는 이야기는 지난 오후예배인가 했지요? 아하수에로 왕, 에스더의 남편은 에스더라는 꽃뱀한테 걸렸다. 왜냐하면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것을 남편보고 이야기할 것을 남편보고 이야기한 적 없어요. 에스더는 자기의 미모를 팔아서 권력을 얻었던 여자에요. 미모를 미끼로 나라의 반이 되는 권력을 차지한 여인. 아주 무서운 여자지요. 무서운 여자지요. 우리는 줄게 없고. 뭐 줄게 있어야지. 나라 반? 지금 부동산도 남의 전셋집 들어가는데 무슨.


인간은 하나님한테 못 이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작과 끝을 다 알고 있는 분이거든요. 드라마 작가 김수연 작가에요. 처음과 끝 김수연 작가가 다 시나리오를 쓰잖아요. 중간에 배우가 그것도 단역 배우가 뭘 알겠어요. 끝에 가면 알 수도 있겠다만. 잠시 역할 맡고 사라지는 그게 무슨 시작과 끝을 압니까.


그러니까 시작과 끝 모르니까 허하니까 허세라도 부려보겠다고 세상에 헛되고 헛된 것에다가 그거 가지고 돈이나 모으면서 으시대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건 가짜라고. 가짜 명품 들고 어디 까불고. 그런 소리만 듣지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시작과 끝을 모르니까 나는 나를 믿고 싶은 거에요. 나 외에 어떤 자도 믿고 싶지 않아요 인간은. 그러니까 성경은 예수님 믿으면 뭐 해주겠다가 아니에요. 이거는 종교계에서 그렇게 해요. 예수 믿으면 기도 열심히 하면 너 원하는 소원 들어줄게. 이거는 종교계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요.


진짜는 최종적인 목표가 뭐냐? “나를 믿어라.” “그럼 뭐 해줍니까?” “나를 믿게 될 것이다.” “뭐 없습니까?” “없다.” 없어요. 우리가 평소에 인생을 살면서 왜 불안하고 초조하고 염려하고 걱정이 됩니까? 그것은 시작과 끝이 동일해야 되는데 중간에 내 속셈을 따로 뽑아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에요. 어떻게 하나님 이용해가지고 내 속셈 한번 챙겨볼까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아무 허세 덩어리, 권세, 권력. 돈이 권세 권력이니까 돈을 찾는 거에요. 누구의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아요. 내가 주인이 되고 싶고 내가 나의 종이라도 내가 나의 종이 되고 싶지 그 누구의 종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맘으로 지금 교회 다니고 있어요 계속. 신앙생활하면 집사라고 하고 목사, 장로라 하면서 돌아다니는 거에요. 자기가 주인 행세하면서.


이게 어른들만 아니라 애들도 그렇거든요. 아무 실속 없는 것, 실속 없는데 힘 쎈 짐승. 그게 뭘까요? 사우르스죠. 공룡. 처녀 때 그냥 모양내고 공부 대충하고 회사 다니다가 이뻐가지고 좋은 남편 만나서 살림하는 그 새댁들. 그 사람들 딸 낳으면 상관없지만 아들 낳아가지고 한 4년째 키우면 갑자기 엄마가 공룡 박사가 됩니다.


왜? 아들이 공룡에 미쳤어요. 왜 미칩니까? 바퀴벌레에 미쳤습니까? 공룡이 크기 때문에 그래요. 작은 것만 해도 30톤이 넘어요. 스피노사우르스. 얼굴은 작은데 목이 길어. 이걸 브라키오 사우르스. 그리고 싸움을 잘해. 시속이 40km나오는 이빨이 있고 10km앞에 먹잇감도 본다는 맨날 쥬라기 공원에 나오는 티아노사우르스. 사우르스는 공룡이라는 뜻입니다. 코뿔소처럼 되어 있는 것 트리케라 톱스. 그 다음에 스테고사우르스. 엄마라는 이유 때문에. 아이가 맨날 이것 묻는 거에요. 이게 무슨 사우르스냐 묻는 거에요.


그런데 그 공룡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지금. 공룡처럼 보이는 게 있지요. 삼성사우르스, 현대사우르스, 엘지사우르스. 허세덩어리. 왜 그렇게 합니까? 믿을 것은 나밖에 없기 때문에. 왜 나를 믿어야 됩니까? 나는 때려죽어도 누구의 종이 되기 싫기 때문에. 나는 누구의 종이 되기 싫어요. 누구의 종이 되기 싫은데 내가 필요한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내가 예수를 부르고 싶어. 그래야 내가 주인임을 놓치지 않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인생의 보람은 비록 돈 월급 적고 암 말기에 빌빌 거려도 그놈의 고집 세 가지고 죽어도 요양 병원 안 간다고 버티는 고집 센 90넘은 노인네들. 내가 왜 가는데! 내 집이 최고다 하고 자식들 죽던 말던 자기 과거, 추억만 챙기면서 자식들이 얼마나 힘든지 생각 못하고 그 나이 많은 고집으로 버티는 것.


이거는 뭐냐? 내 평생 다 하기까지 남는 것은 내가 주인으로 살았다는 그것만큼은 내가 몸이 아프고 돈이 없다 할지라도 이거 놔버리면 진짜 자살이다. 이것 때문에 나 살아왔다 버리는 그 노인네들. 그거 뭐 지옥가도 마땅해요. 왜? 저런 사람을 지옥 보내지. 그런 사람들 지옥가야 되는 거에요.


참 예수님의 말씀에 인간 자신을 주님께서 공격하는 거에요. 하나님 우호적으로 좋게 좋게 갑시다. 내가 교회 가줄게요. 예수 믿어 줄게요. 헌금 천원 씩 할게요. 자꾸 우호적인 관계를 해서 공격을 안 하기 위해서 하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다룰 때는 그렇게 다룬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 전체를 한꺼번에 다 폭로시켰습니다. 너의 자리는 현재 너의 옆에 없다. 하나님이 너와 너의 빈자리를 채워줘야 돼요. 그래야 나의 하나님이 돼. 그 빈자리에 하나님이 공유합니다. 그 공유의 자리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이런 가사가 있어요. 제가 하면 아 들어본 적 있다 할 거에요.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 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이게 2절 가사거든요.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거는 끝까지 개뿔도 없으면서 본인이 여전히 주인공이에요. 그놈의 기억 때문에. 줄 곧 내가 나를 믿어왔던 그 기억, 그 기억이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네. 한결같애. 35절에서 48절에 나오는 이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종으로 이미 전환시켜버렸습니다. 그러면 이 종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 종에서 두 종으로 나눠버립니다. 악한 종과 선한 종으로 나눠버려요. 종 아닌 인간은 애초부터 태어난 적이 없다. 다만 악한 종으로 태어나는가? 선한 종으로 태어나는가 그것뿐이다.


그럼 어떤 것이 악한 종이냐? 남을 종 부려먹는 인간이 악한 종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걸 저는 오늘 제목으로 삼고 싶은데 제목을 악한 종이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해요. ‘중간 종’. 주인 밑에 전부 다 종인데 종이면서도 중간에 자기가 관리 종으로 나서서 밑에 것에게 밑에 것들에게 주인 노릇하는 중간 종. 예수님은 이것을 뭘로 보느냐? 이것을 이스라엘로 본거에요. ‘이스라엘’. 이스라엘로 봐서 하나님의 종노릇하라고 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그걸 빌미로 해서 다른 사람들을 자기 종으로 의식하면서 살아왔다.


따라서 이 이스라엘 전체가 뭘로 전환시키느냐? 매 맞아야 할 종으로 주께서 전환시켜 버립니다. 매 맞아야 할 종으로. 46절에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이렇게 되어있어요.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이건 이방나라. 이스라엘에 “너희들이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잖아. 내가 메시아다” 이런 뜻이에요.


자, 이렇게 설명하게 되면 매 맞는 종들은 상당히 억울해할 겁니다. 우선 이스라엘이 전체 종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마태복음 21장 37절에서 나옵니다.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분명히 버렸는데 “이거는 쓸데없는 돌이다” 버렸는데 그 버린 돌이 안 죽었네요. 자기는 죽였는데 누가 죽였느냐?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죽였는데 메시아가 안 죽으면 이거는 누가 죽을 차례입니까? 이스라엘이 멸망될 차례지요. 이스라엘이. 4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여기 너희는 이스라엘이죠.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거는 값없이 이스라엘 자리를 그 포지션을 그 처지를 대체해서 들어갔던 사람들에 의해서 천국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천국에 들어갔던 그 이방인들의 특징은 뭐냐? 우리가 천국에 들어올 만해서 들어왔다는 생각을 하겠어요? 아니면 이게 웬 횡재냐? 횡재로 여기겠습니까? 어느 쪽이겠습니까? 횡재로 여기겠지요. 그런 자들이 바로 하나님 생각과 공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 자기 안에 들어왔으면 그런 생각 들어왔으면 이미 하나님 나라 들어온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횡재해서 들어왔다면 횡재했잖아요.


그럼 횡재의 그 대상을 더 확대시켜야 돼요. 횡재 받은 내 자체가 횡재가 돼야 돼요. 말을 일부러 어렵게 하는 게 아니고요 내가 횡재한 것을 몇 백억 있다면 이게 내 것이 되잖아요. 그게 아니고 횡재한 몇 백억을 쥔 내 자체가 나에게 횡재라고 여길 때에 내 것이 안돼요. 내 것이 안 되면 주께서 몽땅 도로 가져간다 할지라도 내가 거기서 “오오 그거 내 껀데” 하는 말이 나올 수가 없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착실한 종이지요. 어떤 경우라도 자기를 주인이라고 한 순간도 주인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을 때 이게 바로 신실한 종이다 이 말입니다. 주께서 원하는 신실한 종. 그럴 때 예수님은 계속 그들의 주인으로만 유지될 수가 있는 거에요. 신약에 오게 되면 이건 간단하게 되어있지요. 주인님의 의가 종에게 들어가서 주인님의 아들인 것처럼 종도 이제 내 아들이 되리라. “너희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아들의 영을 받았으니” 주인님이 아들인 덕분에 너희는 하늘나라의 양자로 받아들여졌다. 이게 바로 로마서에 나올 때 성령을 주신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강남-누가복음 12장 47절 (주님과의 공유) 220906a-이근호 목사.hwp (150.0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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