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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9 13:28:03 조회 : 41         
강남-누가복음 12장 47절 (주님과의 공유) 220906b-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222.117.131.67)
강남-누가복음 12장 47절 (주님과의 공유) 220906b-이근호 목사



하나님께서 종의 나라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의 나라만 인정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 나라를 공격하는 이유를 알겠지요. 인간끼리 모여 봐야 종의 나라에요. 자기들끼리 주인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들끼리 뭐하느냐 하면은 이 포도원을 그들이 잘 운영하겠다는 거에요. 포도원을.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서 그들끼리 잘하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얄굽게도 그 포도원을 자기 아들에게 상속하기로 다 사전에 계획이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어요. 절대로 인간 나라를 허용한 적이 없어요. 현재 민주주의를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나라 외에는 딴 나라를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3장 21절에서 23절에 나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그래서 인간은 인간의 선에서 멈추고 그 위로 나가는 방법에 대해서 몰라요. 그래서 일단 인간 나라는 건재하고 여기에다가 하나님을 모셔서 또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되면 너희들이 나까지 다 챙겨주는구나. 고맙다 인간들아 해가지고 하나님이 복을 주면 우리가 생각한 인간 나라는 번영할 것이고 영원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아이디어. 그것이 바로 유대교, 유대신학입니다.


유대신학만 그럴까요? 아니지요. 개혁주의 신학도 똑같은 겁니다. 우리가 착실하고 바르게 하면 하나님은 도와주신다. 여기 하나님의 공격이라는 것은 그들에게는 상상도 못하는 거죠. 그러면 그 나라 의가 어디 있느냐? 첫 번째 시간에 질문했지요. 그 나라 의는 어디 있느냐? 그 나라 의는 적이 없을 것 같은 곳에 적을 만들어서 공격함으로서 비로소 허물어지게 만들면서 그 나라, 의가 비로소 발생되게 만드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참된 종, 바른 종을 하나님이 바른 종으로 인간의 종이 되어버린 거에요. 하나님이 사람의 종이 된 겁니다. 세상에 이런 아이디어는 어느 신에게도 없어요. 신이 인간이 종이 되든지. 신이 인간의 섬김을 받아야 되는데 예수님은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너희들을 섬기러 왔다 이렇게 할 때에 인간 쪽에서 굉장히 당황스럽지요.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상식에 맞지요. 왜? 하나님은 위에 계시고 인간은 아래 있기 때문에. 아랫것이 윗분을 섬기는 것이 너무나 상식적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상식적인 것이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간들이 몰랐던 겁니다. 우리에게는 상식이고 우리에게는 진리인데 그게 하나님한테는 이게 수용될 수 없는 악한 것이 되는 거죠.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부하지만 종다운 종, 제대로 된 종을 그들은 시작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44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대속물’, 대속물은 어디와 플러스를 하느냐? 죄인과 플러스해서 이 죄인을 의인 되게 하지요. ‘대속물’.


그래서 재밌는 것은 이 세상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죄인이라고 우기는 그 자체가 의롭게 여기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내가 죄인이라고 압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지 않고 “나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 보다 낫습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옛날 부흥사들은 목소리까지 변조하잖아요.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자기가 뭔데 부족하대.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나중에 부흥회 봉투 보면서 “부족합니다~~~~” 부흥회 첫 시간부터 마지막까지 관심은 돈에 있어요.


왜? 왜 그렇습니까? 내가 나의 주인이니까. “내가 누구의 종이 될 상인가?!” 누구한테 종이 될 상이 아니에요. 나는 누구의 주인이 될 상이지 누구의 종이 될 상이 아닌 거에요. 내가 종이 된다면 그건 인생 실패로 간주하는 거에요. 세상 자체가 그러니까요. 주님의 방법은 뭐냐? 이 자리를 비워놓습니다. 이 자리를 비워놔요. 그냥 덜렁 대속물로 침투해버려요. 대속물로 와서 여기에 대속물로 결합될 이 자리에 새롭게 발생시킵니다. ‘발생’. 없는 데서 발생시켜요. 창조해버려요.


그러면 창조되면 없는 데서 새롭게 발생됩니다. 그러면 이 대속물로 옴으로써 기존의 인간들이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드렸던 대속물은 전부 다 퇴출이에요. 퇴출. 히브리서는 이걸 모형이라고 해요. 모형은 사라져야 될거에요. 인간들이 드렸던 대속물 속에 뭐가 여기에 담기겠습니까? 여러분 다 아는 거에요. 이 대속물 만들기 위해서 그들은 헌금이 필요했고 그들은 예배가 필요했고 그들은 기도가 필요했고 대속물 하기 위해서 그들은 전도가 필요했고 그들은 성전이 필요했고 정성이 필요했고 그들이 대속물 주기 전에 일주일 전부터 그들은 정결한 양심, 선행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전체가 어떻게 됩니까? 주님의 대속물에 의해서 전부 다 이 전체가 다 쓸데없는 짓이 돼요. 쓸데없는 짓. 아무 짝도 소용없는 게 됐어요. 시편 50편에 나오는 말씀이 또 다시 거론됩니다. “하나님은 번제나 속죄제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는 상한 심령을 원한다” 내가 바로 쓸데없는 자였습니다 라는 이 고백이 필요한 거에요. 그것도 외워서 하지 말고 실제로 체험을 하게 되는 거에요.


다윗이 복을 받은 것이 뭐냐 하면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을 살해함으로서 자신의 처음 자리를 발견한 거에요. 자신의 처음 자리는 내가 있던 자리가 아니라 죄가 있던 자리였어요. 죄가 있던 자리. 이걸 어제 대구강의에서 했는데 죄를 지은 내가 아니라 죄의 의인화가 나다. 죄가 인간 모습된 ‘나’가 돼요. 내가 죄를 지은 게 아니고 내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가 인간 형태를 지닌 게 바로 나다 이 말이죠. 나에요.


초등학교 때 입학식하면 애들 전부 다 손수건 달지요. 왜 그렇게 손수건을 다느냐? 그때는 예방주사같은 것이 별로 없어 가지고 코 찔찔 나온다 이 말이죠. 그때 흘린 콧물이 콧물이 아니고 죗물이에요. 콧물 흘리는 게 아니고 죗물 흘리는 거에요. 죄를 흘리는 겁니다. 다윗이 그걸 알고 기뻐한 거에요. 그걸 알고 성신이 알려줬다는 거에요. 성신이. 성신이 알려준 거에요. 성신이 하나님의 신이 나로 하여금 밧세바의 뒤태를 보게 했고 그리고 남편을 죽이게 한 거에요. 하나님께서.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이 나서지 않으면 어느 인간도 자기가 죄인인 것은 인정하지만 죄가 내가 됐다는 사실을 인정할 위인은 없습니다. 내가 양심상 죄를 많이 지었어. 이런 건 되지만 겸손해 빠져가지고 되지만 내가 곧 죄고 죄가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되면 추가할 죄는 더더욱 없는 거에요. 그걸 로마서 6장 6절에서는 그걸 아주 사도 바울이 너무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이 사실을. 너무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6장 6절에 “죄의 종” 이걸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나의 주인은 죄가 주인이고 죄가 시키는 대로 하는 딸랑딸랑 똘마니입니다. 노예라는 뜻이에요. 본인이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세상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면 사람들이 그렇게 친밀하고 정이 가요. 왜? 나와 똑같으니까. 말 하나 행동 하나가 죄 아닌게 하나도 없으니까 이거는 뭐 홧투 치나 마나에요. 장땡을 쥐고 있던 구땡을 쥐고 있던 남의 패 다 봤어. 벌써 다 알고 있어요.


남편이 한 마디해도 저게 무슨 뜻인데. 아들이 한 마디 해도 저게 무슨 뜻인데. 딸이 한마디 해도 저게 무슨 뜻인지 다 알아요 다. 나는 나를 믿겠다 그런 뜻이거든요. 뭐 딴 게 뭐 있어요. 나는 누구의 종이 되지 않겠다. 그게 나의 사는 보람이다. 그걸 너무 긴 것을 그렇게 행동으로 엄마 나는 딴 거 안 먹고 라면 먹으면 안돼? 이런 짧은 표현 하나하나에 다 들어있어요 그게. 이걸 가지고 어렵게 방금 한 것을 어렵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S1을 알기 위해서 S2에게 묻는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S1은 나의 생각과 현실과 딱 들어맞게 일치되는 것. 이게 S1이라면 S2는 내 생각의 표현, 언어죠. 언어, 표현 이것이 현실과 항상 갭이 있어요. 딱 들어맞지가 않아요. 50억만 있으면 행복하겠다. 집에 5만원 있을 때 50억만 있으면 행복하겠다 하거든요. 그런데 50억 되고 난 뒤에는 이 행복과 갭이 생겨버려요. 50억 있어도 행복하지 않아요. 뭐 다들 없으니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어떤 아가씨가 있는데 남자가 아가씨를 좋아해요. 좋아하는데 둘 다 총각 처녀니까 뜸들이고 있는데 아가씨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남의 감정을 남에게 참 잘 전달하고 남들도 내 옆에 있으면 내가 어떤 감정인줄 알아 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남자가 하는 말이 그 여자보고 “나 라는 남자하고 있으면 어때?” “편안함?” 그러니까 남자가 “또?!” “안정성” “또?!” “쉽게 말을 걸 수 있는 그런 관계.” “또?!”


왜 “또” 라는 말을 자꾸 합니까? 뭐가 나올 때까지? “나 당신을 사랑해” 그거 나올 때까지 계속하는 거에요. 여자는 사랑할 마음이 없어요. 그냥 편안함. 그러니까 남자가 답답해가지고 계속 묻는 거에요. 또!또!또! 계속 묻는 거에요. S1이 S2에게 묻는 겁니다. 주여! 주여! 주시옵소서! 뭐?! 뭐를 달라는지 본인이 몰라요. 그런데 계속 뭔가 미흡해. 미흡하니까 계속 뭐 해야 될 거 같애. 무엇을 원하는지 본인이 몰라요. 그러면서도 달라고만 자꾸 하는 겁니다. 뭘?! 현실과 맞기 위해서. 그러나 현실과 맞출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은 자체가 가짜고 가상이기 때문에 현실과 항상 떨어지게 되어있어요.


이것은 뭐냐? 인간이 드리는 모든 대속물, 제사가 엉터리란 뜻입니다. 제사 드리고 양 드리고 소 드리고 유월절 드리고 맥추절 드리고 부활절 다 하고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다 했어요.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때 빈손으로 오지 말고 크리스마스 봉투 있지요. 돈 넣어오세요. 맥추절 돈 넣어오세요. 돈 넣어라. 부활절 돈 넣어라. 목사는 또!또!또!또!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계속 해도 자기 만족함이 없어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의 대처는 이겁니다. 이 전체를 반란꾼으로 규정해버립니다. 누가? 대속물이. 대속물이 사람의 종이 됨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된 사람의 종은 나 말고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규정하고 그 다음에 공격해요. “저리 가라 이 가짜들아 저리 가라” 치워버려요. 새롭게 발생시켜요. 새롭게.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대속물이 되는 것이 아니고 대속물의 가치 안에서 대속물의 가치를 인정할 사람을 주님께서 새롭게 선택하고 새롭게 창조해버립니다.


손 들고 “저요! 저 예수님 믿겠습니다!” 안 받습니다. 주께서 친히 만들어야 돼요. 만들어요. 그 만들 때 하는 방법이 예수님이 대속물로 완성이 되었으니까 이 완성을 받쳐주기 위해서 죄인이 필요하잖아요. 죄인 되기 위해서 대속물의 완성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여기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여기 성령이 임해버립니다. 성령이 임해버리면 비로소 인간은 자기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애초부터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에서 태어났음을 인정하는 언약적인 죄인이 되어버려요. ‘언약적 죄인’.


내 살과 내 피는 무조건 더러운 거에요.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의 살과 예수님의 피는 무조건 깨끗하다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근거도 없이 그냥 무조건 받아들이는 일이 벌어져버립니다. 그 무조건 받아들일 때는 내 믿음을 걷어차잖아요. 내 믿음을 걷어찰 수 있는 것. 이게 믿음이거든요. 이게 주님 주신 선물로 주신 믿음입니다.


내 믿음과 주의 믿음을 같이 있지 못하고 걷어차는 거에요. 내가 믿는 내 믿음, 내가 나를 규정하는 것. 성령이 와서 이것을 뽑아내서 지적해서 이걸 추방시켜버립니다. 삭제시켜버립니다. 내가 나를 규정하는 것. 내가 나를 평하는 것.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 내가 나를 심사하는 것. 이것을 없애버려요. 인간으로서 이거는 불가능합니다. 왜냐 하면은 인간은 내가 나를 규정해서 나오는 나를 또 내가 여기에 다가 되물림해서 거기에 또 집어넣거든요. 내가 나를 규정해서 내가 나를 또 집어넣어가지고 내가 그만큼 발전했다 성화했다 우기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이기 때문에. 이 순환구조를 인간은 버리지를 못해요.


누가 공격을 해줘야합니다. 공격을 할 때 어떻게 하느냐? 십자가로 공격하지요. 십자가 뾰족하잖아요. 머리 콕 찍어. 십자가로 피날 때까지 때려버리지요. “내가 규정한다니까. 점수를 줘도 내가 점수 줘. 네가 너한테 점수주지 마. 네가 그러면 한 평생 네가 힘들어져. 인생이.” 때리면서 말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얻어맞고 내게 오라 빈 몸으로” 인생이 내 인생이 망쳤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저주받았다 “네가 규정하지마. 내가 규정할거야 말씀으로” 멍이 퍼래가지고 온 천지 얻어맞지요.


마태복음 10장 24절 25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사람들이 예수님 보고 귀신 대장이라고 했으니까 예수님께 부름을 받은 너희들이 귀신 집에 있다하면 그걸로 네가 영광인줄 알아라. 왜? 그 규정은 주님이 받았던 규정이 그것이 그대로 우리한테 공유되거든요. 아까 하늘나라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늘나라는 주님이 갖고 있는 것 같이 갖고 있을 때 하나님 나라라고 했죠.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규정하지 않아야 되는데 그 우리가 우리를 규정해 왔던 그것이 마태복음 10장 35절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환경이 타인의 시선이 내가 그들의 요구에 맞춰준다고 해가지고 우리는 내가 그들의 요구에 맞춰서 내가 나를 규정하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집안 식구가 가장 가까운 식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어떤 제자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예수님을 막 따르고자 하는데 마침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그래서 그 제자가 그냥 상식선에서 이야기한 거에요. “우리 아버지 장례 치르고 예수님 따라 가겠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이 섭섭한 말씀을 해요. “죽은 자는 죽은 자가 장사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 제자 아버지를 죽은 자로 간주해버려요.


생명나무가 없는 자는 죽은 자에요. 생명나무가 없는 자.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은 자에요. 죽은 자면서 사람들이 안 죽었다고 살았다고 우기는 그 이유가 뭐냐? 그게 진짜 현실인데 현실이 뭐냐?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현실에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이 가상인 것을 티를 내는 흔적입니다. 흔적. 흔적이에요. 있다가도 없어지는 흔적이에요. 도로에 타이어 자국 많지요. 태풍 와서 그 자국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지지요. 결국은 없어질 거에요.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있다가 곧 없어질 거에요.


야고보서 4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마치 그걸 안개와 같고 물방울과 같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냥 요새말로 하면 타이어 자국 같은 것이다. 내가 지나간 타이어 자국 위에 다른 차 지나가버리면 내 타이어 자국은 밑에 눌려가지고 보이지 않잖아요. 이 세상은 또또또또 내가 지나간 인생 위에 있고 또 위에 있고.


그래서 나이 좀 들어가지고 생활 좀 안정돼가지고 과거 어릴 때 고생할 때 내가 이렇게 고생했다 내 자식들아 손자들아 내가 이렇게 어려운 데서 고생했다고 자기가 고생한 거 보여줄라고 관악구 봉천동에 가보면 벌써 개발되어있어. 누구 허락도 없이 내 과거를 다 지워놔버렸어요. 내 허락도 없이. 산 넘고 물 건너 개울가에서 놀던 복사꽃 피는 복사꽃 어디 있습니까? 전부 다 개발해가지고 아파트 세워 가지고 전부 다 신혼부부들 앉아있는데. 아저씨 누구세요? 이러는데.


우리는 우리 있는데 겹치고 없습니다. 우리 자신은 없어요. 지워지는 흔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하루씩 지워져요.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는 거에요. 진짜.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는 거에요. 누구로부터? 내가 알던 나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내가 누군지를 전에는 몰라서 섭섭했는데 이제는 모르는 게 나아요. 어차피 내일 되면 또 다른 내가 되어있으니까. 내가 누군지를 알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나라 의를 규정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쓰느냐? 그 종들 가운데서 문제점 있는 종들 지역을 겨냥해서 공격하지요. 누가복음 다시 한번 봅시다. 12장 39절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지금 이런 말씀도 일방적으로 공격한다는 뜻이에요. “계세요?” 이렇게 오는 게 아니고 공격합니다. 마치 “도적”같이.


그 왜 그러느냐? 왜 공격하느냐? 너희가 공격받을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하는 거에요. 왜? 그들은 반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언제 반란했습니까? 주님께서 계속 비유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포도원, 내가 왔으되 인정하고 않고 이게 뭐냐 하면은 전체를 하나의 반란군대로 보는 겁니다. 반란군으로. 공격하는 방법은 어떻게 공격하는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느 한적한 주택가에 이런 담장이 있는데 담장에 도둑이 들어왔어요. 차들이 몇 대 이렇게 주차되어 있는데 형사가 와가지고 도둑정도가 아니고 살인사건이 났다 합시다. 강도해서 사람죽고 했을 때에 형사가 와가지고 이 주변에 뭘 보느냐? CCTV를 보고 그 다음에 여기에 있던 차에 있는 블랙박스를 조사하겠지요. 그 시간에.


그런데 이상하게 차가 많이 주차된 게 아니고 한 대 정도 주차되어 있고 CCTV가 한 대 있는데 다른 건 다 살아있는데 새벽 2시에서 4시 사이의 CCTV가 꺼져있다 해 봅시다. 한결 같이 이쪽 CCTV도 꺼져있다면 우연이 아니잖아요. 누가 의도적으로 안 걸리게 했지요. 그러니까 꺼져있는 CCTV를 찾는 거에요. 찾는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수사에 들어가십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CCTV가 꺼져있는. 꼭 꺼져있는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지금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 전에 사도되기 전에 사울이었잖아요. 사울은 열심히 그 당시에 뭐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서 충성하고자 충성에 열심에 열심을 더해서 예수 믿는 자를 이단으로 봐가지고 체포하고 체포해서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을 했잖아요. 주님께서 어디를 겨냥하느냐 하면은 바로 사울에게 찾아와버려요. 사울에게 딱 찾아 와버리면 지금 사울이 농땡이입니까? 아니죠. 하나님께 열심이죠.


하나님께 열심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걸 이야기하는 거에요. 내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다 지금 이 말은 그 당시 사람들이 유대인들은 여호와가 계시고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에게 나갈 때 이미 길은 확정되어있습니다.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어요. 그 길을 바리새인이 가장 표준적이라고 생각한 그 길이 완전히 정착되어있는 상태에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일등 중에 일등이 누구냐? 사울이잖아요 사울. 그 사울에게 주님이 찾아와서 네가 나를 핍박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울 뿐만 아니고 다른 이 모든 계통 자체가 문제 있다고 주께서는 일거에 알려버리죠.


그래서 사도행전이나 서신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전에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이제 예수를 전한다 라고 되어있어요. 갈라디아서인가 나와요. 전에 예수님을 심하게 핍박하던 자가 오히려 되려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누구든지 성령 받았다고 치면 바로 이와 똑같은 현상을 보여야 된다는 거에요 이게. 그게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왜냐? 주님은 나를 뭐로 규정했다? 범인으로 규정했다는 이 사실이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게. 뭔데 나를 이렇게 진정한 죄인으로 인정해주십니까?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이런 복이.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11장 42절에 보면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되었지요. 예수님께서 기도를 했는데 기도 내용이 이래요.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뭐하자?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 전에 그들은 뭘 믿었습니까? 자기를 믿었지요.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자기를 믿었잖아요.


그러니까 자기를 믿은 이 방향, 자기를 믿었다 이 말이죠. CCTV를 단절, 이걸 끊어버린 거에요. 나를 믿었는데 이게 열심이었는데 이게 하나님 쓸모 있었다가 돼요. 쓸모없는 행위가 아니고 나를 열심히 믿는 것이 너무나도 쓸모 있었던 거에요. 가장 주님과 정면으로 부딪히는데 아주 적합했던 겁니다. 천국 가는 것과 정반대로 가는 모델케이스가 되어버린 거에요.


이것을 죽었던 사람이 압니다. “나를 믿게 함이라” 해놓고 주변에 사람들이 나사로 보고 사람들이 믿었습니까? 정작 믿은 사람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은 믿은 사람은 나사로 본인밖에 없어요. 나사로 본인. 왜냐하면 더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을 이미 주인을 좋게 하기 위해서 종으로 넘어간 종과 주인의 관계가 엮여져 있음을 넘어간 그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고 되어있어요. 뒤에 보면. 믿었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나 이 믿은 사람이 그 믿음은 파생된 믿음이에요. 나사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산 것을 보고 믿어버리면 이건 파생된 믿음이에요. 이건 오래 가지를 못해요. 나사로를 죽은 자들 가운데 살리신 그분이 죽어야 돼요. 그래야 이게 영원한 믿음이 되어버립니다. 나사로 죽었다가 살아나니까 ‘아 이제 예수 믿어야지. 예수 믿어야지’ 하는 그 사람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되면 안돼요.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돼야 돼요. 예수님의 마음과.


나사로가 살았다는 이 말은 무엇과 비교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은 영원히 인간들 눈에서 사라졌다를 흔적을 보여주는 거에요. 나사로가 살았잖아요. 나사로가 산 것을 믿으면 안 되고 나사로를 살리신 분이 영원히 인간 곁을 떠났음을 믿어줘야 돼요. 우리 곁에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이 되어야 우리는 나사로와 동격이 됩니다. 나사로는 본인이 살았다는 것을 믿으면 안 되고 예수님이 나를 살려준 것을 곧 죽어야 될 두 번째 죽어야 될, 나사로도 귀찮아요 귀찮아. 군대 갔다 왔는데 제대했는데 또 가는 것 같애. 이미 죽어서 쉴랬는데 또 살려놨단 말이죠.


그러니까 살아난 나를 나사로는 믿으면 안 된다니까요. 내가 죽었다가 살았다를 믿으면 안 되고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돼요. 누가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살았기 때문에. 나는 사나 죽으나 이거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거라고 믿어야죠. 살아있는 주님이 중요하지 죽었다 살아난 내가 안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그런 믿음이 될려면 이건 성령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돼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더 이상 자기를 규정할 필요가 없고요 예수를 믿는 그것이 예수를 믿으면 뭘 주는 게 아니고 예수 믿음 자체가 이미 얻을 거 다 얻은 거에요. 왜? 나를 안 믿어지기 때문에. 나를 안 믿기 때문에. 세상에 나를 안 믿는 사람만큼 편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그게 자유 아닙니까 나를 안 믿는 것. 내가 나를 규정하지 않는 것, 내가 나를 평가하지 않는 것.


그래서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 같으면요 사라진 예수님을 믿는 자잖아요. 본인도 같이 이 땅에서 말은 잠시 살지 모르지만 사실은 이미 죽은 자. 내가 죽은 자이기 때문에 나를 더 이상 믿을 필요 없지요. 그러면 주위에서 날파리 벌떼까지 달려듭니다. 주위에서 성도보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 그 깊은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아야 돼요.


너는 왜 예수를 믿어? 비난이죠. 나처럼 나를 믿어야지. 주위 사람들이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모르면서 동정하고 또 달래고 협박 공갈하는 게 뭐냐 하면은 “나처럼 나를 믿으란 말이야. 너는 왜 예수를 믿어!” 이렇게 핍박을 하는 거에요. 내가 믿는 예수처럼 그렇게 믿어. 이게 내용이 그 안에 포함이 되어있어요. “나는 내가 예수 잘 믿고 있다는 그 나를 믿는데 너는 왜 나처럼 예수를 그렇게 믿어야지 왜 너는 예수를 믿어?”


이걸 우리 복음 쪽에서 생각하면 어떻게 반격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반격이 돼요. 이런 사람한테 이렇게 반격할 수 있습니다. “너는 왜 천국 간다고 하면서 왜 자꾸 지옥으로 가는데?! 말은 나처럼 예수 믿고 천국 가 라고 하면서 왜 자꾸 대들어? 왜 자꾸 지옥으로 가는데?! 답답해 미치겠네” 거기에 대해서 누가복음 12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 가짜 종들은 자기가 종이라고 우기면서 자기 부하 직원들을 자꾸 두는 거에요.


내가 만만한 다룰만한 사람들을 자기 종으로 다루어 가지고 종으로 다루는데 그 종으로 다루게 되면 그 종들은 어디까지 오느냐 하면은 내 선에서 멈추어버려요. 나를 밟고 넘어가지를 않아요. 나를 밟고. 이렇게 하니까 제가 주일날 설교한 게 생각나요. 주님을 만나야 되는데 복음 전하는 목사를 만나고 있어. 그러고 됐데. 뭘 됐어요. 뭘 됐는데?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 지지도 않았다고 했잖아요. 사도 바울이 자기를 믿으라고 한 게 아니에요.


‘사라진 예수를 믿으라. 그래야 너희들도 사라질 수 있다’ 그겁니다. 사라진 사람은 더 이상 규정의 대상이 아니다. 곧 사라질 건데. 곧 없어질 건데. 15분 뒤에 사형당할 사형수에게 적금 넣을래요? 적금 들어보세요. 보험 하나 들으세요. 이럴 수가 없잖아요. 그때 그 사형수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나이에 15분 뒤에 죽는데 난 더 이상 나를 믿지 않습니다.


이미 나는 없어지기로 이미 결정된 거거든요. 종이 없어져야 아들이 될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종이 없어져야. 종의 자리 옆에 아들의 자리는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종이 됨으로서 아들의 자리가 등장하는 거에요. 주님께서 여기에 악한 종을 공격함으로서 그 나라 의가 이 세상에는 아예 없었다라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중간 종, 악한 종의 노예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 권세가 무섭고 권력이 무서워서 사람이 사람에게 종이 된 거에요.


누가복음 17장7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그러니까 “네가 종이냐?” “예.” “그럼 사라져라” 이겁니다. 왜요? 내가 너희의 종이었잖아. 종노릇 다하고 주님은 사라졌지요. 너도 종노릇 다하고 사라져버려라. 얼쩡거리지 말고. 그런데 권사님도 아시다시피 사라지는데 너무 오래 걸려요. 그렇죠? 좀 이렇게 서프라이즈 해서 자는 중에 없어지면 되는데 아침에 눈 뜨면 또 살아있네. 허연 백발로. 오늘 하루 스케줄 뭐 해야 하는데? 또 살아가지고. 그거 왜 살려주겠습니까? 네가 죄를 지어야 돼. 아직 남은 죄가 있는 거에요. 아직 더 질 죄가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루하루 살면서 이 죄 짓는 즐거움이 보통 즐거움이 아닙니다. 이걸 억지로 죄인이면서도 말도 안 되는 착한 일 하니까 사는 게 힘들어 죽지요. 죄인이 죄 지어보세요. 이기주의에다가 자기 고집과 돈 밝히고 남한테 안 질려고 하고 남한테 지는 거 죽기보다 싫고 그거는 뭐 자동적으로 가만히 있어도 바디프렌드에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마 다 해줘요. 가만 있어도 죄가 막 나와요. 가만 보면서 연예인 보면서 이혼해라. 쟤 왜 또 나오냐 꼴 보기 싫은데 빨리 안 죽고. 쟤 아들 망했데 뭐 이래가지고 고소하고 난리고. 가만 있어도 이재명 안 잡아가나? 이거 뭐 바디프렌드, 오늘 제목을 바디프렌드로 할까. 알아서 안마를 다 해줘요. 이 얼마나 즐겁습니까, 인생이.


누구한테 지기 싫어서 발악을 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이래서 내가 사라져야 되는구나. 그런데 아직 안 사라지는 것은 지을 죄가 더 남아있기 때문에 안 사라지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주님께서 나를 지목했다는 것은 내 CCTV를 수상하다고 일부러 지목했다는 그 자체가 복이에요. “너 찍었어!” “뭘로요?” “죄인으로!” 네가 상한 심령으로 찍었다고요. 다윗은 말하기를 “감사합니다. 제가 나의 근원을 알았고 바닥을 알았고 내 마지막을 알았고 내 시작을 알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나의 주인입니다.” 그거면 됐지요. 당신은 나의 주인입니다.


책임은 내가 종이 지는 법이 없어요. 종은 종대로 하고 책임은 주인이 다 알아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도의 특징은 내가 예수님의 종이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무한한 영광으로. 어떤 자리에서도 나는 종이 된 것을 어떤 종? 누구와 결합된 종? 대속물의 종이 된 것을. 왜냐? 그분이 먼저 나의 종이 되셔서 주님이 되셨기에 이제는 그 주님이 종이 필요하니까 그 종으로 ‘나’라는 죄인을 강도 같은 죄인을 창기 같은 죄인을 대속물로 결합시켜줘서 하나님의 의인이 되게 하셨다 이 말이죠.


이제 말씀을 정리해봅시다. 오늘 48절까지 한 셈이 됩니다. 40절에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여기에 대해서 예비하고 있었던 사람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구원을 받나? 주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이 모든 말씀이 나를 믿으라는 너 믿지 말고 나를 믿으라는 그런 취지로 성령께서 이 말씀을 사용해서 심어줬기 때문에 주께서 이 말씀대로 그대로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뭐가 살아있는가?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있어요.


그렇다면 끝으로 여기 46절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라고 되어있지요. 바로 이런 사실까지라도 주님께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통해서 이미 역사적으로 이렇게 다 보여줬어요. 다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그동안 없었었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우리가 주님과 성령에 공유했기 때문에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해석하게 되면 우리는 어디에 속합니까? 우리는 죄의 종에 속하지요. 이미 다 과거지사지만. 하나님의 원리와 원칙을 하나님께서는 유지하고 끝까지 그걸 멈추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악한 일에 대해서 그 역할을 우리가 즐겁게 해나가는 겁니다. 죄의 종으로서 비로소 죄의 종이 뭔지를 유일하게 알게 되는 자가 천국에 의의 종이에요. 천국 백성입니다.


말씀이 예수님과 경유해서 해석된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은 바로 천국 백성 밖에 없어요. 왜? 하늘나라와 공유되어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는 여기 나오는 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전부 다 누구한테 해당됩니까? 우리한테 해당되지요. 아주 즐겁게 이 역할을 하는 겁니다. 뭐 역할해도 괜찮아요. 악한 역할해도 개런티 나옵니다. 나쁜 역할해도 욕 얻어먹어도 결국은 우리는 그 나라, 의 받게 되어있어요. 왜? 역할이 그 역할이니까요.


순한 역할은 누가 한다? 주님 홀로 하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을 받았으면 이 말씀이 그대로 오늘날 우리에게 이 세상에 적용된 것을 흔쾌히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만이 있는 이 세계에 우리가 지금 그냥 나그네로서 여행하듯이 관통하고 지나가고 있는 중이에요. 폭풍 속으로 말씀의 폭풍 속으로 지나가면서 여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을 절대로 평가하지 마시고요 책임지지 마시고요 모든 것은 말씀대로 그냥 이루어질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주인이 따로 있으니 감사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노릇 행세한 것에 대해서 이게 얼마나 엄청난 잘못인 것을 깨달았사오니 이제부터 어설픈 주인행세가 그냥 어설프게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면서 이 육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께서 시키는 대로 행할 수 있는 저희들 그런 자유를 허락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강남-누가복음 12장 47절 (주님과의 공유) 220906b-이근호 목사.hwp (164.5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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