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22-11-16 07:03:13 조회 : 49         
20221114a 부산강의 : [시편]53(37:1)-창조자의 리듬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20221114a 부산강의 : [시편]53(37:1)-창조자의 리듬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37편 하겠습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행악자, 악이죠. 악에 대해서 시기하지 말라. 이것은 왜 그러냐 하면 여기 형벌이 준비돼 있어요.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받는다. 물론 율법대로 살면 복을 받지만 살지 않았을 경우에는 저주받는다는 말은 모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이유가 네가 잘될 것이라는 걸 생각나게 하는 게 아니고 네가 법을 어겼을 경우에는 저주받는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거예요. 율법을 준 것은.

그래서 형벌은 뭐냐 하면 기억나게 하는 게 형벌입니다. 형벌은 때리는 거예요. 때림으로서 내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나게 하고, 형벌이니까 맞는 거죠. 얻어맞는 것. 고통을 얻어맞는 것을 또 다시 기억나게 만들어요. 맞았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만들어요. 그래서 모세 율법에 무엇이 따르느냐 하면 여기에 플러스 되느냐 하면 제사법이 따르게 돼 있어요. 십계명 같은 제사법이다.

제사법은 뭐냐 하면 희생에 관한 겁니다. 희생을 기억나게 하는 거예요. 우리 삶에다 희생을 집어넣고 그 희생을 새록새록 모든 일어나는 사태에 대해서 기억나게 만드는 겁니다. 이것은 근원적으로 우리를 인간 자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악인으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되는 겁니다. 인간을 악인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희생도 여기 같이 결합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왜 악인인가? 인간에게 선인이 있고 악인이 있는 게 아니고 인간 자체가 악인이 되는 이유가 뭐냐? 사람들은 마귀의 정기라 하지요. 귀신이죠, 그냥. 악마에 사로잡혀서, 이것은 히브리서 2장 15절에 나오고, 디모데후서 2장 16절에도 사로잡힌다고 나오는데 인간은 이미 사탄에 사로잡혀있어요. 마태복음 12장에도 나와 있고요.

인간은 악마에, 귀신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구분해볼게요. 살고 싶어 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 이게 정반대에요. 애들은 살고 싶어 합니까, 살아갑니까? 그냥 까불고 웃고 배고프면 살아가지요. 요양병원의 노인네들은 살고자 합니까, 살아갑니까? 그냥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정반대에요. 살고 싶은 것은 죽음의 귀신을 더 가까이 온 몸으로 느낀다는 거예요.

살아 있는 것은 죽음의 귀신을 사태파악이 안 된, 못 느끼는 거죠. 대표적인 것이 이태원이죠. 이태원 핼러윈 파티. 놀러가서 죽은 거예요. 놀다 죽고 싶어서 죽은 거예요. 그냥 자기 집에서 노는 게 아니고 같이 뭉쳐서 이렇게 놀다 죽을래, 하다가 죽은 거예요. 이들이. 그들은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노인네들은 이미 귀신에 사로잡혀있지 죽음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냥 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살아 있는 게 당연한 걸로 여깁니다. 10대, 20대 살아 있는 걸 당연하게 여겼어요. 철이 없는 거죠.

다시 이야기해서 인간이 철이 없는 것은 바로 자신이 살던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는 고통, 그런데 그 고통에 대해서 무엇이 누락이 됐느냐 하면, 자기가 만든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키는 하나님 자신의 고통을 인간은 망각해버린 겁니다. 그러며 하나님의 고통이 인간 속에 들어오는 방법은 뭐냐 하면 약속을 통해서 들어오게 돼 있어요.

여자의 후손(메시아)과 뱀의 후손의 만남에서 곱게 만납니까, 고통이 있습니까? 고통이 있지요. 둘 다 인간으로 나타나요. 여자의 후손도 인간으로, 그러니까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을 집어넣습니다. 사람의 요소를 집어넣으면 여자라는 후손으로 오시는 거예요, 메시아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요. 사람의 요소를 집어넣는 거예요. 왜냐하면 악마가 인간 요소 속에 이미 들어있기 때문에 인간 대 인간의 만남입니다.

정리하면, 악은 뭐냐? 악은 인간과 상대하는 것. 오늘 시편 37편 7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라고 돼 있지요. 여기 3절에 봐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라고 돼 있지요. 지금 시편은 뭐를 권고하고 있느냐 하면 사람과 사귀한 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사귀란 말입니까? 하나님과 사귀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 말은 사람과 사귀지 말라는. 사람 중에서 의인과 사귀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이 들지요.

시편 37편에 사람 치고 의인은 없어요. 사람과 사귄다는 것은 바로 같은 인간이 같은 악인이 악인과 사귀는 거예요. 교회 왜 옵니까? 사람과 사귀려고 옵니까? 아니지요. 사람과 상대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교회는 병원입니다. 내가 정신적으로 뭐가 문제 있는지 아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를 병원으로 간주하지 않고 제가 보기에는 교회를 화장실로 봐요. 싸는 데. 오줌 싸고, 변 싸고, 그리고 술 먹고 토하고. 자기의 분노를 배설하는 곳으로 여기고 있어요, 사람들이 교회를. 자기의 분노를 배설하는 거예요.

누구 붙들어서 싸움질해서 자기 분노 터뜨리는 곳이 교회입니까?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악과 악의 만남에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분통과 원통과 절통이 발생이 돼요. 저 인간 죽여야 되는데 내가 성질 좋아서 참는다. 이걸 갖고 있다가 교회 와서 애꿎은 주님 붙들고 대듭니다. 대들고 같은 교인들 붙들고 월화수목금토, 6일 동안 친구한테 당했고 가족한테 당했고 손자한테 당했고 남편/아내한테 당한 걸 교인, 집사 붙들고 드디어 분풀이를 해댑니다.

옷 꼬라지하고는, 머린 어느 미장원에서 했는지 몰라, 이런 식으로 그냥 교회가 사람 멱살 쥐고 내부적으로 싸움하는 곳이 돼버렸어요. 자기의 분노를 배설하는 곳이 되고 말았단 말이죠. 물론 그래줘야 복음이라는 의사가 있어서 말씀으로 진단을 내리죠. “아주 썩었어. 지독하게 썩었구나. 지난 한 주 동안 뭐했어요? 왜 이리 썩었어요?” 그런 진단을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받아야 돼요. 왜? 병원이니까요. 참고로 병원에도 화장실 있습니다. 진단받고 토하고.

사람들이 놓치는 것은 이미 악마에 귀신들려서 자기 아픔, 자기 고통, 자기 힘들게 살아가는 것밖에 몰라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것, 하나님이 자기 고통을 자기 창조한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데서 오는 고통을 담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잊어버리죠. 인간들은 인간과 상대해서 자기 어떤 것과 좋게 하느냐 하면, “내가 벌 받을 이유 없다. 내가 이 땅에 고생할 이유는 없어.”

이것 과시하는데 급급하다면 아벨 같은 경우에 희생자잖아요. 창세기 4장에, 아벨의 특징이 뭐냐? 하나님이 아벨은 자기 사람으로 거둬들였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벨의 운명은 홀로 자기가 만들어가는 운명이 아니고 누가 지배하는 운명이에요? 하나님이 지배하는 운명이고, 하나님이 지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을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누굴 포섭했다고 보시면 돼요. 아벨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아픔을 그 인생에 그대로 담는 겁니다.

담아버리면 아벨은 자기 인생을 자기 원대로 소원대로 갈 수 없어요. 주님의 뜻대로 이끌려가는 거예요. 그 함께하심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걸 믿음이라 이야기하는 겁니다. 믿음은 혼자서 믿는 게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나 성립되는 관계가 믿음이에요. 아벨은 믿었지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함께하지요.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과 함께합니까?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듣지 않음으로써 나는 너와 함께 있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가인을 통해서 뭘 보여주느냐?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을 때 그 가인의 운명을 보라는 거예요. 그 하는 짓거리를 보라. 무슨 짓을 하는지. 그래서 여기서 하나 정리할 수 있어요. 이것 하나 정리만 되도 성경 전체를 꿰뚫을 수 있습니다. 악은 드러나고 의는 숨어 있고. 세상에 눈에 띠는 인간들은 다 악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악은 드러나요. 그래서 사람과 사귄다는 것은 악한 인간과 사귄다는 거예요. 사람을 의식한다는 것은 악한 인간을 의식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과 사귄다는 것과 시편 37편에서 반대말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다. 또는 하나님 앞에 있다. 하나님과 사귄다. 그런 뜻입니다. 여기에 3절 봤지요.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 그리고 7절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그다음에 9절에,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 그리고 23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24절에는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계속해서 시편 37편은 여호와와 함께하기를 바라고 있는 거예요. 여호와와 함께한다는 말은 뭐냐? 사람과 사귈 생각이 없는 것, 사람과 상대할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과 상대하게 되면 누가 잘났나, 시합할 거잖아요.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37편 1절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그냥 내비 둬, 이런 뜻이거든요. 그냥 내비 두라는 거예요. 어차피 혼자 살겠다는 데.

혼자 살겠다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거기에 귀신과 함께, 여긴 귀신이 아니고 악이지만, 악과 함께 있는 거예요. 악과 함께 있는 상태를 그걸 부러워한다는 것은 그 마음가짐이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자랑하기를 나는 벤츠 탄다. 그 벤츠에 무거운 골프장비 있다. 이걸 만약이 어떤 사람이 자랑한다면 내비 둬요. 벤츠 타고 골프 하든 말든 그냥 내비 둬요.

이걸 자랑한다는 것은 그걸 최우선으로 자랑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무엇이 없는 거예요? 나는 이것보다 더 귀한 건, 인생 성공한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걸 벤츠의 증인, 골프의 증인. 왜 이걸 자랑하느냐 하면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사람을 상대하려고 사람을 의식하고.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희생이 체화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체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몸에 배기지 않았다.

옛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한 게 있어요. 경건훈련 같은 것을 지금도 수도원이나 기도원에서 하고 있고요. 경건훈련은 하나님의 계명을 체화시키는 훈련이에요. 이 원리는 뭐냐 하면 남자가 군에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그 원리와 똑같아요. 육신의 훈련을 하게 되면 인간이 말씀에 스며들지 않겠느냐 기대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원이나 수련회하게 되면 어떤 마음에 남는 구절이 자기에게 남는다고요. 보통 몇 개냐 하면 인간은 기억력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다섯 개에서 여섯 개 정도입니다. 대여섯 개 해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을 하지 않겠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수도원들, 쿰란공동체 전부 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버틴 거예요.

나는 ~을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겠습니다, 라는 말은 인간은 계명대로 산다고 표현한 게 아니고 다시는 이런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는 부정적인 요소로서 이걸 받아들이게 돼 있어요, 인간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 사람은 노리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그 공동체와 사회가 주는 이점, 그리고 혜택을 나도 좀 같이 누릴 수 있겠습니까, 라는 기대감을 갖고 나는 앞으로 이런 짓들은 하지 않겠습니다. 마약하지 않겠습니다. 나쁜 동영상 보지 않겠습니다. 일종에 반성문 쓰듯이 스스로 갖고 있어요.

이게 체화입니까? 말씀이 그 사람 속에 합치된 거예요? 합치된 게 아니에요. 군에 갔다 오면 인간 되는데 병장 달면 다 날아가죠. 제대만 앞두면 다 날아가요.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37편에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런 식으로 체화시킬 수 있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계명을 내가 지켜서, 그걸 내가 훈련해서 체화시키면 굳이 메시아가 이 땅에 올 이유가 없습니다. 율법 자체도 잔소리고요 하늘에서 돌 판으로 준 것도 잔소리지만 직접 사람이 되셔서 해도 잔소리 밖에 들리지 않아요.

기본적으로 인간은 살아가는 게 아니에요. 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살고 싶어 하는데 이런 계명이나 율법, 또 예수님의 산상설교 같은 잔소리 들어버리면 인간이 살고 싶어 하는 것이 바뀝니까? “나 안 살고 싶어. 나는 죽고 싶어.” 이래 바뀌겠어요? 나는 더 추가적인 새로운 하늘나라 정보, 지혜를 더 획득해서 내가 살고 싶어 하는데 보다 더 유리하도록 조치하겠다는 그런 각오와 결심뿐이죠.

그걸 제가 주일 설교에서 오기라고 한 거예요. 그냥 오기만 더 늘어날 뿐이에요. 자기 마음속으로 오기 안 되니까 아예 복장부터 바꿔서 오기부리는 것, 이게 바로 수녀, 신부, 그리고 땡중. 머리 홀라당 깎아버려요. 남자는 머리 깎을 수 있어요. 심지어 여자가 얼마나 오기가 심했으면 여승 된다고 머릴 다 깎습니까? 여자의 머리카락은 아름다움의 전분데 그 머릴 깎는다는 것은 얼마나 독합니까? 그런 식으로 뭐하고 싶어요? 그런 식으로 깨끗하고 살고 싶은 거예요. 왜? 깨끗하게 살면 죽음의 공포가 사라질 줄 알고. 뒤에서 마귀는 박수를 치지요. 걸려들었다고. 아주 철저하게 걸려들었다고.

악은 인간을 놔주질 않습니다. 절대로 한 번 문 미끼를 악마가 놔주질 않아요.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인간은. 살고 싶다고 해서 사는 게 아니에요. 살고 싶다는 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나 예수 믿고 천국 갈래.”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나 살고 싶어. 보세요, 앞에 누가 있습니까? ‘나’가 있잖아요. 성경에서 이 나를 부인하라 했거든요. 나를 비워놔야 돼요. 나를 빈 칸으로 비워놔야 돼요.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은 아벨처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거둬들인 자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내 소원 살고 싶다는 그 소원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찾아오시면 그 소원을 삭제시켜버리지요. 살고 싶다가 하나님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살고 싶다가 돼버리면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킨 하나님의 그 조치가 모독 받게 돼요.

“하나님, 행정처리 잘못됐습니다. 너무 심한 일이 아닙니까?” 이런 어떤 악마적인 하나님에 대한 악마의 반발심을 그대로 지닌 채 어딜 간다고요? 천국 간다고요? 천국에서 데모할 일입니까? 천국에서 시위할 일입니까? 심심해서 못 살겠다. 이게 무슨 천국이냐. 손흥민이 살려내라. 영국 프리미어리그 살려내라. 롯데 야구팀 살려내라. 부산 갈매기~ 하면서 거기서 야구 즐기고 싶은 거예요.

아마 진짜 이런 살고 싶다는 심정으로 천국을 생각한다면 천국 가서도, “짜장면 시키신 분?” 분명히 나올 거예요. “탕수육, 나 부먹 할게. 찍먹 말고 부먹입니다.” 이것 주장할 거예요. 근본적으로 인간이 달라지지 않는 한 천국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37편에 나오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제가 1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이런 인간으로 달라져야 된다는 거예요. 이 계명 마음속에 새긴다고 우리가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이것 볼 때는 앞으로 투기 안 해야지, 불평하지 말아야지 하지요. 그런데 옆에 있는 집에서 살살 약을 올리면, 이번에 우리 애 검사 됐다. 네 아이는 지금 어디서 뭐하며 어떻게 지내노? 자기 방에 들어가서 음악 듣고 벌써 폐인 된 지 삼 년이고 바깥에 나가지도 않고 있고.

자폐증으로 있는데 그때 불현 듯 시편 37편이 기억나서 불평하지 말고 투기하지 말지어다, 이것이 기억난다면 성경책 집어던져버려요. “나한테 안 맞아. 성경 너무 안 맞아요.” 성경책 집어던지는 대신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이 집에 개 키우는 거예요. 성질 풀 때 만만하거든요. 자기의 온화함과 단아함과 자비가 넘침을 만만한 개를 다루는 거죠.

그래서 주께서는 개 키우지 말고 행악자를 키우라는 거예요. 내 성질만 돋우는 행악자를 키워보지요. 그래서 부부가 되신 거예요. 축하드립니다. 왜? 하는 족족 내 성질만 돋우는 인간들과 희로애락喜怒哀樂, 희가 없어요. 락만 있지요. 살아봐야 혼자 살고 싶은 본성이, 이것이 나한테 떠나지 않았다는 걸 발견합니다. 일찍 그걸 깨달은 사람은 일찍 각 방 쓰고 육십 넘어도 같이 있으면, 가난해서 원룸에 있으면 할 수 없지만.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병들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죄인이라 하니까 너무 식상하니까 다른 말로 바꿔서 환자를 부른 거예요. 죄인보다 더 독한 말이 환자에요. 환자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고치지 못하는 환자.

그런데 교회마다 고칠 수 있다면 나오라고 하니까 이게 말이 안 되지요. 못 고치는 데. 못 고친다는 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교회가 있어야 돼요. 고치지 못합니다.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럼 내가 환자라는 것을 아는 것만 해도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이죠. 고칠 필요 없지요. 그것을 계속 유지해야 되니까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37편 내용이 시작됩니다. 시작을 하나로 묶는 원리를 이야기할게요. 악은 모든 것에 대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 이게 악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우리에게 일어났던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걸 이야기했는데 성경은 악을 이야기하면서 악의 뿌리까지 이야기해요. 그래서 시편 37편에 국한되는 게 아니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운동회 때 만국기 펄럭이는 것처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줄 달아놓고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전부 다 거기의 내용들이 한 줄에 담기게 만들어요.

악이라 하는 것은 지금 그 시대의 악이 아니라 악의 시작부터 끝까지 고드름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그 악이 우리 시대에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악의 계통 발생이 악의 개체 발생 속에 반복된다. phylogeny계통 발생이라 하고, 개체 발생은 ontogeny. 이게 뭐냐 하면 개인이기 때문에 전체를 모르잖아요. 우리는 내 인생이 구십 밖에 안 되니까 전체를 모르잖아요. 성경은 전체를 이야기하는데 계통을 이야기해요. 뱀의 후손부터 해서 요한계시록까지.

악이 숨겨진 계통 발생이 인간의 개인을 통해서 개별자를 통해서 그때그때 그 시대에 반복해서 드러나는 거예요. 반복해서 드러나는데 악의 특징이 뭐냐? 모든 것에 대해서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요지부동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까운 친구나 식구들한테 복음 전하면 요지부동인 사람 있지요. 변함이 없어. 뭐가 변함이 없느냐 하면 본인의 이익을 위하여 변함이 없어. 요지부동이에요. 기도를 하던 교회 다니던 뭘 하든 항상 끝은 뭡니까?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는 나를 더욱더 움직이지 않게 하는 기도, 그러한 선교와 헌신과 봉사에요.

악의 특징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은 이것을 성경에서는 계통 발생적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둘로 나눴어요. 인간의 땅의 세계와 따로 분리해서, 땅이란 이스라엘 땅을 말합니다. 땅에 대해서 해볼게요. 오늘 본문 9절 보겠습니다.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뭘 차지한다? ‘땅’을 차지한다고 돼 있지요. 29절에 의인은 뭘 차지함이요?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34절에 보면,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뭘 차지한다? ‘땅’을 차지한다고 돼 있어요.

그러면 시편 74편 13에서 14절 누가 읽어보세요.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됐습니다.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땅에는 하나님의 창조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계속 연발되는 겁니다. 계속 이어져요. 창조를 하실 때 뭘 뽑아내는가? 창조의 원리를 창조에 담아놨어요. 그것이 안식일입니다.

특별히 여러분들에게 창조가 어떤 형식을 갖고 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자와 리듬이에요. 비트와 리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곧 날이라 했지요. 창세기 1장에. 박자라 하는 것은 시간을 딱딱 끊는 거예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한 날, 한 날. 거기서 한 날과 다른 날을 혼동하지 않아요. 딴 날로 간주해요. 염려하지 말라. 오늘 염려는 그 날에 족하니라.

하나님의 때를 날부터 시작해서 영원으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하루를 해서 영원으로 이어지게 하는 거예요. 날이라는 것이 때에서 확장이 되어서 영원한 때가 돼버려요. 출발은 뭐냐 하면 처음에 시간의 끊어짐을 마디를 비트, 박자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예요. 창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괜히 끊어진 게 아니에요. 무슨 날을 목표로 했느냐? 창세기 2장에 보면 특별한 한 날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됐는데 그 날은 보통 날이 아니에요. 특별한 날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안식의 날입니다. 에스겔에 보면 안식의 날이 영원한 계약으로 돼 있어요.

음악에서 ³/₄박자, ²/₄박자, ⁴/₄박자 악보에 이런 것 있잖아요. 쿵짝짝 쿵짝짝,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쿵짝짝 ³/₄박자에요. 왈츠에 이런 것 있지요. 이거는 박자를 정해요. 그런데 음이 <반달>이란 노래에 ‘쿵짝짝 쿵짝짝’은 있는데 내용은 없어요. 올라가고 내려감은 있어요. 그게 리듬이에요.

나를 뭐로 채우느냐? 리듬으로 채우는 겁니다. 그 리듬도 하나님의 창조에 해당되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19편에 보면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날과 밤은 이미 박자에요. 하지만 그들이 날이란 박자가 뭘 전하느냐? 리듬을 전한다고요. 창조의 리듬을 전달해요. 전달, 전달. 그 창조의 리듬이 뭐냐? 히브리서 4장에 보면 언젠가는 무슨 때가 온다? 안식의 때가 온다. 예수님은 이 안식의 때가 이미 왔다.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것이 어디서 이루나? 땅 위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여러 가지 땅이 있는데 그중에서 약속의 땅에서 가장 진리에 근접하고 구체화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안식이 뭔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명기 12장에 보면 안식은 뭐냐? 하나님과 함께 있음,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있음.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있음, 하나님이 아니고 주와, 주가 이름이거든요. 주와 함께 있음. 그 주는 마지막 때에 안식의 때에 드디어 주님이 독생자 예수로써 주로써 등장하면 모든 것은 게임오버, 끝났어요. 모든 게임은 끝난 거예요.

인간은 뭐냐? 리듬의 노리개. 인간은 타악기뿐만 아니고 관현악기도 될 수 있고 바이올린도 될 수 있고 피아노도 될 수 있어요. 인간을 통해서 소리가 나오고 언약이 나오고 주님의 창조의 리듬이 인간을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치 날과 밤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러하듯이. 시편 103편에 보면 피조물들은 성신과 함께 있기 때문에 주의 영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런 노래를 부를 수 있어요.

그러면 그 목적이 있을 거예요. 목적은 응축인데 응축은 뭐냐? 성령 받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생애의 모든 일이 모든 세상을 보이지 않게 있는 sound of silence침묵의 소리가 구체적으로 하나의 소리로 응축이 되는 겁니다. 세례요한도 그중에 하나고요.

리듬이라 하는 것은 파도 타듯이 타야 되는 거예요. 파도가 있으면 보드 타지요. 하와이 해변에. 파도를 지가 만듭니까? 아니지요. 자기가 만들면 안 돼요. 거기에 타기만 하면 돼요. 올라갈 때 올라가주고 내려갈 때 내려가 주면 되고. 때가 있으매 사랑할 때가 있으며 그다음에 미워할 때 있고,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가 있고. 억지 부리지 마라. 아플 때가 있으면 나을 때도 있고, 태어났으면 죽을 때도 있고. 죽음에 대해서 겁내지 마라. 그것도 하나의 삶의 리듬이다. 창조의 리듬이에요.

그러면 우리 같으면 인간도 주의 리듬을 탈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게 구약적 안목이에요. 구약적 안목에서는 우리도 그 정도는 태어나고 헤어질 때 헤어지고 좋아할 땐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구약적 안목에서는 이게 한계가 있어요. 육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온전한 리듬 타기는 신약에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셔야 가능해요.

그 차이점이 뭐냐? 구약적의 땅은 평지에요. 편평한 평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했잖아요. 광야에 산악도 있지만 편평했거든요. 홍해를 보세요. 홍해를 건너왔을 때에 아까 이야기한 요지부동, 어떤 것에도 움직이지 않는 바다가 가로막았습니다. 바다에는 뭐가 살고 있는가? 악마가 요지부동 살고 있어요. 악은 변하지 않아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땅은 창조로 인하여 계속 변화가 모색되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그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계속 달라지는 거예요. 그러나 악마에 묶인 사람은 악에서 못 빠져나온 사람은 어떤 복음의 말을 해도 요지부동, 변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합리적이 아니고 이치가 어긋나서가 아니라 바윗돌 같은 있어요. 뭐냐 하면 귀신 들린 내가 내 안에 변하지 않는 악마가 들어있으니까 악마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그 사람도 변하는 게 뭔지를 몰라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데, 아프데.

제가 어제 낮 설교에서 느부갓네살 꿈 이야기했잖아요. 느부갓네살이 꿈을 꿨는데 꿈 내용은 모르지요. 그래서 다니엘 통해서 꿈의 내용을 보니까 나는 신상이었다. 그것도 금 신상이었다고 드러나요. 나라는 인간이 사물체다. 요즘으로 번역하면 요샌 신상은 안 섬기니까 나는 트로피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하나의 트로피가 되는 거예요.

트로피는 1등할 때 상 탈 때 영광스럽게 될 때 남한테 자랑거리가 될 때 트로피 받잖아요. 나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트로피였어요. 내가 나를 우상화, 우상의 특징이 사물체거든요. 나는 나를 변하지 않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트로피가 되고 싶어라, 이거에요. 자식들 교육시킬 때도, 너 나중에 상 못 탄다, 이게 뭐냐 하면 그 자식을 하나의 딱딱한 사물체로 만드는 거예요.

아빠가 말합니다. “너는 영원한 나의 트로피가 돼야 된다. 우리 가문을 위해서. 내가 그것 때문에 고생고생하면서 너를 키웠다.” 엄마아빠도 자식에게 함부로 말을 하지요. 내가 못다 한 이 한을 네가 이뤄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삼수했는데 서울대학 떨어졌다. 너는 서울대학 가야 돼. 우리 집안에서 의사 하나는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 트로피 이름이 뭐냐? 닥터, 라는 이름이 붙어요.

여러분들 트로피한테 맞아봤습니까? 트로피란 딱딱한 사물체에 맞아봐야 머리에 구멍 나봐야 아아, 모두가 악인이고 영원히 고정되지 않음에서 못 빠져나오는 나만의 고정되지 않음을 추구하는 그런 마음상태로 교회 나오고 세상 살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돼요. 나는 고정되지 않을래, 이건 뭐냐 하면 자기가 최종적 사물체란 뜻이에요. 자기가 최종적이에요, 가인처럼.

그런데 아벨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해요. 주님께서 주물럭거려요. 마음대로 다뤄요. 아픈 것도 내 마음대로 못 아프고 건강한 것도 내 마음대로 건강 못해요. 아내나 남편 만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해요. 육십 대 여자분들 그런 이야기하지요. “내가 이십 대에 너무 예뻐서 선을 백 번도 넘게 봤는데 꼴랑 만난 게 네 아버지다. 그때 내가 얼마나 인기 좋았는데 내가 고르다 고른 게 네 아버지라 이 모양 이 꼴 되었다.” 아주 복음적이죠.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는.

편평한 평지에서 구약은 한계가 있어요. 모든 것이 수평적이에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특히 요한복음에 그런 게 많은데 주님께서 땅을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이 땅에서 의인은 뭐와 살 수 없다? 악인과 함께 살 수 없다. 이게 시편 37편의 주제에요. 핵심입니다. 의인은 악인과 함께 살 수 없다. 왜냐하면 땅을 차지하는 것은 의인이고, 시편 37편 10절, 이건 다 같이 읽어봐야 돼요.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수평적인 편평한 평지에서 돌아보니까 의인만 남았고 악인은 없게 하시는 거예요. 조건이 있어요. 내가 의인과 함께 살 수 없다는 뭐냐 하면 의인의 특징은 하나님과 함께 산다가 돼요. 악인이 내게서 떨어진 걸 속시원해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돼야 되지, 어이구 지긋지긋한 저 인간 속이 시원하네, 이건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 비슷한 이야기가 잠언에 보면 나옵니다. 잠언 24장 1절, 제가 할게요.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찌어다” 잠언 24장 20절,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그런데 17절을 보세요. 17절이 중요해요. 잠언서 24장 17절,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이 말이 하나님도 귀찮고 악인도 귀찮고 나는 나 혼자 있고 싶다, 라는 그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딱 꼬집는 거예요. “나는 저 인간과 살기도 싫어. 너도 싫어. 만사 귀찮아. 나 혼자 있고 싶어.” 이거는 마귀가 노리는 거예요. 기도원에 혼자 기도하든지 지리산 자연인 되어 살든지 하여튼 자기밖에 몰라요.

비행기를 타고 같이 갈 때 제일 힘든 게 뭐냐? 떠드는 사람이 근처에 있을 때, “오 신이시여, 저 인간과 제주도 갈 때까지 계속 타야 됩니까?” 촌사람 오랜만에 비행기 탔다고 친구와 막 떠드는 거예요. 물론 스튜어디스에게 이야기하면 돼요. 조용히 해달라고. 지 집 안방 아니라고. 그런데 비행기 처음 타는 사람은 그 감격을 잊을 수 없어서 막 고함질러요. 아이고, 저 인간과……, 비행기는 내릴 수나 있지요. 부부는? 부부는 둘 중에 하나 죽어야 되는 거예요. 내릴 수도 없고요.

구약적인 한계는 아직까지 안식의 때가 다 되지 않았어요. 주님의 창조의 리듬이 아직 계속 되고 있는 중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뭔가 한 가지 방향을 향하여 안식의 완성됨을 향하여 계속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같은 인간과 인간을 비교시켜요. 의인은 이래야 되고, 의인은 여호와 말씀의 도를 지키는 사람이고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같은 인간과 인간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안식의 때가 끝나고 이스라엘 역사가 멸망하고 율법과 시편이나 잠언이 끝나고 보면 인간 같은 인간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 그 말은 뭐냐? 모든 사람이 의인이고자 했던 그들이 실은 악인이었다는 것, 악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예수님 오셔야 알아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부인이 안 돼요. 인간은 영원한 고정한 귀신이 들어있어서 귀신이 자기 부정이 안 돼요.

귀신의 특징은 뭐냐? 악의 특징은 어떤 것에서라도 요지부동, 심지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변하지 않는 게 달라지지 않는 것, 바뀌지 않는 것 그게 악마입니다. 그 악마가 인간 속에 박혀있으니까 인간이 모든 것에도 움직이지 않지요. 자, 그러면 이 땅이……, 3분 지났어요.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221114a 부산강의.hwp (60.0K), Down:6
게시물9,970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10510   2023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1강-요한복음: 타인의 … 한윤범 23-01-14 106
10509   13강-하박국 3장 3-9절(쌍둥이 원리)230111-이 근호 … 이하림 23-01-12 67
10508   주일학교 설교 / 뱀의 마음 / 230108 정인순 23-01-11 67
10507   게시판-사진첩에 수련회 사진이 올라와 있습니다. 이근호 23-01-10 109
10506   겨울수련회 정산보고 김종인 23-01-10 129
10505   26강-디모데전서 6장 9-10절(갈라진 내부)-230108-이 … 오용익 23-01-09 64
10504   33강-예레미야 5장 19절(맞대)230108 이근호 목사 송민선 23-01-08 54
10503   수련회 방 배정표 서경수 23-01-07 256
10502   12강-하박국 3장 1-2절(진노와 긍휼)230104-이 근호 … 오용익 23-01-05 64
10501   광주강의20221230b 마태복음9장 17절(정해진 길)-이 … 이하림 23-01-02 58
10500   광주강의20221230a 마태복음9장 17절(정해진 길)-이 … 이하림 23-01-02 72
10499   32강-예레미야 5장 14~18절(불탄 막대기)230101 이근… 송민선 23-01-01 47
10498   25강-디모데전서 6장 6-8절(말씀의 막)-230101-이 근… 오용익 23-01-01 50
10497   주일학교 설교 / 봉사의 삶 / 230101 정인순 23-01-01 45
10496   안양20221215b말1장4절(초과)-이 근호 목사 공은주 22-12-29 36
10495   안양20221215a말1장4절(초과)-이 근호 목사 공은주 22-12-29 37
10494   11강-하박국 2장 18-20절(패는 하나님)221228-이 근호… 오용익 22-12-29 51
10493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14강) 시편51:17(새장) 20221… 한윤범 22-12-28 51
10492   대전-신명기(8강) 신5:3(마귀잡자) 20221226a 한윤범 22-12-28 35
10491   대전-오후예배설교 보충 20221226 한윤범 22-12-28 43
맨처음 이전 [1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