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22-11-16 07:05:36 조회 : 44         
20221114b 부산강의 : [시편]53(37:1)-창조자의 리듬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20221114b 부산강의 : [시편]53(37:1)-창조자의 리듬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합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땅이 어떻게 오는가? 인간들은 자기 신체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신경체제가 있고, 거기서 인간들의 방법은 뭐냐? 내 육을 죽이고 영이 되려고 해요. 모든 교회에서 시도하는 것 아닙니까. 육을 죽이고 내 영혼을 맑게 만들고 순결하게 한다. 이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다 했던 거거든요.

신경체제를 통해서 자기 정신체제를 결합시키려하는 거예요. 정신체제는 관념이에요. 관념체제. 하나님의 계명, 말씀, 율법을 관념이라 여기고 나의 신경체제, 신체가 갖고 있는 신경체제를 여기와 연동해서 같이 움직일 수 있는 방안이 없는가를 그들은 훈련하고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들도 다 경험이 있을걸요.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막 때리고 해서 신경체제, 그냥하면 은혜가 안 되는데 꿇어앉아하면 신경조직 꿇어지잖아요. 손바닥에 신경이 몰려있거든요. 박수치고, 해병대 박수 이래서 벌거니 열이 났을 때는 신경체제와 자기의 정신체제와 일치된 것처럼 느낌을 주는 거예요. 불 받았다, 오순절 불이다 이러잖아요.

이게 문제점이 뭐냐 하면 전부 다 개별적이라는 거예요. 개별적이라도 그들은 받아들이는 이유가, 그들은 요지부동 어떤 것에도 움직이지 않는 것 악마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뭐냐? 개인구원입니다. 나만 천당 가면 끝나는 거죠. 그래서 도를 아십니까, 하는 것처럼 구원파가 와서 꼬시는 거예요. 구원 받았습니까? 왜 그게 먹히느냐 하면 우리가 모든 인간이 악마에 속한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개인구원이거든요. 나만 천당 가면 끝났지, 이 의식이에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구원이 개인구원이 아니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무에서 열린 열매, 이 구원이에요. 나무가 오고 그 나무가 왔음에 비로소 열리는 열매. 요한복음 15장 1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내 가지니 열매가 없을 경우는 잘린다. 나무로 오는 거예요. 나무가 있고 숱한 열매는 그 나무에 소속된 열매여야 내가 붙지 아니하면 열매가 없다는 그 원리에 의해서 오는 거예요. 개인구원 아닙니다. 개인구원이 굳이 있다면 예수님만이 개인구원 받아요. 나머지 개인구원 없습니다. 소속구원이죠.

우리가 의인 될 수 없어요. 의인에 소속되어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의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는 거죠. 고린도후서 5장 21절.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된 거예요. 예수님을 의인이라고 인정하는 그 관계가, 나무와 열매 관계 안에서 우리가 의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알지만 다시 정리합시다.

죄라는 것은 죄 지어서 죄인이 아니에요. 맨날 네 죄를 고하라, 고하라 하는데 십오 년 전에 부흥회할 때 죄 다 고했거든요. 그런데 또 죄 고하라 하니까 찌꺼기 또 끄집어내야 돼. 죄는 죄를 지어서 아니라 죄에 이미 종속돼 있는 상태에요. 죄라는 나무에 우리는 이미 열매가 죄의 열매가 되는 거예요. 그걸 로마서 6장에서 죄의 종이라고 하는 겁니다. 죄의 종이 되었다가 우리는 사적으로 의인 되는 게 아니고 의의 종이 되는 거죠.

하여튼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구원관은 아예 성경에 없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건 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열심히 자기 몸을 때려서 자기가 하나님의 거룩한 삶을 하겠다는 신경체제와 정신체제의 이러한 결합은 성사될 수 없습니다. 있을 수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 방법은 뭐냐? 땅은 어떻게 되느냐? 이런 개별적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구약 때 이스라엘이 갔던 그 이야기, 그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들은 메시아의 구원을 원한 게 아니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원했던 겁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의 구원보다 우리 교회가 구원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왜? 우리는 마음이 하나니까. 그게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우기는데 항상 마음에는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을 본인이 원치 않아요. 천국에서 주님이 짜장면 시켜서 얻어먹는 짜장면은 싫어요. 내가 짜장면 시켜야 돼. 내가 시켜서 시킨 나로 인하여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그 짜장면을 원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시켜서 얻어먹는 것, 이거는 자존심 상해. 내가 그것밖에 안 됩니까, 그렇게 나온다면 그건 뭐 여전히 개인구원에 빠진 사람이에요. 본인이 나무가 되고 독자적인 자기 영역을 포기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만이 구원이란 말은 뭐냐? 네 자신을 포기하라는 뜻이에요. 어제 낮 설교에서는 네 자신을 포기하라는 말 하지 않고 우리의 살아온 인생이 뭐가 된다 했어요? 무효화된다는 거예요. delete 삭제당하니까 무효가 되는 거예요. 다시는 기억치 아니하니까. 우리가 어디서 뭘 하는지 기억치 않으니까 삭제된 거예요. 우리의 신체도 안개가 되어 없어져버렸지요. 아담에 속한 신체가 없어져도 괜찮아요. 겉은 후패해서 없어지지만 속은 날로 새로운 주님의 나무의 열매로서 새로운 신체를 부여받게 됩니다.

옛날에 그때 초등학교 없었고 국민학교 때 학급 올라가면 나라에서 새 필통과 새 책받침을 내주잖아요. 새 책 내주고. 그때 사실은 돈 주고 샀습니다. 굉장히 기쁘지요. 군에 가도 새로운 군복이 나와요. 철 따라. 물론 제가 군대 생활할 때는 그런 혜택 없었어요. 인사계가 사병들 것 다 팔아먹고 그저 몇 개 떨어진 것만 맞지도 않는 것……. 그 인사계 참.

주께서 방법은 뭐냐? 평지를 수직으로 세워버려요. 수직으로 세우면 중력이 작용하겠지요. 밑에 줄줄 다 떨어져버려요. 편평한 땅이 아니라 수직적 땅이 되는 거예요. 수직적 땅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생애로 보여줍니다. 그게 요한복음에 가득 들어있어요. 이번에 수련회 가야산에서 하는데 요한복음 합니다.

요한복음 3장 봅시다. 3장 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의도를 가지고 내려왔어야 된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안 내려오고 하늘에 계시면 안 돼요. 내려와야 드리워진 천, 올라간 천이 새로운 땅, 수직적으로 걸쳐있던 땅이 새롭게 마련되는 겁니다. 왔다가 올라가야 돼요. 그냥 내려왔다가 들려야 돼요. 그냥 하늘에서 낚시하면 안 됩니다.

내려왔다 올라감으로써 그 내려오는 과정 속에서 시편 37편에 있는 땅 개념, 신명기에 나오는 약속의 땅 개념, 그리고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 개념 이것이 예수님이 홀로 그 말씀을 친히 모든 것을 새롭게 완성시킬 임무를 가지고 이 땅에 내려왔다 올라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생애가 있음으로써 이스라엘이 했던 일,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무효가 되는 겁니다. 그거는 하늘나라에서 안 받습니다. 주께서 하신 일만 받아요.

복습해봅시다. 악은 뭐라 했습니까? 모든 것에 대해서 움직이지 않는 게 악이죠. 의는 뭐냐? 주님이 하신 일이 의에요. 우리는 아니에요. 빠져주세요. 우리가 하는 일은 의가 아닙니다. 뭘 시켜먹든 빠지세요. 주님이 하신 일만 의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 의만 증거 하면 돼요. 주님이 하신 일만 증거 하면 돼요. 평생을 걸쳐서. 비록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하루 더 사는 일이 있더라도 내 덕분이 아니고 이것도 주의 일이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 그게 바로 요한복음 제일 마지막 21장 24절에 나와요.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하고, 기록한다는 것, 몸에 문신을 새기듯이 기록한다는 것, 이스라엘 남자들도 문신을 했지요. 그게 뭐냐? 할례입니다. 몸에다가 율법을 새겨버렸습니다. 새긴다는 것, 기록한다는 것은 지적할 수 있는 근거를 이동시킨다, 종말까지. 기록된 그 기록이 완성될 때까지 기록된 자를 끌고 가는 거예요. 할례를. 끝까지 끌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들, 에스겔이나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항상 이스라엘을 닦달 내는 것은 너희들 몸에는 문신 있는데, 할례 있는데 왜 마음에는 할례를 안 했느냐고 끝까지 닦달 내셔요. 심지어 로마서 2장에도 사도 바울이 그 이야기하지요. 몸에 할례 한 게 무슨 소용 있느냐? 몸의 할례는 완성을 내다봐야 되는데 완성되지 못한 할례는 소용없지요. 완성이 뭐냐? 마음의 할례에요.

할례라는 것은 제거하는 겁니다. 마음에 할례 받았다는 말은 내 마음 없어, 이런 뜻이에요. 내가 지킬 내 마음이 이제는 없어졌어요, 라는 뜻이에요. 내 마음이 없어지면 여기에 뭐가 생기겠습니까? 허한 구멍이 생기겠지요. 그 허한 중심 자리, 구멍 자리에 주님의 마음이 들어온 거죠. 주님의 마음을 성령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주님은 깊은 곳도 통과하신다(10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그 깊은 곳이 주님의 깊은 곳, 곧 주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과 바턴터치, 교체를 해버립니다.

교체를 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성도는 어떻게 증거 하는가? 전도지 돌리고, 그런 것 좀 하지 마세요. 하지 말래도 주께서 시키면 해야 되지만. 그게 증거가 아니라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세상일을 어느 관점에서 평하고 시선을 바라보느냐 하면 주님이 십자가 지신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거예요.

여러분 자녀들 가운데 부모한테 한 일들 많이 있지요. “엄마, 또 내가 부장으로 승진했어. 엄마, 이번에 또 사업 성공해서 엄마 드리려고 2억 마련했어.” 그런 이야기 자주 듣지요. “엄마, 드디어 남자친구 생겨서 결혼할 거예요.” 이런 식으로 집은 50평짜리 마련했다는데 좁아서 살겠나, 모르겠어. 그런 이야기, “엄마 힘들었는데 차 벤츠로 바꿔드릴까요?” 그런 이야기 자주 듣지요.

그럴 때 주님의 아픔으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게 증인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증인이에요. 가만있어 보세요. 증인 돌아다니지 않고, 관절도 안 좋은데 돌아다니지 말고 가만있어도 전부 다 증거 할 게 계속해서 쏟아져 나옵니다. 연속극 봐도 쏟아져 나오고, 윤석열 정부 보고 다 쏟아져 나와요. 정치를 어떻게, 전부 다 예수님의 안목으로 볼 줄 알아야 돼요.

기록한다는 것은 지적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거예요. 이미 예수님은 죽어서 피를 흘렸습니다. 이 피 안에 피라는 것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면 마음의 할례가 있으면 그 사람은 그 자체로 예수님의 증인이에요. 성령이 있으니 그 자체로 증인입니다. 아아, 주님이 이것 때문에 돌아가셨구나. 이게 바로 죄구나, 라는 것을 아는 거죠.

그럼 그 증인이 뭐냐? 증인이 바로 주의 일이에요. 성도는 가만있는 데 주의 일을 하는 거예요. 세상 보는 관점이 다르니까 이게 주의 일이 돼버린 겁니다. 그러면 시편 37편 모든 내용이 예수님의 내려왔다 올라가는 가운데, 그분이 나무라 했지요. 시편 37편이 완성이 되면서 거기에 시편 37편에 나오는 백성들, 의인들, 악인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는 자의 등장, 이건 뭐로 등장하는 겁니까? 나무의 열매로 등장하는 거예요.

이 사이는 뭐냐? 주의 일이 관여하고 있지요. 주께서 열매 아닌 자를 열매 되게 하시는 그것이 반복해서 매일 삶속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시편 37편을 매일같이 우리에게 실현시키는 거예요. 그중의 예를 봅시다. 땅에 내려왔다 올라가는 건 조금 있다 보고요 이것 먼저 볼게요. 여기 시편 37편 17절,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붙드신다고 돼 있지요. 그걸 아시고 잠언 16장에 나오는 새 구절을 보겠습니다.

잠언 16장 1절,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어디서 나온다고 했어요? 여호와께로서. 맞지요. 맞거든요. 이것 지켜야지. 앞으로 이것 지키는 게 아니고 그냥 맞지요, 그럼 끝나는 문제에요. 지금 내 모습이 이 모습이니까. 내 모습이 이 모습이라는 건 마음에 할례를 해버리면 주님이 장악해요. 자, 악은 어떤 것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지만 주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요동시켜버립니다. 왜냐? 창조의 리듬 때문에. 이건 좀 약간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어제 낮 설교를 했는데요. 좀 난해했던 게 뭐냐 하면 비교할게요. 주님이 살아계신다. 이건 안 돼요. 주님이 살아계심이 안 되는 이유가 살아 있다는 이 표현 자체가 여기 인간도 포함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주님 살아 있다면 이건 유대교입니다. 구약을 잘못 오해한 사람의 해석이 돼요.

그러면 뭐냐? 언약이 살아 있어야 되지요. 내가 살아 있지 말고 주님이 하신 일이 살려면 주님이 죽었다, 이것도 아니에요. 왜? 주님이 죽었다는 것은 이순신 장군 죽은 것과 똑같이 돼요. “이순신 장군 죽었는데 참 훌륭한 분이야. 그럼 우리 제사 드려주자.” 부활절이 제사 드리는 날 아닙니까. 주님 제삿날이에요? 아니잖아요. 주님이 죽은 게 아니에요. 산 것도 아니에요.

주님의 죽음이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죽음이 살아 있다면 주님이 살았는지 내가 살았는지 둘 중에 하나는 포기돼야 돼요. 내가 살아 있으면 주님은 죽었고, 주님의 죽음이 살아 있으면 나는 그 앞에서 죽은 자에요. 살아도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왜냐? 내가 살아버리면 궁극적으로 나는 내 잘남을 보여주는 증인 되고 내가 죽어버리면 더 이상 죽은 놈은 만질 것도 없으니까 죽은 놈을 증인 할 필요 없거든요. 죽으면 아무것도 못하거든요.

죽은 자가 되지 아니하면 살아 있는 분을 증거 못하는데 뭘 증거 하느냐?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 하는 것,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 십자가 안의 삶이잖아요. 내가 자랑할 것은 이제 주님의 죽은 십자가밖에 없다, 할 때 이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럼 너는? 디모데전서 1장에 보면, 나는 죄인 중의 괴수지, 뭐. 죄와 허물로 죽었지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이, 십자가에 달렸던 그 십자가가 계속 살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설교 마지막에 이랬지요.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옛날 우리의 살던 삶 있잖아요. 나를 위해 사는 내 위주의 삶, 계획 세우고 계획 잡고 그것 이뤄야 될 텐데 기도 열심히 빡세게 해서 주의 뜻이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후원해주시고 도와주셔서 열심히 할 테니까, 하는 그 버릇 있잖아요. 그걸 그대로 하게 해요. 왜냐? 내 계획이 있고 목적이 있을 때는 마치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우리가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으면 그냥 눈 뜨면 안 되지요. 오늘 스케줄, 누굴 만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스케줄이 있다는 것, 계획이 있다는 것은 이건 뭔 뜻이에요? 내가 안 죽고 살아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거예요. 살아 있다고 전제로 열심히 자기 뜻대로 하니까 매사가 내 뜻대로 되지도 않고 되더라도 됐다고 까부는 것도 우리가 좀 싫고, 어쨌든 간에 내가 살아 있으니까 뭔가 좋든 나쁘든 업적이 결과가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실패하든 성공하든 뭐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실패하면 낙담하고 성공하면 까불고 자랑질하고.

그런데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쓱 하고 주님의 죽으심이 들어와 버리면 묻는 거예요. 네가 살아 있는지 내가 살아 있는지 묻는 거예요. 아하, 주님이 살아 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내가 오늘 아침부터 계획에 바빴구나. 구두 닦고 모자 쓰고 오늘 상견례 하는데 뭐 입고 나가나? 신경 쓰는 것, 특히 사돈 만날 때는 주님 생각 안 나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에요.

사돈이 옷 꼬라지 보고 힘들 게 사는 것 들통 다 나고, 또 머리 모양 보고 동네 이발소에서 했구나. 촌스럽기는. 아이고, 내 아들이 아깝다. 촌 집안 여자라니. 내 아들이 아깝지만 어쩌겠나, 지들 좋다는데 참고 지내지, 뭐. 당신 딸 시집오기만 해봐라. 가만 안 둔다. 이렇게 나올 수 있단 말이죠.

그런 것을 미리 당겨서 한다는 것은 뭐냐? 미리 예비하고 대비하는 거예요. 예비, 대비한다는 것은 내가 죽었다, 살았다? 내가 살았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주께서 쑥 들어와 버리면 그게 다 의미 없고 무의미하고 상견례 어떻게 했는지 상견례하다 엎어지고 자빠지고 팔보채 그런 것 기억치도 않아요. 그냥 폼 내는 거고 인간한테 기죽지 않으려고 하는 지 과시고.

괴시라 하는 것은 과시, 체면은 어디서 나오는가? 내가 좋은 것만 기억하는 이 기억에서 비롯된 거예요. 좋은 나를, 좋은 이미지를 인상을 계속하려면 기억에서 온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서 손자 키우는 할머니 같으면 오늘도 손자 잘 키워서 아들한테 사랑받아야지, 할 때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주님이 들어와 버리면 내가 손자 잘 키우고, 얼마나 의미 없고 무의미한 것을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 무의미한 것을 하게 하시죠. 아무 의미 없는 걸 신경 쓸 필요 없는 걸 하게 하시는 이유가 십자가만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제가 북한에 있는 신자가 굳이 남한에 탈출할 필요 없다 이 말이에요. 북한에 있는 기억이나 남쪽에 있는 기억이나 둘 다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남쪽에 왔다 심심하다고 북쪽에 기어 올라가고, 참.

인생 자체가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십 분 뒤에 죽는다면 결국 이 말 한 마디만이 진리가 돼요. “공연히 왔다”에요. 오 분 뒤에 죽는다면 세월이 구십 살든 그냥 공연히 왔다가 그냥 사라지는 이게 인생입니다. 아무 의미 없어요. 우당퉁탕 요란 떨 뿐이죠.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복잡해지는데 예수님의 모든 시편에 있는 말씀이나 모든 말씀을 혼자 다 이루실 때에 그 환경이 뭐냐? 그게 요한복음, 요한복음 하기 전에 아까 한 것 마저 해봅시다.

잠언 16장 1절,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그다음에 16장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이게 구약적 눈에 보이는 세상을 무대로 삼았다는 걸 감안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앞으로 볼 요한복음은 이것과 달라요.

하여튼 구약에서는 비교대상들이 있어요. 과연 확인대상들이 있다고요. 내가 모든 걸 맡길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더 줄까? 구약적인 거예요, 구약에서는. 그다음에 잠언 16장 33절,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누구한테 있다? 여호와께 있다. 계속해서 뭐냐 하면 여호와와 함께 살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다시 시편 37편 16절 봅시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다시 잠언 17장 1절,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어떻습니까? 시편이나 잠언이나 무대를 보세요. 말씀하는 무대가 같은 땅에 같이 있으니까 서로가 눈에 보이는 거예요. 보이는 그런 관계를 뽑아서 하나님이 그 시대에 합당한 말씀으로 주시는 겁니다.

창조, 시작부터 마지막 종말까지 악은 여기 매달려 있는 악들이 움직이죠. 여기에 악을 바탕으로 해서 주님께서 언약적 창조의 리듬을 실어버려요. 그러면 요지부동 변하지 않는 것과 늘 주께서 뭔가 마지막 목표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변화, 이 변화를 계속해서 구약 때부터 주고 있습니다.

구약이니까 우리는 시편, 잠언 구약이잖아요. 이 말씀은 나한테 적합하도록 시험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죠. “그래 맡기자. 맡기면 뭐가 된다? 주께선 맡기면 불교신자보다 더 잘될 것이고 많은 재산을 얻을 것이다. 만사형통할 것이다.” 해보니 됩니까? 맡겨도 망하고 안 맡겨도 망하고. 왜냐? 시대가 이미 언약적으로 말씀이 완성돼버렸어요. 남 이웃집과 비교하지 말고 누구와 비교해야 되느냐 하면 피 흘리신 주님과 비교해보세요. 주님의 피가 모든 일의 맡김에 최종 완성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구약적 요소의 차이를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기도할 때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해야 되고 내 원이 따로 있었음을 알고 있어요. 그럼 자기 원이 뭐냐? 어떻게 이 고통을 그냥 면제하고 넘어갈 순 없겠습니까, 이 잔을 안 마실 순 없겠습니까? 그런데 주께서는 기도를 통해서 이미 아버지의 뜻과 불일치를 일치로 만들어버렸지요. 땀이 핏방울처럼. 주님의 신체만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지금 땀이 핏방울처럼 한다고 땀이 피가 되지도 않고, 해도 우리 무릎만 아프고, 하다 배고프고 밥 먹으러 가고. 되질 않아요. 주님만 홀로 하신다니까요. 그게 의에요. 시편에 나오는 의를 다 뽑아보세요. 다윗도 아니에요. 다윗을 앞장세운 배후에 계신 언약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그걸 다 이루시는 겁니다. 다윗도 이루질 못했어요. 책을 쓸 때 저자가 책을 잘 썼다고 해서 저자를 존경하지도 않고 존경받지도 못합니다. 책은 잘 썼는데 행동은 왜 그 모양이냐.

요한복음 7장 33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환경을 비교해보세요. 여러분들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지금 바리새인들은 평지를 생각해요. 평지의 땅, 약속의 땅 그러니까 가나안 땅은 영원히 약속의 땅이라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유대인들이 평했어요. 어떻게 평했느냐 하면 유대인들은 이 땅이 전분데 이 땅 말고 다른 땅이 있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어디로 간다 했습니까? 땅에서 멀리 간다는 뜻입니까, 위로 간다는 거예요?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만약에 유대인들이 이걸 인정해버리면 그들은 뭘 포기해야 되느냐 하면 기존에 약속의 땅 위주로 성경을 해석했던 모든 걸 포기해야 됩니다. 그걸 포기한다는 것은 그 땅의 출신되는 자신의 육체와 신체도 포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신체 위해서 자기 신체를 맞바꿔야 되고 포기해야 돼요.

이 이야기가 오늘날 이 시대에 왜 중요하냐? 성경을 안 보는 게 아니고 보잖아요. 보게 되면 요지부동 자신의 신체와 자기가 살던 동네, 자기 것, 이것 인간들은 요지부동 포기 못합니다. 그다음에 포기 못한 채 뭘 본다? 성경을 보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아까 잠언 보지요, 그다음에 시편 봤지요. 특히 잠언 본 사람이 모든 계획은 우리가 하지만 이루시는 것을 주께서 이루신다. 그게 대기업의 사장실, 회장실에 액자로 안 걸리겠습니까? 내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십일조 드릴 테니까 이번 사업만큼은 성사되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 안 나오겠어요? 그리고 목사 불러다가 축복 안 하겠습니까?

만약에 목사 불렀는데 재수 없게도 복음을 아는 목사가 왔다. “주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회사도 부인하고 이딴 게 무의미한 것을 이 회사를 운영하는 자체가 의미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하면 손가락 부러뜨릴 거예요. 내가 이러려고 봉투 준비하고 점신 대접한 게 아니다. 회사 축복하러 온 목사도 그 정도인데 병원목사 원목, 군대목사 군목, 그다음에 학교 교목, 그리고 사목 이런 것들을 한꺼번에 준비된 용어가 있어요. 생계형 목사.

생계형 목사만 있는 줄 알아요? 생계형 전도사도 있는데. 특히 생계형 목사 가운데서 들키지 않는 것이 회목, 교회라는 업체의 목사 이거는 정당한 것처럼 느껴지지요. 목회라는 이름으로 복음 전하고 주의 증인 되라 하니까 교회의 증인 돼요. 내가 이만큼 키워놨다고 자기 교회의 증인 되고 있다고.

그렇다면 주님께서 구약 잠언, 시편 그럼 왜 마지막에 예수님 일찍 와서 혼자 다 이루면 될 건데 어차피 주님이 의인이고 이루는 것도 주께서 한다면 미리 당겨오면 되는데 뭐 때문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런 말씀 줘서 헷갈리게 만들고 허황되게 만들어서 결국 그들이 스스로 자기 손으로 자기 메시아를 찔러 죽이는 그런 사태가 벌어지게 하고 왜 그런 일을 하게 하시는가?

그것은 신명기 5장 3절에 보면 벌써 예언돼 있습니다. 2절부터 보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하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할 때 그때 동원됐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분명히 있어요. 그리고 누가 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고,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언약이 지금 여기 있는 너희들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모세 율법으로 너희에게 계명을 세웠다는 거예요.

아까 배운 것 다시 해봅시다. 기록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빼도 박도 못한 지적할 수 있는 증거를 주는 거예요. 기록은 뭘 유발하느냐? 내가 미처 모르는 숨어있는 죄에요. 내가 아는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반성하거나 회개할 수 있는 죄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숨어있는 죄에요. 숨어있기 때문에 회개 안 돼요. 이스라엘은 회개가 안 돼요.

회개가 안 되는데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계속 예수님 시대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몰아넣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 사도 바울의 명령 보면 하라가 많지요. 술 취하지 마라. 성령에 취하라. 할 수 있거든 늘 쉬지 말고 기도하라. 무시로 기도해라. 하라 많지요. 하라가 되는 이유가 이게 기록됐잖아요. 기록된 것은 우리를 어디로 몰아넣습니까? 예수님의 피로 다 이뤘다, 로 몰아세우는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몰아세움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자꾸 요지부동 나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애가 구원한다는 생각이 이 육신이 있기 때문에 마귀가 계속해서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나를 믿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나를 믿는가?” 이것 때문에 <십자가마을>이 도중에 둘로 깨졌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했지요. 예수님을 믿는 그 주인공이 누구냐 했지요. 너잖아, 너.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믿는 거예요. 이게 어디서 잘못됐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은 숨어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예수님의 비유도 그거에요. 숨어있는 것이 나타날 때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깨닫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깨닫지 못해야 내가 내 구원에 거들지 않잖아요. 거둘 필요가 없다.

내가 만약에 내 구원에 거들면 그건 무효 됩니다. 이거는 구원이 안 돼요. 구원은 주님 홀로 이루신 의가 돼야지 내가 끼어든 내 행위가 들어간 의와 거룩은 하나님이 더러워서 안 받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나무가 있고 열매는 주께서 그 나무에게만 나온 열매에요. 우리가 바친 열매는 주께서 받질 않습니다. 왜 그러냐? 우리의 기억이 들어가기 때문에.

기억 이야기 나왔으니까 기록한다는 것은 주님의 기억입니다. 주님의 기억이 기록된 거예요. 그럼 주님의 기억이 뭐냐? 주님의 기억은 어렵지 않아요. 간단하지요. 너희들이 내가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 따먹었다. 이것 주님께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이미 죽었다.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지? 이거는 관계가 끊어진 거예요.

관계가 끊어지면 주께서 계속 유입하는 생명이 끊어져버려요. 파이프가 막힌 거예요. 이걸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이 드린 것은 안 받고 주께서 드린 것도 인간에게 도달하지 못한 관계가 죽음의 관계에요. 숨 쉬느냐, 지금 이것 따지지 마세요. 이거는 구약적 안목입니다. 살아도 죽은 것이고 죽어도 산 사람이 예수님의 신약시대에는 등장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살았다고 할 때 앞에 뭘 붙이느냐 하면 네가 죽어도 살겠고, 요한복음 11장에(25절), 죽어도 산다는.

자, 마지막 남은 어려운 것 해봅시다. 수직으로 드리워졌지요. 주께서 오지 않았으면 생성되지 않는 땅, 수직적으로 펼쳐진 천, 이걸 뭐라고 하느냐? 요한복음 14장에서 이걸 길이라 하고, 이걸 진리라 하고, 이걸 생명이라 하는 겁니다. 길, 혓바닥 같이 내려진 길. 이 길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을 떠나야 된다는 거예요. 이번에 교재 올렸잖아요. 교재 결론 부분에 나와요. 주께서 베드로에게 한 말씀이에요.

“너는 거기 있으면 안 돼!” 네가 아는 이 세상에 네가 있으면 안 돼. 거기 있지 말고 내가 처소를 마련할 테니까 너는 거기 있어야 될 사람이 아니야. 내가 마련한 처소에 있어야 될 사람이야. 그게 제자들은 몰랐어요. 성령이 오기 전까진 몰랐어요. 오고 나니까 우리가 붙들고 우리가 못 놓는 부동산 말고 다른 부동산, 주님의 길과 생명의 세계가 주님이 다녀감으로 이뤄지는 거예요.

하나님 계신 곳이 천국이 아니고 주님이 다녀가신 이곳이 하늘나라에요. 그 하늘나라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움직일 때 유대인들은 저 하늘에 있는 고정된 땅을 봤지요. 천국은 그게 아니야. 천국은 이와 같으니, 라고 하면서 비유로 이야기하지요. 포도원 아침 일찍 놀고 있는 사람 왔는데 전부 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 뭐냐? 창조의 리듬이 계속 움직일 때 그 장소가 예수님의 활동 장소고, 활동 장소가 바로 천국입니다. 그걸 아들의 나라라고 하지요. 골로새서 1장에(13절).

세상에 있는 땅에 있는 모든 것들. 심지어 보이지 않는 악마까지 주를 위하여 만들어졌어요. 이거는 주님을 믿고, 안 믿고 문제가 아니고 오늘 말씀처럼 그냥 맡길 문제지요. 믿겠습니다, 팔짱 끼고 그러지 말고 우리 자신을 그냥 내비 두세요. 내비 두셔서 주님이 어떻게 이끄는지를 증거 하면 되는 겁니다. 뭘 싸매고 주의 말씀 지키고 영광 돌리고 고민하지 마세요. 고민하면 자꾸 주변의 이단들이 꼬시잖아요. “십일조 했어? 올해 전도 몇 명했어?” 맨날 꼬신다고. 신경체제와 정신체제가 결합하라고. 말씀이 네 안에 살아 움직여야지, 이런 식으로.

말씀은 주님이 다 이뤘는데 왜 우리가 살아 있어야 돼요? 우린 잘려야 되지요. 우리는 마음의 할례 받아 잘려버려야지요. 내가 한다니? 내가 없는데 뭘 내가 해요. 그럼 니가 없는데 밥은 왜 먹느냐? 주께서 먹게 하셨지요. 주께서 먹으라 했는데 안 먹을 수가 있어요? 감사함으로 먹으면 다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감사함이 영광이 돼요. 어디서 뭘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감사하면 돼요. 다방에 앉아도 노래방에 가도 감사하면 된다니까요. 이 소리 듣고 오늘 저녁 노래방 가는 게 아닌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37편 돌아옵시다. 요한복음 더 보고 싶지만 이 정도면 여러분 아신다 치고. 그만큼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 찾아온 유대인들은 그저 육신으로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였어요. 그게 유대인들뿐이겠어요? 오늘날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 육신 앞에 주님께서 매일같이 성령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입장 바꾸도록 그렇게 쑥 들어오시는 거예요.

맨날 생각하는 게 예수 믿었는데 나한테 돌아온 이익은 뭐고? 끊임없이 용암 올라오듯이 눈만 뜨면 “예수 믿었는데 주님이 해준 게 뭐가 있지,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것 같아. 주님 대충 믿을래, 앞으로. 열심히 믿어도 소용없는 걸.” 맨날 이 생각 끓어오르는 거예요. “그럼 나는요? 나한테 오는 이익은 뭡니까? 우리 자식은요? 열심히 기도했는데 내 자식 왜 아파요?” 맨날 이런 식이에요.

분노와 원망, 이걸 유발시켜놓고 주께서는 희생물 앞에 데려옵니다. 이게 아주 과격한 폭력이거든요. 하나님의 과격한 폭력에 어린양이 죽습니다. 이걸 되풀이하는 것이 뭐냐 하면 구약의 절기였습니다. 날짜 정해서. 절기의 핵심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이 어떻게 이뤄지는가? 누군가 하늘에서 오신 분이 희생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구약 때부터 절기를 통해서 절기 또는 다른 말로 축제지요. 축제를 통해서 그 일을 하는 겁니다.

희생이라 하는 것은 악에 대한 단호함. 내 아들까지 나는 악은 싫다, 이게 하나님의 의사표시에요. 그러니까 피 외에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마라. 이게 하나님의 단호함입니다. 시편을 통해서 역시 하나님의 단호함이 나타나지요. “그 악인들 까부는 것, 그거 부러워하지 마.” 이게 단호함이에요. 나중에 내가 사는 땅에는 그들이 없을 것이다.

또 그 땅이라 해서 넓은 땅 생각하지 마세요. 무슨 땅? 아래 내려왔다 위에 펼쳐진 그 땅, 주께서 다녀가심으로써 없는 데서 새로 생긴 그 땅에서 악인들은 중력에 의해서 다 떨어지지요. 지옥으로. 그래서 지옥은 떨어지는 곳이에요. 다 떨어지고 열매로서 붙어있는 것은 주께서 함께하심으로 나를 생각한다는 조건 하에 나 같은 것 드린 것은 필요치 않는다는 것을 아는 조건 하에 주님께서 자신의 사람으로 백성으로 만든 겁니다.

그러면 그 조건을 우리가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느냐? 내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유지해요? 성령이 오셔서 일방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지옥 가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계속 강조하는 이유가 네가 없기에 두 번 다시 너의 증인 될 이유도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일상을 통해서 내 위주로 살다가 성령이 와서 희생물, 십자가 앞에 동원시키면 이것조차도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활용해주시는 주의 반복적이고 연속적인 살아 계시는 주의 죽음의 일이라는 사실을 그 짧은 순간에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면 인생사는 것이 세상사는 것이 이미 주와 함께하는 가벼운 천국생활이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행악자로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우리가 무슨 능력으로 이걸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지키지도 못한 자아를 귀하다고 붙들고 있는 한심스러운 우리를 향하여 주께서 대신 큰 희생을 하셨기에 이제는 그 희생만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221114b 부산강의.hwp (64.5K), Down:5
게시물9,970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10510   2023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1강-요한복음: 타인의 … 한윤범 23-01-14 106
10509   13강-하박국 3장 3-9절(쌍둥이 원리)230111-이 근호 … 이하림 23-01-12 67
10508   주일학교 설교 / 뱀의 마음 / 230108 정인순 23-01-11 67
10507   게시판-사진첩에 수련회 사진이 올라와 있습니다. 이근호 23-01-10 109
10506   겨울수련회 정산보고 김종인 23-01-10 129
10505   26강-디모데전서 6장 9-10절(갈라진 내부)-230108-이 … 오용익 23-01-09 64
10504   33강-예레미야 5장 19절(맞대)230108 이근호 목사 송민선 23-01-08 54
10503   수련회 방 배정표 서경수 23-01-07 256
10502   12강-하박국 3장 1-2절(진노와 긍휼)230104-이 근호 … 오용익 23-01-05 64
10501   광주강의20221230b 마태복음9장 17절(정해진 길)-이 … 이하림 23-01-02 58
10500   광주강의20221230a 마태복음9장 17절(정해진 길)-이 … 이하림 23-01-02 72
10499   32강-예레미야 5장 14~18절(불탄 막대기)230101 이근… 송민선 23-01-01 47
10498   25강-디모데전서 6장 6-8절(말씀의 막)-230101-이 근… 오용익 23-01-01 50
10497   주일학교 설교 / 봉사의 삶 / 230101 정인순 23-01-01 45
10496   안양20221215b말1장4절(초과)-이 근호 목사 공은주 22-12-29 36
10495   안양20221215a말1장4절(초과)-이 근호 목사 공은주 22-12-29 37
10494   11강-하박국 2장 18-20절(패는 하나님)221228-이 근호… 오용익 22-12-29 51
10493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14강) 시편51:17(새장) 20221… 한윤범 22-12-28 51
10492   대전-신명기(8강) 신5:3(마귀잡자) 20221226a 한윤범 22-12-28 35
10491   대전-오후예배설교 보충 20221226 한윤범 22-12-28 43
맨처음 이전 [1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